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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6강>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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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6강>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9월 28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자본주의 체제 전복 없이 기후정의, 체제전환 없다!
기후정의를 위한 체제전환은 혁명을 통한 코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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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창간호]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의식의 문제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 코뮤니스트 사이 일련의 토론 부분을 담은 글이다특별히 이 글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내부 분파로 부르는 동지들이 제출한 문서에 대한 답변이다그 분파가 ICC에서 탈퇴한 지 몇 년이 지났다글 끝에 실린 인용문은 그 내부 분파의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의식의 문제는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문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다그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혁명들의 실패특히 러시아혁명의 실패라는 불행한 유산 중의 하나다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맞서는 강령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당에 대한 모든 생각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볼셰비키(나중에 코뮤니스트)당이 자본주의 반(反)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1917년 지주자본가그리고 사회민주주의 협력자들의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전과 전복 과정에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료한 표현으로서 수행한 역할을 흐려버렸기 때문에 사실이다당이 점차 계급의 기반을 대체한 러시아 내전(1918-21)에서 벌어진 일들은 당이 사회주의를 위한 선전을 확산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란으로 이끄는데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선진적이며명료한 부분이라는 전반적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게 만들었다당이 봉기를 이끌고 당의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강령으로 계급에 되돌아간 인간의 대대적인 변혁만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이는 말 그대로 노동계급의 절대 다수의 작업일 수 있고 또한 말 그대로 사상의 생산의 주인(자본가계급)이 극복되는 시작일 수 있다이러한 생각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1-30)에 게재된 계급의식에 대한 연재물에 실려 있다이는 수정되어 소책자로 재출간될 것이며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에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중에 있다.

 

의식의 문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분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그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방법론적 정식화의 실질적 차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 차이가 존재한다면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여기서 다시 서술하는데 논의를 한정하려고 한다.

 

 

첫째혁명혹은 코뮤니스트 의식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개념은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즉자적’ 계급의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깨달음과 그 착취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코뮤니스트  의식은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부과한 예속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수단투쟁의 형식전술전략과 정치 강령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또한 코뮤니스트 의식은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고 있는 정치적 형식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맑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떠밀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이해를 방어하는 기반 위에서 싸울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그 역사는 또한 투쟁의 도구를 줄 수 있고 계급투쟁의 궁극적 결과인 봉기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총체로서 완전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다른 말로 그것은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풀 수 없고 혁명당이 그 안에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정치 강령에 도달하기도 어렵다.

 

올바른 유물론적변증법적 해석으로부터 관념적기계적평의회적경제주의적 입장을 구별해 내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문제이고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본질적인 문제는 특정한 수준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고스스로 피할 수 없는 의식의 성숙으로 이끄는경제적 요구 투쟁의 발전을 통하여의식이 계급의 내부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또는 계급 외부로부터 의식이 들어온다면그것은 계급의 바깥에서 당이 만들어지고 혁명적 정치의식의 위로부터 주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가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이 계급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당면한 경제적인 계급의 모든 요구를 종합하고 역사적 과업에 속하는 요구를 종합하는 것은 더 진전된 논의의 부분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만이 그 의식은 외부에” 존재한다사회학적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든소부르주아든부르주아지에서 나온 지식인이든 간에당은 계급 안에서 태어난다당은 조그만 경제적 요구로부터 완전한 정치 강령에 이르게 하는 보다 보편적인 전략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투쟁의 요구를 스스로 만든다당의 정치 지식은 다양한 계급 경험의 역사적 종합의 결과이다그것은 승리의 원인을 맨 앞에 내세우듯이 패배의 원인으로부터도 배운다그것은 매일 계급투쟁의 뒤틀림과 반전으로부터 때로는 숨겨져 있거나 본능적이고 부문적인 계급투쟁으로부터 나오는 충동 뒤에서 이끌어낸다당은 전 계급에게 정치적 전술과 전략을 통해 이 계급투쟁의 경험을 되돌려준다이처럼 그 관계는 계급과 그로부터 분리되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와 더 앞서는 사려 깊은 부분 속에서계급 스스로 내부에서 형성되는 관계다이러한 앞선 부분은 아래로부터노동자로부터 충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적 전략으로 만들어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부분으로서의 당이다.

 

이는 투쟁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이 일정 정도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그러나 특히 오늘날 같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요구의 부분적 측면과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에 대한 세계적 전망의 결여가 당의 존재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당은 세계적 계급의식을 제공하고 있으며전위로서 당 내부부터 그 의식을 만들 수 없다면 계급의 적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당은 계급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의식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계기의 산물이다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급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당이 항상 존재해야 하고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정치적 준거가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우리는 혁명을 향한 계급투쟁의 정치적 진화가 당 없이 일어날 수 있다거나 당이 단순히 조직자이며 전 계급이 독립적으로 정치 강령과 그를 실행할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투쟁을 일반화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우리는 또한 당을 기껏 대부분의 반혁명 시기에 연구센터로 여기면서 오직 혁명 시기에만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지를 위험하다고 본다이는 객관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강제한 후 주요 경제위기가 당을 만드는 시점과 두 실체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기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이 경우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또는 너무 늦게 만들어진 당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린되었고유혈적으로 억압되었는지를그리고 하루에 날조될 수 없는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심각하게 지체함으로써 계급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객관적 조건은 계급투쟁을 작동하게 할 수 있다그 조건들은 계급과 당 사이의 관계를 편하게 하고 강화할 수 있다그러나 그 조건들은 무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쨌든 너무 늦은 것이다아주 한참당은 봉기 단계 전에 역사적 시기에 이미 존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당은 계급 자체와의 관계를 작고사소하지만 효과적으로 세우는 데 성공해야 한다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들위기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의지는 이른바 당에 의해 쥐어질 수 없다그래서 그 모든 결과로 또 다른 정치적 패배로의 길을 닦을 것이다이는 계급투쟁의 앞으로의 소생을 어렵게 만든다왜냐하면 당이 계급의 부분즉 계급투쟁의 일시적 도구가 아닌 영속적 도구이기 때문이다당이 계급과 함께 성장하고 정치적 지도력을 줌으로써 계급과 함께 진화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패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당이 오로지 계급투쟁이 시작된 후에만 만들어지고 그 투쟁과 함께한다는 이론을 지닌다면 패배는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계급투쟁이 사라지거나 낮은 수준의 투쟁만이 있는 시기에 그늘과 같은 후퇴가 있더라도.

 

이는 당이 당 주위의 사회적 맥락과 독립적인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엄청난 반혁명 시기에 당과 계급을 통일하는 박약한 관계는 깨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의 적에 의해 패퇴되어 당은 말 그대로 지워져버린다그러나 이는 그 상황에 따른 최소한의 정치적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는데 더욱 진전된 요소들을 막아낼 수 없다당은 개입되거나생성하고 사라지는 조건들을 선택할 수 없다반대로 경제적사회적 조건들은 계급투쟁의 리듬과 당의 개입 가능성의 정도를 규정한다그 수위가 어떠하든 계급투쟁을 위한 준거가 되려는 시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투쟁의 요구를 궁극적 요구로 만드는 것 외에 경제투쟁에서 당의 주요 임무는 투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다른 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이나 방어적인 경제 투쟁은 경제적노동조합주의적 투쟁을 정치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피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경제 투쟁은 요구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일으키고 정치적 적을 떠나지 않으면서 쇠퇴한다계급의식의 더 높은 수준에서 다음 투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지식으로 어떠한 경제투쟁도승리하든 패배하든 간에변혁시키는 임무가 있는 혁명당의 개입이 없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당의 우선성은 당면 요구라는 자연스러운 영역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투쟁이 착취의 의식과 계급의 적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으로 볼 때조직적 측면이나 정치적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그 투쟁을 유발시킨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고계속해서 요구투쟁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된다이러한 의미에서 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그와 더불어 혁명적 습격으로 이끌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정교화하는 전략적 준거의 틀로서 당의 역할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식화가 가능하다.

 

노동계급이 당면한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을 하게 될 때그것은 객관적으로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정식화는 의식의 문제에 관한 당과 계급 사이의 이 관계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만일 그렇다면 계급의 경제적 요구는 스스로 전술전략그리고 코뮤니스트  강령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을 기계적으로 결정할 만큼 충분하다그렇다면 당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모든 것이 계급의 운동과 그 역사적 역할의 독립적 성숙에 위임되기 때문이다현실적으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경제적 수준으로부터 정치적 수준으로 투쟁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질적인 도약을 수행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계급 전위곧 당이기 때문이다.

 

위와 똑같이 다음의 정식화도 허약한 주장이다.

 

경제적 요구투쟁은 계급과 그 투쟁의 역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표현다시 말해 일정한 발전의 수준에서 계급정당이 되는 정치적 표현으로 나타나는계급의 경험을 종합하고 이론화하기 위한그리고 일정한 수의 노동자를 지배이데올로기의 혼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의식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다.”

 

이 경우 당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계급에 맡겨지고 그래서 당은 계급 스스로의 정치의식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미 결정된 역사적 단계에서만 만들어진다당은 계급 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전술과 전략이 된 것도 그것이 갇혀 있는 경제적 우리를 부수면서 계급을 혁명적 길로 되돌리는 일련의 경제투쟁그리고 그것의 종합과 정교화의 역사적 성과가 된다그러나 당은 전체로서 계급이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독립적으로 끝내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또한 당은 계급투쟁이 매번 반복되는 동안 이미 결정된 진화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끝내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계급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반대로 코뮤니즘 이론과 실천의 기본에 대한 근본적 동의와 명료성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모든 일관된 혁명적인 힘이 함께 오는 과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Bilan & Perspectives No. 6 (2005년 12월)

번역 ㅣ 오세철

 

<원문 출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23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2005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05-06-01/the-question-of-consciousness-a-basis-for-discu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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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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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8월 1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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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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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저개발

 

케인즈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경제 체제도 원하기만 한다면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그는 종전이 1930년대 규모의 실업을 다시 불러올 뿐이라 예측하고 공포에 질렸다그러나직후의 사건을 고려하면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2차 세계대전 중의 대규모 생산력의 파괴는 경제적 회복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다.

 

유럽 철도 노선 전체 곳곳의 철도 조차장그리고 항만 시설들이 폐허로 남겨졌다기계는 끊임없이 사용하고 수리하면서 낡아 소모되었다광산은 무자비하게 착취되어 전쟁 이전 효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했다농업은 토지 착취로 수확은 형편없었다대부분 나라의 노동력은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16)

 

독일일본그리고 이탈리아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동안대부분 승리한” 열강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소련은 12백만 명의 군인과 8백만 명 이상의 시민을영국은 1,180만 톤의 선박 운송품프랑스는 전체 국부의 45%를 잃었다예외는 미국이었는데전쟁은 생산을 엄청나게 부양했으면서도 산업 기반은 훼손하지 않았다비록 전쟁이 그동안 축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으나생산 수단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이것이 미국에 전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경제적 형태를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그것은 상당히 불균등한 두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한 편에 있고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이결국은 당연하게도그들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다른 한 편에 있었다심지어 루스벨트 이전에도처칠과 스탈린은 1945년 2세계를 나누기 위해 얄타(Yalta)에서 만났고미국은 (뉴 햄프셔브레튼우즈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중무장시키고달러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구성원 국가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고정했고양 세계대전 사이 동안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ur”)의 통화 평가절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키기 위해미국은 1온스당 35달러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했다조약의 요점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정했고세계은행은 IMF의 채권자로서 필연적으로 달러로 거래했다.

 

소련은 1947년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UN 총회에서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월 스트리트 분점이며세계은행을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었다라고 비난했다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이 이제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커다란 부분을 포함한 영토를 통제했지만그것은 전쟁으로 부상한 약한 제국주의였다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통화를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그들이 동독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불변 자본을 러시아로 수송하는 동안미국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생산 기반이 온전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미국 문제는동맹들이 자신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더는 미국의 상품을 구매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경기 후퇴 위협과 그 모든 결과도 나타났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을 거쳐빠른 인플레이션과 대부분이 노동조합이 속하지 않은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연료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미국 지역 경제와 동맹국 경제를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힘겨운 과제가 미국 자본에 주어졌다따라서 미국은 1947년 유럽의 동맹들을 위한 마샬 계획(Marchall Plan)을 시행했다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이 소련에 충성하는 코뮤니스트당의 숫자가 증가하는 국가들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의미했는데심지어 그렇지 않은 지역인 영국은 큰 코뮤니스트당은 없었음에도(1945년 영국 코뮤니스트당(CPGB)에는 국회의원이 1명 밖에 없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빚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마샬 원조를 수락했다이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서 런던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달러 지배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소련은전적으로 사심이 없진 않았던 원조를 거부했고그 위성 국가들의 마샬 지원 수락을 허락하지 않았다대신동유럽 국가들이 마샬 플랜에 참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미국영국그리고 그 외 서유럽 국가들이 부과한 무역 거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을 설립했다.

 

이는 양극단에 있는 세계의 제국주의 분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으로 이어졌다이러한 호황의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단기적인 마샬 계획의 지원이 아니라전쟁 그 자체가 가져온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였다전체 세계는특히 미국소련그리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별나게 높고 지속된 성장을 경험했고이 모든 것과 함께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 사실상 완전 고용(no unemployment)을 맞이했다이것은 1930년대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으며그 계속되는 호황에 직면하여그들이 경험한 아우성치는 20세기”(Roaring Twenties)의 문제그 역사를 특징짓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탈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은 그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무렵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다시 위기를 가져왔는데그 위기가 19세기의 사업 불경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축적 수단으로서 경기 순환은 명백히 끝났다아니 경기 순환은 세계 전쟁의 순환이 되었다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다만 자본주의 전쟁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그러하다다른 모든 가설적인 이유를 제쳐 두고주요한 목표는승전 열강들의 전매특허인 정책들로경쟁국이나 경쟁 블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그 결과로전쟁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 형태를 띠게 되었다이것은 경제 외적’ 수단에 의한 경쟁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들 사이 유혈 낭자하고 원시적인 투쟁을 위한 가식을 벗은 경제적 경쟁일 것이다.”(17)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재건하는 수단이 왜 파괴 도구 생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한다아래의 표는 영국과 미국에서 군비 증가를 보여주는데 1962년에 이르게 되면 430억 파운드가 군 예산과 무기 비용으로 매년 지출되고이는 전 세계 총자본 형성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이다.”(18) 무기 생산은 폐기물 생산으로총 사회적 자본에 어떤 새로운 가치도 더하지 않는 생산이다진실로한 국가의 자본은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그러나 거래에 사용된 돈은 그 나라 노동자들 노동으로 생산된 결정화된 가치 형태를 나타낸다그리고 그 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영국과 미국의 공공 지출, 1913-1969

 

연도

GNP 대비 국방비 비율(%)

GNP 대비 전체 국가 지출 비율(%)

 

UK

USA

UK

USA

1913

3.0

/

13.5

10.5

1923

4.7

/

27.5

11.0

1933

3.8

/

30.0

16.5

1938

4.9

1.5

31.2

19.5

1948

7.4

8.0

37.0

24.0

1953

8.9

13.2

35.0

27.5

1958

6.4

10.1

31.5

29.0

1960

6.2

9.0

32.5

28.0

1965

5.8

7.5

34.0

28.5

1969

5.3

9.0

39.0

32.0

출처: M. Barratt Brown, “The Economics of Imperialism”, 216.

 

정교한 핵무기 구매는 단순히 사냥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그 목적은 파괴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그 말은무기 생산은 가치의 창출에 연결되기보다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이윤율 하락에 대한 가상의 (경향은 세계 자본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며종국에는 오직 더 심각한 위기쇠퇴기 자본주의 아래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주요 특징들을 개괄했다자본주의 경쟁은 이제 개별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블록에 속한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그러나 자본주의 성장기 개별 기업들이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면제국주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의 경제적 집중은 그 과정을 자본주의 아래 궁극적 한계까지 밀어붙였다제국주의는 지구의 가능한 상당 부분을 원자재투자시장의 원천으로써또는 그 이득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써분할 하려는 각 자본주의 국가 내부 투쟁이었다제국주의 군비 경쟁은 모든 외교 전술무역 전쟁제재와 호의적 국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나이 모든 것들은 결국 순수한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었다쇠퇴기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왜 자본주의가 버터보다 총을!”(guns not butter) 선호하는지교육주택과 같은 사회적 편익보다 일종의 폐기물 생산으로서 군비 지출을 선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

 

1914년 이래제국주의 전쟁은 거의 중단되지 않은 사슬처럼 확장되었다물론 가장 충격적인 예시는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었는데이 전쟁은 30년대 초반의 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규모 군비 지출에 뒤이은 것이었다영국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보면군비 지출은 1937년과 1939년 사이 각각 144%, 142%, 그리고 103% 상승했다.(20) 1차 세계대전이 가장 지배적인 세계 제국주의로서 영국 자본주의의 파괴를 완성했다면2차 세계대전은 명백히 미국을 세계에서 선도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확립시켰다비록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 산업과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소련이라는 점점 더 위험해지는 라이벌과 직면했지만 말이다.

 

전후 세계의 역사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둘이 모두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윤을 유입함으로써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키는 시도 속에서세계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려 시도하는 역사였다따라서 냉전 속에서 제국주의적 갈등은 한국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다양한 중동 위기와 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는 대리전쟁의 형태를 취했다제국주의는 소수의 높은 유기적 구성을 한 선진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산물이다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것이 영토의 물리적인 지배 식민주의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그 당시 지배적인 강대국들은 그들이 그 무엇이 되었든 영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레닌은 정확하게도자본의 수출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식민지에서 초-이윤(super-profit)을 얻지 못하도록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막고따라서 자본주의에 상당한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그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첫째()맑스주의 역사가들(21)이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처럼인도라는 명시적인 예외를 포함하여일반적으로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리 수익성이 크지 않았다그 당시 그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은아프리카를 비롯한 땅을 점령하는 다른 동기들은 종종 부정적인 것 라이벌로 하여금 특정 영토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 이었던 반면식민지가 곧 수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점이다둘째식민지의 개발 및 군비 때문이었는데2차 세계대전 이후독립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더욱 교묘하고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방법(곧 -식민주의로 불리게 된다)을 개발하였다비록 정치적 의미에서 명목상 독립했지만, ‘새로운’ “개발도상국” “세계” 국가인 구 식민지들은 세계 시장을 유의미하게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2차 세계대전 이후선두의 제국주의 열강과 개발도상국” 나라들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1952-1954미국의 1인당 생산량은 1,870달러는 인도의 60달러이집트의 120달러였다. 1969이 수치는 미국이 4,240달러였는데인도는 110달러그리고 이집트는 160달러가 되었다.(22) 2022이 수치는 미국 70,246.6달러인도 2,256.6달러그리고 이집트 3,698.8달러였다.(23)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개발도상국 세계의 실패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자기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잉여가치를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시도해야만 했다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은저개발 국가들의 자본 축적을 통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를 막았고따라서 이 지역에서 자본 재생산 기반을 파괴했다따라서제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낙후된 지역을 계속 착취하는 것은 서서히 개발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그러나 착취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이미 불충분한 이윤을 더 감소시킨다는 의미이다.”(24)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로서의 선진 국가의 지원가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무조건적인 원조는 없는 것이 당연했고그것은 자본이므로따라서 자본으로 작동하므로, (원조는이윤과 이자라는 이름의 기대 수익을 대가로 빌리는 것이 되었다이전 원조에 대한 이자와 빚을 지불하면, 1965년에는 (쿠바를 제외한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8억 83백만 달러의 순손해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25) 이 당시 쿠바는 제국주의에 의존하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상황이 좋았는데소련으로부터의 30억 달러 원조의 수혜자가 되었다비록 더 나은 조건이었음에도 쿠바의 경제는 계속 침체했다소련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에, “원조에서 경쟁자를 약화하기 위해 낮은 이윤율과 장기의 대출을 제안했다이는 결코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쿠바와 다른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들 나랏빚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전후 제국주의 게임에서 소련의 다른 약점은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는 있었지만베트남 전쟁의 운명이 명백히 보여주었던 것처럼독립을 쟁취한 이후 경제적 지원은 거의 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저개발 경제가 견고한 산업 기반을 확립하기 어려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각 자본은 경쟁으로 인해 대략 유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므로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 지속적인 가치의 유출이 발생한다더욱이이윤율은 균등화(equalisation) 경향이 있으므로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국가들은 새로운 축적을 위한 충분한 규모의 이윤이 없음을 알게 된다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Social Reform or Revolution)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본 것처럼.

 

생산성과 교환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 그 자체의 성장에서 비롯된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위협이다그것은 어떤 새로운 중소 규모 자본의 기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로 위험한 경향이다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형성그러므로 자본 배치의 확장도 제한한다.”(26)

 

그러므로저개발 국가가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자본을 대출하여 무거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따라서

 

“1960년대 개발도상국의 공공 대외 재무는 매년 14%씩 상승했다. 1968년 6빚은 475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27)

 

어떤 이들은 저개발 국가의 계획 경제 정권이 해당 지역 잉여가치 생산 부족의 만성적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 국가 자본주의 해결책으로 소련을 모델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28) 그러나쿠바와 극찬받던 중국 사례가 대표하듯이그런 지역에서 계획 경제의 적용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국외 자본이 실패하자지역 부르주아지는 축적을 위한 충분한 잉여가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국가 권력에 고삐를 채우고자 했다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길 희망했다쿠바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0년대 핵폭탄을 개발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그러나 중국에 호의적인 이들조차도 아래와 같은 것은 인정했다.

 

이례적인 진보에도 중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경제적 도약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바, 1인당 곡물 공급이 여전히 국민당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때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29)

 

가치 법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계획 경제의 집중화도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충분한 잉여가치를 불어넣지 못했다전후 호황이 1970년대 초반 자유세계의 종말에 도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지표들은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도 하락세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물론 우리도 당시 이 경제들의 이윤율을 계산할 수 없었다그러나 우리는 성장률을 보아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1951-5년 시기코메콘(동구 경제상호원조회의)의 전반에서 성장률은 1960년대 성장률에 비해 2배였고, 5개년 계획(1971-5)의 주요 목표 달성은 모조리 실패했다.(30) 냉전의 양측 모두에게 멈춤쇠(détente)”는 평화를 향한 진정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베트남 전쟁의 비용이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에 이바지했다면코메콘의 무기 생산은 GDP 성장 둔화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점차 지속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이것이 부패낮은 노동 생산성알콜 중독자 비율의 증가그리고 소비재의 부족이 만연했던 브레즈네프(Brezhnev) 시절이었다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1982년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있었고이 시기에 소련은 1979년 필사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자신만의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동안중국과 미국 모두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그들의 화해를 향한 첫 단계를 밟았다새로운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정책과 같은 중국의 주체적인 발전 시도의 실패그리고 1960년대 중반 소련과의 관계가 무너진 이후 뒤이은 스태그네이션 결과였다그러나, 1970년대 말(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 그리고 1980년대 초반중국 코뮤니스트당서유럽의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문제를 다루는데 상호 이득이 되는 방법을 우연케도 발견했다서유럽 자본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결책은 만들지 못한 채, 1970년대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려는 시도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를 패배시키는 방법을 제공했다서유럽의 산업 구조조정(즉각적인 자본의 단순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은 일본한국그리고 중국 내 서유럽 금융 자본(그리고 멕시코와 같은 보다 작은 장소들)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했다이곳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이것은 규제가 사라진 통화금융화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이며이에 더해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소련 붕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

(16)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51

(17) 매틱(Mattick), 앞의 책. 135

(18)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19) 적어도 세계부르주아지의 부분적 실현에도 불구하고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명백한 정치적 강점.

(20) 수치는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18.

(21) 고전적인 예시는 D.K. Fieldhouse, The Theory of Capitalist Imperialism (Longman 1967)

(22) Key Issues in Applied Economics, 1947-1997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3) data.worldbank.org

(24) 매틱(Mattick), 앞의 책. 262

(25) T. Hayter, Aid as Imperialism, 17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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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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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정기 독자들은 소소한 사항을 추가하여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를 재발간해 오고 있음을 알 것이다. 1974년 처음 발간된 이 글은 1975년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일부가 된 혁명적 전망 그룹의 기반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반세기 전 작성된 이 글의 핵심 전제는 세월의 시험을 견뎠고처음 두 부분에 대해 우리는 원본에 가벼운 수정만 가했다.

 

그러나, 3부에서 우리는 온갖 혼란과 변화의 지난 반세기에 진입했고여전히 살아가고 있다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원래 글에서 제기된 것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사실이미 1976년 당시에도 도래하는 위기와 그 결과에 대한 전 세계적 노동계급 저항의 부활이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물음이 의제였음에도 불구하고그것은 즉각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였음을 우리는 이미 결정했었다. 1970년대의 경제적 투쟁(우리들 사이에서는 재정적 전투성으로 칭한다)은 체제를 없애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계급의식을 자동으로 출현시키지 못했다심지어 그 체제가 더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해도 그랬다우리는 위기의 원인에 관해 설명했고여전히 남아있지만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만약 그 이후의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거나 우리가 다룬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지 않는다면그 설명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따라서, 3부와 이 연작의 이후 부분은 처음 두 부분에 비해 더 많은 편집이 가해질 것이다이 3부는 원본이 작성된 시기전후 호황()의 마지막에 끝난다이 시기는 노동계급이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자신의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전 세계적 파업과 폭동으로 반응한 시점이다이는 CWO와 같은 코뮤니스트좌파 조직의 탄생과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코뮤니스트투사(Battaglia Comunista)와 같은 기존 조직의 재활성화로 이어졌다우리의 새로운 세대는우리를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현실(유물론적 실재)을 설명하는 맑스의 분석으로 이끌었다그러나우리가 1970년대 초반에 볼 수 없었던 것은축적 순환의 마지막그리고 그 위기에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시도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대한 체제의 반응이었다이 연작의 다음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글을 요약할 것이고그 글은 이 축적 순환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 축적 순환의 핵심 문제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의 필요성 등 의 끝에 대한이어지는 자본주의자들의 뒤틀림과 전환에 대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해야만 했던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쇠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인데이 쇠퇴가 자본주의의 빠르게 붕괴할 것이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생산양식의 등장과 몰락에는 수 세기가 걸린다생산양식의 모순은 그것이 마침내 붕괴하기 전까지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때때로 명백하게 확장하기도 한다심지어 그 이후에도 경제적 모순은 그 자체로 계급 규칙을 끝내지 않는다우리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Internationalist Communist) 23권에 썼듯이: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 동안 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밝힐 수 있지만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결코 내다보지 못한다대안의 부재 속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 광기의 과정을 수행해 갈 수 있다자본주의가 쇠퇴한다고 기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종말과 사회주의의 도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 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이다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쇠퇴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국제주의적그리고 국제주의자 당의 지도를 받은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투쟁 과실이다.”1)

 

따라서 쇠퇴는 자본주의가 독점제국주의그리고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의 시대그러나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이비록 모습은 다를 라도 기본적인 채찍으로 남아 축적 순환의 물질적인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약칭에 불과하다그러나 이 쇠퇴는 전에 없는 거대한 위협을 제기한다지배계급의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복합위기’(polycrisis), 경제적 스태그네이션팬데믹제국주의 전쟁환경 오염과 세계적 온난화 등의 모든 위협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가 아닌 인류 자체의 잠재적 미래를 이야기한다여기에는 어떤 보장된 미래도 없다우리는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묘사한, ‘투쟁’(contending)의 승리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승리 또는 우리 모두의 몰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혁명적 소수도광범위한 노동계급도 무엇이 벌어질지 팔짱을 끼고 기다릴 수 없다집단적정치적 양쪽으로 모두 조직화를 시작할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이 연작은 그 노력에 공헌하고자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의 시대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생산양식임을 결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그러나 우리가 이윤율 하락이그것이 자본주의 상승기든 쇠퇴기든 그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기본적인 추동력임을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우리가 어떻게 단정적으로 세계 자본주의가심지어 축적을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었고생산력이 확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제 쇠퇴하는 사회적 체제이고 그것은 1914년쯤부터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먼저우리가 자본주의의 쇠퇴의 시작 시기를 ‘1914년쯤이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다생산양식은 어느 날 하룻밤 만에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만들어 내고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건설하는 그 역사적 책무를 모두 수행한 것이 1914년 이전쯤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독점 자본과 세계 경제의 발전과 함께축적 순환상의 경제적 위기만으로는 축적 과정을 다시 활성화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자본의 중앙집중화는 이미 선행되었고이제는 몰락할 것이라고는 주변부의너무 소규모생산성이 낮은 자본밖에 남지 않았다전 세계적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로써 자본의 평가절하만이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연구의 이전 부분에서일단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버리면이윤율 하락의 역(경향이 헛된 것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종국에는 세계전쟁으로 나아갈 뿐인지를 보았다세계 자본의 등장은 자유방임주의 또는 고전학파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 축적은 오직 각 지역 경제(national economy)에서의 지속적이고 증가하는 자본의 개입과 국가의 시민 사회의 점진적 흡수 – 전 세계적인 국가 자본주의로의 경향의 존재 라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했다국가 소유(자산)의 증가와 생산수단 통제의 증가경제를 통제하려는 재정 정책을 제외하고서도이는 불모 생산(waste production. 세계 자본의 관점에서 자본 축적에 기여할 수 없는 생산)의 자극을 포함하는데무기 생산이 불모 생산의 가장 명시적인 표현이다고전적인 경쟁이 이제 제국주의 강국 사이의 영속적인 경쟁 상황에 포함되면서경기의 호황과 불황은 그 자신이 세계 경제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세계 경제 위기는 종종 무기 생산의 증가와 새로운 자본 축적의 순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동반했는데이 위기는 오직 전쟁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데전쟁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재건(reconstrucion)기의 전주가 된다. 20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역사는 위기-전쟁-재건 순환의 역사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자본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작동했고제국주의 강대국들2)의 재편성을 가능하게 했지만이후 선진국가의 제국주의 사이 경쟁의 책략 속에서 단순히 졸병 역할을 했던 중진국(less advanced states)의 상대적인 지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왜냐하면이른바 개발도상은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독립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국제적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존재는 세계혁명과 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코뮤니스트 제도의 물질적 가능성의 존재를 의미했다. 1917-21년 세계혁명의 물결은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이 더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 가능성임을 증명했다그러나 이보다 더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임을그리고 사회가 야만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제도가 필연적임을 증명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도중그리고 이후의 국가 주도 경제화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 가운데, 1870년쯤부터 계속선진국에서 총 국민 소득에 비례하여 국가 지출이 증가한 것을 보았다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국가 지출의 가장 거대한 단일 항목은 국방비지만교육 및 공공사업(높은 기술적 구성이 요구되는 가스상수도 등의 서비스또한 중요한 항목이었다. 1909영국 정부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국가에 의해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을 결성하고정부의 통제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구의 이전 부분3)에서 지적한 도금의 시대’(Gilded Age) 독점 경향이 독점 가격을 통해 새로운 자본의 발전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정치적 과정을 왜곡할 것이라 위협하는 일은 미국에서 발생했다조직된 노동의 저항에 대한 반응으로, ‘농민 운동’(Granger Movement)의 농민들은 반()-독점당을 설립하고, 1890년 첫 번째 독과점 금지법셔먼 조례(Sherman Act)를 통과시켰다맥킨레이(McKinlay) 대통령 정권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아래그 법은 대개 이용되지 않았다그가 암살된 이후후임자인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의 열정적인 지지자테오도르 루스벨트 시기가 되어서야 JP 모건과 록펠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그 법을 적용했다. ‘경쟁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 자본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쟁은 시스템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시장마저도 규제되고 나아가 국가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는’4) 과정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루스벨트는 실제 산업을 국유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정부 계약이 국가 계획과 자본의 주요 원천이 되는 지점에서 산업들과 관계를 구축했다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 – industrial – Congressional – complex)의 씨앗은 뿌려졌고그 무렵전후 붐 시기산업의 지도자들은 정부 서비스에 막힘없이 드나들었다.5)

 

1914전쟁의 발발은 전쟁 목적 생산에 대한 다소간의 직접적 통제권을 중앙 정부가 갖고 있던 선두 자본주의 강국들 모두의 내부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의 진행이 가속했다. 1916년 이후독일 제국에서는 라테나우(Rathenau)의 경제 통제가 너무 강력하여, “국가 사회주의로 회자하였으며그를 도와 군수품 부서(Ministry of Munitions)를 운영하던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생산분배그리고 교환의 모든 수단이 총체적으로 그들의 마음대로였다”6)

 

이 국가 개입의 특정 측면들은 다수 전후에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유지되었고국가 자본주의는 모든 자본의 경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경제의 국가 주도화 경향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군사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조정한민족 국가 내부에서의 생산 필요성의 결과 – 비록 그 필요가 경향을 가속하고 강화했지만, - 가 아니다더 중요한 이유는 기형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초래한 만성적 잉여가치의 부족으로 추적할 수 있다산업의 침체기(불변자본을 더 증가시키기에는 너무 낮은 잉여가치)를 맞아경제 붕괴를 피하고자 국가는 지금까지는 시장의 기능이었던 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는데그것은 전체 경제에서 잉여가치를 재분배함으로써 평균 이윤율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자본의 집중 과정에서 더 큰 잉여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대기업들 사이에서 나눠지고이는 시장이 그 자신의 몇몇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이다시장 메커니즘이 자본의 확장 과정에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를 멈춰버리면이윤율의 평균을 형성하는 문제는 복잡해진다개별 산업의 개별적 이윤율에도 불구하고모든 필수적인 산업의 동시적인 이윤율의 존재를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이윤율의 평균은, ... 잉여가치를 통합(pooling)’함으로써스스로 사회적 수요의 수단이라 주장하는 사회적 생산의 물리적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을 암시한다자본의 지체(stagnation)는 그것이 문제가 있는 수요로 표현되는데잉여가치의 사회적 통합에 참여하는 자본 주체(entities)를 증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잉여가치의 통제는 자본주의의 안전에 필수적인 것이 되고이윤의 분배는 정부의 관심사가 된다.”7)

 

이런 이유로은행금융 등에 대한 국가 통제가 뚜렷하게 증가하고2차 세계대전 이후특히 1929년 위기의 시작과 더불어정보 보조금많은 기간 산업의 노골적인 국유화가 이뤄졌다따라서보기를 들면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거의 모든 해운 회사민간 항공 회사부채를 지불할 수 없는 은행과 국유화된 철도회사에 자금을 빌려주었다영국 정부는:

 

“... 철도의 통합을 달성(1921), 전력 공급의 부분적 국유화(1926), 정부가 지원하는 철강(1932) 독점그리고 국가적 석탄 카르텔(1936)을 만들어 집중화를 이루었다...”8)

 

나치의 독일에서는히틀러가 볼셰비즘에 반대해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국가의 경제 통제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자본주의자들은 통산·산업의 영지”(Estate of Trade and Industry)노동자들은 노동 전선(Labour Front)으로 조직화하였는데그러는 동안 1938년 2괴링(Goering)은 ‘4년 계획’(Four Year Plan)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 독재를 실시했다.

 

이 소개된 방법들은 ... 경제에 대한 특정 나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니다그것들은 일종의마지못해 채택된 계획이며, 1930년대 현재 많은 국가에서 케인즈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되는 것이다그것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도입된 전쟁 사회주의에 일부 기반을 두고 있다.”9)

 

이탈리아에서는 1933파시스트 정부가 산업재건기관(the Institute for Industrial Reconstruction, IRI)을 세웠다:

 

“... 정부의 경제 자립 정책과 재무장 정책을 돕기 위한 영속적인 산업 지주 회사로서민간 기업이 충분한 자금을 투자할 의지가 있는 산업과 서비스에서만 활동하도록 계속해서 그 활동에 한계를 두었다.”10)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두경제적 회복은 무기 생산과 노동계급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그런데도 1929년에서 1938년 사이두 나라의 총 사회적 생산은 감소했다.11) 우리는 아래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 이 메커니즘에 어떻게 축적을 돕는지’ 알아볼 것이다그러나국가 주도 경제화(산업의 국가 소유라는 의미에서)한 편에서 잉여가치의 재분배를 지원하고경제 지원을 돕지만다른 한 편에서는 사적 영역의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킨다왜냐하면주로 사적 영역의 잉여가치를 지휘함으로써국가가 이 기업들의 자금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완전히 국가자본주의화 된 경제(이른바 코뮤니스트’ 국가)에서 작동하는높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영역에 속하게 될 것)과 낮은 잉여가치율의 산업(1영역에 속하게 될 것사이에서 이윤율을 국가가 평등화하려는 시도에서똑같은 과정이 발생하는데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금을 이전시키는 것이 여기서는 더 쉽다왜냐하면국가가 하나의 거대 기업가로 행동하면서총 국가 자본을 직접 통제하기 때문이다모든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데이는 전체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 비용의 증가에 해당하고따라서 이윤율의 하락을 심화시킨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적 관리법’, ‘노동절약’ 기구성과급 시스템의 도입 등의 수단을 통해 생산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에 속도가 붙었는데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이윤을 내는 산업에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떨어지는 이윤율을 상쇄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하락은 실질임금이 세기 초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백했다그동안 독일에서는 국가 경제에서 임금의 비율이 1932년 64%(이것마저도 1928년 수준에서 심각하게 떨어진 것)에서 1938년 57%로 떨어졌다.’12)

 

그런데도상대적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확대되던 실업 증가에 기여했고중앙 정부는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입하여 국유화사회 보장 제도그리고 공공사업을 심화했다미국 F.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이러한 정부 개입 가운데 가장 거창한 것이었다뉴딜 정책의 수단들은 그 정치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축적의 실제 마중물이 된 적이 없고그저 대공황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으로 체제를 단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1937년쯤에 이르러서는 국가 지출 단독으로는 이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명백했다그 대신경제위기 시기 고조된 제국주의 긴장이 관세 장벽 강화에 따라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ur”)과 경제자립 정책을 불러오거나또는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가 국가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주장되었다이러한 긴장 아래의 재무장은 군수 산업의 이윤율은 높였을는지도 모르나, 1939년과 1941년 제국주의 전쟁의 전면전에 추동을 더했을 뿐이었다. (이 제국주의 전쟁은궁극적으로 엄청난 양의 자본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축적의 새로운 출발그리고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기의 신호가 될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단일 국가에서 고립되어 발생한 1917년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의 다른 종을 낳았다세계혁명의 전망이 미래로 멀어지자, 1921년 신경제정책(NEP)이 채택되었다레닌은 너무도 솔직하게 이것이 국가 자본주의로의 후퇴라 했으나그는 항상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무언가를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심지어 러시아의 좌익 코뮤니스트들은 러시아에서의 서유럽 방식 국가자본주의(이후 혼합경제로 불림)를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들도 맹비난해 왔는데이들조차 생산력의 완전한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아님(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을 알 수 없었다. 1920년대 계속된 소련 내 논쟁은 자본 축적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NEP를 지속하는 옹호자로서 부하린이 등장하는 동안(그리고 농민에 대한 양보로 농업을 성장시키면서), 그의 이전 좌익 코뮤니스트 동료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산업화를 더욱 가속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가 이 정책을 지지했다). 좌익 반대파 가운데 이 -산업화 지지자들’(super-industrialisers)은 스탈린이 당 조직을 장악하면서 패배했는데, 1928년 스탈린이 그들의 정책을 훔치는 것도 막지 않았다스탈린주의자들이나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는 그 이후 이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동의 시작이라고 주장해 왔는데사실은 이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 자본주의 모델의 시작이었다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식민주의의 굴레 아래 있으면서그들의 이전 제국주의 주인들의 자본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축적할 방법을 찾던 국가에 이 초-산업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스탈린은 5개년 계획(Five Year Plan)의 동기는 러시아 노동자의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이 계획에 잉여가치를 제공할 것이었다), 서유럽 열강들의 공격 – 스탈린은, 1928년에도 그들이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에 저항할 수 있는 군수 기계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나치가 조금 이후에 말할 것처럼그것은 버터가 아니라 총’(guns not butter)이었다그러나 1930년대 동안월가의 충격 이후 대규모 실업이 서유럽 경제를 황폐화했을 때, 5개년 계획은 완전히 계획된 명령 경제(소련에서는 사회주의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코뮤니즘으로 잘못 불렸다)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 이르는 기간 두 주요한 열강 사이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고조됨에 따라이것은 전쟁 직후의 파업 물결주택 점유와 나란히 이른바 자유 세계에서 복지와 사회 보장 제도의 도입에 일정 역할을 했다.

 

전후 호황(The Post-War Boom)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1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전시 통제가 완화되는 일은 없었다사실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갈수록 확실해졌다. GNP 대비 국가 지출 비율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아래의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표를 보라). 소련에서는 1946년 제4차 5개년 계획 개시가 선언되었다프랑스에서는 모네’(Monnet) 계획을 채택하고르노석탄가스전기프랑스 은행대규모 시중 은행에어 프랑스그리고 최대 규모의 보험 회사들을 국유화했다영국이 국유화한 대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우리가 이전에 지적한 것처럼미국의 국가 자본주의가 정부의 국방 관련 계약의 형태를 취하는 동안전후 재건기 독일이탈리아그리고 일본의 회복은 미국의 마샬 원조(Marshall Aid)에 의해 시작되었고전쟁 이전 국가 통제를 이용해 유지되었다이탈리아에서는 IRI(위의 내용을 보라)가 거대한 규모로 성장국가 철강의 60%를 생산했으며알파 로메오(Alfa Romeo)사를 소유, 20만 명의 공학 노동자를 고용했으며그 외에도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사업을 통제했다그동안 독일에서는

 

이 시기 부르주아지는 자본 축적을 강제하도록 국가 기관과 통화재정 체계를 다른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보다 더 많이 이용했다.”13)

 

이러한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은 아마도 서유럽의 민간 산업에서조차공공 영역이 이제 보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고용주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의 공공 영역 종업원 표를 보라). 정부의 직접 통제는 주로 기간 산업들에서 이뤄졌는데이 산업은 자본의 갱신과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이윤이 필요하다는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국가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윤율의 동등화 경향이 무너지는역사적 위기의 지표이다이것은 1970년대 초전후 호황이 끝났을 때 국유화를 향하는 경향들이 처음에 더욱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국가가 통제하는 UCS와 롤스 로이스(Rolls Royce), 그리고 국민 기업 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형태의 국가 주도 경제화의 심화그리고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당장의 선박제조 산업들의 국유화와 함께영국은 이러한 방식의 보편적 발전을 이끌었다.

 

               공공 영역 종업원의 숫자 – 노동력 대비 비율(%)

국가

총 일반

정부 부문

공기업

총 공공 영역

영국

11.9

10.1

22.0

캐나다

9.9

2.0

12.0

미국

16.7

0.04

16.7

베네수엘라

12.4

1.2

13.6

칠레

10.1

N.A.

10.2

아르헨티나

11.5

3.5

14.9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인 인플레이션

 

경제 부문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를 동반하는 국가 지출의 많은 부분은 사실 비()생산적 부문이다 – 그것은자본 축적을 심화시키지 않는 지출이라는 것이다무기 생산뿐만 아니라 전체 제3의 영역(사회적 서비스 등)은 비생산적 지출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포함될 수 있다그런데도비생산적 지출의 증가는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다시 말해가격의 상승)을 발생시키지 않는다전체 경제 수준에서 보았을 때 총가격은 총가치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총 사회적 자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비용이 잉여가치의 ’(pool)에 있는 배수관을 상징하고따라서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임은 명확하다그러나 인플레이션은연관된 가치 생산의 양적 증가 없는 화폐 공급 확장의 결과이다.

 

다른 말로가격의 상승은대량의 통화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상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화폐 공급의 확장으로 인한 자신의 실제 가치를 재정립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통화의 가치 하락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연관된 가치 생산의 증가 없는 화폐 공급 증가의 결과는 부르주아 고전 경제학 이론의 용어로, MV = PT로 표현할 수 있다이때 M은 화폐의 양, V는 순환 속도, P는 가격, T는 산출물이다명백히, M의 증가는 그에 동등한 T의 증가 없이는 P(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비생산적 지출은 그렇게 방정식에 삽입된다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중요한 요인은새로운 가치(또는 고전 경제학 용어로 산출물’)의 생산 증가보다 빠른 화폐 공급의 확장이다따라서비생산적 자본이 어떻든 관계없이화폐 공급의 확장 없이는 인플레이션도 없다그러나실업이라는 매우 큰 위기가 있을 것이다.

 

전후 시기 국가는 화폐 공급의 확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고 있었는데이는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회피하고실질 구매력을 약화하는 간접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직접적인 공격이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정부 수입의 중요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그들은 국가 책임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 전체를 공급할 수는 없다적자 재정(다시 말해 국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는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특히 1930년대 초 금본위제가 폐기된 이후 모든 혼합’ 경제 국가들의 공통 특징이었다.

 

국가가 화폐 공급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 경제가 금속(주화교환 기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국가 경제에서의 화폐 공급은 국가 경계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실제 금(또는 은()의 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발행된 지폐는 법적으로 주화로 교환될 수 있었고지폐 발행의 양은 은행이 보유한 주화로일정 법적 고정 비율로 교환해 줘야 하는 의무에 의해 제한되었다따라서 화폐의 공급은 각 국가 내의 은행이 보유한 금은괴 보유량에 의해 제한되었다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적대국이 화폐를 찍어냄으로써 엄청난 재정 비용을 감당하면서 국제 금본위제의 포기를 맞이했다따라서 1918년에 이르렀을 때독일의 지폐 발행 증가는 1914년 수치의 5배였고영국은 전 이전 수치의 4.5프랑스는 1914년 합계의 거의 4배였다이러한 화폐의 증가는 전쟁으로 인한 폐기물 생산에 돈을 대는 것이었고이는 새로운 자본의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가격은 독일에서 245%, 영국에서 230%,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53% 급증했다.14) 여러 국가에서의 금본위제 폐지를 동반한 화폐의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는 평가절하된 국가의 상품들의 단기적 경쟁력을 향상했으나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상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은 낮아졌다그러한 효과는 오직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었는데경쟁하는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그들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1936년쯤에는 이전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이 황금 연합’(gold bloc)의 국가들은 이제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자신의 화폐를 평가절하했다.

 

1930년대에는1차 세계대전 중과 꼭 마찬가지로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앙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함으로써 화폐 공급을 증가시키고경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확대할 수 있었다아래에서 볼 것처럼정부 지출의 최대규모 증가는 무기 생산의 대규모 증가 때문이었는데대규모 실업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공포는 국가가 기존의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공공사업의 건설에 개입하도록 했다.

 

                         국가별 총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국가

총 국가 지출

(각 국가 통화 기준현재가치 000,000은 생략)

공공 부채

(국가 수입에 대한 비율)

1928 or 1929

1937 or 1938

1929

1937 or 1938

프랑스

44,248

68,971

114

171

이탈리아

20,519

34,100

N.A.

N.A.

영국

782

1,134

174

163

독일

8,187

N.A.

12

25*

벨기에

12,299

13,546

77

85

미공개 기명 어음의 양에 대한 정보 원천클라우 (Clough and Cole), “유럽의 경제 역사”(Economic History of Europe), 819

대개 적자 재정으로 자금을 확보했던 폐기물 생산의 큰 증가는 오직 인플레이션을 확대하고 공공 부채를 증가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고이는 위의 표로 증명된다.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엄청난 비용은 다시 국채나 재무부 단기 채권을 담보로 한 은행으로부터의 중앙 정부 대출로 충당되었고결국 화폐 공급을 확대했다아래의 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폐 순환의 증가를 명백히 보여준다전쟁 자금을 위한 화폐 공급의 엄청난 증가는 가격을 고정하는 수단들이 무용해지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과 그 직후모든 적대국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도입된 정책들은 다시 한번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폐 순환의 증가

                     (1939년 7월 ~ 1944년 12)

국가

시기

증가 비율(%)

독일

1944년 12

435

벨기에

1944년 8

339

프랑스

1944년 12

369

이탈리아

1944년 12

1,034

미국

1944년 12

259

영국

1944년 12

160

캐나다

1944년 12

318

 

출처클라우 콜 유럽의 경제 역사”, 847

 

서유럽에서의 케인즈주의 조치의 도입은 다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들이 강제적으로 도입한 정책들의 다소 의식적인 확장으로 보였다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를 투자를 촉진하는 이윤율을 조작함으로써그리고 불황기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적자 재정과 공공사업으로 피할 수 있고결과적인 국가 부채의 증가는 호황기에 상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사실 실제 일어난 일은 모든 선진국가에서의 국가 부채의 영속적인 증가였고인플레이션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임이 증명되었다보기를 들어,

 

서유럽의 물가는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66% 증가했다이것은 매년 5% 증가한 결과인데이 비율은 국채 수익(세전)과 거의 같은 정도이다.”15)

 

케인즈주의 이론에 따르면점진적인 인플레이션은 국가 경제의 건전하지 못한 특징보다 오히려 건전한 것이며왜냐하면 이것은 사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하고세계 시장에서 수출물의 경쟁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그런데도애초에 인플레이션의 존재 이유를 기억한다면(생산으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증가보다 화폐 공급의 확대가 빠른 것), 인플레이션은만약 화폐 공급의 팽창 비율이 계속 가치 생산의 비율을 계속해서 앞지른다면, ‘점진적’ 과정을 넘어선 무언가임이 명백하다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이것은 프랑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칭한 “30년간의 영광스러운 세월이라는 장기 호황의 끝을 가져온 세계적 규모의 경기 후퇴의 진행과 함께 197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계속)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9월 8

 

 

<>

 

1) 쇠퇴의 개념 구체화 참고

 

 

 

2) 보기를 들어미국 경제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표는 다음과 같다.

 

photo_2019-01-09_13-27-57.jpg

 

3)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참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4) 이러한 미국 정부의 조치 변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팀 우(Tim Wu)의 '거대함의 저주 새로운 황금시대의 반독점'을 참조

 

5)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입성한 제너럴 모터스의 사장 찰스 윌슨이다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막대한 지분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 사이에 이해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언론인들은 이를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축약했다결국윌슨은 자신의 주식을 팔아 이를 확인받았다.

 

6)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전쟁 기억 1, 147

 

7) 폴 매틱(Mattick), 맑스와 케인즈, 115-6

 

8) E. 홉스봄(Hobsbawm), 산업과 제국, 242

 

9) D. 차일즈(Childs), 1918년 이후 독일, 59

 

10) E. 탄넨바움(Tannenbaum), 이탈리아의 파시즘, 112

 

11)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유럽 경제사, 764

 

12) ‘제국주의 본국의 분석에 관하여서독의 사례’,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 회보, 1974년 봄, 6동유럽과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독일의 '경제 기적'에 대한 유용한 설명이다.

 

13) 위의 책, 19

 

14)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op.cit. 734쪽에서 발췌한 수치이다.

 

15) 매틱 op.cit. 147쪽에서 인용. J. O. 코포크(Coppock), 유럽의 필요와 자원에서 인용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8/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ii

 

<이전 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1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645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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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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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가 지난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그는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코뮤니스트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많은 활동가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했다그는 2006년 한국에서 개최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여했고코뮤니스트좌파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공개강연회(자본주의좌익공산주의와 계급투쟁)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미국 뉴욕의 한국 영사관 앞에서 한국 노동투사 (사노련탄압 중단과 국가보안법 철폐”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국제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 2012년 이후에는 한국의 코뮤니스트좌파와 의미 있는 교류를 하지는 못했지만(그의 관심사와 소통 범위는 너무 넓어서 이른바 자본의 좌파나 맑스주의에서 이탈한 이들과도 자주 교류했다), 우리는 그의 활동과 저술을 계속 주시하고 참고해 왔다.

 

우리는 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국제주의자 전망의 추모글과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작성한 글을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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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

 

로렌 골드너 동지가 4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위대한 투쟁가의 상실이며 그의 죽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로렌의 정치 인생은 60년대 버클리 대학 재학 중 연좌 농성과 반전 폭동으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이러한 맥락에서 로렌은 급진주의에 빠져 마오주의스탈린주의신좌파에 대한 비판을 찾아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한동안 그는 독립 사회주의자 클럽에 가입했는데이 클럽은 나중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IS)가 되었다하지만 그 전에 로렌은 버클리와 ISC를 떠나 초좌파의 전통에 매료되어 정기적으로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했다유럽에서 그는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Socialisme o Barbarie),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international), 불변성(Invariance) , 장 바로(Jean Barrot), 프롤레타리아(Le Prolétaire) 및 망명 중인 이탈리아 좌파의 다른 요소들과 친숙해졌다로렌의 정치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생각과 결정적으로 단절하고그가 받아들여야 할 국제주의적 지향과 역사적 연결고리를 제공한 앙리 시몽(Henri Simon)과 만남이었다.

 

1970년대에 로렌은 뉴욕에 정착했다뉴욕에서 그는 아르바이트하며 좌파 서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맑스를 읽으며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선언하며 살았다이곳에서 그는 첫 번째 중요한 저서인 미국 노동계급의 재구성을 출간했다.

 

80년대에 로렌은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하버드에서 사서로 일하게 된다그는 코뮤니스트좌파에 동조하는 다른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며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로렌은 많은 정치 서클에서 활동했지만어떤 조직과도 연계하지 않았으며그 대신 "시류에 반하는 글쓰기"를 선호했다그는 종파를 초월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그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나중에 온라인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했다건강이 악화할 때까지 수년간 운영한 '멜트다운(Meltdown)' 목록과 같은 여러 온라인 토론 목록을 만들었다.

 

로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주기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90년대에는 아시아에 관심을 보였다그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장 투쟁을 따라 인도중국일본한국을 여행하며 경제 위기와 의제 자본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았고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노동계급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집필하기도 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로렌은 반란자 노트(Insurgent Notes) 창립에 참여했고노동계급 운동을 추적하고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며 맑스 읽기 그룹을 이끌고 중국어를 배웠다. 2017년 로렌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로렌은 많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뛰어난 언어학자였고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성과 겸손함을 겸비했으며모든 것에 대해 열정이 있었고 호기심이 많았으며누구에게나 항상 질문이 많았다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헌신으로 그는 전투적으로 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그는 터키로 여행했고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서 살았으며스페인 남부에서 로마 공동체와 함께 살았다이탈리아에서는 보르디가를 영어권 세계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로렌은 가는 곳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친구이자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며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계혁명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오만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열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국제주의자 전망의 친구이자 동지였다그가 그리울 것이다.

 

국제주의자 전망(IP)

2024년 4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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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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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양쪽의 끔찍한 이미지는 시청자가 입장을 정하게 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전쟁을 하는 양쪽 진영의 전쟁 선전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ㆍ축제 참석자가자지구 로켓포의 희생자납치된 사람들이 키부침(kibbutzim)에서 학살당한 사진.

ㆍ가자지구 폭격으로 인한 병원구급차학교주택가에 있는 희생자 사진

 

이러한 사진을 보고서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반응은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반응은 공격자나 방어자에 의한 역습으로 대체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반격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 부여는 가족 및 부족 관계로 조직된 농경 사회에서 행해졌던 복수의 도덕성에서 시작되었다노동자와 자본가의 이익 공동체로서의 '국'이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전쟁의 명분으로 이러한 복수의 도덕성에 성공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현재 전쟁에서 양쪽 진영이 모두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과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누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양쪽 모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팔레스타인이 침략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반복해서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약 2,000년 동안 '홀로코스트'무법자로 살아왔다." 전쟁의 명분은 민족주의의 독설로 쓰인 한 민족의 역사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이제 '식민주의'와 '민족 해방 투쟁', 한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보다 더 나쁘다고 얘기하는 '집단 학살이야기도 등장한다학살의 규모를 측정하여 이후의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며 슬픔은 저마다 고유하다파편으로 인한 상처의 고통은 폭격으로 온 가족이 사망한 사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두 경우 모두 전쟁 선전으로 복수심에 호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이는 ‘국과 조국을 내세워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수에 의존하는자신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전쟁의 실제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도덕의 영역즉 오래전에 사라졌지만민족주의 세뇌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 형태에 기반을 둔 도덕의 영역에 속해 있다우리는 100년 넘게 전 지구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진보 없이 노동과 자본의 생산 관계를 강요해 온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반대로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세계 시장이 형성되면서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크고 작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제국주의 블록으로 뭉쳐 직간접적으로(대리인을 통해서로 싸우는 전쟁으로 바뀌었다이러한 전쟁에서 민족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단결시키고전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더욱 압박하고 억압하며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으로 계급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단이다노동계급의 도덕성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다현재 중동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분석에 대한 글은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참조하라.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0/26/the-working-class-and-the-war-israel-palestine/)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함정은 본질적으로 양측의 민족주의 복수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제국주의 사이 전쟁이 지속할수록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람들의 일부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된다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러한 열망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데이는 시민의 자유와도 비슷하다.

 

아랍어권 또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때로는 몇 세대 전에차별을 통해 민족 정서를 갖게 된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민족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덧붙이자면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을 시오니스트가 되게 한 바로 그 기제이다그 결과 여러 유럽연합 국가와 미국캐나다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일부의 사람들이 침략자로 낙인찍힌 승리한 당사자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부와 관계없이 패배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을 주요 피해자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뉴욕 중앙역 복도에서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된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독특한 구호를 내걸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많은 시위대가 체포되었고이는 미국 시민 자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이 사건에 이어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농성이 이어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는데현지 언론은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지난 주말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전국적인 기후에 대한 시위에서 친팔레스타인 발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이제 남은 것은 프랑스유럽연합미국카타르등의 국가가 어떻게든 폭력을 멈출 것이라는 희망뿐이다. '평화'는 여전히 너무 먼 곳에 있다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인도주의적 휴전', '전투 휴전', '정전등 누군가의 승리와 누군가의 패배를 향한 전쟁의 단계에 불과한 일련의 계급 질서에 불과하다정부 지도자들과 의회 정당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군사적경제적이념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위선적인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공교롭게도 미국이 제국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하나 또는 다른 '단계적 완화'와 '중재'를 찬성한다고 말한다노동계급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미국과 네타냐후 진영이 부분적으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이러한 점은 EU 내 충성도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TV 대담 테이블의 모든 가짜 토론과 소셜미디어의 모든 선동은 대중에게 두 전쟁 정당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망치질한다이는 미래의 전쟁나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의도된 행동도 어느 한쪽의 선택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항만노조의 전쟁 물자 적재 거부는 서방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중인 이스라엘 측을 겨냥한 행동이다우크라이나 탈영병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탈영병 등도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중요한 것은 무기 수송 방해와 탈영병에 대한 지원은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 모두를 대상으로 명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안타깝게도 항만노조의 활동은 종종 후자에 해당한다이러한 '행동'에 반영되는 '의식'의 의미는 '식민지배자이스라엘과 '제국주의'(미국)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이란중국러시아)에 대한 지지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반전 선전과 행동은 모든 교전 국가와 그들을 지원하는 초강대국의 제국주의 목표를 폭로하는 데 명백히 기반을 두어야 한다따라서 혁명적 소수는 전선 양쪽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향해 연대해야 하며세계 자본의 모든 분파의 공격에 맞서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발전의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물론 국제주의 입장은 노동계급이 친팔레스타인과 친이스라엘로 나뉘는 잘못된 분열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혁명적 소수가 주장하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전쟁 지역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무엇보다도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간접적으로(대리인전쟁을 지원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에 대한 억압이데올로기적 지배더 많은 착취를 강요하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유럽과 미국에서 전쟁의 한쪽을 지지하는 위의 '전쟁 반대 투쟁'은 전쟁 양측이 모두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적 목표에 봉사하고 있으며둘 다 반()프롤레타리아적 이며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응은 자본의 모든 분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원칙을 침해하는 행동이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은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계급 관계를 바탕으로 노동계급 투쟁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와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계급투쟁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할 수 있지만현실에 기초해 보면 다양한 부르주아적 '해결책'도 마찬가지다물론 가장 '급진적해결책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는 모든 유대인을 멸망시키는 것이지만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두 국가해법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중 하나이다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하나의 국가'라는 해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 상호 증오뿐만 아니라 억압과 착취 세력을 보존하는 각 국가의 분할 및 정복 정책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세계를 계속 지배하는 한지금의 전쟁에 이어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크라이나중동 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주요 쟁점은 계급투쟁이다편의상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도 모든 국가와 전선 양쪽에서 자본과 국가가 의료 및 기타 서비스를 삭감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지배를 강화하면서 착취를 강화하는 등 노동계급을 상대로 계급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는 가자지구헤즈볼라이란중국과 러시아에서 장악한 지역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주변 서방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에 투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는 기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그럴 수 없다'이다노동자들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그것이 자신의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패배로 이어질지라도즉 혁명적 패전주의로 이어질지라도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포기하면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지하 공장과 이스라엘의 지상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느라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친 채 상호 폭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이다.

 

ㆍ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여성이스라엘의 예비군뉴욕의 유대인(센트럴역 농성)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를 진압하고모든 생산 방해 행위를 처벌하며탈영병을 군대로 압송해야 한다.

ㆍ그리고 이란의 철강 노동자들은 '그들정권이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1)

ㆍ그리고 전쟁 경제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는 서방 무기 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레도 코르보(FC)

2023년 11월 17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기사를 기반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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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은 이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아야톨라 정권과 러시아는 중국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는 블록 일부다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고, 하마스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레바논(헤즈볼라), 시리아이라크 등지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란의 좌파 부르주아의 지하 저항 단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정권과 같은...중동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인민'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항상 미국 편에 서는 우파 부르주아 계열의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아야톨라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부르주아들이 정권 전복의 전주곡으로 여겼던 차도르 시위(중산층이 주도당시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중산층 시위의 구호를 따르지 않자 이기적이고 비겁하다거나 경제주의자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이제 이란의 노동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의 정권이나 우파 또는 좌파 부르주아 저항 세력과 달리노동자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진행될 수도 있는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전쟁에서 선택할 수 있는 편이 없다노동자들은 계급 이익을 옹호하고 이란의 모든 부르주아 분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란 국가에 대한 공세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1/17/traps-in-understanding-the-war-in-the-middle-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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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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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선진화된 군대 중 하나가 무방비 상태의 밀폐된 도시 지역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모습을 전 세계가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다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요구와 분노가 확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많은 좌파는 전쟁을 멈추기보다 하마스 편에 서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고 있다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이 대의를 위해 행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하기를 원한다과연 그럴까?

 

하마스 옹호자들은 하마스 군대는 식민지 권력에 대항해 일어선 토착 자유 투사이며, 식민지 전쟁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분쟁은 필연적으로 양측 모두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잔인한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그들은 투쟁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 투사'들의 몫이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특히 백인이고 식민지를 보유했던 국가에 살고 있다면 더 그렇게 주장한다. ‘그들’ 국가의 과거 또는 현재 행동에 대한 수치심은 ()식민지’ 투쟁의 전술과 목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그들은 "저항 세력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위치에 있지 않다.

 

다른 쪽의 옹호자인 시온주의자들도 똑같은 논리를 사용한다과거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된다홀로코스트가 있었고 나크바(Naqba)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잔인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가하는 잔혹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분 관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색이나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나는 1976년 좌파 친구들과 함께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Pol Pot’s Khmer Rouge)를 비판해서는 안 되며우리는 유럽에 사는 백인이기 때문에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던 토론이 생각난다그들에 따르면 크메르루즈는 자유의 투사였고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 지지를 의미했다물론 오늘날에는 아무도 폴 포트의 킬링필드에 대해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물론크메르루즈는 대부분 자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맞다하지만 하마스도 마찬가지다.

 

국제주의자 전망(IP)이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주장했듯이하마스는 10월 7일의 행동이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사망과 파괴를 초래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그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냉정하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하마스의 권력욕 때문에 수천 명의 동료가 희생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가?

 

하마스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와 같은 '자유의 투사'가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누구로부터의 해방이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주민들이 이슬람주의 하마스 국가에 살면 자유로워질까?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무엇을 의미할까?

 

목표와 방법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반대파를 투옥하고 고문하고민간인을 살해하고어린이와 노인을 인질로 잡는 등 하마스가 하는 모든 행위는시민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하마스의 목표를 보여준다지난여름 가자지구에서는 많은 사회적 시위가 있었다. 물전기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하마스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전년도(특히, 2019년 3)에 비해 시위를 덜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10월 7일의 대규모 하마스 공격은 그 더운 여름에 이어 발생했다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하마스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이 행동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팔레스타인 전문가 에밀리오 미나시안(Emilio Minassian)은 팔레스타인의 무력함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수하고 싶은 이중적 분노의 논리를 낳는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국가보다 더 나쁘거나 더 잔인하지는 않다그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비슷한 논리로 행동하고 있다하지만 각자의 방법이 다른 만큼 전술과 전략도 다르다이는 비대칭적인 분쟁이다따라서 그들의 잔인함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한 쪽은 참수를 하고 다른 한 쪽은 융단폭격을 한다둘 다 공포를 심는 것이 주요 목표이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다우리 시대에는 공포가 정치적 무기로 점점 더 보편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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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어디에도 인민’ 이 주인인 나라는 없다모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주인에게 속해 있다인구 대다수를 굶주림과 권력의 부재에서 해방시킨 민족 '해방투쟁의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모든 투쟁은 자본주의 주체 사이의 투쟁이었으며 좌파는 항상 어느 한쪽을 지지했다.

 

가자지구 응징을 집단으로 반대하는 것이 하마스 지지라고 믿는 좌파 단체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북베트남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지지라고 믿었다그 전쟁에서 200만 명이 사망했다베트남은 승리했다이제 베트남은 자신을 해방’ 시킨 국가의 후발 상업 및 군사 파트너가 된 경찰국가가 되었다베트남 노동자들은 이제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공장에서 중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저귀를 차고 일한다이제 베트남 사람들은 하노이에서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펩시를 마실 수도 있는선택의 자유가 있긴 하다.

 

민족 '해방'의 목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그렇게 하면 너무 멀리 갈 수 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체제가 더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식민지 멍에에서 해방된 대부분 국가에서 대다수 사람이 매우 불행하게 사는 것은 민족 해방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방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그러나 그것은 민족투쟁이 사실상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르주아 투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반대로특히 현시대에 민족투쟁은 걸림돌이 된다인종 차별이 내재한 식민지 체제가 철폐된 것은 좋은 일이다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종식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진전이 있었음에도 그 한계를 봐야 한다이 나라는 빈부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실업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으며파업 참가자들을 기관총으로 쓰러뜨리고불법체류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터너와 베이컨

 

하마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거론하는 또 다른 예는 터너(Turner)봉기다냇 터너(Nat Turner)는 1831년 버지니아에서 유혈 봉기를 주도한 노예였다그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백인을 죽이는 것이었다가족 전체가 학살당했다이 학살은 10월 7일 하마스 학살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압제자에게 대항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폭력"이다.

 

그렇게 되면 터너와 하마스는 자신의 의지도주체성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벽이 테니스공을 반사하듯 받은 폭력을 반사하는 자동화 장치에 불과하다마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았다하지만 인종이나 민족 전쟁으로 전개되지 않는 억압에 맞선 봉기의 사례도 있다미국의 첫 번째 주요 봉기는 1676~1677년에 일어난 베이컨 봉기다이 영화에서 가난한 백인과 흑인 노예들은 버지니아의 식민 정부에 맞서 함께 싸웠다그들은 당시 수도였던 제임스타운을 점령했다영국에서 원정군이 도착한 후에야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흑인 노예와 백인 프롤레타리아는 이해관계가 같았다도덕적 측면을 제쳐두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부분으로 베이컨 봉기를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베이컨과 함께 싸운 노예들은 터너를 따르는 노예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투쟁 방법즉 피부색이나 종교보다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계급에 기반을 둔 동맹을 선택했음이 분명하다식민지 권력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베이컨의 봉기는 식민지 권력에 공황상태를 초래했다힘없는 백인과 흑인이 다시 힘을 합쳐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제의 인종적 특성을 강화하고 백인과 흑인 간의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인종 분리주의(apartheid) 제도인 버지니아 노예법이 도입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백인 노동계급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었고오늘날 미국의 흑인 프롤레타리아트도 이러한 인종을 넘어서는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지원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그리고 그들은 터너처럼 최대한 많은 유대인을 살해해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베이컨 봉기 이후 권력자들이 백인과 흑인을 갈라놓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던 것처럼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권력을 장악한 시오니스트와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프롤레타리아가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반()식민지 전쟁인가?

 

이스라엘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원래 살고 있던 거주민 대부분이 쫓겨난 땅에 대부분 유럽의 백인들이 정착하면서 탄생한 국가이다각기 다른 해의 지도를 나란히 놓고 살펴보면 두 나라의 성장과 원주민의 영토가 축소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원주민 추방은 계속되고 있다이는 최근의 강경 우파 네타냐후 정부 하의 서안 지구에서 가속화되었으며현재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정착민들과 함께 광신적인 군대처럼 과도하게 추진되고 있다미국이 인디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오니스트 국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호구역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는 식민지 권력이 아니라 이미 영토를 확보한 국가이다국가가 하는 일은 그들을 분리해서 국가의 지배를 보장할 수 있는 다른 구역으로 밀어 넣어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은 비슷할 수 있지만식민지 전쟁은 아니다하지만미나시안(Minassian)이 지적했듯이 다음과 같은 유럽 식민주의와 이데올로기적 유사성도 있다.

 

"이스라엘은 인종적 기준에 따라 노동자를 '동물화'하여 문명 세계와 문명 이전 세계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유럽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이 논리에 따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있다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즉 이 지역에서 인간 집단을 구분하는 위계를 상기시키기 위해 다른 정치적 목적 없이 폭탄에 의해 매몰되고 있다개가 물면 무리를 향해 총을 쏘게 된다." 그는 "문명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유동적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덧붙인다그들은 이스라엘-유대인 시민권이 있었고 스스로 활동하고 있다아랍계 유대인(미즈라히)이나 에티오피아계(팔라샤)는 오랫동안 울타리의 반대편에 있었으며 다른 원주민을 달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원주민을 보조하는 군대였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은 토착 사회 상류층 관료들이 이끄는 토착민과 국가를 통제하고 국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국 세력 사이의 전쟁이다미나시안은 두 나라 사이의 투쟁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며그런 의미에서 이 분쟁은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사실상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도시들은 빈곤한 변두리 지역으로하나의 국가하나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다가자지구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 화폐이스라엘 제품이스라엘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다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는 똑같이 전체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서안지구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이스라엘과 식민지에서 일한다그들은 종종 히브리어를 사용한다미나시안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서안지구의 한 난민 캠프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저녁 내내 들은 적이 있었는데그들은 이스라엘 수도의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인종분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즉 건설 발주자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점령지에서 노동자 모집은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감독관은 아랍어를 구사하는 세파르드(Sephardic) 유대인 등 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그리고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주 프롤레타리아들도 있다태국인중국인아프리카인 등 미등록 이민자로서 실제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이 그룹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각 그룹은 생산 관계에서 고유한 지위와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이스라엘은 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당시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한 덕분에 경제가 성장하고 고도로 발전한 국가가 되었다그러나 1980년대에는 1983년 주식 시장 폭락, 1984년 445%의 인플레이션기록적인 국제수지 적자 등 급격한 성장세가 주춤했었다그 후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이주가 이루어졌다이러한 전개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 산업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전보다 훨씬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팔레스타인 실업률이 치솟게 되었다이스라엘은 첨단기술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다른 선두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용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다이런 측면에서 미나시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제를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 가두어 두고 현지 하청업체에 관리권을 넘기는 분리 정책이었다.

 

"이 거대한 울타리민족-종교적으로 유용한 프롤레타리아와 잉여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하는 이 작업은 평화 과정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실제로는 불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외부화되는 과정이었다"라고 미나시안은 말한다따라서 식민지 분쟁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토착민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의 중심지 특유의 비율로 잉여 프롤레타리아 인구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이스라엘에서 노동 계약을 맺은 모든 노동자 외에 팔레스타인이 관할하는 폐쇄된 대규모 교외 지역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있다이들은 거의 5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텔아비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갇혀 매일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고 있으며우리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가자지구는 서안지구의 도시나 난민 캠프보다 이스라엘 경제의 쓰레기통과도 같은 곳이다이스라엘의 청년 실업률은 70%를 넘어섰다(현재 침공 전). 이러한 남아도는 노동자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극빈층으로 살아가고 있다이 돈은 하부 조직인 하마스와 이른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분배되며이들은 주로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다른 준군사조직을 제압하는 등 다른 국가 기능도 수행한다하부조직들은 환멸을 느낀 팔레스타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실추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항하여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미나시안에 따르면우리는 하마스의 전략에 대한 해석을 찾아야 한다하마스는 스스로 "불명예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한다이것은 해방 투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역 분쟁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내부 역학 관계는 이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다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미국과 그 도전자들 간의 지정학적 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대부분의 유럽 식민지 체제가 종식되면서 탈식민지화의 물결과 함께 이루어졌다둘 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 세계 권력이 이동하면서 발생한 결과이다강력한 무기를 갖춘 미국 군대를 보유한 군사화된 백인 식민지는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계획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석유 자원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미국에 이스라엘의 중요성도 커졌다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 틀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는 일을 결정한다이러한 의미에서도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사이 분쟁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인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란에 대항하는 강력한 친미 동맹을 형성하려는 미국의 정책도 중요한 요소였다이란은 미국이 IDF를 지원하듯이 하마스(보다 온건한 정치세력은 카타르가 자금을 지원함)의 군부를 지원하고 있다전쟁에 사용된 돈과 무기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조달되었다사상자만 지역 사람들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관점의 부재와 그 위기가 심화할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한 바 있다구조적 위기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현재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군비 지출과 군사 분쟁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우크라이나아프리카카라바그그리고 현재 가자에서 얼어붙은 전선이 녹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새로운 분쟁이 아니라 기존 분쟁이 갑자기 고조되는 상황이다앞으로 몇 년 동안 더 많은 화약고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력 중 쓸모없는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가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서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이스라엘이 그러한 부분에서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미나시안에 따르면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 아니라 중심지역 축적 블록의 일부인 민주적이고 문명화된 국가가 전면전에 상응하는 군사적 수단으로 남아도는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하는 것"이다그는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수천 명의 죽음은 "다가올 자본주의 위기의 끔찍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전쟁의 역할이 커지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군인과 '자유의 투사'를 존경하고대량 학살에 박수치거나 눈감고조국을 위한 죽음과 파괴를 정상으로 여기며평범한 사람들이 항상 패자가 되는 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법을 배우는 시대이다.

 

해방은 전쟁과 공격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부색이나 신앙과 관계없이 함께하는 노동자의 공동 이익에 대한 연대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이를 실현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진정한 해방을 방해한다무엇보다도 민족주의민족-종교적 또는 인종적 이유로 사람들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따라서 팔레스타인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팔레스타인은 강에서 바다까지 해방될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은 전쟁을 멈추라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다전쟁에서 싸우는 대신 전쟁을 멈추는 것지금 가장 먼저 요구해야 할 사안이다지금 당장 휴전하라이제 인질들을 석방하라이제 가자 지구 봉쇄를 해제하라서안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을 당장 멈추어라()유대주의도이슬람 혐오도 반대한다고통도유혈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연대를 구축하자!

 

샌더(Sanderr)

2023년 11월 15

국제주의자 전망(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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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warmongers-left-and-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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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4강>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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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4강>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강사 ㅣ 이형로

일시 ㅣ 2024년 7월 2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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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침머발트 선언문(1915년)

침머발트 선언문(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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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노동자여!

 

1년 이상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전장에는 수백만 구의 시체가 널려 있고수백만 명이 장애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유럽은 거대한 도살장과 같다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으로 이룩한 문명 전체가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자부심이었던 모든 것에 대하여 야만이 승리하여 이를 자축하고 있다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진실과 관계없이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전쟁이 각국의 자본가계급이 전 세계의 노동력과 천연자원을 착취하여 이윤에 대한 탐욕을 채우려는 제국주의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나 정치적으로 약한 국가는 강대국에 예속하고강대국은 전쟁을 이용해 자신들의 착취적 이익에 따라 유혈과 철권으로 세계 지도를 다시 만들려고 한다벨기에폴란드발칸 반도 국가아르메니아와 같은 민족과 국가 전체가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분할되어 병합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전쟁의 원동력이 완전히 악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이 세계 재앙의 본질을 대중의 인식에서 감춰왔던 장막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민중이 흘린 피에서 전쟁 수익이라는 붉은 금을 만들어 내는 모든 국가의 자본가들은이 전쟁이 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는 거짓말이다실제로 그들은 다른 나라의 독립과 함께 자국민의 자유를 파괴의 현장에 묻어버리고 있다승자와 패자 모두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짓누를 새로운 족쇄새로운 사슬새로운 짐이 생겨나고 있다전쟁이 발발했을 때 생활 수준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지만실제로는 빈곤과 궁핍실업과 인플레이션영양실조와 전염병이 발생했다전쟁 비용을 지불하는데 사회 개혁의 성과를 훼손하고 모든 진전을 방해하며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하게 할 것이다.

 

지적도덕적 황폐화경제적 재앙정치적 반작용 등 국가 사이의 끔찍한 분쟁이 불러온 폐해다.

 

따라서 전쟁은 노동 대중의 이익역사적 발전의 환경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동의 존재라는 인간의 첫 번째 조건과도 화해 할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세력손에 운명을 쥐고 있는 국가군주제 및 공화당 정부비밀 외교방대한 사용자 조직중산층 정당자본주의 언론교회이 모든 세력은 그들을 키우고 보호하는 사회 질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되고 있는 전쟁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착취당하고권리를 박탈당하고멸시받던 여러분은 전쟁 발발 당시 형제이자 동지로서 인정받다가 혼란스러운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제 군국주의가 여러분을 손상하고상처입히고타락시키고파괴했을 때지배자들은 여러분에게 이익목표이상을 포기할 것을한마디로 "국가 휴전"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여러분은 자신의 견해감정고통을 표현할 수 없으며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투쟁할 수 없다언론은 재갈을 물리고정치적 권리와 자유는 짓밟히고 있다이처럼 철권통치를 하는 군부 독재 정권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유럽과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상황을 더는 방관할 수 없으며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다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노동계급은 군국주의에 맞서 투쟁을 계속해 왔다불안감이 커지면서 국내 및 국제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제국주의 결과로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전쟁의 위협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슈투트가르트코펜하겐바젤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에서 노동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길을 결정하는 데 참여했던 우리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계급 조직은 전쟁 발발 이후 그에 따른 의무를 무시했다그들의 대표들은 노동자에게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하고 효과적인 수단에 해당하는 노동계급 투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그들은 전쟁을 계속한 지배계급의 공로를 인정하는 투표를 했다그들은 매우 다양한 서비스를 위해 그들의 정부에 의지했다그들은 언론과 특사를 통해 각국 정부 정책에 대한 중립국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그들은 국가의 휴전 준수를 위해 사회주의 장관들을 정부에 인질로 바쳤으며따라서 이 전쟁과 그 목표방법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당들이 개별적으로 실패한 것처럼모든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을 대표했던 국제사회주의서기국(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도 실패했다.

 

이러한 사실은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비록 그 일부가 제1차 세계대전의 국가적 공황에 희생되지 않았거나 공황을 극복하고 일어선 곳에서도국가 학살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지금도 모든 나라에서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동시에 벌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함께 만났다우리는 사회주의당노동조합 또는 그 소수파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루마니아불가리아스웨덴노르웨이네덜란드그리고 스위스 사람들을 대표한다착취계급과의 국가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계급 투쟁의 국제적 연대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서 있다우리는 국제 관계의 끊어진 유대를 새롭게 연결하고 노동계급을 재조직하고 평화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모였다.

 

이 투쟁은 또한 자유형제애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우리의 임무는 합병이나 전쟁 배상금이 없는 즉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그러한 평화는 국가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사상이 척결될 때만 실현될 수 있다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점령당한 국가에 대한 강제 편입이 없어야 한다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합병은 안 되며정치적 권리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더욱 견딜 수 없는 강제적 경제 결합도 용납될 수 없다.

 

조직 노동자들이여!

 

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당신은 지배계급에 봉사하기 위해 에너지용기용감함을 발휘했다이제 자신의 대의를 위해사회주의의 신성한 목표를 위해피억압 국가와 노예 계급의 구원을 위해화해할 수 없는 노동계급 투쟁을 통해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다.

 

모든 힘을 다해 이러한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 교전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자 의무이다피비린내 나는 야만과의 싸움에서 모든 효과적인 수단으로 형제들을 지원하는 것이 중립국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자 의무다.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이보다 더 시급하고이보다 더 귀중하며이보다 더 숭고한 임무는 없었으며공동으로 이를 완수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사실은 틀림없다국가 사이 평화 구축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너무 크지 않으며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일하는 남자와 여자어머니와 아버지홀어미와 고아다친 사람과 장애인!

 

전쟁으로 인해 또는 전쟁의 결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외친다국경 너머연기가 자욱한 전장 너머황폐해진 도시와 마을에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의 이름으로

 

독일 대표단조지 르데부르(George Ledebour), 아돌프 호프만(Adolph Hoffman)

프랑스 대표단 : A. 부르데론(A. Bourderon), A. 메르하임(A. Merrheim)

이탈리아 대표단 : G.E. 모딜리아니(G.E. Modigliani), 콘사니노 라자리(Consanino Lazzari)

러시아 대표단: N. 레닌(N. Lenin), 폴 액셀로드(Paul Axelrod), M. 보브로프(M. Bobrov)

폴란드 대표단세인트 라핀스키(St. Lapinski), A. 바르샤바키(A. Warski), Cz. (야곱하네키(Cz. (Jacob) Hanecki)

사회주의 연맹: (루마니아 대표단) G. 라코프스키(G. Rakovsky) (불가리아 대표단바실 콜라로프(Vasil Kolarov)

스웨덴 및 노르웨이 대표단: Z. 호글룬드(Z. Hoglund), 투레 네르만(Ture Nerman)

네덜란드 대표단: H. 롤랜드 홀스트(H. Roland Holst)

스위스 대표단로버트 그림(Robert Grimm)

 

1915년 9

 

 

1915년 9월 스위스에서 침머발트(전쟁 반대회의가 열렸다비록 42명의 대표만이 참석했지만(트로츠키에 따르면 4명의 지도자가 모두 참석했다고 한다), 이 회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인인터내셔널의 토대를 마련했다.

 

 

좌파의 선언

 

서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번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문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선언문에는 공개적인 기회주의나 급진적 문구 속에 숨어 있는 기회주의즉 인터내셔널 붕괴의 주요 원인뿐만 아니라 그 붕괴를 지속하려는 기회주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선언문에는 전쟁에 맞서 싸우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 언론과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제국주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직면하게 한 과제에 관해 분명한 맑스주의적 입장을 계속 옹호할 것이다우리는 이 선언문을 투쟁에 관한 요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찬성한다그리고 투쟁에서 우리는 인터내셔널의 다른 부문과 함께 나란히 행진하기를 열망한다우리는 이번 선언문을 공식 절차에 포함할 것을 요청한다.

 

서명: N. 레닌(N. Lenin), G. 지노비예프(G. Zinoviev), 라덱(,Radek) 네르만(Nerman) 호글룬드(Hoglund), 윈터(Winter)

 

 

 

<관련 글> 침머발트 좌파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9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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