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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6/28
    사랑이 주는 모든 것
    昭瀾
  2. 2008/06/24
    너엄실 집단전에 놀러오솨요 :)(4)
    昭瀾
  3. 2008/06/18
    두드러기
    昭瀾
  4. 2008/06/11
    외딴 방
    昭瀾
  5. 2008/06/07
    정직(1)
    昭瀾
  6. 2008/06/05
    [제안] 0607 언니들의 액숀
    昭瀾
  7. 2008/06/04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불편한가"(4)
    昭瀾

사랑이 주는 모든 것

당신을 위해 내가 이렇게..

이 문장에서 눈이 떠나지 않는다.

 

예전에 그랬듯이 사랑할 때 누구나 다 하는 말이라고 도리질해낼 방법이 없다. 냉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저 주면 주는 대로 받아들이기, 상처든 따뜻함이든 그것이 내가 이 사랑에서 배운 것이다.

사랑은 그저 감정일 뿐이라 확신이라거나 약속 같은 건 무용할 뿐이라고 여전히 믿어도(왜 이런 건 알지 않으면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 다만 나는 내가 이제 더는 사랑이 주는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는가,를 조금쯤은 더 알게 되었으니까.

 

 

일전에 쓴 정체 모를 두드러기는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면역력이 약해졌으니 무조건 쉬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아르바이트도 중단했다. 아르바이트를 안하는데도 이래저래 일이 많아 매일같이 외출을 하게 된다. 몸이 고단하고 에너지가 낮은 상태인데도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이야기하고 그러는 게, 신기하다. 이 사람들을 만나면 충전이 되는 게야 그런 마음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몸에 밴 관성인 것같기도 하다. 바짝, 정신 차리고 미소가면 하나 덧쓰는 거다. 뭘 그렇게까지 용을 쓰시나, 내가 짠해지는 순간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바깥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면 너무 힘이 들어서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같다. 그 좋아하는 춤도 마음이 일지 않고, 내 가장 좋은 충전방식인 책읽기도 기력이 딸려-_- 못하겠다. 그런데 쓰는 것,만은 어떤 순간에 참을 수 없이 쓰고 싶다. 축 늘어져서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아방가르드한 장면.

 

 

일찍부터 조로했던 나는 편한 마음으로 응석을 부려본 기억이 없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살폈다. 내가 좀 수고로운 게 남한테 마음 쓰는 거보다 차라리 낫고, 사랑받고 살아남기 위한 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발병-_- 후 맘껏 응석을 부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뭘 이런 걸 다). 생각날 때마다 애인에게 환부를 보여주며 경과를 살펴주도록 한다. 한 번쯤 귀찮을 법도 한데 너무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핀잔 줄 법도 한데 매번 놀라며 마음 아파해준다. 그런 게 또 내 마음을 데우고,

 

나는 지금 내 지나간 날들을 위로받고 있다는 걸 알아.

사랑받았어도 사랑받는 줄 몰랐던

열을 받으면 나머지는 손으로 다 쳐내고 두서넛 정도만 집어들고 품고 절대 놓아주지 않던,

그래서 끊임없이 차갑고 목이 마르던.

 

 

 

내가 그 시간들에서 조금씩 걸어나가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르나,

보이는 풍경이 그걸 느끼는 내 속이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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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엄실 집단전에 놀러오솨요 :)

저의 저질 사운드아트도, 여기에.

아고.

블로그 femiwave.tistory.com 에도 꼭 한번 들러보솨요. 재밌다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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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러기

같은 것이 났다.

그것도 왼쪽 허벅지 위쪽에만.

처음엔 조그맣게 발긋발긋하더니 지금은 약간 커져서 손바닥 절반 크기만큼 불긋거린다. 걸을 때나 앉아있을 때 거기가 우리하고 당기는 듯한 통증이 있다.

 

 

지난 번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긋한 것들이 배며 다리에 올라왔다 가라앉은 적이 있다.

그 전날 저녁으로 먹은 고깃국이 잘못이었나 싶어 아는 의사에게 물어보니 먹어서 탈이 났다면 먹자마자 바로 두드러기가 올라왔을 거라고 한다.

침을 맞았더니 한층 더 심해져서 기겁을 시키더니 그 다음날 싹 사그라들었다.

 

 

몸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나 생각했다. 

 

 

이번에는 좀더 특이하게 한쪽 허벅지에만.

더 넓게 퍼지진 않는 것같아 다행인데 미묘한 통증이 있어 걱정스럽다.

이런 것도 생리통의 일종인가?

안그래도 생리통이 심한 편인데 이번에는 더욱 독해서 왼쪽 골반이 얼얼할 지경인데 이것이 그것과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정말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나.

이럴 때면 몸도 참 갑갑하겠지 싶다. 글로 쓰거나 좀 알기 쉬운 걸로 내색해주면 저도, 나도 수월할텐데 알 수 없는 두드러기만 올라오니 의아할 따름이다.

내 몸인데, 이럴 때는 참 알 수도 없고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신기해서 자꾸 들여다보기만 한다. 그냥 밥 잘 먹고 씩씩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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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방

<외딴 방>을 읽었다. 기억하는 한 세 번째다. 처음 신경숙을 알고, 조용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까무룩,했던 고등학교때, 불면과 섭식장애를 동반한 우울증의 한 가운데서 비칠거리고 있었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그리고 이번. 청소년들을 위한 추천 서평을 쓸 요량으로 집어들었는데, 지금쯤이면 담담하게 읽어내려갈 줄 알았지, 숨이 턱턱 막힌다.

 

신경숙은 내 원시의 기억 중 하나다.

 

에쿠니 가오리나 전경린에게 하듯 그저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나의 첫 번째 글 선생님이고, 촌스럽고 끈끈하고 자꾸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가다. 신경숙을 떠올리면 유치하고 촌스러웠던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 쑥스러움과 흡사한 기분이 든다. 나에겐 그저 작가 신경숙,이 아니다. 신경숙으로 명명된 어떤 시간들이 내 생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녀의 <외딴 방>을 집어들 때에는 그냥-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어떤 그리움이나 막막함, 어찌할 수 없는 고독감들이 내 삶에 만연할 때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웁고 막막하고, 어찌할 수 업이 고독한가.

 

비단 지금만이 아니라 나는 삶의 태반이 고독하다. 이걸 꽤 어렸을 때 깨달았고 그닥 부정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쓴 기억은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달래었고, 달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리 이르게 철들지도 않았으리라. 부러 사람들과 만나가며 목소리를 높이고 떠들어대는 걸로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냥 담담히, 나는 고독했다. 열살때도, 열다섯살때도, 스무살때도.

어떤 사람은 외로움은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이고 고독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구분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나는 외롭기보다는 고독하고, 점점 더 단독자가 되어간다.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도, 친밀해지려는 욕구도 가슬거리는 입술의 거스러기같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와도 말하지 않으니 나의 바닥으로, 어둑한 계단을 따라 나의 지하실로 내려가고 싶다고 간구한다. 요즘은 그런 욕구가 더욱 승해 같이 사는 이마저 밖으로 내몰지 않으면 가슴팍이 갑갑하다. 저쪽 방 한구석에 기척도 내지 않고 조용히 머물 뿐인 그를 애써 인식하고 맘껏 편해지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도대체 내가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주어지는 거야! 나는 화를 낸다. 같이 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쁘지만 홀로 존재할 시간을 가지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욕구다. 순전히 미안함 때문에 나는 나의 욕구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던 것을 그친다. 미안한 것과 나의 욕구가 틀렸거나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스스로 내 욕구를 지나친 것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폄하하지 않고 미안해하면 되는 노릇이다. 그저 하루 단 몇 시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게 왜 이렇게 어렵고, 그저 너는 정해진 곳으로 출근해서 너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러면 나도 매번 아쉬운 소리 않고 편할텐데 왜 이렇게 매번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지. 내가 있어도 괜찮아,라고 물을 때마다 열 번에 네다섯 번은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정말 괜찮을 때는 많아야 한 번 정도다. 내가 널 그리워할 수 있게 해줘. 내가 널 애틋하게 대할 수 있게 해줘. 24시간 같이 있으니 미칠 것같아! 어느 날 내 안에 쌓인 갑갑함들이 나를 잠식하면 나는 너의 세간 따위를 집어던지며 제발 나가!라고 악다구니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은둔하려 하나

 

은둔에도 용기와 박력이 필요하다. 깜냥껏 용기와 박력을 부려보기에는, 해야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완전히 0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만은 아직 덜 되었다, 한다. 은둔하고 싶으나 은둔하고 싶지 않기도 한 것이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갔다. 뜻없이 비가 오고 궂은 날이 계속되어 가까운 시장에서 당장 먹을 것들만 사다가 날이 개었길래 나선 길이었다. 사실, 커다란 마트에 들어서면 나는 입구에서부터 좀 지치는 기분이다. 잔뜩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신을 사가라고 유혹한다. 소비가 곧 행복이라고, 무엇을 얼마나 사느냐가 곧 행복의 척도라도 되는 양 이걸 사면 행복해지고, 행복해지려면 저걸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선전과 유혹은 꽤나 달콤하고 강력해서 내가 사온 것들보다는 사오지 못한 (엄청난) 것들에 더 입맛이 쓰다. 아무리 사도 그 마트를 통째로 데려오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을 구하러 가나 결코 얻거나 충족할 수 없다. 이것이 대형마트의 딜레마.

 

이것저것 살 생각에 신날 때도 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언가 살기 위해 "사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다. 여지없이 두 손 가득 먹을 것, 소용할 것 등을 사들고 나올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그저 욕심부리지 않고 가볍게 살겠다는데도! 그래도 매번 한가득 사오고 만다. 지금쯤에는 그저 사는 데 이 정도는 필요한가보다, 하고 체념하고 있다.

이날은 메밀을 한 됫박 사왔다. 저녁을 먹고 갔는데도 군침이 돌아서 시식코너마다 들러 한 입씩 맛을 보던 참이었다. 곡식 같은 것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나의 시선을 포착한 아저씨는 메밀물을 작은 종이컵에 덜어준다. 뭔가 싶어 컵을 받아들고 마시는 동안 아저씨의 설명이 시작된다. 장에 열을 내려줘서 얼굴에 불긋불긋한 기운을 덜어준다고, 아가씨처럼 장이 더운 사람은 맵고 단 것을 피해야 한다고. 이걸 먹으면 변비도 싹 가시고, 피부도 좋아질 거라고. 불긋불긋한 기운과 변비가 가신다,는 말에 덥석 현혹되어 버린다. 빈 속에 두 숟갈, 밥 할 때 두 숟갈, 뜨거운 물 부어 우려도 먹고 간식으로도 먹으라 한다. 한 됫박만 달라 했는데 인심썼다며 한 됫박 가까이를 더 퍼준다. 그걸 사들고 와서는,

 

공복에도 먹고 간식으로도 먹는다. 생메밀은 아니고 굽고 어쩌고 해서 과자처럼 고소하다. 자꾸 씹으면 입 안이 약간 거끌거끌하지만 고소한 맛에 자꾸 먹게 된다. 지퍼락통 두 개에 나눠담고 생각날 때마다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이 고소한 메밀이 나의 예민한 피부와 장을 달래어줄 수 있을까.

 

두꺼운 <외딴 방>을 다 읽고는 문장들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실감한다. 신경숙은 이렇기에 나에게 그저 좋은 작가,가 아니다. 신경숙의 문장들은 나의 내면을 건드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고 무엇이든 쓰라고 충동질한다. 쉼표가 몇 번이고 거듭되는(이제는 촌스럽달 수도 있는 화법이지만) 그렇게 수식을 해도 장황하거나 화려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녀 특유의 문장들을 보면 심연의 한 쪽에서 쓰여져야 할/쓰고 싶은/쓰여지겠다고 주장하는 문장들이 하나씩 둘씩 떠오른다. 견디지 못하고,

 

나는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다. 주제도 목표도 없는 글.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이 턱턱 막힌다. 쓰여져야 하나 쓰여지지 못한 채 혈관 저 아래, 흉곽 어느 께에 가라앉아있는 문장들을 우리는 얼마나 지니고 살고 있나. 무겁고, 어둡고, 버거운 문-장-들. 우리 각자에게 놓여있을 외딴 방.

쇠스랑처럼 가라뜨리기엔 쉬웠으나 길어올리기엔 얼마나 힘이 겨운지. 그 힘겨운 줄다리기를 보고 있는 동안 내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쇠스랑 쇠스랑 쇠스랑. 조용하지만 높은 쇠울음소리가 들린다. 긴장한 어깨 근육이 아파온다. 용암처럼, 밑바닥에 또아리튼 용이 정수리를 뚫고 터져나오면, 그런 날엔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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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

적당히 흘려보낸 것들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비슷한 허방에 빠지는 방식으로. 그때 적당히 힘들어하고 지나간 것들을 확실히 내 것으로 익히지 않으면 삶은 단 한 발도 디디지 않는다. 그때, 설익은 채 잘 보살펴주지 않고 흘려보냈던 패배감이나 억울함 같은 것들은 결국 이렇게 맞닥뜨리게 된다. 직면하고, 몸을 낮추고 또 낮추어 바닥 끝까지 내려가 내 것으로 받아안지 않으면. 한두 개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어도 좋을 것을. 덤도 없고 설렁설렁,도 없다. 이 악물고 걸어내는 것말고는 수도 없다.

 

 

생은 참으로 아플 정도로 정직하다.

내게 주어진 생의 꼴을 아슬아슬하게, 담담하게, 걸어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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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0607 언니들의 액숀

녀름님의 포스팅을 보고 저도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습니다.

 

 

녀름님이 제안하신 두 가지 액숀 모두 의미가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다이인도 좋아요.

밟고 지나가면- 끄으응.

다만 예비역들의 "보호"에 대한 우리의 메시지가 충분히 잘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조금 조심스러워요.

언제까지나 계속 "설명"해주어야 하는 건 정말 고역스럽고, "됐거든"하고 한마디 하면 자기들이 좀 성찰도 하고 생각도 해보고 그러면 좋을텐데 그게 잘 안되면 또 다시 달군님 블로그에서 보듯 저런 난동짓 난리들밖에-_-

(다음에 나 안나갈 거야 라든가 너는 안지켜줄 거야,라는 류의 댓글들을 보면 정말 쩔어요 쟤네 진짜 어쩔-_-)

 

대중적인 액숀이고 거리에서 이뤄지다 보면 섬세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오해 받아서가 아니라 분통이 안풀려서) 짜증날 것 같아요.

이걸 어떻게 좀더 효과적이고 속 시원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보아야겠어요!

구호를 쓴다면 어떤 걸 쓸지. 다이인을 하는 동안 좀더 명확하게 우리의 의견을 제시할 보조 수단은 뭐가 있을지 등등.

저는 앞에서 쓴 대로 여기가 다양한 이슈가 자유롭게 논의되는 장,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군요.

 

 

또 라디오 액숀도 해보고 싶어요.

집회 현장의 소리들을 담아보기도 하고, 참가한 언니들 주변 반응들을 한마디씩 따보는 것도 좋을 듯하구요.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아무 말이나 해보는 것도 좋겠구요.

노가바한 노래들도 녹음해보고 등등등등.  

 

흣 좀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액숀이라,

또 가슴이 뛰는군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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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불편하다&quot;고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quot;불편한가&quot;

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가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들여오느냐 마느냐,의 "단일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단순하다면 "내가" 안먹으면 된다. 싫은 사람이 조심하고 피해서 미국산 쇠고기 안먹으면 그걸로 그만,이라는 건 우스운 주장이지만 가능하지도 않은 얘기다. 생산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은 식당이나 공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미국산 쇠고기를 원료로 사용하고 싶어할 것이다. 원산지를 국산이라고 거짓으로 표기해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다(지금도 숱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자본이 미덕의 꼭지점에 올라앉아 있는 사회에서 비단 개별 식당이나 공장 주인들의 이기심만 비난할 수 있을까. 비난할 수 있긴 한데 그걸로 해결되는 건 무엇이 있나.
(서민들이 비싼 쇠고기 많이 먹게 됐으니 좋아할 일 아니냐고? 헐.)

미국산 쇠고기의 가격이 낮은 것은 "대량 생산"되기 때문이고, 인간들은 고기를 많이 얻기 위해 기꺼이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물만 먹인다든가, 어린 송아지들이 많이 움직이면 고기가 질겨지니까 움직일 공간조차 없는 좁디 좁은 우리에 가둬놓는다거나. 광우병의 원인이라고 알려진 동물성 사료도 이걸 먹이면 소들이 살도 잘 오르니 축산업자들이 마다하지 않고 먹였다.
닭이나 돼지도 마찬가지고, 이러한 폭력은 미국의 일만도 아니다.

가축을 기르고 도살하는 방식과 그들을 그렇게까지 꼭 먹어야 하는지 등의 물음이 가능하다. 전세계적으로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호되는 그 "폭력"에 대해 대항할 수 있다(고 하면 뭔가 대단한 걸 생각하던데 의문을 제기하는 것부터 대항은 시작된다).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구호를 보면 가끔 숨이 턱 막힌다(라고 하면 또 그 구호 만든 분들께선 내 진심을 몰라줬다고 화내실 건가요?). 내가 안먹고 너만 먹으면 괜찮은 것도 아니고(이런 뜻으로 만들었다고는 저도 생각지 않아요 하하), 그냥 "미친 소"를 안먹으면 그만인 것도 아니다. "미친 소"라는 명명도 소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다. 누가 그 병을 만들어 냈는가. 왜 그런 문제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무엇이든 "많이" "빠르게" "생산"해내야 좋은 거라고 자연스럽게 믿고 있는가.
이렇게, 최상의 미덕으로 이야기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봉에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번 미국과의 협상에서 정부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고기를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복해 선전했다. 어떤 전문가들은 다른 주장을 했고, "과학적 근거"도 제시했다.
정부는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문제가 있고 없고도 중요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나왔을 때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도 중요하다. 그저 일부 전문가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리고는 다른 사람들 무서운 줄 모르고 하고 싶은 건 하겠다(내지는 해야 하는 건 하겠다, 였을까?)고 고집을 부렸으니 이 지경까지 온 거다.
(그걸 "이명박 대통령의 추진력 또는 고집"이라고 불러선 안된다. 그런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에 '추진력'은 물론이거니와 '고집'이라는 단어도 아깝다. 제대로 명명해주어야 한다. 그건 오만불손한 독선이고 아집일 뿐이다.)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연일 이어지고 나서야 "그게 국민의 뜻이라면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수입 않겠다"고 말한다. 국정브리핑을 보고 그야말로 헐-인 심정이 됐다. 그걸 이제까진 몰랐냐는 거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니 겨우 알아듣는 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신과 다른 주장이나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애당초 귀 기울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집회를 폭력적으로 막고, "집회가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자유민주주의의 질서를 흐뜨린다"고도 호도할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든다. 나는 각자가 가진 다양한 고민의 지점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논의되는 자리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 쓴 종이 카드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들은 휠체어를 타고 나오고, 어떤 사람들은 유모차를 끌고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군복을 입고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주저앉아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의사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고,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의 폭력적인 집회 해산에 분노하는 것도 이런 최소한의 믿음 때문 아닌가.)

자유롭게 이뤄지다 보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무리에서 "이끄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킁). 여기로 가보자 저렇게 해보자 동을 뜨거나,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이러저러하게 움직이자고 택을 짤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의 자유고, 그것에 응하든 응하지 않든 철저히 각자의 자유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위험하고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까 저렇게 해보자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안이어야지, 명령이나 일방적인 지도일 수는 없다.
자신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희생하고" 있기 때문에 명령하고 지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일 뿐이다. "보호"라는 "아름다운" 이유를 대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대해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 당신은 명령하고 지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왜 그렇게까지 "불편한가". 어떤 행동에 대한 느낌을 말하고,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증오와 멸시의 대상"으로 만든 것인가. 선의로 한 것이니 조금의 불평도 하지 말라는 것은 지금 이명박 정부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게 도대체, 본심을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할 문제인가.
(이에 관해 이야기했던 달군의 블로거에는 "호의를 몰라주는 것도 나쁘다"는 댓글도 달려있다. 호의라는 건 어차피 자기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도 호의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이런 목소리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와 나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소통할 수 있지,라고 논의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다못해 아 "나는 보호해주려고 했는데 상대는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구나" 정도라도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적어도, 차이를 존중하고 소통할 의지가 있다면.

여기서 스크럼 짤 때 여자들은 힘이 없어서 방해만 된다(헐-_-)라든가 사수대가 필요하냐 아니냐 등의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위계와 통제에 관련되어 더 논의해볼 수 있다.
우선은 집회를 하러 온 시민이 국가 권력과 대응해 힘으로 부딪혀야만 하는 근본적인 부조리가 있고, 여기에 대항할 때 육체적인 힘에 따른 우열이 생긴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고, 누군가는 배제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결코 둔감해지지 않는 것일 게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들은 뒤로, 사수대는 앞으로!"로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부분들을 당연하다거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놓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애쓰는 건 또 어떻게 하자는 거냐? 그건 같이 고민해보고 얘기해보면 된다. 똑 떨어진 답을 내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논의해볼 수는 있다.


나는 이런 모든 종류의 논의들이 이번 촛불집회를 통해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데 이런 문제 제기로 힘 뺀다는 주장에는 코웃음도 치지 않겠다. 더 많은 힘을 모으기 위해 이런 소통과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같은 편끼리(누가 누구와 같은 편이란 말인가) 욕하면서 분열시킨다"는 말로 이런 소통과 논의를 막으려는 발상이야말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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