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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3/03/10

[운동평론]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

1. 분노조절장애와 트라우마 

활동가들이 척박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은 일반인들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종종 ‘분노’로 표출되는데, 이는 일상 외에도 운동에 있어 이념적 노선이나 활동가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관계들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분노’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 우리는 일단 ‘분노조절장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활동가들은 통상 현장에서 싸우거나 비난하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등의 양태로 나타나는데,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이나 한탄을 늘어놓는 일 혹은 상대에 대해 못된 사람이나 사기꾼 혹은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등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이 그런 증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증상이 지속될 경우, 그는 자존감과 자기정체성이 붕괴됨으로써 현재 자신이 처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억압된 상처가 무감각한 감정으로 이어져 사회적 제반 인간관계까지 포기하게 되는 불행을 가져오기도 한다.

분노조절장애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지만 때로는 개인의 기질이나 가족사 측면에서도 유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 정신병 의사이자 행동생물학자인 보리스 시륄닉 (Boris Cyrulnik)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피해자의 기억 속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마치 그를 따라다니는 유령처럼 그때부터 그의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다.

즉, 이러한 트라우마는 사회적 관계에서 믿음과 신뢰를 잃게 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연결을 단절케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선택하는 능력까지 상실케 한다. 결국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 당시 문제의 시점에만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분노조절장애에서 ‘충동적 분노 폭발형’은 강한 생리적 반응이 동반되어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어 분노가 폭발하는 다혈질 기질에서 종종 발견된다.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동반된 이 증상의 치료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약물을 복용하면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습관적 분노 폭발형’인데 이는 통상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노 표현 자체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이는 흔히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식의 경험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키워 온 사람이 많으며 치료에는 약물보다는 ‘분노 조절 훈련’이 효과적이다.

‘분노 조절 훈련’은 첫째, 분노 폭발을 ‘폭력’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신체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 역시 폭력이라는 인식으로 "나는 화를 조절할 수 있으며 이를 표현할 줄 아는 강한 사람"이라는 자기 격려를 수시로 한다. 둘째, 분노 폭발은 어떤 자극에 대해 통상 30초 안에 이루어지므로 이 순간을 넘겨 대화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셋째,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문제해결의 담지자가 됨으로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색하게 한다. 

(본문은 ‘레프트119’ 에 발표된 글입니다.)


2. 이른바 <재능교육지부 투쟁관련 입장서>에 대한 진단  

3월 8일, 진보넷 공개 블로그 ‘한걸음씩’에 <재능교육지부 투쟁관련 입장서(강종숙, 박경선, 유명자)>란 제목의 글(이하 입장서)이 올라왔다.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므로 해당 실명인물들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간주, 사회심리학적인 측면과 운동적 관점에서 진단해보기로 한다.   

1)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의 <입장서> 

<입장서>는 기본적으로 선악구도를 취함으로써 분노에 갇힌 트라우마 증상의 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즉, ‘사실(팩트)’을 기반으로 오늘 불편한 관계에 놓인 동지들에 대해 일일이 실명비판/비난을 쏟아 붓는다. 동지에 대한 마녀사냥 식의 표현이 관계망을 파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증상인데, 이러한 십자포화는 <입장서>측이 결과적으로 자승자박하는 ‘피해자 자처하기’의 이면으로 파악된다.   

사실은 진실과 전혀 다른 층위의 이야기로, 현상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운동이 진정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사실과 전체성에서 ‘진실과 총체성’으로 인식이 확장되어야 하며, 이를 토대로 사안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트라우마 상태에서는 인식의 폭이 더더욱 좁아지고 상대적으로 분노가 급증하기에 이에 대한 치유가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2) <입장서>측의 치명적 오류  

재능투쟁은 노조운동이 지닌 숙명적인 조합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그나마 재능동지들은 노동자성 인정도 받지 못한 상태 아닌가), 5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러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진보좌파의 정치운동으로 기반을 넓혀왔다. 따라서 우리 사회와 운동진영은 매우 특별한 이 싸움에 깊이 고마운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아무리 트라우마 상태라고 해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다. 그러나 <입장서>측은 이러저러한 개별적인 비판/비난에 이어 경찰과 ‘전기장판’ 이야기까지 써서 선을 넘어버렸다. 성당 측의 배려로 경찰병력 철수가 이루어졌고, 종탑에 ‘전기장판’이 올라갔으니 “침탈로부터의 안전은 확보된 것”인데, “투쟁의 확산이 아니라 종탑사수만을 되뇌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적들 앞에서 행하는, 동지들 각자에 대한 도덕적 비판/비난은 재능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명분을 순식간에 앗아간다. 동지를 ‘사장님’이라고 단죄하고, 또 다른 동지를 ‘복직의사 없음’을 운운하며 문제 삼았다. 필자는 그 동지가 얼마나 큰 기업을 경영하는지 모르지만, 그 ‘사장님’이 종탑 고공농성에 올라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는 정도는 안다. 여기서 필자는 생계형 자영업조차도 ‘쁘띠’로 규정하고 간단히 배제하려는 철지난 좌파운동의 경직성(노동자주의)을 읽는다. 

초장기 투쟁 속에서 (정도의 차이뿐) 트라우마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봐야 한다. 한 동지가 ‘복직의사’가 없다고 말했다고 하자. 싸움을 통해 사측에 질려버린 동지가 트라우마 상태에서 “이 회사, 정말 싫다”라는 느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를 보듬어주기는커녕 말꼬리 잡기 식으로 그걸 팩트로 내세워 맹비난한다면, 그런 조직에서는 동지라고 믿고 편하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교회재산에 경찰이 진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조치지만 그들은 필요하면 즉시 달려오게 돼있으니 새삼스럽게 대단한 얘기도 아니다. 특히 몸이 남성들과 다른 여성들이 종탑 고공농성에서 병고에 덜 노출되도록 올린 전기장판을 거론한 것은, 바로 길 건너편 재능교육(본사) 사측에게 조소와 함께 교섭에서도 심리적 여유를 안겨주는 (결과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 된다. 

혹자는 이를 간단히 여길지 모르지만, 이러한 행태는 이곳이 만약 전장戰場(사실 대 자본 전장이다)이라면 여지없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마땅한 심히 무거운 죄목에 해당한다. 

투쟁의 확산은 그간 재능투쟁의 성격상 함께 한 동지들 모두가 머리를 맞대며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종탑 쪽 동지들에게만(현 조직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비난하고 책임을 물을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 동지들의 운동이 조합주의에 매몰된 폐쇄형 구조라면 일부러라도 적극 참여해서 운동을 바꿔내면 될 일이다. 

그리고, 만약 <입장서>측이 글에서 암시한 것처럼 재능지부가 전혀 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오류에 빠진 조합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면, 구 지도부의 다수인 <입장서>측은 그동안 이를 은폐한 채 운동을 흉내 내며 기만했다는 혐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3. 재능투쟁 제대로 하기 

비밀 아닌 비밀을 밝힌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 페친인 양쪽에 나름 핫라인을 가동해서 재능투쟁을 둘러싼 내부의 간극을 좁히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집회를 통해 자연스레 양쪽 동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접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내가 어느 특정단체 소속이 아닌 까닭에 어쩌면 좀 더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입장서>에는 ‘폭언폭행’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조직 내 소통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현상은 비단 재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운동진영 곳곳에 암초로 자리하고 있는 만만찮은 과제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한 사안들은 그때그때 정리했어야 마땅한 사안으로 조직과 리더의 총체적 역량에 관한 문제로 봐야 한다.   

<입장서>는 “비없세 동지들의 제안에 따라 개최한 학습지노조 대의원대회에 참석한 4인의 대의원 가운데 박경선은 강종숙을, 비대위측 강경식은 황창훈을 지지했고, 나머지 두 명 또한 황창훈을 지지해 결국 황창훈을 직무대행으로 뽑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여기 참여한 두 대의원에 대해 불성실한 활동 등을 들어 대의원 ‘자격 미비’를 간접 암시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 대의원대회에 자격이 없는 대의원이 나왔다면 출마자들은 애초 경선을 거부하고 대회를 진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경선이 진행됐다는 건 그 두 사람에 대한 대의원 자격을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시일이 경과한 후 <입장서>에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것은 선거에 패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다. 

한편, <입장서>측은 결론부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재능교육지부투쟁은 공대위를 비롯한 연대단위와의 소통과 합의를 통해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사측과의 합의(타결)안’, ‘타결 이후의 방침과 계획’, ‘타결 이후 노조체계와 역할’에 대한 방안까지 전반적인 사항을 열어놓고 이에 대한 사전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일괄 합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합의가 선결되지 않으면 지금처럼 각각 따로 가는 상황이 이어질 것입니다.” 
(중략)
“지난 5년 투쟁을 함께 해 왔던 조합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구조를 시급히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그 정당성을 전혀 인정받고 있지 못한 비대위와 직무대행을 더 이상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몇 사람도 안 되는 동지들을 (진위와 무관하게) 운동적/정치적으로 무자비하게 저격해놓고는 난데없이 ‘일괄 합의’를 던지는 데에서, 필자는 진보좌파진영을 상대로 한 강박적 이데올로기의 선전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또한 연대단위의 제안 하에 이루어진 학습지노조 대의원대회 경선 결과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에서 ‘그 정당성’이 특정인에게만 국한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독선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각각 따로 가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에서 시청 환구단 농성장에 세워질 것 같은 새로운 깃발이 연상된다.           

필자만 그런가. ‘제안’은 미시에 갇히지 않고 낮은 자세에서 시작해야 빛이 나는 걸로 알고 있다. 오늘 이 척박한 운동 속에서나마, 권력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그런 제안의 겸허함을 지닌 동지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지난한 투쟁 속에서도 우리들의 작은 기쁨은 큰 기쁨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오늘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재능투쟁에 연대하고 있는 동지들은 <입장서>에 구구절절이 적힌 온갖 혐의와 의문투성이로 가득한 문건을 보면서 이제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직접적 발단이 된 2월 6일 재능지부 조합원 두 명이 종탑에 오르기 전까지의 재능지부 5년간의 투쟁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만약, 대의원대회에서 구 지도부가 다시 선출되었다면 <입장서>와 같은 내용의 문제 제기가 이처럼 거칠게 던져질 수 있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나와야만 <입장서>측의 문제 제기는 비로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지들! 마음을 추스리자. 분노를 다스려 운동의 에너지를 자본을 향해 집중하자. 어떤 경우에도 동지들 간의 소통을 포기하지 말자. 혹여 자신이 운동을 빙자한 '관료'가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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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평론]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2)

1. 사회심리학적 접근 

그간 운동공간에는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으면 훌륭한 활동가로 일할 수 있었던 썩 괜찮은 동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했거나 제 앞가림에 바쁜 이유 등으로 그들을 안타깝게 떠나보낸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늘도 우리들의 가슴을 애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동지를 잃는다는 것은, 대부분 동지들이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거나, 영원히 잠수 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반동적인 진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포함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원인은, 전선이 분명한 외부보다는 좀처럼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내부의 모순에서 찾아진다. 

내부모순은 종종 ‘내분(infighting)’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공감대가 형성된 조직의 경우, 내분은 동지들의 ‘번아웃(Burn Out: 탈진)’이 모순의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곤 한다. 이와 관련, 현재 처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동지들의 능력이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라고 여겨질 때, 우리는 트라우마(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염려해야 한다.  

오랜 기간 진행된 현장투쟁(행동주의)이 동지들의 삶을 장악해서 발생하는 트라우마에 걸리면, 가장 극단적인 정서의 유발로 인해 먼저 조직 내 ‘의사결정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집중할 수 없으며, 숙면이 어렵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증가하면서 투쟁 주체인 동지들 간에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흔히 발생하는 ‘험담’이나 ‘피해망상적인 마녀사냥’은 치명적으로 투쟁을 해치는데, 문제는 트라우마에 직면한 동지의 마음이 굳게 닫혀있는 관계로 주위에서 돕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그나마 이 경우에서도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을 해치지 않게끔 ‘자기 자신에 대한 친절’을 다하는 것이고, ‘동지들 간의 예의와 존중’을 지켜 소통을 위한 사전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정신의(醫) 로널드 랭(R.D Laing)이 “번아웃 모두가 파경(breakdown)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또한 돌파구(breakthrough)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듯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 필요들과 욕구들을 돌보는 ‘휴식기’가 급선무로 요청된다. 이는 최소한의 ‘휴식’을 통해 번아웃을 피함으로써, ‘열린 소통’을 통해 투쟁을 보다 지속가능하게 만들어 내자는 제안이다. 

1900일을 훌쩍 넘은 초장기 투쟁사업장인 재능지부와 같은 경우는 그간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조합원들이 트라우마에 걸릴(걸렸을) 환경적 조건이 농후하다. 더욱이 장기간 함께한 연대단위 동지들도 유사한 트라우마 증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가뜩이나 어려운 조합원들의 정서에 (본의와 무관하게) 왜곡된 상승작용을 끼칠 개연성 또한 없지 않다.     

(* 이상은 장투사업장 동지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트라우마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레프트119」에서 발표한 바 있는 Activist Trauma Support 자료를 우리네 실정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2. 재능투쟁 문제 제대로 보기 

지난 3월 1일자 ‘[운동평론]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 글이 나간 후, 한 동지가 지난 재능투쟁의 사실관계와 관련하여 일일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운동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취지의 실명비판 문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에 대해 필자는 동지적 차원에서 [재능투쟁 & 적전분열]이라는 제하의 재능투쟁 관련 단상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강력한 적을 상대로 힘겹게 전투 중인 전선에서 아군이  '네탓'이로소이다 책임 논쟁을 벌이면 그 싸움은 필패한다. 적대모순과 비적대모순을 가리지 않고 기관총을 난사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국공합작에서 개조와 공동전선을 배우지 않았나.
무조건 덮어 책임 논쟁을 말라는 게 아니라, 안전한 진지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따지라는 거다. 그것은 바로 '시점'에 관한 얘기 아닌가. 
단사 투쟁만이 아닌 자본권력을 앞에 둔 특고부대 상황이 정세적으로 유리하지도 않은데,  비적대모순에 일일이 시비를 가리자고 한다면, 이러한 싸움은 지리멸렬을 피할 수 없다. 
운동이 어차피 바닥이니 모조리 까발려보자? 명쾌하긴 한데.. 그건 아닌 듯하다. 
다섯 번의 겨울을 이기고 이제 봄을 맞으려는데, 그것을 운동과 동지들에 대한 예의로 볼 수 있겠나. 묵언과 실천으로 마무리 투쟁에 최선을 다하자!!“


필자는 우리들의 제사회·노동운동 진영이 비정규직/특고투쟁에 헌신하고 있는 재능지부 동지들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노동자성 인정도 받지 못한 채 개별자본과 자본가권력으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아온 재능동지들이 단사투쟁을 뛰어넘는 자본과의 거대한 싸움판을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참에 다소 거칠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중차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재능동지들 한분 한분을 저울에 올려 함량을 재보려는 것과 같은 무모한 시도는 어떤 경우에도 있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개별적인 편차가 있다손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모든 재능동지들이 제각기 맡은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지난 5년은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 활동가들은 자신의 소속을 넘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재능투쟁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실 요즘 재능투쟁을 두고 웹상에서 떠도는 이른바 개량주의 소문은 별로 근거 없는 얘기로 보인다. 왜냐하면, 재능투쟁은 이미 재능지부의 것만이 아닌 제사회·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동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기에 '운신의 폭'이 생각보다 협소한 까닭이다. 

재능동지들은 처절한 초장기 천막농성에 이어 이젠 종탑 고공농성이라는 극단의 고육지계를 선택했다. 해서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 천막도 지켜야 하고 종탑에 올라간 동지들도 챙겨야 하는 여간 바쁜 상황이 아니다. 

새로 구성된 집행부 선출과정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비민주적이었다는 문제 제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특정 정당의 과도한 영향력 혐의는 근거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재능조합원 가운데 정당 소속 동지는 진보신당과 통합진보당 각기 1명이다). 

고독한 길거리 천막투쟁을 해본 동지들은 흔히 “지나가는 개도 반갑다”라는 얘기를 한다. 연대단위에 다소 변화조짐이 있다고 해서, 현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이라고 해서, 안 보이는 곳에서 함부로 편을 가르고 섣부르게 비난하는 행태가 있다면 그건 재능동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재능동지들은 판단력을 상실한 바보가 아니다.   

동지들이 씻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유인물을 만들거나, 선전전을 진행할 때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소통 문제로 기존 동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동지들이 힘을 보탰는데, 이를 두고 개량주의 운운한다면 이는 선후가 뒤바뀐 아주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된다. 

연대단위 및 활동가들에게 다시금 부탁드린다. 

투쟁의 주체인 재능동지들을 (결과적으로) 가르지 말자. 개별적인 신뢰와 사랑을 조직적인 단결투쟁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적극적인 도움주기에 나서자. 재능동지들을 하나가 되도록 밀어주는 것을 마치 현 시기 운동의 퇴행처럼 간주하는 근거 없는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말자. 재능투쟁에서 만난 동지들이 생산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지난 5년간의 싸움을 기반으로 더 큰 운동을 만들어 내는데 함께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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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평론]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1)

오늘(3월 1일)로 1898일째를 맞은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이하 재능지부)의 투쟁.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는 조합원들의 천막 농성장이, 길 건너편에 위치한 혜화동 성당 15m 높이의 종탑 위에는 두 조합원이 24일째 고공농성이 진행 중이다.      

재능교육을 상대로 한 재능지부의 당면 투쟁요구는 ‘단체협약 체결’과 ‘해고자 전원 원직 복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사용자(자영업자)로 분류돼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인 200만 국내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 쟁취를 위해 당국을 상대로 법제도를 바꿔내야 하는 지난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투쟁들과 차이가 있다.  
       
필자는 최근 재능지부와 관련된 페북 소식과 집회 참여를 통해 조합원들이 또 다른 힘든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게 됐다. 페북에서는 동지들 사이에서 무거운 기류가 감지됐고, 투쟁현장에서는 평소와 달리 조합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상황을 고루 들어보니 조합 내부의 문제로 견해차가 존재했다. 

발단은 종탑 고공농성 직전 이를 둘러싼 이견의 충돌이었다. 한쪽에는 비정규직 최장기 투쟁사업장으로서 속히 투쟁의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며 고공농성을 지지하는 다수의 조합원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안 그래도 장기투쟁의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에서 극한의 고공농성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회의하며 대안을 모색하던 소수의 조합원이 있었다. 

문제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견해 차이가 조율되지 않은 채 고공농성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불거졌다. 그러나 다수는 이런저런 소통의 장애로 인해 합의가 어렵게 되자 고공농성을 시작했고, 이후 농성투쟁을 담보하기 위해 조직을 재편해 집행부의 새 주체로 등장했다. 여기서 소수에 해당하는, 지난 5년간 투쟁을 이끌어 온 전임 집행부와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다수안과 소수안은 모두 나름 일리가 있어 심층적으로 논의할만한 내용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간 함께 해 온 조합원들 사이의 신뢰와 인화(人和)였지만 이 부분이 미흡했다. 사실 노동자들이 장기투쟁을 하다보면 조합원들 사이의 해묵은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조합원 모두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분위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위기를 해소해야 하는 게 그런 이유다. 

어쨌든 투쟁방식에 치중한 결과 틈이 생겼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정파싸움이 아닌가 하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조합원 개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미루어 보건데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새 집행부가 구성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투쟁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지만, 재능지부의 경우 순서가 뒤바뀌는 바람에 더욱 오해의 소지가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87년 체제를 모태로 한 그간의 민주노조운동은 명백히 한계에 봉착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황기 자본주의 하의 전환기 운동에서, 재능지부가 비정규직인 특수고용에서 투쟁의 선두에 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제 재능지부는 특수고용에 대해 ‘노동자성 인정’을 기치로 내걸고 단사인 재능자본을 넘어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는 거대한 싸움으로 확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만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진보단체들의 연대와 헌신적인 집행부의 선도투쟁, 그리고 조합원들의 노력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종종 어려움은 선도투쟁에 몰두하다 조직 내 인화가 소홀해지는 데에서 발생하기 쉽다. 이 경우 집행부는 조합원들에게 좀 더 겸허한 자세로 다가가고, 조합원들은 선도투쟁한 이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게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투쟁은 서로를 배려한 총체성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다. 

다섯 번의 겨울을 이겨낸 재능투쟁은 이미 재능지부만의 것을 넘어선 진보운동의 사랑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곧 화사한 봄날, 이 땅의 노동자들과 연대동지들은 재능동지들 모두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보고 싶다. 자본주의 기독교의 패션 십자가 아닌, 모처럼 허름한 종탑 십자가에 스민 노동자민중의 벗 예수가 두 동지를 보듬어 안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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