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xxxx 같은 모임이었겠지? 논쟁하고, 설득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

그러다 그 사람들과 집회를 나갔는데, 인도 위를 행진하다 도로로 나가는 게 계획이었던 것 같다.

선두와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도로로 다 올라갔고 멀리 떨어져 있기 하지만 나도 차도로 나가야할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과 차도로 나섰다. 그런데 멀리 앞에 보이는 건 먼저 차도로 나왔던 사람들이 경찰들에게 쫓겨 이리저리 흩어지고 도망다니는 모습이었다. 들고 있는 죽봉은 끝이 다 갈라졌다. 차도 위로 올라온 우리에게도 경찰들이 달려온다. 허겁지겁 골목길로 도망가는데, 꿈속에서는 한발짝 한발짝 떼는 게 왜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골목길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코 앞에 있는 모퉁이까지 힘겹게 뛰어간다.

모퉁이를 돌고 나서도 꿈은 계속 이어졌는데,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한동안 쫓기는 꿈을 많이 꾸다 근 몇 년동안 꾸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쫓기는 꿈을 꾼다.

예전에는 쫓기는 상황이 너무 절망스러워, 격한 감정에 잠을 깨곤 했는데, 그래도 이번에 꾼 꿈은 감정이 심란하지는 않았다. 또 뭐가 날 쫓고 있는걸까...

2009/12/27 22:20 2009/12/27 22:20

지나간다음악

집에 mp3를 구워놓은 씨디가 많이 있길래 그 안에 담긴 파일들을 모두 하드에 옮겨보았다. 대학교 1학년 무렵부터 몇년동안 내가 모아놓고 들었던 음악들의 목록을 훑어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CD에 어떤 밴드의 음반이 하나 밖에 안 담겨 있지만, 다음 CD에는 그 음반 외에 다른 음반이 하나 더 담겨 있기도 하고, 이렇듯 어떤 식으로 듣는 음악의 범위를 넓혀나갔는지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보낸 시간과 기억의 조각들을 이런 식으로 뜻밖에 확인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떠올려보면 내가 만들었던 컴필레이션 음반도 있는데, 그걸 주위사람들에게 선물하고 꽤나 뿌듯해 했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난 어느만큼 멀어졌나.

 

CD10장 분량의 mp3가 지금은 DVD 한장에 들어간다. 지금 집에 쌓여있는 수십장의 CD는 정리하고 나면 DVD 몇 장 분량 밖에 안될텐데, 공간을 잔뜩 차지하고 있는 녀석들이 민망해할까 해서 머쓱하다. 불과 5년전만 해도 DVD를 집에서 굽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단 말이다.

그만큼 사람마다 쥐고 있는 정보의 양은 끝모르고 많아지는데, 우리는 그 중 어느만큼을 담아내고 있을까? 지금은 예전만큼 음악에 탐닉하지 못하는데,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 많아질 수록 쉽게 물리는게 아닌가 싶다. 나를 살펴보면 고등학교 때보다 듣는 음악의 양은 많아졌을지언정, 어떤 음악 하나를 내 안에 담아내는 깊이는 더 얕아졌다. 몇 년 전엔 음악 하나에 심취해 그 음악을 구석구석 머리속에 그려넣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뭐, 그 땐 아예 mp3플레이어라는 게 없었고, 휴대용 기기는 cdp, mdp, 카세트플레이어 등이었는데, 난 cdp살 돈을 못모아 카세트플레이어로만 음악을 들었었다. 이미 절판돼 구하기 힘든 음반을 사기 위해 시내 모든 음반사를 돌아다니던 게 떠오른다. 지금은 설사 구하기 어려운 음반을 찾아야 한다 하더라도 발품을 팔기보다는 손가락에 일을 더 시켜야 한다. 어렵게, 어렵게 원하는 음악을 찾았다 해도 전선을 타고 온 음악은 발품을 팔아 손에 든것보다는 애착이 떨어진다. 옛날에 대한 향수인건가 질문을 던져보는데, 손과 발, 오감을 통해 촉지한 것과 전선을 타고 와서 모니터에 보이는 것 사이에는 그만한 '물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우리는 결국 色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2009/12/19 16:39 2009/12/19 16:39

지나간다학생회 단상

MinorGood님의 [학생회운동에 거는 딴지] 에 관련된 글.

 

내가 겪어왔던 학생회 관련된 일들, 생각들. 떠오르는 대로. 짧게. 답없는 글.

 

 

내가 학생회일을 직접 했던 건, 총학생회 1년, 단대학생회 1년.

총학생회는 2학년 때 맡았었고, 그 때도 몇 안되는 사람들로 허덕이며 운영했었다. 그래도 총학생회 이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다 총학생회 경험 속에서 학생회에 대한 실망에 부딪혔을 때(구체적인 실망의 근거들을 나열하려고 생각해보니 너무 장황해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던 것들이고, 지금 내가 쓰려는 글과 별 상관 없는 내용이어서 뺀다.), 맨처음 가졌던 건 학생회가 자치의 가능성을 내리누르고 있고, 그것을 벗겨내면 만인에 의한 자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권력과 대중에게 내재되어 있는 역능을 대립시키면서 그 둘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줄 근거를 아우또노미아를 소개하는 그룹에게서 끌어오려 했었고, 지금와서 보면 결론을 내려놓은 채 근거를 뒤적이는 매우 글러먹은 태도였다. 아무튼, 그런 생각에서 해봤던 게 선거반대운동이었는데 기호0번-자신의 이름을 찍자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반응이 꽤 좋았었다. 이 때에도 선거는 소위 비권-반권의 이권다툼이었고, 어느 편이 당선되든 학교에 변할일이 없다는 건 객관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구호가 그 개인들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구체적인 제안이지 않았고, 결국 정치에서  자신을 분리시켜내는 걸 정당화시키는 효과를 남길 것이라는 반성을 요즘 와서 깊이 하고 있다. 선본들의 공약에 대한 비판과 정책제안 같은 활동이 당위적인 풀뿌리 민주주의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낫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이런 시도들을 거치고, 단대학생회는 사실 별다른 준비 없이 함께 하게 되었다. 이것도 사람이 없어서 내내 허덕거렸다. 옆에서 보면 즉흥적인 결정으로 보이기도 하겠으나, 항상 머리속의 반절은 대학사회(특히 학생회)를 어떻게 개조시키면 좋을까에 대한 질문과 나름의 계획들로 차있었고, 내가 단대학생회에 들어가게 될 상황과 조건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계산이 있던 터였다. 몇 해전에 실패했던 걸 극복해보고 싶던 욕심이 있었다.

해가 갈수록 학생회의 조건도 무너지는 걸 실감했다. 이름만 '학생회', 손에 잡히는 물적인 토대가 너무 없었다.  그 때도 선도투만 머리속에 있던 것 같은데, 한창 한미fta정세가 있을 때여서 학생회 힘을 동원해 실천단을 꾸리기도 했지만, 정작 fta에 대한 대중적인 선전은 꽝이었다. 학생회를 자치공간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학생들 불러모아 매일 밥해먹기도 했지만, 그것도 내가 구상한 사업에 사람들을 끼워맞추는 식이었다. 학생회 임기 안에 하려고 했던 것 중 하나가 학생회칙을 바꿔 누구나 학생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일종의 평의회를 실현하려고 했는데, 결국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적극적인 반대자 몇명에게 밀려 무산되었다. 그 해 해봤던 모든 것들은 정말 몰정세적 선도투라고 이름 붙일 수 밖에 없도록 낯부끄러웠다.

학생회를 누가 어떻게 운영하느냐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삶에서 정치가 사라지는 것과 꼭 같은 만큼 학생회도, 동아리도 축소되어가고 있었다. 학생회가 강력해지면 동아리가 죽는 대립관계/인과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에 의한 효과가 반영되는 것일 뿐이다. 그 인과관계를 고민하는 동안 학교에서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모든 자치기구들이 비가역적으로 망가지고 있다.

고민은 여기까지인데, 그래서, 그걸 넘어설 방법은? - 도저히 답을 못찾고 있다. 지금 당장은 하고 있는 활동 유지하기도 벅차다. 그 활동마저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주변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단위가 하나 둘 문닫더니 이제 내가 다니는 학교 밖에 남지 않았다. 푸념이 별로 도움될 일은 없지만, 그래도 한숨이 나온다. 처참한 현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버티는 일. 그래서 요즘은 학생회에 대한 고민을 접어두었다.

2009/12/16 00:25 2009/12/16 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