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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파라 Gracias a la vida

  • 등록일
    2009/10/09 02:47
  • 수정일
    2009/10/09 02:47
 
<생에 감사해>를 부르는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청아했다. 흙냄새가 나는 평소의 단조롭고 칙칙한 목소리와는 분명 달랐다. 또한 괄괄한 여장부 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노래를 녹음한 1966년의 비올레타 파라는 어언 50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칠레 민속음악의 전당을 만들어보겠다는 오랜 꿈을 실행에 옮겼다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절망하고 있었다. 또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던 이는 그녀의 직선적인 성격에 진저리치다 볼리비아로 가서 다른 여인과 결혼했고, 건강마저 비올레타 파라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더구나 <생에 감사해>의 노랫말은 그녀의 상황을 알던 사람들로서는 더욱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노랫말이었고, 삶의 은총을 기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생에 감사해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어
흑백을 온전히 구분하고,
창공을 수놓은 별을 보고,
무수한 사람들 틈에서 내 님을 찾을 수 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청각을 주어 밤낮으로 귀 기울여
귀뚜라미, 카나리아, 망치 소리, 물레방아, 소나기,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사무치게 사랑하는 임의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새기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소리와 문자를 주어
‘어머니, 친구, 형제자매,
애모하는 영혼의 편력 길을 비추는 빛’ 같은
말들을 떠올리고
표현할 수 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내 지친 발을 이끌어주어
도시와 시골길,

해변과 사막, 산맥과 평원,
그대 집과 거리와 정원을 순례하였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인류의 지성이 낳은 창조물을 볼 때,
악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선인을 볼 때,
그대 맑은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볼 때마다
요동치는 심장을 주었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웃음을 주고 울음도 주니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 재료인
즐거움과 고통을 구분할 수 있네.
당신들의 노래는 바로 하나의 노래이고
모든 이의 노래가 바로 나의 노래라네.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el alto cielo su fondo estrellado,
y en las multitudes el hombre que yo am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oido que en todo su ancho,
graba noche y días, grillos y canarios,
martillos, turbinas, ladridos, chubascos,
y la voz tan tierna de mi bien ama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cedario,
con é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ru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es cansados,
con ellos anduve, ciudades y charcos,

playas y desiertos, montañas y llanos,
y la casa tuya, tu calle y tu pati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el corazón que agita su marco,
c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humano
cuando miro el bueno tan lejos del malo,
cuando miro el fondo de tus ojos claros.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í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y el canto de ustedes que es el mismo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io c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노랫말 번역: 우석균ㆍ정승희

그러나 비올레타 파라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남기고 몇 달 후인 1967년 생을 마감했다. 공연 장소이자 그녀의 거처이기도 했던, 산티아고 외곽의 한 천막에서 스스로 머리에 권총을 쏘고 분신과도 같은 기타에 엎어져 쓸쓸하게 죽어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생에 감사해>는 비올레타 파라가 자신이 상실한 모든 것들을 담은 노래라고. 그녀가 당찬 삶을 선택했기에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는 뜻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1917년 칠레의 산 카를로스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인생은 출발부터 고단했다. 아버지는 악기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한량이어서 가계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노래를 잘해 때때로 마을 잔치에서 노래 품을 팔던 어머니가 이에 질색하여 자식들이 기타를 만지는 것을 금했을 정도였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식이라고는 큰아들뿐이었다. 그 덕에 큰아들은 칠레를 대표하고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바로 반시(反詩)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이다. 반면 나머지 동생들은 처음에는 잔돈푼이나 받는 재미로, 나중에는 가세가 기울어 거리와 식당과 열차 등을 돌아다니며 노래 동냥을 해야 했다. 니카노르 파라는 평생 이에 대해 미안해했다. 특히 비올레타의 천부적인 끼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죽자 제일 먼저 비올레타를 산티아고로 불러올려 어떻게든 학교를 다녀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니카노르 파라 자신도 가난한 고학생 처지라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국 비올레타는 아홉 살 때부터 익힌 음악으로 밤무대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비올레타 파라에게는 덧없는 세월이었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비올레타 파라는 민속음악을 보존, 재창조,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가슴 한 구석이 늘 허전했다. 그러다가 니카노르 파라의 권유로 1953년부터 민속음악을 채집하면서 그녀의 삶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비올레타 파라는 공책과 연필만 달랑 들고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혼자서 칠레대학 민속연구팀보다 더 많은 노래를 채집하는 억척스러움을 발휘했다. 1953년은 또한 그녀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해이기도 하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잊혀져 가던 민요가 비올레타 파라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감격에 찬 청취자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이 감격의 순간을 회고하며 비올레타 파라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진짜 인생은 서른다섯 살이 넘어야 시작돼요.”라고.

1955년 민속 부문에서 칠레의 예술 대상인 카우폴리칸 상을 수상했을 때, 비올레타 파라의 삶은 평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녀의 열정이 너무나 컸다. 폴란드에서 국제민속대회 초청장이 날아들자 비올레타 파라는 주저 없이 유럽행을 선택하였다. 칠레 민속음악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겠다는 포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얼마 후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9개월짜리 딸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비보를 접한 비올레타 파라는 그 아픔을 달래려고 미친 듯이 음악에 몰두하지만, 이런 행동이 결국은 두 번째 이혼의 발단이 되었다.

비올레타 파라의 유럽 생활은 궁핍함의 연속이었으나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파리에서 <칠레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 성격의 음반을 취입하고, 인류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르 박물관 부속 전시실에서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했다. 또 영국에서도 방송에 출연하고 BBC방송국 자료실에 자신의 노래를 보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올레타 파라가 최종적으로 칠레로 돌아온 것은 ‘파라 페냐’(Peña de los Parras)가 문을 연 다음이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 파라와 앙헬 파라가 파리의 상송 카페에 영감을 얻어 1965년 산티아고 시내에 연 라이브 카페다. 페냐는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성과 서정성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한 노래운동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의 모태가 되었다. 뒤늦게 유럽에서 돌아와 카페의 성공을 두 눈으로 목격한 비올레타 파라는 가슴이 설레었다. 드디어 칠레 사회가 전통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녀가 자살한 장소에 천막을 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속음악의 전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내디딘 그 발걸음은 비올레타 파라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렸다.   산

티아고 외곽까지 일부러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약속된 구청의 지원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파라가 삶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생에 감사해>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살아보지 못한 삶에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쨌든 <생에 감사해>는 이미 희망과 사랑과 건강을 잃은 비올레타 파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비올레타 파라로서는 처절한 순간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킴으로써 노래꾼다운 죽음을 택한 셈이다.

<생에 감사해>는 아르헨티나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와 미국의 포크가수이자 저항운동가인 존 바에즈(Joan Baez)가 부르면서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명곡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생에 감사해>를 즐겨 부른 것은 단지 곡의 내력이나 비올레타 파라의 치열한 삶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전 세계 사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비올레타 파라는 분명 민속음악으로 음악의 길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빅토르 하라(Víctor Jara) 같은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들에게 대모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 음악의 도시화를 추구하고, 칠레 음악의 국제화를 시도하고,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음악 전통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령, 오늘날 안데스 전통 악기와 선율을 내세워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인티 이이마니(Inti Illimani) 같은 칠레 그룹의 존재는 비올레타 파라의 선구적인 실험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전통과 도시와 국제성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비올레타 파라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그녀의 음악 경향을 구분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전통 음악에 더 가깝다. 그러나 <생에 감사해>를 비롯한 몇몇 곡들은 선율도 노랫말도 모두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만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생에 감사해>가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의 명곡으로 꼽히는 것이다.

칠레인들에게는 <생에 감사해>가 아주 특별한 곡이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칠레 사회는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삶은 형편없이 쪼그라져 들었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 희망의 노래가 바로 <생에 감사해>이었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실종된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혹독한 탄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의 희망을 부여잡으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생에 감사해>는 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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