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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감시와 관련집회에서의 소회

요즘 현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를 감시, 관찰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우울증 및 정신장애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먼저, 그들의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특히 방용석 이사장(이하 방사장)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것 안다. 자잘한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가 이번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노동감시에 따른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라는 하이텍 노동자의 농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객관적 근거없이 호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9월 30일 동조집회 못가서 하이텍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열심히 투쟁하신 만큼, 노동자의 권리를 분명히 찾으리라고 믿는다. 다음에는 꼭 가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객관적 근거없이 토론에 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토론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건, "호소"다. 호소가 항상 객관적 근거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하이텍 노동자들의 병이 산재법상 병이 된다고 했다. 그 의사들은 무슨 야매의사들인지는 몰라도 공단측 심사담당 의사들은 병이 안된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보통 되든 안되든 간에 "호소"를 하면 그 호소를 언제하는 가에 주목해야 한다. 노무현이 지역감정 청산하자고 졸라 외칠 때, 경상도 사람들이 귀도 안열었다. 같은 동향이라도, 노무현은 '깜'이 아니라고 노무현 이야기 듣도 안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TV토론에 나와 말끝마다 "도와주십시요 "이런 말을 한 것은 객관적 근거가 얼마나 치밀하고 짜임새가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객관적 근거로 통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나라면 어떻겠소. 내 입장을 이해해주오. 좀 도와주오"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동정을 구하는 것이다. 동정...같은 동향으로서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같은 동향, 진짜 같은 노동운동의 동향인 방 사장은 어떤가? 자기는 호소를 안해본 사람처럼 객관적 근거없는 호소에 불과하니 들을 필요가 없단다. 호소는 위와 같이 다음의 코스를 밟은 뒤 최후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객관적 근거를 대도, 그것이 씨알이 안먹히면 결국 하는 것이 호소이다. 호소는 결국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것이다. 강자는 호소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동향인 방 사장이 호소를 안듣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건 김대환 노동부장관(이하 김장관)도 마찬가지 이다.

 

1. 노동운동이 자선봉사가 아니다. 가장 이기적이면서 가장 사회적인 운동이다. 그것을 지도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자신의 결정 이전에 공생관계의 결정을 가장 존중한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그 구성원이 절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생관계의 구성원들은 공생관계의 결정에 따른 지도자의 지도와 책임에 신뢰를 하게 된다.

 

2. 그런데 이와 달리 공생관계의 결정 이전에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획정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결정을 공격하는 자와 지켜줄 수 있는 자 사이에 빈 공간 사이에서 좀 더 넒은 범위를 확보한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위치는 항상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무장 지대에서 자신은 비무장 지대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려고 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신을 방어하는가에 있는가, 아니면 공생관계를 방어하는가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3. 이렇게 되면 자신을 지키는 자와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따라서 느슨한 연방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사실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코드를 맞추기 이전에 100볼트인지, 220볼트인지를 맞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4. 따라서 일정한 연방관계에 대한 도전은 결국 자신의 결정과 범위를 더욱 공고히 하게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자신이 지나온 일생에 따라 갖추게 된 가치관을 포기하는 대신, 연방관계의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그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가변적인 연방관계의 룰을 깨지 않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격을 받게 되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방어하게 된다. 자신이 노출되게 되면 더욱더 필사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나 방어는 본능이지만, 방어에 따른 공격은 이성을 가장한 본능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 방어든, 공격이든, 호소든, 협박이든 간에 아무 것도 얻거나 이룰 수가 없게 된다.

 

가령 김장관의 경우, 더이상 올 수 없는 길에다가 멈출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가 진보적이었는지는 잘 모르나, 감투쓰기 전의 세간의 평가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을 보는 순간, 사람 눈이 뒤집히는 경우라면 일단 그 사람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많은 곳에서 혹시 술을 산다든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서 우쭐댄다든지, 공짜 술과 밥을 자주 먹는다든지, 평소 누구 험담이나 뒷다마를 잘 깐다든지, 자신의 어려움을 필요이상 오바해서 이야기한다든지, 편을 가를려고 한다든지, 어디든지 인정받을려고 한다든지, 학벌을 자주 얘기한다든지, 집안 얘기를 자주 한다든지, 주변에 가우잡는 친구들 얘기를 많이 한다든지, 자기는 안하면서 남을 질책하는 걸 잘한다든지 이런 점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너무 많지만 단 하나로 요약하지만 다음과 같다.

 

"호소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된 사람이다. "

 

200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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