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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안톤 판네쿡

 

 

들어가는 말

 

1920년은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해였다. 레닌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 코민테른 제2차 대회를 앞두고 각국의 대표자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를 출간했으며, 같은 해 안톤 판네쿡이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100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그룹들은 그의 책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따라서 좌익공산주의를 [좌익소아병] 또는 [초좌익]으로 매도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좌익공산주의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10년이 채 안됐다. 이는 좌익공산주의를 제대로 소개하기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좌익공산주의를 한 사람의 책 한권만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100년 전 러시아의 상황을 현재 한국의 상황과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리가 판네쿡의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을 번역 및 게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좌익공산주의를 왜곡한 것에 대한 반박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쇠퇴기 하에서 노동조합, 의회주의, 공동전선와 민족주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토론의 활성화 등을 위해서이다.

 

이 팸플릿은 총 9장으로 구성된 이유로 이번 호를 포함하여 총 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안톤 판네쿡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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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 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좌익공산주의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의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가장 일관되고 지속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해방세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지배와 종속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일련의 인상적인 문제를 제기했던, 흥미롭고 독창적인 사상가로 남아 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판네쿡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당대의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루카치, 코르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그 대부분은 판네쿡 사상의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대한 좌우의 수정주의와 권위주의 세력의 종파적 대응 때문이었다.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두 가지 힘에 의해 일어나는데, 하나는 물질적 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힘이며, 후자는 전자에 그 근원을 둔다. 경제의 물질적 발전은 의식을 만들어 내고 의식은 혁명 의지를 활성화시킨다.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향의 기능으로서 발달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과학(Marxist science)은 먼저 사회주의당 이론과 그다음 공산당 이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과학은 혁명운동에 엄청나고 건강한 지적 통일을 부여한다. 이 이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에 서서히 인식되고 있는 동안에, 대중들 자신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증대하는 정도로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급격한 경제 붕괴는 대중들이 공산주의를 지적으로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혁명을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모순은 혁명을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만드는 모순, 망설임 그리고 좌절의 근원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 그 자체는 새로운 추진력을 발휘하고 순식간에 대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정들은 갑자기 너무나 거대하게 발생하는 봉기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방해받는다.

 

서유럽에 관한 한, 혁명의 발전은 주로 두 가지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 경제 붕괴와 소비에트 러시아(Soviet Russia)의 사례.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 그렇게 빨리 그리고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 부르주아지의 나약함, 소농과의 동맹, 혁명이 전시에 발생했다는 사실 - 여기서 상술할 필요는 없다. 노동자가 지배자라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공산주의 건설에 참여했던 국가라는 사례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엄청난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사례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자극하는 데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자신의 물질적 환경의 결과에 가장 강하게 좌우된다. 만약 자본주의가 그 낡은 힘을 완전히 유지했다면, 저 멀리 러시아로부터의 소식은 인상을 거의 주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그러나 소부르주아처럼 소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용기도 없이, 러시아와 인류 전체는 행동을 취했다." 이것이 러트거스(Rutgers)1)가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대중들에게 느낀 충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서유럽의 모든 사람은 급격한 경제 호전을 기대했고 혼란과 야만의 장소로써 러시아를 수동압착기(lying press)로 묘사했다. 이내 대중들은 그들의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부터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했다. 혼란은 전통적인 문명의 발상지에서 확산된 반면에, 러시아에서의 신질서(new order)는 증대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그 대중들이 이곳에서도 동요하고 있다.

 

경제 붕괴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경제적으로 이미 완전히 산산조각 났으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멈출 수 없는 하락에 들어서 있다. 영국은 너무 심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재건에 대한 자국 정부의 활발한 시도가 붕괴를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하며 미국에서는 위기의 첫 번째 위협적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국에서, 대략 이와 같은 순서로, 대중들 내에서 불만은 커지고 있다. 대중들은 경제를 더욱 강력하게 때리는 총파업운동(great strike-movement)으로 궁핍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 이 투쟁들은 서서히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신념으로 볼 때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도, 대중들은 공산주의가 그들에게 보여준, 즉 현실의 필연성이 그들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길을 더욱더 뒤따르고 있다.

 

이 필연성과 분위기의 성장과 더불어, 그것들을 짊어졌던, 이를테면 공산주의자 전위(communist vanguard)는 이 국가들에서 발전해 왔다. 이 전위는 목표를 또렷하게 인식하며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 스스로 조직을 재편성한다. 이 발전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두드러진 점은, 이데올로기적 용어와 조직적 용어 두 가지에 있어서,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의 뚜렷한 구분이다. 이 구분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경제 위기에 빠졌던 – 부르주아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불가피했던 - 중유럽 국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중유럽에서의 위기가 너무나 엄청나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독일통일사회민주주의당USP은, 그들이 아직도 광범위하게 낡은 사회민주주의의 방법, 전통, 구호 및 지도부를 고수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의 가입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모든 사회민주주의당은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는 대중들 사이에 전투적인 혁명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생디칼리즘(syndicalism) 및 공산주의 관점의 이론적 혼합을 간과하도록 한다. 프랑스 공산주의 그룹들은 최근에 사회민주주의당과 노동조합운동에서 스스로 분리했으며 지금은 공산당 창당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국에서 낡고 익숙한 조건들에 대한 전쟁의 지대한 영향은 서로 다른 기원과 새로운 조직 형성의 아직 구성되지 않은 공산주의 운동을 발생시켜 왔다. 미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당이 모스크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데 반하여 두 개의 공산당은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당에서 분리했다.

 

반동의 맹공격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의외의 회복력은 협상하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서구의 노동당에게 새롭고 강력한 인상을 심어줬다. 제2인터내셔널은 파산하고 있다. 모스크바를 향한 중도파 그룹들의 전면적인 움직임은 대중들의 성장하는 혁명적 분위기의 강한 욕구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이 그룹들은 대단히 달랐던 그 그룹들의 이전 관점을 사용하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빌렸으며 낡은 사회민주주의 개념과 방법을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이전시키고 있다. 이 국가들에서 혁명을 위한 기회가 더욱 무르익었다는 징후로서, 바로 본래의 것과는 상반되는 현상이 이제 막 나타나고 있다. 그 그룹들의 제3인터내셔널로의 입성 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원칙을 지지하는 선언과 같은 방향으로, 위에서 언급되었던 독일통일사회민주주의당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간의 뚜렷한 차이는 또다시 희미해지고 있다. 몇몇 원칙의 확고함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3인터내셔널 외부에서 그러한 당들을 공식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가 무엇일지라도, 그 당들은 새로운 구호로 입에 발린 말을 함으로서 전투적인 대중들에 대한 그 당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교묘히 각국 혁명운동 지도부의 환심을 산다. 이것이 모든 지배계급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대중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기보다는, 가능한 한 그 영향력으로 혁명을 끌어내리기 위해 스스로 '혁명가'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는 이처럼 우리에게 생기는 증대된 힘만을 보며 취약성의 증가는 보지 못한다.

 

공산주의와 러시아의 등장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평범하고 복잡하지 않은 방식을 얻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이제 맞닥뜨리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극도로 복잡하고 고된 과정으로 만드는 힘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강령과 전술에 대한 쟁점과 해법은 추상적인 원칙에서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경험에 의해, 현실적인 삶의 실천에 의해 결정된다. 공산주의 목표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은 그들이 늘 해왔던 것처럼 이전의 혁명적 실천을 기반으로 정교해져야 한다.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이 이 지점까지 진행되었던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원동력, 조건 및 방식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은 그 당시 서유럽 관찰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너무나 믿기 힘들 정도의 빠른 상승세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를 가져왔고, 그것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 서유럽에서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보인다. 그것의 최초 결과는 예상한 대로 열광의 감격 도취였으며, 서유럽에서 혁명이 직면한 문제들은 과소평가되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앞에,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민주주의 양식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평의회 체제, 산업, 농업 및 교육의 재조직이라는 그 힘의 모든 광채와 순수성으로 새로운 질서의 원칙들을 밝혔다. 많은 점에서, 그것은 본질에 대한 묘사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내용을 매우 간단하고 분명하며 포괄적으로 제공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사례를 목가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독일에서 표면화되었던 힘들은 나머지 유럽을 통틀어 전반적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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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주의가 1918년 11월에 붕괴되었을 때, 노동자 계급은 권력 장악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4년간의 전쟁에 따른 마음과 정신의 황폐화와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의 휩쓸림은 전후 몇 주 내에 노동자 계급이 그들의 과업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할 수 없게 했으며, 공권력이 약해졌을 때 공산주의 선전의 집중적이었지만 짧은 기간은 이 부족을 보충할 수 없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훨씬 많이 배웠다. 노동자들의 각성 상태를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 빨갛게 몸치장을 하면서, 부르주아지는 즉시 자신의 권력 기구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평의회는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당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었다. 군인으로서 무장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가 아닌 그들 스스로 무장 해제했다. 가장 활동적인 노동자 그룹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백군(white guards)에게 진압 당했고 부르주아지는 무장된 자경단civil militias을 만들었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묵인 아래,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들은 혁명 중에 쟁취했던 노동조건의 모든 개선을 서서히 강탈당했다. 이처럼 공산주의로 가는 길은 자본주의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를 혼란으로 더욱 깊이 침몰시키기 위해 철조망으로 차단당했다.

 

물론, 독일 혁명의 과정에서 쌓였던 경험들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혁명의 발전은 각국에서 다른 과정으로 전개될 것이다. 권력은 정치 및 군사적 붕괴의 결과로서 준비가 안 된 대중들의 수중으로 갑자기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고 이렇게 하여 승리했을 때 더 높은 정도의 성숙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 11월 혁명 이후 열풍의 속도로 발생했던 것은 이미 다른 국가에서 더욱 조용히 발생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를 도출하고 있고, 내전을 위한 군사적 준비를 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의 도움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정치적 기만을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일 혁명은 확실한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며 일반적 의의에서 확실한 교훈을 제공한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더디고 고된 과정일 것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이것에 원인이 있는 힘들을 드러내 보였다. 서유럽에서 혁명 발전의 더딘 속도는, 비록 상대적일지라도, 모순되는 전술적 경향의 충돌을 초래했다. 급격한 혁명 발전의 시기에, 전술적 차이가 즉시 행동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면 의식적으로 되지 않는다. 철두철미한 원칙에 입각한 시위는 사람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고 동시에 대중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며 정치적 행동은 낡은 신념들을 뒤집는다. 그러나 외부적인 침체의 시기가 시작될 때, 반대 및 혁명적 구호를 방치하는 대중들이 더 이상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어려움이 늘어나고 적수가 각각의 교전으로 더욱 거대하게 부상하는 것처럼 보일 때, 공산당이 약세를 보이고 패배만을 경험할 때 - 관점은 갈리며, 새로운 행동 방침과 새로운 전술적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바로 그때 모든 지역 편차에 대하여 각국에서 인식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이 부상한다. 하나의 경향은 언행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명확하게 하려고 하며, 이것을 위하여 낡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신념들에 반대하여 가능한 가장 분명하게 새로운 원칙들을 제기하려고 한다. 다른 경향은 여전히 방관자로서의 대중들을 현실 활동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고 그래서 그들을 단념시킬지도 모를 그 무엇이든 가능한 한 방지하기 위해 차이점보다는 합의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대중들 사이에 냉철하고 분명한 분리를 위한 노력이고 두 번째는 통합을 위한 노력이다. 전자는 급진적 경향이라고 칭할 수 있으며, 후자는 기회주의적 경향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장애물에 직면해 있는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러시아 혁명을 타도하기 위한 연합국들의 공력에 대한 러시아의 확고한 저항과 더불어, 서유럽의 현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지금껏 결정하지 못한 노동자 그룹들의 제3인터내셔널로의 보다 많은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회주의는 거의 틀림없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내에서 강력한 세력이 될 것이다.

 

기회주의(opportunism)는 순종적이고 회유적인 태도와 어휘뿐만 아니라 더욱 신랄한 방식으로서 발본주의(radicalism)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분명하고 원칙에 입각한 전술의 부족은 너무나 자주 공격적인 표현을 광신적으로 감춘다. 그리고 확실히, 혁명적 상황에서, 그 모든 기회주의의 희망으로 위대한 혁명적 행동에 급작스럽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 기회주의의 특징이다. 기회주의의 본질은 앞으로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항상 목전의 문제만을 감안하며, 심층에 기초한 결정요인을 인식하기보다 현상의 표면적인 측면을 주시한다. 힘이 즉각적으로 특정 목표의 달성에 충분히 않을 때, 그러한 힘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다른 방식 즉,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목표는 목전의 성공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미래의 영구적인 성공을 위한 조건들을 희생시킨다. 기회주의는 다른 '진보'그룹들과 동맹한다는 그리고 낡은 신념에 양보한다는 사실에 대한 정당성을 구하며, 그것은 흔히 권력을 잡을 수 있거나 하다못해, 자본가계급의 연합인, 적을 분열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하여 투쟁에 더욱 유리한 조건들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의 권력은 항상 환상으로 드러나며, 개인의 권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력이 아니라 각각의 지도자에 의해 행사되었다. 이 모순은 그 경야經夜에 혼란, 부패 그리고 갈등을 유발할 뿐이다.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hegemony) 행사를 위해 충분히 준비된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은 국가 권력의 장악은 다시 빼앗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잖이 힘이 빠진 반동 세력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계급 적대의 분열은 - 개량주의의 매우 과시된 구호 - 드러나지 않게 연합한 부르주아지의 통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고 혼란시키며 약화시킨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전위가 정상적인 조건들이 충족되기 이전에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명확성, 통찰력, 연대 및 자율성 면에서 얻어진 것만이 공산주의를 향한 그 이상의 발전 토대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다.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는 이러한 기회주의 정책 사례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사례들은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非사회주의 노동자 그룹들 또는 다른 계급들의 도움을 구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부패했고 최종적으로 붕괴될 전술들을 초래했다. 지금 제3인터내셔널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선의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원칙에 입각한 정책과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미래 혁명의 시대를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 조용한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는 끝났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있다. 전 세계는 우리의 선전이 다수를 명료한 공산주의 통찰력으로 획득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대중들 자신과 전 세계가 재앙으로부터 모면하려면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개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할 때, 소규모 당은 원칙에 따라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폭넓은 대중들을 빨리 모으려는 노력으로 필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기회주의가 아닌가?

 

혁명은 소규모 급진정당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거대 대중정당 또는 서로 다른 정당들의 연합에 의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은 대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당에 의해 선동된 행동은 간혹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으나 (간혹 있는 사건) 결정적인 힘은 대중들의 무의식 내 깊은 심리적 요인에 그리고 세계정치의 중요한 사건에 있다. 혁명당의 기능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전체 대중들에게 사전에 냉철한 이해를 선전하는 데 있다. 그리고 혁명의 과정에서 당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대중들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강령, 구호 그리고 지시를 제고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따라서 위대한 목적의 명료성에 이르는 데에 그 자신의 목표를 표현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은 투쟁에 앞서게 된다.

 

대중들이 계속해서 소극적이라면, 이것은 보람이 없는 전술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원칙의 명료성은 처음에는 혁명을 방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포된 영향력을 미치고 혁명은 투쟁에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는 그 활동적인 힘을 드러낸다. 반면에 만약 원칙의 희석, 동맹의 결성 및 양보에 따라 거대정당에 모이려고 시도해 왔다면, 그때 이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불충분함을 꿰뚫어 보지 않고도 혁명의 시기에 분명치 않은 부류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한다. 전통적 관점에의 순응은 그렇게 되는 전제조건인 혁명이 없이 권력을 잡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결과는 혁명의 과정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실패하도록 운명 지어졌는데 왜냐하면 가장 급진적인 생각이 대중들이 혁명에 참여하자마자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혁명이 완수되지 않는 한 적당함은 그들을 충족시킬 뿐이다. 혁명은 동시에 대중들의 사고에 엄청난 대격변을 수반한다. 그것은 혁명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며, 스스로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하여 혁명의 지도력은 분명한 원칙이라는 세계이행 권력 덕분에 공산당의 몫이 된다.

 

공산주의를 사회민주주의와 구별 짓는 평의회 체제와 독재라는 새로운 원칙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강조와는 대조적으로, 제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는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이어받은 투쟁의 방식에 최대한 의지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 의회 활동을 평의회 체제로 대체했고 공장을 기반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건설했으며, 서유럽에서 첫 번째 충격은 이 사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독일공산당(KPD)은 의회 선거를 거부했고 노동조합으로부터 즉각적이나 점진적인 조직 분리에 찬성하는 운동을 했다. 그러나 1919년 혁명이 느슨해지고 침체되었을 때,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의회주의를 선택하는 데에 이르고 산업별 노동조합에 반대하여 낡은 노동조합연맹을 지지하는 데에 이르는 이전과는 다른 전술을 도입했다. 이 배후에 있는 주된 논거는 공산당은 계속해서 전적으로 의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대중들에 대한, 선거운동과 의회 연설을 통해 최고에 도달하는 대중들에 대한, 그리고 대거 노동조합에 가입함에 따라 700만 명까지 조합원을 증원시켰던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생각이 영국 사회주의당BSP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노동당이 제2인터내셔널에 속할지라도 다수의 노동조합주의자와의 관계 상실을 두려워하여 노동당과 단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들은 공산주의적 기회주의의 강령적 진술로서 간주될 수 있는「세계혁명의 발전과 공산당의 과업(Development of the World Revolution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Party) : 베를린 감옥에서 집필」의 저자인 우리의 친구 칼 라덱(Karl Radek)에 의해 가장 신랄하게 진술되었고 결집되었다.2) 공산주의는 모든 선전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목표로서 노동자 평의회의 점진적인 도입과 함께 (부르주아) 의회 활동과 노동조합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무기로 남는다는 점을 통해서 여기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토대, 조건 및 어려움에 대한 검토는 이것이 어디까지 옳은지를 보여줄 것이다.

 


 

서유럽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은 여러 차례 강조되었다. 이 힘의 기반을 분석해보자. 그 힘의 기반은 부르주아지의 수에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이 수적으로 훨씬 더 많다. 그 힘의 기반이 전체 경제생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중요한 권력 요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중유럽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그렇다면 그 힘의 기반은 모든 강압 수단을 포함하여, 국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있는가? 분명히, 국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항상 프롤레타리아틀 방해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의 정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목표였다. 그러나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지의 힘이 없는 지배에서 빠져 나갔으며 국가의 강압 기구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대중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는 이 국가 권력을 다시 건설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을 한 번 더 지배하에 두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보였을 때, 그들의 헤게모니를 재건하기 위해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에 또 하나의 숨겨진 원천을 보유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숨겨진 힘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부르주아 사고방식에 완전히 지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붕괴된 이후 그들 자신의 손으로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부활시켰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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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경험은 우리에게 서유럽에서의 혁명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낡은 부르주아 생산양식과 이와 함께 발전했던 수백 년간의 문명은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에 그것들 자체를 강하게 새겨 넣었다. 이런 이유로, 서유럽 대중들의 사고방식과 내면은 부르주아 문화의 지배를 경험하지 못한 동유럽 대중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이것이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했던 서로 다른 과정을 구별한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중세 이래로 프티 부르주아지와 초기 자본주의 생산에 기초한 강력한 시민 계급(burgher class)이 있었다. 봉건주의가 쇠퇴하면서, 시골 지역에서도 똑같이 강력한 자영농 계급 - 각자는 또한 그 자신의 소규모 사업의 주인이었다 - 이 성장했다. 부르주아 감수성은 이 토대 위에서 단단한 민족 문화로 발전했는데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서 선두에 섰던 영국과 프랑스 두 해양국에서 그러했다. 19세기에, 전체 경제의 자본으로의 종속과 대부분의 외진 농장의 자본주의 세계무역 체제로의 편입은 이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고 개선시켰으며, 언론, 학교 및 교회의 심리적인 선전 활동은 민족 문화를, 자본이 프롤레타리아화시키고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끌어 모은, 대중들의 뇌리에 확고히 주입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모국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형태일지라도, 유럽인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웠던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그리고 그 당시까지 침체되었지만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파도가 낡고 낙후된 소농 경제 및 프티 부르주아 문화와 연결될 수 있었던 중유럽,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도 해당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동유럽 국가로 압력을 가했을 때, 매우 상이한 물질적 조건과 전통에 직면했다.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에서 심지어 엘베 강 동부 독일에서도 정신적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자는 대규모 토지, 가부장적인 봉건주의 및 촌락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와 더불어 원시 농업 조건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곳 대중들은 백지처럼 수용적으로 더욱 원시적이며 간단하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연관되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지한' 러시아인들은 노동의 새로운 세계의 전위로 주장할 수 있다고 흔히 조롱하면서 표현했다. 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관련하여, 암스테르담 공산주의 대회4)에서 영국의 한 대표는 차이점을 상당히 정확하게 강조했다. 러시아인들은 더 무지할지 모르지만, 영국 노동자들은 그들 사이에 공산주의 선전을 더욱 힘들게 하는 편견으로 가득 찼다. 이 '편견'은 영국, 서유럽 그리고 미국의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화 상태로 만드는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측면일 뿐이다.

 

이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전체 내용은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의 세계관과는 대조적으로 다변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간신히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 프티 부르주아와 소농의 노동 형태에 그 기원을 두고 점진적으로 공동체라는 그리고 인정되는 규율의 필연성이라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감각으로 대체될 뿐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다. 이 특징은 아마 앵글로색슨(Anglo-Saxon) 국가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개인의 관점은 총체로서 포괄적인 사회 대신에 그의 작업장에 제한된다. 너무 절대적으로 분업의 원칙은, 정치 그 자체로, 전 사회의 통치 체제, 누구나의 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전문가들, 정치가들의 전문화된 분야인, 지배하는 계층의 독점으로서 보인다. 수세기에 걸친 물질적, 지적 무역과 더불어, 문학과 예술 즉 부르주아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에게 단단히 박혔고, 외면적인 무관심 또는 표면적인 국제주의보다 무의식에 훨씬 깊게 기반을 둔 민족단결의 감정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민족적 계급연대로 그 자신을 표현하며, 국제 행동을 적지 않게 저해한다.

 

부르주아 문화는 주로 사고(thought)의 전통적인 태도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존재한다. 대중들은 실질(real terms)로 생각하기는커녕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하며 부르주아 문화를 따라갔다. 부르주아적 사고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와 전통은 통합적이지 않다. 이전 세기의 무수한 계급투쟁으로부터 남겨진 정신적인 반사 작용은 낡은 부르주아 세계를 구분 짓는 사고의 정치 및 종교 체제로서 존속하고, 이런 이유로 그것에서 기인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그룹, 교회, 분파, 정당으로 분열된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적 과거는 새로운 세계 창출을 위해 필수적인 계급통일을 방해하는 조직 전통으로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존속한다. 이 낡은 조직에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위의 추종자와 지지자를 이룬다. 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지도자를 공급하는 것은 지식인계급(intelligentsia)이다. 지식인계급 - 성직자, 교원, 문인, 언론인, 예술가, 정치인 - 은 무수한 계급을 형성하며, 부르주아 문화를 조성, 발전 및 전파시키는 기능을 한다. 지식인계급은 부르주아 문화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며, 자본의 헤게모니와 대중들의 이익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본의 헤게모니는 대중들에 대한 이 그룹의 지적 지도력에 뿌리박고 있다. 억압당하는 대중들이 흔히 자본과 그 기구에 반대하여 투쟁할지라도, 그들은 지식인계급의 지도력 하에서 그렇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공동투쟁에서 쟁취한 확고한 연대와 규율은 이 지도자들이 드러내 놓고 자본주의의 편으로 전향하자마자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강력한 버팀대임이 입증된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그들 투쟁의 표현으로서 살아있는 힘이 되었던 쇠퇴하는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문화투쟁(Kulturkampf)5) 이후 독일에서의 가톨릭교(Catholicism)와 마찬가지로, 흔히 국가를 강화했던 반동 체제로서 후에 그 가치를 입증했다. 그 이론적 기여라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것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처럼, 낡은 이데올로기를 파괴하고 끝장내는 데에 있어 사회민주주의가 수행했던 역할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정신적으로 전문가로서 정치 및 다른 지도자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반적인 유형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그들 스스로 다루는 대신에 지도자들이 맡아 관리하도록 했다. 반세기의 극심한 계급투쟁에서 발전한 확고한 연대와 규율은 자본주의를 파묻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과 통제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4년 8월과 1918년 11월에 이는 대중들을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 그리고 반동의 무력한 도구로 만들었다. 서유럽에서, 이를테면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과거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작동하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이란 계급의 통일을 방해하도록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되는 그룹으로 나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원래 이 계급 통일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순전히 정치 방침을 계급 정치로 대치하는 어느 정도의 그 기회주의적 전술로 인하여, 실패했다. 그것은 단지 그룹의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위기시기에 대중들이 필사적이 되어 행동을 할 때, 대중들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는, 1918년 11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이 전통의 힘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다시 대두되며, 일시적인 승리를 패배로 만든다. 우리의 관점에서 부르주아 개념의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힘은 독일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슬로건에 대한 존경, 이념과 강령의 오랜 습관의 힘. 요점은 의회의 지도자들과 사회주의 정부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이다. 러시아에 대한 더러운 거짓말의 폭격이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이 증거가 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자신감의 부족, 대중들의 그 자신의 힘에 대한 믿음의 부족,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십 년 동안 그들의 투쟁, 그들의 혁명적 목표, 그들의 이상의 화신이었던 당, 조직, 그리고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 그것이다. 이 조직의 엄청난 정신적이고 도덕적이며 물질적 힘인 이 거대한 기계는 노동운동이 우세한 자본의 앞잡이였고, 지금은 다시 한 번 대중들 내에서 타오르는 모든 혁명적 경향을 짓밟았던 시기를 포함하는 투쟁 형태의 전통을 구현했던 대중들 자신의 수년간의 노력으로 공들여 만들어졌다.


이 사례는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빠른 붕괴와 정신의 미성숙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작동하는 부르주아지 전통의 힘으로 표현된다. 프롤레타리아가 헤게모니와 자유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신의 성숙을, 번영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모순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한 모순은 오직 혁명적 발전의 과정에서, 자발적인 봉기와 권력 쟁취, 그리고 후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만 해결된다. 혁명이,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낡은 투쟁 수단뿐만 아니라 새로운 투쟁 수단을 사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랫동안 자본의 요새를 헛되이 공격한다는 과정을 취할 것이라는 점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라덱의 개요(schema)에서 제기되었던 장기간에 걸친 전술과 신중히 조작된 포위 작전은 이와 같이 불발로 끝난다. 만약 권력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전술적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권력을 가능한 한 빨리 획득하느냐가 아니다. 이것은 코뮤니스트에게는 너무 쉬운 선택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지속적인 계급 권력의 기반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이다. '단호한 소수파(resolute minority)'는 전체로서 계급의 행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뿐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대중들이 그들의 머리에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무관심을 발생시키기 위해 그러한 권력 장악을 받아들인다면, 진정으로 수동적인 대중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쟁취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반동의 적극적인 추종자로서 언제 어느 때나 혁명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그리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교수대와의 연합(coalition with the gallows on hand)'은 고작 이러한 종류의 옹호될 수 없는 당독재(party dictatorship)를 위장할 뿐이다.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가 부르주아지의 파산한 지배를 파괴하고, 공산당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냉철한 전위가 정치 지배를 장악할 때, 공산당은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나약함의 근원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그리고 미래에 닥쳐올 혁명 투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업만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성공적으로 완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대중들 스스로 그들에게 맡겨진 과업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것은 대중들 자신을 활동의 정점으로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결단력(initiative)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자신감(self-confidence)을 상승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조직 형태의 지배와 낡은 지도부의 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불가피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키고 대중들의 물질적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연립정부에 합류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본주의 외면의 맹공격에 대비하여 생산과 방어의 재조직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반혁명을 방지하는 전제조건이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지배하는 그러한 권력은 정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주성과 독립성의 결여에 의해 야기된다. 혁명 발전의 과정은 의존성과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해방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투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이미 오랜 제도이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미 그것에 대항해 몇 세대 동안 투쟁하고 있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시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당대의 단계에 상응하는 투쟁의 방법들, 형식들 그리고 지원들을 창조해 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곧 임시방편으로 여겨지기보다, 지속적이고 절대적이며, 그리고 완벽한 형식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결국 파괴되어야 하는, 발전의 족쇄가 되었다. 계급이 거듭되는 대격변과 급격한 발전에 휘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특정 국면의 대변인으로서 계속해서 특정 단계에 남아 있으며, 그들의 엄청난 영향력은 운동을 방해할 수 있다. 행동의 형태는 도그마(dogma)가 되고, 조직은 변화된 투쟁 조건에 다시 맞추고 재적응시키기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격상된다. 이것은 여전히 적용된다.

 

계급투쟁 발전의 모든 단계는 지금의 발전이 훨씬 빠른 페이스로 선행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 만약 그 자신의 과업을 분명히 인식하고 과업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면 이전 단계의 전통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혁명은 내부 투쟁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저항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안에서부터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산주의를 향해 성숙해진다.

 


옮긴이 ❙ 성승욱
 

 

<주>

 

 

 

 

 

 

1)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 회원인 S. J. 러트거스는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 또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 참석했으며 암스테르담에 제3인터내셔널 서유럽 서기국 설립을 위해 1919년 말 귀국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따르면 갑자기 얼어붙게 만든 기초를 야기했던, 서기국 기관지의 독점적 발행에서 의회 전술과 노동조합 전술에 관해 좌파 지향의 글을 썼다.

 

2) 여기서 판네쿡은 라덱이 수감 중 작성한 두 개 글의 제목을 혼동하고 있다. 「독일 혁명의 발전과 공산당의 과업The Development of the German Revolution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Party」은 하이델베르크 회의 전 쓰였고「세계혁명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공산당의 전술The Development of the World Revolution and the Tactics of the Communist Parties in the Struggle for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은 그 이후 쓰였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3) 다음에 나오는 단락은 호르터Herman Gorter의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Open Letter to Comrade Lenin」에서 『촌락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를 인용했다.

 

 

 

4) 문제의 암스테르담 대회는 서기국을 설립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5) 1860년대 말 독일 루르 지방의 첫 노동조합은 가톨릭 사제들의 작품이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 비스마르크Bismarck는 독일사회민주주의당에 대한 공동전선을 위해서 가톨릭교와 그 정치대표인 젠트럼Zentrum (독일기독교민주동맹Christian Democrat Union의 전신) 에 대한 그의 운동을 중단했다.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84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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