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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4/29
    노동절(5월 1일)은 부르주아지의 손에 넘어갔다: 코뮤니스트 혁명 만세!
    자유로운 영혼

노동절(5월 1일)은 부르주아지의 손에 넘어갔다: 코뮤니스트 혁명 만세!

노동절(5월 1일)은 부르주아지의 손에 넘어갔다:

코뮤니스트 혁명 만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역자 주>

 

"중요한 것은 이재명 정권이 어떠한 개혁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펼치더라도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므로 임시방편에 불과하거나, 누군가에게 위기를 떠넘기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 투쟁이 이재명 정권 비판을 넘어 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국익'과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물론 이재명 정권은 윤석열처럼 세련되지 못한 폭압 정책이 아니라 노동계급 일부를 포섭하고 최소한의 법제도 개선 정책도 펴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의 개혁은 실제로는 자본가계급에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본의 이익에 도움을 주는 자본주의 착취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정책이다. 앞으로 '계급협조' 세력의 동조 아래 이러한 정책이 자리 잡으면 착취의 강도는 높아지고, 노동자들의 분열과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정권의 탄생을 도운 진보당-민주노총 자주파는 노동자 운동과 자본가 정부 사이의 가교역할을 넘어 노동자 투쟁을 무장해제시키고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이들이 '내란 종식, 사회대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자본가정권과 손을 잡은 것은 일시적 연합을 넘어 이미 '계급협조' 노선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매우 해롭다. (우리는 이들을 ‘자본의 좌파’로 규정한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과 계급투쟁의 미래는 자본가계급과의 투쟁뿐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이들 ‘자본의 좌파’와의 투쟁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노동자 운동 진영이 자본가정권에 협조하고 참여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은 분열되고 개별 자본과의 투쟁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위기보다 훨씬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에 내몰린 현실을 직시하고, 노동계급의 영역(현장)에서 아래로부터의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2025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전단,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한국위원회」 )

 

 

노동절(메이데이)은 지난 수년간 자본주의 세계 전역에서 자본의 다양한 세력이 활개 치는 무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계급투쟁에 뿌리를 둔 노동절을 지배계급과 자본의 좌파가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거짓 기치를 내걸고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적인 모습을 감추고 견딜만한 것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급진적인 구호를 내걸고 "붉은 깃발"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노예제 현실을 은폐하려 한다. 매년 5월 1일, 행진과 거리 시위라는 형태로 벌어지는 이 한심한 행사는 기만적인 가면을 쓰고 지배 이념을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노동절의 정치적·계급적 뿌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지우고, 반(反)자본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내용을 제거하여, 궁극적으로는 노동절이 원래 저항했던 바로 그 착취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만들려 한다.

 

자본주의 중심 국가에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5월 1일 노동절 시위의 선두에 서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프롤레타리아 투쟁 전통의 대표자로 자처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세력이 현실 정치 무대에서는 가장 반(反)노동자적 법률과 긴축 정책을 추진하고 실행하면서 노동계급에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의 필요성을 설득한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은 사실 자본주의 질서의 틀 안에서 그들이 수행하는 물질적 역할, 즉 계급투쟁을 자본이 허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제한하는 역할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본의 좌파 정치 기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 관계 내에 위치하고 그 제도를 옹호하는 야권 세력으로서 기능하며,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투쟁을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해롭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자본주의 주변부 국가에서 자본의 좌파는, 급진적인 기조를 취하며 파업권, 노동자 조직 결성권 등의 요구를 내세워 거리 장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여주기식 급진주의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제도를 수호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시도이다.

 

실제로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맞서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보루이자 요새가 되었다. 특히 주변부 국가들에서 나타난 독립적인 노동자 투쟁과 그들이 노동조합 및 자본주의 국가와 벌인 급진적인 대립의 경험은 부르주아지와 그 모든 좌파·우파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계급투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1917~1923년의 혁명 물결이 좌절된 후, 스탈린주의는 10월 혁명의 폐허와 피로 물든 코뮤니스트들의 시신 위에 권력을 공고히 했다. 10월 혁명을 일으켰던 수천 명의 코뮤니스트와 노동자들이 추방당하고, 투옥되고, 학살당했다.

 

독일혁명의 패배와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및 전위의 한 세대를 학살한 것은 세계혁명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고, 패배의 길을 열었다.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살아있는 세력, 즉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중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문을 억압하고 물리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위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코뮤니스트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살해, 그리고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기관들의 파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무기를 무력화시켰고, 세계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을 국가(애국)주의 깃발 아래 동원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량 학살을 자행할 수 있도록 했다.

 

한때 노동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한 투쟁의 날이었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은 부르주아지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자임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힘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혁명의 물결이 꺾이고 반(反)혁명이 승리하면서, 노동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수많은 정치적 성과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손에 넘어갔다. 그 이후로 부르주아지는 5월 1일의 혁명적, 계급적 의미를 제거하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오염시키고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1920년대 후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패배는 노동계급이 일시적으로 자본에 의해 패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反)혁명 암흑기의 시작을 알렸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적인 반(反)혁명의 도구로 기능했다.

 

1930년대, 제3 인터내셔널이 프롤레타리아 입장을 완전히 저버리고 러시아 국가 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오직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만이 국제주의 원칙과 코뮤니스트 입장을 옹호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코뮤니스트 전통의 진정한 연속성은 자본의 좌파 흐름이 아니라 코뮤니스트 좌파의 흐름에서 표현되었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역사적 계승자로서 코뮤니스트 좌파는 계급투쟁이라는 무적의 깃발과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이라는 전망을 지켜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를 영원히 패배시키고 코뮤니스트 혁명의 위협을 제거했다고 믿었다. 군사적 승리와 전쟁의 폐허와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 노동자의 학살 위에 세워진 상대적인 전후 번영에 도취한 자본주의는 역사적 위기의 종식과 자체 질서의 영속성을 선언했다.

 

이러한 환상은 지난 수십 년간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참담한 패배와 오랜 반(反)혁명 시기, 즉 스탈린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파시즘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질서의 틀 안에 가두었던 시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이 더는 독립적인 역사적 세력으로 무대에 복귀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68년 5월은 이러한 환상을 깨뜨렸다.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대대적 파업과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계급임을 증명했다.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역할을 은폐하기 위해 1968년 5월 총파업을 "학생 봉기"로 축소하려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분명히 학생 운동은 당시 사회 분위기의 일부였지만, 부르주아지를 뒤흔든 진정한 원동력은 학생들이 아니라 수백만 노동자의 대대적 파업이었다. 바로 이 대대적 파업이 계급투쟁의 부활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을 역사의 중심에 다시금 끌어올린 힘이었다.

 

이 새로운 계급투쟁의 물결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반(反)혁명 시대의 역사적 약점을 극복하고 독립적인 사회·정치 세력으로 다시금 무대에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68년 5월은 단지 일시적인 폭발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투쟁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에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이 다시 한번 공개적이고 확장되는 형태로 드러났다.

 

이러한 부활의 결과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투쟁이 확산했다. 광범위한 파업, 대중 투쟁, 그리고 자본의 공격에 대한 저항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과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급 이익을 수호하고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동계급은 다시 한번 자본주의 질서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현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종말을 선언했던 모든 이념에 대한 결정적인 대응이었다. 그러한 이념들은 노동계급을 자본에 “매수”되어 통합된 존재로 보거나, 아예 노동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혁명적 정치 조직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임무를 피상적인 사회학적 관찰로 축소하는 평의회주의, 모더니즘 등과 같이 무미건조하고 일탈적인 해석과 달리,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이론과 방법론으로서 여전히 살아 있다.

 

바로 이러한 이론적 연속성 덕분에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과제인 자본주의의 전복을 정치 투쟁의 중심에 둘 수 있었다.

 

“이것은 특정 프롤레타리아, 혹은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금 무엇을 목표로 삼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인지, 그에 따라 역사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1]

 

동유럽 블록의 붕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의 내부 위기와 스탈린주의가 서유럽 블록과 경쟁할 수 없었던 한계의 산물이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한 형태이자 노동계급에 대한 반(反)혁명의 도구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모순의 압력으로 무너졌다.

 

이러한 현실은 세계 부르주아지가 거대한 이념적 캠페인을 조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혁명을 통해 붕괴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경쟁 속에서 붕괴했기에, 노동계급 내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은 더 강화되었고, 계급의식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부르주아지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유세계"가 "전체주의"를 이긴 승리로 포장했다.

 

이 이념적 전략의 목적은 명확했다. 모든 혁명적 노력,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모든 전망, 그리고 이 왜곡된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모든 생각은 이미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 심어주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죽음"이라는 세계적 캠페인을 통해 코뮤니즘의 역사적 가능성을 완전히 매장하려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러한 역사적 왜곡에 맞서 싸운 것은 코뮤니스트 좌파였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무너진 것은 코뮤니즘 자체가 아니라, 코뮤니즘의 가장 폭력적인 적(敵) 중 하나인 스탈린주의였다. 코뮤니즘은 결코 모스크바나 당 국가(독재) 체제의 국가 자본주의가 아니었다. 코뮤니즘은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이고 국제적인 투쟁의 연속성 속에서 살아남았다.

 

현 상황에서, 그리고 자본의 좌파가 계급투쟁 과정에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의 정체성 확립을 방해하는 파괴적인 역할을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코뮤니스트 좌파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전투적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성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 건설을 위한 노력은 이 과업의 필수 요소이다. 이 조직은 노동계급의 세계적 투쟁을 의식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필수적인 무기가 될 것이며, 코뮤니스트 혁명의 승리를 위한 정치적 조건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피와 오물, 그리고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 자본주의는 전쟁, 위기, 비참함을 의미한다. 이 체제는 노동력 착취와 자본 사이의 무자비한 경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지금, 인류에게 파괴, 빈곤, 그리고 야만성만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은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부 논리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전쟁을 전 세계 곳곳으로 확산시켰고, 전 세계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총알받이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국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전쟁 경제를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비용은 긴축, 대량 해고, 임금 삭감, 물가 상승, 그리고 착취의 심화를 통해 노동계급이 부담한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노동계급은 독립적인 사회 세력으로서 독자적인 계급투쟁을 벌여, 오직 자신의 역사적, 계급적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 임금 노예제, 착취, 실업, 해고, 빈곤, 물가 상승에 맞서는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겨냥하므로 노동계급에 해방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 전쟁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계급 전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는 코뮤니스트 좌파가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맞서 항상 추구해 온 관점이다.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의 야만성, 빈곤, 전쟁, 파괴를 종식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계급이다. 역사상 그 어떤 계급도 이처럼 막중하고 보편적인 책임을 짊어진 적이 없다. 오늘날 인류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달려 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뿐이다. 인류를 완전한 파멸로 몰아넣기 전에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들이 오랫동안 제시해 온 대안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코뮤니스트 혁명인가, 인류의 파멸인가!

 

2026년 4월 24일

국제주의자 목소리(IV)

 

<주>

 

1. 맑스, 「신성가족」, 제4장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tvoice.org/labour-day-1-may-has-been-captured-by-the-bourgeoisieive-for-working-clas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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