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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김규항의 글에서 좋은 insight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어떨 때에는 윗 글의 경우처럼 어이없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더군요. 대단한 안목도 아니고, 누구나 머리속에 떠올려보긴 하지만 경우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되어 넘어간 부분인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저러는건 전형적으로 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http://kojiwon.com/931의 댓글 참조

 

 

 



워낭소리, 보긴 봤다. 다큐의 전반적 흐름을 음악으로 지배하지 않고 바람소리와 카메라에 쓸리는 옷깃소리만 간혹 들릴 뿐, 무성(無聲)의 장면 장면과 롱테이크는 사실과 허구 속에서 잠시 혼동을 일으키게끔 했다.

 

전반적으로 소와 노인의 늙어가는 상태에 대한 나와 감정이입이 잘 안되는 부분도 많았다. 노인이 소와 느끼는 감정이 단순히 소유물에 대한 개념인지, 종을 뛰어넘는 연민의 대상인지는 아직까지 잘 구분가지는 않지만 '팔지 않겠다'고 소시장에서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는 노인의 태도에서 어느 정도의 그 판단이 가능한 요소들이 숨어있었다. 극이니깐.

 

여하간 긴 시간 동안 '소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며' 찍은 이 다큐가 주는 의미는 독립영화 살리기, 운운하는데는 적합할지 모르나, 인생에 큰 시사점이나 화두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다큐의 중요한 포인트는 죽음, 그 자체다. 그래서 소가 죽을 때까지 이 다큐를 찍은 것이 아닌가. 여기서 죽음이 주는 메시지는 뭘까. 내 개인적으로는 긴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소가 먼저 죽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노인도 죽을 것이라는 것, 거기서 느끼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있을 것, 많이 힘들 것이라는 등등의 감정흐름을 통해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죽음이라는 문제로 우리 생에서 한 번 제동을 걸어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내 생각일 뿐, 전혀 강요하거나 설명하고픈 생각은 없다.

 

하지만 김규항이 노동관, 어쩌고 했는데. 위 댓글이 정답인거 같다. 김규항, 이 냥반은 가끔씩 자뻑에 빠질 때가 있는데, 위의 글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다큐의 주제는 소이고, 소와 교류하는 노인이며, 그것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노인의 부인, 이 삼각관계가 전부이다. 여기에 노동이 개입되고, 누가 주변부로 격하되고 그런 거, 애시당초 없다. 그런 걸 기대했으면, 차라리 <전함 포템킨>을 보는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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