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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장르 다큐멘터리

 

노인과 그의 늙은 일소

 

 

1.

어제는 그동안 보고싶었던 워낭소리를 봤다.

마침내 CGV에서도 워낭소리를 배급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도 상영하기 시작했다.

 

요즘 하고 있는 일도 그렇고,

민주노총 일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우울하던 참에 아내가 워낭소리를 본다고 하기에

내 표도 하나 더 끊으라고 했다.

 

늙은 소는 노인에겐 여전히 농사를 지어주는 충직한 일소이다.

 

 

2.

산골 동네 경북 봉화.

그곳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다.

 

노인은 40살에 가까운 일소를 기르고 있고,

그 소에 의지해 30년 동안 농사를 지었고, 9남매를 키웠다.

노인도 늙었고, 소도 늙었다.

 

흔히 경상도 남자하면 연상되는 그 무엇이 있듯이

노인도 역시 여전히 말이 없고, 무뚝뚝하다.

 

노인은 어려서 다리 신경을 다쳐 걸음이 매우 불편하다.

다친 다리가 아니라도 그는 이미 걸음이 불편할 나이다.

소도 마찬가지다.

소의 평균수명이 15세라고 하는데, 40세에 가까우니 늙을 대로 늙어 걷기조차 힘겹다.

 

소를 위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꼴을 베어 지고 오는 노인.

 

 

3.

늙은 소는 여전히 노인의 일소다.

소달구지는 노인의 이동수단이기도 하고, 짐을 옮기는 수단이기도 하고,

밭을 갈고, 논에 써래질 하는 늙은 소는 노인의 가장 소중한 농기구이기도 하다.

 

소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관계를 떠나 노인의 삶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소와 노인을 저주하면서도 그들에게 의지하는 할머니에게서 소와 노인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노인은 논밭에 농약을 주지 않는다.

농약을 주면 소에게 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그런 노인은 그저 일감만 늘리는 인정없는 영감일 뿐이다.

 

다큐멘터리 도중에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소와 짐을 나눠지고 가는 정경이 나온다.

감독은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성자'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소먹이를 생각해 농약을 치지 않는 것도,

늙은 소와 짐을 나눠지는 것도,

단순히 환경보호나 동물보호 차원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생명에 대한 이해, 같은 호흡...

그것이 어쩜 '성자'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늙은 소와 짐을 나눠지고 오는 노인/ 감독은 이 모습에서 '성자'의 모습을 봤다고 한다.

 

 

4

워낭소리는 오염되지 않은 산속의 맑은 냇물을 보는 것처럼 순수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하다.

 

소도 늙었고, 노인 부부도 늙었고, 심지어 달구지에 달고 다니던 라디오도 늙었다.

어쩜 봄날 산비탈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진달래가 있는 풍경도 늙었는지 모르겠다.

보는 이 없이 잊혀져 간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밭 옆 산비탈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 그러나 내겐 이제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 그래서 '과거'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늙음으로 보였다.

 

 

늙는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화될지라도, 또는 체념될지라도

쓸쓸한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 어떤 광고를 보니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빛은 결코 어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말이다...

 

다만, 우리는 빛을 좇고, 빛을 의지해 살 뿐이다...

 

유난히 늙음이 도드라지고, 쓸쓸하게 보인 건

이미 늙어버린 우리의 '운동'을 '현재'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늙은 소는 평생 달고다니던 저 워낭을 남기고 떠났다./ 80평생의 노동으로 주름지고 상처난 저 손도 노인과 함께 머지않아 늙은 소가 간 그곳으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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