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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독립영화관, '돌속에갇힌말'  방영취소 1주년(1)]

[방영취소 1주년(2)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방영취소 1주년(3) 전화가 중요하구나] 

[방영취소 1주년(4) 공식적인 사과를 원한다]

[방영취소 1주년(5) 관련일지와 성명서]

[방영취소 1주년(6) 사과촉구 성명에 동참하신 분들]

[방영취소 1주년(7) KBS 현 제작진의 입장]

[방영취소 1주년(8) 담당PD와 통화했습니다]

[방영취소 1주년(9) 면담을 위한 사전점검]

[방영취소 1주년(10) 오늘 면담합니다]

[방영취소 1주년(11) 면담했어요]

[방영취소 1주년(12) KBS 독립영화관의 사과문 초안]

[방영취소 1주년(13) 사과문 초안에 대한 의견]

[방영취소 1주년(14) KBS 독립영화관, 사과문 발표]에 관련된 글

 

KBS 독립영화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낸 일은

축하받을 일이나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나라에서 독립영화는 제가 겪은 일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집요한 제도적 폭력과 야만적 횡포를 견뎌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부가 원하지 않는,

자본과 주류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조금 다른 생각을 담은 영화 한 편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발표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했던 군부독재의 시대를 지나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아직 온전한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규명하지 못한 많은 사건들,

아직도 말이 되지 못한 많은 장면들,

우리는 여전히 '돌 속에 갇힌 말'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공정한 선거문화를 관리하고 조직해야할 '선거관리위원회'라는 기관이

국민의 볼 권리와 알 권리보다 조직의 명예실추 가능성에 더 연연하며

방송가능한 영화를 방영취소하도록 위협하는 공문을 통해

'선거관리'보다 '이미지 관리'에 더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는 현실에서

1년전의 방영취소 사건에 관해 공식적인 사과를 받는 것이 받지 못하는 것 보다는 낫고

아예 사과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개운하거나 홀가분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오래 고민하고 너무 늦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제 나약함에 대해

작년 6월부터 1년동안 어깨에 걸쳐져 있던 자책감이

조금은 덜어진 듯 해서 다행입니다

서로 오해하고 벽을 쌓았던 사람들끼리 마주 앉아

속내를 내보일 수 있었던 것도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단 한번의 만남이

'방송'과 '독립영화(혹은 대안적 영상활동)' 사이에 켜켜이 쌓인 앙금과 문제들을

말끔하게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언제쯤이면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날이 올까요

얼마나 더 지나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세상이 될까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어떤 해프닝,

단지 개인적인 갈등으로 비치는 어떤 상황의 이면에서

자본과 권력과 뿌리깊은 성별분업으로 인한 차별이나 소외를 감지할 수 있어야

우리가 원하는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예민하다고, 너무 앞서나간다고 누군가의 조금 다른 감수성을 지적하기 전에

그 누군가가 왜 날카롭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지를 듣고 이해하려는 감수성도

조금 더 예민해지고 조금 더 풍부해졌으면 합니다 

 

1987년 12월 16일 서울 구로구청에서

부정의혹을 가진 대통령 선거 투표함 밀반출에 항의하며

참여한 동기는 저마다 달랐을지라도 자발적으로 농성에 참여했던 그 분들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수많은 주민들, 학생들의 함성과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저항하던 장면을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구호 외쳤다는 말 하지 마라, 농성하러 왔다는 말 하지 마라,

화염병에 불 붙였다는 말 하지 마라, 공정선거감시단이라고 말하지 마라

구청에 들어온 시간과 들어온 방법과 잡힌 시간에 대한 시나리오를 짜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진술서를 쓰게 할테니 알리바이를 정확하게 기억해라...

악몽같은 진압이 끝나고

등짝에 군화자국을 업고 줄줄이 복도에 꿇어앉아 앞 사람 엉덩이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진압봉으로 맞아가면서도 저를 보호하기 위해 끈질기게 속삭이던 그 분의 목소리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왜곡하던 사람들과

술기운을 빌지 않고서는 입을 열 수 없었던 한 노동자와

2년동안 거절하던 인터뷰를 승락하며 눈물 글썽이던 또 다른 노동자와

오랫동안 잊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리느라 고통스러워했던 양원태님과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꼭 완성해달라고, 혼자서 고생이 많다고 격려했던 그 분들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노동력을 기꺼이 제공해준 여러 동료들과

5년 동안 완성을 못하고 쩔쩔매는 초보감독에게 후원금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과

여러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상영작으로 선정해준 여러 독립영화제 심사위원들과

제가 미처 정리하지도 발견하지도 못한 의미를 부여하고 널리 알려준 친구들과

작년 6월 방영취소 이후 즉각 기사를 쓰고 해당 게시판에 항의글을 올렸던 분들

잊지 않겠습니다

 

문자를 받자마자 선뜻 변호사를 소개해준 보라돌이

두서없는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고 조언해주신 문건영 변호사님

대책없이 일을 벌였는데도 곧바로 동참해준 '돌속' 스탭들과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들

한 달 동안 꾸준히 동참해준 그 많은 진보넷 블로거들과 네이버의 사토와 명제와 성희언니

직장동료를 35명이나 설득해서 지지자 명단을 만들어온 그 친구

게시판에 관련글을 올리자마자 그 내용을 그대로 기사화했던 '울산노동뉴스'

울산에서 수고했던 연정씨와 미희, 대전에서 수고했던 도끼님, 그리고 여해연 친구들

메일 한 통을 받자마자 단체명의로 동참하신 '인권운동사랑방'

구로지역에서 신속하게 연대서명을 조직했던 수정씨와 경동 선배

빨간눈사람 홈페이지에 관련글을 올리고 쇼킹한 스탭들을 모았던 경순

반드시 방영해야한다는 조언을 이메일로 보내주셨던 '망각의 삶'

태준식, 이마리오, 슈아, 알엠, 노치를 비롯한 여러 독립영화 감독님들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말아야할 그 장면들, 잊을 수 없는 그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안

저는 아마도 조금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 덜 부끄럽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KBS 독립영화관의 '돌 속에 갇힌 말' 방영취소 1주년을 맞아

관련일지와 항의성명을 읽어주시고 연대서명하셨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독립영화관 제작진의 사과문은

제가 받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받아낸 것입니다

 

이 일이 단지 누구를 돕고 누구를 지지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누구를 질책하고 누구를 책임추궁하며 몰아세우는 일이 아니라

관련되었고 관심가졌던 모두가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이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이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한가지씩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납시다

 


2006/08/03 11:21 2006/08/03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