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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의 도처에는 새로운 시도 발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그러한 노력들이 '개량주의'으로 치부되거나 매도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도 비단 그런 일은 흔히 발견된다. 좌파할동가들은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와 같은 사람들을 개량주의자로 도매금화 해버린다.

그러나 그들도 유심히 읽으면 반면교사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로자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의 논쟁 속에서도 왜 카우츠키 해법에 대한 로자의 분석이 때로는 그 당시에 대중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는가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 로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편이다.

 

얼마전 환경운동가 대니 서라는 작자가 텔레비젼에 모습을 간만에 드러냈다. 그가 77년 생 29세이니깐 22살 때 다큐멘타리를 했다고 하니, 약 7년만에 그가 어떻게 변신,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그를 보면서 두가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를,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첫째는 그가 왜 환경운동가에서 에코-스타일리스트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다. 그는 참으로 똑독하고 자기주관이 강한 소위 '난 놈'이다. 그에 대해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가 '지구의 날'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왜 우리는 노동자의 날에 태어나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묻어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좀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경찰이 경찰의 날에 태어났다고, 목사가 성탄절에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부러워할까에 댛서는 지극히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냥 여기까지는 이렇게 해두자.

 

그의 직업 변화는 기존 환경운동가들과의 연대를 박차고 나가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식에 맞는 운동방법을 택한 것이고, 그것이 설사 운동이 아닌 하나의 비지니스라해도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의 행동이 환경운동의 대의와 배치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의 차이이고, 그 목표에서 상이한 형태라 할지라도 사회에 유익한 방법이라면 굳이 그것을 비판하거나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도리어 부메랑이 되는 법이다. 다만, 그의 행동을 면밀하게 보면서 우리가 그의 아이디어에서 배울 점은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둘째, 대니 서라는 작자를 보여주는 언론의 태도, 즉 언론관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달라져 보일 수 있다. 언론관이라 뭣하지만 방송사에 보내는 대니 서의 평가는 가히 극찬이다. 비지니스 사업가로서도, 기존의 환경운동의 형태면에서도 세련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중산층의 환경운동(혹은 환경관련)참여는 환경문제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자기가 출판하는 잡지회사에 대기업의 광고가 선듯

 

나의 광고를 내어달라는 것은 자기 회사의 '친환경성'을 상품화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없이 오직 '성공'의 관점에서만 미화하고 포장한다.

이건 좀 문제있다. 과정이 없다. 광고를 게제하기 까지의 환경서약 쯤은 있지 않겠는가. 그런 과정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니 서가 자기는 핸도폰과 자동차없이 사는 사람이고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방어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매니져가 전화다받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대충 선수라면 좋게봐주겠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 그것을 풀어주는 뭔가가 없다는 건 문제있다. 대니 서가 그리 못되먹은 작자는 아니라고 보지만 냉철한 평가도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위 두 가지를 묶어서 그것을 내 행동양식에 조금이나마 접목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먼저 일정한 원칙은 존재하되, 그 원칙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의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의 경직성이 전체가 유익한 방향으로 가는데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거라면 새로운 발상으로 전환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험에서 그쳤을 때에는 과감하게 돌아오고 실험이 가능성을 보이면 끝장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나와 관계된 사람, 혹은 대중들과의 소통에서도 항상 소통이 과도할 정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 남의 의견을 재단해서는 안되며 재단해야 하는 경우면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속의 평가는 일부가 주도권을 잡은 평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충분하게 내릴 수 있는 평가로서, 한 쪽 방향의 경직된 형태의 비판이 아니라 '상호 평등한 양과 질의 비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정도로도 개량이나 변질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냥 제자리에 있는 것이 낫고, 이 정도의 자세가 되어있다면 개량이나 변질의 비판을 감수하고도 한 번 새로운 발상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다.

 

200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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