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그 순간 세계가 보인다

 

 

우리가 잠시 만난 그 순간

너와 내가 나눈 표정과 말이

각자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내가 촬영하고 구성하고 편집한 영화를,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출연하고 함께 작업하고 후원해준 영화를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같이 본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관객으로서도 연출자로서도 만족할 수 없는 기술적인 숱한 헛점과

내가 고민했던 것이 지금도 앞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과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덜 익어서 의도한 만큼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는 것과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또' 봐야하는 것과

쏟아부을 곳을 찾지 못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맴돌던 분노를 응시해야하는 것을 견디며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우웅우웅 떠도는 머리를 비우면서

어서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마련한 '중구난방 토론회' 가 두번째 열리는 자리였다

 

빔프로젝터를 빌리고 스피커도 잘 싸서 들고 갔는데

DV 데크에 필요한 리모컨을 안챙겼더니 화면에 타임코드가 뜬다

00:00:00  부터 70분 동안 계속 화면 오른쪽 상담에 프레임, 초, 분단위의 숫자가 표기된다

노트북을 급구해서 디비디로 틀어봤지만 중간에 멈추더니 꼼짝도 않는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하는 수 없이 타임코드가 뜨는 채로 상영을 했다

죄송해서 할 말이 없다 (그걸 70분 동안 암말없이 지켜보신 관객들, 감솨!)

 

한 십 분,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되는 걸 보다가 옆방에 가서 맥없이 앉아있었다

부끄럽고 속상하고 한심하고...오늘은 불편한 감정이 몇 배로 늘어난다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빵집에서 빵을 몇 개 사들고 들어와 우적우적 삼켜보지만

별다른 진정효과는 없다

 

드디어 영화가 끝나고 토론회가 시작되었는데

'오늘은 좀...영화에 대한 질의응답보다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으면...'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

중구난방 토론회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취지여서 그랬는지

 간단한 질문과 답변 이후에

모인 분들이 저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서 좋았다

슬슬 불편했던 마음이 펴졌다

다리미같은 사람들, 다시 한번 감사!

 

초보좌파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해서 3개월 정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한겨레 21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리우스는 운동을 하다가 어느날 잠적(?)하고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은 적이 있다

그러다 지금은 강의도 하고 책도 만들고 연구도 하고 싸움도 한다

한노정연의 한 연구원은 인천에서 문화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토론회를 진행한 다른 연구원은 한때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지금은 접어두고 있다

그 연구원의 학교후배들 중 하나는 현재 학내 한 건물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점거농성을 취재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제일 나중에 온 분은 얼마전에 석사논문을 마쳤다

 

그들이 각자 영화를 보고 나서, 혹은 늦게 와서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의 제목이나 내용에서 연상되는 어떤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습, 내가 말하는 모습, 그들과 내가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처음 만났거나 겨우 두 세번 만난 사람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긴장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즐거운 거라고

 

'나'라는 한 개인이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영화로, 혹은 그 영화의 연출자로

주목받거나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 중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여서 좋았다

영화는 그저 동기를 제공한 다음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멀찌기 떨어져있고

'감독 나루'였다가 스무살 학생이었다가 철없이 나이만 먹은 선배였다가

그렇게 오락가락하면서 털어내고 뒤집고 내지르고 수용하는

다양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손님, 혹은 초대한 자

조직, 혹은 개인

진실, 혹은 거짓

옳거나 그르거나

이분법의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것에 익숙했던 시간을 넘어가서

저마다 나름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구나

할 이야기를 좀 더 꼼꼼하게 준비할 걸 그랬나, 후회도 하면서 다시 그 시간을 돌아본다

 

두 시간 전에 미리 차를 몰고와서 짐을 실어주고 점심을 먹이고 데려다 주고

마음쓰고 돈까지 쓰면서 모임을 준비하신

리우스와 진행자에게도 감사를

 

또 놀러갈께요

 

 

 

2006/08/24 23:03 2006/08/24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