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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단편영화산책>에서 보는 독립영화에 대한 비평문을 모으고, 독립영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모아보는 곳입니다.

5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12
    <대추리 전쟁>을 보고 - 김현선
    독립영화비평
  2. 2007/06/09
    <대추리 전쟁> - 박선영 리뷰
    독립영화비평
  3. 2007/06/08
    <우리는 정의파다> 박선영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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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6/07
    <쇼킹 패밀리>에 대한 리뷰 - 김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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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6/07
    <쑈킹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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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6/06
    <쇼킹패밀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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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5/31
    <파산의 기술>에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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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5/31
    파산의 기술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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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5/30
    파산의 기술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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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5/17
    <우리는 정의파다>에 대한 질문 - 김현선
    독립영화비평

<대추리 전쟁>을 보고 - 김현선

<대추리 전쟁>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ㅡㅡ;;(간절하게 요구되는 이모티콘)'였다.

다시 말해,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자본주의'에 맹렬하게 봉사하던 우리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대추리 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사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건 그냥 '코메디'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그리고 그렇게 그냥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의 근거는 바로 그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법치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국민의 사유지를 강제로 매입할 수 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법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 그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 답을 구하는 일이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대추리 전쟁의 원인인 미군기지 이전이 이 나라의 무엇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하지 않고 버려둔 것은 무엇인지,

그 답을 구하는 일이 되겠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답은 너무 자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선 탄식에 이어 다시 한 번

''법'이라고 하는 것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ㅡㅡ;;'라고 생각하며,

 

사람이 국가 안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 길은

그저  '안개 속의 풍경'에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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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전쟁> - 박선영 리뷰

 
약육강식

- <대추리 전쟁>/ 정일건 감독/ 2006

 


박선영

 

 약육강식 법칙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약자는 언제쯤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대추리 전쟁>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2003년부터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대추리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논밭 옆에 미군 기지가 세워졌을 때 국가가 하는 일이니까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살아갈 땅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논밭을 빼앗지 않는 이상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국가는 그들에게 미군기지 확장을 주장하며 대추리를 떠나 땅을 비워 줄 것을 요구했다. 갈 곳도 갈 돈도 없었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가를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한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그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들의 투쟁은 4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배고팠을 시절, 그들이 도와줬으니까 땅도 내주고 했지만 이제는 빚 다 갚았어. 그러니까 나가라고 해. 죽든 말든 이제는 우리끼리 알아서 해.

국가에서 다른 좋은 일 하는 것이면 기꺼이 돕겠지만 미국 놈들 돕는 거면 절대 안 돼.

 


세월의 흔적을 얼굴 위 깊은 주름으로 고스란히 간직한 할아버지들은 말한다. 그들은 요즘 세대와는 다르게 전체주의, 애국주의를 운운하며 평생을 국가를 위해 살아왔다. 그들은 국가가 지은 빚을 자신의 빚처럼 생각하며 언제나 빚쟁이 같은 심정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야 그들은 허리 좀 피고 살아 보려고 하지만 나라는 그들을 도와주지도 보호해주지도 않는다. 늙고 힘 없는 그들에게 국가가 보여주는 태도는 고마움은 커녕 배은망덕함이었다. 누가 지켜 온 국가이며, 누구를 위한 국가인데 국가는 그 누구를 간과하고, 돈 있고 힘있는 자에 의해, 강한 자를 향해 굽실거리며 휘둘리고 있으니 여기서 비롯되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내 땅 내가 지킨다는데 왜 지랄들이여.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곡식 밟지마. 곡식 밟으면 너희들 가만 안 둘꺼야. 밟기만 해.

 


그들이 애써 가꿔 온 생명이, 삶의 터전이 전경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전경들은 풀조각을 밟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대추리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모든 삶이 짓밟히는 것과 같다. 그들의 투쟁은 살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늘 그렇듯이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잡아 먹히더라도 당당히 싸우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강자와 타협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추리의 160가구 가운데 16가구가 그러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대통령 빽이라도 안 돼.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고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거야.

국가가 있은 다음에 내가 있지. 국가가 없어봐. 내가 존재할 수 있나.

 


하지만 한 입 가지고 두 말하는 정부는 그들 마저 잡아 먹고 만다. 타협하면 잡아먹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은 국가의 뒤통수 때리기 작전에 휘말리고 말았고, 그들은 정말로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국가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땅을 빼앗겨야 하는 현실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단 농성에 들어간다. 할머니들은 6살짜리 꼬마 아이가 부르는 투쟁 노래 앞에서 마냥 즐겁다. 그들은 힘든 삶을 웃음으로 견뎌온 것처럼 힘든 투쟁 또한 웃음으로 견딘다. 하지만 웃음은 이내 억장이 무너지는 눈물로 변하고 만다.

 


다리가 떨려서 못 서있겠어(I can't stay here).

 


서울까지 먼 걸음을 한 대추리 마을의 한 할머니는 촛불시위 현장에서 꺼질 듯 흔들리는 촛불처럼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린다.

자본주의의, 산업사회의 무시무시하고도 잔인한 손, 포크레인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는 나무 앞에서, 폐교 앞에서 대추리 사람들 역시 처참히 무너진다. 포크레인이 끊어버린 것은 나무가 아닌 대추리 사람들의 생명이었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한 땅, 대추리를 떠나는 사람들. 이제 대추리에는 60여개 가구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들 역시 언제 떠날지는 모를 일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평화 운동가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빈자리를 메꾸고 있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타협할 수 없어 보이는 대추리는 버려져 가고 있었다.

2007년 3월, 대추리는 미군기지 확장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합의하에 공동 이주를 했다. 이렇게 강자는 손쉽게 약자들을 물리치고 땅따먹기에서 승리했다.

강자들의 땅따먹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 약자가 사라져 버린 곳에서 강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봄,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다.

여름,

새싹이 자라다. 그러나 힘들게 자란 그것들은 이내 짓밟히고 만다.

그러나 가을,

살아남은 벼들은 잘도 자라 수확된다.

겨울,

언제 또다시 짓밟힐지 모르는 그 땅에 또다시 씨를 뿌려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들은,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대추리 영농학교를 개설하여 다음 해를 준비한다.

또다시 봄,

삭막한 땅에 씨를 뿌린다.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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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의파다> 박선영 리뷰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처럼

- <우리는 정의파다>/ 이혜란 감독

 

박선영


 

 1970년대, 수많은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갔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들은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한 가족들을 위하여 그들은 그나마 다니고 있던 학교도 그만둬야 했고,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순이’ 정도밖에는 없었다.

 영화 <우리는 정의파다>는 이러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똥투척 사건’으로만 알려져 있는 동일방직 여공들의 복직 투쟁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동일방직이 당시 어떤 회사였는지, 그 회사에서 여공들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차별을 없애기 위해 그들은 어떻게 싸웠는지, 그 싸움에서 어떻게 해고되었고 복직을 위해 지금도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보여준다.

 1978년 4월 1일, 동일방직 사장 서민석은 124명의 여성 노동자를 강제 해고 시킨다. 그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였다. 사장 서민석을 비롯한 동일방직의 남성들은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권력에 감히 여자가 도전장을 내밀고, 평등을 주장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성들이 노동조합을 구성하고 그들의 여성 대표를 뽑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며 온갖 수단을 사용해서 그들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 시절 수많은 여성들은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식사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며 엄청난 일들을 소화해내야 했다. 그들은 “16살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키가 자랐고”, 한 달에 7Kg씩 빠져가며 일했다. 그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하며 일해 왔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대우 받아야 할 권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힘들게 획득한 것은 30분 정도의 식사 시간뿐이었다. 그들은 힘들게 획득한 권리를 조금 더 보장받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똥물’ 뿐이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남성이란 동물들은 여성의 입과 귀에 똥물을 쑤셔 넣었고, 그들의 일터를 똥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식해서 잔인한, 치사함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남성들의 이러한 만행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 일을 겪지 않은 나조차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다. 자신들의 아내요, 어머니이자 딸인 여성들을 같은 인간으로서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권위를 일정 부분 공유하자는 것뿐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사나운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내야만 했을까.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아야만 했을까.

 “모르고 바보처럼 사느니 알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어느 여성 노동자의 말처럼 이대로 물러설 여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신력은 남성들의 그것보다 강했다.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녀들은 투쟁하고 있다.

 무식했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무지했던 그녀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당당히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외치고 있었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처럼 그녀들 역시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수많은 세월을 수많은 눈물로 지새웠지만 그만큼 성숙해진 그녀들이다.

 그녀들의 고통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왔다. 그러자 내 마음도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들만큼은 아니겠지.

 그녀들이 아파했기에, 힘들게 투쟁했기에 얻어진 지금의 자유와 권리, 행복이 새삼 고맙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많은 것들을 누리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와 닿는 다큐멘터리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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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에 대한 리뷰 - 김현선

'패밀리쇼킹함’, 그래서 ?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2006), 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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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는 수다스럽다. 수다(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고 가볍다. 또한 수다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만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쇼킹 패밀리>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쓸 데 있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쓸데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첨언하자면 <쇼킹 패밀리>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문제를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게’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가벼움은 ‘무거운 주제는 무겁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에 무게(‘가족’의 문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쇼킹 패밀리>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건드리기는 하였으나 고민하지 않으며 ‘그래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소리는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즉,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는 ‘입’들은 너무 많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쇼킹 패밀리>를 보는 일은 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수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외부와 내부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사운드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수다스러움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아줌마들의 노래방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혹은 감독 경순)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며, 이렇게 시작된 감독의 말소리는 영화의 내부에서 외부(내레이션)로 이어진다. 처음 장면에 등장하는 아줌마들은 가족 안에서 ‘패밀리’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금의 사회 현실을 보여주며, 이를 시작으로 영화는 다양한 방식(문자와 소리의 몽타주, 가훈의 의의, ‘패밀리’의 ‘쇼킹’함을 더하는 경순의 친구-엄마 때문에 버린 인간이며, 자기가 잘못하고도 여자가 모든 것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동시에 싫은 소리하는 것은 싫어하는, 공공캠페인 패러디)으로 사회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이 그녀는 이러한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에 있어도 여전히 혹은 여지없이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즉, 친구처럼 길러온 그녀의 딸 수림이 가족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려 하고 그녀 자신이 ‘쇼킹 패밀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음에도 그녀의 前史에 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2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이혼하여 싱글맘이 된 그녀는 영화 안에서 솔직한 그녀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그녀가 만들어내고 그 속에 들어갔던 ‘패밀리’의 ‘쇼킹함’에 대해서만은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은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만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쇼킹 패밀리>는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현재에 다시금 출몰하며 놀라운 자생력을 보이는 ‘가족’과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는 현재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녀의 과거들을 불러낸다. 즉 싱글맘이 되기 전에 바로 거쳤을 30대의 경은과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인 20대의 세영을 불러낸다. 물론 그녀들(경은과 세영)의 이야기는 그녀들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즉 경순의 과거라고도 볼 수 있는 경은과 세영의 삶은 각자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세영의 이야기를 통해 <쇼킹 패밀리>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시작한다.


<쇼킹 패밀리>는 이미지 또한 수다스럽다. 영화는 그 자신의 안과 밖(밖: 영화에 참여하는 스텝들의 회의, 안: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스텝들의 대화 혹은 인터뷰)을 오가며 ‘패밀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이와 동시에 그래픽 몽타주, 외부(그녀들이 아닌-가훈, 입양, 대학입시, 호주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에서의 장면들, 그녀가 찍은 사진 혹은 그녀들을 찍은 사진, 그녀와 그녀들의 춤, 세영의 집을 담는 왜곡된 화면 등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의 편집과 조합 또한 가벼움이라는 무게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쇼킹 패밀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하고, 이로 인해 영화는 경제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도 쉽게 만들어지고 한편에서는 고민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과잉을 만들어냈다. 즉, 디지털 영화들은 보다 더 일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상의 인상(印象) 혹은 단편적인 시간의 조각들을 펼쳐놓거나 모아놓는 데 그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쇼킹 패밀리>는 디지털 영화가 지니고 있는 한계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쇼킹 패밀리>를 통해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는 수다에 참여했던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웃는 사이 ‘패밀리’의 심각함과 시사성을 망각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것은 ‘패밀리’의 ‘쇼킹함’, 그래서?라는 질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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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쑈킹 패밀리>

가족은 가정이어야 한다.

김현지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공감할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경순 감독. 감독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을 따라가는 이 다큐 형식의 영화에는, 돈 잘 버는 아버지도 헌신적인 어머니도 없다. 말 잘 듣는 똑똑한 아이도 없는 것도 물론이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가족의 이미지를 조롱하면서, 우리가 어떤 환상에 젖어있는지 한번쯤 되돌아보게 한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으로 풀어내는 감독의 위트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그래서 너무나 흥미롭다.

 

쇼킹패밀리라는 제목 속에 탄생하게 될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가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가족이라는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가장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문화의 총화이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국가의 가장 튼튼한 하부조직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해 볼까 한다. 따라서 그 기록은 대한민국의 가족이 좀 더 붕괴되고 해체되고 망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밑바탕에 깐 새로운 기록이 될 것이다.

 

1. “가화만사성”,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뜻이다. 영화초반 조롱하듯 “뭐 어때 가족인데”, “아들 핵심”, “가부장”, “파더리스”, “인간도 아니다” 등등의 문구와 함께 이 단어가 반복 된다. 감독은 이런 형식으로 지금 시대에 만연한 한국 안에서 가족이란 단어의 오용, 남용 사태를 풍자한다. 영화 초반에 이렇게 단어를 무식할 정도로 크게 강조하며 편집한 것을 보고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짐작했다. 일종의 코미디 같은 현실. 웃기지도 않은 사실 등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당연하게 정신적 학대를 강요받는 사람들의 고충을 유쾌한 풍자로 풀어낸 것이다.

 

2. 가족이란 이름으로 정신적 학대를 강요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이 영화 내용 중 가장 좋은 예는 결혼한 사진 감독인 정은의 고충을 통해 볼 수 있다. 정은은 시 엄마의 구박과 마마보이 같은 남편과 7년을 살며 자신이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이혼한 정은의 집안 얘기를 집에 늦게 들어온 정은을 꾸중하며 아무렇지 않게 “ 네 집에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런다”라며 인격 모독적인 말을 하는 시어머니, 이 사이에서 정은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고 자신의 엄마편인 마마보이 남편. 이 사이에서 정은은 이 가족 구성원 중 자신이 열외 대상인 것을 알고 손을 긋고 약을 먹으며 자신의 고충을 표현하지만 모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3. “ 넌 옷이 그게 뭐냐?” - “ 네가 내 딸이면 내 체면을 살려줘야지 네 존재가 창피하다”

   “ 넌 언제 돈 벌래?” - “ 네가 내 딸이면 언젠가 부모 호강 시켜줘야 하지 않냐?”

 

영화에 나오는 이 말들은 가족이니까 자신의 욕심에 맞춰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고 존중해주지 못할까? 단순히 가족이여서 일까? 가족은 단순한 구성원이 아니라 서로의 안식처가 되 주며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 되는 가정이어야 한다. 감독은 “ 대한민국의 가족이 좀 더 붕괴되고 해체되고 망가져야한다”고 했는데, 이는 왜곡된 한국 가정을 뜻하는 것이다. 그녀도 영화 속에서 “ 사실 외롭다”고 말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행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악한 것이다. “혁명은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이 변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란 감독의 말처럼 이를 사회적인 문제로 돌리기보다는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다.

 

<등장인물 소개>

 

바보조세 나이 25세 (세은)

맞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식구끼리 주먹질은 당연하다는 정의 속에 살아왔지만 영화를 시작하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직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증후군이 있긴 하지만 영화를 통해 진정한 타락천사를 꿈꾸는 그녀는 이 영화의 촬영감독.

특기 : 좋으면 약간 갸우뚱 싫으면 어! 갸우뚱 의심나면 으..갸우뚱

 

나쁜 들개 나이 25세 (정은)

군대 간 애인을 차버리고 남들 다 뜯어말리는 결혼을 했으나 결국 시 엄마의 구박과 마마 보이 같은 남편과 7년을 살며 자신이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을 뛰쳐나온 이 시대의 진정한 나쁜 여자. 더욱더 나쁜 쇼킹패밀리를 위해 영화에 몰입하는 그녀는 이 영화의 사진감독

특기 : 한번 물리면 치명적이다. 한번 더 물어 줘

 

미친 자경 나이 25세

한때 춤바람이 격렬하게 일어 온몸에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녀는 진정한 이 시대의 바람꾼. 바람난 여자들의 심금을 울릴 영화 쇼킹패밀리를 간절히 원하며 불철주야 몸을 흔들어대는 그녀는 이 영화의 조감독

특기 : 그녀의 변신은 무죄....무한변신, 무한 칼라

 

멋쟁이지은 나이 25세

섹쉬한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한동안 병마와 싸우다 새까맣고 시꺼먼 인간들이 득실대는 독립영화계에서 동색이 되어 빛을 엄청 발하고 있는 이 시대의 화끈한 음악가.

이 영화의 음악 감독

특기 : 뒤끝이 없는 깨끗한 일갈. 이게 뭐야!

 

이쁜이은희 나이 25세

날 때부터 트로트 가락으로 울어댔다는 그녀는 성악가의 꿈을 꿈으로만 간직하다 쉬지 않고 읊어대는 수다가 노래로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진정한 O.S.T를 꿈꾸는 그녀는 이 영화의노래 감독

특기 : 먹는 건 다 쏜다. 그러나 몸은 절대 안돼!

 

빨간경순 나이 25세

12살 먹은 딸을 18세에 내쫓을 궁리를 하고 있으나 더 버텨 보려는 음모를 꾸미는 딸과 어쩔 수 없는 동거를 하고 있지만 절대 동침만은 봐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아동학대라는 말을 젤로 무서워한다. '건강가정기본법'에 수없이 저촉되는 그녀는 이 영화의 감독

특기 : 아! 나도 특기가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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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패밀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쇼킹 패밀리> (2006, 이경순)에 대한 질문들~~~

- ‘가족’에 대한 솔직 당당함

<쇼킹 패밀리>는 여느 독립영화들과는 달리 산뜻한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그저 유쾌하고 재밌는 내용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 감독과 여성 스텝들의 솔직한 가족이야기와 그들의 인생이야기에서 나의 경험과 고민들이 겹쳐지면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의 나의 삶과 인생 그리고 미래의 나의 가족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려 보았다. 아니 내가 진정 원하는 가족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가족’에 대해 올바른 정의나 ‘가족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가족’에 대한 가능성과 사회 인식의 변화와 그 필요성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제도화된 가족,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한 한국의 가족에 대한 모순들 -입양이나 이혼, 편모(부)가족, 호주제에 대한 문제들- 을 나름의 유쾌한 화법으로 과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일상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곧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문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영화를 보고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방식이든지 가족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더욱이 ‘감독이 말하고 있는 쇼킹 패밀리란 과연 무엇인가?’  결국 ‘가족’의 진정성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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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기술>에대한 질문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파산의 기술>은 과연 ‘파산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의아스럽고 흥미로웠던 지점은 파산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파산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상황을 직접 시각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인터뷰와 마치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경제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일상의 소음들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면은 감상하는 입장에서 심히 너무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라디오와 같은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들과 중첩시켜서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들, 특히 노동자들,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영화 중간 중간에 인용하고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파산의 기술’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이미지와 사운드의 무분별한 충돌을 사용함으로써 과연 얼마나 ‘파산의 기술’에 대한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파산하고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과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도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인터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희망인가 좌절인가, 신자본주의에 대한 비아냥인가 아니면 절규인가.

<파산의 기술>은 ‘파산’에 대해서 라기 보다는, 이를 묵과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아이러니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다지 별로 매끄럽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는 지점 또한 간과할 수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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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기술記述

<단편영화산책>

강 지 혜

파산의 기술記述

 

내용-1날조된 희망들에 대해

재건축 아파트를 부수고 있다. 분명 저 조밀한 평수 대 아파트에는 가난한 누군가 들이 살았을 텐데. 여명처럼 들리는 어느 아이들의 웃음 혹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일찍이 간소한 짐을 챙겨 그곳을 떠났을 터. 청약이다 분양이다 이미 몇 채의 집을 소유한 자들이 재산을 더 불리기 위해 이곳에 달라붙을 것이다. 재건축은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기 위한 자들에게만 희망적이다. 희망이 보입니다 라는 채용공고를 보는 남자. 그는 희망을 보았을까? 비정규직인 인터뷰어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막연한 희망.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와는 엄연히 다른 삶들. 나는 내내 영화 앞에 나온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남자를 지울 수가 없다. 한 달에 85만원씩 96개월간 갚아야 된다는 블라인드의 남자.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갚겠다는 말을 한다. 그의 미래를 점쳐본다면 선로에 뛰어 든 후 암전이 된 그 것이 아닐까. 이미 그는 블라인드 뒤에서 그림자로 된 모습이다. 이제 불만 꺼지면 될 듯. 이 희망은 집행자들, 승리를 선포한 자들의 사기극이다.

 

내용-2파산, 숫자들에 대해 혹 시간.

수학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아니 자본주의가 오셨다. 하물며 시간은 12시가 넘으면 다시 1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 시간마다 생산되어 정리된 미친 숫자들. 자본의 숫자 그 숫자를 불리기 위해 다른 곳에서 빼앗아온 파산의 숫자들이 미친 듯이 성장한다. 사망의 원인조차 숫자로 개조된다. 말도 안 되는 숫자들이 넘쳐난다. 숫자로 정의되는 삶. 강제 집행 중인 암전된 화면에서 200만원 205만원 220만원 이라고 부르는 숫자는 너무나 과학적이고 견고하고 폭력적이라서 감히 딴죽 걸지 못한다. 내 삶이 숫자로 분해되어 파산되어 빠져나가는 광경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가 시작한지 44분 50여초가 지났다 우리가 보아온 풍경들에 관해 주석을 달고 맺음말을 달아주어야 할 시간이라고 한다. 하물며 영화조차도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 있는데 40여 년간 집행자들에 의해 휘둘러진 우리의 역사에 대한 거짓된 결론과 숫자들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시간을 인질삼아 카멜레온처럼 변하며 알리바이를 늘리고 있다.

 

 

방식

밥상 위에 차려진 반찬이 넘친다. 지하철CCTV 화면에서부터 라디오, 인터뷰들, 시시각각 치고 들어오는 난쏘공의 대사들. 엔딩에 나온 빠르게 스케치를 하는 남자의 손길처럼 숨 가쁘다. ‘소재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목표였다.’ (감독의 말) 과연 그럴까? 멀어지는 것은 이미 불가능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러하다면 감독은 이미 내성을 가져버린 우리들의 유약한 선한 얼굴을 질타할지도 모른다.

 

방식-1 파산자(여)들, 대비 교차

왜 하필 파산된 인터뷰어들은 셋 다 여성이었을까? 월드 이코노믹 포럼 장면과 교차 된다. 그 포럼에 참석한 양복쟁이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그리고 대부업 과장이라는 자도 남자다. 그는 자기자본 적정성에 대해 떠들며 대기업보단 가계대출이 남는 장사라는 식으로 말하며 이 시장을 누가 먼저 선점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 시장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세 여성은 그 희생물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는 식으로 붉은 립스틱을 칠한 여성은 처음엔 입부분만 클로즈업 되어 있다. 이러한 남/여 대비 구조는 더 극적인 효과를 준다. 더구나 애 아빠가 3개월을 못 넘겨 혹은 애기 아빠가 놀기 시작 등등의 인터뷰로 이 바닥에는 먼저 침몰하고만 가장들의 그림자도 보인다. 점차 여성들의 얼굴이 넓게 클로즈업 된다. 하지만 잔해물을 꽉 비틀어 쥐는 중장비기계의 몸짓아래 그녀들은 무방비상태로 공개된 기분이 든다.

 

뒤에서 가장 강하게 대비되었던 부분은 서울시청 앞 민주화운동 콘서트 장면과 죽창을 든 민주노총 시위장면이다. 감독은 따뜻한 기념식의 밤, 얼음 같이 차가운 대낮의 딱딱함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자체도 우리가 흔히 알던 밤과 낮의 느낌을 전복시킨다.

 

방식-2 낯설게 하기?

선로에 뛰어든 남자. 암전이 된다. 강제집행을 온 집안은 암전처리 된다. 마치 누군가가 눈을 질끈 감아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강제집행원의 사무적인 말투가 관객의 귀를 후벼 판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게 아니다. 어두운 화면에 진열한 난쏘공의 문장들처럼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할 심사인 거 같다. 호기심조차 갖는 것을 부끄러워 할 만큼 그는 단호하다. 이건 눈물까지 쏙 빠지게 만들만큼의 냉정함이다.

인터뷰어들의 모습이 (이런 영화기술방식에 대해 모르겠음.) 저화질의 화면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웃음을 짓거나 행복 희망에 대해 서술할 때 더더욱 그 장면이 더 자주 잡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마치 매스미디어가 던져주는 날조된 희망을 말하는 느낌도 든다. 비정규직 그들은 잠재적인 파산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잘될 거야 희망적이다 라고 말한다. 중간에 삽입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에서 나온 문구는 인터뷰어의 삶과는 현저히 차이가 있다.

 

마치며

식약청에서 발표한 황색포도산구균의 내성이 높아지는 것만치로 영문도 모른 채 미세먼지에 당하는 것처럼 우리도 집행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세뇌되는 이 메커니즘에 깊은 내성을 지닌 채, 영문도 모른 채 파산되어 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든 바보 같은 생각은 이 영화 무척 세련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감독이 넘치도록 말하고 싶은 세상의 기록들에 숨이 차기도 했다. 더구나 속이 다 후련해야 하는데 왜 이리 갑갑해지기만 할까. 어쩌면 감독이 말하는 집행자들의 정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똑바로 소리 내어 그들을 세세히 다 잡아내는 그의 모습에 질리기도 했다. 하지만 차가우면서도 무언가 넘쳐나는 어휘로 포장된 내레이션을 들으면 그의 분노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게 정리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켜켜이 쌓여 우리에게 다가온 전단지의 벽처럼 우리는 또 오랜 시간동안 그 전단지 지층을 벗겨내며 진정한 나의 적을 보아야 한다. 양치기 소년들이 양산되는 그 곳을 박멸하길 바라며.

 

나의 목숨을 달라하면 너의 가슴에 칼을 꽂겟다. 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이 이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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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기술 질문!

김현지

 

1. 이제것 봤던 영상들과는 다르게 영상 편집과 텍스트의 조합이 두드러지는 영화였습니다. 이런 형식을 뭐라고 부르는지 궁금하고 다른 예들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이런 형식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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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의파다>에 대한 질문 - 김현선

<우리는 정의파다>에서는

 

인물들과 관련된 객관적인 자료에 '우리는'이라는 주어를 사용하는 주관적인 나레이션이 덧입혀진 화면과 이와 관련된 인물들의 '증언'을 담고 있는 화면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인물들의 증언을 담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실내를 벗어나지 않고, 정지되어 있으며,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인물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그녀들의 투쟁을 담을 때 뿐이다.

 

첫 번째 질문.

앞서 지적했듯 객관적인 자료에 주관적인 나레이션이 덧입혀지고 뒤이어 이와 관련된 인물들의 증언을 연결한 방식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객관적인 자료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현실 혹은 진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같은 화면에 객관적인 나레이션을 사용할 경우 영화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두 번째 질문.

<우리는 정의파다>의 투쟁의 과정에 있어서 '과거'에 해당되는 부분은 실내, '현재'에 해당되는 부분은 실외로 카메라의 위치를 구분지을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대한 증언에 있어서는 집단적으로 인물들을 다루지 않고, 같은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현재'에 있어서는 집단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감독의 어떠한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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