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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혁명적 소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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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혁명 100주년, 지워진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에 세계혁명의 길고 험난한 과정을 깨우치게 했다. 반면에 지배계급에는 혁명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했고, 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했다. 1917~1921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패배한 이후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학살하며 직접 공격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파시즘과 반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계급투쟁의 암흑기1)이다.

     

    이후 1945~1989년 미-소 제국주의 블록의 냉전 시대에는 서로 간의 대립과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왜곡하고 음해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주의 국가를 10월 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왜곡했고, 서구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제국주의 간 대립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소련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심지어는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로 혁명운동은 강력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지배계급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노동계급 내부의 억제력으로 혁명의 불씨는 물론 일상적인 계급투쟁까지 잠재우고 있다.

     

    ‘공산주의(코뮤니즘)의 붕괴’에서 포퓰리즘의 등장까지 지난 수십 년간,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좋게 봐도 세상과 관계없는 괴짜, 멸종 위기에 처한 희소 동물로 비치고 있다. 현재 노동계급의 다수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대해 대부분 잊었고, 혁명 전통의 일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망각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보다 생산 수단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더욱 ‘새로운 것’에 의존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경험인가에 대한 왜곡은 노동계급에 기억상실을 일으킨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의존은 소비뿐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의 기억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교훈까지 잊게 하는 데 유용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은 미래의 투쟁에 적용할 진정한 교훈까지 버리면서 자신의 혁명적 전통을 망각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전히 인류의 미래와 함께하는 계급이며,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끌어내 공산주의(코뮤니즘)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 따라서 역사적 과거에 대한 교훈을 찾고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지워진 혁명의 기억을 되살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현재 위기를 돌파해 낼 첫걸음이다.

     

    2. 혁명적 소수란 무엇인가?

     

    작년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자 세계혁명의 미래’를 꿈꾸게 했던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날의 계급투쟁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혁명적 상황과 무관한 지금의 노동자투쟁은 러시아혁명의 엄청난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욱이 지금은 러시아혁명과 같이 혁명적 투쟁이 분출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그런 대중행동을 예측할 수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정세에서 일관된 목표를 갖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혁명적 소수’의 문제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1905년 자발적으로 출현한 소비에트를 촉진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었고, 1917년 소비에트를 다시 등장하게 만든 것도,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소수였기 때문이다.

     

    혁명적 소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최종목표와 혁명의 전망을 갖게 된 인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나오고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때문에 ‘계급의 일부’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에서 계급적 소수파도 운동의 최종목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계급투쟁에 원칙적이며 가장 활성화된 부분을 차지한다. 계급투쟁의 확산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바로 이들이 얼마나 계급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승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이들이 대중행동을 대신할 수 없고, 정세와 무관하게 대중의식을 고양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소수가 계급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투쟁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투쟁을 자극하고 전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오랜만에 분출된 투쟁은 우리 희망과는 다르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좌절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수파 운동의 존재 이유이며, 단순히 소수라서 항상 다수를 추종하고 계급투쟁의 최종 승리보다 다수파가 되기 위한 운동은 혁명적 소수의 운동이 아니다.2)

     

    지금의 암울한 현실에서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면서 혁명적 소수의 복원에 중점을 두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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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과 교훈

     

    첫째, 혁명적 소수는 1905년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에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자발적으로 출현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당시 자본주의는 발전의 정점에 있었고, 전 세계를 하나의 경제 및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에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분출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96년부터 1896년,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직물 노동자들의 총파업, 남부 러시아 일대를 뒤흔들었던 1903년, 1904년의 주요한 파업 등 줄곧 수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 배경이다. 이때 혁명적 소수였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끊임없는 정치 선동과 조직 활동이 소비에트의 출현에 크게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본질에서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다양한 계획, 토론,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는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여기서 대중의식의 주목할 만한 성장(자신의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집단적 흐름)이 있었는데, 여기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 중요했다.

     

    둘째, 혁명적 소수는 10년간 사라졌던 소비에트를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05년 12월 혁명의 패배 이후 소비에트를 되살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서서히 쇠약해졌고 1907년 봄 결정적으로 사라진다. 소비에트의 자발적 참여와 집중을 경험한 정권이 파업 투쟁과 새로운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위해 끔찍한 탄압을 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1917년 부활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러시아에서 사라진다.

     

    소비에트가 사라진 1905년에서 1917년 사이 소비에트는 단지 소수 투사의 정치 투쟁 지향점이었다. 혁명적 소수파들, 특히 1905년 이후 볼셰비키는 투쟁을 단호하게 밀고 나아가기 위해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발상을 방어하고 전파했다. 이 소수파들은 노동계급의 집단 기억에서 소비에트의 불씨를 살려냈다. 순식간에 퍼진 2월 파업과 함께 소비에트를 세우기 위한 수많은 계획과 호소가 있었다. 볼셰비키는 오랜 기간 소수파들에 국한되어 왔던 소비에트라는 발상을 투쟁하는 대중 안에서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이끌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출현에 기여한 것은 소비에트 형성을 위한 중개 조직의 역할이 아니라 정치 투쟁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정치적으로 투쟁했다. 1915년 레닌은 제국주의적 반동적 전쟁으로 나가는 군수사업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면서, 파업위원회의 선거, 전 러시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혁명적 소수는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6~7월 소비에트의 위기와 대중들의 이반이 나타났을 때,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사건은 가장 선진화된 노동자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져 완전히 사기가 꺾이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뒤에 숨지 않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면서 왜 지금 시기가 권력을 쟁취하는데 무르익지 않았는지 설명했다. 이것은 당시에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독일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중상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풀뿌리 소비에트 조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비에트의 부활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고,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열정적이고 친밀하고 인내심 있는 볼셰비키당의 토론3)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타깝게도 1919년 독일 베를린 노동자들과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함정을 피하지 못했고,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한다.

     

    넷째, 볼셰비키당의 오류 : ‘소비에트와 국가 문제’에서 볼셰비키당은 국가를 끊임없이 강화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를 배제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만의 국가가 아니라서 소농계급, 쁘띠부르주아지 및 여러 중간계층을 포괄했다. 이 계급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방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 혁명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쁘띠부르주아 사고방식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전과 세계혁명의 지체는 전직 차르 관료 재고용과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하게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새롭게 나타난 관료를 포함하여 자신을 소비에트 국가와 동일시하는 관료 계층을 형성케 한다. 결국, 관료주의의 성장과 국가기구의 강화는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를 제압했고, 국가의 이익이 노동계급의 이익보다 우선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강화는 볼셰비키당의 흡수로 이어진다. 레닌은 볼셰비키당과 중요한 당원들이 정부의 관여한다면, 스스로 그 체계에 갇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세계적인 관점을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1918년 7월 소비에트 정부가 최종적으로 볼셰비키화 되자 볼셰비키당은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 전직 차르 관료들, 멘셰비키 전향자들로 들끓었다. 그들에게 당은 출세와 취업의 수단이었다. 그 후 볼셰비키당은 수많은 숙청을 통해 이런 유입과 싸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력해진 국가기구와 볼셰비키당의 통합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로 이론화되었고, 볼셰비즘은 당국가로 변화한다.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치적 장악과 당의 지배를 결정했고, 카메네프는 “공산당(볼셰비키당)은 러시아의 정부이다. 60만 명의 당원이 러시아를 지배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920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모든 의식적인 노동자는 노동계급의 독재는 계급의 전위인 공산당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결국,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 일부로서 전위 역할을 포기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전위로서 볼셰비키당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다 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기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끊임없는 투쟁과 토론, 참여의 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기구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노동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며, 토론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진정한 계급의 기구이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혁명적 소수-볼셰비키를 비판하는 또 다른 혁명적 소수에 대해서도 정확히 비판해야 한다.

     

    먼저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세계혁명 패배의 한복판에서 볼셰비키의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소비에트)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 동안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소비에트를 약화했고, 1921년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소멸로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당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 실패에 따른 고립으로 혼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안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가 있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런 오류들은 범하지 않거나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훈은 앞으로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혁명적 소수는 국제적 전망을 하고 국제적 수준에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을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평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지나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평의회주의자들은 또한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 ‘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 조치의 채택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도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과업(세계혁명)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4) 평의회주의자들의 볼셰비키 비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세계혁명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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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다시 혁명적 소수의 복원을 위해

     

    우리는 한 시대, 한 계급의 혁명을 언급할 때 한편의 무용담이나 화석화된 경전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혁명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역사는 일어날 것 같은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다. 러시아혁명은 실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이자, 계승해야 할 혁명 전통이다.

     

    100년 전 혁명을 돌아보며 필자는, ‘혁명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과 현재도 계속되는 지배계급의 ‘거짓 환상’ 공세가 같은 맥락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공세는 너무 오랜 기간 지속하였고 지금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유일한 혁명의 기억, 미래에도 필요한 혁명적 전통까지 망각할 위험에 놓여있다. 그래서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지금과 같은 계급투쟁과 혁명운동의 극심한 침체기에 그것은 더욱 혁명적/계급적 소수의 책임이다.

     

    혁명적 소수의 복원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혁명적 실천의 복원은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과거를 지우고 혁명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왜곡되고 지워졌어도 과거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찾고, 혁명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에서 러시아혁명이 지워진 것은 지배계급의 공세 때문이지만, 혁명적 소수의 책임도 크다.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거짓 환상’과 다른 한 편의 ‘가짜 사회주의’와 철저히 단절시키지 못했고, 계급투쟁에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이라는 최종목표를 분명히 하면서 전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후퇴와 패배의 연속은 혁명적 소수를 계급투쟁과 계급의식 발전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는 작은 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의 극심한 침체는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에서 겪어야 할 필연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실패의 유산을 반복하지 말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낡은 운동인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로부터 시작했듯이, 낡은 운동과 지금 당장 단절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필자는 낡은 운동과 단절한 혁명적 소수의 운동을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과거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이라 규정했다.

     

    첫째,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치사상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여러 운동과 다양한 대중행동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더욱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발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운동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문화와 심리 등 인류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영역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자본주의 가치법칙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 총체적 운동이어야 한다.

    둘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혁명적 계급의식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개별 활동의 연합이 아니라 ‘집단적 활동’, ‘지속성’, ‘실현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혁명 강령과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집단적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해주며, 이것은 코뮤니스트 조직의 생존 기반이자 물질적 힘이다.

    셋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조직에서도 코뮤니즘 원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기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코뮤니스트조직은 과거 왜곡된 전위당 노선이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과 같이 일방적 지도체제와 획일적 성원 규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에 기반을 두고 성원들의 자발성, 다양성, 창조성을 극대화하는 조직체계를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조직 운영은 총회에 책임을 지는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내부 소통에서는 이론과 지식, 정보에 대한 정직한 표현과 전달, 그리고 토론에서 상호 존중과 모욕 금지, 차별금지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이형로, (코뮤니스트 5호, 2017 . 4)

     

    여기에 더해, 그동안 계급 운동을 왜곡하고 새로운 운동과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운동 사회 내부 모순과의 단호하고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또한,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차별에 대한 ‘집단적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피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계급 내부에서도 다양한 차별과 억압구조 아래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동은 바로 이러한 공감과 투쟁을 통해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5. 혁명적 소수의 기본임무는 분파 활동

     

    노동자운동과 계급을 위한 교훈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조직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원칙 없이 ‘계급정당’을 선언하거나 퇴행적 강령(정치원칙)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혁명조직’을 자임하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한 과거의 반복이거나 퇴행하는 노동자운동에 따른 결과이다.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의 역사에서 우리는 혁명적 소수의 진정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제 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본주의 체계 속으로 통합(자본주의와의 어떠한 혁명적인 단절 없이도 사회주의를 향해 평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개혁주의적 흐름)되어 갈 때,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최초로 인지했던 ‘좌파’ 흐름(분파)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레닌,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판네쿡, 이탈리아의 보르디가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으로 활동해야 했지만, 이들 중 누구도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았다. 기회주의 흐름이 제2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퍼지자 그들은 각각의 정당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분파로써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타락해가는 제3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리해 나왔던 코뮤니스트좌파들의 국제적인 분파 활동이 있었고, 1928년 이후 스탈린주의 반혁명세력에 맞서 투쟁해 온 수많은 코뮤니스트들의 공헌이 있었기에, 소수이지만 오늘날 진정한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 형성에 기여할 혁명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역할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 << 4/3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Bilan(빌랑), (1933. 11)

     

    그러므로 혁명적 소수는 여기서 후퇴를 멈추어야 한다. 모든 낡은 실천과 조직을 멈추고 다시 ‘혁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낡은 운동의 복원이 아니라 혁명적 전통의 복원을 통해 다시 한번 제대로 된 운동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것의 시작은 혁명적 분파 형성과 활동이다.

     

    현실에서 원칙을 지키며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의식적 노동자들과 함께 다시 한번 소수파 운동, 그 고난의 길에서 투쟁하자.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혁명적 분파 운동으로 전진하자.

     

    혁명 강령,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적 실천에 기반을 둔 분파 형성, 혁명조직 건설로 나아가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토론회> 발제문을 보완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주>

     

    1.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1930년대는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이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는 혁명운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2. "계급에 대한 당의 궁극적 목표는 계급을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이 다수가 되어, 계급 자신의 힘으로 혁명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시기(계급의식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균질하지 못했을 때) 당의 역할은, 이러한 상태의 계급 안에서 다수를 획득하거나 국면적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가 되더라도 혁명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계급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당장 인기와 계급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판단하여 “미래에 계급이 얼마나 혁명적으로 변화되었나?”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것도 혁명적 정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일상시기 또는 침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다수의 계급의식과 타협하는 영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수에 대한 영향력을 잃더라도, 혼란에 대해 단호하게 단절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노동계급에 진정으로 공헌하는 길이다. 혁명조직이 노동계급에 근거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끈기 있는 인내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모든 활동의 방향이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변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는 것에 있다." <<사노위 실패의 교훈과 혁명당 건설 투쟁의 연속성>>, 이형로, (마르크스21 제11호, 2011.9)

     

    3.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이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하게 하려면 모든 토론이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었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생 시몽(Saint Simon)과 오웬(Robert Owen)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 문화 : 계급투쟁의 무기>>, ICC, )International Review no.130 - 3rd quarter 2007)

     

    4. (필자)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장애물이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코뮤니스트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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