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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6/10
    [코뮤니스트 22호] 문화 전쟁에서 모험: 비평
    자유로운 영혼

[코뮤니스트 22호] 문화 전쟁에서 모험: 비평

문화 전쟁에서 모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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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라 미디어(Novara Media)의 객원 편집자인 애쉬 사카(Ash Sarkar)는 올해 “문화 전쟁에서 모험(Adventures in the Culture Wars)”이라는 도발적인 부제를 단 첫 번째 저서 󰡔소수자의 지배󰡕(Minority Rule)1)를 출간했다. 노바라 미디어는 2011년에 설립되어 학생 운동2) 이후에 자율주의적 경향의 뉴스와 정치 분석을 제공하는 매체로 두각을 나타냈다.3) 그러나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노동당 대표로 재임하는 동안(2015-2020년) 코빈의 지도력에 열정적으로 몸을 바쳐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면서 이들의 인지도는 크게 상승했다. 5년 전 코빈이 사임한 이후 사카와 그녀의 노바라 동료들은 다시 당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기회주의적이던 시절의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사카는 자신의 정치를 “자유의지 코뮤니스트(libertarian communist)”로, 자신의 분석 체계를 “맑스주의자”로 묘사하는데, 아마도 TV 프로그램 “굿모닝 브리튼”에서 짜증이 폭발하여 자신은 “코뮤니스트”이며 피어스 모건(Piers Morgan)은 “바보”라고 선언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4) 사카는 󰡔소수자의 지배󰡕에서, 지난 수십 년간 대중의 분노를 조장하고 표출시켜 우리 모두를 서로 대립하게 하고, 당면한 실제 문제에서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데 있어 미디어가 수행한 역할을 분석한다. 필연적으로 좌익과 우익 모두에서 나타나는 정체성 정치는 이 역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이는 사카의 조사에서 중심 주제를 형성한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

 

사카의 출발점은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그녀는 자신이 정체성 정치의 혁명적 본질이라고 제시하는 것을 좌파가 자유주의적 일탈로 왜곡하여, 최근 몇 년간 정체성 정치가 반(反)생산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사카는 좌파 환경―여기서 조직화 시도는 “억압 올림픽”5)에 의해 탈선되었다―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경험을 회상하고, 개인적 경험과 피해 의식에 대한 집착이 집단 프로젝트에서 적극적으로 파괴적인 역할을 해온 일반적인 경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콤바히 리버 콜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 CRC)와 블랙 팬서 파티(Black Panther Party, BPP) 같은 그룹과 대조한다.6) 사카는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CRC 성명서(1974년 작성, 1977년 발표)로 돌아가서, 정체성 정치의 본래 의도가 집단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혁명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오늘날 좌파의 정체성 정치와 비교하면서, 사카는 후자에 만연한 세 가지 핵심적인 해로운 사상, 즉 “생생한 경험”의 우위,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대한 강조, 그리고 당연한 듯 받아들인 “상충하는 이해관계”라는 가정을 제시한다.(32쪽) 우리의 이해관계가 다양한 정체성 범주에 근거하여 서로 상충하며, 우리의 차이가 노동자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실제로 연대에 파괴적이며, 사카가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분명히 올바른 것이다. 또한, 사카가 지적했듯이, “생생한 경험”을 탁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사회자본”7)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피해 의식을 만들어낸 조건을 바꾸기보다는 피해 의식을 고수하려는 비뚤어진 동기”를 창출했다.(65쪽)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그녀가 정체성 정치의 혁명적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사카의 주장은 훨씬 더 불확실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CRC의 경우에는 이것이 그들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그들은 “가부장제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정치경제 체제의 파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8) 그들은 “인종, 계급, 성적 억압을 분리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흑인 여성들에게 이러한 억압들은 “대부분 동시에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페미니즘과 반(反)인종주의 운동의 “정치적 기여”에 의존하는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개인적 경험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꽤 명백하다. 그들은 “억압의 문화적, 경험적 본질을 탐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따라서 이러한 경험이 그들 정치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게다가 자칭 “맑스주의자”로서는 다소 당혹스럽게도, 사카는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이 “노동계급을 ‘인종도 성별도 없는 노동자로만’ 생각했다”라는 CRC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특정 부분이 억압받는 구체적인 방식을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며, 최고로 중요한 일이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 자신도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당대에 여성이나 이주민이 착취당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더 광범위한 노동계급 내에서 이것이 지니는 역학관계를 반복적으로 지적했다.9)

 

그리고 맑스주의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억압에 반대하는 데 있어 “동시성”이라는 상당히 기본적인 개념보다 훨씬 더 적합한 이론적 도구를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억압이 단순히 서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역사적 과정―계급 사회의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카는 나중에 이 문제를 어느 정도 다루지만, 인종 개념과 관련해서만 다룰 뿐인데, 그녀는 이 인종 개념을 노예제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중에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영속화된 “기술”이라고 설명한다.(237쪽)

 

게다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가 보아왔듯이, 소수 집단의 동화는 지배계급의 구명 세트에서 소외만큼이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소외 경험은 누군가를 혁명적 관점을 채택하도록 이끌 수 있지만, 소수자라는 정체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보기를 들자면, 오늘날 흑인 레즈비언이면서 동시에 CEO가 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체성에 기반을 둔 주장은 자연스럽게 개량주의적 막다른 골목(단일 쟁점 캠페인, 대표성 요구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개량주의로부터 “정체성 정치”를 구출하려는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정체성 정치의 발전은 정체성 정치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논리적 귀결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노동계급의 다양한 부문이 겪는 구체적인 억압과 착취에 대처하기 위한 토대는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여야만 하며, 동화와 개혁을 목표로 하는 계급 혼합적, 분파적 정치에 대한 다원주의적, 기회주의적인 양보여서는 안 된다.

 

제국주의

 

개량주의로 향하는 이러한 내재적 경향을 고려할 때, 정체성 정치의 논리적 종착점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채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며, 비록 (곧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사카의 분석은 부족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자본가의 위선을 지적한 것은 올바르다. 그녀는 특히 코카콜라와 CIA가 교육과 마케팅에서 교차성을 수용한 사례를 언급하며, 코카콜라가 미시간주 플린트의 지속적인 식수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주에서 이득을 취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또한, CIA가 자신을 반(反)차별주의자라고 광고하면서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지정학적 적대국들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사카는 이 문제를 제국주의라고 명명했고, 그녀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카, 또는 적어도 이 책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는 영국, 미국, 그리고 그 동맹국들의 제국주의 정책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단지 한 국가나 국가 블록의 정책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모든 국가가 한 세기 넘게 그 안에서 운영되어야 했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국면이며, 모든 국가의 외교 정책을 좌우하는 어쩔 수 없는 원동력이다. 학생운동 이후 좌파의 베테랑이자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칭하는 사카가 맑스와 엥겔스가 정교화하고 이후 부하린과 레닌이 제국주의 이론으로 발전시킨 방법론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적잖이 거만한 짓일 것이다.10)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의 지배󰡕의 제국주의 비판에서 그것들이 빠진 것은 더욱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그녀가 지적하는 많은 문제를 훨씬 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기를 들어, 생산과 분배 수단이 점점 더 적은 수의, 점점 더 큰 조직(아마존, 구글, 메타 등)의 수중에 집적되고 집중되고 있는 현재의 경향은 “사유화가 [아닌] 인클로져”로 나아가는 (바루파키스의 표현으로)11) “봉건제적 전환”으로 설명된다.(258-60) 그러나 금융화·투기·국가개입이 증가함과 더불어 독점적 소유로 나아가는 이러한 경향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모호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한 세기 넘게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를 규정해 온 바로 그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교조주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을 빈곤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세력이 어떻게 세계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과 동일한지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더욱 완전한 정의는, 이러한 경제적 발전이 생산양식 측면에서 퇴보가 아니라 더욱 깊은 심연―이 체제가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고 있다―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임을 보여준다.

 

우파의 정체성 정치

 

그러나 “좌파”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의 지배󰡕의 끝이 아니며,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도 아니다. 대신에 사카는 언론의 문화 전쟁에 대한 좌파의 부적절한 대응을 다룬 후, 이 문제를 추적하여 자본의 우파가 “전통 매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애초에 그것들을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되짚어본다. 여기서 그녀는 다양한 우파의 주장에 내재해 있는 환상과 오류를 분석하고, 왜 그것들이 일반 대중에게 그토록 큰 지지를 얻었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간다. 마케팅 방식―사카의 통제력이 명백히 제한된 부분―과는 달리, 이 부분은 실제로 󰡔소수자의 통치󰡕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첫 번째 장이 없었다면 (사카가 자주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 ‘담론’의 언어와 유머는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지만) 분석과 메시지 측면에서 훨씬 더 광범위한 타당성을 지녔을 것이다. 여러 직장으로 확대되며 점점 더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다양성과 포용성 교육 외에도, 사르카르가 능숙하게 보여주듯이, 대부분 노동계급은 교차성을 둘러싼 토론을 접하기보다는 우리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우익의 논지를 더 많이 접하게 된다.

 

사카의 두 번째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다. 문화 전쟁은 자본가 계급, 특히 우익이 조종하는 미디어의 산물이며, 우리의 불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문제는 자신과 그들의 체제가 아니라 서로에게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가 다양한 홍보 영상과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소수 엘리트 집단―우리가 들어왔던 그런 집단이 아니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사카는 지난 40여 년간 영국 노동계급이 겪은 경험―계급투쟁 물결의 붕괴, 영국 중공업과 복지국가의 해체, 소규모 재산·사업체 소유로 점진적 전환 등―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자본가들, 특히 자본의 우익과 언론(이 시기 대부분 동안 권력을 누려온 것은 맞지만, 여기서 그녀는 자본의 좌파가 수행한 역할을 축소하여 언급한다)이 어떻게 이러한 과정을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에 맞춰 조종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은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해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의심을 품게 되었다.

 

사카가 보여주듯이,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의 연대를 체계적으로 약화함으로써 혼란의 씨앗을 뿌렸는데, 오늘날 그들은 우파와 좌파의 정체성 정치 사이의 문화 전쟁이라는 형태 속에서 그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사카는 이주와 성 정체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최근의 도덕적 공황을 하나하나 조금씩 살펴본다. 또한, 그녀는 주류 언론의 변화―한때 “맹목적인 유행 추종자들”로 조롱받고 무시당했던 영국 노동계급이 이제는 조작된 위협(이주민, 성전환자 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백인 노동계급”으로 변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카는 장막을 걷어내고 환상 기계의 다중 레버를 맹렬히 잡아당기고 있는 사기꾼들을 폭로함으로써, 노동계급 전체―이러한 도덕적 공황이라는 허구의 분열 양쪽에 나뉘어 있다―가 서로 분열하여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정확하게 강조한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과 조건에 대한 공격은 나중에 백인 영국 노동자들에게도 확산한다. 그리고 “젠더 이념”에 맞서 싸우는 것처럼 포장된 의료 서비스에 대한 공격은 필연적으로 시스젠더(cis: 생물학적 성과 성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옮긴이)와 트랜스젠더 모두의 의료 서비스에 영향을 미친다.

 

사카는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소셜 미디어의 새로운 기술 발전이, 우리의 주의와 사고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독점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에 주목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모든 시대에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라고 지적한 이래, 우리의 사고 자체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속적인 지배의 본질은 상당히 변화했다. 맑스와 엥겔스 시대에, 이러한 지배는 빈곤층과 노동계급의 기초 문해력이 비교적 최근에야 나타난 현상이고 그 이상의 교육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지난 18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문해율이 상승했고, 처음에는 신디케이트 저널리즘의 형태로 그다음에는 소셜 미디어의 형태로 대중 매체가 급격히 늘어났다. 사카는 소셜 미디어가 “부분적으로, 그러나 극적으로 공적 영역을 민주화”했으며, 그 효과는 “놀랍고도 매우 우울”했다고 말한다.(83쪽)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모든 자본주의적 “민주화”와 마찬가지로, 사회 영역에서 평등한 참여라는 약속은 자본의 이해관계가 다양한 참여자들의 영향력을 끊임없이 조작하는 방식의 현실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

 

그러나 사카의 설명에는 자본주의의 작동에 내재한 위기의 본질은 빠져 있는데, 이는 이러한[정부의] 정책과 전술이 연이은 우익과 중도 정부의 악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이윤율이 하락함에 따라 자본가 계급은 이러한 경향을 상쇄하는 동시에 경제적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가능한 한 큰 비용을 노동계급에 전가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노동계급의 실업, 빈곤, 비참함을 수반하는 주기적인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존재에 있어 불가피한 부분이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서, 새로운 축적 사이클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본 인프라의 대대적인 파괴는 결국 전쟁, 즉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 번째 세계적 축적 사이클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 따라서 중공업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해체되어 임금 노동이 더 저렴한(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낮은) 주변부로 이전되었다. 따라서 모든 곳에서 인플레이션 대비 임금이 하락 압력을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임금이 감소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동시에 노동계급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정부들의 정책과 전술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표현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사카는 단 한 번, 자본주의가 위기로 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경향을 “새로운 시장에 대한 끝없는 욕구”라고 설명한다.(7쪽) 그러나 새로운 시장에 대한 이러한 욕구―분명 자본주의에 내재한 위기의 특징―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본론󰡕 3권에서 아주 분명하게 밝혔듯이, 이 동력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이며, 자본의 끊임없는 “새로운 시장” 추구는 이윤율의 저하와 동의어가 아니라 그 증상이다. 이 말이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이 위기의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기를 들어, 사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 즉 영국 사회민주주의의 전성기에 대한 향수를 해로운 환상으로 정확하게 규정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녀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계급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는 매우 간단”하다고 묘사하고 난 후, 그 시대를 정의했던 케인스주의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제안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복지와 공공 서비스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윤을 쥐어짜고, 임금을 끌어올릴 의향이 있다면”, 198쪽). 일회성 발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는 실상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것이 사카가 말하는 “코뮤니즘”(우리는 그것이 코뮤니즘이 아니라고 가정한다)가 이런 의미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양보적 개혁이 어떻게 그리고 왜 도입되는지,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개혁을 약속하는 좌익 정당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집권하는지에 대한 본말이 전도된 오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코빈주의(Corbynism: 코빈은 영국 노동당 내 좌파로 당대표를 지냈다―옮긴이)의 실패는 이러한 이유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스타머의 노동당 정부와 그 이전의 블레어 정부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상당히 강경했지만, 코빈 운동의 종말에 대한 사카의 분석은 대체로 전략상의 오류와 다른 정치 세력의 반대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점에 국한되어 있다. 사카는 자신과 노바라 동료들이 이 시기에 근본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전략을 추구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이 시기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순진했고 궁극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좌파의 혼란과 환상을 심화시키는 데 있어 사카와 노바라가 수행해 왔고 지금도 계속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그들에게 정직한 심판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 견해에서도 똑같이 순진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소수자의 지배󰡕가 좌파주의, 즉 개량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카는 이 책 (그리고 그녀의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자신을 “코뮤니스트”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그녀가 지적한 실제 문제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사카는 󰡔소수자의 지배󰡕에서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것으로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주장이 담고 있는 실제 정치적 내용은 필연적으로 개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후퇴하고 만다. 우리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의 조건을 방어하고 개선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집단적 힘을 다시 배우고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는 자본가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계급으로서 자신의 공동 이익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먼 과거부터 최근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러한 개혁을 허용한 것만큼이나 쉽게 철회할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이해관계는 임금과 복지보다 군비 지출이 우선이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투쟁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와 이 독특한 위치가 부여하는 역사적 사명,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무덤을 파는 자의 사명을 이해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자본 좌파의 환상을 고려할 때, 사카가 정치가 “관중 스포츠가 되었다”(12쪽)라고 불평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체제의 범위 안에서 모든 “민주주의”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소수를 위한, 유산계급만을 위한, 부자만을 위한 민주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노동계급이 우리의 권력을 어떤 사람들과 단체들에 위임하는 것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단체는 우리를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착취하는 계급,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려면, 부르주아 팬터마임과 공통점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해 명확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역사적으로 자기 조직화한 대중 계급투쟁의 경험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독립적인 계급 통치 기관―대중 집회, 파업위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평의회(또는 소비에트)―을 통해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대 미디어에서 날조된 분노에 대한 간략한 역사로서, 󰡔소수자의 지배󰡕의 핵심에는 동의하지 못할 부분이 거의 없다. 우파가 유리한 곳에서 우파를 이기기 위해 문화 전쟁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지를 거부하고 우리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우리만의 의제를 설정하고 분열을 더 큰 분열이 아닌 연대로 극복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그녀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장점은 그 약점과 분리될 수 없는데, 이 책의 요점은 “좌파”의 정치와 전략이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좌파”의 일부가 아니라 노동계급 일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그것을 지배하는 계급을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그 대신 계급, 국가, 화폐가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소수의 계급 일부이다. 우리가 코뮤니즘이라고 부르는 이 사회는 소련과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괴물들이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계급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다른 어떤 민족 국가와도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혁명적 수단에 의해 초래된 이 사회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를 아우르지 않으면 실패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혁명은 노동계급이 이끌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주도하에 우리만의 독립적인 영역에서 조직되어야 하며, 우리를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착취자들이 그어놓은 자의적인 차이의 선들―인종, 성별, 성적 지향, 종교, 그리고 그들이 생각해 낸 다른 모든 것―을 넘어 단결해야 한다.

 

2025년 6월

틴코트카(Tinkotka)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혁명적 전망」 26호

 

<주>

 

1. (옮긴이 주)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인 ‘다수 지배’에 대립하는 ‘소수 엘리트의 지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젠더 같은 영역의 소수자가 서구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역설적인 제목이다.

2. (옮긴이 주) ‘학생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들이 주도한 좌파 운동(이후 신좌파)을 언급하는 말로 보인다. 이 운동은 민주주의, 시민권, (대학)개혁 같은 문제를 중요시했는데, 노바라 미디어는 그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3. ‘노바라’라는 명칭은 엘리오 페트리(Elio Petri) 감독의 1971년 영화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The Working Class Goes to Heaven)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피에몬테(Piedmont) 지역의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다.

4. “코뮤니즘”의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후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5. (옮긴이 주) 어떤 집단이 가장 억압받고 있는지 경쟁적으로 따져보는 것.

6. 아사드 하이더(Asad Haider)는 2018년에 출간한 책 󰡔잘못된 정체성: 트럼프 시대의 인종과 계급󰡕(Mistaken Identity: Race and Class in the Age of Trump)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쳤는데, 당시 우리는 이 책을 리뷰하면서 CRC와 BPP에 깃든 스탈린주의의 유산을 비판했다. leftcom.org.

7. (옮긴이 주) 사회자본이란 사람들 사이의 연계와 네트워크가 중요한 자산이 된다는 개념이다.

8. CRC 성명서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americanstudies.yale.edu.

9. 보기를 들어, 맑스의 󰡔자본론󰡕과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흑인 노예제와 아일랜드 이주민에 대한 논평을 볼 것. 여성 억압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분석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참고할 것.

10.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그리고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볼 것.

11. (옮긴이 주) à la Varoufakis: 그리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는 오늘날을 ‘테크노 봉건주의’ 사회로 묘사한다. 거대 기술 기업이 세계를 자신들의 봉건적 영토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5-08-26/adventures-in-the-culture-wars-a-review-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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