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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방

<외딴 방>을 읽었다. 기억하는 한 세 번째다. 처음 신경숙을 알고, 조용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까무룩,했던 고등학교때, 불면과 섭식장애를 동반한 우울증의 한 가운데서 비칠거리고 있었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그리고 이번. 청소년들을 위한 추천 서평을 쓸 요량으로 집어들었는데, 지금쯤이면 담담하게 읽어내려갈 줄 알았지, 숨이 턱턱 막힌다.

 

신경숙은 내 원시의 기억 중 하나다.

 

에쿠니 가오리나 전경린에게 하듯 그저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나의 첫 번째 글 선생님이고, 촌스럽고 끈끈하고 자꾸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가다. 신경숙을 떠올리면 유치하고 촌스러웠던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 쑥스러움과 흡사한 기분이 든다. 나에겐 그저 작가 신경숙,이 아니다. 신경숙으로 명명된 어떤 시간들이 내 생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녀의 <외딴 방>을 집어들 때에는 그냥-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어떤 그리움이나 막막함, 어찌할 수 없는 고독감들이 내 삶에 만연할 때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웁고 막막하고, 어찌할 수 업이 고독한가.

 

비단 지금만이 아니라 나는 삶의 태반이 고독하다. 이걸 꽤 어렸을 때 깨달았고 그닥 부정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쓴 기억은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달래었고, 달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리 이르게 철들지도 않았으리라. 부러 사람들과 만나가며 목소리를 높이고 떠들어대는 걸로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냥 담담히, 나는 고독했다. 열살때도, 열다섯살때도, 스무살때도.

어떤 사람은 외로움은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이고 고독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구분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나는 외롭기보다는 고독하고, 점점 더 단독자가 되어간다.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도, 친밀해지려는 욕구도 가슬거리는 입술의 거스러기같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와도 말하지 않으니 나의 바닥으로, 어둑한 계단을 따라 나의 지하실로 내려가고 싶다고 간구한다. 요즘은 그런 욕구가 더욱 승해 같이 사는 이마저 밖으로 내몰지 않으면 가슴팍이 갑갑하다. 저쪽 방 한구석에 기척도 내지 않고 조용히 머물 뿐인 그를 애써 인식하고 맘껏 편해지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도대체 내가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주어지는 거야! 나는 화를 낸다. 같이 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쁘지만 홀로 존재할 시간을 가지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욕구다. 순전히 미안함 때문에 나는 나의 욕구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던 것을 그친다. 미안한 것과 나의 욕구가 틀렸거나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스스로 내 욕구를 지나친 것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폄하하지 않고 미안해하면 되는 노릇이다. 그저 하루 단 몇 시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게 왜 이렇게 어렵고, 그저 너는 정해진 곳으로 출근해서 너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러면 나도 매번 아쉬운 소리 않고 편할텐데 왜 이렇게 매번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지. 내가 있어도 괜찮아,라고 물을 때마다 열 번에 네다섯 번은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정말 괜찮을 때는 많아야 한 번 정도다. 내가 널 그리워할 수 있게 해줘. 내가 널 애틋하게 대할 수 있게 해줘. 24시간 같이 있으니 미칠 것같아! 어느 날 내 안에 쌓인 갑갑함들이 나를 잠식하면 나는 너의 세간 따위를 집어던지며 제발 나가!라고 악다구니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은둔하려 하나

 

은둔에도 용기와 박력이 필요하다. 깜냥껏 용기와 박력을 부려보기에는, 해야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완전히 0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만은 아직 덜 되었다, 한다. 은둔하고 싶으나 은둔하고 싶지 않기도 한 것이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갔다. 뜻없이 비가 오고 궂은 날이 계속되어 가까운 시장에서 당장 먹을 것들만 사다가 날이 개었길래 나선 길이었다. 사실, 커다란 마트에 들어서면 나는 입구에서부터 좀 지치는 기분이다. 잔뜩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신을 사가라고 유혹한다. 소비가 곧 행복이라고, 무엇을 얼마나 사느냐가 곧 행복의 척도라도 되는 양 이걸 사면 행복해지고, 행복해지려면 저걸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선전과 유혹은 꽤나 달콤하고 강력해서 내가 사온 것들보다는 사오지 못한 (엄청난) 것들에 더 입맛이 쓰다. 아무리 사도 그 마트를 통째로 데려오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을 구하러 가나 결코 얻거나 충족할 수 없다. 이것이 대형마트의 딜레마.

 

이것저것 살 생각에 신날 때도 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언가 살기 위해 "사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다. 여지없이 두 손 가득 먹을 것, 소용할 것 등을 사들고 나올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그저 욕심부리지 않고 가볍게 살겠다는데도! 그래도 매번 한가득 사오고 만다. 지금쯤에는 그저 사는 데 이 정도는 필요한가보다, 하고 체념하고 있다.

이날은 메밀을 한 됫박 사왔다. 저녁을 먹고 갔는데도 군침이 돌아서 시식코너마다 들러 한 입씩 맛을 보던 참이었다. 곡식 같은 것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나의 시선을 포착한 아저씨는 메밀물을 작은 종이컵에 덜어준다. 뭔가 싶어 컵을 받아들고 마시는 동안 아저씨의 설명이 시작된다. 장에 열을 내려줘서 얼굴에 불긋불긋한 기운을 덜어준다고, 아가씨처럼 장이 더운 사람은 맵고 단 것을 피해야 한다고. 이걸 먹으면 변비도 싹 가시고, 피부도 좋아질 거라고. 불긋불긋한 기운과 변비가 가신다,는 말에 덥석 현혹되어 버린다. 빈 속에 두 숟갈, 밥 할 때 두 숟갈, 뜨거운 물 부어 우려도 먹고 간식으로도 먹으라 한다. 한 됫박만 달라 했는데 인심썼다며 한 됫박 가까이를 더 퍼준다. 그걸 사들고 와서는,

 

공복에도 먹고 간식으로도 먹는다. 생메밀은 아니고 굽고 어쩌고 해서 과자처럼 고소하다. 자꾸 씹으면 입 안이 약간 거끌거끌하지만 고소한 맛에 자꾸 먹게 된다. 지퍼락통 두 개에 나눠담고 생각날 때마다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이 고소한 메밀이 나의 예민한 피부와 장을 달래어줄 수 있을까.

 

두꺼운 <외딴 방>을 다 읽고는 문장들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실감한다. 신경숙은 이렇기에 나에게 그저 좋은 작가,가 아니다. 신경숙의 문장들은 나의 내면을 건드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고 무엇이든 쓰라고 충동질한다. 쉼표가 몇 번이고 거듭되는(이제는 촌스럽달 수도 있는 화법이지만) 그렇게 수식을 해도 장황하거나 화려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녀 특유의 문장들을 보면 심연의 한 쪽에서 쓰여져야 할/쓰고 싶은/쓰여지겠다고 주장하는 문장들이 하나씩 둘씩 떠오른다. 견디지 못하고,

 

나는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다. 주제도 목표도 없는 글.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이 턱턱 막힌다. 쓰여져야 하나 쓰여지지 못한 채 혈관 저 아래, 흉곽 어느 께에 가라앉아있는 문장들을 우리는 얼마나 지니고 살고 있나. 무겁고, 어둡고, 버거운 문-장-들. 우리 각자에게 놓여있을 외딴 방.

쇠스랑처럼 가라뜨리기엔 쉬웠으나 길어올리기엔 얼마나 힘이 겨운지. 그 힘겨운 줄다리기를 보고 있는 동안 내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쇠스랑 쇠스랑 쇠스랑. 조용하지만 높은 쇠울음소리가 들린다. 긴장한 어깨 근육이 아파온다. 용암처럼, 밑바닥에 또아리튼 용이 정수리를 뚫고 터져나오면, 그런 날엔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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