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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대통령의 영화 되다(펌)

  • 등록일
    2009/02/24 02:38
  • 수정일
    2009/02/24 02:38
이송희일 감독 글 ( 이걸로 내 울화는 조금 가셔졌다.)

다 죽은 줄 알았던 한독협 게시판이, 졸지에 '대통령의 영화'가 된 한 편의 독립 영화 때문에 시끄럽네요. '독립 영화, 대통령의 영화 되다'는 제 표현이 아니라 어느 진보 사이트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죠. 상당히 쪽팔리더군요.

문을 열어놓으니 들어왔습니다. 아니, 일말의 진정 어린 말로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사과 비스무리한 것 정도 기대했다가 '한 번 해보자' 식의 글을 보고 놀라서 들어왔습니다. 그간 하도 제 개인 홈피에 그간 떠들었더니 힘도 딸리고, 그닥 쓸 말이 없어 일부 퍼옵니다.  



1.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라는 고영재 사무총장님의 글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책임은 고영재 사무총장님께 있죠.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간단한 사실 하나 이해하는 데 그 많은 소란을 경유해야만 했나 봅니다.

문제는 이명박과 나란히 서서 악수를 한 사건에 대해 전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않을 뿐더러, '독립 영화를 위해서라면 이명박이 아니라 전두환하고도 손을 잡아도 괜찮다' 싶은 이기적 진영 논리 안에 여전히 감금되어 계시네요.

열심히 뛴다고 해서 스스로 자초한 정치적 판단의 오류를 감출 수는 없겠지요. 하나만 묻지요. 왜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셨나요? 대체 뭘 위해서? 부르조아 정치판에는 '문상 정치'라는 게 있죠. 고영재 사무총장 위 글에도 문상 정치에 참여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열심히 일하시는 건 잘 알겠으나 왜 굳이 관료들과 노회한 정치인들이나 하는 문상 정치 안에 뛰어들어가 무엇을 알리시려고 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고영재 사무총장님을 동분서주 땀 흘리며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고영재 사무총장이 말하는 그 목적어, '독립 영화'의 실체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한나라당도 '서민'을 정치적 목적어로 삼고, 민주당도 '서민'을 이야기하죠. 그들이 말하는 서민은 대상화된 객체일 뿐, 주체의 목소리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민노총도 '노동자'를 이야기하고, 한국노총도 '노동자'를 이야기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연대체도 전혀 다른 의미로 '노동자'를 이야기합니다. 이 맥락에서, 전 고영재 사무총장을 그리 힘들게 움직이게 한 독립 영화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집니다. 다른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도 배제하고, 표현의 자유는 물론 서민의 삶을 찜쪄먹는 이명박과 악수하면서까지 지켜내려고 애썼다는 그 비분강개의 '독립 영화'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는 시클롭스 괴물이 되어도 되니 실체 묘연한 '독립 영화'만 지키면 된다는 말씀인가요?

전 고영재 사무총장이 그리 애쓰며 지키려고 했다던 독립 영화가 왜 그간 우리들이 지키고 버텨내고 새롭게 창조해내려고 했던 독립 영화와 사뭇 다른지 갑자기 혼동이 오기 시작하네요. 부패한 정권의 최고 권력자와 악수를 해도 좋으니, 그 정체 묘연한 고영재식 독립 영화만 지키면 된다는 말씀인가요? 독립 영화는 한미FTA를 찬성하나요? 독립 영화는 자기 호주머니만 배부르면 대운하 삽질에 동참해도 되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인디 스페이스 없을 때도 독립 영화 있었습니다. 미디액트 없었을 때도 독립 영화 있었습니다. 인디 스페이스와 미디액트 가지고 협박하지 마세요. 그건 독립 영화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기술적 과정의 일부분이지 독립 영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치, 윤리적 담론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고영재 사무총장이 지금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해도 지키려고 했던 그 자존의) 독립 영화를 훼손시키더라도, 미디 액트와 인디 스페이스를 살릴 수만 있으면 강한섭이든 이명박이든 그 어떤 괴물이든 손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대체한 전형적인 관료적 의식이며, 엉뚱하게 도착된 이기적 진영 논리의 소산입니다. 수단이 목적을 잡아 먹어버리면 소외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이 사태 때문에 분개하는 이들은 대부분 느닷없는 소외의 감정을 느끼고 있죠. 이건 대체 뭥미? 라고 말이죠.

조낸 힘들겠지만, 미디액트 없어지면 다시 또 싸워서 만들면 됩니다. 인디 스페이스 조각나면 다시 또 싸워서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사무총장님이 이명박과 손을 잡고 허허실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출한 알흠다운 사진은 독립 영화 역사 페이지에 오욕의 장면으로 오래도록 기록될 거라는 점입니다. 참 웃기게도, 미디액트와 인디 스페이스는 고영재 사무총장이 워낭소리 블로그에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토로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나왔지 말입니다. 이명박과 만난 게 나름 자랑스러우셨나 봅니다.



2.
혹여 그간 독립 영화를 '규모의 경제'로 사유하지 않았는지 곰곰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결과한 '철학의 빈곤'이 우리 스스로 정체성과 정치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까지 깡그리 소멸시키지 않았는지도 함께 고민해봐야겠죠.

고영재 사무총장님은 우리가 낸 세금을 공적 기금으로 전환하여 집행하는 구조가 영진위든 청와대든 같기 때문에 강한섭과 만날 수 있다면 이명박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견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유인촌 문화부장관을 사랑하고, 또 유인촌 장관이 강한섭씨를 영진위 위원장으로 뽑았으니, 내리 사랑이 맞는 모양입니다.

그 쉬운 이치를 몰랐으니 앞으론 힘들게 영진위의 공공성을 위해 싸울 이유도 없고, 청와대 앞에 가서 직접 읍소를 하면 될 일이겠군요. 왜 한국의 인권단체들은 힘들게 인권위 축소 문제를 가지고 왈가불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인권 워낭소리' 찍고 흥행 대박시켜서 이명박을 만나면 될 일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 간단한 이치를 일깨워준 고영재 사무총자님께는 참 죄송한 말이지만, 저항과 온갖 잡음을 기반으로 하는 테이블 협상과, 청와대가 직접 수여하는 표창장 수여식을 잘 구분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영재 사무총장님은 마치 그간의 열렬한 정책 토론과 저항을 기반으로 하여 이명박을 만난 것처럼 말씀하시는 뉘앙스 같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제 눈에는 그게 마치 '금메달' 따고 돌아온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이미지처럼 보였단 말이지요. 어차피 이메가인 그 분에게 워낭소리의 '흥행'은 비인기종목의 '금메달'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상장, 받으셔서 좋으셨습니까?

고영재 총장님은 만나서 할 말 다했다고 말씀하시지만, 국가 권력을 '강제'하고 압박해서 원하는 걸 얻어내고 전취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이명박이 어쩔 수 없이 청와대에서 기어나와 만난 거라면 우리도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죠. 이런 걸 전문 용어로 '놀아났다'고 표현합니다. 이명박-유인촌-강한섭 이렇게 삼종 세트를 한꺼번에 만나 어떤 구두 약속을 받아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다른 독립 영화인들에게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함께 놀아나준 기념으로 받은 선물이 생각보다 크기를 바랍니다.

국가 권력과 제반 시민 운동과의 접점을 사유하는 데 가장 긴요한 것 중에 하나가 어떤 내용을 가지고 그들과 '어떻게 만나느냐'는 것도 포함되겠지요. 헌데 이 모든 전술의 차이를 제껴두고, 세금 집행하는 강한섭도 만나는데, 왜 킹왕짱 세금 집행자인 이명박을 못 만냐느냐고 단순하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싸우는 것'과 '놀아나는 것'도 구분 못한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기에서 바로 정치가 발생하고 정체성에 파열이 생기는 거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아쉬운 대목은 이 만남의 윤리적 흠결입니다. 앞으로 한독협은 '용산'을 비롯한 철거민 투쟁에 과연 카메라를 어떤 양심으로 들이댈지 궁금합니다. 모두가 분노하고 싸우고 있는 상황에 나만 살자고 구명 보트를 달라고 읍소하는 목소리는 윤리적 흠결로 이미 상처가 너덜너덜해진 목소리겠죠.

배가 부르신가요? 선물 많이 받아 좋은가요? 제가 생각해온 독립 영화는 제반 진보적인 시민 단체,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과의 폭넓은 연대를 통해 영화를 비롯한 문화적 시스템을 차근차근 변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거리의 정치'와 '시스템 내부의 정치'를 병행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거리의 정치와 연대를 도외시하거나 관계의 끈을 배반한 채 시스템 내부에 도착된 정치를, 시쳇말로 '변절한 부르조아 정치'라고 하지요.

'용산의 눈물'을 뒤켠에 내버려둔 이명박 부부가 워낭소리를 보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겠다고 찾아왔는데 덥썩 손을 잡고 나는 배고프다, 식의 히딩크 패러디를 하는 건 아무리 봐도 연대는 커녕 이기적 진영 논리의 소산이라고밖에는요.


3.
워낭소리와 이명박의 만남은 싫든 좋든 분명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고, 이에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혹감, 혼란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슬프기까지 합니다. 이 상황에서 고영재 사무총장님이 '앗, 실수, 경황이 없어 정치적 판단을 잘못했다, 미안하다.' 정도라도 재빨리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랬더라면, 굳이 이렇게 게시판 DB 갉아먹으면서 제가 서툰 글 쓸 일도 없고, 쪽팔리게시리, 어디 가서 내놓고 이야기하기도 거시기한 이 사건을 이렇게 공적 게시판에 쓸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제가 이번 사건을 통해 얻은 건 '규모의 경제'에 강박된 현 독립 영화 진영이 어느 순간 철학의 빈곤 속에 놓여져 있었고, 이에 전략과 전술도 함께 빈곤해지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입니다. 이 모든 소란 속에서 유령을 다시 호출해야 할 필요가 있나 봅니다. 독립 영화란 무엇인가?

이럴 때 그런 독립 영화가 밥 먹어주냐고 말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습니다만.



여튼 희일 글 덕에 여전히 올곧고 뚝심있게 서있는 '독립' 영화인들 있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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