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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노동절: 자본주의의 잔혹함이 심화하고 있다. 해결책은 독립적인 계급투쟁뿐이다.

2026년 노동절: 자본주의의 잔혹함이 심화하고 있다. 해결책은 독립적인 계급투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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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북미 노동절; 올해 역시 노동자 탄압, 파업 금지, 노동조합 방해 공작, 이주 노동자 탄압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자본가계급이 자행하는 이러한 공격은 미국과 캐나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이윤이라는 국제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다. 문제는 한 명의 악덕 기업주나 정치인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피와 땀과 눈물로 대가를 치르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이다. 그러나 전 세계 노동계급은 오직 단결된 계급으로서만 결정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절은 투쟁적이고 급진적인 51일 아닌 9월 첫째 월요일이다. 이는 노동조합과 자본가정권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온건하고 평화로운 축제의 형식을 띤다. <역자>)

 

노동자 탄압

 

전 세계적으로 자본가들은 노동계급 동지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설립된 미국 국토안보부(DHS)의 예산은 수십억 달러 규모로 대폭 증액되었고, 권한도 크게 확대되었다. 감시 체계의 전면 개편, 개인 정보 접근 권한 확대, 그리고 내부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국내 테러를 진압할 수 있는 재량권 확대는 이 기관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다.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이민세관집행국(ICE), 국경순찰대, 그리고 국토안보부(DHS)는 주요 도시 전역에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잔혹한 단속을 벌였고, 주 방위군과 해병대는 연방 부처의 보안 강화를 위해 동원되었다. 한편, 많은 비난을 받는 지역 경찰은 그 와중에도 노동자 추방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체포했다. 지금까지 4명이 거리에서 살해당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으며, 이민세관집행국(ICE)과 국토안보부(DHS)의 수용소에서 적어도 52명이 사망했다. 캐나다에서는 카니(Carney) 행정부가 대규모 채용 캠페인의 일환으로 캐나다 왕립 기마경찰(RCMP) 예산을 증액하고, 사법 제도를 개편하고, 정부 기관에 훨씬 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이러한 현상이 북위 48도 이남 지역이나 도널드 트럼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민 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우연한 비극의 연속이 아니었다. 세계 체제들이 치명적인 민족주의 숭배로 빠져드는 가운데, ‘책임 전가는 부르주아 국가의 대리인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자본주의 모순에 내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데 가장 유용한 전술 중 하나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권력자들이 국가 자본의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만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민 단속 요원들에게 납치당했다. 어떤 경우에는 소규모 사업체의 직원 전원이 구금되기도 하는데, 이는 개별 소부르주아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의제를 실현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는 수사를 통해 노동계급을 더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고, 이민자 유입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크고 명백한 모순을 낳는다. 민주주의의 환상이 무너져 내릴수록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전술은 점점 더 잔혹해지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같은 곳에서는 수십만 명, 아니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겠다는 위협이 현실화하고 있다.

 

현재 대규모 강제 추방, 때로는 "재이주"라고도 불리는 이 주장은 대부분 우파에서 나온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민주주의 정부든 자유주의 정부든 모두 집권하면 극단적인 추방 정책을 채택해 왔다. 설령 2028년 공화당 집권이 끝난다고 해도 추방 건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은밀한 방식으로, 마치 관례를 따르는 듯한 행정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잔혹한 수준의 강제 추방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과 오바마 행정부 모두 트럼프 행정부에 버금가는 추방 정책을 펼쳤으며,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 첫해에만 90만 건 이상의 강제 추방이 이루어졌다. 결국, 미국 부르주아 국가의 양 진영 모두 수십만 명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뿌리 뽑고 추방해 왔으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파업 금지

 

1926년 제정되어 여러 차례 개정된 미국 철도노동법(RLA) 도입 이후, 의회가 철도 노사 교섭에 개입한 19건의 사례는 모두 파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최근 사례인 2022년에는 노동자들이 이전에 거부했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이 법안은 미국 역사상 가장 친()노동자적 대통령으로 불리는 인물과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의원들도 서명하여 통과되었다. 파업 발생 원인 중 하나는 과도한 대기 근무 정책으로 인한 안전 문제였다. 철도 노동자들에게 이 합의안이 강요된 지 두 달 후, 오하이오(Ohio)주 이스트 팰러스타인(East Palestine)에서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하여 심각한 유독 물질 유출 사태가 벌어졌다.

 

최근 캐나다에서 발생한 파업들은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상대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캐나다 우체국(Canada Post)과 에어 캐나다(Air Canada)의 사례는 파업이 자본가계급에 너무 불편한 상황이 되면, 주저 없이 업무 복귀 명령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그러한 명령을 거부한다고 주장하더라도, 파업을 주도한 노동조합들은 법적 소송을 제기(파업이 아닌 법적 분쟁)하여 파업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기세를 꺾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 퀘벡(Quebec)주에서 '공익에 반()하는' 파업을 금지하려는 움직임까지 더해져, 노동계급을 굴복시키기 위한 통일된 전술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의 법적 테두리 밖에서, 그리고 노동조합의 통제를 벗어나 투쟁해야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계급의 역사는 이러한 방향을 제시하는 풍부한 교훈들로 가득 차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비공인(와일드캣) 파업 물결부터 1970년대 퀘벡(Quebec)의 파업 위원회에 이르기까지, 노동계급은 국가와 그 산하 기관들과 직접 맞서 싸울 때 가장 큰 성공과 투쟁력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승인 없이 파업 현장에서 독자적으로 파업 전술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작은 사례조차도 우리 투쟁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중요한 한 걸음이다. 이러한 행동이 없다면, 우리의 운명은 밀실에서 변호사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노동조합 대 노동자

 

전 세계적으로 자본가계급은 심각한 이윤율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윤을 얻기는 어려워지고, 노동계급에 전가해야 하는 손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고용하려는 자본가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은 노동자들에게 손실을 강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제 교섭은 회사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다가오는 세계 제국주의 간 갈등 속에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에 점점 더 많은 (불리한 또는 해로운) 것을 요구할 것이 예상된다.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조합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국가 체제에 깊숙이 통합되어 있다. 이들은 전미노동관계위원회(NLRB)와 같은 정부 기관을 통해 조직적으로 운영된다. 이러한 기관들은 분쟁이 항상 정부 기관과 분리된 채 진행되도록 보장하고, 부문 간 연대투쟁을 막고 연대파업을 범죄화한다. 따라서 전미자동차노조(UAW) 지도부가 2028"총파업"을 인위적으로 선언한 것(이는 자본가들에게 2년이라는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다. 마치 계약 만기 시한의 문제일 뿐, 노동자들의 실제 투쟁 의지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에서부터 트럭운전사노조(Teamsters)와 항만노조(Longshoremens) 위원장들이 트럼프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지지하는 것까지, 노동조합이 자본가계급에 충성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을 자본가계급의 여러 분파에 이용함으로써, 노동계급을 의도적으로 분열·약화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가장 "급진적인" 노동조합 운동조차도 이러한 노동조합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자본주의에 맞선 정치적 수사와 투쟁하는 노동계급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이러한 '급진적 노동조합'들은 여전히 ​​노동력 매매 협상의 틀에 갇혀 있다. 그곳에서의 성공은 결국 그들을 전통적인 노동조합과 유사하게 만들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조차 '파업 금지' 조항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성 체제에 도전하려는 진보-좌파들과 마찬가지로, '급진적 노동조합'들은 노동계급을 권력 장악을 향한 방향성 없이 영구적인 반대 상태에 묶어둔다. 게다가,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와 맺고 있는 수많은 법적·정치적 유착 관계 때문에, 이들은 결국 대형 노동조합의 모델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노동자들이 제국주의 국가와 그 모든 정치적 목표를 위한 꼭두각시로 전락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부, 기업, 노동조합을 결합한 "삼자 모델"은 제국주의 전쟁을 통한 계급 말살이라는 수십 년간의 낡은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역시 조국 방어를 위해 노동조합을 총동원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파업 금지와 단체교섭 금지라는 제약 속에서도 생산을 유지하며 전쟁 수행을 지원하고 있다.

 

결론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을 국가 기관에 편입시키고, 조합원들에게 점점 더 불리한 교섭 조건을 강요하는 것처럼, 결국 노동계급을 제국주의 무대에서 국가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이처럼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을 방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독립적인 계급투쟁의 절대적 필요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 주도의 방식이나 법치주의 방식, 또는 비정치적이고 오로지 경제적 성격만을 지닌 모든 노선에 단호히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정치와 코뮤니스트 강령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은 이미 파업위원회,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슈라, 노동자평의회 및 총회와 같이 우리 계급의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의 기반이 되는 진정한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기구들을 만들어 왔다.

 

지난 200년 동안 투사들이 얻은 교훈을 되새겨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계급으로서 행동해야 하며,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이 제시하는 모든 해결책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배계급은 우리에게 수많은 정당 중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만, 결국 그 정당들은 노동계급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면서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은 국경 폐쇄를 주장하지만, 금융 자본은 지리적 경계를 알지 못한다. 한편, 개혁주의자들의 해결책은 단지 경비원만 교체할 뿐이다.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체제를 개혁할 수 있다는 허황된 희망을 심어줌으로써, 진정한 노동계급의 권력을 저지하기 위한 대안 전략에 불과하다. 캐나다의 경우,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주와 매니토바(Manitoba)주에서 집권한 개혁주의 신민주당(NDP) 정부는 노동계급에 대한 대규모 공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공약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그 공격을 묵인해 왔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답은 자본주의 권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강령과 정당이 이끄는 가운데, 지배적인 부르주아 질서를 전복하는 혁명에 있다. 혁명적 코뮤니스트의 과제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 노동계급의 모든 구성원과 함께 투쟁에 참여하여 국제적 차원에서 세계 혁명당(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것이다. 세계혁명당은 자본주의에 맞서 코뮤니즘, 즉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로서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사회를 위한 혁명 운동을 이끌어갈 것이다.

 

202697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계급투쟁(Klasbatalo)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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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본주의는 우리를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는 우리를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오직 전 세계적인 계급 운동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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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비롯한 코뮤니스트 좌파 단체들이 몇 년 전 예견했듯이, 해결할 수 없는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지배자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이는 훨씬 더 광범위한 갈등의 전조가 되고 있다. 수많은 휴전평화 협정이 계획되거나 실행되었음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4년이 넘었고, 팔레스타인 전쟁은 거의 3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이후로 위기는 더욱 심화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 세계적인 전쟁의 불씨는 새롭고 극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거의 6개월 동안 중동 전역에 미사일과 드론이 쏟아지면서 수천 명이 사망했고, 걸프 국가들의 에너지 기반 시설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석유, 가스, 비료 등의 세계 주요 무역로 중 하나인 호르무즈 해협이 이란의 봉쇄로, 이어 미국의 봉쇄로, 그리고 다시 이란의 봉쇄로 인해 차례로 폐쇄된 사실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단순히 군사력뿐만 아니라, 제재, 관세, 기타 금수 조치와 같은 경제적 무기를 통해서도 치러진다. 미국은 오랫동안 이란 정권 교체를 시도해 왔으며, 지난 반세기 동안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제재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제재를 위반하는 국가나 기업에 대해 (자금 접근 및 세계 금융 시스템 이용 차단 등을 통해) 벌금과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주요 제국주의 경쟁국인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더 광범위한 제국주의 투쟁의 일환이다. 이란으로부터 중국으로 공급되는 석유를 장악하는 것은 미국에 큰 이익이 될 것이며, 베네수엘라에서 펼쳤던 전술의 재현이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시도가 실패했으며, 이란의 정권 교체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는 가운데 평화 회담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경제 전쟁에서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강력한 반격 무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전 세계에 미치는 전쟁의 파급 효과를 더 확대하고 있다. 일본 석유산업의 공급 차질부터 아프리카 농부들이 올해 작물 재배에 필요한 비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는 참담하다. 호르무즈 해협에 발이 묶인 선박들은 움직이는 속도가 더딘데, 이는 온대 해역에 너무 오래 머물러 선체에 해조류와 따개비가 달라붙은 탓도 있지만, 이란 해군에 의해 나포되거나 봉쇄될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 국제 무역의 통로였던 이 해협은 이제 이란의 통행료 징수 해로로 변해가는 듯하다.

 

산유국들은 석유 수송 경로를 변경하거나 석유 및 가스 수출에 미치는 타격을 완화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반도를 가로질러 홍해의 얀부( Yanbu) 항구로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석유 수송 경로 전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탈퇴했다. 이는 해협이 재개방될 때 생산량 감소분을 쿼터 제한 없이 만회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아랍에미리트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인도와 중국 같은 원유 수입국들은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야 했다(인도는 미국의 명시적인 승인 아래, 중국은 마지못해). 기반 시설 피해로 인해 무역이 내일 당장 재개된다 하더라도 회복에는 수년이 걸릴 수 있다. 이번 에너지 충격은 2022년 에너지 위기나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처럼 인플레이션에 즉각적이고 극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는 결국 노동계급의 생활비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단기에서 중기적으로 볼 때, 석유 및 가스 공급망에 크게 의존하는 식료품과 휘발유 같은 기본 생필품 가격은 계속해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아랍에미리트가 탈퇴한 석유수출국기구(OPEC) 카르텔은 페트로달러체제의 일부이다. 이 체제는 전후 호황이 끝나고 이윤율이 하락함에 따라 미국이 전후 자본주의 질서의 기반이었던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달러 본위제로 전환해야만 했던 시점에서, 전후 세계 경제 체제의 주요 축이 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달러를 자유롭게 찍어낼 수 있었다. 미국이 이러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달러가 세계 자본주의, 특히 석유 거래의 주요 통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며, 그 대가는 전 세계가 치렀다. 석유 판매 수익을 달러로 환산하여 미국 금융 시스템에 재순환시킴으로써, 산유국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로서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미국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인 화폐 발행 능력은 미국이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이 군사력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며 미국과 달러 패권에 대한 모든 위협을 진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적어도 원래 계획은 그랬다. 그러나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러한 방식으로 석유 자금을 재순환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제 석유 최대 수입국은 아시아 경제권이며, 미국은 상당 부분 자급자족하고 있다. 걸프 국가들은 석유 수익을 미국 은행이 아닌 국부 펀드에 투자하는 추세이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인해 달러 패권 또한 더 위협받고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는 유조선에 통행료를 달러가 아닌 이란 리알(rial)이나 심지어 위안화(yuan)로 징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제국주의 경쟁국, 특히 중국에는 세계 무역, 특히 석유 무역에서 달러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것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을 무너뜨리는 핵심 전략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에 원유 대금을 위안화로 결제해 왔으며, 이란 전쟁은 달러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가속할 것이다.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미국 재무장관이 6월 양해각서(MOU)에 따라 합의된 원유 판매 대금을 달러로 지불할 것을 이란에 헛되이 요구한 것은 미국의 우려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 중앙은행은 다른 기관들과 협력하여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스위프트(SWIFT, 국제은행 간 금융통신협회)에 필적할 만한 국제 결제 시스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스위프트는 미국이 장악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을 통해 미국의 패권에 적대적이라고 간주하는 국가는 물론 중국인 개인에 대해서도 제재가 가해져 왔다. 그러나 위안화는 여전히 달러가 지배하는 세계 금융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신뢰성 문제를 안고 있으며,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몇 건의 거래만으로는 달러화의 영향력을 흔들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베네수엘라, 쿠바, 콜롬비아 선거에 ​​개입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위안화는 여전히 마찰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란 전쟁은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에 전략적 실패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양국 모두 이란 정권 교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역시 우월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나 하마스를 거점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미국에 가장 큰 타격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이미지가 훼손된 점이다. 만약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그 기반이 되는 무역로 및 공급망을 유지할 수 없다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명확하지 않고, 분쟁의 양상 또한 불분명하지만, 이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요컨대, 우크라이나와 이란에서 벌어진 전쟁은 모두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세계 제국주의 투쟁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쟁 추동력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경제 위기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윤율 하락 경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존 자본의 가치 창출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결국 석유나 희토류와 같은 전략 자원은 물론 무역로,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여 경쟁국이 이를 확보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쟁과 세계 경제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식 시장(군수 산업 관련 주식뿐 아니라)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스페이스X(SpaceX)의 기업공개(IPO)를 통해 세계 최초의 1조 달러 부자로 등극했다. 스페이스X는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AI 기술과 회사 수익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명확하지 않다. 오픈AI(OpenAI), 앤트로픽(Anthropic), 엔비디아(Nvidia) 등은 모두 가장 낙관적인 수익 전망을 바탕으로 수십억 단위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투기 거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AI 투자자들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고 있다. 그들이 금전적 이익을 좇는 데 열광하는 이유는 수익성 있는 산업 투자처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자본가들은 이 과대광고를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대부분 허황된 것이고 AI 사용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이 투자 손실을 상쇄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250년에 걸친 미국 역사의 정점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그 자체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AI 도구들이 단조로운 일자리를 대체하여 실업률을 높이고, 최적화된 감시 및 무기 시스템을 통해 더욱 억압적인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 외에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한편, 영국에서는

 

영국은 심각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난 10년 동안 일곱 번째 총리가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키어 스타머(Keir Starmer)2024년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망가진 영국"과 지난 13년간 집권했던 보수당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다. 스타머가 이끄는 노동당은 집권 이후, 변화를 약속했던 이전 정부들처럼 방향성을 잃고 스캔들에 휩싸였다. 복지 혜택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삭감 및 위협은 국민적 반감을 샀다. 스타머가 과거 신노동당의 "어둠의 왕자"이자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의 측근으로 알려진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의 임명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의혹은 그의 이미지를 더 실추시켰다. 더욱 강경한 이민 정책 시행 시도, 가자지구 학살 항의 시위대 탄압, 트랜스젠더 권리에 대한 정책 번복 등은 그들의 기존 지지 기반이었던 진보 및 좌파층을 등 돌리게 했지만, 그들이 끌어들이려 했던 우파 비평가들을 만족시킬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스타머의 후임으로는 그레이터 맨체스터의 전() 시장인 앤디 번햄(Andy Burnham)이 선출되었다. 비교적 인기 있는 정치인인 그는 남북 격차 해소를 내세우는 것 외에는 전임자보다 나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올여름에도 영국 전역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인종 폭동이 다시 일어났다(가장 최근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전직 준군사조직원들이 불법여부와 상관없이 이민자로 지목된 사람들의 집과 차량을 불태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영국 자본주의의 심각한 실패로 인해 이민자들이 고통받는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정치 지형이 얼마나 급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로, 경쟁 정당인 극우 포퓰리즘 정당 '재건영국당(Restore Britain)'은 소수 민족의 "재이주"를 직접적으로 주장하며 '영국개혁당(Reform UK)'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가 우리를 전쟁과 기후 파괴로 몰아가는 흐름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 산발적인 저항은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주로 국민보건서비스(NHS)나 대학과 같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이 두 분야의 지속적인 위기는 정부 재정 지원 삭감의 결과이며, 이는 보건 및 사회복지 서비스의 민영화와 교육의 시장화를 부추기고 있다. 그 결과, 직원들의 근무 환경은 악화하고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더 광범위한 저항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만, 극복해야 할 심각한 장벽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의사와 강사들 사이에서 여전히 만연한 '자신의 직업만 지키려는' 사고방식이 있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노동계급이 직면한 과제는 막대하다. 영국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영국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모든 주요 중심지에서 반복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 노동계급이 지난 100년간의 반()혁명의 무게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성을 재발견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힘을 지닌 국제적 사회 세력으로서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이 과정의 일환으로, 우리는 혁명가 조직, 즉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정치적 저항으로 단결하여 진정한 계급적 대응을 조직할 수 있는 가장 계급의식이 투철한 노동자들의 조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혁명 단체들은 규모가 작고 흩어져 있으며 전체 노동계급과 거의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계급 저항의 부활에도 달려 있다. 우리는 전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혁명가로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계급의식을 가진 투사로서 우리의 임무 중 하나는 이러한 혁명적 전망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현재 노동자들은 혁명 단체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설령 안다고 해도 자본의 좌파 정당(각종 노동·진보·좌파 정당) 및 단체들과 우리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노동자가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끼거나 심지어 자본주의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점조차 의심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해답은 사회의 혁명적 재구성을 위한 노력보다는, 운명론으로의 후퇴나 정치적 새로움(신기루)의 추구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역대 구원자들이 우리 모두에게 닥친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음이 드러나더라도, 또 다른 사기꾼이 나타나 자본주의를 구원하겠다는 또 다른 계획을 내세워 대중의 여론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 중심지조차도 대다수 노동계급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이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추세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작동 방식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오직 자본주의를 전복해야만 또 다른 세계적 대재앙을 막을 수 있다. 오직 세계 자본가계급에 맞선 세계 노동계급의 대대적 운동만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다. 노동계급이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자본주의 전복을 시도한 지 벌써 100년이 넘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노동계급이 자체적인 대중 의사결정 기구(노동자 평의회, 즉 소비에트)를 창설했고, 한때 세계 혁명을 고수하던 혁명 조직(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을 주도한 볼셰비키당)이 존재하기도 했다. 이 시도의 실패는 100년간의 반()혁명을 낳았고, 이는 다시 국제주의 혁명가들의 분열과 전 세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저하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혁명가들은 자본주의가 왜곡한 역사적 주장, 즉 모든 노동자 정치 조직이 독재로 이어진다는 허위 주장을 일축해야 한다. 오히려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오늘날 노동계급을 위한 강령을 갖춘 세계혁명당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다. 그중 핵심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결코 타인에게 위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의 정당에도 권력을 넘겨주지도 않는다라는 것과 사회주의는 소수의 당에 의해 실현될 수 없으며수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실천하는 법을 배울 때만 실현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공개적으로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 국방비가 증액되고 있으며, 이에 필요한 자금은 사회 복지 지출 삭감을 통해 마련되고 있다. 동시에 영국과 유럽의 지배자들은 징병제를 공공연히 요구하며, 노동자들에게 전쟁을 위해 목숨이나 생계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전쟁의 궁극적인 희생자는 전 세계 노동계급, 즉 이 체제의 경제적 착취의 기반이 되는 대다수 노동계급이다. 국제주의자들은 전반적인 긴축 정책과 전쟁 추진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를 더 넓은 노동계급에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전쟁이 아닌 계급 전쟁으로(NWBCW)'라는 운동에 참여해 왔다. 이 운동은 다양한 경향의 국제주의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이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어떠한 민족 부르주아지도, ‘덜 나쁜 악, 그리고 어떠한 새로운 국가도 지지하지 않는다!

국가, 임금 노동, 사유 재산, 화폐, 그리고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세상으로 대체되는 사회를 위하여!

현재의 전쟁과 앞으로 다가올 전쟁이 노동계급에 가할 경제적, 정치적 공격에 맞서 투쟁하자!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투쟁을 위하여, 독립적인 파업위원회, 대중 집회, 노동자 평의회의 결성을 위하여!

억압과 착취에 맞서, 노동계급의 단결과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의 연대를 위하여!

 

우리는 모든 국제주의자가 자기 배경에 상관없이 이러한 위원회에서 우리와 함께 활동하거나, (해당 지역에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유사한 모임을 결성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제주의자들이 (자신을 맑스주의자, 아나키스트, 혹은 그 밖의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우리의 경제 분석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혁명 조직의 본질에 대해 우리와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두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위원회를 도구로 삼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적인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쟁으로 치닫는 경향과 환경 위기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공포를 우리 모두 매일 겪는 일상적인 시련(저임금과 착취 심화, 공공 서비스 축소, 실업, 열악한 생활 환경)과 연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고통을 가중하는 것이 본질이며, 이러한 고통은 개인적으로는 생활 및 노동 조건의 악화를 통해 느끼며, 집단적으로는 지배계급이 더는 운신의 폭을 좁히지 못하고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넣을 때 느낀다. 계급전쟁은 현실이며, 우리는 매일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저항하기 위해 조직해야 한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위원회는 혁명가들이 이를 실천할 방법이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는 데 동의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고, 전쟁과 억압, 착취가 없는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조직 활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혁명적 전망28(4) 사설. 20265월 맨체스터에서 열린 CWO 연례총회에서 논의한 관점들을 요약한 글.

 

20267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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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되어 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썩은 이념들

해체되어 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썩은 이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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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중동 전쟁을 둘러싼 여러 상황 속에서, 특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지도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이성적인 발언들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이란의 성직자, 혁명수비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몽매주의는 국민을 통제하고, 징집하고,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급진적 시온주의가 비()유대인 인구를 제거하고 성경에 나오는 대이스라엘을 복원하려는 인종 청소가 자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이 분쟁에 대한 전략적 명분은 여전히 매우 모호하고, 변덕스러우며 심지어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쟁 선전은 망상적인 구세주(메시아)적 서사를 조장해 왔는데, 미국이 서구 기독교 문명을 군사력으로 수호해야 할 신성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전쟁 담당 국무장관피트 헤그셋(Pete Hegseth)의 주장이 그 보기이다. (미국인을 서구를 수호하는 새로운 십자군으로 묘사하는 '미국식 십자군 전쟁')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트럼프나 네타냐후 같은 부르주아 분파의 어리석음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사실 이러한 비이성적 표현의 이면에는 유물론적 토대가 깔려 있으며, 그 사회적 차원은 특히 지배계급의 이념적 상부구조의 붕괴, 즉 미래가 없는 자본주의 세계, 해체되어 가는 세계에서 비롯된 붕괴에 반영되어 있다.

 

사회에서 비이성적 이념의 부상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주권 시민운동,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급진주의 등 극도로 비이성적인 정치 이론과 세계관의 부상을 목격해 왔다. 이러한 현상들은 더는 고립된 인터넷 사용자나 주변부의 소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부르주아지의 핵심 세력이 이를 옹호하고 있으며, 대중 사이로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 중 하나는 과학에 대한 신뢰 상실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경향으로 나타난다.

 

- 기후 회의론 : 수십 년 동안 과학자들은 대기 중 온실가스(특히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기하급수적 증가로 인한 온실 효과가 지구 온난화를 초래하고, 이에 따라 지구 평균 기온이 상승하고, 이는 다시 사이클론, 폭우, 기근, 가뭄과 같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의 증가를 특징으로 하는 기후 변화를 촉발할 것으로 예측해 왔다. 이러한 예측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충분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확인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2026년의 조기 폭염으로 입증되었다. 경제적 결과뿐만 아니라, 특히 미래에 인류의 삶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지배계급이 이러한 영향을 억제하기 위해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이유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1], 과학적 논증과 이러한 예측에 대한 실증적 검증에도 불구하고, 모든 증거를 무시한 채 확고하게 자리 잡은 기후 부정론자 운동이 어떻게 존재하는지[2]를 지적하는 데 있다.

 

- 백신 반대운동 :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동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백신[3]에 대해 단순히 의구심을 품은 데 그치지 않고, 소아마비 백신처럼 수십 년간 사용되어 온 백신과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해 온 다른 백신들까지 포함해 백신 전반의 효능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나타났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불신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이는 반증 실험이나 이러한 불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음모론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과학의 연구 결과를 부정하는 비이성적 태도의 또 다른 표현으로, 광신자들은 과학이 훨씬 더 사악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주장하는 어둠의 세력을 위해 거짓말을 퍼뜨린다고 무책임하게 비난한다[4].

 

음모론과 관련된 또 다른 개념은 거대 대체(Great Replacement)’ 이론이다. 이는 최근 들어 세력을 얻고 있는 완전히 근거 없고 비이성적인 주장으로, ‘난민의 대량 유입이 다시 한번 한 국가(혹은 유럽과 같은 대륙)현지 주민을 대체하고 복종시키려는 배후 세력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특히 포퓰리스트 우파와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미지의 것과 외국인에 대한 (치밀하게 조장된) 공포, 그리고 점점 더 깊은 빈곤과 폭력에 빠져드는 사회에서 희생양을 찾으려는 욕구에 의해 부추겨지고 있다.

 

이 모든 비이성적 이론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포퓰리스트 우파의 선전을 넘어, 이 이론들을 부추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불확실성,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바로 그 불확실성, 미래에 대한 불신, 나아가 미래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로 인해 현실과 합리적 사고로부터 도피하여, 신비주의적·비밀주의적·음모론적 믿음에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현실에 직면하여, 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의 과장된 선전 속에서

 

이러한 비이성적 이론들은 특정 계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부 정당과 정부의 정책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 결과가 심각하고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가장 터무니없는 이론과 가장 망상적인 사상들이 세계 최강대국의 최고 권력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다음 세 가지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과학에 대한 의문, 심지어 거부까지 : 정치 지도자들과 지배계급 내 유력 인사들 사이에서 과학에 대한 불신이 확산하고 있으며, 이들은 과학을 직접 공격할 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 해롭고 위험한 정책까지 추진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트럼프는 자칭 백신 반대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Robert Kennedy Jr)를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예방접종 캠페인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미국은 계속해서 확산하는 홍역 발병에 직면해 있으며, 점점 더 허술해지는 백신 접종망의 틈새로 홍역이 퍼지고 있다. 717일 현재,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2,260건의 홍역 확진 사례를 기록했는데, 이는 2025년 한 해 전체 확진 건수(2,288)와 맞먹는 수치이며 2024년 대비 10배에 달하는 수치다. 이러한 급증으로 인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오는 11월 예정된 다음 평가에서 2000년부터 유지해 온 홍역 퇴치국지위를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20251110, 캐나다는 이미 이 지위를 잃었으며, 126일에는 영국과 스페인을 포함한 6개 유럽 국가가 뒤를 이었다. ‘이는 1989~1991년 이후 가장 큰 유행이며,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이다라고 홍역 협력단(Measles Collaborative)’의 패시 스틴치필드(Patsy Stinchfield) 단장은 설명했다.”(르 몽드, 723) 과학자들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는 코로나19와 같은 대유행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과학에 대한 공격은 기후 변화 문제에서도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트럼프는 줄곧 기후 변화는 허구이자 사기라고 주장해 왔다. 바로 이러한 태도 덕분에 그는 지난 2, ‘시추해, 시추해(Drill, baby, drill)’라는 구호에 맞춰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철회하겠다고 뻔뻔스럽게 발표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트럼프 지지자인 밀레이(Milei) 대통령도 똑같은 태도를 보여왔으며, 이탈리아의 살비니(Salvini)가 이끄는 레가당(Lega)과 같은 일부 정부 내 세력도 마찬가지이다.

 

지구 온난화 대응 조치를 시행하지 않거나 무기한 연기하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터무니없는 기후 변화 부정론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자원 부족과 자본주의의 난국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결국 지배계급이 재앙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구세주주의(Messianism) : 구세주주의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지배계급 내 유력 인사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세계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Musk)는 자신을 새로운 구세주로 자처하며 '기술과 우주여행을 통해 인류를 멸종에서 구하겠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과장된 자아의 망상이 아니다. 이 과대망상증 환자는 이러한 망상적 이념을 퍼뜨리는 유럽의 극우 포퓰리스트 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복음주의 신앙과 전통주의 기독교를 혼합하여 자신을 미국의 '구세주', '이 사명을 위해 신에게 선택받은 자'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의 '전쟁 장관' 헤그셋(Hegseth)은 몸에 '서방 십자군'의 상징을 문신으로 새겼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이끈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에서 널리 공유되는 이러한 이념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내외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 국내적으로는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심어줌으로써(이에 따라 그는 능력보다는 개인적인 충성도를 기준으로 측근을 선택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베네수엘라 사례, 이란과의 전쟁, 그린란드에 대한 야망에서 볼 수 있듯이 잔혹하고 맹목적이며 약탈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또한 경제 분야에서도 관세 전쟁이나 특정 국가들을 상대로 한 경제적 위협을 가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5] : 이 허무주의적이고 '()국가적' 운동은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비이성이 확산하는 또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르헨티나에서는 '전기톱 대통령'으로 불리는 밀레이를 통해 집권까지 했다. 자유지상주의(이들은 libcom과 같은 리버테리안 코뮤니즘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역자>)는 개인주의, 사유재산, 규제 완화를 찬양하는데, 이는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징후 중 일부이다.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은 사회 구조의 해체와 크고 작은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전방위적 충돌 심화라는 배경 속에서, 사회 모든 계층에서 '각자도생'이라는 사고방식이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규제 완화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체제가 겪고 있는 회복 불가능한 쇠퇴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해 온 전체 정책, 즉 국가 자본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왜냐하면, 영구적인 위기에 처한 경제를 떠받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힘을 가진 것은 오직 국가이기 때문이다. ‘딥 스테이트’(, 국가 권력의 다양한 분과)와의 투쟁을 명분으로 삼아, 유능한 기관을 해체하고, 경쟁력을 짓밟고, 최첨단 연구와 학문을 공격하고, 가장 유능한 전문가들을 해고하고 무지한 사람이나 단순한 이념가로 대체함으로써 미국 국가를 파괴하고 마비시키는 트럼프의 행태는, 자유지상주의가 제시하는 자본주의 해체 이론의 명백한 표현이다.

 

해체와 전망 부재의 산물

 

현대 사회의 사고와 삶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비이성적인 현상들은 맑스주의 방법론인 역사적 유물론에 기반을 둔 분석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사회는 지배적인 생산관계에 물질적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그 생산관계를 정당화하고 이에 부합하도록 고안된 이념적·법적 장치가 구축된다. 보기를 들어,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부르주아지가 경제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을 때, 철학 사상은 유토피아주의자와 합리주의자들의 입장을 발전시켰다. 이는 인간의 이성이 진보하고, 이전까지 봉건적 생산양식에 특정한 계급 질서의 불변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하는 긍정적 세계관이었다. 뒤이어 나타난 관념론적 철학 사상은 초기 단계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사고 형태를 유지하며, 존재를 순수한 정신의 발전으로 정당화했다[6]. 19세기에는 실증주의 운동이 과학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 및 발전 능력에 대한 확신을 표명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이러한 합리주의는 결국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확실성의 종말을 예고하며 불가지론과 비관주의를 확산시켰다.

 

이 모든 것은 맑스의 다음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특정한 조건에서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과거에 대한 분석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상의 비이성적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는 근본 원인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객관적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의 현재 상태는 역사적 쇠퇴와 역사적 위기,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상태, 그리고 인류에게 긍정적인 미래를 제시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이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비이성적 경향이 더욱 심화한 것은 쇠퇴한 자본주의가 최종 단계, 즉 우리가 해체의 시기라고 부르는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부르주아지는 역사적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세계대전을 사회에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의 약점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극단적인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7]. 이러한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무너져 가는 세계에 맞춰 적절하게 조직화할 수 없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지 못했고, 자본주의 야만성에 대한 대안인 코뮤니스트 혁명을 제시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현상이다.

 

죽어가는 체제의 역사적 위기에서 비롯된 이러한 사회관계의 교착 상태는, 사회가 내부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탈출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요컨대 사회 전체가 전망을 상실한 상태다. 시대에 뒤떨어진 계급, 사회의 모순적인 발전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계급처럼, 부르주아지는 당면한 현실에 매몰되고 비이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역사가 심판한 계급과 체제의 존재 자체는, 그 체제가 역사적 위기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수록, 신비주의적 망상, 도덕적 타락,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광적인 개인주의 속에서 점점 더 비이성적 논리로만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계급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들 역시 어떠한 전망도 갖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특히 소부르주아지는 전망이 없는 전형적인 계급으로, 자유지상주의나 반국가주의, 또는 세금 반란과 같은 반동적인 형태를 통해 이러한 현상에 매우 취약하다. 노동계급은 본질적으로 더 회복력이 강하지만, 이 현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노동계급 중 가장 취약한 계층은 프롤레타리아적 역사 관점을 갖지 못한 채, 기후 위기 부정이나 구세주에 대한 기대와 같은 단순하고 위안적인 이론에 일시적으로 안주하거나, 위기를 설명할 희생양(엘리트, 외국인, 유대인 등)을 찾는 데 몰두한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의 해체를 프롤레타리아에 전가한다. 유일한 미래는 혁명적 전망에 있다.

 

현재로서 부르주아지는 사회 해체의 부패한 결과를 노동계급에 전가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특히 좌파는 이러한 이념적 왜곡을 이용하여 '민주주의 수호', 부르주아 '법치주의', 혹은 '책임 있는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왕은 없다‘(No Kings) 시위, 독일의 극우 독일대안당(AfD) 반대 시위, 그리고 네팔, 방글라데시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특히 젊은 세대인 'Z세대' 사이에서 일어난 정부 부패 반대 시위에서 이러한 현상을 목격했다. 주로 좌파 정당이나 부르주아지의 극좌 단체들이 주도한 이러한 시위들은, '공정하고', '민주적이며', 그리고 이른바 더 친환경적인형태의 자본주의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고 믿도록 고안된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이 체제는 개혁할 수 없으며,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지배계급이 인류에게 긍정적인 미래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퇴폐적 이념에 맞서, 사회 역사를 바라보는 또 다른 분석,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야만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인 맑스주의이다.

 

맑스주의는 우리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계급이 아닌, 사회의 다른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인류를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피착취 계급이다. 그 새로운 시대는 착취가 종식되고 협력이, 빈곤이 종식되고 풍요가, 경쟁과 각자도생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연대가 기본이 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맑스주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단순히 여러 철학 체계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계급의 무기이다.

 

오늘날 이 계급은 아직 공개적으로 혁명적 행동을 펼칠 역량이 부족하지만, 자본의 위기로 인해 위협받는 일상적 생활 조건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경험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가들의 선전과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정치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그것은 물질적 힘이 된다 (맑스)

 

2026726

헬리오스(Helios)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

[1] 생태 위기에 관한 우리의 선언문은 ICC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658/manifesto-ecological-crisis

[2] 여기서 우리가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부정론을 신봉하는 일부 집단이지, 사회적 필요와 인간의 생명을 수호하기보다는 오로지 이윤 추구만을 목표로 행동하며, 이러한 이론을 이용해 지배계급의 태만함을 은폐하려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아니다.

[3] 이 백신은 신속하게 개발되었고, 감염 확산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백신 사용과 관련된 금기 사항 및 잠재적 부작용에 관해 철저한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으며, 이것이 신뢰 부족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4] 비록 지배계급의 주요 세력들이 직접 부추긴 것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음모론적 태도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규명할 수 없는 모호한 세력들에게 전가함으로써 결국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간과할 수 없다.

[5] "자유지상주의는 미국에서 발전한 이념이자 정치 철학으로, ‘자유와 자연법을 엄격히 우선시하며, 권위, 전통, 평등과 같은 다른 가치들보다 선택의 자유, 개인주의, 자발적 결사를 강조하는 일련의 이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가 강압적이고, 정당성이 없으며, 심지어 불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하며, 개인의 자유와 자발적 결사를 중시한다. 그들은 규제 없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실천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최소 국가(민정주의)를 추구한다." (위키백과)

[6]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사상의 진보였음을 인정했지만, 이를 단순히 뒤집어, 정반대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7] 최근 몇 년간의 투쟁은 이를 증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가 강요하는 경제적 희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부르주아 전쟁터에서 죽는 궁극적인 희생을 받아들일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다.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833/rotten-ideologies-system-decom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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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폭염: 치명적인 새로운 일상

유럽 폭염: 치명적인 새로운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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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1976년의 악명 높은 여름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당시 영국은 24일 동안 30가 넘는 폭염에 시달렸고, 흉작이 닥치며 식료품 가격이 치솟았다. 2026년 여름은 이미 50년 전 30도 이상 기온을 기록한 날의 최다 일수를 넘어섰다.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현상이었던 것이 이제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의 평균 기온은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평균보다 1.2°C 높았으며, 2022년에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40°C를 기록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과 산불

 

햇볕에 타거나 땀을 지나치게 흘리는 것과 같은 불편함을 넘어, 이번 폭염은 이미 영국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 수천 명의 사망으로 이어졌다. 영국 기상청(Met Office)에 따르면, 5월과 6월 두 달 동안만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에서 약 2,700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지만, 특히 65세 이상 고령자나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게 위험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장 취약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극심한 더위든 추위든, 악천후는 연료 빈곤에 시달리거나, 열악한 주거 환경에 살거나, 의료 및 지원 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준다.

 

기록적인 폭염의 또 다른 결과는 물론 산불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소방 및 구조대는 7월 단 2주 동안 200건이 넘는 산불에 출동했으며,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스코틀랜드의 케언곰스(Cairngorms) 국립공원에서는 여전히 화재가 진행 중이다. 이에 따라 수백 명의 주민이 대피했지만, 피해와 인명 손실은 주변 환경과 야생 동물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화재 중 상당수는 이미 생태적으로 민감한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보기를 들어, 케언곰스에는 영국 멸종 위기종의 25%가 서식하고 있다).

 

유럽 대륙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여러 나라에서 40°C가 넘는 기록적인 고온이 발생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대형 산불로 30만 명이 넘는 주민이 대피해야 했다.

 

자본주의적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영국 정부는 폭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제도를 거의 마련하지 않았다. 물을 더 많이 마시고 실내에 머물라는 식의 단순한 조언 정도만 제공했을 뿐이다. 하지만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 차원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25COP30(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1.5목표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2024년 유엔 배출량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정책으로는 2100년까지 기온이 최대 3.1까지 상승할 수 있으며, 설령 약속이 지켜진다 하더라도(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2.6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는 지구 생명체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COP30에서는 산유국의 반대로 화석 연료 단계적 폐지가 의제에서 제외되었다. 분명히,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류가 분열해 있는 한, 지구적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격렬하게 벌어지는 제국주의 전쟁은 문제를 훨씬 더 악화시키고 있다. 무기 생산과 실제 사용은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 배출을 초래한다. 전쟁은 우리 몸과 땅과 물을 수세대에 걸쳐 오염시킨다. 설상가상으로, 새로운 AI(인공지능) 군비 경쟁은 유해 폐기물을 배출하는 서버와 냉각을 위해 막대한 양의 물을 소비하는 데이터 센터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것은 당연하다. 세계는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 생태계 붕괴, 그리고 모두의 고통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지만, 정치인, 기업가, 그리고 부유층은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를 자멸로 이끄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지구를 구하는 일은 결국 국제 노동계급의 몫이다.

 

2026813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오로라76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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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안은 있다

세상은 불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대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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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켜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전쟁, 또 다른 잔혹 행위, 또 다른 국가 사이 갈등이라는 암울한 소식만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소식은 인류를 파멸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상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는 듯하며, 더 큰 규모의 분쟁이 임박했다는 경고 신호를 이제는 부인하기 어렵다.

 

전쟁 중인 세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정권 교체 시도는 실패했고, 오히려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로 중 하나인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봉쇄되어 석유와 가스 수송을 방해하고 전 세계적으로 가격을 상승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는 이른바 "휴전"이 선언되었지만,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어린이들을 표적으로 삼아 살인을 계속 저지르고 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는 이스라엘 방위군(IDF)(자국) 정착민들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 이스라엘 안보 내각을 장악하고 있다. 이스라엘 내각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추방하거나 살해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34개의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43천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승인했다. 한편, 수단, 콩고, 미얀마에서는 민족 집단 사이, 대리 세력 사이, 그리고 붕괴한 국가들 사이의 장기적인 내전이 지구 곳곳을 질병과 죽음과 파괴로 뒤덮고 있다.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들은 이제 가자지구, 수단, 미얀마와 같은 곳에서 이미 자행되었거나 자행 중인 대량 학살과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침공이 교착 상태와 격화 사이를 오가고 있으며, 총기, 탱크, 포병, 그리고 점점 더 많이 투입되는 드론이 양측의 병력과 기반 시설을 초토화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 전선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최근 카스피해에서 러시아로 향하던 이란 상선을 공격한 데 이어, 후티 반군이 이란을 지원하기 위해 만데브 해협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전쟁을 재개함으로써 또 다른 주요 세계 무역로가 마비되고 있다.

 

이러한 분쟁은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수많은 분쟁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국 대 중국의 경쟁

 

이러한 수많은 갈등의 근저에는 두 제국주의 강대국 사이의 세계 패권 쟁탈전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쇠퇴하는 강대국으로 보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을 추월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은 국제 질서의 최정상 자리를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중국의 이익과 동맹국들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거나 공격해 왔다. 이는 이란, 우크라이나, 베네수엘라, 쿠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금융 위기의 가능성이 모든 경쟁국의 계획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본주의 위기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외면하는 명백한 문제다

 

왜 지금 이 모든 갈등이 격화하고 있는 것일까? 1970년대 전후 호황이 끝난 이후, 자본주의 체제는 위기를 임시방편으로 막으며 전전해 왔다. 소련의 붕괴는 세계 대전 없이 이루어졌지만, 그 덕분에 중국이 저비용 제조 거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서구의 수백만 노동자들은 아웃소싱(위탁), 규제 완화, 그리고 전반적인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었고, 금융화, 자동화,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AI 열풍(거품)으로 자본주의는 간신히 버티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데 기반을 둔 체제의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고, 또 다른 경제 호황을 일으킬 수 있는 수준의 수익성을 회복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세계 곳곳에서 경기 침체와 흔히 "쓰레기화“(enshittification : 플랫폼의 품질 저하, 플랫폼의 타락)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배계급은 선택의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윤 추구라는 제단 위에서 우리의 육체적·정신적 건강, 예술과 문화, 자연환경을 희생시키면서도 오히려 돈과 자원은 전쟁을 부추기는 데 점점 더 낭비되고 있다. 다행히 아직 공개적인 분쟁 지역에 살지 않는 노동계급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붕괴하는 의료 서비스, 과부하 된 교육 체제, 쇠락해 가는 거리, 허울뿐인 '고용 시장'에서 줄어드는 일자리가 현실이다. 수많은 사람이 무감각해지고 우울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분노하지만, 비극적이게도 포퓰리스트 우파의 분열적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그 분노를 더는 인류를 위해 작동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이주민, 특히 "유색인종" 이주민들에게 표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는 노동계급이 쥐고 있다

 

자본주의 위기의 여러 불씨가 하나의 거대한 화염으로 합쳐지면서,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가 한때 말했던 대립하는 계급 사이의 공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지배계급이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려,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끝없는 이윤 추구를 포기하여 우리가 마침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전 지구적 이윤 생산 체제가 그들의 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하나의 세계적 계급이며, 어떤 식으로든 지구상의 생명 기반을 파괴하는 하나의 세계적 체제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해졌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연대와 협력, 그리고 필요에 따른 생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상품 생산의 중심에 독보적으로 자리한 우리 노동자들은 작업장과 지역 사회에서의 저항을 통해 이 체제를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파업(볼리비아, 포르투갈), 대규모 시위(칠레, 인도), 징병 거부(우크라이나) 등 이러한 반격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움직임들이 고립적이고 일시적이며,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자본주의의 개량주의 수렁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권력자들에 대한 도전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여전히 부족한 것은 더 광범위한 계급 단결과 자기 조직화, 그리고 공동의 정치적 목표이다. 우리가 계급투쟁의 불씨를 마법처럼 일으킬 수는 없지만, 혁명을 위한 정치적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노동계급 전체가 무너져가는 자본주의를 더 빨리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류의 미래는 전 세계 노동계급에 달려있다.

 

202686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오로라76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6-08-06/the-world-may-be-on-fire-but-there-is-an-altern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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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3호] 협조

협조

어느 위원장에게

 

 

 

왼손이 아는 걸 오른손이 모를 리 없다

고통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서로 방패가 될 때

슬픔의 전이를 막을 수 있다

말을 건네고 들어줄 곁이 있어야

고립의 깜깜한 골짜기에서 넘어지지 않는다

혼자 살 수 없는 단순명쾌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가난에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협조란 그런 것

함께 주먹 쥐던 손을 뿌리치고

주먹을 쥐게 만든 손과 악수를 하는 건

배신이다
 

 

신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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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신경현 197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시집 그 노래를 들어라, 따뜻한 밥, 당부가 있다.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모임, ‘해방글터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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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 운동 평가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평의회 운동 평가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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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의 혁명적 조직화 문제는 노동자 자기해방 원칙의 핵심이다. 맑스와 엥겔스 이래, 1 인터내셔널의 구호가 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기 과업이어야 한다”(국제노동자협회규약) 라는 원칙은 모든 일관된 코뮤니스트 실천의 토대를 이룬다. 이러한 자기해방은 계급의 집단적 조직화 없이는 달성될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라는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의 단일 기관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혁명 투쟁의 역사는 이러한 평의회들이 필수적이지만, 퇴보하기도 하고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여기서 노동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투쟁적인 분파에서 비롯된 혁명당(코뮤니스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현재의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동지들이 참여했던) 한국의 평의회 운동을 평가하고, 혁명당과 평의회의 관계, 오늘날 노동자평의회의 의미와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000년대 한국 평의회 운동에 대한 간략한 평가

 

아래는 2002노동자민중회의에서 제출한 평의회 운동 제안서 일부이다.

 

평의회에 대한 악선동들

 

평의회는 꼬뮨, 소비에트 등과 같이 노동계급의 (몰계급적 공동체가 아닌)자치체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평의회는 자율운동체(정신)이며 조직이다.

 

우리가 한국 사회에 평의회라는 조직운동전망을 대중적으로 제출하자마자 적잖은 이들이 무정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댔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과거 소비에트의 맹아였던 러시아 노동자평의회에 일군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침소봉대해 악의적으로 평의회의 가치를 폄하하는 몰계급적 악선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별반 설득력을 얻지 못하자 이제 평의회란 혁명 시기에나 가서 생겨나는 조직이라는 딴지를 널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 역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소비에트 이전 공장위원회 등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미성숙의 학습 상태에서 당운동에 경도된 지도부의 분별없는 발설을 그져 따라 읖조리는 앵무새 복창일 뿐이다. 이들은 파리 꼬뮨조차도 본래 존재하던 자치체가 아니라 파리 혁명 때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없는가. 그러나 꼬뮨은 12세기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립된 자치체로서 사회혼란이나 영주권(領主權) 남용에 대해 사회질서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이 상호부조를 맹세하고 단결하여 왕 또는 영주로부터 사회단체로 인정을 강제했던 것이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왕권의 간섭이 강화되자 도시는 가두정치화하여 100년 전쟁의 혼란 속에 쇠퇴해 갔으나 자치체의 개념만은 유지돼 1871년 파리 꾜뮨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평의회 역시 혁명시기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투쟁기의 평의회가 혁명시기에는 노동조합까지 흡수해 계급대중 전체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사회권력이며 정치권력을 해소시키는 자치체로 질적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또한, 평의회는 투쟁을 통한 생산수단의 장악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투쟁의 핵심과제로 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국유화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공장자주관리는 평의회의 전략적 목표 중 하나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기업의 사유화를 저지하는 최선의 지름길은 국공기업의 노동자 자주관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결코 이상이 아니다.”

 

2000년대 평의회 운동의 한계

 

하나, 노동조합(현장조직)을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노동자 독립 조직(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등)을 통한 평의회 건설이 아닌 활동가 평의회를 건설해 노동자 조직으로 확산하려 했다.

 

, 당과 평의회의 명확한 관계 정립 속에서 당 건설-평의회 운동을 연계하지 못했다.

 

, 일국적인(전국) 조직화가 아닌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국제적인 계급투쟁) 국제연대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 노동자 자주 관리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 자주관리, 자치 경영,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자기착취"로 귀결된다.

- 노동자들이 기업을 살리기 위해(이윤추구를 위해)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쟁함으로써 공장, 지역, 산업부문 사이에 서로 분리되고 고립되어 노동계급을 분산시킨다.

-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노동계급의 과제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철폐에 있는데도, 노동계급을 투쟁 대신 자본주의 경제 문제에 속박시킨다.

- 노동계급이 진정 생산의 경영을 인수(생산수단의 사회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인 수준의 권력에서 가능할 뿐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법칙의 틀 안에서가 아니라 그 법칙의 파괴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2. 노동자평의회의 역사와 의미

 

19세기 초 노동계급의 운동이 역사적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필연적으로 이전 세대의 많은 용어를 대체하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노동자와 혁명가들은 다양한 "클럽", "조합", "위원회", "협회", "정당", "노동조합", 그리고 "코뮌""평의회"를 조직하려고 했다. 그 용어는 상당히 모호했지만, 이미 어떤 종류의 독립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1) 파리 코뮌

 

파리코뮌은 노동자 스스로 사회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도시구역에 따라 구성된 무장한 노동자들이 지키는 위원회가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노동자 민병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최초의 평의회형태이다.

 

18713, 프랑코-프로이센 전쟁의 여파로 파리의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일어섰고, 그 과정에서 단명한 혁명 정부, 즉 파리 코뮌, 더 정확하게는 공동체 평의회, 프랑스어로 콩 세유 코뮌((conseil communal) 정부를 수립했다. 혁명 대대의 대표들로 구성된 방위군 중앙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한 후, 공동체 평의회 선거를 발표했다. 투표권을 가진 파리의 485,000명 중 275,000명이 이 선거에 참여했다. 베르사유에 있는 권력자들은 대대적인 기권 운동을 조직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필연적으로 봉기를 지지하는 노동계급 지역 출신이었다. 평의회에 선출된 사람 중 소수만이 노동계급 출신이었지만, 통과된 법령 대부분은 파리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들로 구성되어 행정권과 입법권을 모두 행사하는 파리 코뮌은 우리가 원시 노동자평의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당시 맑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마침내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형태가 발견되었다. 계급의 존재와 그에 따른 계급 지배의 기반이 되는 경제적 토대를 뿌리 뽑기 위한 지렛대이다.” (맑스 1871프랑스 내전)

 

궁극적으로, 노동계급 민주주의에 대한 이 짧은 실험은 몇 주 만에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될지에 대한 많은 교훈을 남겼다.

 

2)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즉 러시아어로 소비에트로 알려진 조직은 1905년 혁명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온 대대적 파업의 물결은 전대미문의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이에 (창조적) 자극을 받은 노동자 대중들은 파리코뮨에 이어 스스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탄생시킨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 부분, 국가 등의 구분들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또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의-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 133)

 

최초의 소비에트는 19055, 볼셰비키의 거점인-보즈네센스크(Ivanovo-Voznesensk)에서 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던 중에 등장했다.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이 협상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대의원을 선출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은 공장 감독관이었다. 다음날 110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소비에트는 본질적으로 개별 공장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위한 파업위원회였다. 그것은 19057월까지 존재했으며 군사적 탄압, 폭동,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파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바노보-보즈넨스크 소비에트가 해체된 같은 달에, 이웃 도시 코스트로마(Kostroma)에서 또 다른 소비에트가 결성되었지만, 몇 주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파업 운동을 통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0510월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비에트가 출현한 것이다. 세 번째 회의에서는 96개 사업장에서 온 226명의 대표,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의 대표들, 그리고 자문의 역할로 사회주의 정당들(멘셰비키, 볼셰비키, 사회혁명당)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곧 자체 신문을 발행했고 러시아 제국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소비에트를 만들 수 있는 등대가 되었다. 1905년 혁명은 일부 지역에서는 고갈로, 다른 지역에서는 탄압으로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에게 다음 투쟁에 필요한 많은 경험을 제공했다.

 

소비에트는 1905년에 자발적으로 출현한다. 소비에트의 본질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다양한 계획들, 토론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들,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면,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19059월부터 대중 내부에 생겨난 주목할 만한 '의식의 성숙'은 토론에 대한 엄청난 욕구의 발전이었다. 공장, 대학, 지방으로 퍼진 격론은 9월 한 달 동안 발전했던 새로운현상이었다.

 

"트레포프의 무한한 테러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대학 담장에서 생겨나고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중들의 모임은 1905년 가을의 가장 놀라운 정치적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복도, 강당 그리고 홀을 가득 채웠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곧장 대학으로 갔다. 블라디미르대학 강당에 모인 청중을 보고 깜짝 놀란 공식 전신기관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학생들 외에도 군중은 다수의 관련 없는 모든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 도시 사립학교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잡다한 무리로 구성되었다." (트로츠키, 1905"10월 파업)

 

하지만 이 모임은 잡다한 무리가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는 집단적 그룹이었다.

 

소비에트 회의는 부르주아 의회 또는 탁상공론적인 학자들 내의 논쟁과는 정반대였다.

 

"소비에트 회의에는 대의제의 궤양인 어떠한 과장과 허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의 중인 문제( 파업의 확산 및 두마 앞으로 보낼 요구)는 전적으로 현실적이었고 토론은 간결하고, 활기차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쥐꼬리만 한 매시간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전체 회의에 엄격한 승인을 가진 의장은 미사여구로 흐르는 최소한의 흐름도 꼼꼼히 살폈다." (같은 책)

 

활기 넘치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심오하고 구체적인 토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사회 심리에 변화를 나타냈고, 이 두 가지의 발전에 있어서 강력한 요인이었다. 의식은 사회 정세와 그 전망에 대한, 대중 행동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힘에 대한, 그리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고, 미래 세계의 목표를 정교히 하는 경로 설정의 필요성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심리는 의식과 다르지만, 그것과 함께 실재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 심리는 노동자들의 도덕과 생활태도를, 그들의 확산하는 연대를, 그들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공감을, 그들의 열린 마음 및 학습을 그리고 공동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이타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요인이다.

 

3) 러시아혁명

 

그리고 1905년의 경험은 1917년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러시아에서 재탄생한다. 러시아혁명의 자극과 1920년대 혁명적 물결은 독일과 헝가리에서 노동계급에 생동하는 힘과 넘치는 생각들을 강하게 분출하게 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노동자총회가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은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처음에는 애국심의 열정에 부딪혔지만, 제국주의 갈등의 가혹한 현실은 곧 각 나라를 강타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노동계급은 마침내 시위, 파업, 봉기로 대응했다. 소비에트를 결성하려는 의지가 다시 한번 생겨났고, 노동자들은 파업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혁명의 범위를 제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72, 노동자들의 등 뒤에서 두마의 정치인들은 타우리데 궁전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 차르의 붕괴에 직면하여, 그들은 러시아를 민주적 공화국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1917년 혁명의 이야기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그들 자기 대표로 채우고 러시아 제국 전역에 걸쳐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더 많은 소비에트를 창조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권력 행사를 위한 조직으로 변화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1905년의 교훈을 배운 것은 부르주아지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레닌과 같은 혁명가들은 이미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성찰했다.

 

노동자 대표인가? 아니면 당의 소비에트인가? 나는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그 결정은 확실히 노동자 대표의 소비에트와 당 둘 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는 소비에트가 어느 한 당을 전적으로 고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는 총파업을 통해, 파업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누가 파업을 주도하고 승리로 마무리했는가? ()사회민주당원을 포함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였다. 다행히도 소수이다. ()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불완전하고 유일한 "서류상" 정보만을 근거로) 정치적으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임시 혁명 정부의 태동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1905)

 

나중에 레닌은 스위스에 있는 동안 쓴 국가와 혁명에 대한 준비 노트에서, 맑스의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낡은 ("기성") 국가 기구와 의회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그들의 수탁자들로 대체하는 것!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 (레닌, 국가에 관한 맑스주의, 1917)

 

레닌은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이 강령을 위해 싸웠고, 곧이어 볼셰비키들도 소비에트 내에서 이 강령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조직에 참여했고, 소환권이 도입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거리에서 외쳤다. 191710월까지, 그 강령은 혁명적 노동자 다수파의 승인을 얻었고, 지금까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았던 임시정부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자체의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무너졌다.

 

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비준된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은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 10월 이후 첫 6개월 동안 소비에트 원칙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었지만, 내전 과정에서 이전 지배계급이 외부 군사 개입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면서 소비에트는 점차 쇠퇴했다. 고립, 전쟁, 기근, 질병과 같은 객관적인 요인이 이러한 사태의 배후에 있었지만, 주관적인 요인은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에 인민위원회(Sovnarkom)가 창설된 것, 좌파 사회혁명당(SR)이 일당 정부를 남기고 인민위원회를 떠난 것, 코뮤니스트당에 의한 선거구 조작 등이 그 보기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러한 과정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작성한 바가 있다. ()혁명 과정에서 소련이 된 소비에트 러시아는 1991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이었지만, 소비에트는 1921년에 이미 빈 껍데기였다. 코뮤니스트당 안팎에서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7년 혁명은 스탈린이 결정타를 날리면서 점진적인 퇴보로 패배했다.

 

4) 노동자평의회의 의미 : 프롤레타리아 자기 조직화의 표현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 또는 1918년부터 1923년까지의 독일 노동자 봉기와 같은 격렬한 투쟁 시기에 등장한 이 평의회는 정치적 소속이나 노동조합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노동자들이 투쟁을 이끌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는 단일 조직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평의회는 단순히 임시 통치 기구가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 전체에 도전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초기 형태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표현, 즉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생산관계를 변혁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조직 형태이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것과 같이,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구현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러한 정의만으로는 현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코뮌이나 소비에트도 항상 이 기준을 완벽히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특정 공장이나 부문을 넘어 넓게 노동자를 포괄

위임과 소환의 원칙에 따라 조직화

공동 목표를 향한 운동의 통합을 지향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를 타파

노동계급 전체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적합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유사한 기구들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독일, 헝가리,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노르웨이 등의 노동자평의회

(1918~9)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 (1919~20)

중국의 코뮌과 파업위원회 (1925~7)

쿠바의 설탕 공장 소비에트 (1933)

스페인의 도시 및 농촌 협동조합 (1936~7)

베트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노동자평의회 (1944~7)

헝가리와 폴란드의 노동자평의회 (1956)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파업위원회 및 공장위원회 (1968~9)

칠레의 코르돈 (1972~3)

포르투갈과 아르헨티나의 파업위원회 (1974~6)

이란의 슈라스 (1978~9)

폴란드의 공장 연대 파업위원회 (1980~1)

아르헨티나 총회 (2001)

이란의 조직위원회 (2021)

 

이러한 사례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들이 그 이름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한국의 평의회 전국모임도 마찬가지) 우리가 실제 노동자평의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계급투쟁의 절정기에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그들만의 계급적 기관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혁명가들은 이 과정을 돕고 촉진할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급적 기관에 혁명가들이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다른 정치 세력이 그 공백을 메우고 지배하며, 방해하고 무력화할 것이다. 보기를 들어, 독일의 사회민주당(1918), 베트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1944-7)의 스탈린주의, 이란(1978-9)과 폴란드(1980-1)의 종교 우파가 그랬다.

 

이렇게 역사는 평의회가 퇴보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계급의 자기 조직화 기구들 내에서 진정한 코뮤니스트 강령 노선을 일관되게 옹호할 수 있는 혁명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 혁명당과 평의회의 관계

 

1) 혁명당: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중요한 도구

 

맑스, 엥겔스, 그리고 코뮤니스트좌파의 특정 흐름이 생각했던 혁명당은 노동계급 외부에 있거나 노동계급으로부터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시점에도, 어떤 이유로도, 자신의 투쟁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다른 이에게 위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정당에도 권력을 그저 넘겨주지 않는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정치강령, 1952)

 

노동계급에 이행기(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떤 별개의 단계가 아니라, 노동자평의회 통치의 수립과 동시에 시작되어 계급의 최종적인 소멸로 끝나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노동자평의회(그리고 평의회가 운영할 수많은 다른 형태의 협회)의 창조적 활동을 통해 표현되는 수백만 노동자들의 자기 주도성과 자기 조직화의 존재에 달려 있다. 동시에 혁명당은 평의회 안에서 자신을 해체할 수 없다. 계급이 최종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혁명의 전 세계적 확산을 돕고 코뮤니스트 강령의 채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기관의 설립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사상과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투쟁의 시작일 뿐이다. 국제주의자들의 혁명적 소수는 새로운 사회 건설 시도를 방해하려는 모든 개량주의적이고 순응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 정당으로 나아가야 할 혁명당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가장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분파의 결정체로서, 일관된 혁명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명확한 코뮤니스트 강령이 있어야 한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에 뿌리를 두고, 역사적으로 혁명 시기에도 종종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협해 온 해로운 기회주의적 일탈에 맞서 싸워야 한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대리주의조직숭배라는 두 가지 함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대리주의는 종종 블랑키주의 시각과 연관되어 당의 자율화를 초래하는데, 이는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조직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행동하거나, 어떠한 정당성도 없이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리주의 관점과는 달리, 혁명당은 평의회를 대체하거나 관료적으로 운영하지 않는다. 평의회 내에서 당원들은 아래로부터 민주적이고 소환 가능한 방식으로 선출되어 코뮤니스트 노선을 관철해야 한다.

 

한편, 평의회 조직의 숭배는 평의회 형태를 보편적인 해결책으로 이상화하는 데서 비롯되며, 평의회가 "시장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이념, (가장 진보적일 경우에도) 분권화된 물물교환, 또는 단순히 부르주아적 사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적 모순과 지역적·부문적 분열(더 나아가 혁명 시기에도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 질서로부터 강력하고 지속적인 압력을 받는다는 점) 때문에, 명확한 혁명 의식이 이끌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규범을 그대로 재생산할 수 있다. 1918~1920년 독일의 경험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평의회주의는 당의 역할을 부정함으로써 평의회를 이러한 악용에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이는 분명히 퇴보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더욱이 당 역시 모든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므로, 러시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계급의 기초로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역사적 교훈과 현재의 전망

 

러시아혁명과 독일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역사적 경험들은 당과 평의회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1917년 소비에트는 권력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내전, 고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갈이라는 극적인 물질적 여건으로 인해 약화했다.

 

독일에서는 평의회에 뿌리를 둔 강력한 혁명 정당의 부재(게다가 부르주아지와 개량주의 노동조합의 막대한 영향력)로 인해 사회민주주의가 혁명적 잠재력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험들은 혁명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당은 명확한 코뮤니스트 강령을 방어하며, 노동자평의회 내에서 활동하면서도 계급을 대체하지 않아야 한다.

 

현재 자본주의 위기-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코뮤니스트와 혁명적 노동자들은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 기관 안에서 투쟁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은 비록 소수지만, 국제주의-코뮤니스트 원칙을 방어하며 국제적으로 연대하고 투쟁하는 동지들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전망을 대신한다.

 

노동계급이 다시 투쟁에 나선다면, 그리고 살아갈 지구가 남아 있으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그 결과로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처음에는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또는 지역 협회에서 생겨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주춧돌이 될 것이다. 미래의 노동자평의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될 것들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생겨나는 모든 기구의 계급적 성격을 규명할 수 있어야 하며, 자본주의 통치의 전복, 노동자평의회 통치,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코뮤니스트 강령을 제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조직은 모두 필수적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20229)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수년간 자본의 순종적인 동맹자임을 충분히 입증해 온 노동조합과 제도권 정당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는 산발적인 파업, 행동의 날, 산책하는 시위를 끝내고, 평화주의와 법치주의를 끝내야 한다. 우리는 계급적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대중집회나 파업위원회 형태로 독립적으로 조직하고, 투쟁을 확대하고 전면화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야만으로의 회귀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지름길은 없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20259)

 

노동자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선거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우리의 삶과 투쟁에 직접 도움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다. 노동자민주주의는 선출자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어 선출한 사람이 통제할 수 있고, 모든 대표자의 특권을 폐지하여 위임받지 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아래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다. 노동계급은 위대한 투쟁의 역사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특히,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수백만, 수천만 명이 자기 삶의 수준과 일상을 스스로 결정하고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투쟁의 물결 속에서 자주적으로 투쟁을 조절-통합하고 자기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냈다.

 

미래에 노동자 투쟁이 대대적으로 확산하고 계급의식이 발전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이 벌어진다면, 세계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계급투쟁이 혁명적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지배계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생산과 사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노동계급은 처음으로 자기 권력을 갖게 되며, 사회는 계급 철폐와 인간해방을 위한 자유로운 인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민주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자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이 대중총회와 파업위원회에서 발전시킬 수 있다. <대중총회>는 모든 노동자와 연대하는 동지들에게 열려있는 투쟁의 공간으로, 대중총회 참여자들이 토론을 통해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방식이다. 대중총회에서는 흩어져 있던 노동자의 개별적인 요구를 모으고 집중하여 공동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작업장/업종/부문을 넘어 진정한 계급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파업위원회>는 파업 투쟁에서 조합원과 비조합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 없이 모든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대표단을 선출해, 파업 노동자 스스로 투쟁을 결정하고 통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파업만이 관료주의, 조합주의를 넘어 계급투쟁을 확산할 수 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20255)

 

2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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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세계를 하나로 묶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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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월드컵 홍보 자료에 "축구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라는 문구가 실렸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경기 중에는 포클랜드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고, 라호이(Rajoy) 전 스페인 총리는 프랑스 대표팀을 향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쏟아냈으며, 결승전에서는 트럼프와 밀레이의 우익 포퓰리즘에 맞서 싸운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 사회노동당 정부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개최국인 미국의 거리에서는 이민세관집행국(ICE)의 급습으로 이민자 4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축구가 진정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바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결속이다. 매 경기 팬들은 카페, 거리, 집 등 어디에든 모여 국기와 조국 수호의 상징물을 펼치며 응원했고, 마치 전쟁의 역학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계 챔피언인 스페인에서는 이러한 민족주의 열기가 절정에 달했고, 복스(Vox)당과 극우 정당들은 좌파가 국가 상징을 도용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국제주의를 옹호해 온 바르뎀(Bardem)과 같은 유명 배우조차 관중석에서 나는 스페인 사람이다, 스페인 사람이다를 외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팬들 사이의 유일한 충돌(물론 몇 차례 발생하기는 했다)은 누가 가장 위대한 애국자인지, 누가 국가를 가장 잘 지켰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집단적 망상의 중심에서 FIFA(국제축구연맹)의 부패 행위에 연루되었고 그 지도자들을 옹호했던 국가대표팀 감독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종종 지루하고 반복적이었던 스페인 팀의 경기 스타일은 축구 전략의 정점으로 칭송받았고, 스타 선수들의 부진한 경기력은 개인의 천재성을 희생하고 단결을 위해 헌신한 집단 플레이의 궁극적인 사례로 찬양받았다. 이는 프랑스나 잉글랜드처럼 '패배자'로 낙인찍힌 팀들이 받은 대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들은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 공격적이고 역동적인 경기 스타일로 찬사를 받았지만, 이후 굴욕을 당하고 폄훼당했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심지어 세계 최강국이 어떻게 자국의 이익을 강요하려 하는지, 다소 과장된 방식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트럼프가 인판티노(Infantino) FIFA 회장에게 직접 전화해 미국 국가대표팀 선수의 즉시 퇴장징계를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한 사건이다(이 압력은 결국 성공했다).

 

우리는 이전 글에서, 오늘날 스포츠는 20세기 초 노동자 걷기 및 자전거 클럽에서 잠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문화적 표현이나 인간적 자질을 개발하는 수단이 아니라, 착취와 궁극적으로 전쟁을 견딜 수 있도록 개인을 준비시키는 훈련이라고 주장했다. [2] *아래는 역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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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과는 달리, 자본주의 스포츠는 고대 올림픽과 단순한 연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정신은 기록 경신이나 시간과의 싸움에 대한 집착과는 전혀 무관했다. 상대방과의 대결은 있었지만, 이는 종교적 의식과 신화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현대 올림픽의 물질적, 정신적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비록 군사적 측면이나 도시 사이의 전쟁, 심지어 상업적 차원이 존재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1900년 파리 올림픽이나 1908년 런던 올림픽과 같은 근대 올림픽은 이미 거대한 상업 박람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올림픽은 제국주의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 개최되었고, 따라서 당시 만연했던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1896년에 창설된 올림픽 경기는 고대 그리스 전통의 계승 또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의 유명한 명언 "참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에서 드러난 민주적 이상에 부합하는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국가주의 광기와 군국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부활한 현대 올림픽은, 모든 것이 엘리트주의와 상품 생산과 관련된 지배 관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적 소외의 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 초, 스포츠는 주로 기숙학교 교육을 받는 부르주아 엘리트층의 전유물이었다. 부르주아지가 과시하고, 즐기며, 경쟁하는 자리였다. 이 시기에는 경마장에서의 대규모 행사, 수상 스포츠, 샤모니(Chamonix)에서 시작된 초기 동계 스포츠, 그리고 골프 클럽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들은 부르주아지 전용이었으며, 당시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19세기 초 자본주의 착취의 구조상, 노동자들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수단도, 시간도 없었다. 공장이나 광산에서의 광적인 착취와 비참한 일상생활로 인해 노동력을 회복할 여유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구루병에 자주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자녀들조차 6~7세부터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다. 10시간 노동제는 그보다 훨씬 후인 1900년에야 도입되었고, 휴일 제도는 190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얻어냈다.

 

초기 노동자 운동은 부르주아지의 스포츠 활동에 대해 불신을 품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자율적인 계급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 조건 개선과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자본주의로부터 이전에는 금지되거나 접근할 수 없었던 일부 스포츠 활동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노동자 스포츠는 대규모 투쟁을 통해 노동자 스포츠 연맹클럽이결성되기 전까지, 다소 주저하는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원래 공장 밖에서의 모임은, 아무리 소규모라도 불법이었다. 축구처럼 소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대중적인 경기들은 당국에 의해 공공 도로에서 금지되었다(1835년 영국 도로법). 고용주들의 눈에는 스포츠 경기를 하려는 사소한 시도조차도 의심스럽고 위험하게 보였다. 경찰은 이를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간주했다. 초기에는 폐쇄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공간으로 제한되었던 노동자 스포츠는 사실상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탄생했으며, 빅토리아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발전했다.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스포츠는 문화와 사교 활동의 전반적인 분위기 일부였으며, 계급에 대한 소속감을 형성하는 수단이었다. 신체 활동은 사회적 유대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노동자들은 스포츠 활동을 우애(友愛)와 연관시켰고, 이는 상호부조로 이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1890년대부터 노동자 클럽(축구와 자전거)이 급증했고, 이후 '붉은 지구'에서 발전했다. 자율적인 계급으로 자리매김해 가던 노동자들에게 스포츠는, 노동을 잔혹하게 하는 것에 맞선 투쟁, 그리고 정치 활동과 선전을 통해 자신을 교육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단결해야 할 필요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1907년 창설된 사회주의 체육 연합(Socialist Sporting Union) "스포츠 축제를 조직하고 운동 경기에 참여함으로써, 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듬해 사회주의 체육 스포츠 연맹(Socialist Athletic Sporting Federation)"우리는 노동계급을 위해 당과 함께 발전하고 선전과 신규 회원 모집의 장이 될 오락 센터를 만들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스포츠 활동을 통해 노동계급의 활동가들은 알코올 중독의 해악과 비행의 폐해에 맞서 예방적 투쟁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자각하고 있었다. 보기를 들어, 사회당 스포츠 연맹(USPS)은 강령에서 프롤레타리아 청년들의 근력을 키우고 폐를 정화하며, 일부 젊은 동지들 사이에서 만연한 알코올 중독과 나쁜 습관을 완화할 수 있는 건강하고 즐거운 오락을 제공하고, 젊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결사와 조직 정신을 함양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독일에서는 1890년부터 1914년 사이, 사회민주당(SPD)이 이러한 관심사를 공유했는데, 당은 노동자 교육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클럽과 체육 연맹은 물론 노동조합 조직 및 구직소 설립을 지원했다. 1893년에는 노동자 체조 연합이 창설되어 당시 만연하던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견제 세력 역할을 했다. 단결과 국제주의에 관한 관심 속에서 노동자들은 1913년 벨기에에서 사회주의 체육 국제연맹을 창설하기까지 했다.” (자본주의 하의 스포츠 역사 [1], ICC, 2012)

 

1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 이후,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 사이의 간극은 스포츠로 채워졌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에 대중적 볼거리로서의 스포츠는 국가를 상징하는 개인과 팀 사이의 끝없는 검투사 전투로 변모했다.

 

민족주의는 스포츠 경기를 둘러싼 의식과 상징주의를 이용해 끊임없이 유지되었다. 공식적인 역사와는 달리, 스포츠를 선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일반화된 관행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 특히 국가대표 축구팀의 입장 장면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러한 대규모 스포츠 행사는 강력한 집단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쉽게 국가 상징이라는 보편적인 코드로 이용된다. 스포츠가 민족주의-국가주의 정서를 심어주는 데 있어 독보적인 효과를 지닌 이유는, 스포츠를 통해 개인과 국가 상징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 대회는 종종 군악 연주와 함께 진행되며, 경기 시작 전이나 끝에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경기는 국가적 위신이 걸린 대결이다. 이렇게 신성한 결합의 짧은 순간 동안 사회 계급은 '해체'되고 부정되며, 관중들은 공개적으로 일어서서 국기나 그것을 상징하는 팀에 시선을 고정하고 노래를 부른다.

 

위대한 스포츠 승리 또한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 맹목적인 복종이라는 원칙을 연장할 수 있다. 이러한 행사의 축하 분위기는 깃발과 미리 만들어진 국가적 신화로 가득 차 있다. 마지막으로, 타이틀과 메달을 향한 경쟁, 국가 대 국가의 대결은 마치 군사적 충돌의 전선처럼 외국인 혐오와 민족주의적 폭력의 씨앗을 뿌려 이러한 정신적 의존성을 유지하려 한다. 스포츠는 국가 정신을 구현하며 군대와 동일한 의례를 받는다. , 훈장, 표창, 메달, 행진 등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적 이익은 노동 대중을 그들의 치명적인 적(), 즉 제국주의에 ​​봉사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허구에 불과하다.”

 

스포츠는 언제나 제국주의 대립에 이용되었다. 보기를 들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군사 블록이 '핵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침략을 예고하는 군사화의 선봉이었다. 나치에게 챔피언은 "독일을 위한 전사, 3 제국의 대사"여야 했다. 히틀러에 따르면, 독일의 젊은 스포츠 선수들은 "가죽처럼 질기고 크루프(Krupp) 강철처럼 단단해야" 했다. 스포츠는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고, 따라서 히틀러를 격분시킨 흑인 미국 단거리 선수 제시 오웬스(Jesse Owens)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리아인(Aryan)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모든 스포츠 경기는 나치 정권이 탐내는 영토 위에 상징적으로 깃발을 휘날리는 수단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폐허 속에서 세계 스포츠계는 1990년대 말까지 냉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제 대회는 동서 대립이라는 맥락 속에서 치러졌고, 특히 서방은 핵전쟁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 내내 스포츠 경기는 제국주의 긴장감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올림픽이 상징하는 보편성은 섬뜩한 위선이며, 이 대회는 서로 다른 자본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보기를 들어 1920년대에는 독일처럼 패전국이 보복과 응징으로 올림픽에서 퇴출당했다. 1948년에는 독일과 일본이 출전 금지되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등 일부 국가의 보이콧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부다페스트에 배치된 러시아 탱크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자 냉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였다. 반면,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는 삼문화 광장(Tlatelolco)에서 300명의 학생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은 전쟁의 현장이었다. 이스라엘 선수단이 팔레스타인 특공대에 의해 인질로 잡혔고, 그 결과 17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1980년대 모스크바 올림픽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영광을 찬양하는 군사적 찬가와 같았으며,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항의하는 의미로 중국을 포함한 많은 서방 동맹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미국 제국주의 편에 서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중국 역시 '핑퐁 외교'를 통해 스포츠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오늘날, 특히 미국과의 경쟁 구도 속에서 세계 제국주의 무대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은 매우 공격적인 스포츠 행보를 보이며 높아진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들은 언제나 눈썹까지 도핑한 선수들을 마치 '전쟁 중'이거나 ''과 싸우는 것처럼 묘사해 왔다. 이는 경쟁 군사 블록 사이의 갈등이든, 같은 블록 내의 갈등이든, 혹은 블록이 사라진 후의 국가 사이 갈등이든 마찬가지였다. 축구는 이러한 긴장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관중들의 증오심을 부추겼다. 수많은 사례 중 하나로 1969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벌어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경기를 들 수 있다. 이 경기는 두 나라 사이 전쟁의 서막이 되었고, 결국 최소 4,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스포츠는 미래가 없는 부르주아 사회의 쇠퇴를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1970년대, 특히 1980년대 초,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 실업, 그리고 비참함은 술에 취한 외국인 혐오증에 사로잡힌 훌리건 무리를 낳았고, 이들은 경제 위기에 시달리는 대도시의 경기장에서 테러와 증오를 자행했다. 이들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축구 경기에도 빈번하게 난입했는데, 보기를 들어 19905월 디나모 자그레브(Dynamo Zagreb)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Red Star Belgrade)의 경기는 조직적인 폭력 사태로 이어져 수백 명의 부상자와 몇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미 존재하던 민족주의 긴장을 더 악화시켰고, 결국 옛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가장 극단적인 세르비아 지지자 중에는 인종 청소 전문가이자 훗날 유엔에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수배된 민족주의자 아르칸(Arkan)이 있었다.

 

이 사건 외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대중적인 부르주아적 감각은 이러한 폭력의 증가가 스포츠가 점점 더 "돈과 마피아에 의해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이는 스포츠 자체가 마피아이며 순수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현실을 가리고 있다! 축구는 재정적으로 과도하게 비대해진 부문, 즉 억만장자와 방송사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 배후에는 국가 자체가 있다. 파국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스포츠는 진정한 카지노 게임, 즉 파산한 생산 양식의 상징이 된다.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FIFA(국제축구연맹)와 같은 주요 국제 스포츠 기구, 훌리건과 갱단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대형 클럽, 그중 일부는 저명한 대표자 역할을 하고, 정치인과 수상한 투기꾼들은 자금 횡령이라는 범죄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스캔들에 끊임없이 연루된다.

 

모든 국가와 모든 종류의 마피아는 스포츠와 도박이라는 경제 부문에 투기한다. 어떤 이들은 카타르가 파리 생제르맹을 인수한 것처럼, 아예 클럽 전체를 사들여 이 비생산적인 부문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기도 한다. 영국에서도 대형 클럽들은 마찬가지이다. 축구 선수들의 '육류 시장'과도 같은 이적 시장에서는 불법 자금 세탁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범죄 전문가인 노엘 폰스(Noel Pons)에 따르면, "축구 클럽은 CAC 40 유형(프랑스 주요 주가지수)에 속하므로 자금 세탁 현상은 이러한 기업들과 같은 수준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의 이면에는 심각한 착취가 존재한다. 과도한 연봉을 받는 스타 선수들과 부패한 에이전트들을 제외하고도, 수천 명의 젊은 스포츠 선수들이 계약 없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의 화려한 삶을 약속받고 유럽으로 건너간 아프리카의 어린 선수들은 무자비하게 거리로 내몰리고, 심지어는 신분조차 없는 신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럽과 세계 무대에서 수많은 경기에 영향을 미친 승부조작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이탈리아 축구계는 수많은 선수와 주요 인사들이 정치권 및 조직범죄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핸드볼처럼 언론에서 깨끗한 스포츠로 묘사되는 종목조차도 승부조작과 부패에 얽혀 있다. 테니스의 경우, 뇌물을 받는 선수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고의로 패배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결론: 스포츠와 코뮤니즘

 

자본주의 쇠퇴기에 스포츠를 노동자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기회주의적 병폐를 더 악화시키고 보수 세력을 부추겼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스포츠'란 존재할 수 없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세계 혁명의 물결이 일던 시기에, 1921년에 창설된 국제적색스포츠대회(Red Sport International)의 좌절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 즉 쇠퇴하는 자본주의와 러시아 혁명의 비극적인 고립과 관련이 있었다. 1920년 볼셰비키가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에서 개최한 중앙아시아 경기대회는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고 옛 러시아 제국의 다양한 지역 국가들을 강화해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이는 연합군이 포위된 러시아 소비에트를 봉쇄하는 방어선을 더욱 공고히 했다. 1928년 모스크바의 스파르타키아데스(Spartakiades)는 이미 반()혁명을 상징하는 스포츠 경기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의 수호를 완성했다. 진정한 '승리''강철의 볼셰비키'를 자랑스럽게 내세운 스탈린주의의 승리였다! 맑스는 코뮤니스트 사회가 "학습과 체육을 노동과 결합하고 그 반대로도 결합할 수 있음을 실질적으로 증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완전한 인간을 실현하기 위한 관점에서였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처음에는 이러한 전망을 옹호했지만, 그들은 이 과업이 실현되는 것을 볼 시간도 가능성도 없었다. 스탈린주의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바로 괴물 같은 로봇의 의학적 왜곡된 모습이었다! 미래의 코뮤니스트 사회를 예측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스포츠는 사라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독이 없는 세상을 보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체적 활동과 지적 활동 사이의 온갖 인위적인 분리, 선수와 관중 사이의 강제적인 대립 대신, 통일되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인간 세계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따라서 맑스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완전한 인간은 코뮤니즘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사회적 본성을 발견할 것이다. 오직 인간의 본질적 존재가 객관적으로 펼쳐진 풍요로움을 통해서만, 주관적인 인간 감수성의 풍요로움(음악적 듣기, 형태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안목요컨대, 인간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감각, 인간의 본질적 능력으로서 자신을 확립하는 감각)이 함양되거나 탄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풍요로운인간은 신체와 정신의 변증법적 통일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개성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하의 스포츠 역사 [3], ICC,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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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축구는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적 결속과 국가 사이 대립이라는 역학을 재현하여 전쟁 선전의 수단이 된다.

 

국경도 민족도 성별도 초월하는 노동계급의 세계 혁명 투쟁만이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스포츠 경쟁에는 또 다른 측면, 즉 상업적 볼거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월드컵은 경기 중간에 광고 휴식 시간을 강제로 편성하여 기록을 경신했다. 공식적으로는 선수들의 수분 보충과 건강 관리를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방송 일정을 맞추기 위해 선수들에게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대에 경기를 치르게 하거나, 다음 경기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거의 매일 비행기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2026725

히크 로도스(Hic Rhodas)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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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어 웹사이트의 기사 바르셀로나 2026: 전쟁과 혼돈에 빠진 자본주의 속의 허위적인 진보와 평화의 국제주의를 참조
 

 

2. "자본주의 하의 스포츠 역사를 참조

 

[1] 자본주의 상승기(1750-1914)의 스포츠

 

[2] 자본주의 쇠퇴기의 스포츠 (1914년부터 현재까지)

https://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301/6346/history-sport-under-capitalism-part-ii-sport-decadent-capitalism-1914-today

[3] 스포츠, 민족주의, 제국주의

https://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302/6420/history-sport-under-capitalism-part-iii-sport-nationalism-and-imperialism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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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전쟁이 다시 불붙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전쟁과 야만 외에는 어떤 미래도 제시하지 못한다

중동에서 전쟁이 다시 불붙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전쟁과 야만 외에는 어떤 미래도 제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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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페제시키안과 트럼프가 이란과 미국 정부 사이의 양해각서(MoU)에 전자 서명을 했다. 이 양해각서는 양측이 최대 60일 이내에 최종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협상을 지속하기 위한 틀을 마련했다. 한편, 부르주아 정부와 그 선전기구들은 이 합의를 양국 관계의 획기적인 진전과 지역 평화 및 안정의 약속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의 적대 행위와 대리전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우리는 이 양해각서가 영구적인 평화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 당사국 사이의 일시적인 세력 균형을 반영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1] 이러한 분쟁의 물질적 기반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향권, 에너지 수송로, 시장, 지정학적 지위, 군사적 우위를 둘러싼 경쟁은 양해각서 하나로 해소되거나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한 물질적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새로운 긴장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변하는 것은 이러한 대립의 본질이 아니라, 단지 대립이 전개되는 형태와 방식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정부와 언론이 모든 외교적 합의를 "새로운 평화 시대"의 시작으로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맑스주의와 코뮤니스트 좌파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합의는, 설령 공식 조약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끊임없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중단일 뿐이다.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 시대의 평화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다른 수단을 통한 같은 경쟁의 지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근의 양해각서는 갈등의 종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가 지속되는 한 필연적으로 긴장, 전쟁, 그리고 야만으로 이어질 과정 속의 한순간으로 보아야 한다.

 

이 양해각서 제5조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은 초기 60일 동안 페르시아만과 오만해 사이를 오가는 양방향 상업용 선박에 대해 통행료 없이 개방될 예정이었다. 동시에, 양해각서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오만 및 기타 걸프 연안 국가들과 향후 해협 관리 및 해상 서비스 제공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은 향후 통행 체제를 변경하거나 해상 서비스에 대한 통행료 또는 수수료를 부과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조항이다.

 

이후의 상황 전개는 호르무즈 해협이 더는 단순한 핵심 상업 항로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 세력 사이 경쟁의 주요 수단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이 해협은 잠재적인 영향력 행사 수단에서 정치·경제·군사적 압박의 적극적인 수단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 부르주아지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지역 내 위상을 높이고 제국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협상력을 증대시키려는 더 큰 전략의 일환이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이러한 전략적 영향력이 이란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측은 군사적, 법적, 그리고 물류 수단을 통해 해상 운송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각자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해상 교통을 규제하려 했다. 그 결과, 호르무즈 해협은 경쟁하는 자본주의 강대국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 중 하나로 부상했으며, 이 갈등 속에서 세계 무역, 에너지 이동, 심지어 수백만 명의 생명까지도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구도에 놓이게 되었다. 이슬람 부르주아지 역시 해협 통제권을 제국주의 경쟁에서 협상력을 강화하고, 긴장이 고조될 때 해상 교통을 제한하거나 방해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 달성은 이란의 지역적, 제국주의적 입지를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입지를 약화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오만은 미국의 지원과 압력 아래 이란의 조치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국 영해를 통한 대체 항로를 국제 선박에 제공했다. 이후 이슬람 부르주아지는 호르무즈 해협 폐쇄를 선언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오만 대체 항로를 이용하는 선박을 공격했다.[2]

 

미국의 호전주의자들은 이란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이란의 호전주의자들은 이 지역의 미군 기지와 미국과 동맹국의 이익을 공격했다. 갈등이 격화되면서 전쟁은 점차 순수한 군사적 목표를 넘어 주요 기반 시설까지 제국주의 전쟁터로 끌어들였다. 이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은 폭격 범위를 교량, 터널, 해수 담수화 시설, 상수도 펌프장, 공항, 해상 교통 관제 시설까지 확대했다. 이에 맞서 이란은 요르단, 쿠웨이트, 카타르, 오만, 이라크, 아랍에미리트(UAE)의 목표물을 공격했고, 이후 쿠웨이트의 해수 담수화 시설, 원유 선적 터미널 및 기타 물류 센터 등 이들 국가의 주요 기반 시설까지 공격했다.

 

이처럼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대결을 넘어 해당 지역의 경제 및 사회 기반 시설을 겨냥한 전쟁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전개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상대방의 경제와 물류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전쟁 수행의 주요 수단 중 하나가 됨에 따라, 민간 기반 시설 자체가 군사적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쟁에서 노동계급과 인민 대중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전장에서 병사로 희생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근간이 되는 기반 시설의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실질적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의 논리이다. 자본주의는 평화로운 시기든 전쟁 시기든 인류에게 파괴, 야만, 그리고 고통의 심화만을 안겨줄 뿐이다.

 

지금까지 이 전쟁은 지역 노동계급은 물론이고, 더 중요하게는 세계 노동계급으로부터도 독립적인 계급적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대립을 대체로 방관해 왔으며, 제국주의 진영에 맞서 독자적인 투쟁을 펼치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국제적 차원의 계급투쟁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주요 약점 중 하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 특히 코뮤니스트 좌파의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확고히 수호하고 이 전쟁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가차 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에 참여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하며, 정부 형태, 지정학적 위치, 이념적 수사와 관계없이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 또한 이 과제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역시 다른 어떤 형태의 부르주아 국가 못지않게 "자유 수호", "민주주의 수호", "조국 수호"와 같은 구호를 내세워 노동계급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들이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독립, 그리고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반대를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 또는 이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처한 실질적 위치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다. 노동계급은 전쟁에서 어느 국가의 승리에도 관심이 없다. 전쟁의 양측에서 노동계급은 착취, 군사 동원, 파괴, 그리고 학살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이고 국제적인 투쟁만이 자본의 전쟁 기계에 맞서고 제국주의 전쟁의 악순환을 종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제국주의 전쟁의 종식은 외교적 협상이나 도둑들의 소굴인 유엔(UN)의 개입, 또는 그 어떤 부르주아 기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길은 제국주의 전쟁을 자본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전환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투쟁을 확대하며, 세계 코뮤니스트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전쟁과 야만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부르주아적 평화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폐지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존재 형태 중 하나로서 계속해서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전쟁 만세!

 

2026718

F.A.

국제주의자 목소리(IV)

 

<>

 

[1]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들을 참고

 

 

전쟁과 양해각서를 넘어: 제국주의 전쟁의 근원은 자본주의다.

 

전범들의 일시적 휴전: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의 막간극

 

 

 

[2] 호르무즈 해협 봉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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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3호]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우리를 둘러싼 게

눈물과 고통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 위에 새겨진 하루하루

바람을 동반한 슬픔이 비처럼 몰아칠 때 괜찮다며

주고받던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막막함은

폭염에 녹아내린 밤처럼 견디기 힘듭니다

어떤 뒷모습은 표정이 없어 위험해 보였고

어떤 말은 너무 떨고 있어 애처로웠습니다

 

고통을 통과해 정점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곁이 됩니다

가끔, 미련에 묶인 번민도 찾아오지만

겁내지 않고 지낼 용기를 가지게 됐습니다

슬퍼도 내색하지 않고 건너갈 요령을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할 체력도 가슴 한 켠 숨겨뒀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눈물이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이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들 하지만

마지막이 어떨지 두고두고 궁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신경현

 

약력

신경현 197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시집 그 노래를 들어라, 따뜻한 밥, 당부가 있다.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모임, ‘해방글터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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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비주류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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