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26/06

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26/06/07
    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자유로운 영혼
  2. 2026/06/06
    [2026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자유로운 영혼
  3. 2026/06/02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2
    자유로운 영혼
  4. 2026/06/02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1
    자유로운 영혼

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부르주아 선거 쟁점과 코뮤니스트 대안
 
 
이번 선거에서(선거 때마다) 쟁점이 된 “부동산·자산 투표”, “정의·공정”에 대한 코뮤니스트 대안

"선거에 진 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분파(여, 야)이며, 이긴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다."
 
주거문제슬로건1592446619.jpg
 
부동산 정책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었고, 수도권도 100%에 가까운 상황이다. 주거 문제는 공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와 건물, 주택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주택을 많이 공급해도 무주택자가 아닌 자본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 더 현실성 없는 고위정책 관료층과 국회의원에게 1가구 1주택의 퍼포먼스까지 진행하겠는가?
 
자본주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저금리정책은 필연적으로 유동성을 증가시켰고, 그 대부분은 대자본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다. 자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투자는 관심 밖이다. 이윤이든 지대든 자본에는 부가가치 증가만이 목적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이처럼 부동산 가격 폭등의 배후에 작동하는 힘은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이것이 유발하는 초저금리와 천문학적인 유동성 증가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그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집값을 억제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정권의 몰락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겉으로는 ‘갈지(之)’자 행보처럼 보이지만, 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한 부르주아 정부는 심화하는 위기 때문에 더욱 노골적으로 노동자의 목을 죄어 올 것이다. 이윤율 하락,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체제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경제 위기라는 배경에서 부르주아의 계급적 선택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착취와 고통을 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동산 대책은 집값 안정을 결코 해결할 수 없지만, 집값 안정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 있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로는 어떠한 정책을 내놓아도 주거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는 토지와 주택에 대한 사적 소유와 매매와 임대를 통해 소유주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부동산 가공을 통해 증가한 부가가치까지도 보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올리고 공급을 확대해도 더 비싼 집값의 형태로,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노동자에게 전가될 뿐이다. 결국, 노동계급은 주택 가격 안정이 아니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떠한 정책을 내놓더라도 노동자인민에게는 1가구 1주택과 주거환경 개선은 현실화할 수 없다. 자본주의 소유 관계를 그냥 둔 채 주택 투기와 개발 이익에 대한 사적 취득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환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가 이를 환수하여 양과 질을 담보로 한 공공임대주택을 마련하는 것 또한, 공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자본의 총체로서 전자본의 이익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인민에게 양질의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은 토지와 주택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가 폐지된 사회, 즉 인민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토지와 주택을 비롯하여 사유재산과 착취, 계급 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 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 모든 토지와 (거주 목적 이외의) 주택도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몰수하여 평의회의 통제 아래 사회화시킨다. 이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제공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자인민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복지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평등한 사회이다. 주택뿐 아니라 의료와 건강권, 교육권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처음으로 실현되는 사회이다. 코뮤니스트는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와 무상 주거권 쟁취를 내걸고 근본적으로 투쟁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폐지만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혁명만이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모두에게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전문 읽기>
 
 
photo_2021-01-12_00-17-07.jpg
 
 
정의와 공정
 
 
한국 사회는 선거 때마다 공정 담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공정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능력주의를 전제로 진행되고 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능력을 갖춘 사람을 사회의 모든 요소에 선발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물적 토대인 생산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은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게다가 가족을 경제단위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가족 배경이 능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능력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관점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순수한 개인의 능력은 환상에 불과하고, 이러한 능력주의를 전제로 한 공정은 계급지배의 통치 수단이다.
 
공정의 핵심 전제인 능력주의는 봉건귀족에 대항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였다. 또한, 무산자계급에 대한 차별과 배제,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원시적 자본 축적기부터 자본주의가 세계적 지배 질서가 된 이후에도 자본은 능력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막고 분열을 획책했다. 이에 포섭된 노동계급 일부는 능력주의 신분 상승 대열에 개별적으로 합류하는 데서 전망을 찾으면서 불평등 사회를 인정했다. 한국의 주류 노동조합운동도 능력주의에 편승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 노노 갈등은 증가하였다. 그 흐름은 노동운동의 역할을 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당면 생존권에 대한 협소한 방어로 제한했다.
 
노동계급 일부의 능력주의로의 편승은 노동자 자기해방에 대한 전망 부재를 스스로 폭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미래 노동계급에 능력 중심의 불평등 사회를 지양하기보다는 더욱더 능력과 공정에 집착하도록 하였다. 전망의 부재는 한편으로는 불평등 완화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기대로 나타나기도 했고, 한편에서는 공정성 시비로 적법한 노동권마저도 빼앗고 있다. 이렇게 능력주의에 갇히는 순간 노동운동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체제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과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즉, 노동운동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라지고 형식적 공정성과 실질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탄압하는 자본주의 신봉자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노동계급에 초등학교부터 취업 이후까지 학업/취업/임금인상/승진 경쟁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에 부합하도록 노동자를 재창조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능력주의에서 패자에게는 결과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사회 부적응자로서 온갖 차별에 노출되고 적법한 요구마저도 무시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인종주의, 엘리트주의, 평가주의, 성과주의 등 차별의 여러 형태와 같은 패러다임을 가진다. 하지만 부르주아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란 부와 권력에 대한 세습이 가장 중요할 뿐, 실수로 거액을 날려도 그들의 태생적인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능력주의는 계급마다 다르게 적용되며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 자본가계급에는 공정을 초월한 정의이지만, 노동계급에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다.
 
지금까지 능력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공정에 기준을 두고 조건, 과정에 대한 평가였다. 또한 능력주의가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능력이 세습되는 시대에는 능력주의 자체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을 공정의 기준, 능력주의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한 결과이다. 그래서 비판의 결론은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능력주의를 다시 계급 상승의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정의, 공정, 능력주의는 언제나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힘이다. 계급 단결로 노동력이 상품이 되지 않는 사회, 생산수단이 사회화된 사회, 가치법칙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코뮤니즘 사회로 나아가야 비로소 노동계급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즉, 정의, 공정, 능력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더는 필요 없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자원 희소성, 자원의 불평등 분배의 원인이었다. 자본주의 고유의 모순을 감추고 노동계급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서 공정 담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시켰다. 하지만 노동계급에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는 결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계급의 단결과 연대로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해야 억압과 모순을 뿌리 뽑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가장 큰 능력은 야만과 착취의 낡은 사회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집단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반대로 지배계급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은 노동계급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단결과 연대라는 진정한 능력을 빼앗아가는 반동 이데올로기이다. 
 
<전문 읽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6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다시 투쟁으로! 항로는 희망행으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를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항로는 희망 행으로!

 

 

 

리가에서 죽임을 당한 앙드레
에스파냐에서 죽임을 당한 다리오
내가 붕대로 상처를 싸매준 보리스

 

내가 눈을 감겨준 보리스
프랑스의 어느 조용한 과수원에서
스무 살 된 심장에 총알 여섯 발이 박혀
영문도 모른 채 죽은
나의 이층 침대 친구 다비드

 

이미 흙이 다 되었을 때
내가 손톱을 보고 알아낸 카를
너, 높은 지성과 숭고한 사상을 가진 너를,
죽음이 너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검고 거친 인간 넝쿨

 

북쪽, 물결, 바다가
배를 뒤집고, 이제는 핏기가 사라진 네 사람이
고뇌를 깊이 들이켠다,
파리여, 잘 있거라, 너희 모두 다 잘 있거라,
삶이여, 잘 있거라, 제기랄!

 

바실리, 우리가 잠 못 이루던 한밤 내내
너에게는 상하이에서 온 투사의 넋이 있었다
그리고 아르마비에르의 옥수수 밭에 있는 
너의 무덤이 바람에 씻겨 지워진다.

 

홍콩에 불이 들어오고, 때는 고층 빌딩의 시대,
종려나무 잎은 아랍의 반달칼을 닮았고
광장은 묘지를 닮았고,
저녁은 무더운데, 감옥 침대에서
응우옌, 너는 죽어가는구나

 

그리고 너희, 목 잘린 나의 형제여,
길 잃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
학살당한 자, 르네와 레이몽
유죄이지만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별들의 비,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나는 너희에게 나의 가장 암울한 침묵,
나의 결의, 나의 탐닉을 빚지고 있다.
텅 비어 보이는 이날을 생각하면,
그리고 내게 남은 긍지는 그 무엇이든지
사막에서 이는 불길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물을 장식하는 이 숭고한 조상에
정적이 있으라!
맹렬한 항해는 계속되고,
항로는 희망행이다

 

언제 네 차례가 될까?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항로는 희망행이다

 

(「죽은 형제들의 별자리」, 빅토르 세르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2

거부: 자본주의 선거에 대한 계급적 대응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을 밝힌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동지들의 과거 기사를 소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부 언론 매체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거부’ 요구를 검열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므로[1], 우리는 선거에서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는다. 오늘날 어느 국가에서든 진정한 의사결정 과정은 국민 대표자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진정한 권력은 의회나 백악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기관 배후에 있는 기구에 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레닌의 "혁명적 의회주의"조차도 본래 목적은 차르 두마(하원)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집권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의 활동은 그들이 지지하는 반동적 자본주의 분파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부르주아지는 누가 후보 명단에 오르고, 누가 선거에 출마할지 집단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유권자에게 자신의 조건에 맞는 정당에 투표하라고 요구한다. 반면 시민들은 후보 명단에서 가장 덜 악한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사람을 기준으로 투표한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쇼(선거)를 거부하라는 요구는 결국 일부 자본가들에게 위협이 된다. 실제로 한 주요 소셜 미디어 기업이 그러한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의 원인은 미국 정권을 이끄는 두 분파(민주당, 공화당) 사이의 정치적 경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쟁은 너무나 심해서 지배계급이 더 강력한 검열을 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리 코뮌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사례들이 있다. 이는 소수 지배층이 장악한 자본주의 정치 체제에서 단순히 자리를 차지하는 정치적 꼭두각시가 아니라, 위임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선출자가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대표)을 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였다. 이러한 노동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를 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자본가들에게 자신들이 배제된 모든 형태의 사회 조직은 독재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치 기구인 정당의 등장은 19세기 경찰 조직의 형성과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나타났다. 계몽주의 혁명의 시대에 ‘당파적인 사람(당원)’이란 민중의 이익보다 자기 정치 분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이는 옛 귀족 계급의 한 분파에 가담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혁명 직후 휘그당과 공화민주당과 같은 느슨한 정치 세력은 19세기 후반에 명확하게 확립된 경직된 정치 구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자본의 좌파 일부는 누구나 부르주아 공화국의 가장 오래된 정치적 득표 획득 기구에 들어가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당 기구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모든 정치 세력을 이념적으로 압박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종파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율성을 표출하는 모든 행위를 종파주의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노동자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선거라는 부르주아 정치쇼 참여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선거 과정 자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외는 무관심과 불만으로 나타난다. 이는 강렬한 이념적 공격을 받는 노동자들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거부를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영역에서, 계급의 방식으로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인터넷이라는 주류 매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표현을 부르주아 양당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투표소에 가두어, 누구나 부르주아 전쟁광들에게 투표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표현의 제한은 누군가가 금지된 ‘거부’ 주장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주장이 용인되고 무시되곤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위기는 이러한 정치적 각본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했다. 부르주아지는 끝없는 축적의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스스로 반대되는 현상을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 캠페인이 자행되고 있다. 이 캠페인은 모든 반대 의견과 사회적 저항을 경쟁 관계에 있는 제국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아 공격한다.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부르주아지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면서 사용해 온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것이다. 이는 국외에서 전쟁의 명분을 쌓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정치적 검열과 탄압을 강화하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발생한 모든 사회 운동은 제국주의 세계 무대에서 특정 적대 세력이 조장한 분열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경찰의 총격에 시달리는 것이 싫다면 "X"라는 나라에 속았기 때문이고, 전쟁에 지쳤다면 "Y"라는 나라 탓이라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계급 분열이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집단, 모든 정체성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부르주아 이념가들은 이러한 계급 구분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계급 분열은 그들의 정체성 정치로도 지울 수 없을 만큼 뿌리 깊다. 미국의 두 주요 부르주아 집단인 민주당과 공화당은 모두 시민들의 신뢰에 대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그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반동적이다. 달라진 점은, 거대한 소셜 미디어 기구를 장악한 일부 사람들이 선거 거부를 촉구하는 모든 목소리를 금지된 표현으로 규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떤 투표도 제국주의 전쟁 기계를 정당화하는 행위이다. 이는 부르주아 행정부의 양 진영 모두 해외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데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결국 핵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충돌로 이어질 영구적인 전쟁 상황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선택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이 체제의 실체를 폭로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행위원회를 누가 운영할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2]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거부는 지배적인 자본주의 세력의 이념적 통제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계급이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급'으로 자각하기 위해서는 [3] 정치적 단절이 첫걸음이다. 유진 V. 뎁스(Eugene V. Debs)는 민주당에 입당해서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을 탈당해서 그러했다. 실제로 그는 특히 풀먼(Pullman) 파업의 유혈 사태 이후 민주당 초기 활동을 개인적인 수치의 원천으로 여겼다. 초기 볼셰비키들도 차르의 경찰국가를 개혁하겠다는 목적으로 두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위를 이용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규탄했고, 의회 연단을 통해 부르주아 정권을 비난했다. 냉전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이름을 가진, 제국주의 전쟁 지지가 명백히 드러난 우리의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정당 앞에 우리 모두를 무릎 꿇게 하려고 한다. DSA는 미국 사회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 정당으로 전락하여 붕괴한 결과물이다. 그들은 열린 무덤을 응시하며 그것이 요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부르주아 선거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집권당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의 정치적 위기를 활용하여 우리의 정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노동자들에게 선거란 착취자들이 자행하는 의례적인 굴욕 행위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본주의 선거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부르주아 선거를 거부하자!

 

2019년 9월 6일

ASm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

 

<주>

 

[1] 클라이모어(Clymore), A. “페이스북, 미국 유권자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광고 금지할 예정”. 로이터. 2019년 6월 30일.

https://www.reuters.com/article/us-usa-election-facebook/facebook-will-ban-ads-that-tell-people-in-u-s-not-to-vote-idUSKCN1TV0Y8/

[2] 『코뮤니스트 선언』 제1장, “현대 국가의 행정부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맑스)

[3] 『철학의 빈곤』, “따라서 이러한 대중은 이미 자본에 대항하는 계급이지만, 아직 자신을 위한 계급은 아니다.” (맑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9-09-06/abstention-a-class-response-to-capitalist-election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 1

모든 투표는 자본주의에 대한 찬성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대안”을 밝힌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동지들의 과거 기사를 소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활 조건이 악화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후보”에 투표할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선거에서 누가 승리하든 노동계급이 맞이할 결과는 모든 분야에서 삭감과 위기뿐이다

 

자본주의 투표는 노동계급에 무의미한 것 이상으로 해롭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설령 노동자 정당이나 이른바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한다 해도, 결국 현 체제를 정당할 뿐이다. 우리가 투표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더 커진다. 국민(유권자)의 뜻이라는 것이다! 사실, 1974년 이후 영국 선지(The Sun)의 지지 없이 당선된 정부는 없었으니, 국민의 뜻이 아니라 머독 언론이 대변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생산 수단을 장악한 자들은 사상의 재생산 수단도 장악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자신들의 언론매체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진정한 권력은 의회에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우리 조상들이 참정권을 위해 싸웠으니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라고 여전히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는 차티스트 운동(참정권 요구)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진보적인 역할을 상실했다. 노동계급이 투표함에 종이 한 장을 넣는다고 해서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체제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다. 19세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했던 것은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자본주의 언론은 노동계급에 접근할 수 없었고 국가는 다른 매체를 활용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이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공포감을 심어주고, “대중” 언론이 이미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모든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된(1918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편적 참정권이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발판이 되기는커녕, '민주주의 수호'가 자본의 실질적인 지배를 감추는 의회주의라는 허울에 노동자들이 충성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일부(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지배자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유롭다. 그리고 만약 1923년처럼 자본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1년 뒤 데일리 메일(Daily Mai)에 실린 가짜 지노비예프 편지(1)처럼, 거짓 정보를 퍼뜨려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노동당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동당은 오래전부터 의회 정치에만 관심이 있었고 영국 자본의 이익에 반할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왜 선거에 무관심한지 의아해할 만도 하다!

 

결국, 의회는 자본주의 지배를 가리는 허울에 불과하다. 의회 자체가 국가는 아니다. 진정한 권력은 배후에서 지배계급의 의제를 설정하는 네트워크에 있다. 국회의원들은 로비스트들을 앞세워 실질적인 의제를 좌우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독점 자본가들에 비하면 무력하다. 언론이 '질문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스캔들'과 같은 의회 부패 사건을 집중 조명할 때, 폭로되는 것은 주로 국회의원들이다. 그러나 로비스트에게 뇌물을 주고 부패를 조장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의회는 서커스와 같고, 투표는 누가 당선되든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가리는 연막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우리 투쟁에 필요한 것과 정반대이다.

 

좌파 민족주의의 환상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나고 오래된 자본주의 경기 순환 위기가 다시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1950년에는 영국 유권자의 85%가 투표에 참여했지만, 1970년부터 이 수치는 꾸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59.3%만이 투표했고, 온갖 매체를 동원해 투표를 독려했던 2010년에도 65%에 그쳤다. 언론은 체제의 정당성 하락을 우려하는 지도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물론, 특별한 지역적, 정치적 쟁점이 있을 경우는 예외적으로 투표율이 놓을 수도 있다. 어느 지역에서 좌파 세력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수도 있고, 설령 그들이 가치 있는 정책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다. 지역이든 영국 전체든, 국가적인 해결책은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저항(좌파) 정당에 투표하는 데서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없다. 노동계급이 깨어나 자본주의 공격이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현재 우리는 패배하고 있다. 비록 반(反)자본주의 사상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저항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러한 사상들은 아직 반(反)자본주의 운동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대안이 명백히 부재하다는 점이다.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는 신뢰를 잃었으며, 자본주의 야만성을 대신해 문명화된 미래의 열쇠를 노동계급이 쥐고 있다는 생각은 언론에서 절대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전 세계의 전쟁과 경제 위기 소식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라고 위안 삼으며, 위기가 곧 사라져 긴축 정책이 과거의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심지어 가장 큰 피해자들조차 투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앞장서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긴축 정책에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저 투쟁을 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사실 모두 같은 투쟁이지만, 대다수는 아직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더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주장에 동의해 온 사람들은 그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

 

집단으로 조직하자

 

따라서 우리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투표를 거부하자! 이 부르주아 사기극을 거부하자! 하지만 이것은 수동적이거나 체념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악화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조합비로 급여를 받으며 투쟁을 점점 더 협소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만 유지하도록 감시하는, 어쩌면 얼굴도 자주 볼 수 없는 노조 대표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강제 퇴거에 맞서 싸우든, 의료 혜택 삭감에 맞서 싸우든, 악화하는 노동 조건에 맞서 싸우든, 우리는 파업위원회·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모임·총회를 개최하여 우리만의 조직 형태를 마련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발언권을 갖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본주의 대의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우리만의 직접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이는 모든 대의원(대표)을 선출한 사람들이 즉시 소환할 수 있는(4년·5년에 한 번이 아닌) 민주주의다. 유급 관료나 자칭 ‘대표자’들이 밀실에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파업을 벌일 때는 몇 시간이나 하루이틀 정도 피켓을 들고 하는 형식적인 시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조직하자

 

사실 생활 수준 저하에 맞선 투쟁은, 이를 일으키는 체제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전투적인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가들은 신속하게 재정비하여 양보했던 것들을 되돌려 놓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공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은 투쟁의 핵심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단계를 설명할 정치적 의무가 있다. 이는 계급투쟁의 부활과 분리된 진공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자체적인 정치 조직이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명확한 강령 없이는, 궁극적으로 현 자본주의 국가 체제를 전복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이룰 수 없다.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는 자본주의 야만성을 피하려면,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이는 의회 선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코뮤니스트의 목표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존 수단을 집단으로 장악하고 이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하여 인류의 건강과 복지, 그리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노동당이 추진했던 산업 국유화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식만이 소수 엘리트의 이윤 창출을 최우선으로 삼고 인간의 필요는 부차적으로만 다루는 자본주의 생산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끝장낼 수 있다. 이러한 변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제도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인류에게 코뮤니스트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소련, 중국, 쿠바 등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회주의는 착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건설할 때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은 쟁취해야 할 세상이 있다.

 

2015년 5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역자 주>

1. '지노비예프 편지(Zinoviev Letter)'는 1924년 10월 영국 총선을 불과 4일 앞두고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이 특종으로 대서특필한 조작 문서이다. 이 편지는 코민테른 의장과 지노비예프가 영국 공산당에 보낸 것으로 위조된 문서이다. 편지의 내용은 영국 노동당을 통해 영국 내 적색혁명을 일으키고 군대 내 반란을 선동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는 러시아 반공주의 망명객들이 위조하여 영국의 정보기관 요원들과 보수당 측에 전달한 가짜 문서였다. 우익 성향이 강했던 데일리 메일은 이 편지의 출처가 의심스러움을 인지하고도 총선 직전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에 이를 폭로했다. 편지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적색 공포(Red Scare)'를 자극하여 많은 유권자의 반발을 샀고, 이는 보수당이 압승하고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훗날 진상 조사와 문서 검토를 통해 이 편지는 소련을 악마화하고 노동당을 실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100% 위조 편지로 판명 났다. (위키피디아)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5-04-28/every-vote-is-a-yes-for-capitalis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