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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지 않고 부딪힐 때 나는 성장한다

KBS 독립영화관으로부터 사과문을 받다

 

 
나루 | 독립다큐멘터리 감독 |제 109 호

 

 

단 한 장면으로 남은 시절이 있다.  멈춰버린 그 장면에서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질식하기 직전의 얼굴들…
- <돌 속에 갇힌 말> 중에서

 

 

2005년 6월 9일, <돌 속에 갇힌 말-87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사건>(아래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독립다큐멘터리가 KBS의 '독립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 방영취소를 통보받은 날이다.

보름 전이었던 5월 25일, '독립영화관' 담당피디는 <돌 속에 갇힌 말>의 연출자이자 제작자였던 내게 이 작품을 방영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었다. 애초에 예정했던 방영일정은 6월 23일이었으나 심의를 거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6월 9일로 앞당겨졌다는 것을 알았다. 5월 31일, '독립영화관' 홈페이지의 '미리보기' 게시판에서는 <돌 속에 갇힌 말>에 관한 소개글이 등록되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한 방영예고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몇 차례 거듭 계약에 관한 문의를 하고 계약서 발송을 요구한 끝에 6월 8일, 방영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계약서를 받은 나는 VOD 서비스(방영된 작품을 온라인에서 동영상으로 다시 보기)를 일주일 동안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에 대한 조절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계약서의 전문은 단 한 문장도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행정업무를 담당한 한 피디의 입장이었고 계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6월 9일, <돌 속에 갇힌 말>의 방영계획을 당분간 보류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고 나는 곧바로 KBS 본관으로 가서 담당 피디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계약서 미체결'로 인한 방영유보라는 답변을 되풀이했고, '독립영화관' 홈페이지에는 '축구 관련 프로그램의 긴급 편성으로 인해 정규 방송이 연기된다'는 요지의 간단한 공지가 등록되었다. 그 다음날인 6월 10일, 담당 피디 중 한 사람으로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방영을 취소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공문의 내용을 보여달라는 내 요구는 거절당했다. 기관 대 기관의 일이므로 개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날 이후 '독립영화관' 시청자 게시판에는 방영유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밝히라는 시청자들의 항의글이 연이어 올라왔으나 13일이 되어서야 이에 관한 공식적 답변이 게재되었다. 계약서 미체결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공문으로 인해 방영이 유보된다는 내용이었다.

KBS 독립영화관 제작진이 공지한 <돌 속에 갇힌 말> 방영유보의 이유는 처음과 나중이 전혀 달랐으나 이에 관한 사과의 표현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방영유보'라는 일방적 통보를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한국독립영화협회(아래 한독협)를 통해 대응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대책회의를 갖고 '독립영화관' 제작진과의 공식적인 면담을 요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나 소개받은 변호사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2005년의 여름이 그렇게 맥없이 지나갔다.

2006년, 16인의 독립영화감독 및 미디어활동가들이 제작한 장편 다큐멘터리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에 참여했던 나는 몇 달 동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투쟁현장을 찾아다녔고 영화가 완성된 후에는 전국에서 다양한 관객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었던 한 가지 사실에 직면했다.

내가 싸워야할 문제, 내가 매듭지어야할 문제를 유보한 채로 다른 영화를 만들고 다른 투쟁을 지지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 그래서 카메라로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현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곳에서 싸우는 그 사람들이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그 현장이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가능하다. 새로운 작업을 하고 내가 만든 영화를 열심히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긴급한 일은 'KBS 독립영화관의 일방적인 방영취소에 대한 항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일 년이 지난 일에 대해 지지를 호소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돌 속에 갇힌 말>에 출연한 분들이나 스탭으로, 후원금으로, 자료제공으로 다양하게 참여했던 많은 분들께 일일이 연락을 드리기도 민망했다. 2006년 6월 13일, 일단 블로그를 통해 'KBS 독립영화관 제작진의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알렸다. 한독협을 통해 다시 면담 요청을 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변호사를 다시 소개받았으며, 진보넷 블로거에서부터 고향친구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에게 서서히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한겨레, 참세상, 일다 등 온라인으로 기사제보가 가능한 여러 언론매체에 항의성명서와 관련일지를 발송했고 자주 드나들던 각종 인터넷카페와 홈페이지에 소식을 전하면서 초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렸다. 6월과 7월은 제작비도 마련해야했고, 이미 제작중이던 두번째 장편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의 1차 가편집을 완료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작년에는 인권운동사랑방과 구로타임즈, 계간 독립영화, 씨네21(매주 '독립영화관' 방영작품을 소개하는 하단 박스기사를 통해 간단하게 언급되었다)에 방영취소에 관련한 기사가 실렸으나 올해는 그 어떤 매체에서도 이 일을 기사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초조했다. 과연 '독립영화관' 제작진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일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해줄 사람이 있을까?

한 달이 지난 7월 중순, 한독협 사무국장의 주선을 통해 면담을 하려던 계획은 기어이 좌절되었다. 한독협과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했고 결국 혼자 이 일을 맡아야했다. 막막했지만 일단 담당 피디 두 사람에게 '방영취소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원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당시 '독립영화관'을 담당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나머지 한 사람과 새로 합류한 한 사람이 답변을 보내와서 몇 차례 전화연락 끝에 면담일정이 잡혔다.
 
나는 <돌 속에 갇힌 말>을 연출하고 제작한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꺼이 연대서명에 동참했던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충북민예총 영화위원회, 씨네 오딧세이 등 4개 단체와 170여명의 개인지지자들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면담에 참여했고 한독협 배급위원장인 이마리오 감독이 중재자 자격으로 함께 나갔다. 면담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이 날 서로의 입장을 말하고 들으면서 사과문의 내용과 발표일정을 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8월 1일, KBS 독립영화관 홈페이지에 드디어 사과문이 게재되었다.

그 날 많은 지인들이 축하해줬고 연대서명에 동참했던 분들로부터 고생 많았다는 격려를 들었지만 어쩐지 껄끄럽고 씁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두 달을 건조하게 정리하는 지금도 기쁘거나 후련한 마음보다는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앞선다. 나는, 왜, 이렇게, 더디고 어리석은가. 자꾸만 자책을 하게 된다.

87년 12월 16일, 대통령 투표 당일 벌어진 서울 구로구청의 투표함 밀반출 사건에 대해 당시 재야활동가들이 현장에서 확보한 여러 증거물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열었으나 방송은 물론 그 어떤 신문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농성 이틀째가 되어서야 '화염병을 대량으로 제작하고 있는 불법시위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사건을 보도했던 방송사가 KBS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해서,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독립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있다고 해서, <돌 속에 갇힌 말>이 반드시 KBS에서 방영되어야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은 왜곡되었고 농성 참여자들은 모욕을 당했다. 그 아픈 기억을 20여년 만에 또 다시 되풀이할 빌미를 내가 제공한 것이다. 방영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제작한 영화였고, 출연한 분들께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개해도 좋다는 사전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최소한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이 영화만큼은 처음 방영제의를 받았을 때 깔끔하게 거절했어야 했다.

내게 가장 큰 유혹이 되었던 방영료 칠 백 만원, 방영이 되면 이 사건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그래야 풀리지 않는 여러 의혹들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판단, 사람과 조직에 대한 순진한 기대감…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또 자본과 권력으로 끊임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 사회에 저항하면서 살아가려는 한 사람으로서 결코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조금 더 당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 더 날카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단 한 장면으로 남은 시절을 무한 반복 재생하는 어두운 삶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르겠다. 사과문을 받기까지 지지해준 많은 분들과 초보감독을 믿고 어려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많은 출연자들과 아무런 보상없이 스탭으로 참여하고 후원해주셨던 분들, 이 영화의 부족한 부분을 격려로 메꾸며 따뜻하게 바라봐주셨던 관객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감히 예상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의 관심과 믿음이 필요하다. 나도 다른 사람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통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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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편 다큐멘터리 <돌 속에 갇힌 말> 관련정보와 방영취소에 관한 보다 자세한 소식은 제 블로그 http://blog.jinbo.net/hyunhyun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7/05/09 16:04 2007/05/09 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