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보안법 위반 혐의 재판 등 실제 내 모습과 너무 닮아”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67)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대부다. 그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에서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국가변란 선전·선동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5월부터는 사노련 대신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 그가 요즘 ‘외도’할 생각에 들떠 있다. 오는 12월 시연되는 연극 <반도체 소녀>에서 교수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소녀>는 용산참사를 다룬 <리스트>를 지난 1월 공연해 관심을 모았던 극단 ‘날’의 신작이다.
오 교수는 <반도체 소녀>를 “올 한 해 노동계 이슈를 총정리하는 사회극”이라고 소개했다. 연극에는 올해 노동계에서 부각된 다양한 문제가 등장한다. 주인공 격인
대학원생의 여자친구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로 일하다 해고당했고, 매형은 기아차 모닝을 만드는 하청업체 동희오토의 노동자다. 간호사인 누나가 돌보는
백혈병 환자는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다.
연극에서 오 교수가 맡은 역할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강의를 하고, 지친 노동자들에게 ‘파업가’를 불러주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다. 대본을 쓴 최철씨는 “애초에 오 교수님을
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대본을 읽어 보니 이 ‘교수’가 내 실제 모습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흔쾌히 응했다. 더 늙으면 하고 싶어도 못할 것 아니냐”며 웃었다.
오 교수가 걱정하는 건 딱 한 가지다. 12월 중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1심 판결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된다. 오 교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민중운동을 함께해온 작가 유민용씨(64)를 교수 역으로 끌어들였다. <반도체 소녀>에서 2명을 섭외한 배역은 교수 역이 유일하다.
오 교수의 부모는 일제시대 사회주의 연극운동을 했다. 해방 후 어머니(박노경 전 이화여대 교수)는 ‘여인소극장’을 만들어 연극운동을 이어가다 한국전쟁 때 국군에게 총살당했다. 영문학자이던 아버지(오화섭 전 연세대 교수·작고)는 꾸준히 외국 작품을 번역해 소개했다. “코흘리개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연극을 접했다”는 오 교수는 연세대 재학 시절에도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다. 누나 오혜령씨(69)도 1960~70년대 필명을 날린 극작가다.
오 교수는 마르크스 연구자이면서 상아탑에만 머물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직접 뛰어든 드문 인물이다. 그를 ‘늦깎이 운동가’로 만든 것은 87년 제자 이한열(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년)의 죽음이었다.
장례식에서 교수 대표로 조사를 읽은 그는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대학 연극 동아리를 떠난 뒤 47년 만에 무대에 서는 오 교수는 이번 공연에 대해 “어머니가 업으로 삼았던 연극운동과 어머니의 60주기를 기리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11월 초 연습이 시작되는 대로 동료 배우들에게 연극에 등장하는 현장에 가보자고 할 계획이다. 삶은 연극보다 ‘리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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