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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이란 전쟁의 여파에 맞선 첫 번째 방어적 대규모 파업

[인도] 이란 전쟁의 여파에 맞선 첫 번째 방어적 대규모 파업

 

“우리의 요구를 들어라!”–인도의 노동자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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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부터 델리(Delhi) 남부 산업 지역에서 대규모 노동자 봉기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란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올해 초부터 산업 중심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해 온 노동자 시위의 일환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초과근무 수당 인상, 체불 임금 지급, 그리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동등한 노동 조건을 요구했다.

 

배경: 노란 안전모 시위와 물가 상승

 

2026년 1월부터 3월 사이, 인도 전역에서 최소 28건의 대규모 파업과 노동자 시위가 발생했으며, 대부분은 산업 건설 현장에서 일어났다. 「이주 노동자 연대 네트워크」(Migrant Workers Solidarity Network)가 발간한 팸플릿은 시위대 대부분이 노란색 안전모를 착용한 건설, 석유, 철강 노동자들이라는 점에서 이 운동을 ‘노란 안전모’ 운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요구 사항은 임금 인상, 안전 조치 개선, 그리고 하루 최대 8시간으로의 노동 시간 단축이었다. 보기를 들어, 파니파트(Panipat)에서는 작업장 사고로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자, 인도 최대 정유 공장의 파견 노동자 3만 명이 거리로 나와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차량을 파손했다. 하자라(Hazara)에서는 2,000명 이상의 철강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며 파니파트 정유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대를 표명했다. 임금 인상과 8시간 노동 요구는 특히 건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을 촉발하는 효과를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섬유 및 에너지 산업으로까지 확산했다. 구자라트(Gujarat)주에서는 알록 텍스타일(Alok Textiles) 노동자들이, 문드라(Mundra)에서는 인도 최대의 석탄 화력 발전소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란 전쟁은 아시아에 에너지 위기를 촉발했고, 이는 인도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동자들이 취사에 사용하는 LPG 가격이 급등하면서, 이주 노동자들의 임금은 이제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해졌다. 지방 정부는 2026년 4월 1일부터 최저임금을 35% 인상하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이 조치가 이행되지 않았거나 인상 폭이 너무 미미했다.

 

이란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지난 3월 초, 인도 남부 케랄라(Kerala)주에서는 수천 명의 간호사들이 최저임금 두 배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4월 3일에는 마네사르(Manesar)에 있는 혼다(Honda)와 스쿠터 인디아(Scooter India)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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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다(Noida) 봉기

 

4월 8일, 델리(Delhi) 교외에 있는 인구 65만 명의 노이다(Noida)에서 노동자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자동차 부품 및 전자 산업 분야를 포함한 수천 개의 산업체가 밀집해 있는 노이다와 델리 광역 산업 지대는 아시아 최대의 산업 중심지 중 하나다. 노동자들은 35%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일주일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4월 13일, 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4만에서 4만 5천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인디언 익스프레스》는 “월요일, 노이다 산업 단지의 수십 개 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돌을 던지고 차량을 파손했으며, 그중 몇 대에 불을 질렀다”라고 보도했다. 공장 건물들도 불에 탔다. 현장에 배치된 경찰은 여러 차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이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 직접 올린 영상에는 시위대가 공장 내부를 행진하며 “우리의 요구를 들어라!”라고 외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건설 노동자들이 건물을 철거하고 있다. 또 다른 영상에는 IT 사무실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4월 14일에는 가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고, 4월 15일에는 비정규 플랫폼(gig) 노동자들이 모여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이 봉기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여, 구르가온(Gurgaon)에서 파리다바드(Faridabad)를 거쳐 노이다(Noida)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는 2014~2015년 이후 이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파업 물결이다. 그리고 당시와 달리, 이번 파업은 섬유 및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14~2015년과 현재의 차이점 중 하나는, 공장 점거가 아닌 거리 봉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봉기가 확산한 흥미로운 요인 중 하나는 여러 기업이 서로 다른, 그것도 상당히 멀리 떨어진 산업 지역에 공장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차(Richa) 의류 회사의 노동자들이 마네사르(Manesar)에서 파업에 돌입했을 때 경찰의 공격을 받고 보복 조치를 당하자, 노이다(NOIDA)에 있는 리차 공장 노동자들이 이에 대응해 파업을 시작했다. 모더슨(Mothersons) 공장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먼저 노이다(NOIDA)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그 뒤를 이어 파리다바드(Faridabad)와 라자스탄(Rajasthan) 주에 있는 비와디(Bhiwadi)의 모더슨 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비와디(Bhiwadi)는 노이다(NOIDA)에서 약 90km 떨어진 곳이다.

 

현지 동지들은 운동 기간 몇 가지 ‘평등주의적’ 정서가 지배적이었다고 전했다: “우리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왜 ‘관리자들’(경영진, 사무직)이 모든 돈을 가져가는가?” 그리고 “왜 주마다 최저임금이 다른가?” [이 산업 단지는 여러 주로 나뉘어 있다. 델리(Delhi) 주는 자체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노이다(NOIDA)는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주의 임금을, 구르가온(Gurgaon)이나 마네사르(Manesar)는 하리아나(Haryana) 주의 임금을, 비와디(Bhiwadi) 노동자들은 라자스탄(Rajasthan)주의 최저임금을 받는다. 임금 격차는 상당히 클 수 있다.]

 

지방 정부는 초기 대응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겠다고 발표했으나, 현재로서는 35%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한, 집회를 금지하는 ‘제163조’를 발동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이제 주 정부는 소셜 미디어(특히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영상이 많이 올라오는 인스타그램)를 제한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제한적인 효과만 거두고 있다. 경찰의 보호 아래 회사 경영진은 노동자들에게 시행할 개선 사항과 임금 인상안을 발표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현재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평화롭게 행동하고 '무정부 상태를 확산시키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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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조립한?

 

이번 노동자 봉기, 특히 노동 시간 단축 요구는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흐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2022년 중국 폭스콘(Foxconn) 노동자들의 코로나19 관련 파업 이후, 특히 애플은 미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생산 시설의 상당 부분을 인도로 이전하고 '중국 조립' 전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2024~25년경 인도 전자 산업계에서 발생한 첫 번째 투쟁과 조직화 성공 사례들은 이러한 계획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시사했다.

 

인도 노동자들은 ‘세계적인 초저가(저임금) 경쟁’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2026년 4월

와일드캣(Wildcat)

 

* 「와일드캣」(Wildcat)의 “우리의 요구를 들어라! – 인도의 노동자 봉기” 독일어 원문을 「분노한 노동자들」(AngryWorkers)이 영어로 번역하고 내용을 추가함.

 

 

 

<독일어 원문 출처>

https://www.wildcat-www.de/aktuell/a129_indien.html

 

<영어 출처>

https://www.angryworkers.org/2026/04/15/meet-our-demands-workers-uprising-in-india/ (내용 추가)

 

https://leftdis.wordpress.com/2026/04/16/india-first-defensive-mass-strike-against-the-consequences-of-the-iran-war/ (제목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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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들은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어야 하는가?

혁명가들은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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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의 심각성과 전쟁의 야만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이 역사적 쟁점을 자각하고, 계급 사이 힘의 균형 역학과 그것이 투쟁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며, 투쟁의 목표에 대한 성찰을 발전시키도록 자극해야 할 책임이 있다. 코뮤니스트 좌파의 원칙을 수호하는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정치 환경 내의 다양한 단체가 노동자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어떤 분석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프롤레타리아 토론의 중요성

 

3월 7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과 3월 21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파리와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개최한 공개회의는, 다양한 혁명 단체들의 분석과 주장을 비교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의 공개회의 평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 점에 동의한다. “우리는 노동계급이 위험에 처한 이 시기에 이러한 토론과 성찰, 논쟁의 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코뮤니스트 좌파 활동가와 동조자들의 견해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혁명적 국제주의 소수파의 주장에 새롭게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정치적 출구를 제공하기 위함이다.[1] 실제로 이 토론은 프롤레타리아 단체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과도[2] 우애적인 정신으로 진행되었으며, 특히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 전쟁이라는 핵심 쟁점과 혁명가 및 노동계급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진 젊은 층이 참여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이 강조했듯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파멸적이고 야만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에 대한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되었다.”[3]

 

토론 과정에서 분석 방법과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상당한 견해 차이가 드러났다. 전쟁의 역학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참석한 대다수 단체는 세계가 “제3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다”라고 주장했지만,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며 “우리는 점점 커지는 혼돈을 배경으로 전 세계적으로 갈등이 확산하고 일반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위협이 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토론의 핵심은 오늘날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의 타당성, 즉 각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 부르주아지의 전복을 위한 투쟁을 촉진하기 위해 자국 부르주아지의 (전쟁) 패배를 바라는 태도에 집중되었다. 실제로 이 구호를 내세우는 것은 진정한 국제주의에 대한 모호함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현재 역학 관계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이 시사하는 바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드러낸다.

 

처음부터 모호했던 구호…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는 분명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이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레닌은 ‘중앙파’들의 궤변에 반박”하고자 했다. 중앙파들은 “원칙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 참여에 반대하면서도, ‘적국’의 노동자들이 전쟁에 맞서 투쟁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자국’의 노동자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만약 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적국 노동자들보다 먼저 봉기한다면, 오히려 적국의 제국주의 승리를 돕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러한 조건부 ‘국제주의'에 맞서 레닌은 어느 나라의 노동계급도 '자국’ 부르주아지와는 공통된 이해관계가 없다고 매우 정확하게 반박했다. 특히 그는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패배한 후 발생한) 파리 코뮌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1905년 러시아혁명의 사례에서 보듯, 부르주아지의 패배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그는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 부르주아지의 (전쟁) 패배를 ‘바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마지막 입장은 당시에도 이미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각국의 혁명가들이 '자국' 프롤레타리아트에 (자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요구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특히 전쟁에 참여하는 주요 선진국에서 일어나야 했다. [4]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록 자신도 때때로 이러한 ‘역(逆) 애국주의’의 논리에 휩쓸리곤 했지만, 이미 이와 관련하여 레닌의 잘못된 입장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가 아니라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의 훨씬 더 명확한 구호인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결론을 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레닌에게 있어 이러한 입장의 약점은 그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오류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레닌은 (‘자국’ 부르주아지의 패배를 바라는 것이) '적국'의 부르주아를 지지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그의 ‘소망’이 이끄는 논리적 결론일지라도 말이다.”[5]

 

반면,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에 담긴 민족주의적 혁명 전망은 이후 “코뮤니스트”라는 외피를 두른 부르주아 정당들이 제국주의 전쟁 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차례 악용했다. 보기를 들어, 1939년 소련-독일 불가침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 스탈린주의자들은 갑자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혁명적 패전주의’의 미덕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들이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미덕이었으며,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마자 재빨리 배척해 버렸다. 이탈리아 스탈린주의자들도 1941년 이후 무솔리니에 맞선 저항 운동을 주도하는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6]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정 부문에 호소하며, 다른 부문과 구별되는 과제를 부여하는 구호는 모호하며, 쉽게 노동계급에 불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7]

 

레닌은 1917년 2월 이후로는 이 구호를 거의 내세우지 않았으며, 대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라는 구호를 선호했다. 더욱이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기된 또 다른 중대한 단점이 있는데, 이는 이 구호가 진정한 국제주의를 얼마나 외면하는지를 보여준다. “자국 정부의 패배가 혁명의 발전에 유리하다고 주장하고, 전쟁 상황에서 모든 정부에 대항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내재적인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는 혁명적 패전주의의 기존 체계는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분열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 깊은 분열을 초래한다는 사실, 즉 1914-18년 전쟁 이후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로 명백히 반박되었다.”[8]

 

…오늘날의 예외적인 현상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가 처음 제기되었던 당시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제3차 세계대전을 겨냥한 블록 형성이나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를 전선으로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쇠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제국주의적 ‘각자가 모두에 맞서는 투쟁’의 폭발과 혼돈과 야만적인 전쟁의 확산을 향해 가고 있다. 노동계급이 심각한 물리적, 이념적 패배에 직면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투쟁을 통해 자율성과 계급의식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의 길로 돌아오고 있으며, 특히 2022년 영국의 ‘불만의 여름’ 동안 ‘더는 참을 수 없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일어난 운동 이후, 그동안 지속하던 무기력에서 확실히 벗어나고 있다. 2023년 프랑스, 미국, 그리고 전 세계로 이어진 이 움직임은 지난 30년간의 상대적 수동성과의 ‘단절’[9]을 의미하며, 다시금 투쟁 정신을 표출하고 잃어버린 계급 정체성을 점차 되찾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을 보인다.

 

이 느리고, 우여곡절이 많으며, 어려운 과정은 분명 걸림돌로 가득 차 있지만,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인용하자면, 이는 “분자적 과정”, 즉 아직 형성 중인 경향을 나타내며, 필연적인 정치화와 혁명적 투쟁의 장기적 전망 확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잉생산 위기와 관련된 경제적 공격에 대한 저항, 전쟁 경제에 대한 저항, 그리고 희생을 요구하는 이념적 캠페인에 대한 저항은 비록 아직 취약하더라도 실질적인 진전이다. 요컨대, 현재의 역동성이 내포하는 이해관계와 그것이 노동계급에 제기하는 과제는 상당하지만,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가 내세웠던 세계대전과 같은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사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 옹호하는 이러한 분석 틀은 낯설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맑스와 엥겔스(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당대에 발전시킨 ‘고전적’ 분석을 가리키는데, 이 분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이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제적 붕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아니다. 전쟁은 혁명의 일반화를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할 정도로 매우 빠른 진전을 암시하는 전쟁론(러시아 모델)과는 달리, 룩셈부르크가 독일 코뮤니스트당 창당 대회에서 말했듯이, 혁명은 투쟁 속에서 실패와 전진, 후퇴가 뒤섞인,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과정에서 혁명의 일반화, 의식 고양, 그리고 자기 조직화 능력을 위한 조건이 성숙해진다. 혁명가들은 더는 조급함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현실이 요구하는 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활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  혁명의 일반화 조건은 바로 위기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점점 더 깊은 위기에 빠져드는 것은 (…) 투쟁의 일반화를 향한 불가피한 행진, 세계적 차원에서 혁명을 개시하고 최종 승리를 거두기 위한 조건이다.”[10]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혁명적 패전주의’는 더는 단순히 잘못된 구호나 핵심에서 빗나간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좌파적 입장을 옹호하는 문을 활짝 열어준다. 사실, 이 구호는 부르주아지와 그 좌파들이 제국주의 목적을 구현하도록 허용하며, 때로는 ‘민족 해방 투쟁’이라는 또 다른 구호와 결합하기도 한다. 이는 제국주의 사업과 주민 학살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는데, 냉전 시기나 1990년 제1차 걸프전 당시처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미국의 억압’에 맞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옹호할 때 이 구호를 사용했던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이 구호는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와 이스라엘 부르주아지가 대립하는 분쟁에서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민족주의적 지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구호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게다가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은 비록 모호하게는 있지만, ‘억압받는 이들 사이의 우애’를 옹호하기 위해 유사한 어휘를 사용한다.[11]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과 「국제코뮤니스트당」(ICP)은 특정 부르주아 진영을 다른 진영에 대항해 지지하지는 않지만, 국가 사이 상황의 차이에 대한 잘못된 근거로 “혁명적 패전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좌파들의 기만과 그들의 오염된 “국제주의”와의 명확한 구별을 흐리게 한다. 이러한 조직들이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과거의 낡은 공식을 기계적이고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위험성을 보여준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과 「국제코뮤니스트당」은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 그에 따른 계급 사이 힘의 균형, 그리고 특히 동지들이 “여전히 반혁명의 무게가 크게 드리워져 있다”라고 생각하는[12]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급의 실제 물질적 상황을 그들의 분석 틀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과 군국주의가 현재 상황의 핵심에 있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수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켜야 할 원칙으로 남아 있지만, 과거와는 달리 다음 혁명 물결의 발전은 세계대전에서 비롯되지 않을 것이며, 최근 「국제코뮤니스트당」의 기사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선 사이의 우애에서도 비롯되지 않을 것이다.[13] 혁명의 기원은 심화하는 경제 위기에 있다. “전쟁 기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부르주아지가 요구하는 희생은 불굴의 노동계급으로부터 심각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이 단절을 특징짓는 계급운동은 계급투쟁의 주요 자극제로서 경제 위기의 중심성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전쟁의 확산과 전시 경제 비용의 증가는 향후 투쟁의 정치화에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은 전시 경제가 요구하는 희생과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의 증가 사이의 명확한 연관성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해체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른 모든 위협을 체제 전체에 대한 투쟁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14].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일관된 구호는 맑스의 「코뮤니스트 선언」에 나오는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이다.

 

2026년 4월 4일

WH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주>

[1]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파리 공개회의 요약”
https://www.leftcom.org/fr/articles/2026-03-14/bilan-de-la-r%C3%A9union-publique-du-7-mars-2026 (프랑스어)
https://blog.jinbo.net/iscralee/832 (한국어)

[2] 참석한 코뮤니스트 좌파 단체: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국제코뮤니스트당-프롤레타리아」(ICP), 「국제코뮤니스트당-국제주의자 노트」(ICP), 「전국노동자연맹-노동자연대」(CNT-SO) 소속 활동가 1명

[3] 위의 “파리 공개회의 요약” 참조

[4]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기사, “걸프전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 정치 환경”, 『국제 평론』 64호, 1991년

[5] 위의 글 참조

[6] 위의 글 참조

[7] 위의 글 참조

[8]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제 26차 총회, “계급투쟁 보고서”, 『국제 평론』 174호, 2025년 5월

[9]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기사, “왜 ICC는 계급투쟁의 ‘단절’을 말하는가?”, 『세계혁명』 397호, 2023년 7월

[10]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노동계급 투쟁의 일반화를 위한 역사적 조건, 『국제 평론』 26호, 1981년

[11] 위의 “파리 공개회의 요약”

[12]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공개회의 “여는 말”

[13] 「국제코뮤니스트당」(ICP), 우크라이나 전쟁. 국방과 현실 정치의 혼탁한 수렁 속의 “명확한 경향”

[14] 「국제코뮤니스트흐름」, 국제 정세에 관한 결의안, 『국제 평론』 174호, 2025년 11월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797/should-revolutionaries-put-forward-slogan-revolutionary-defeatism

 

<참조할 글> 오늘날의 혁명적 패전주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ICT)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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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과 코뮤니스트의 역할에 대하여 (잊어버리거나 오해하는 이들을 위해)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과 코뮤니스트의 역할에 대하여

(잊어버리거나 오해하는 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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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코뮤니스트 좌파 내에서, 특히 급진적 개량주의 진영에서는 주기적으로, “경제” 투쟁, 즉 일상적인 노동 조건(임금, 노동 시간, 노동 강도 및 작업량, 해고 등)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대한 우리의 개입 입장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항상 주장해 온 것을 무시하거나 (선의라 할지라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우리가 자본가에 맞선 “소규모 (일상) 투쟁”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노동계급에 추상적인 혁명적 전망을 호소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과 소속(지부) 그룹들이 역사 전반에 걸쳐 발간한 수많은 문서와(1) 우리가 가진 역량을 다해 계급투쟁에 참여해 온 점을 고려할 때, 특정 비난이 되풀이되는 것에 다소 놀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선의를 가진 동지들을 위해, 그리고 몇 가지 사항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하기 위해 이 주제를 다시 다룬다.

 

우리는 노동계급이 작업장 안팎에서 자신들의 기본적인 생활조건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축적 주기의 위기라는 역사적 국면에서, 개량주의(사실상 개혁은 불가능하다)뿐만 아니라 더 나은 생활조건을 요구할 공간조차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고 투쟁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다만 우리는 노동계급에 현실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알려야 한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중재의 여지는 전혀 없으며(최소한의, 그리고 간헐적인 중재는 예외), 자본과 노동 사이에는 진정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풀뿌리 노동조합(평조합원 노조, ‘전투적’, ‘대안’ 노조 등)과 일부 보르디가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노동조합 (권리) 요구 목록"에 대해 비판적이다. 보기를 들어, 요구 목록에는 임금 삭감 없는 주 30~32시간 노동제, 대폭적인 임금 인상, 실업자 전액 임금 지급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는가? 이러한 요구들이 충족될 때 수반될 착취의 감소에 반대하기 때문일까? 물론 아니다. 사실 이러한 요구들은 기성 노조 활동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심지어는 노조 활동에 반(反)하는 대중 투쟁을 의미하며, 부르주아지와 그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대결, 즉 혁명 전 단계의 상황을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동시에 계급에, 또는 적어도 가장 전투적인 부문에 충분히 뿌리내린 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어떻게 주 30시간 노동제 등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특히, 몇 주 또는 몇 달 전에 미리 예고하는 파업을 통해서 말이다. 게다가 모든 국가, 또는 거의 모든 국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파업 금지법을 준수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지는 결코 그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권력 투쟁이라는 객관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투쟁 운동에 대해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질서 유지 세력을 동원할 것이다.

 

게다가 직접적인 경제 요구를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활동가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대적 파업이 마법처럼 경제적 요구를 정치적 요구로 자동적이고 자연스럽게 전환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전국을 마비시킨 대대적 파업이 일어났지만, 계급의식의 대대적인 고취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운동은 패배했다.(2)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무의미한 논쟁을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사실들을 꼼꼼히 검토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이러한 사실들을 상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우리와 같은 이유로 작성한)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 2000년 2호에 실린 우리 동지 마우로 주니어(Mauro jr)의 글을 여기에 다시 싣는다. 또한,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서로, 1997년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에서 발표한 “노동조합에 관한 테제”의 발췌문도 함께 싣는다.

 

2026년 4월 10일

국제주의혁명그룹(GRI)

 

 

 

노동조합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노동조합은 혁명 전략에 무용지물이지만, (권리) 요구 쟁취 투쟁은 계급의 생명줄이자 혁명 전략의 존립 조건이다.

 

우리는 혁명이 노동조합의 시체를 밟고 나아갈 것이며, 노동조합은 기껏해야 혁명가들에게 다른 활동 무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활동 공간(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이마저도 부족한 실정이다)을 제공할 뿐, 결코 혁명 전략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적인 경험은 점점 더 우리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정치 경험은 또한, 우리가 요구 쟁취 투쟁을 무의미하게 여긴다고 오해하는 단순한 생각과 우리의 원칙적인 입장을 혼동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이러한 오해가 일반 노동자들, 특히 일부 급진적 노동조합 조직에 선의로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물론 용납할 수는 없지만), 맑스주의, 혁명, 강령 등의 정통성을 수호한다고 자처하는 집단이나 조직에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정당화될 수 없는 오해이지만, 실제로 존재한다. 심지어, (보르디가주의) 「국제코뮤니스트당」(Programma Comunista)의 한 구성원이 우리의 북미 지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서술하겠다.

 

요구 쟁취 투쟁의 본질

 

맑스주의는 그 기원에서부터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자 운동, 즉 자본가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운동을 계급투쟁의 근본적이고 억압 불가능한 형태로 규정해 왔다. 따라서 이는 어떠한 "정치적 초월", 즉 계급투쟁을 최고 경지인 혁명적 공세로 발전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오늘날 계급투쟁은 자본이 임금과 노동 조건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반면, 노동계급은 이에 저항할 능력이 없는 역전된 형태가 깊어지고 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보르디가주의 운동의 다양한 분출에서 나타난 일부 소규모 그룹들이 오히려 지지하는) 요구 쟁취 투쟁이 의미가 없다는 가설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요구 쟁취 투쟁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투쟁이 성숙하는 데 필요한 조건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요구 쟁취 투쟁을 할 능력이 없고, 저항을 통해 가장 심각한 형태의 억압에 맞설 능력이 없는 계급은 혁명을 일으킬 자격이 없는 계급이며, 억압받는 계급으로서의 상태가 지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 쟁취 투쟁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러한 투쟁을 이끈다고 주장하는 조직들(그리고 오늘날에는 전문적으로 이러한 투쟁을 방해하는 조직들)은 또 다른 문제이다.

 

노동조합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되는가?

 

노동조합은 노동력의 가격과 판매 조건을 협상하기 위한 노동자 조직으로 탄생했으며, 언제나 이러한 본성을 따르고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불변의 정통주의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노동조합의 구체적인 기능은 이미 1880년 엥겔스가 설명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교섭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조직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온다.

 

코뮤니스트 운동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험난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1905년과 1917년 10월의 경험, 그리고 (‘다수파 장악’이라는 유명한 과정의 일환으로) 노동조합을 장악하려는 트로츠키주의의 가설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들과 함께) 순수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19세기 말, 즉 엥겔스의 노동조합에 관한 저술 이후에 도출될 수 있었던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제2 인터내셔널에서 계승된 것으로 보이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임무 관련 가설들은 혹독한 경험을 겪고 나서야 반박되었다, 이는 결코 스탈린주의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옹호했던 사실이 아니며, 심지어 그 가설들은 이미 그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원칙과 방법론에 모순되고 있었다. 민족 문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대화 상대가 선의로, “만약 당신이 요구 쟁취 투쟁을 벌이는 노동조합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투쟁 자체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의 오류는 요구 쟁취 투쟁과 노동조합을 동일시하는 데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 특히 요구 쟁취 투쟁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조직 형태를 띤다. 그중에서도 노동조합은 확실히 가장 지배적인 형태이다. 노동조합은 가장 체계적이며, 그 본질과 기능상 가장 자기 보존적인 성격을 띤다. 오늘날처럼 자본이 노동자들을 공격해야만 존속할 수 있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이익을 옹호할 수 없을 때도, 노동조합은 존재의 근간인 교섭, 즉 자본주의 관계를 수호하며 자본주의의 임금 공격을 중재하는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노동조합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해 왔으며, 자본주의 경기 순환의 상승기, 즉 이윤율이 축적에 비례하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축적 시기에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다.

 

요구 쟁취 투쟁의 다른 형태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은 어떤 이유로든 노동조합이 실패할 경우, 노동조합에 대한 대안적인 조직 형태를 항상 구축해 왔다. 총회에서 위임한 투쟁위원회에서부터 이러한 위원회들의 부문별 또는 전국적 조정 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계급이 자신의 당면한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조직들로, 요구 쟁취 투쟁 자체로 표현되고 그에 뿌리내린 조직들이다. 투쟁이 끝나면 그러한 조직 형태 또한 사라진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형태와 그것의 소멸 가능성은 다양하면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혁명적 전위는 이러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활동에 참여한다. 그 형태는 1)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 혁명적 전위의 계급 기반 조직을 유산으로 남기고 사라지는 것(러시아의 1905년 소비에트, 그리고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프랑스의 1968년 5월 투쟁위원회, 또는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소규모 경험들)에서부터, 2) 상설적 노동조합으로 변모하는 것(최근의 대표적인 예는 반동적인 솔리다르노시치의 승리로 끝난 1980년 8월 폴란드 투쟁,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 1987년 기층위원회(코바스)의 불명예스러운 시코바스 노동조합으로의 변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투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교섭을 위한 상설 조직으로 변모시키는 후자의 해결책은 혁명적 계급 관점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상설 조직인 노동조합은 (1980년 폴란드에서 다시 볼 수 있듯이) 어쩌면 혁명 실험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던 공식 노동조합의 반(反)혁명적 행보를 더욱 빠른 속도로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집회를 통해 스스로 조직한 투쟁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 선출 및 투쟁의 경험 덕분에, 계급 잠재력의 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참여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자신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집단적 힘을 대표할 수 있다는 자각을 높이기 때문이다.

 

반면, 상설 노동조합 기구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교섭을 추구하고, 현재의 노동조합주의에 동조하도록 이끈다. 한마디로,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모든 일을 벌인다.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생명줄인 요구 쟁취 투쟁을 지지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투쟁에 역행하는 노동조합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목표는 바로 (비록 자본주의 공격에 대한 방어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 쟁취 투쟁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기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인해 새롭게 형성된 계급 구도 속에서, 투쟁을 재개할 수 있는 형태들을 연구하는 데 전념해 왔다. 이는 우리의 활동을 수행하고, 혁명적 전망에 가장 부합하는 방식, 즉 지금의 썩어빠진 생산·유통 체제를 전복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 2호, 2000년 2월

 

 

 

 

1997년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의 “노동조합에 관한 테제”에서 발췌

 

 

테제 7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하고, 심지어 당장 눈앞에 닥친 이익까지도 보호하려면 노동조합의 노선이나 계약 중재와 같은 어떤 형태의 개입도 배제하고 반대해야 하는데, 그러한 개입은 결국 통제력과 권리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공격에 직면했을 때, 노동자들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옹호하려는 시도는 자본의 생존 요구와 즉각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어적 투쟁과 공세적 투쟁의 구분은 오직 투쟁의 정치적 내용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임금 삭감 없는 노동 시간 단축 요구는, 진정한 계급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방어적인 요구이다. 만약 그것이 과거 스탈린주의 정치 세력이었지만, 지금 다시 부상하고 있는 급진적 개량주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최저 임금 보장 요구 또한 실업자와 소외된 대중을 위한 방어적인 요구이다. 오늘날 급진적 개량주의의 정치 강령으로 보이는 이 두 요구는 모두 자본에 의해 생존 "필수 조건"을 잔혹하게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절실한 필요를 나타낸다. 이러한 요구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 형태로 표출될 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방어하려는 의지와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전복해야 할 필요성을 표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그 투쟁이 방어적인 성격을 띠느냐 공격적인 성격을 띠느냐와 무관하게, 성공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테제 8

 

혁명 정당의 기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권력쟁취 외에 다른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은 비록 방어적일지라도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투쟁 발전을 위한 필수 조건이자 전제 조건이므로, 코뮤니스트 전위의 과업과 활동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서 계급의 경제 투쟁에 참여한다.

 

코뮤니스트는 임금 노동을 폐지하고 넘어서기 위한 혁명 강령을 제시하고 확산함으로써 자신들을 구별한다.

 

코뮤니스트가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고 단순한 요구 투쟁의 한계를 비판하는 한, 그들은 노동조합 조직과 공개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당의 과업과 노동자 투쟁 내부 투사들의 활동 사이 이러한 관계가, 경제적 투쟁이 실질적으로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만든다.

 

 

<주>

(1) 보기를 들어, "코뮤니스트 좌파는 무엇을 하는가?"를 참조.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0-04-22/what-does-the-communist-left-do

(2) 1980년대 폴란드의 운동에 대해서는 "솔리다르노시치: 노동조합주의인가, 자율조직인가?"를 참조.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9-05-17/solidarnosc-trade-unionism-or-self-organisation

 

<츨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6-04-13/on-the-daily-struggle-of-the-working-class-and-the-role-of-communists-for-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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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투쟁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하여

오늘날 ‘투쟁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하여

 

 

국가의 전체주의적 편재성과 고도로 발달한 사회 통제가 특징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의 상설 대중 조직은 더는 노동자의 물질적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이제 대부분 노동조합은 노동자 파업을 체계적으로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완전한 부르주아 정치 기관이 되어, 자본주의 국가에 편입되었다. 국가에 편입된 노동조합은 사회 평화의 주요 집행자가 되었다.[1] 그러나 노동자의 관점에서 투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자본이 전가한 위기 비용 외에도,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희생, 즉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고 있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위기의 여파뿐만 아니라 전쟁 준비로 인한 해로운 영향으로도 고통받고 있다. 이는 캐나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는데, 연방 정부는 대부분의 부처 예산을 삭감하는 동시에 군대, 국경 보안 및 법 집행 기관에 대한 자금 지원을 늘렸다.[2] 여러 나토(NATO) 회원국에서 정부 대표들은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에게 생활 조건 악화를 강요하겠다고 공공연히 발표하고 있으며, 징병제에 대한 논의도 증가하고 있다.[3] 마크 뤼테(Mark Rutte) 나토 사무총장의 발언은 특히 이를 잘 드러낸다. “국방비 지출을 늘리면 다른 우선순위에 대한 지출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감소 폭은 크지 않다." 정말 작다. 노동자들, 특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이러한 희생이 "최소한"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와 그에 따른 군사화는 또 다른 제국주의 진영의 주요 축인 중국과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군수산업 생산에 투입되는 자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다수 노동자가 겪는 가장 잔혹한 일상생활의 측면들을 완화하는 데 사용되지 못하는 자원이다. 우리가 본래 싸우려는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우리에게 무자비한 계급전쟁을 선포했기에 투쟁의 도구를 준비하고 반격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노동자들이 개인의 의식 수준과 관계없이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국가 어디에서든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조합은 우리의 투쟁을 억제하고, 와해시키고, 방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따라서 대대적 투쟁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비록 그러한 투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더라도, 투쟁이 시작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조합의 방해 책략에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가장 투쟁적이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동료 노동자들과 주변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노동조합의 공격에 저항하고 그들의 책략에 반대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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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 즉 코뮤니스트 의식이 노동계급 내에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전쟁 준비가 초래하는 해로운 영향에 맞서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의 의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투쟁 의식이 더 강한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파업이 시작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모든 주도권을 노동조합에 넘겨줘야 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조직화할 수 있다. 이는 새롭고 더 “급진적인” 노동조합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투쟁위원회는 노동자 투쟁의 역동성과 당면한 필요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또한, 투쟁위원회를 투쟁 중인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를 모으는 기능을 하는 초기 형태의 총회나, 그러한 총회의 위임을 받은 파업위원회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투쟁위원회는 미래의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투쟁적이고 결연한 의지를 가진 소수의 노동자를 한데 모은다. 특히 그들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노동조합이 준비한 분열과 방해 책략에 맞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 전단 배포, 파업 연설, 선전전, 집회 및 시위 참여를 통해 노동자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조직한다.

- 다른 사업장이나 지역의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접촉하고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 다양한 분야의 노동자, 심지어 실업자까지도 투쟁을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투쟁위원회는 1960년대 후반과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수없이 생겨났다. 이탈리아(1970년대의 Coordinamenti), 프랑스, ​​스페인, 로테르담 항만 노동자 등[4]의 사례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노동자 투쟁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제하는 것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전쟁 준비를 명분으로 퍼붓는 부르주아지의 공격과 한편으로는 아래로부터의 대대적인 파업을 조직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여,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투쟁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체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행진에서 발생할 대립에 대비하는 여러 대응책 중 하나이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첫째, 이러한 위원회는 전쟁을 위한 희생을 거부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둘째, 파업과 투쟁을 지역적으로 확대, 통일, 전면화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셋째, 러시아/나토에 대한 방어, 민족 해방, 민주주의와 조국 수호, 또는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을 자기 계급의 이익에 반(反)하는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 꾸며낸 그 어떤 허황된 구실이든 간에, 모든 계급 협조를 거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특정 지역에서 자발적인 선택 과정을 통해 모인 투쟁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이러한 투쟁위원회는 노동조합이 내세우는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원칙, 즉 전쟁을 위한 희생 거부, 민족주의 거부, 그리고 공동의 요구를 위한 파업의 통일과 전면화를 통해 행동에 나서는 데 신중하거나 주저하는 동료들에게 투쟁의 필요성을 설득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투쟁위원회의 범위는 단일 사업장의 구성원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을 늦추거나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파업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파업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해 나가는 비합법적인 비공인 파업뿐이다. 따라서 투쟁위원회는 특정 도시나 대도시권 내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포함해야 한다. 또한, 투쟁위원회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활동을 자신의 사업장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 사업장에서 구체적인 투쟁 가능성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노동계급이 직면한 일반적인 상황(구매력의 감소, 노동 강도의 심화, 사회 복지의 전반적인 악화)은 모든 사업장에서 동일하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오직 자신의 사업장에서만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반드시 맞서 싸워야 할 생디칼리즘적 일탈이다. 계급 갈등은 근본적으로 단일 사업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차원에서 나타난다. 이를 사업장으로 축소하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다.

 

투쟁위원회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2022년 4월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이 요청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위원회에 우리가 참여한 배경이 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이 분명했다. “우리는 이 운동이 국제주의를 중심으로 혁명 세력을 재결집하려는 시도라고 보지 않는다. 이는 초기 단계의 침머발트 회의도 아니며, 당을 위한 투쟁의 순간도 아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 운동은 전쟁 준비가 야기하고 앞으로 더 심화할 공격에 맞선 전반적인 프롤레타리아 동원에 부응해야 한다. 이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재집결의 첫 번째 시도일 뿐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유형의 투쟁위원회가 ‘자발적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 겪고 있고, 앞으로 겪게 될 침략에 대한 1차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저항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5]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의 지속적인 진전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방식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맥락과 쟁점을 결정짓는다. 투쟁위원회나 다른 조직 형태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가입 여부나 정치 조직 소속 여부와 관계없이)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반드시 고려하고 투쟁해야 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이 이러한 위원회에 대해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6]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은 “국제주의자들”을 결집하\시키는 것이 위원회의 목적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토론토와 몬트리올 위원회를 활동적이고 여전히 기능하는 투쟁위원회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위원회들은 비록 대부분 고립되고 분산된 형태였지만, 지난 3년간 전개된 다양한 노동자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정치적 존재감을 유지하고 노동계급의 방향을 제시해 왔다. 위원회는 12종류 이상의 전단을 배포하고, 여러 차례 공개 집회를 개최했으며, 다양한 피켓 시위에 참여하여 가장 투쟁적인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노동조합 정책에 대한 조직적인 대안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 연락망과 회의 망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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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캐나다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투쟁위원회의 원칙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규모로 실행된다면, 이는 노동계급에 중요한 정치적 진전을 의미하며, 부르주아지의 전쟁 도발 계획을 실질적으로 저지할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기 위해 전쟁으로 향하는 행진을 멈추거나 늦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위원회들과 코뮤니스트들에 이는 단순히 노동자들에게 “전쟁 기계 파괴”나, 무기 생산과 같은 “전략적” 부문의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촉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행동도 환영받을 만한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주요 원칙은 계급적 파업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노동계급 전체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원칙들이 실행된다면, 노동자들은 당면한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전쟁으로의 행진을 저지하며, 혁명 전 단계의 상황을 조성하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당면한 요구와 인류를 전례 없는 파멸과 몰락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역사적으로 낡은 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과제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이 실현되려면 계급 협조의 거부, 파업의 통일 및 전면화의 필요성, 그리고 전쟁 희생의 거부가 공장과 지역의 노동자선봉대에 의해 채택되고 전파되어야 하며, 이들은 투쟁위원회 또는 다른 어떤 조직 형태로든 조직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진영과 미래의 세계혁명당은 소수 세력(투쟁위원회)의 투쟁 흐름이 나타나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려서는 안 되며, 그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초기부터 참여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투쟁위원회 결성을 촉구하거나, 더 나아가 주도적으로 결성해야 한다.

 

2025년 12월

스타브로스(Stavros)

코뮤니스트좌파 국제그룹(IGCL)

 

 

<주>

[1] 실제로 노조 지도부도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캐나다 자동차노조(CAW)의 전 회장 버즈 하그로브(Buzz Hargrove)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조는 파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막는 경우가 더 많다. 노동자 4명 중 3명은 고용주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훌륭한 노조는 그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한다. (...) 노동조합은 해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노동자 저항의 형태(낮은 생산성, 결근)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만약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노동계의 이면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한다면, 파업을 막는 데 그토록 효과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버즈 하그로브, 『사랑의 노동: 더 인간적인 캐나다를 만들기 위한 투쟁』)

 

[2] https://budget.canada.ca/2025/report-rapport/intro-en.html

 

[3] https://www.economist.com/europe/2025/06/04/germany-is-building-a-big-scary-army

 

[4] 스페인의 코미시오네스 오브레라스(Comisiones Obreras, 현재 CCOO 노조)와 이탈리아의 코미타티 데 바시(Comitati de Basi, 현재 COBAS)는 인위적으로 조직을 유지하며 사실상 새로운 노조로 변모하기 전에는, 원래 진정한 투쟁위원회였다.

 

[5] 「혁명인가 전쟁인가」(Revolution or War) 30호, NWBCW 투쟁위원회에 대하여

 http://www.igcl.org/No-doubt-we-shall-have-to-draw-up

 

[6] <역자 주>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노동계급에 관한 내용은 ”자본주의 위기 이후: 시위와 폭동 - 그리고 독립적인 계급 표현의 필요성” 참고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5-07-22/in-the-wake-of-the-capitalist-crisis-protests-and-riots-and-the-need-for-an

자기조직화에 관한 내용은 ”유일한 탈출구: 오직 우리 자신의 힘!” 참고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5-05-03/the-only-way-out-your-own-strength

 

 

<출처> 「혁명인가 전쟁인가」(Revolution or War) 32호

https://igcl.org/On-the-Need-for-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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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제헌의회에서 국가 비상사태까지

칠레: 제헌의회에서 국가 비상사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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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 칠레 대통령은 과거 피노체트 정권의 우파와 현대 극우 포퓰리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카스트의 당선 과정에 대해 칠레 동지가 쓴 기사를 게재한다.)

 

 

3월 11일,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José Antonio Kast)가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몇 시간 만에 그는 6건의 비상사태 법령에 서명했고, 독재 정권 이후의 안정에 대한 모든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스트는 피노체트 ​​분파에서 파생된 극우 정당인 공화당(Partido Republicano)을 이끌고 있다. 이 정당은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와 "반체제" 성향이 결합해 칠레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국내 자본의 가장 공격적인 세력을 대변하며 국가에 자신들의 역할을 거리낌없이 요구하고 있다. 그의 연합은 전통적인 우파(독립민주연합당, 국가개혁당)와 이러한 신흥 세력을 결집해 모두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 즉, 자원 착취를 가속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며, 다른 모든 것을 이윤율 회복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취임식에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다니엘 노보아(Daniel Noboa), 그리고 망명 중인 베네수엘라 반체제 인사들이 참석한 것만 봐도 이러한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새롭게 부상하는 지역 모델이다. 즉,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의회의 중재 과정 없이, 수탈적 자본의 도구이자 워싱턴과의 결속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행정 권위주의이다.

 

이 법령 자체를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국경 경비 계획(Plan Escudo Fronterizo)”은 군대에 국경 통제권을 부여하고, 베네수엘라와 아이티 이민자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생체 인식 감시 및 물리적 장벽 설치를 승인한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중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이들을 통제함으로써 나머지 계층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유로 표적 삼은 것이다. 북부 지역을 “군사 구역”으로 선포함으로써 해당 지역은 일반적인 법적 보호를 박탈당하게 된다. “전면 감사(auditoría total)”는 환경 허가 절차를 우회하여 160억 달러 규모의 자원 개발 투자를 신속히 추진한다. 같은 자리에서 60억 달러 규모의 긴축 조치 중 첫 번째 단계인 3% 지출 삭감안이 서명되었다. 평화 유지, 소유권 박탈, 재정 긴축, 모든 것이 법령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는 칠레 좌파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의미의 보수적 복원이 아니다. 이는 2019년부터 서서히 쇠퇴해 온 탈독재 체제의 최종 논리다. 1990년 이후 칠레 정치는 중도좌파 정권과 중도우파 연립정부 사이를 오갔으나, 헌법에 명시된 피노체트 경제 모델은 어느 정권에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이러한 정권 교체가 더는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축적이 심각한 이윤율 위기에 직면했을 때, 민주적 형식은 이익이 아닌 비용이 되며, 부르주아지는 이를 기꺼이 대변할 대표자들을 찾아낸다.

 

카스트의 승리를 이해하려면 2019년 10월의 봉기와 그 여파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1) “사회적 폭발(Estallido Social)”은 민영화된 AFP(연금관리회사) 연금 제도, 이중적인 의료 및 교육 모델, 1980년대 피노체트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헌법 체제에 대한 거부로 시작되었으며, 단순한 거리 시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 광범위하고 강렬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지역 주민 총회가 결성되었고, 금융 자본을 상징하는 기반 시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중 권력의 문제가 적어도 개략적으로는 제기되었다.

 

그 후의 전개는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11월 15일, 코뮤니스트당(PC)과 대체좌파연합(광역전선·FA)을 포함한 의회 내 모든 정당이 “사회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거리의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봉기의 에너지는 3년간의 헌법 제정 과정(제헌의회)으로 전환되어 두 차례의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지만, 모두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노동계급은 봉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제도적 과정을 부여받았지만, 그 과정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 2022-2026)는 이러한 변화를 구체화한 정치인이었다.(2) 2011년부터 전문 정치인으로 변모해 온 전(前) 학생 운동 지도자였던 보리치는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인도적으로 자본주의를 운영하고자 하는 소부르주아 지식인(대학생, NGO 활동가, 공공 부문 전문가)을 대표했다. 그의 정부는 긴축 정책을 시행하고, 마푸체족(Mapuche) 거주지의 군사화를 지속했으며, 2019년 폭력 사태에 대한 경찰의 면책을 확대하는 나인-레타말(Naín-Retamal) 법을 통과시켰다.

 

항만 및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고 법적 조치로 이어졌다. 2022년 5월에는 후알펜의 정유 공장 노동자들을, 다음 달에는 파업 중인 구리 광부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경(carabineros)이 동원되었다. 2022년 14%의 인플레이션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실질 임금은 그의 임기 말에 겨우 2021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2019년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였던 AFP 연금 제도는 "진보적인" 정부의 4년 통치 기간 구조적으로는 유지되었고, 일부 수정된 민영화된 형태로 변형되어 존속했다. 2025년 1월에 승인된 개혁안은 개인 자본화 모델을 유지하면서 고용주 기여금을 인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그것은 또한 무덤이 될 것이다"라는 그의 공언은 4년간의 그의 통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의 지도력 아래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헌법 제정 과정은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했다. 합의는 사전에 조건을 설정했다. 즉, 위임 권한은 헌법 조항에만 국한되었고, 경제 모델은 구조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제1차 제헌의회에서 피노체트 정권 시절의 "보조적 국가" 조항을 삭제하고 사적 이윤보다 사회적 권리를 우선시함으로써 이를 바로잡으려 하자, 부르주아지는 "헌법 제정 찬성”(Apruebo) 측보다 약 18배나 많은 선거 자금을 투입하여 강력하게 반격했다. 결국, 부르주아지가 승리했지만, 이는 주로 부유층의 표 덕분만은 아니었다.

 

진보 세력이 우세해야 했을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 “헌법 제정 반대”(Rechazo) 표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것은, 수백만 노동자에게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한 반대가 보리치와 2019년 총선에서 무력화된 정치권에 대한 반대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제헌의회는 이러한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양당은 12가지 제도적 원칙에 대해 사전에 합의했는데, 이번에는 경제 모델에 대한 어떠한 의문 제기도 명시적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부결되었다. 3년간의 헌법 제정 논의는 제도적 좌파가 아무런 대가도 내놓지 않고 민중 봉기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25년 11월이 되자 노동계급은 지쳐버렸고, 정치적으로 갈 곳을 잃었다. 의무투표제의 재도입은 투표율을 55%에서 85%로 끌어올렸다. 1차 투표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결과는 선두가 아니라(코뮤니스트당의 자네트 자라가 27%로 1위를 차지하며 개혁 좌파의 정당성을 잠시 입증하는 듯했다)가 아니라 결선 투표의 결과였다. 카스트는 58%를 득표하며 1990년 이후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무효표와 기권표는 세 배로 늘어났다. 우파 후보들은 1차 투표에서 5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연립정부를 유지했지만, 좌파의 상대적 다수표는 무너졌다. 의무투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우경화가 아니라 오히려 계급의 분열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취임식을 앞둔 몇 주 동안, 상황을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차이나 모바일이 지원하는 발파라이소와 홍콩을 연결하는 19,873km 길이의 해저 광케이블 건설 계획인 "칠레-중국 익스프레스" 사업이 2026년 1월 27일 보리치 정부의 교통부 장관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이틀 후,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의 공개적인 위협을 포함한 미국의 직접적인 압력으로 해당 승인안은 철회되었다. 워싱턴은 이후 칠레 관리 3명에게 비자 제재를 가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동맹국이 아닌 적대적인 정부에나 가해지는 공개적인 굴욕이었다.

 

이번 외교 전문 유출 사건은 단순한 외교적 망신 이상의 것을 드러냈다. 칠레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주권 국가가 아니라,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무대라는 사실이다. 보리치 정부가 중국의 인프라 투자와 미국의 안보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던 시도(사회민주주의가 항상 원칙에 대한 세련된 대안으로 제시하는 "실용주의")는 직접적인 압력에 직면하자 마비와 굴복으로 끝났다. 퇴임하는 연립정부인 '칠레를 위한 단결'의 어느 정당도, 코뮤니스트당(PC)이든 대체좌파연합(광역전선·FA)이든, 이러한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주권이 핵심 개념인 것처럼, (이미 오래전에 국경을 넘어선) 자본이 그 표현의 의미를 규정하는 경계를 넘은 지 얼마 안 되는 것처럼 "국가 주권 침해"에 항의했다.

 

카스트는 특유의 정확성을 발휘하여 이 사건을 이용했다. 그는 보리치와의 모든 정권 이양 회담을 중단시키고, 퇴임하는 정부가 "전략적 정보를 은폐했다"라고 비난했으며, 칠레의 지정학적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워싱턴과 확고히 동맹을 맺겠다고 밝혔다. 케이블 사태는 헌법 제정의 함정과 국가 비상사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불가능했으며, 권위주의적 우파야말로 부르주아지가 필요로 하는 일관된 종속 관계를 제공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결코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에너지 전환 분석가들이 점점 더 '녹색 채굴주의(green extractivism)'라고 부르는 현상의 주요 무대가 되었는데, 이는 탈(脫)탄소화라는 명분 아래 과거 식민주의적 자원 추출 모델이 재편되는 것을 의미한다. 칠레는 전 세계 구리 생산량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절반 가까이 보유한 리튬 삼각지대(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속해 있다. 구리와 리튬은 전기화의 핵심 소재이다. 모든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발전 설비, 대규모 에너지 저장 시설에는 이 두 광물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향후 10년 안에 그 수요는 두 배로 증가할 것이 예상된다. 따라서 이 지역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둘러싼 경쟁은 일시적인 투자 순환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을 통해, 그리고 그 너머가 아닌,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특정한 지정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중국은 2018년에서 2024년 사이에 남미 리튬 프로젝트에 16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으며, 칠레와 페루의 구리 시장에서는 지역 최대 광산 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를 통해 점진적으로 입지를 강화해 왔다. 이에 대한 워싱턴의 대응은 2025년 국가안보전략에서 명시적으로 선언한 "트럼프 조항"으로, 서반구 전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패권을 회복하고, 경쟁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산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공급망의 근거리 이전(nearshoring)은 이러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전 세계 제조업체들이 아시아 중심지에서 생산 기지를 이전함에 따라, 미주 지역은 적극적으로 서반구 생산 플랫폼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과잉 생산분을 흡수하는 동시에, 가치 사슬의 기반이 되는 원자재를 계속 수출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케이블 위기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워싱턴은 칠레의 인프라 관련 결정이 산티아고에서 발표되기 전에 워싱턴에서 결정되어야 할 안보 문제라는 새로운 미주 질서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었다.

 

새 정부의 계급적 성격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카스트 내각은 경제부에 CPC(칠레기업연합회) 대표를, 안보 관련 부처에는 조직범죄 단속과 연관된 검사들을, 법무부와 국방부에는 피노체트 정권의 사법 기구 출신 인사들을 배치했다. 이는 기술 관료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계급 권력이며, 지난 30년 동안 그 관계를 중재해 왔던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개입 없이 칠레 자본의 지배 세력이 국가를 직접 운영하는 것이다.

 

지역적 축도 중요하다. 밀레이(Milei)의 아르헨티나는 달러화 정책과 “톱날” 같은 긴축 정책을 통해 복지 국가의 잔재를 해체하고 있다.(3) 노보아(Noboa)의 에콰도르는 5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국내 안보를 군사화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부활시킨 먼로 독트린은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적 불확실성에 대한 워싱턴의 관용에도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4) 카스트 치하의 칠레는 이러한 지역적 양상의 예외가 아니라, 가장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노동계급에 있어 당면한 결과는 명백하다. "국경 방어 계획(Plan Escudo Fronterizo)"은 노동 시장 전반을 통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중 가장 취약한 계층을 범죄화한다. "허가제(permisología)" 관련 법령들은 마푸체족과 농촌 공동체가 광업 및 에너지 프로젝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공식적인 거부권을 박탈한다. 재정 긴축이 사회 복지 지출을 줄이는 동안, 정권은 "성장"을 약속한다. 여기서 성장이란 자원 추출과 이윤 증대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역사적 의미의 파시즘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준군사 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헌법적 형식은 명목상으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헌법주의 좌파가 의회 절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정치의 내용은 이제 비상 법령과 제국주의 동맹이 결정한다.

 

야권의 반응은 보리치 정부 시절 이미 드러났던 한계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칠레 통일당(Unidad por Chile)’은 두 개의 흐름으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헌정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코뮤니스트당(PC)과 대체좌파연합(광역전선·FA)으로 구성된 ‘진보’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성’을 명분으로 카스트와의 선택적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기독민주당(DC)과 민주당(PPD)으로 구성된 중도좌파 세력이다. 두 세력 모두 공통으로 국가라는 틀, 즉 계급 정치가 칠레 국가 기관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전제가 케이블 사태를 통해 더는 유지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자본은 이미 ‘주권’이라는 요구를 정당화하는 국가적 경계를 초월했지만, 개량주의 좌파는 아직 그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저항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강제 추방, 연금 삭감, 토지 몰수가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실제로 취임식 당일에도 저항의 조짐이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저항이, 2019년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제헌의회로 몰아넣었던 방어적 자유주의의 틀을 넘어 정치화될 수 있느냐이다. 칠레의 노동계급은 아르헨티나, 미국, 유럽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확대되는 세계적 갈등의 그림자 속에서 긴축 정책, 군사화, 제국주의적 재편이라는 동일한 공세에 직면해 있다. 독재 정권 이후의 체제를 관리해 온 개량주의 정당들은 4년 동안의 집권 기간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합의 조건을 관리하는 데에만 급급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주의적 토대 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의 좌파 전체와 명확히 단절해야 한다. 독재 이후 체제를 지배해 온 개량주의 정당들뿐 아니라, 선거에서 그들을 따르거나 계급의 자발적 행동을 자신들의 강령으로 대체하는 극좌 세력들과도 결별해야 한다. 이들 모두는 계급 정치가 자본주의 사회의 기존 제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전제에 얽매여 있으며, 이 전제는 어떠한 다른 길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국경을 초월하여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방어 투쟁을 인류 해방이라는 전망과 연결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당(세계혁명당)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업은 진보적인 정부나 제헌의회, 혹은 자본주의 정치 기구의 어떤 분파에도 위임할 수 없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여전히 노동자 자신이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칠레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그 과제는 이미 오래전에 이뤄야 했을 과제이다.

 

N

2026년 3월

 

<주>

 

사진 출처 : Gobierno de Chile (CC BY 3.0 CL), commons.wikimedia.org

 

(1) 2019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시위 물결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19-12-19/latin-america-burns-between-revolt-and-repression

(2) 보리치의 선출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2-01-20/on-the-chilean-elections

(3) 아르헨티나 밀레이의 노동 개혁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6-03-30/labour-reform-in-argentina-capitalism-imposes-slavery-on-us-let-s-impose-class

(4) 트럼프의 중남미 정책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6-01-17/beyond-venezuela-the-road-toward-generalised-war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6-04-03/chile-from-constituent-assembly-to-emergency-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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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는 생산 양식의 판도라 상자

 

부패하는 생산 양식의 판도라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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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세가 보여주는 전망은 곳곳에서 깊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전쟁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언론을 통해 평화를 약속하는 세계 지도자들의 공허한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및 레바논 공격, 그리고 이란과 그 대리 세력의 이스라엘 및 걸프 국가들에 대한 반격은 중동 전체를 불태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4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파키스탄과 인도,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수단의 대량 학살, 끝없는 콩고 전쟁, 이슬람 무장 단체와 나이지리아 정부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한편, 기후 변화에 대한 새로운 과학 보고서들은 현 체제가 환경 파괴에 대처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점점 심화하는 군사적 야만성은 생태 재앙을 가중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완화하는 데 최소한의 자원을 투입하는 것조차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불안과 허무주의, 종말론적 분위기가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으며, 점점 더 비이성적인 반응들이 정치 주류로 자리 잡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기를 들어, 미군 고위 장교들이 이란과의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에게 열띤 설교를 하며 전쟁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아마겟돈과 예수의 재림을 알리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중동 전쟁이야말로 세계 지도자들이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 새로운 차원의 야만과 자멸로 치닫는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인류의 미래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매우 타당한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암울한 전망에 직면하여, 전 세계 소수 집단은 이 파괴적인 악순환의 이면에는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회 체제 전체, 즉, 계급 지배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노쇠하고 부패한 체제는 세계 인류에 끊임없는 재앙을 안겨주면서 '생존'하고 자신을 방어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쇠퇴와 해체의 시대에 접어든 모습이다.

 

반(反)트럼프주의와 반(反)파시즘: 자본주의의 이념적 방어 기제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이념은 사회 현실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심화하고 확장하는 데 수많은 걸림돌을 제시한다.

 

이란 전쟁이 명확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시작되었거나, 명시된 목표가 매일 바뀌고 있다는 것은 지배계급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엄청난 (그리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군사력 동원은 단순히 이란의 군사력을 파괴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란 성직자 정권을 완전히 전복하기 위한 것인가? 명확한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이 분쟁은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 이란이 중동 전역은 물론 그 너머까지 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고, 지역 전체에 초토화 전략을 펼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 무역과 에너지 공급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여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계산은 있었는가?

 

이 전쟁의 배경에 일관성 있는 계획이 없다는 점은 대개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 특히 트럼프의 자기애적이고 독선적인 성격, 논리적 사고 능력 부족, 그리고 점점 심해지는 노쇠와 인지 기능 저하 징후 탓으로 돌려 설명된다. 그리고 트럼프는 실제로 이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속담에 "때가 되면 그에 걸맞은 인물이 나타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인물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과 궤적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자본주의는 이미 한 세기 넘게 낡은 체제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말 이후로는 쇠퇴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류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미래를 내다볼 능력이 점점 더 부족하고, 스스로도 다가올 미래를 부정하는 '지도자'들을 양산한다. 트럼프가 기후 변화는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주장하거나 미국이 새로운 황금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러한 비이성적인 근시안적 사고방식의 징후이다.

 

트럼프와 그의 정치 초보 무리의 즉흥성, 서투름, 그리고 복수심은 미국이 더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주요 보루가 아니라 전 세계를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세력으로 변모하는 경향을 가속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트럼프 집권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보기를 들어, 2000년대 초중반에 우리는 여러 기사와 국제 결의안에서 러시아 블록 붕괴 이후 제국주의 국가 사이 관계의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력의 잔혹한 과시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그러한 노력 때문에 세계적인 혼돈을 가져오는 주요 주체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라크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극적인 전복을 가져왔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결국 이 나라를 끝없는 유혈 사태와 분열로 몰아넣었고, 수많은 통제되지 않은 무장 민병대와 ISIS 같은 테러 집단이 등장하게 했다. 현재 이란과의 전쟁은 상당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결과를 초래하며 이러한 영향을 한층 더 심화시키고 있다. 이 전쟁은 점점 더 많은 국가와 세력을 수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세계 경제에 훨씬 더 큰 피해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가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부 붕괴"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지난 수십 년간 급속도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트럼프나 그 무리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에는 분명한 이념적 기능이 있다. 즉, 이 무리를 진지하고 민주적인 정치인들로 교체할 수 있다면, 파멸로 치닫는 이 문명의 근본적인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트럼프를 몰아내고, 성숙한 지도자들을 다시 정부에 앉히고, 국제 사회에 "규칙 기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당이나 공화당 내 온건파의 선거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주장은 전혀 다른 결론, 즉 진정한 문제는 특정 정치인이나 자본주의 정당이 아니라, 의회 민주주의라는 허울뿐인 체제와 세계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제기구(UN, NATO 등)를 포함한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결론을 확산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네타냐후와 그의 정부 내 종교 광신도들을 축출할 수만 있다면 이스라엘 제국주의가 평화 정책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실 이스라엘의 모든 정당은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이란 공격에 노골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또한, 이란에서 성직자(물라)들의 잔혹한 통치가 민주적 야당으로 교체되거나 팔레비 왕조의 통치로 회귀한다면, 그곳에서 자행되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학살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는 트럼프와 다른 나라의 그와 유사한 인물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우리를 파시즘으로 이끌고 있다는 주장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트럼프주의 하에서 국가가 점점 더 직접적인 억압 방법, 즉 이란 도시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유사한 미국 도시 내 폭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국민에게 공개적인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동원된, 일종의 지도자 친위대 역할을 하는 이민세관집행국(ICE)의 행태는, (그러한 정권들을 탄생시킨) 역사적 조건이 오늘날과는 매우 다르긴 하지만,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 속에 감춰진 가장 큰 거짓은, 그것이 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체포와 추방을 수반하더라도, 이러한 국가 억압에 맞서는 방식은 다시금 '진정한 미국 민주주의' 수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캠페인과 시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조직하기보다는, 시민 대중 속에 녹아들어 부르주아 정치 구호 뒤에 서도록 촉구하는 캠페인들이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우선은 경제적 차원에서 제기되지만, 분명히 국가의 탄압으로부터 동료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 세력 뒤에 있는 ‘인민’ 전선에 합류하여 ‘파시즘을 저지하자’는 호소에 따른다면, 스스로 계급의 적(敵)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1936~39년의 이른바 ‘스페인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이처럼 프랑코와 그의 군대뿐만 아니라 인민전선 민병대에게도 총살 당했다(가장 유명한 사례는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의 바리케이드 사건이다).

 

‘규칙 기반 질서’의 현실

 

미국과 서유럽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규칙 기반 질서’의 붕괴를 애도하고 있다. 이 ‘질서’는 나토(NATO) 회원국인 그린란드에 대한 미국의 위협, 마두로 대통령 납치, 유엔을 대체할 ‘평화위원회’ 설립 시도, 그리고 미국의 나토 동맹국들이 트럼프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호르무즈 해협 개방에 협조하지 않는 등 미국과 유럽 사이의 갈등 심화로 산산이 조각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규칙 기반 질서’는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은 애초부터 미국의 주도로 구축된 질서였으며,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제국주의 세력으로 부상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양 진영 체제는 미국과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국가들에 일정한 규율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양 진영의 지도자들이 쿠데타, 침투, 암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 베트남, 아프리카 등지에서 벌어진 끝없는 대리전을 통해 자신들의 진영을 유지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전쟁들은 ‘코뮤니즘(공산주의) 저지’나 ‘민족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치러졌으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은 핵전쟁-대재앙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질서'였다.

 

1989년 러시아 블록이 붕괴했을 때,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국제 관계에서 '각자가 모두에 맞서는'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전쟁 지향성을 없애지 않고 단지 다른 형태로 변모시킨, 점점 거세지는 혼돈의 물결을 예고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이 전 세계의 '경찰'처럼 행동하며 군사적 우위를 이용해 옛 동맹국들을 통제하고 혼란과 불안정의 물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제1차 걸프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과 같은 미국의 행동은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기존 동맹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침공당한 국가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는 2020년대 초의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 하마스, 헤즈볼라 사이의 전쟁과 같은 주요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해체 과정이 더 가속화되는 것을 목격해 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그리고 이란의 주변국 및 세계 무역에 대한 반격은 통제되지 않는 군사적 야만으로 치닫는 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첫 번째 선언문에서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린 전쟁의 폐허를 바라보며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궁극적인 결과는 혼돈이다"라고 선언했던 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트럼프의 목표는 얼마 전 베네수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주요 경쟁국이자, 경제·전략적 차원에서 이란을 중요한 제국주의 동반자로 삼고 있는 중국에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분쟁은 무력을 통해 중동에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을 새로운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트럼프는 끝없는 파괴적 분쟁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거나, 군대를 철수시키고 막대한 혼란을 남겨두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굴욕을 당하고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했기에 중국에 대한 입지도 약해졌다. 이란 역시 순전한 초토화 전략을 펼치고 있으며, 만약 정권이 무너진다면(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지만) 이는 혼돈과 야만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진정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으며, 만약 전복되지 않는다면 인류 전체를 심연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계급과 내부의 혁명적 소수 세력은, 정치 지도자를 바꾸거나 국제기구를 재활성화하거나 국가를 ‘민주화’하는 것만으로 이 치명적인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는 모든 환상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적(敵)은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당, 혹은 특정 국가가 아니라, 착취와 전쟁을 통해 유지되는 바로 그 생산 양식이며, 이는 모든 국가의 피착취 계급이 벌이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2026년 4월 1일

아모스(Amos)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사진 출처> 연합뉴스 / 트루스소셜 캡처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794/pandoras-box-mode-production-putref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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