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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22
    독립영화에 대해서...
    독립영화비평
  2. 2007/06/22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이경순, 2006) 발제문...
    독립영화비평

독립영화에 대해서...

독립영화(다큐멘터리)는 독립해야 하는가? 안창현 (영상이론 3) 영화 매체는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를 보여주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려 하든 카메라가 존재하는 한 찍혀진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앵글을 선택해서 어떤 사이즈로 보여주는가에 따라, 또한 렌즈나 조명 등 그 밖의 많은 요소들에 의해서, 그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영화 매체는, 그래서 다큐멘터리적이다. 빌 니콜스의 말대로, 모든 영화는 얼마간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겠다. 다큐멘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허구의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고, 다큐멘터리는 찍는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우리는 흔히 믿게 된다. 영화는 분명 매체 그 자체로 그러한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고,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생각해 보았을 때 사실, 영화만큼 그것에 잘 어울리는 매체는 없을 것이다. 극영화나 실험영화와는 다르게 다큐멘터리에서 유독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쟁점들이나 영화의 진정성이 중요한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영화에서의 카메라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다는 생각과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큐멘터리는 감춰진 자리를 비추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함께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자리, 그 속의 사람들을 비추는 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아니, 다큐멘터리라는 특정한 장르에만 그러한 기능이 주어진다는 것보다, 이는 카메라 자체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들이 흔히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일상화된 시선으로 자연스럽게만 바라보는 주변의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카메라다. 카메라라는 객관적 기계 장치에 의해 찍혀진 것들을 이렇게 다시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자연스런 일상의 모습으로 무심히 지나쳤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거나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일 수도 있다. 우리들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회의 이면을 비춰주는 것, 이러한 카메라의 기능은 우리에게 카메라의 윤리적 측면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이는 논픽션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게 되는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극장에서 상영되는 주류의 대중적인 극영화에서도 사실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원래 무언가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 사람은 그 안에 찍히는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윤리가 필요한 것 아닐까? 물론, 카메라로 찍혀진 현실이 그것 자체로 진실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그럴 것이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을 표방한다고 하는 것, 그래서 그 영화가 우리들 현실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영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현실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리얼리즘이 반영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이미지이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다큐멘터리적인 효과, 현실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그 현실 효과를 특징으로 할 수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 자체로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악의적으로 왜곡의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현실의 진실을 드러내려 한다고 해도, 최소한 그것은 현실의 어떤 측면만을 드러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영화 속에 표현된 작가의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분명 영화를 통해서 작가의 진정성을 느낄 수도 있을테지만, 그 힘겨운 환경 속에서 전력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진정성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그 진정성이 진실을 보증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진정성이 거짓과 비극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자행한 나치에게서 진정성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큐멘터리가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큐멘터리들을 어떤 진실의 모습으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 도대체 영화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진실이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 어떨까? 아마도 많은 진실들 중에 하나를 다큐멘터리들은 겨우, 간신히 드러내려는지도 모른다. 영화 한 편이 온전히 그 진실 전체를 드러낼 수는 없다.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다큐멘터리들을 본 우리들 관객이 아닐까? 혼란스런 현실 속에 어떤 진실을 담으려는 다큐멘터리는 현실 속의 남겨진 진실들을 온전히 관객들의 몫으로 남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다큐멘터리의 가치이고 진짜 힘일 것이다. 진실은 이것이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대해 다양한 진실들을 드러내고 환기시키는 힘 말이다. 독립(다큐멘터리)영화는 독립해야 하는가? 우리는 자본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다큐멘터리들이 독립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에 기생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독립영화는 자본에, 권력에 당당히 기생해서 자신의 다양한 모습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도처에 있는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영화가 왜 독립해야 하나? 독립영화는 어디에서도 독립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자본과 권력의 숙주에 기생하면서, 그 거대한 숙주에서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당당히 피 빨아먹으며, 독립영화는 그렇게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있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른다. 숙주가 빈혈로 쓰러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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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이경순, 2006) 발제문...

"빨간눈사람"이 <쇼킹 패밀리>를 이야기하다 안창현 (영상이론 3) Ⅰ. "빨간눈사람"은... 독립프로덕션 빨간 눈사람은 1998년 4월 20일 창립되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항상 난감한 일입니다. 때문에 "빨간눈사람"에 대한 소개를 우리의 "영화 선언"으로 대신합니다. Ⅱ. "빨간눈사람"의 영화 선언... 우리의 인습, 제도가 완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억압하고 우롱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내)가 영화(저술)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리는 날까지 이 정신과 작업은 지속될 것이다. - 미셸 푸코의 1971년 어록을 재구성함 우린 억압없는 세상, 차별없는 세상, 착취없는 세상, 편견없는 세상,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 꿈을 실현하는 도구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영화"다. - 빨간눈사람의 오리지널 어록 Ⅲ. 우리의 적과 현실... 1. "CONTACT"를 믿지 않는 오만한 인간 우주인에 대한 일체의 편견과 조장된 적개심을 경계하고자 한다. 생명과 자연의 가능성을 짓밟고 서려하는 인간의 오만함은 가장 우려할만한 파시즘이다. 우리는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인간으로서 우주를 동경한다. 우리는 우주 곳곳에서 문명을 번창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지켜보고 있을 그들에게 살아있는 자로서의 우정을 표시하고자 한다. 2. 자연을 잠식하는 문명인들 문명과 자연의 이원론적인 인식이 지구전체의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칭하는 낯 뜨거운 왕자병, 人本主義라 부르는 我田引水격 가치관의 썩어가는 속내를 보여주고자 한다. 3. 성과 인종을 차별하는 자들 유색인종, 소수인종, 국외자들의 차별은 모순의 적나라함으로 인해 쉽게 인식하고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차별보다도, 지능적이고 조직적이며 일상적인 차별이 여성에 대해 작동되고 있다. 인류의 절반에 대한 노예화에는 어떻게 이처럼 관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류의 절반이 가해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4. 제3세계의 식민지화에 열 올리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와 문화를 앞세워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오는 제국주의를 우리는 경계한다. 전 인류의 2/3가 그 나머지 인류의 포식을 위한 식민지가 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5. 한국이라는 미친 개 애국, 혹은 민족, 윤리란 미명하에 자행되는 전 국가적 규모의 비이성적인 광기가 우리를 당혹케 한다. 파쇼적인 극우와 완고한 보수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이 땅의 현실을 마냥 함구하고 지켜볼 수는 없다. Ⅳ. 우리의 믿음과 자세... 1.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또한 세상은 영화로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의식과 기술과 자본으로 생산되는 "영화"란 매체는 우리의 지적, 정서적 환기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는 변혁을 도모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세상이란 거대한 유기체는 수많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란 화학작용으로 생성, 변화해 가기에 "영화"란 일개 매체 하나만으론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하고도 낭만적인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많은 역활과 매체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선택한 "영화"란 무기로 발언하고 변혁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믿는다. "카메라를 무기 삼아"란 낡아 보이는 수식이 우리에겐 여전히 유효하다. 2. 우리는 "독립영화"를 만든다. 우리가 믿는 독립영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 그리하여 작가의 창작정신이 작업 전 과정에 걸쳐 온전히 살아있는 영화" 3.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 자신은 이러한 구분을 모른다. 태초에 영화가 있었고 후세사람들이 형식을 규정지었다. 하지만 영화란 존재 자체는 규정지워진 형식을 비웃으며 스스로 자유로이 발전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나 "픽션"을 만들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 뿐이다. 4. 전술은 바뀐다. 전술의 변경은 언제든 가능하다. 본 영화선언정신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5. 문제는 다시 "자기로부터의 자유"다. 스스로를 깨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습과 체제속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내부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다.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 자가 떠드는 자유는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몇 십년에 걸쳐 자신에게 거짓 입력된 가치를 깨부수는 아픔을 감내하고자 한다. 6. 적과 현실앞에 겸허해 진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적을 보지 못하고선 내부에 더 큰 적을 키우게 된다. 적과 현실 속에서 스승과 교훈, 그리고 전술을 찾는 자세만이 진정한 변혁의 싹을 틔우게 될 것이다. 7. 우리는 싸움꾼임과 동시에 창작인이다. 또한 "우리"에게 "영화"는 무기임과 동시에 작품이다. "우리란 주체"와 "영화란 객체"의 정체성에 관한 이러한 양면은 함께 공존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할 뿐 아니라 진실이 아니다. 이 인식은 곧 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내용이 형식이고 형식이 내용이라는 익히 들어온 얘기는 여전히 진부한 것이다. 진보적 내용은 진보적 형식을 필요로 한다. 형식의 변혁은 내용의 변혁을 수용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창작의 제1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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