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from 돌속에갇힌말 2008/03/1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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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봐도 입에 착 붙지 않는 말들

여전히 알맹이를 찾지 못해 겉돌고 있다.

겨우 이만큼 정리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큐, 역사와 치유]기획전을 위해 월요일에 쓴 글

19일날 자료집에 실린다고 하는데 전문을 다 실어주실지는 모르겠다

쓰고나니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이미 약속한 날짜를 넘긴 터라 줄이지도 못했다

 

*  *  *

 

스스로, 그리고 더불어 치유하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본다는 것

 

 

나루 (다큐멘터리 감독, 구성작가)

 

1. '돌 속에 갇힌 말'을 만들기까지

 

 

  아버지는 잠꼬대가 심한 편이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깊이 잠든 채로 찬송가를 2절까지 부르거나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 발음이 정확했고,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어서, 어쩌다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엄마와 나는 소리를 죽여 웃곤 했는데 내게도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릴 땐 기껏해야 꿈에 뱀이 나와서 소리를 지른다거나,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스무 살 이후부터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들려준 내 잠꼬대는 예사롭지 않았다.

 

  '때리지 마' 라거나 '내가 사람을 밟았어'라고 하거나 '안돼, 안돼'라는 말을 반복한다고 했다. 몸을 심하게 뒤척이면서 누군가를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누가 머리를 내리찍기라도 하는 듯 두 팔로 감싼 채 완전히 웅크린 자세로 끙끙 앓는다는 것이다. 방 친구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내 잠꼬대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서서히 없어지겠거니 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몸이 많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날에는 어김없이 잠꼬대가 이어졌다.

 

 

 

  어떤 악몽은 깨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또 어떤 악몽은 나를 보호하느라 전혀 기억나지 않기도 한다. 그 잠꼬대를 불러온 나쁜 꿈은 매번 저절로 지워졌고, 덕분에 무서운 장면을 아침에 되풀이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늘 불안했다. 잊을만하면 되살아나는 그 꿈, 그 잠꼬대의 원인을 스스로 직면해야만 한다는 것이 숙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자세히 말할 수 없었을 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87년 12월 16일, 그 날 내가 보고 겪은 것이 내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87년에 다녔던 대학을 중퇴하고 다른 대학에 다시 입학하게 되었을 때, 소설을 전공하게 된 나는 그 일을 글로 쓰고 싶었다.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죄명을 붙여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사례는 너무 많았다. 단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그 집회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공권력을 휘둘러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 책으로 엮어 발표했거나 앞으로 책으로 써야할 사건들이 쌓이고 쌓인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러나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구로구청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책은 찾기 힘들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단체의 활동가도 아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이름을 알린 사람도 아닌 나,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신입생이었던 나의 시선으로 그 일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지 못한 기억은 글이 되는 것도 거부했다.

 

  93년 가을부터 구성작가로 일하면서 가끔 사석에서 그 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묻곤 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말은 못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방송사의 심의에 걸리지 않겠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겠나, 그런 사건에 대해 일반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지겠나...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론하며 그 사건을 영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99년 여름, 나는 비디오카메라 한 대를 구입했다. 그 해 겨울,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비디오 촬영과 편집에 관한 강좌를 들었다. 직접 카메라를 들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2. '돌 속에 갇힌 말'을 만드는 동안

 

  내 기획 의도는 87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점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구로구청에서 농성을 했던 사람들이 가진 상처를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87년 12월 16일 오전, 선거를 한창 진행하던 시각,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투표함을 우송했던 트럭이 있었고 그 앞을 막고 해명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납득할 수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거센 비난만 받고 끝내 침묵했다. 선거에 참여하러 왔던 주민들과 사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공정선거감시단원들,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농성을 시작했다. 그 날 거기 있었던 사람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 우리끼리라도 속을 털어놓고 그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번 이야기해보자는 것이 직접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였다.

 

  농성 이틀째 되던 날 구로구청에 들어가서 진압될 때까지 있다가 연행되었던 것이 내 경험의 전부였지만, 그런 나도 두고두고 그 장면들을 잊지 못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더 아프게 후유증을 겪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공권력의 횡포가 사라지지 않은 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만약 그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먹고 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다면,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쳤다면 그 상처는 누가 어떻게 달래야하나. 그런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어렵게 만난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술에 만취해서 카메라를 거부하던 한 사람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들로 하여금 말문을 막고 있는 걸까.

 

  당시 민심은 노태우에게 기울어 있었다. 평화민주당이나 통일민주당에서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주민들을 선동해서 벌어진 일이다, 우발적인 농성이었고 그래서 처절하게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 일을 다시 이야기한다고 해서 선거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카메라를 들고 만난 사람들은 내 기획의도에 관심이 없었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박정희 정권 이후부터 지금까지 의문사한 사람들, 노동현장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옳은 일을 하다가 소리 없이 끌려가서 주검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라고 했다. 그 일 이후 돌아가신 분들 중에서 대통령이 될 만한 인재가 있었는데 그 분에 대한 추모영상이나 만들어 달라고도 했다. 답답했다. 대화는 불가능해보였다.

 

  농성에 참여한 인원이 만 명에 가까웠고 연행된 사람들만 이천 명이 넘었다. 과연 사람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사라졌을까, 그런 의문을 개인이 밝혀내긴 어렵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몇 명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일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을 찾는 일도, 만나는 일도, 만나서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어야 했던 사람, 감옥에서 큰 병을 얻어 결국 세상을 떠난 사람.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혹은 조직활동 자체에 회의를 느껴 숨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10년 이상 찾아가지 못했던 구로구청 앞을 날마다 배회했다.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기도 했고, 수퍼마켓이나 복덕방 문을 열고 들어가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들려달라고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한번 거절당하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갔고, 일단 연락이 닿은 사람들에게는 거듭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부탁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그 작업을 하느라 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두어야 했고, 조그만 사무실을 열어 오로지 사람을 찾고 만나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건 어느 곳에건 진심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덜 익은 진심은 그 사람들로 인해 조금 더 성숙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시작한 일이 엉뚱한 짓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고, 진작에 시도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느꼈다. 가장 중요한 건, 같이 한숨 쉬고 같이 기억을 더듬으며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치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그 일이 '지우고 싶은 잔인한 기억, 떠올리기 싫은 지루한 악몽'으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 일은 이 사회가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다양한 폭력 중 한 가지였을 뿐이며, 그런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 '돌 속에 갇힌 말'을 만들고 나서

 

  증언을 수집하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누구든 카메라를 들 수 있고 인터뷰를 할 수 있지만, 그 결과물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영화는 논문이나 소설과 달라서, 각주나 세부묘사 없이 화면에 보이는 영상만으로 관객들에게 주제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소재가 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세밀한 장치를 계산해서 편집과 수정을 거듭해야하는 전문적인 작업이다. 적절한 훈련도 없이, 논리정연하게 구성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단지 이러다가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다급한 마음 하나로, 구성작가로 일했던 이력만 믿고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타고난 기계치였던 나는 컴퓨터를 만지면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불쑥 나타난 나를 믿고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완성을 하고 싶었다. 성인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거리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87년, 그렇게 해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가 왜 노태우를 당선시켰는지도 궁금했고, 그 이후 이 사회가 과연 얼마나 민주화되었는지도 묻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 날 그 일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다같이 힘없고 겁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같이 힘을 모아 외쳤던 생각은 지금도 의미가 있지 않냐고, 우리가 틀려서 맥없이 진 게 아니라 국가권력의 힘이 너무 강했던 거라고. 혼자 중얼중얼 묻고 대답하면서 인터뷰를 조금씩 이어붙일 수 있었다.

 

  편집을 하는 과정은 과거를 되짚는 시간이었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숙제처럼 놓여있던 그 날에 관해, 촬영하는 내내 자료를 찾아 사람을 찾아 서울부터 부산까지 헤매고 다녔던 몇 년에 관해,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일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우리는 아픈가. 이런 상처는 우리들만의 것인가. 비슷한 상처를 가진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한 번 더 서로 힘이 될 수는 없을까.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카메라 앞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후원금을 기꺼이 내주고 스텝으로 자원활동했던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5년 만에 완성한 '돌 속에 갇힌 말'은 내 기획의도와 달라 보였고, 영화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았다. 관객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객과의 대화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인터뷰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보고 상처를 공감하게 되었다면, 상영을 마치고 나눈 대화는 치유의 다음 단계였다. 인권과 국가폭력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더듬거리는 감독의 메시지를 감독의 의도보다 더 명쾌하게 정리해준 사람들, 영화 속에 드러난 문제점과 모호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문이 트였다. 몇 번이고 다시 진압 장면을 바라봐야하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던 맨 마지막 장면을 들어야하는 것이 낯뜨거웠지만, 대화를 거듭하다 계단이나 패쇄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4. 두 번째 영화를 준비하며

 

  2004년 10월,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처음 관객을 만난 이후, 상영을 거듭할수록 화면에서 점점 더 많은 문제점이 보다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웠다. 좀 더 당당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었고, 계속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째 작업을 기획했고 이번 주제는 '민중문화운동을 했던 네 여성이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 그들이 꿈꾸는 미래'로 잡았다.

 

  80년대 당시 민중가요와 마당극을 중심으로 대학가와 작업장에서 활발하게 전개했던 문화운동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앞장서서 싸운 민주화운동세력의 주역이었지만, 그 안에도 성차별은 존재했다. 공연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단체 안에서는 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아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제대한 남자선배들보다 더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고, 너무 여성적인 외양을 지녔다는 이유로 중요한 일거리에서 배제되기도 했으며, 연애와 결혼을 거치면서 가족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해야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0년,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남은 그 현장에서 여성들은 건강한가, 살만 한가, 행복한가 묻고 싶었다.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많고, 독립운동 투사들과 빨치산 전사들의 삶을 다룬 영화도 많았지만,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의 한 대목을 차지하는 그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어쩌면 '돌 속에 갇힌 말'보다 더 절박한 이야기가 그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외면한 것이 있다면 다시 들여다 봐야하고, 소외시켰던 적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도 내 첫 번째 작업과 마찬가지로, 맺혔던 것을 풀어내고 답답했던 가슴과 머리를 서로 쓰다듬어 주는 과정이 되기를 바랬다.

 

  두 번째 작업도 생각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출연자들과 나 사이에서 독립영화에 대한 소통이 부족했고, 그들을 만나는 내 태도와 나를 만나는 그들의 시선 사이에서 메우지 못하는 거리감이 있었다. 출연자들과 감독이 가까워진다는 건, 어떤 사람과 내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 다가가는 과정과는 달랐다. 어쩌다 우연히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연락했고, 그들은 갑자기 일상에 뛰어든 카메라에 적응해야만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들이 빛나던 시절로 기억하는 과거와 실제로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고통과 위기로 기록되어 있는 객관적인 시점의 과거 사이, 피곤하지만 뿌듯하고 넉넉하진 않지만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고 믿는 그들의 현재와 그 길을 벗어난 어떤 이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안정을 얻는 동안 제3자가 보기에 그들은 점점 궁핍해질 뿐인 현재 사이 , 그 어긋난 과거와 현재, 주인공과 제3자의 시선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작업에서 부딪힌 여러 가지 벽은 내가 뛰어넘지 못할 만큼 높고 두터웠다. 일단 물러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한국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았다. 여행이 길어졌다. 귀국을 한 달 앞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물러섰던 것도 나를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겉으로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제 나도 뭔가 보여줄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던 건 아닌가. 촬영이나 편집기술도 늘었고, 다큐멘터리가 뭔지도 어느 정도 알았으니 찍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가. 맨 처음 카메라를 사고 컴퓨터를 만지면서 완성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그 때의 나는 어디로 갔나.

 

  이번 작업에서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질문하기 전에 먼저 듣고, 판단하기 전에 먼저 공감하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림자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먼저 정해놓고 만났기에 그 거리감도 벽도 모두 내가 쌓은 것이다. 돌아가면 다시 만나야지. 서로 아픈 곳을 쓰다듬는 마음으로 만나서, 그들이 마무리하고 싶다고 할 때 욕심 부리지 말고 마쳐야겠다.

 

  만들기 전부터 만든 이후까지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 관계에 대해, 고통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다큐멘터리가 좋다. 제작비도 인력도 장비도 늘 부족하지만 주류 언론이나 유명한 영화제작사에서 하지 못하는 작업을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보는 사람들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사는 내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치유하는 존재로 관계맺기를 바란다. 이 슬프고 아픈 세상에서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는 친구처럼 좀 더 따뜻하고 희망이 담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

 

 

2008/03/12 16:20 2008/03/12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