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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8/02
    공돌
  2. 2006/08/02
    논문 정리단계
    공돌
  3. 2006/08/02
    공부, 그리고 두려움
    공돌
  4. 2006/08/02
    현장과 책상의 거리
    공돌
  5. 2006/08/02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돌
  6. 2006/08/02
    공돌
  7. 2006/08/02
    전자감시와 관련집회에서의 소회
    공돌

끝나다.

완전히 끝나다.

완벽하게 끝나다. 그러나

안전하게 끝나어야 했는데 사실상

그러질 못했다.

 

빳빳한 종이날에

관절 사이의 살점을 베인 것과 같이

결과적으로 흉터는 아물겠지만

손가락을 구부릴 때 아무는 시간은

비교적 오래걸릴 수 밖에 없다.

 

이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200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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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정리단계

논문 올리고

잠시 쉬러 여기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제는 특별히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졸업을 하게 되었고,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논문을 읽고 심하게 부끄러웠다.

문장이 오문 투성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이런 논문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학위를 주는 학교도 문제고 교수도 문제다.

더군다나 내가 이렇게 글을 못쓰는지도 몰랐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함부러

붓 드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적어도 글쓰기는 제대로 배워야 한다.

훈련되지 않은 글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설득보다 의심만 품게한다. 그래서 조금은 글쓰는데

주저하게된다. 그게 정상인거 같다.

 

200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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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그리고 두려움

짧게 한마디..

 

실력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는 결국 게으르다는 것이다.

표현하는 것보다 사물을 직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베이스가 탄탄해야 하는데, 기본 베이스를 탄탄하게 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단발적이고, 비약적으로 기초를 무시한 덩어리를 과시한다. 그러나 그 속에 숨은 알갱이가 강한 응집력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쪼개지고 만다. 그 때 붙여봐야 이미 잘 붙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에너지가 있을 때, 마음 껏 활용하라. 인간의 에너지는 전기와 달라서 저장도 되지 않고 충전도 되지 않는다. 평생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한다.

 

200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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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책상의 거리

너무 분리되어 있다.

 

논문 주제에 한정하다보니 내가 적어도 노동자 감시에 대한 현실을 피부로 느껴야 하는데, 책상머리에서 이것을 하려니 도저히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태조사라도 가능한 주제라면 몰라도, 내 알량함이 이런 정신적 참극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다. 주제는 정해져 있고, 현실은 저멀리에 있다. 사고는 이미 참고문헌에 갇혀있어, 노동자의 고통과 심리상태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이런 것을 상상력으로 해결한다면 결국 또 사기치는 것이다.

 

미치도록 감시 당하고 싶다.

 

200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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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의 도처에는 새로운 시도 발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그러한 노력들이 '개량주의'으로 치부되거나 매도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도 비단 그런 일은 흔히 발견된다. 좌파할동가들은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와 같은 사람들을 개량주의자로 도매금화 해버린다.

그러나 그들도 유심히 읽으면 반면교사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로자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의 논쟁 속에서도 왜 카우츠키 해법에 대한 로자의 분석이 때로는 그 당시에 대중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는가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 로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편이다.

 

얼마전 환경운동가 대니 서라는 작자가 텔레비젼에 모습을 간만에 드러냈다. 그가 77년 생 29세이니깐 22살 때 다큐멘타리를 했다고 하니, 약 7년만에 그가 어떻게 변신,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그를 보면서 두가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를,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첫째는 그가 왜 환경운동가에서 에코-스타일리스트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다. 그는 참으로 똑독하고 자기주관이 강한 소위 '난 놈'이다. 그에 대해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가 '지구의 날'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왜 우리는 노동자의 날에 태어나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묻어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좀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경찰이 경찰의 날에 태어났다고, 목사가 성탄절에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부러워할까에 댛서는 지극히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냥 여기까지는 이렇게 해두자.

 

그의 직업 변화는 기존 환경운동가들과의 연대를 박차고 나가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식에 맞는 운동방법을 택한 것이고, 그것이 설사 운동이 아닌 하나의 비지니스라해도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의 행동이 환경운동의 대의와 배치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의 차이이고, 그 목표에서 상이한 형태라 할지라도 사회에 유익한 방법이라면 굳이 그것을 비판하거나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도리어 부메랑이 되는 법이다. 다만, 그의 행동을 면밀하게 보면서 우리가 그의 아이디어에서 배울 점은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둘째, 대니 서라는 작자를 보여주는 언론의 태도, 즉 언론관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달라져 보일 수 있다. 언론관이라 뭣하지만 방송사에 보내는 대니 서의 평가는 가히 극찬이다. 비지니스 사업가로서도, 기존의 환경운동의 형태면에서도 세련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중산층의 환경운동(혹은 환경관련)참여는 환경문제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자기가 출판하는 잡지회사에 대기업의 광고가 선듯

 

나의 광고를 내어달라는 것은 자기 회사의 '친환경성'을 상품화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없이 오직 '성공'의 관점에서만 미화하고 포장한다.

이건 좀 문제있다. 과정이 없다. 광고를 게제하기 까지의 환경서약 쯤은 있지 않겠는가. 그런 과정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니 서가 자기는 핸도폰과 자동차없이 사는 사람이고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방어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매니져가 전화다받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대충 선수라면 좋게봐주겠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 그것을 풀어주는 뭔가가 없다는 건 문제있다. 대니 서가 그리 못되먹은 작자는 아니라고 보지만 냉철한 평가도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위 두 가지를 묶어서 그것을 내 행동양식에 조금이나마 접목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먼저 일정한 원칙은 존재하되, 그 원칙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의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의 경직성이 전체가 유익한 방향으로 가는데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거라면 새로운 발상으로 전환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험에서 그쳤을 때에는 과감하게 돌아오고 실험이 가능성을 보이면 끝장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나와 관계된 사람, 혹은 대중들과의 소통에서도 항상 소통이 과도할 정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 남의 의견을 재단해서는 안되며 재단해야 하는 경우면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속의 평가는 일부가 주도권을 잡은 평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충분하게 내릴 수 있는 평가로서, 한 쪽 방향의 경직된 형태의 비판이 아니라 '상호 평등한 양과 질의 비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정도로도 개량이나 변질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냥 제자리에 있는 것이 낫고, 이 정도의 자세가 되어있다면 개량이나 변질의 비판을 감수하고도 한 번 새로운 발상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다.

 

200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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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의 땀은 참으로 가치있다.

흘린 땀이 바로 과정이고 결실을 보장한다. 피부를 뚫고 나와

송글하게 맺힌 땀들이 뭉쳐서 흘러내릴 때 먼 미래를 약속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앉아 있으므로

땀을 흘릴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같은 땀이라도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지적을 받거나 준비를 소홀히 해서 흘리는 땀.

 

그것은 운동선수의 땀 만큼이나 소중하다. 그러한 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안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부하면서 늘 땀을 흘리자. 그 땀은 현재 나를 위한 것이지만

진짜 내가 흘릴 땀은 따로 있다. 그곳을 향해 때로는 부끄러움과

성실함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하여야 한다.

 

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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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감시와 관련집회에서의 소회

요즘 현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를 감시, 관찰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우울증 및 정신장애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먼저, 그들의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특히 방용석 이사장(이하 방사장)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것 안다. 자잘한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가 이번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노동감시에 따른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라는 하이텍 노동자의 농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객관적 근거없이 호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9월 30일 동조집회 못가서 하이텍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열심히 투쟁하신 만큼, 노동자의 권리를 분명히 찾으리라고 믿는다. 다음에는 꼭 가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객관적 근거없이 토론에 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토론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호소"다. 호소가 항상 객관적 근거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하이텍 노동자들의 병이 산재법상 병이 된다고 했다. 그 의사들은 무슨 야매의사들인지는 몰라도 공단측 심사담당 의사들은 병이 안된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보통 되든 안되든 간에 "호소"를 하면 그 호소를 언제하는 가에 주목해야 한다. 노무현이 지역감정 청산하자고 졸라 외칠 때, 경상도 사람들이 귀도 안열었다. 같은 동향이라도, 노무현은 '깜'이 아니라고 노무현 이야기 듣도 안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TV토론에 나와 말끝마다 "도와주십시요 "이런 말을 한 것은 객관적 근거가 얼마나 치밀하고 짜임새가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객관적 근거로 통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나라면 어떻겠소. 내 입장을 이해해주오. 좀 도와주오"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동정을 구하는 것이다. 동정...같은 동향으로서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같은 동향, 진짜 같은 노동운동의 동향인 방 사장은 어떤가? 자기는 호소를 안해본 사람처럼 객관적 근거없는 호소에 불과하니 들을 필요가 없단다. 호소는 위와 같이 다음의 코스를 밟은 뒤 최후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객관적 근거를 대도, 그것이 씨알이 안먹히면 결국 하는 것이 호소이다. 호소는 결국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것이다. 강자는 호소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동향인 방 사장이 호소를 안듣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건 김대환 노동부장관(이하 김장관)도 마찬가지 이다.

 

1. 노동운동이 자선봉사가 아니다. 가장 이기적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운동이다. 그것을 지도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자신의 결정 이전에 공생관계의 결정을 가장 존중한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그 구성원이 절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생관계의 구성원들은 공생관계의 결정에 따른 지도자의 지도와 책임에 신뢰를 하게 된다.

 

2. 그런데 이와 달리 공생관계의 결정 이전에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획정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결정을 공격하는 자와 지켜줄 수 있는 자 사이에 빈 공간 사이에서 좀 더 넒은 범위를 확보한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위치는 항상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무장 지대에서 자신은 비무장 지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려고 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신을 방어하는가에 있는가, 아니면 공생관계를 방어하는가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3. 이렇게 되면 자신을 지키는 자와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따라서 느슨한 연방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사실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코드를 맞추기 이전에 100볼트인지, 220볼트인지를 맞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4. 따라서 일정한 연방관계에 대한 도전은 결국 자신의 결정과 범위를 더욱 공고히 하게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자신이 지나온 일생에 따라 갖추게 된 가치관을 포기하는 대신, 연방관계의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그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가변적인 연방관계의 룰을 깨지 않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격을 받게 되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방어하게 된다. 자신이 노출되게 되면 더욱더 필사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나 방어는 본능이지만, 방어에 따른 공격은 이성을 가장한 본능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 방어든, 공격이든, 호소든, 협박이든 간에 아무 것도 얻거나 이룰 수가 없게 된다.

 

가령 김장관의 경우, 더이상 올 수 없는 길에다가 멈출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가 진보적이었는지는 잘 모르나, 감투쓰기 전의 세간의 평가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을 보는 순간, 사람 눈이 뒤집히는 경우라면 일단 그 사람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많은 곳에서 혹시 술을 산다든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서 우쭐댄다든지, 공짜 술과 밥을 자주 먹는다든지, 평소 누구 험담이나 뒷다마를 잘 깐다든지, 자신의 어려움을 필요이상 오바해서 이야기한다든지, 편을 가를려고 한다든지, 어디든지 인정받을려고 한다든지, 학벌을 자주 얘기한다든지, 집안 얘기를 자주 한다든지, 주변에 가우잡는 친구들 얘기를 많이 한다든지, 자기는 안하면서 남을 질책하는 걸 잘한다든지 이런 점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너무 많지만 단 하나로 요약하지만 다음과 같다.

 

"호소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된 사람이다. "

 

200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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