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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16
    그을린 사랑 Incendies(2)
    풀소리
  2. 2011/06/12
    사랑을 카피하다(2)
    풀소리
  3. 2011/06/03
    똥파리
    풀소리

그을린 사랑 Incendies

시간 좀 지났습니다.

지난 8월 2일 문득 시간이 났고, 문득 외로웠습니다.

영화나 볼까 하고 뒤적이는데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

 

저는 영화에 대한 2~3줄 짜리 간단한 소개를 보고 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전 지식 없이 보고 싶었습니다.

 

광화문 씨네큐브까지 나가려다 라페스타 롯데시네마에서도 상영해서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 제목 : 그을린 사랑 Incendies

* 감독 : 드니 빌뇌브

* 출연 : 루브나 아자발, 멜리사 데소르모 풀랭, 막심 고데트

* 상영시간 : 130분

* 장르 :드라마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제작국가/언어 : 캐나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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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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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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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 없는 총성.

여지 없이 살을 뚫고, 피를 튕기는 생생한 총성..

 

비극을 잘 직시하지 못하는 저에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비극을 볼 때 느끼는 건,

특히 전쟁이나 내전으로 겹쳐진 비극을 볼 때 더욱 그러한 건

비극은 세상을 뒤덮는 지독한 폭력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폭력은 그것을 겪은 이들 내면으로 파고들어 뒤덮습니다.

투라우마, 외상후 스트레스, 결코 꺾을 수 없는 복수심 등등으로요.

 

그래도 사람들은 살고, 세대는 이어가지만

개인과 사회 유전자에 각인된 폭력이 남긴 진한 DNA는 또 어떤 형태의 괴물로 우리에게 다가 올 지 모릅니다.

 

암튼 다시금 세상이 굴러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개인적으로 결코 견딜 수 없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겠지요..

 

 

저는

비극을 구조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것에 익숙하고,

비극을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있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도대체 한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비극이 얼마나 될까?

주인공(들)이 겪는 비극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랑도, 자신도 지킬 수 없습니다.

 

사랑을 향한 약속을 하지만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은 결코 그(들)을 피해가지 한습니다.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분노하지만

분노에 대한 대가 또한 무자비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폭력은 뭘까요..

그건 아마도 당하는 자에게 그의 실존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가치를 부정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결국 스스로도 부정하게끔 하는 것이겠지요...

 

15년을 이어가는 노래가락...

그건 아마도 스스로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는 마지막 나락 속으로는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겠지요...

 

 

그러나 운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마지막 남은 목줄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약속?

사랑?

화해?

 

 

만약에 주인공이 저라면..

...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사막지대에 남겨진 긴 협곡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협곡은 수억년의 세월이 새겨진 지층을 또 수천년, 수만년의 비바람으로

거칠게 절개되고 마모되어 만들어진 것일 겁니다.

 

비극의 땅 레바논

그러한 비극이 남긴 상처는 그들 땅에 남겨진 거친 협곡을 닮아 있을 겁니다.

앞으로의 시간이 부디 조금씩이라도 비극을 덜어가는 시간이 되기를...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 또한 상처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겠지요...

그래도 살아남아 세월의 거대한 서사시 속에서 그 상처를 조금씩이라도 녹여 가기를...

 

 

ps.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년 전에 보았던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 2008)] 이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레바논은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이곳을 점령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강경파인 팔랑헤당 당수 바시르 제마일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후원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시까지 레바논은 대통령은 기독교도가, 수상은 이슬람이 맡아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취임 9일 전 폭탄 테러로 숨지고 맙니다.

이에 팔랑헤당 민병대는 1982년 9월 14일 베이루트 서부 사브라와 사탈라 지역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난입하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협조 속에서 그렇게 합니다.

 

결국 내전은 더욱 격화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베이루트를 떠납니다.

 

[그을린 사랑]은 그 시절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영화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가해자로 참전했던 이스라엘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혹시 참고가 되신다면...

 

[바시르와 왈츠를]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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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카피하다

[prologue]

 

어제 영화번개를 쳤습니다.

4시 30분 모임을 11시 51분에 쳤습니다.

 

번개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혼자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거의 정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영화를 상영한 씨네큐브 1관에는 이미 50여명의 관객 있었습니다.

남자 관객은 서너명 뿐이었고, 혼자 온 남자 관객은 저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90년대 초반 [중독된 사랑]을 봤을 땐 더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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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카피하다

감독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

 

[기막힌 복제품]이란 책을 쓴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는 책과 관련한 강연차 이탈리아 투스카니에 옵니다.

복제품(카피) 골동품점을 하고 있는 엘르는 제임스 밀러의 팬입니다.

엘르는 강연을 들으러 오지만 함께 온 아들의 배고프다는 성화 때문에 중간에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자신의 연락처를 주고 만날 것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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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 줄리엣 비노쉬, 월리엄 쉬멜 등

 

 

2.

 

제임스는 9시 기차를 탈 때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답답한 실내보단 햇볕 아래에 있고 싶어합니다.

둘은 자연스레 교외로 갑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복제품(카피)에 대한 생각 정도일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모든 게 달라보입니다.

그들의 대화는 점점 어긋나고 날이 섭니다.

 

여기서부터 저는 불편해졌습니다.

마찰이란 상대방에 대한 개입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나 분노가 없다면 개입도 없겠지요.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찰을 이르킬 정도의 개입을 한다는 건 개연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치 '꿩은 포유류입니다. 지금부터 포유류로서 꿩의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꿩이 포유류란 말이야?' 하는 생각에 계속 집착하는 꼴이랄까요..

 

그리고 개연성 부재에 계속 집착하는 저를 보면서 '내 몸 속에도 범생이의 피가 흐르나?'하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암튼 그런 개연성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대화에 좀 더 몰입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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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느덧 그들은 15년차 결혼 부부가 되었습니다.

제임스도 엘르의 역할극에 점점 빠져듭니다.

신혼여행을 와서 처음 갔던 호텔로 갑니다.

그들의 역할극은 절정을 향해갑니다.

제임스는 결혼 15주년 날 집에 와서 엘르가 목욕하는 사이 잠든 자신에 대해 변명하기도 합니다.

엘르는 처음으로 제임스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8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제임스는 9시 기차를 타야 다음 약속에 늦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과연 이들의 역할극은 여기서 끝날 지 아니면 계속 이어질 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epilogue]

 

사실 이 영화를 보고 후기를 쓰기 쉽지 않았습니다.

뭔가 강한 끌림 때문에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쉽게 후기를 쓰는데,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꿩이 포유류라는 전제에, 그러니까 개연성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소소한 대화와 심리적인 변화를 좋아한다면

그래도 볼만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ps :

스포일러 하나 : "제, 제, 제,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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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벌써 재작년이군요.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많은 관객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던 게요.

전 그때 그 영화를 못 봤습니다.

남들이 마구 몰려가 보면 오히려 잘 보지 않는 모난 성격 탓도 있지만, 그땐 이상하게 일정이 꼬여서 끝내 못 봤습니다.

 

어제 12시가 다 되어 케이블TV에서 똥파리를 상영했습니다.

저는 일찍 잠을 자고 싶어하는 아내의 구박을 무릅쓰고 소리를 최대한 줄인 채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래서 대사 일부를 놓쳤습니다~ ㅎ 하지만 전체 맥락에는 지장이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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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2008년 한국

감독 : 양익준

출연 :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직, 윤승 등

 



똥파리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밑바닥 사람들입니다.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따뜻한 기억도 별로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살면서 아무리 밑바닥 인생이라지만 어찌 따뜻한 기억이 없었겠습니다.

노란 옷을 입고 화사하게 웃으며 춤을 추는 엔딩 즈음의 꿈결같은 옛 기억처럼

분명 따뜻한 기억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따뜻한 기억은 검은 물감 속에 묻힌 작은 원색처럼 잔혹한 현실 속에서 존재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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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시선은 늘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고 있습니다.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따뜻한 사랑을 줄 줄도 못한다고 하나요.

감정표현은 거칠기만 합니다.

 

다른 사람(또는 다른 사람의 반은)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겠지요.

실물보다 아름답게 보여주는 거울이 없듯이, 이 세상은 이미 거친 나를 따뜻하게 받아줄 세상은 아니지요.

그러니 그들의 삶은 살려고 살려고 바둥치면 바둥칠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곳으로 한없이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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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이렇듯 여전히 엇나갑니다.

 

 

늪과 같은 삶은 대물림하면서 돌고 또 돕니다.

상훈이 똥파리처럼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인 영재에게 '얼른 가'라고 하지만, 영재가 가더라도 늪을 벗어나진 못합니다.

 

아파도 아파하지 못하고, 사랑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삶.

참으로 아픈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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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따뜻하게 마주보는 시선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밑바닥 삶을, 거칠고 외면하고 싶은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커다란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런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애정은 상훈과 같은 밑바닥 사람들을 '사람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폭력적인 우리 사회를 깨끝한 거울처럼 훤히 비춰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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