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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의 편지 -서평에 앞선 느낌 전달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07/09 00:32
  • 수정일
    2011/07/09 08:45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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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의 편지 -서평에 앞선 느낌 전달

 

 

 

칼 마르크스는 1882년 초 마르세이유 항에서 출발하여 알제로 가 그곳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으며, 5월4일 프랑스로 되돌아와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한 달을 보냈다.

마르크스의 삶속에서 위의 4개월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론을 새롭게 할 특이한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체류할 때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일상생활에서 나타내는 거동, 반응, 느낌 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알제와 몬테칼로에서 띄운 편지에서 그가 늘 사용한 단어는 재발이다. 실제로 1882년 10월의 늑막염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진료했지만, 마르크스는 계속 질병 속에서 살았다. 그의 병환이 서신왕래의 중요한 주제이다.

 

그의 병환은 육체보다 지적활동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는 정신적 고통에서 나왔다. 심한 우울증 때문에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인간들과 교류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줄여 나갔다. 마르크스는 결벽성 때문에 죽음이란 단어의 공적 해석을 피해갔다.

물론 모든 암시는 그의 둘도 없는 친구 엥겔스에게만 한 것이고, 그의 어떠한 감정도 숨기지 않고 토로하였으나 딸들에게 편지할 때는 그를 괴롭히는 병, 죽음 같은 상념을 버리고 싶었다.

 

마르크스에게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으나 알제리와 프랑스 리비에라의 체류는 이 환자의 생명을 조금 연장하였다. 부인이 간지 1년도 안되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그리고 누구보다 그의 곁에서 그를 돌봐주던 큰 딸을 잃자, 마르크스도 더 이상 오래살지 못했다. 폐렴이 그의 마지막을 재촉하였다. 1883년 3월 14일 오후 2시에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마르크스의 셋째 딸 엘레노어가 임종을 지켜보았다.

 

인생살이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육체적 건강과 죽음과 물질적 향유에 대한 상념이다. 이에 마르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 엥겔스의 물심양면의 도움이 있어도 부인의 죽음, 큰딸의 가난과 병환, 무위도식의 인상을 준 큰 사위 등에다 말년의 질병에 시달리면서 요양하러간 곳의 날씨 때문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듯한 편지내용은 인간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후대가 교조적으로 신격화한 끈을 유지하려고 했는지 지금까지도 그의 알제와 프랑스 리비에라에서의 편지가 왜 관심을 끌지 못했는지의 의문을 이 편지들이 풀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가 알제에 머물 때 예언자처럼 하고 다녔던 긴 수염을 면도하였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짧게 하였을까? 라는 의문은 마르크스 최후의 서한집인 [알제리에서의 편지  -빛나는 전망]을 끝까지 읽고 나서 판단해야 할 후세대들의 즐거운 상상력일 것이다.

 

그리고 몇 통의 편지 (우울증, 딸과 손자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역사적인 사진 한장)

 

 

 

엥겔스에게

 

1882년 3월 1일

 

친애하는 프레드(*엘겔스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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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12월 날씨는 엉망이었으나 1월은 화창했다고 하네.  공교롭게도 2월부터 날씨가 춥고, 습기 차 제일 추웠던 2월20, 21, 22일 3일간 아주 혼이 났다네. 불면, 식욕저하, 심한 기침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고, 덩치 큰 돈키호테처럼 심한 우울증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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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그렇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보다 더 감정표현을 싫어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지. 내 아내에 대한 추억을 내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겠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  런던의 내 딸들에게 이 늙은 닉에게 편지쓰라고 일러주게.  애비가 먼저 편지를 보내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간 창조라는 주요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펌스는 어디있나? 내 안부를 전해주게.

헤렌, 무어 셜머, 모두에게도.

나의 고우에게

 

자네의 무어인

 

아참! 나의 친애하는 돈킨 의사에게 처럼 스테판 의사선생에게 줄 코냑을 잊지 마!

 

 

 

예니 롱게에게 (*마르크스의 큰 딸)

1882년 3얼 27일 월요일

 

내 사랑하는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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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의 벤트너 마을에 있을 때는 아주 편했어. 반면 런던에서 엥겔스의 권고 극성이 아빠의 건강을 헤쳐버렸단다. (그리고 라파르그 이 허풍선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걷는것" 이라고 생각한 거야) 마다 할 수가 없었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런던을 벗어나야 하겠다는 조급함이 앞서거든. 너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도 너를 파멸시킬 수 있거든. 이와 같이 환자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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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올드 닉

 

재간 때 "자본론'을 다듬거나 고칠 생각하면 안 된다.

 

 

 

예니 롱게에게

 

1882년 4월 28일 (*알제리에서의 마지막 편지)

 

 

진정 사랑하는 애야,

두 줄만 쓰마. 이 바닷가가 가엾은 해리에게는 안성맞춤인데. 형편이 되면 걔와 그의 형제들을 늦기 전에 노르망디로 보내보지 그래. 내가 너희들, 예니, 너와 손자들을 노르망디나 파리 아니면 다른 곳에서 만나보지도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유치해지는구나.

내 건강은 많이 좋아지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스테판 의사선생이 나를 “아프리카”에 잡아 매어두지. 내 생각에는 한 보름간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통과 의례만 거치면 될 것 같아.

내 진정한 안부를 사랑하는 이이게.

 

올드 닉

 

 

 

라우라 라파르그에게 (*마르크스의 둘째 딸)

 

1882년 5월 6일 (*프랑스 리비에라에서의 첫 편지)

 

 

나의 사랑하는 카카두 (*둘째 딸 애칭)

이곳 몬테칼로에 도착한지 몇 시간 되었구나. 엥겔스에게 띄운다고 알린 편지내용도 살펴볼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어쨌든 네가 받을 이 편지보다 하루는 늦게 받을 것이야)

이제 쓸 일용품을 사러가야 하는구나. 너와 프레드에게 사진 한 장씩을 동봉하여 보낸다. 어떤 예술도 사진보다 사람 모습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야.

 

늙은 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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