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자유로운 영혼

조직보위와 정치적 계산을 넘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출발하기를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12/08 08:11
  • 수정일
    2014/12/08 08:11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조직보위와 정치적 계산을 넘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출발하기를
- 기호 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과 노동자연대에 고한다

 

 

 

1.

지난 11월 29일 대책위는 기호 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이하 선본)의 이영주 사무총장 후보를 만났다.

 

대책위는 선본이 면담까지 요청한 이상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면담에 응했다. 그러나 선본 대표로 면담 자리에 나온 이영주 사무총장 후보가 보인 태도에 우리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영주 후보는 사건 자체에 대한 사실관계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물론 이는 후보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바쁜 후보에게 결정을 미룬 선본 자체의 문제일 것이다. 이영주 후보는 이 사건을 원칙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 해결을 위한 출발점은 삼자대면이라고 말하며 기존 선본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영주 후보는 원 사건은 성폭력이 분명하며 노동자연대의 성폭력 개념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인정했지만, 이것이 왜 다함께 사건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바로 다함께의 입장이며 사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사건이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인 이유는 피해자가 사건을 공론화했을 때부터 운영위원과 학생팀 간부 등 지도부를 포함한 수십 명의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집단으로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과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 유포, 협박, 욕설 등 온갖 2차 가해를 저질렀고 노동자연대에선 이에 대한 제재나 징계, 사과 등의 조치가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연대는 단체 회원의 성폭력 사실을 인정한 지금에 와서까지 사건 해결(성폭력 재발방지 조치 및 피해자에 대한 사과)을 위한 노력은커녕 자신들에 대한 명예훼손을 중단하라고 피해자와 대책위, 심지어 피해자의 전 대리인에 대한 공격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책위는 이미 선본에 이에 대한 증거를 넘겼으며, 면담자리에서도 판결문을 비롯하여 이영주 후보에게 새로운 증거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면담 이후에도 이영주 후보는 “2차 가해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양측의 자료가 달라 현재로써는 판단이 어렵다”며 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였다.

 

 

2.

노동자연대는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 자기 조직인 이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개인들의 문제일 뿐이고, 여기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명예훼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 명의로 11월 20일 온라인에 도배된 「성폭력 대책위는 노동자연대 비방을 중단해야 한다」라는 문서는 이렇게 말한다.

 

“노연 운위는 처음에 소송을 반대했지만(정아무 대리인의 2013년 2월 22일 노동당 당원 게시판 글을 보라), 일단 소송이 제기된 이상 노연 운위는 송사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면 그것을 기초로 단체의 공식 기구인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쟁위)가 평결을 할 것을 기대했다.”


“이런 일이 좌절된 뒤, 정아무가 형사소송을 취하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노동자연대 분쟁위는 자체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정아무를 성희롱 방조로 징계 처분했다.(그는 징계 받고 단체를 탈퇴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 대책위가 입수하여 이영주 후보에게 직접 제출한 노동자연대의 내부 문건을 보자. 이 자료는 2014년 3월 1~2일에 열렸다는 노동자연대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에 실린 공식 문서들이다. 이 당시에는 가해자 B도 여전히 노동자연대 회원이었고 재판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가지 문서 중 하나는 운영위원인 최미* 씨가 쓴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도 2차 가해를 자행하고 있는 노동자연대 회원 최창* 씨가 쓴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운영위원인 최미* 씨는 새롭게 학생팀 담당자가 되면서 이 사건도 대응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를 두 번 고소했다. 첫 번째는 2012년 12월의 형사소송이었다. 이 소송은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거짓말탐지기 조사 끝에 피해자의 말이 진실로 판명되자 가해자 측이 스스로 취하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12일 가해자 측은 다시 피해자에게 2500만원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노동자연대의 처음에 소송에 반대했다는 주장과 달리 최미* 씨는 스스로 가해자 B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당당히 고백한다.

 

“B가 진정 억울함을 풀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면 본인이 적극 명예훼손 소송에 임하고 일부 단체나 운동 내 개인의 성폭력 혐의 씌우기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면서 진실 규명 작업을 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미*,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이서* 동지의 글을 읽고」,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이어 최미*씨는 가해자 B의 형사소송 취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B에게 행위 주체로서 분명히 의식하며 행동하라고 논쟁한 또 다른 이유는 B가 여러 차례 스스로 소송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비쳤기 때문이다. 나는 B가 정말 본인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변호할 마지막 수단인 소송을 포기하는 것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송 포기는 곧 자신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B는 나중에 결국 형사소송을 스스로 포기했다. 물론 민사소송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나는 이유가 무엇이었건 스스로 소송을 포기하는 행위는 앞으로 B에게 흠결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B의 형사 소송포기는 우리 단체가 B에 대해 한층 더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최미*, 같은 글)”

 

최창* 씨가 처음으로 소송이 논의되는 상황에 대해 쓴 대목을 보면 더욱 정황이 잘 드러난다.

 

“사건 직후 정병*는 B, 이현*(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와 만난 자리에서 B에게 법적대응을 권하며 변호사 선임을 하라고 권하였고, 이현*와 B가 변호사 수임에 따른 비용부담을 누가 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모금을 하던지 해야죠’라며 마치 단체에서 일정부분이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지원해 줄 것처럼 대답했다. 이 말을 믿고 이현*는 B가 학생임을 감안하여 수임료 500만 원을 개인 대출까지 해가며 감당했으나 이후 단체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전술했다시피 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므로, 이후 몇 차례 정@@ 동지에게 모금계획이 있는지 등을 물어봤으나 나중에 확인해주겠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최창*, 「“페미니즘에 대한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성폭력추문을 돌아보며”에 더하여」,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정병* 씨는 사건 당시 다함께 학생조직 담당자였으며 최미* 씨 이전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이현* 씨는 최근까지 가해자 B의 대리인을 자칭하며 피해자와 대책위에 가장 악질적인 2차 가해를 퍼붓던 페북명 “Duckling Hyeon”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이 글에서 최창* 씨는 이현*를 파트너라고 지칭하며 양인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최창* 씨의 말이 따르면 두 사람은 다함께 학생조직 담당자인 정병* 씨가 다함께가 소송비까지 대줄 것처럼 이야기를 하며 소송을 권했기에 B에게 개인대출로 소송비를 대주었다는 것이다.

 

공식 입장과 달리 노동자연대는 이렇게 소송 배후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노동자연대가 동원하고 있는 각종 논리들은 조직원들이 저지른 성폭력을 은폐하고 방어하는 조직들이 전형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이 문서들은 (유사한 짓을 저지른 다른 모든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물론 이현*는 당시 비회원(후원회원)이었고, 최미* 동지 입장에서 회원도 아닌 사람을 지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현*는 이서* 동지의 글에도 있듯이 본 사건에 있어서 다함께와 공조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봤고, 따라서 그 자신 회원이 아님에도 사건의 추이 등을 꼬박꼬박 보고하며 우리 단체의 지시에 따르고 동시에 협조를 얻고자 했다. 비록 정병* 동지가 다소 무책임하게 처리한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이현*의 노력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며 협력적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한 측면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미* 동지로 바뀐 뒤에는 이러한 협력적인 태도와 토론 대신에 일방적인 지시만 있었고, 이 때문에 이현*는 다함께가 부당하게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최창*, 같은 글)”

 

가해자 B와 그 대리인이 다함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2차 가해행위들이 다함께와 밀접한 공조 속에 이뤄졌다는 사실은 최미* 씨의 글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이서*의 글에서 이미 나와 있듯이, 민사재판 변호사 선임, 그 비용마련, 증거 수집, 증언 확보, 정당성 주장, A 지지모임의 온·오프라인 상의 음해에 대한 대처, 심지어 우리 단체에 하는 보고조차 B가 직접 하는 게 거의 없었다. 위의 행위는 압도적으로 대리인인 이현* 씨를 통해 이뤄졌다. (최미*,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이서* 동지의 글을 읽고」,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노동자연대는 가해자 B를 자체 징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체 징계가 사실이라면 피해자에게 공지하고 사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해 피해자와 대책위에 아무런 통고가 없었으며 노동자연대 회원은 이후에도 재판과정에 가해자 측 증인으로 협조했다. 올해 2월에 작성되었다는 최미* 씨의 글을 보아도 가해자 B에 대해 공식조사는 이뤄진 바 없고 최미* 씨가 가해자를 불러다 몇 가지 물어봤을 뿐이다. 여기 징계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다. 비슷한 시기에 노동자연대를 탈퇴한 변혁재장전 블로그 운영자들의 말에 따르면 B는 스스로 탈퇴했으며 B가 탈퇴하자 그제야 노동자연대는 B에 대한 사후 징계를 내렸다고 한다.

 

우리는 다함께에 단지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진지한 사과를 하라는 것,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마련하라는 것을 요구해왔다. 피해자 개인이 주변의 다함께 회원들에게 요청해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론화를 한 것이었으며, 백번 양보하여 다함께 지도부가 주장하는 대로 공론화 전까지 공식라인으로 올라오지 않아 몰랐더라도 사건이 공론화된 시점부터 사건을 진지하게 접수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함께가 한 짓은 조직보위를 위한 집단적 2차 가해였고, 이에 대해 대책위가 꾸려지고 대화를 수차례 촉구했음에도 다함께는 그동안 계속 무시로 일관하다가 선거가 닥치니 다시 피해자와 대책위에 대한 공격과 사실 왜곡을 하기 시작했다.

 

 

3.

우리는 기호 2번 선본에 진상조사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이 사건에 대한 입장표명과 가해 단체에 대한 연대활동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와서 진상조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기에는 선본은 한시적인 기구이고, 상황 자체의 맥락에 대해서 증거자료는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최소한의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도 없이 대책위와 노동자연대의 얘기가 너무 다르니 삼자대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선본의 이런 태도에 한껏 고무받은 노동자연대는 이제 개인들에 대한 공격까지 서슴없이 나서고 있다. 노동자연대의 이러한 반여성적 입장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선본과 선본 내부의 일부 단체들의 방관자적인 태도이다.

 

예컨대 최미* 씨는 위의 글에서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상의 무책임한 논의가 다 진실이라고 믿는 일부 무분별한 개인들을 제외하면, 지금 운동 진영 내 책임 있는 누구도 이 사건을 들먹이며 공식적으로 우리를 매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주의료원 투쟁, 전교조 투쟁, 철도 파업, 올해 3·8 여성의 날 기획단 등 조직 노동계급의 운동 속에서 별 장애 없이 활동하고 있다. (최미*, 같은 글)”

 

사건 초기 운동진영 전반이 보인 방관자적인 태도들이 다함께-노동자연대 사건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우리가 위에 인용한 문서들은 성폭력 사건의 은폐와 2차 가해의 배후에 노동자연대가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물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사건 관련해서 페이스북에서 한 동지는 항상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간 있었던 진실을 알리고 또 이에 대한 피해자가 원하는 적절한 대처가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요구되기만을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정보들에 대해 하등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고서 난 모르는 상태로밖에 있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건 명백히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 자체에 관심 가져주시길 바라며 사과 부탁드립니다.”

 

피해자와 대책위 성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4.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우리는 중재가 아닌, 그리고 이미 모든 사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대책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공감에 기초한 판단과 입장을 원한다.

 

노동자연대가 이미 공개적으로 낸 입장만 봐도, 그리고 최미* 씨가 쓴 글을 볼 때 더욱 확실하게 노동자연대는 “성폭력예방 교육을 넘어서 여성주의에 기초한 전 조합원 교육”이라는 공약에 반대하는 것이 명확하다. 노동자연대의 “여성운동 개입 담당자”라는 최미*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반성폭력 문제를 가지고 필요한 때 내부 교육을 추가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조차 그 내용은 민주노동당 시절 모든 당원이 의무적으로 받던 반성폭력 교육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성폭력 개념의 무한 확장 등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개념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의 반성폭력 의무 교육이 오히려 성폭력에 대한 토론을 가로막는 역효과를 낸다는 점 대문에 이런 교육을 해왔던 일부 단체도 더는 하지 않는 실정이다. (최미*,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이서* 동지의 글을 읽고」,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그런데 어떻게 같은 선본에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사건 자체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면 선본은 이 부분에 대한 입장, 과연 노동자연대와 마찬가지로 2차 가해, 피해자중심주의 같은 개념도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라도 빠른 시일 내에 명확히 밝혀주기를 바란다. 이미 선거가 시작되었지만 가해단체가 포함된 삼자대면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가 확보되는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여 이후라도 사건처리에 대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또한 이 선본에 참여 하고 있는 노동, 정치 단체들은 선본과 별개로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신의 명의로 발표할 것을 요청한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현재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대응들이 어쩔 수 없는 노동운동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계속 그렇게 용인하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 선본에서 내 걸고 있는 영혼 없는 여성 공약을 철회하길 바란다.

 

2014년 12월 5일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사건을 말하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11/28 11:07
  • 수정일
    2014/11/28 11:0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사건을 말하다

 


이번 대책위의 글은 재판과정에서 일어났던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와 다함께(현 노동자연대)의 조직적인 가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해서 다루고자 한다.

 
 

알다시피 현재 사법기구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지 않고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누가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더 많이 불러왔는가가 관건이 된다. 심지어 그것이 가해자의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채택된다. 가해자들이 마치 자신들이 승소하고 면죄부를 얻은 것인 양 판결문을 왜곡한 것은, 가해자들과 노동자연대가 조직보위를 위해 자신들끼리 조직적으로 짜 맞춘 증거와 주장이 판결문의 일부로 인용된 데서 비롯되었다.

 

2년여 동안 지속 되었던 가해자 A와 노동자연대의 2차가해와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은 가해자 자신들의 성폭력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화시도였으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물타기였다. 재판 과정 대부분은 본건과 개연성이 전혀 없는 허위진술과 허위증언으로 피해자를 몰아붙이는 2차가해 그 자체였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법정 2차가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성추행 가해자로 둔갑시키다.

 

피해자 동지의 전애인이었으며 당시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학생팀 간부였던 C는 가해자A를 옹호하기 위해 피해자 동지가 ‘평소 A를 짝사랑 하였으며,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몸까지 이용하려고 했다.’는 허위의 진술서를 썼다. 또한, 당시 차에 동승하였던 다함께 회원 E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 했다고 허위진술과 허위증언을 했다.

 

C는 사건 당시 피해자 동지가 문제제기를 하자 “볼셰비키는 케렌스키도 방어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면 성폭력범과도 함께해야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 학내 우파들로부터 공격 받을 테니 함구하라.”고 했고, 공론화 되자 ‘연애결별의 앙갚음’이란 글을 올린 사람이다. 이 글을 토대로 다함께 운영위원 F와 2차가해자들을 비롯한 다함께 및 그 회원들은 피해자 동지를 평소에 문제가 많았던 성격 이상자, 조직을 음해하는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2013년 2월, 자신들이 제기했던 형사고발이 불기소 처분되자 (이후 민사소송에 불리할 것 같아), 소를 취하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 새로이 급조되고 기획된 것이었다.

 

E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2011년 7월 고려대 다함께 맑시즘 행사에서 피해자 동지가 A에게 “니가 뭔데... 내 맘도 몰라주면서...” 라고 술병을 집어 던졌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맑시즘 행사에 같이 참여하고 있던 또 다른 증인은 술병을 집어던지는 일과 소란스러운 소리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진술서를 썼다. 그러자, E는 법정 증언에서는 교묘하게 말을 바꿔 그때 피해자가 집어 던진 것은 술병이 아니라 종이컵 이었다고 진술했다. 당연히 차안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성추행 같은 일은 없었다.

 

A, C, E는 조직보위라는 공동의 목적 하에 허위진술과 허위증언을 했다. 이 재판은 다함께 지도부가 직접 재판을 권유하고 개입하였다. 이 사실은 얼마 전 당시 다함께 운영위원 이었던 사람이 블로그에 올린 고백 글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조직보위’를 위해 학생조직 책임자등 2차가해자들이 사생활에 관한 악소문등을 유포하여 2차 가해를 주도했으며 재판에 조직적으로 개입했기에 우리는 노동자연대를 가해조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M.T사건의 실상

 

대학문화 가해자인 B는 평소에도 성적인 농담을 자주 했고 상대방의 동의없이 애인과 성관계를 하는 것을 찍어 편집원들에게 보여주기도 했으며, 성에 관한 책을 사서 피해자 동지에게 읽으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레퍼토리는 이것이었다.

 

피해자 동지가 어느 날 우연히 아르바이트 모집공고를 보고(그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면접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키스방 업주라는 사실을 알고 거절하고 나왔다는 얘기를 A와 B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피해자동지의 말에 착안하여, B는 처음에는 성매매를 말리기 위해서 동영상을 틀었다고 하더니, 이후에는 성적으로 자유롭게 건전한 대화가 오고가는 과정에서 동영상을 틀었다고 말을 번복했다.

 

법정에서는 교묘히 이를 합쳐서 성매매를 말리면서 성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과정에서 동영상을 틀었다고 증언했다. A와 B의 증언은 서로 짜 맞춘 듯이 모든 것이 일치했다. A와 B는 성매매를 말리면서 성적인 대화가 오가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피해자 동지의 동의하에 동영상을 보았다고 주장하였고, A는 동영상을 본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날의 사실은 이러했다. 가해자들은 섹스파트너, 원나이트, 성적 취향 등에 관해 피해자가 거부를 하는데도 일방적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B는 피해자 동지에게 "자위해본 적 있느냐?",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내가 여자가 자위하는 거 보여주겠다"라며 일본여성이 자위하는 동영상을 틀고 피해자 동지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그 동영상을 보게 했다. A도 “아오, 성포비아. 너도 이런 것에 대해 좀 알아야 돼.” 라며 동영상 보기를 종용했다. 동영상을 보면서 B는 “흥분된다.” 는 등의 말을 했다.

 

또한, “임신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는 B의 질문에 A도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며 대답을 강요했다. B가 성교하는 시늉을 내며 “3, 2, 1 발사.” 라는 농담을 하자 A도 B와 같이 박장대소를 하며 크게 웃었다. A측의 변호사 또한 재판과정에서 법적 공방내용과 상관없이 피해자 동지가 성매매를 했느냐 안했느냐 이것만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성매매를 말리기 위해서 일본여성이 자위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과연 납득할 수 있는 말인가? A는 피해자가 눈을 감고 거부하는 것을 보았다고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말했으면서도 자신은 동영상을 본 적이 없다며 법정에서 모순된 증언을 했다.

 

민사재판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제출한 증거의 대부분은 법정의 주된 내용과 상관없는, 피해자 동지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가는 일이었다.

 

민사소송 초기의 조정과정에서 그들은 피해자 지지모임 페이지 폐쇄와 앞으로 이 사건에 관해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으면 소를 취하하겠다고 했다. 이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재판 자체가 본 사건과는 사실상 하등에 관계없었고 진실폭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재판이었다.

 

 

피해자의 호소를 무시하고 2차 가해로 일관해 온 노동자연대

 

노동자연대는 판결 이후 더 이상 버틸 수 없자 이제 적극적으로 사실관계 날조에 나서고 있다. 애초부터 가해조직으로 단정되어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피해자 동지는 사건의 공론화를 결심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했지만 묵살 당했으며, 사건이 공론화 된 이후에도 피해자 동지와 지지모임은 그들을 가해조직이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진상조사와 사건해결을 촉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집단적인 2차 가해와 소송이었다.

 

우리는 지금껏 계속 노동자연대 측에 SNS상에서 2차 가해를 중지해 줄 것과 소를 취하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2012년12월 2일, 2012년 12월26일, 2013년 1월23일 세 차례에 걸쳐서 피해자 지지모임은 다함께 측(노동자연대 다함께, 노동자연대학생그룹)에 피해자동지의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상태라 SNS상의 상호비방 중지와 공동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과 책임자와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늘 같았다. ‘본 단체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 법정 소송이 진행 중이니 당사자끼리 해결하라, 본 단체에 대한 명예훼손행위를 중단하라.’ 는 내용이었다. 당시 지지모임은 노동자연대에 공문을 보낼 때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후 지지모임의 계속되는 공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단 한 차례도 소통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거짓말과 2차 가해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대화를 하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강을 건너왔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행위, 가해자들 및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진정성 있는 공개사과와 반성과 반성폭력 내규의 지정 없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단호히 거부한다.

 

악조건 속에서도 피해자 동지는 용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대책위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왔다. 더 이상 제 2, 제 3의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고 이러한 자들과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운동의 중심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이 피해자 동지와 대책위의 일관된 생각이다.

 

노동자연대는 사실 날조 뿐 아니라, 이미 상식이 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같은 개념까지 호도하고 있다. 그들이 비난해 마지않는 성폭력 개념의 확대, 2차 가해, 피해자중심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그동안 피해자를 보호하고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은폐된 성적・인격적인 침해들을 폭로하는데 큰 기여를 해 왔다. 십 년 전만 해도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많은 사례들이 지금은 운동사회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성폭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 사건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음란동영상을 보게 한 명백한 성폭력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건을 성희롱, 성추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노동자연대의 인식은 그 조직이 갖고 있는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반성폭력 교육에 이른바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딱지를 붙여 거부해온 노동자연대의 태도가 바로 이번 사건과 같은 비극을 낳은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연대의 이러한 입장과 태도야말로 무엇이 문제의 원인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맺으며

 

한국이라는 사회는 아직도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사회이며 도처에 성폭력이 만연되어 있다. 한국의 현실은 영화 ‘도가니’,‘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여군대위 자살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반면에 성폭력 피해자는 억울하여 죽고 싶다는 충동을 수도 없이 느끼고 실제로 자살을 선택한 경우도 많았다.

 

겨우겨우 용기 내어 사실을 폭로해도 그 중의 일부밖에 얘기하지 못한다. 사실을 얘기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진실로 확인되기 전까지 피해자는 가해자조직의 보위나 가해자의 명예를 위해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몰리거나 2차가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갖은 가혹한 수모를 겪는다.

 

노동자연대가 “피해자절대주의”라고 폄하하고 있는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 가해 같은 개념은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등장한 개념이다. 그리고 왜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 같은 개념이 필요한지는 피해자의 호소를 애초부터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2차 가해를 일삼았던 노동자연대 자신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 동지는 노동자연대의 2차가해가 시작된 다음부터 식음을 전폐하며, 극도로 건강이 악화 되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수도 없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등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 수십 번이다. 이것은 그들이 재판에서 주장했던 대로 경미한 것으로 치부할 일이 결코 아니다.

 

반성폭력운동의 관점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진실만을 주장했다. 가해자 A의 대리인이라는 D가 있지도 않은 사실 - 어느 날인가 카페에서 (우리도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친구를 2차가해자로 지목하여 시비를 걸었다거나 재판방청 후 우리 측이 하지도 않은 욕설을 했다거나 - 을 거론하고 피해자 중심주의를 질타하며 피해자동지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오히려 D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물타기를 하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것과 - 우리의 관점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의 본질을 밝히고 정당한 문제제기를 통해 성폭력문제에 둔감한 운동 내부가 조금이라도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가해자들과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모든 시도에 대해 부단히 맞서 투쟁할 것이다.

 

2014년 11월 27일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6&document_srl=17877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와 기호2번 선본과 주고받은 공문을 공개하며 우리의 요청에 대한 선본의 빠른 답변을 촉구합니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11/24 23:08
  • 수정일
    2014/11/24 23:08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지난 11월 7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는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참가하고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과 선본에 참여하고 있는 각 단체들에게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와 연대를 재고하고 성폭력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답변 시한으로 제시한 11월 17일 자정을 30분 정도 남겨 놓고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에서 노동자연대의 선본 배제를 결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연대와 선본, 대책위가 참가하는 3자 대면을 통해 대화하자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대책위는 이런 조치가 사건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않으려는 편의적인 답변이며 이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대책위의 구체적인 진술과 요구를 바탕으로 사건을 접수하고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건을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현재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은 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는 또 다시 대책위 입장서에 대한 악의적인 반박문을 작성해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책위는 그동안 기호2번 선본과 주고받은 공문 세 건을 모두 공개하며 우리의 요청에 대한 선본의 빠른 답변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기호2번 선본에 참여하고 있는 제 활동가단체 역시 선본 차원의 입장과 별도로 이 사건에 대한 조직의 입장을 빠른 시일 내에 밝혀주시기를 덧붙여 요청 드립니다.

 

 

2014년 11월 21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

 

 

 

제목: 성폭력 사건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여 재고에 관한 협조의 건

수신: 가칭) 직선제 승리, 민주노총혁신, 총파업투쟁을 위한 민주노총 선거대책모임

일자: 2014년 11월 7일

 

 

 

1. 귀 직선제 승리, 민주노총혁신, 총파업투쟁을 위한 민주노총 선거대책모임(가)(이하 선거대책모임)의 발전과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 귀 선거대책모임에 저희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성폭력사건의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연대조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이미 인지하다시피 노동자연대는 지난 3년간 다함께(현 노동자 연대).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을 방임하다 못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소송을 건 성폭력사건 재판에 해당 조직(노동자연대) 중앙 등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면서 위증을 했습니다. 또한, 본 사건을 운동 사회 내 양성평등, 반성폭력 규약 일반 원칙에 따라 운동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집단적으로 2차 가해를 한 사실과 정황들이 계속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3. 직선제 승리·민주노총 혁신·총파업을 위한 전국 활동가 승리 결의대회 자료집(2014.11.1)에서 귀 선거대책모임이 발표하신 <혁신6>에는

 

 

- 여성의제의 부차화 극복. 여성사업 대폭강화. 여성위원회 위상 제고.

- 개점휴업상태로 전락한 성평등 위원회 활성화를 통한 조직문화 쇄신.

- 성폭력예방 교육을 넘어서 여성주의에 기초한 전 조합원 교육.

 

 

이라는 여성정책공약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노동자연대 측에 2차 가해 중단과 사과, 가해자 징계 및 부르주아 사법기구를 통한 고소. 고발 철회, 가해자들의 성폭력 교육 이수, 성폭력 내규 제정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자연대 측은 이를 계속 무시했습니다.

 

 

따라서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연대세력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귀 선거대책모임이 발표하신 여성정책공약과도 모순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 저희 또한, 이 상황에 대해 귀 선거대책모임에 좀 더 빨리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후 저희는 무려 3년이나 계속되었던 노동자연대 측의 2차 가해와 성폭력사건 재판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 계속 진실을 폭로할 예정입니다.

 

 

혹여라도 노동자연대의 성폭력 사건이 귀 선거대책모임의 행보에 누가 되지 않을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거듭 심사숙고하시어 성폭력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귀 선거대책모임에 참여하는 것에 관해 재고해주실 것을 아래와 같이 요청합니다.

 

 

<요청사항>

 

 

하나, 성폭력 사건 가해 단체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가에 대한 선거대책모임 차원의 공식논의와 입장표명

 

 

둘, 선거대책모임의 여성정책(공약)에 근거한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처리에 대한 이후 계획

 

 

5. 저희 요청에 관해 귀 선거대책모임 동지들의 많은 관심과 진정성 있는 논의와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6. 답신은 위 대책위 메일로 11월 17일까지 보내 주시기 바라며, 다른 사정이 있으면 진행 상황을 통보해 주십시오.

 

 

7. 본 사건 관련자료는 다음의 다함께. 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결을 위한 포험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의 "귀 대책위원회의 공문에 대한 답변"

일자 : 2014년 11월 17일

 

 

 

 

1. 귀 대책위원회의 본 선대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2. 귀 대책위의 요청에 대한 기호 2번 선대본의 논의 결과를 보내드립니다.

 

 

가. 귀 대책위가 요청하신 노동자연대의 선대본 참가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입니다. 우선 본 선거대책본부의 조건과 사정은 귀 대책위가 제기하신 사안에 대한 전반적 파악이 물리적으로 어려운 현실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본 선거대책본부는 귀 대책위가 요청하신 노동자연대의 선대본 참가배제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귀 대책위의 양해를 요청드립니다.

 

 

나. 그럼에도 귀 대책위가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본 선거대책본부는 심사숙고 하였습니다. 이에 본 선거대책본부는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귀 대책모임과 노동자연대 그리고 본 선거대책본부의 이영주 사무총장 후보가 참여하는 3자 연석회의를 제안합니다.


이 연석회의를 통하여 장기간 진전이 없었던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으면 합니다.

 

 

다. 귀 대책위원회가 위 나 항을 수용한다면 3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귀 대책위의 대표 또는 대리인을 선임하여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그 대표 또는 대리인과 곧바로 3자 연석회의의 개최 일정과 의제에 대하여 협의하였으면 합니다. 귀 대책위원회의 적극적인 검토를 기대합니다.

 

 

기호 2번 한상균, 최종진, 이영주 선거대책본부 드림
연락담당: 사무총장 후보 이영주 (전화: 010-8206-3444)

---------------------------------------

 

 


대책위의 "귀 선대본의 11월 17일자 답변에 대한 대책위의 입장"
일자: 2014년 11월 19일

 

 


1. 먼저 민주노총 임원 직선제 선거로 바쁘신 와중에도 본 대책위의 11월 7일 자 공문(성폭력 사건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여 재고에 관한 협조의 건)에 대한 답변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2. 귀 선대본의 답변에 대한 우리 대책위의 입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 아 래 -

 

 

하나, ‘성폭력 사건 가해 단체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가에 대한 입장표명’ 요청에 대해 귀 선대본에서는 ‘선대본의 조건과 사정이 대책위에서 제기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전반적 파악이 물리적으로 어려운 현실’이라는 답변을 해오셨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대책위에서는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데 있어 ‘피해자 권리’를 고려하지 않은 귀 선대본의 태도에 강력한 유감을 표합니다.

 

 

앞선 11월 7일 자 공문에서 밝혔듯이 우리 대책위에서는 이 사건을 ‘운동 사회 내 성평등, 반성폭력 규약 일반 원칙에 따라 운동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 피해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처리하려 노력하는 것은 운동적 해결의 기본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가해자(가해 단체)의 경우 공식적인 활동과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 피해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귀 선대본에서는 ‘물리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회피했을 뿐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대책위는 귀 선대본이 무엇보다 먼저 본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대책위의 구체적인 진술과 요구를 바탕으로 사건을 접수하고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건을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또한,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지 않도록 가해 단체의 귀 선대본 활동을 즉각 중단시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둘, 귀 선대본이 제안한 가해 단체가 포함된 ‘3자 연석회의’는 ‘장기간 진전이 없었던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 하는데 있어 매우 부적절합니다. 장기간 진전이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가해 단체가 피해자와 대책위의 정당한 주장과 요구를 무시해왔을 뿐 아니라 2차 가해를 저질러 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근거로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를 가해 단체로 규정했고, 귀 선대본에 운동 사회 내 성평등, 반성폭력 규약 일반 원칙에 따른 가해 단체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던 것이지, 가해 단체와 피해자 측이 동등한 자격으로 테이블에 앉아 귀 선대본의 중재를 받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가해 단체가 포함된 3자 연석회의는 사건을 당사자 간의 문제로 협소화시키고 가해 단체에게 처음부터 면죄부를 주는 제안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대책위에서는 귀 선대본의 결정사항에 큰 실망을 느끼며, 운동적 해결을 위한 재논의와 진정성 있는 답변을 다시 요청합니다.

 

 

지금이라도 귀 선대본에서 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운동적 해결을 원하신다면, 원칙에 따라 사건을 접수하시고, 사건 해결을 위한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여 정당한 처리절차를 밟아주시기 바랍니다. 귀 선대본에서 가해 단체를 배제하고 정당한 처리절차를 진행하신다면, 대책위는 귀 선대본과 직접 만나는 것을 포함하여 귀측에서 요청하는 모든 과정에 적극 참여, 협조할 것이며, 결과에 대해서도 공동으로 책임지겠습니다.

 

 

2014년 11월 19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6&document_srl=17876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공산주의좌파 이론 연재 1] 제1부 공산주의좌파 역사 (1) 독일 공산주의좌파 역사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178693

 

[공산주의좌파 이론 연재 1]

 


제1부 공산주의좌파 역사

 


(1) 독일 공산주의좌파 역사

 


혁명의 해 : 판네쿡과 유럽 공산주의의 형성, 1917-1919 1)

 

 
맑스주의를 위한 투쟁 : 판네쿡과 러시아 혁명

 

 
1917~1919년 사이 판네쿡의 활동은 극적인 세계적 사건의 배경과 대비해야 한다. 1914년 전 유럽에서의 혁명은 결단한 소수집단의 헌신적인 교리와 꿈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까지 혁명적 분위기는 전 유럽을 휩쓸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판네쿡이 그의 생애의 과거 20년을 헌신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와 같이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판네쿡은 혁명과정의 뉴스를 따라 추적하고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그 의미를 분석했다.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년 이전에 판네쿡과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실현하는 기구형식을 모호하고 일반화된 용어로 설명했었다.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토론했지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보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 판네쿡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미래 혁명의 경로에 대한 예후에서 판네쿡은 종전의 입장을 뒤집고 러시아가 “유사-맑스주의 교조주의의 형태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무르익지 않았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난했다. 룩셈부르크 같은 볼셰비즘에 대해 다른 비판자와 달리,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실제적 견해에 동조하였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확신은 그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수행함에 비타협적 헌신을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힘은 조직구조에 있지 않고, 공격적 전투력과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굶주림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린 그들의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성숙”은 “투쟁과 권력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숙”에 의해 상당 정도 결정된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판네쿡에게 볼셰비키의 투쟁은 유럽 전역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것에 주로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차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스스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위하여 : 브레멘 좌파와 독일 혁명

 

 
1917년은 전쟁의 피로가 최고조에 오르자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격정의 해였다. 민중적 불만이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고조된 독일만큼 위기에 처한 나라는 없었다. 브레멘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발발이 혁명적 좌파의 상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이 나자, 브레멘 경찰은 보고서에서 “행동파 혁명적 좌파 소집단은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 혁명의 위험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영향의 가장 최초의 직접적인 표현은 1917년 3월 31일 나타났는데, 수천 명의 브레멘 부두 조선 노동자가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와 전쟁 지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고 시 중앙으로 행진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1917년 봄 동안 미래에 채택할 조직형식에 관한 브레멘 좌파들 내부의 토론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SPD(독일사민당)로부터 좌파의 축출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판네쿡의 관점에서 브레멘 좌파의 당과 노조 조직의 옛 형식은 새롭고 직접적인 계급도구가 기대되는 혁명적 투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린 새로운 조직 형식의 모델은 미국의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2)에 대부분 영감을 얻었다.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와 친숙하게 된 것은 첫째, 전쟁 전까지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를 편집한 함부르크 혁명적 좌파 지도자가 Fritz Wolffheim(후리츠 울프하임) 이었고, 두 번째는 함부르크 항에 독일어판 문헌을 배포한 미국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 선원의 활동 때문이었다.

 

 
1917년 3월 Wolffheim(울프하임)은 당과 노조의 기능을 통합하는 새로운 “단일 조직”의 설립을 「Arbeiterpolitik」에 제청했다. 자본주의의 집중화되고 카르텔화되는 경향에 효과적으로 맞서는 방법은 자발적인 공장수준의 조직적 그물망 주위에 구조화된 지역적인 계급 운동밖에 없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견해는 그와 토론하기 위해 함부르크로 여행 온 Knief3)에 의해 즉각 채택되었다.

 

 
새로운 조직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그로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혁명적 기질은 여러 곳에서 보이게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파업투쟁은 주로 현장 활동가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참여로 나아갔다. 노조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맹아적 구조가 생겨났다.


브레멘에서는 이러한 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주로 좌파에 의해 결정되었다. 10여 년 넘는 정치투쟁기간 동안 좌파는 1917~1919년의 투쟁에서 중추적 임무를 수행한 대규모 산업공장에서의 현장 전투파 조직을 발전시켰다.

 

 
4월 파업으로 고무받고 ‘단일’ 조직형식의 기초를 희망하면서, 브레멘 좌파는 1917년 6월, 7월 또 다른 파업과 시위를 일으키는 데 역할을 하였다. 좌파에 대한 정부의 물리력이 동원되자 Knief는 체포를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판네쿡과 협력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베를린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새로운 혁명적 좌파 조직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7월까지 새로운 조직 결성을 제안하기 위하여 전 독일의 수많은 좌파집단으로부터 실행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러한 소집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대한 판네쿡과 브레멘 좌파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지도자당”이 아니고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건설의 필요성이었다.

 

 
이러한 소집요구에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창립대회를 한다. 여기서 “국제”라는 말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발전될 제3인터”와 현존하는 찌머발트 좌파의 회원임을 밝히는 의미였다. 내부구조로 보면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혁명투쟁에 대한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믿음은 두 번째 자주적 파업이 1918년 1월에 일어나자 더욱 강화되었다. 이 사건은 1월 28일 베를린에서 40만 명의 금속노동자가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즉각 공장 대표가 선출되고 400명의 노동자평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는 요구가 ‘평화협상에서의 노동자 참여’였다. 며칠 사이에 파업은 백만이 넘는 노동자를 포괄했으며 그 시기까지 독일에서의 민중적 불만이 표현된 것 중 가장 큰 것이었다. 브레멘에서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수천 조선노동자의 파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파업은 부두에서 2주간의 군대점거로 진압되었다.

 

 
이러한 파업은 분명히 독일노동계급 사이에 급진적 반전경향이 자리 잡고 전쟁 전 정치적 통일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노동계급 행동의 심각한 반발 없이 8개월이 지나갔지만, 경제조건과 군사상황은 꾸준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9월 초와 10월 초의 주요 패배를 뒤이은 군사상황의 악화는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국가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1.JPG
 


 
혁명은 1918년 11월 4일 Kiel(키일)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되었고 독일 전역으로 눈사태처럼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혁명의 형식은 거의 그들의 예측과 같았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평의회(소비에트)가 조직 형식으로 평의회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독일노동자의 경험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의 주요세력이 된 SPD(독일사민당)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브레멘에서는 혁명이 수천 명 부두 및 조선노동자들의 파업으로 1918년 11월 4일 시작되었다. 그리고 Kiel(키일)의 혁명적 선원들은 지역 군대의 무장해제를 도착한 이틀 후 완수하였다. 같은 날 도시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선거가 부두와 공장에서 있었다. 평의회는 180명 노동자와 병사로 구성되었는데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회원이었다.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지부장인 Henke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평의회의 첫 번째 행동은 기존 시를 해산하고 시청에 붉은 기를 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주요 세력이 된 공장과 부두에 지역 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전략적 입장을 요약하는 두 가지 주요 표어를 채택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가 그것이다.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독일 혁명의 직접적 참여자는 아니지만, 판네쿡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1월, 12월의 중요한 시기 동안 판네쿡의 상황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Arbeiter Politik에 정기적으로 실렸으며 사실 Knief를 포함한 다른 기고자들보다 더 많았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평가는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 그 임무의 조그만 부분만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판네쿡은 스스로 자랑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은 전체로서의 계급을 일으키는 평의회 틀 내에서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적극적 소수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판네쿡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기구가 아니라는 근거로 평의회에 비판 없이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다. 주요임무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면적 서곡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명확화와 의식의 도구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행동계획의 추적을 시도하면서 판네쿡은 전쟁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진정한 형식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로 전쟁 전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SPD(독일사민당)는 전쟁기간에 더욱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다. SPD(독일사민당)에 대해서는 덜 적대적이었지만, 판네쿡은 그것도 사회주의 변혁의 도구로서 거부했다. 판네쿡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열망 속에 있는 국가사회주의 유형은 “노예의 가장 최악의 형태”를 표현한다고 경고했다.

 

 
혁명을 급진화하려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시도는 혁명 때문에 자유로운 몸이 된 후 11월 18일 브레멘으로 돌아온(뮤니히에서 1월 활동 때문에 체포된) Knief에 의해 고무되었다. 중앙 노동자평의회 모임에 예기치 않게 극적으로 나타난 그는 브레멘 좌파의 공격적 전투성을 사로잡는 말로 시작했다. “이 순간 중요한 문제는 권력의 전복이다.” 그는 브레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가 혁명적 기관이 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 주도의 시위 파업과 함께 11월 27일 시작되었다. 이틀 후 Knief는 중앙 노동자평의회 모임에서 일련의 요구를 제시하는 2만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다. 그 요구는 ①평의회 체제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확립 ②모든 비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제거 (사회애국주의를 포함한) ③노동자의 즉각적 무장과 부르주아지의 무장해제 ④Bürgerzeitung의 통제를 중앙 평의회로의 이전이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그 이름을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로 11월 23일 바꿨다. 이론사업에 Arbeiter Politik을 보완하기 위하여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폭넓은 전국, 지역 배포망을 갖게 된 그리고 독일 전역에 걸쳐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의 견해를 전파할 수 있는 일간 선동지 Der Kommunist(코뮤니스트)를 창간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의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혁명 후 처음 몇 주는 브레멘에서 급진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앙 노동자평의회도 독일의 다른 시 정부가 당면한 문제에 부딪혔고 혼란스런 정치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시간 벌기에 급급했다. 옛 시 행정구조는 중앙 노동자평의회의 감독하에 기능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병사평의회로부터 축출됐지만, 군대의 저항은 적군의 구성을 방해했다. 평의회는 일상 업무에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이었지만 혁명 초기 몇 주간 독일 곳곳에서 일어난 평의회와 달리 행동보다는 분위기에 의존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브레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데 추동력을 강화함으로써 11월의 질서정연한 혁명과정을 12월에는 평의회 역할의 보다 급진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12월 12일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는 하루 후에 풀어주려고 부르주아 인질을 체포했다. 12월 21일 평의회는 Bürgerzeitung을 접수하고 그를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넘겼다. 12월 24일 평의회는 국회의원 선거를 지지하지 않고 평의회체제 지지를 재확인했다. 5일 후에는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성원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힘겨루기의 첫 번째 시험은 이틀 후 75보병연대가 브레멘에 돌아올 때였다. Freikorps(자유군단)4)가 형성된다는 두려움으로 무장 노동자와 혁명군은 보병연대를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브레멘에서 일어났지만, 독일 혁명은 점차 두 적대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상반되는 표어, 즉 의회냐 평의회체계인가라는 상징 표현의 이러한 갈등은 독일 혁명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에 기반을 둔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SPD(독일사민당) 주도의 임시정부는 옛 정권의 기구와 동맹을 맺고 평의회 권력을 침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으며 혁명을 좌파에게 몰아가길 바랐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러한 세력의 연합은 노동조합주의를 정당화하고 평의회를 격하시키는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Stinnes-Legien 협약5)(11월 15일)으로 제도화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독일 관료들의 권위를 보장한 Ebert-Groener 협정6)(11월 10일)이었다. 혁명의 미래 진로는 임시정부가 국가의 최종 정치형태를 결정하기 위하여 제헌의회에 개입할 준비를 했을 때 명확해졌다. 이것이 정부의 구조를 비프롤레타리아 사회계급의 수중에 들어가게 한다는 걸 깨달은 좌파는 평의회체제에만 기반을 둔 정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2월 16일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의 전국대회까지, 평의회 권력이 이름뿐 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25만 노동자와 병사가 평의회체제를 찬성하면서 베를린 거리에서 시위했지만, 대회를 주도한 SPD(독일사민당)는 그 결과가 예견된 결론임을 확신했다. 12월 19일 중요한 투표가 있었을 때, 대표들은 평의회 권력은 과도기적이고 따라서 미래 의회에 넘길 것을 선언했다.
 사진2.JPG  

 

 

 
혁명의 혼란스런 처음 몇 주간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7) 사이의 단결 부족은 좌파를 무겁게 짓눌렀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특히 좌파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통을 겪었다. 사건의 속도가 순간순간 달라지고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2월 5일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그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했다. 이 시기 동안 칼 라덱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중재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파견자로 모스크바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되었다.

 

 
공식적으로 KPD(독일공산당)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벌어진 토론을 보면 독일 공산주의의 두 흐름 사이의 전망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분화지점은 새로운 조직의 성격이었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새로운 당이 모든 공산주의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판네쿡의 관점에 따라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당 조직의 진정한 기반이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는 공산주의자가 기존 노조연맹에 참여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노동자평의회 틀 내에서 생동하는 “단일조직”에 의해 노조기능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다수의 유능한 스파르타쿠스 지역 지도자의 지지를 받았다. 심각한 논쟁을 피하고자 룩셈부르크는 이 문제와 관련 문제를 특별위원회에서 다룰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대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 지도부를 대신하여 Paul Levi가 선동의 가능성을 근거로 참여를 정당화했다. 오토 륄레(Otto Ruhle)는 의회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진정한 임무라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때 룩셈부르크나 리프크네히트 모두 성원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으며 결국 참여 반대 안이 65대 23이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통과되었다.

 

 
KPD(독일공산당)의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는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KPD(독일공산당)는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가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8)
 
사진3.JPG

 

 
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하는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 배후에는 평의회와 공공모임에서 평의회 권력의 형식을 선언할 필요에 대하여 좌파에 의한 수 주간의 토론이 있었다. 맹장 수술에 이은 합병증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Knief가 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충고를 했지만 처음 결정된 전기는 되돌릴 수는 없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KPD(독일공산당)가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는 이제 과거의 역사임을 선언한다. 이 시간부터 평의회가 지배한다.” 새로운 평의회공화국을 이끌기 위해 Henke를 의장으로 하는 KPD(독일공산당),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그리고 병사평의회 대표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평의회가 창설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사회주의혁명의 모델이라고 믿으면서, 평의회는 독일의 다른 지역에 혁명 활동을 조정하는 대표를 파견했다.

 

 
평의회공화국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처음 3주간은 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시위와 사회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지만, 지역 조건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구조는 대체로 문서 상의 체제에 불과했다. 첫 번째 대결은 1월 14일 SPD(독일사민당)의 강권으로 일부 군부대가 군 무장해제 시도에 항의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들은 도시 주요지점을 장악하고 노동자들도 무장해제 시키려고 Weser 부두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 거리투쟁 이후 무기를 소지하는 타협안에 군인들이 동의하게 된다. 공화국의 존재가 순간적으로 안전했지만 어려움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KPD(독일공산당)가 총파업을 벌였을 때 지방금융기관에 의한 신용보이콧이었다. 며칠 동안 간헐적 거리투쟁이 일어났다. 이 시점에서 공화국은 만족할만한 출구를 찾기 위하여 선거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1월 25일 SPD(독일사민당)의 내무장관인 Noske(노스케)는 중앙정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브레멘 봉기를 무력으로 분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그는 Freikorps(자유군단) 연대에게 브레멘으로 행진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도시 탈환의 전투는 2월 3일 시작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마지막 타격은 좌파의 주요 거점인 Weser 부두가 2월 5일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유혈의 패배 이후 평의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SPD(독일사민당) 지배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패배와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KPD(독일공산당)와 브레멘 노동계급은 4월 2주간의 총파업을 포함한 저항을 1919년 동안 계속했다.
 
사진4.JPG

 

 

 

 

 
독일 좌파의 명백한 패배는 제2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판네쿡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다. 1919년 1월 2일 비극적 사건을 놓고 판네쿡은 좌파의 패배가 혁명투쟁의 전 시기에서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에 의해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독일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전면적 검증을 하는 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와 기꺼움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이 독립파에서 분리할 때 노동자들은 상황을 더 잘 이해했지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회애국주의자와 같이 동일한 전제에 근거한 통찰력과 이해”를 독립파가 가졌다는 사실에 의해, 혁명적 실천과 관련이 없는 “혁명적 애국주의”의 죄를 지었다고 비난했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판네쿡의 실용주의적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전술로만 공격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판네쿡이 계속 강조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평의회의 의식고양 능력을 통하여 모든 형태의 군사력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판네쿡은 당이 조정과 선전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보았지만, 미래의 전략과 행동에 대한 중요한 토론은 평의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노동자는 혁명적 변혁에 필요한 “실천적 통찰력의 통일”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평의회의 새로운 요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위한 판네쿡의 공식은 본질에서 변하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공산주의의 성장은 공산주의 사상의 성장, 권력획득의 의지, 그리고 혁명을 위한 준비의 성장이다.”

 

 
목적에서 패배하고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로 강화된 독일 좌파는 새로운 상황에서 그들의 입장을 새롭게 정립할 정치적 과제에 직면했다. KPD(독일공산당)와 브레멘 좌파에게 1919년은 무엇보다 자기규정의 해였다. 1월 공격이 노동계급을 급진화 시키고 사회혁명을 이룩하는데 무능력을 드러냈지만, 그들의 패배는 독일에서 시민의 투쟁을 종식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의 나머지는 위기일발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기대상황과 생활조건의 악화에 의한 일반적인 불안과 산발적인 봉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뮈니히에서는 새로운 평의회 공화국이 선언되고 4월 3주간 권력을 장악했다.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군대가 함브르그, 라이프치히, 할레, 브룬스비크와 루르에 파견되었다. 베를린에서는 선원이 이끄는 총파업이 있었지만, 대량 처형으로 진압되었다. 1919년 동안 거의 5천 번의 파업이 독일 안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발전은 판네쿡이 주요 참여자였던 독일 공산주의운동 내에서 전술논쟁의 시급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월, 2월 사건의 공동참여에도 불구하고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융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KPD(독일공산당) 창당대회에서 두 집단을 갈라놓은 차이는 베를린에서의 KPD(독일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6월)에서 다시 나타났다. 갈등의 첫 번째 그림자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사망 이후 KPD(독일공산당)의 지도자로 내정된 Paul Levi가 브레멘과 함브르그 조직의 규율부족을 공격할 때 드리워졌다. KPD(독일공산당)의 패배에 좌파가 책임이 있고 당의 첫 번째 과업은 중앙집권화로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Levi는 보았다. 동시에 Levi는 KPD(독일공산당)가 고립을 벗어나는 길은 좌파를 버리고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80만 성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브르그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평의회체제가 확립되면 당은 스스로 해소할 책임이 있다는 가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주제는 Levi 와 그들의 차이를 개관한 판네쿡의 계획에 요약되었고 1919년 8월 KPD(독일공산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열띤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 당 대회 이후 레비는 좌익반대파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시작했다. 브레멘, 함브르그, 베를린에 강력한 거점이 있을 뿐 아니라 KPD(독일공산당) 지역 지부에 사실상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비는 그 당시 베를린 감옥에 있었지만 Zentrale의 입장의 이론적 정당화를 해온 칼 라덱의 도움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라덱은 볼셰비키의 결단성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중앙집권적인 당 조직의 지지자였다. 레비와 같이 라덱도 KPD(독일공산당)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를 이기므로 그리고 기존하는 노조운동 내에 활동함으로써 고립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까지 10월 24일에 열릴 하이델베르그 당 대회가 힘겨루기의 결정적 검증이 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레비와 Zentrale는 반대파를 생디칼리스트로 비난하고 당 업무에 “가장 엄격한 중앙집권주의”를 요구하는 당 정책의 지침서를 준비했다. 이 지침서는 사실 최후통첩이었다. 왜냐하면, 이를 따르지 않으면 출당된다는 것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당 대회는 처음부터 레비에 의해 통제되었다. 대표 다수는 지명되었고 대회소집이 당규에 따른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절차도 토론이나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는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33대18로 지침서가 통과되자 레비는 반대표를 던진 대표를 출당시키려고 움직였다. 반대파의 주요 인물인 Wolftheim은 독일에 두 개의 공산주의당이 있다고 선언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축출과 함께 독일 공산주의 첫 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했다. 독일공산주의의 두 흐름 사이의 차이는 전술에 대한 단순한 차이보다 더 깊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공산주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노정 시켰다. 이러한 사건 이후 판네쿡은 다음 해 봄에 나타날 새로운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핵심역할을 할 독일 혁명의 실패를 이론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주>

 


1. Gerber의 박사 학위 논문 「Anton Pannekoek and The Socialism of Worker's Self-Emancipation, 1873-1960」의 제9장 “Years of Revolution : Pannekoek and The Formation of European Communism, 1917-1919"를 각주와 인용문을 빼고 번역하였음.

 


2. 1905년 조직된 미국 최초의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 전 노동자의 산업별 조직화, 자본주의 제도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확립을 위하여 결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反戰) 활동으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았다. 

 


3. Johann Knief (1880-1919), teacher, member of the SPD from 1906, editor on the Bremer Bürgerzeitung from 1911 until 1916. He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Linksradikale’, and later of the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 and edited Arbeiterpolitik, where he worked with Radek. Knief, alias Peter Unruh, was imprisoned by the government for revolutionary activity in January 1918.

 


4. 자유군단(Freikorps)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제대 군인 및 우익 장교들에 의해 독일에서 조직된 극우 의용병 단체로 주로 좌익 세력과 시가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지휘관은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구스타프 노스케였다. 이들은 독일 공산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좌익 혁명 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을 괴멸시켰다. 자유군단은 전쟁 당시 자신들이 입던 군복과 철모,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예비역 및 현역 장교들이 지휘하였다. 나치 돌격대의 초기 지휘관들과 에른스트 룀도 자유군단 출신이었다. 이들 자유군단 구성원들은 자유군단이 해체되면서 기존 우익계 정당의 폭력 조직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 돌격대 역시 그들을 받아들였다.

 


5.‘슈틴네스-레기엔 협약’ - 자유노동총연맹의 의장 레기엔(Carl Legien)이 제철 기업가인 슈틴네스(Hugo Stinnes)와 협정을 체결, 하루 8시간 노동일 제도를 도입하고 ‘황색 노조’(어용노조)에 대한 기업가들의 지원을 중단하는 등의 내용.

 


6. 에베르트 당시 대통령과 육군 참모총장 빌헬름 그뢰너 장군 간에 맺어진 조약으로 군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지되도록 하되, SPD정권은 군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협정.

 


7.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혁명단체.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결성했다. 이들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고 전쟁 기간 중 계급 투쟁을 중지하려 한 사회민주당의 정책에 반대해 전쟁 반대와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이름은 1916년 1월부터 이들이 발행한 비합법 기관지 <스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스파르타쿠스서신)에서 비롯됐다. 1917년 결성된 독립사회민주당에 참가해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려 했다.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까지 전당 대회를 열어 독일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단원들은 12월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주동해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소위 스파르타쿠스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경찰과 연계돼 있던 자유군단(Freikorps)에게 체포되어 살해됐다.

 


8. 1918년 11/12월,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치”(독립사회민주당)냐 아니면 “의회주의”(독일사회민주당)냐 라는 대안을 놓고 진행된 논쟁이 노동자운동의 분열로 이어진다. 1919년 1월 5일 독립사회민주당은 독일사회민주당과의 공동행동에서 철수한다. 혁명 지도자들, 스파르타쿠스 연맹, 독립사회민주민당은 대중시위를 촉구한다.
같은 날 베를린에서는 무장 노동자들이 주요 신문사 건물을 점거한다. 이 중 하나가 독일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Vorwärts/전진) 및 독일사회민주당 제국정당 학교가 자리한 “린덴하우스”(Lindenhaus)다. “포어베르츠”는 유난히도 다수파 독일사회민주당이 완고하게 견지하던  “함구와 질서”(Ruhe-und-Ordnung)의 노선을 선전했다.
1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구스타브 노스케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반격의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위해서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간 황제의 군부를 불러 원조를 구한다. 특히 “포르베르츠” 건물을 둘러싼 전투가 치열했다. 심한 폭격을 받은 점거 노동자들은 결국 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백기를 들게 해서 적군 사령관에게 보낸다. 대표단의 목적은 '안전한 철수'를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명 협상 대표단은 인근 용기병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한 명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와 함께 돌려보내고, 나머지 5명은 학대를 받고 총살된다. 나중에 이 자리(베를린 메링광장)에서 나치즘이 일어난 것은 옛 세력(황제)과 결탁하고 혁명을 죽인 독일사회민주당의 원죄에 있다.

 

 

 

*글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 연표


1905년 러시아 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대중파업론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찌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 혁명 발생, 대중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 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 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 독일사민당 진압(룩셈부르크 암살당함)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 이것이 발전해서 국제연맹 산하의 국제노동기구) ->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 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 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 노동자총연합 AAUD 창립(공장조직의 연대) 오토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소아병 : 공산주의에서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산당 (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됨
1927년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 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한국에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Left Communism)가 소개된 것은 80년대 레닌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공산주의좌파 진영에서 레닌 '최악의 저작'으로 혹평 하는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가 그것인데, 이에 대한 재평가와 비판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기관지  '코뮤니스트'에 연재 중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477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이 팸플릿의 권위는 90년 넘는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가진 '공산주의좌파'를 '좌익소아병' 한 단어로 매도하며 오랜기간 세계 공산주의 운동뿐 아니라, 한국운동사회도 지배해왔으며, 계급투쟁의 중요한 시기마다 기회주의자들의 자기합리화 도구로 전락해왔다. 한국에 공산주의좌파가 공산주의자 자신에 의해 체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중반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공산주의(혁명적 맑스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무려 20년 넘는 기간 공산주의좌파는 이론가들의 연구대상에서도 제외되었고, 구체적인 이론적 쟁점에 대한 논쟁도 없는 상태에서 이상주의적인 '극좌파' 또는'초 좌익'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다가 공산주의좌파에 기원을 두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론, 즉 1920~30년대 볼셰비키와의 논쟁과 유럽 혁명의 실패로부터 자신을 정립한 '평의회 공산주의(Council Communism)'와, 그것에서 시작하여 '당(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 '평의회주의(Councilism)'를 '공산주의좌파'와 혼동하는 운동세력이 이곳에서는 아직 다수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이 사회주의자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혁명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사상노선에 대해 역사적인 기원을 설명하고, 공산주의좌파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1. 기원과 구분


1) 공산주의좌파


공산주의좌파는 마르크스주의 연속성에 있는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이다.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좌파를 형성했는데, 러시아의 레닌과 함께했었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1),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2)로 대표되는 이들은 기회주의 세력이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확산되자 자신들의 정당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로서 활동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전망을 확인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운동 내부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마르크스, 엥겔스에 기원을 두었다는 조직들이 서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예전의 개량주의자들이 장악한 사회민주주의 당들은 과거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먹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동원의 앞잡이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


반면에 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들게 한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좌파 흐름이었다. 또한, 1919년 창설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좌파 흐름이었다. 이들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던 1919년, 코민테른 창설 총회에서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라는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등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그간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발전되고 혁명적인 입장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시인이자 공산주의좌파였던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3)는'국제 프롤레타리아 선두의 전위 투사'로서 당시의 레닌을 환영했고,"세계 노동계급은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 자신의 조직화, 집중화, 형태 그리고 표현을 이러한 노동자 평의회에서 발견한다." 라면서 소비에트를 찬양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의 악명 높은 팸플릿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통해 호르터와 그의 동료 판네쿡을 '소아병'에 걸린 극좌파로 혹평한다.


그러나 1917년 두 사람은 국제 혁명운동 내에서 주요한 인물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회민주주의 당들과 노동조합의 참전은 이들에게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의 도덕적 비열함뿐만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지도자들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조직형태의 파탄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러한 낡은 노동조합에 맞서,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대치시켰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당 형태에 맞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의 발전에만 집중된 정치적 전위의 '새로운 형태'를 옹호했다.


서유럽의 많은 지역 특히 독일에서 그러한 관점은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폭넓은 반향을 얻었다. 1919년 말에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독일 공산주의좌파들은 새로운 당인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이 당은 짧았지만, 독일 노동자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 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1920년 초 우익들의 카프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산주의좌파 활동가들은 루르 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안에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유아적'이고 '무정부 노동조합 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지라도, 낡은 의회주의 및 노동조합 전술에 대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거부는,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는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전술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은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쿡과 호르터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코민테른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 내부를 변질시켰다.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이었던 소비에트에 비해 반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고,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행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로 제시되었다.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 활동의 강조, 동양인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을 호소, 그리고 애국적 민족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정책 등이 그것이었다. 이때 공산주의좌파들은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했듯이,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했다.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 민족해방에 대한 국제주의적 입장, 프롤레타리아 독립성을 훼손하는 통일전선의 거부 등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공산주의좌파들은 코민테른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활동했다. 독일­네덜란드의 판네쿡과 호르터, 이탈리아의 보르디가, 러시아의 오신스키, 스미르노프, 영국의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4) 등 공산주의좌파(코민테른에서의 공산주의 좌파 흐름)는 본질에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요약과 현재>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914년 제국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제주의를 방어했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 창설에 공헌했고, 1920년대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주로 활약했다. 즉, 공산주의좌파는 1920~30년대에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서 분리해 나왔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 특히 독일,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의 연속적인 공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반혁명과 파시즘 아래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며 살아남았고, 68혁명 이후 고무되어 1970~80년대 국제적인 혁명조직을 건설했고, 현재에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볼셰비키와의 논쟁, 그리고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회민주주의 좌파에 속했던 공산주의좌파였다. 이들은 오랜 기간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타났으며, 네덜란드의 판네쿡과 독일의 칼 스로더(Karl Schroder), 오토 륄레(Otto Rühle)5)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 후 폴 매틱(Paul Mattick)6)이 중요한 이론가가 되었다.


판네쿡은 190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독일에서 활동했는데, 브레멘에 있는 동안, 항만 노동자의 아주 중요한 비공인파업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계급투쟁에 대한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을 아주 이른 시기에 거부하게 된다.


오토 륄레도 판네쿡처럼 1920년대 볼셰비즘을 거부하는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히 다른 조직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정립한 최초의 인물 중의 하나다.


이러한 생각들은 더욱 세밀하게 정립 되어갔고, 그 경향들은 평의회 공산주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독일혁명의 실패를 겪은 이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평의회 민주주의'의 방어와 '당 권력'의 거부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볼셰비키와 볼셰비즘으로부터 구분하였고,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20년대 독일과 러시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처음에는 레닌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볼셰비즘과 구분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10월 혁명이 짜리즘(tsarism)을 붕괴시켰고 봉건 관계를 끝장냈지만, 러시아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와 상관없다'는 것에 근거해, 러시아에서의 생산이 계급사회인 사적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가치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스크바를 언급하면서, 러시아가 더는 공산주의가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1930년대에, 수많은 잡지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을 위한 공개토론장을 제공했는데, 당시 공산주의좌파들은 자신들을'평의회공산주의자'라고 칭했었다. 잡지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폴 매틱의 '국제 평의회 통신(후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가 됨)'이었는데, 평의회 공산주의 주요 이론가들인 판네쿡, 오토 륄레, 칼 코르쉬(Karl Korsch)7)가 기고했었다. 이러한 잡지들 속에서 발전한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분석은 높은 수준이었지만, 반혁명의 기나긴 어둠은 이들을 오랜 기간 고립시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후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0~70년대의 급진적 정치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레닌주의 그룹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8년 이후의 리버테리안(자유의지주의)경향 좌파의 생각에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때 평의회 공산주의는 초기에 레닌주의와 결별한 그룹과 사상가들인 '상황주의자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 '존슨-포레스트' 경향들과 접촉했고, 몇몇 경우에는 가족 역사 내의 우연성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노암 촘스키는 뉴욕에 있는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삼촌에 의해 급진적 정치와 처음 만났다. 이후 현재까지 평의회 공산주의는 실천(조직)적 운동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반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으로 자리 잡아 여러 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안톤 판네쿡, 오토 륄레, 아펠(Jan Appel), 칸느 메이예르(Henk Canne-Meijer), 폴 매틱, 칼 코르쉬, 카요 브렌델(Cajo Brendel)8)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주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볼셰비키(레닌)와의 논쟁에서 자신들을 정립했는데,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한다. 당에 대한 권력의 거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의 분리, 노동조합과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평의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결실을 제거한 일종의 반혁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스탈린을 볼셰비즘과 볼셰비키 혁명의 계승자로 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좌파와 유사한 기원을 두지만, 국제적인 분파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들은 반혁명시기 이후 오랜 기간 고립되었다가 1960~70년대부터 재발견되어 이론화되었으나 실천적 운동세력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러시아혁명, 독일혁명의 경험 속에서 '반의회주의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했지만, 여전히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도식적인 완결된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평의회주의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1926~7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테제에 맞서 모든 공산주의좌파들은 반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평의회주의자들은 '자율'과 '자주관리'에 기반을 둔 '한 지역(국가)'에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방향으로 나가게 됨을 의미한다. 그 후 평의회주의자들은 특히 1930년대 공개적으로 '지방적 및 민족적' 사회주의 건설의 테제를 이론화했다.


또한, 평의회주의자들은 당이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평의회(소비에트)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계급투쟁의 퇴조기(계급의식의 하강기)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자체의 몰락을 가져온다. 당시 네덜란드 좌파는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자본주의 쇠퇴기에서 노동자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들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해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로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결합하여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들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평의회주의가 주장했던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계급이 역사적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은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과 혁명적 생디칼리즘(syndicalism)으로 이어졌으며, 1917~23년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으로, 그리고 오토 륄레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학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의회주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오토 륄레,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as),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헨리 시몽(Henri Simon)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방해되는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이들은 반혁명의 암흑기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가 68혁명 이후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재해석 되어 나타났지만, 운동이 성숙함에 따라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조직을 거부하는 편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평의회주의는 현재에는 독자적인 사상이나 노선을 가진 운동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평의회 공산주의를 리버테리안적으로 해석한 일부 그룹에 의해 '노동자 자주관리'와 '평의회 민주주의' 강조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이론과 한계


1) 레닌과 소련사회 비판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소련사회를 처음으로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했는데,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운동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주의 노선과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근거로 하여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형식의 조직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들의 출발점은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국가주의와 지도자 중심의 정책을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즉,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가 관료에 의한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소련의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를 의미하며,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자평의회에 의하여 일하는 대중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생산에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1938년 레닌의 철학에 대해 분석한 팸플릿(Lenin as Philosopher)을 출판했다. 여기서 판네쿡은 레닌의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러시아에서 짜리즘에 반대한 투쟁은, 오래전 유럽에서 봉건제에 반대한 투쟁과 닮아 있었다. 러시아의 교회와 종교는 현존권력을 도왔다. 그런 이유로 종교에 반대한 투쟁은 사회적 필연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역사유물론을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유물론과 거의 구분되지 않게 사고했다. 유물론이란 교회와 종교에 반대한 영혼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혁명 전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와 혁명적 프랑스의 사회적 관계의 유사성도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그의 당 구성원들이 자신을 자코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8년 3월 볼셰비즘은 이미 최소화된 권력이었던 소비에트를 야만적으로 공격하는데, 그것은 10월 혁명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가 말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는 그러한 시스템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 독재는 임노동의 철폐와 노동착취의 절멸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생산자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 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는 내전 동안에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평의회를 약화시켰고, 1921년 3월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그들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 당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하는 일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의 실패로 인한 고립 속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속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


2) 노동자평의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는 과거의 조직들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조직들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판네쿡은 평의회 조직체계에서는 일반 대중 위에 군림하던 전문적인 지도자를 없앰으로써 지도자와 대중들 간의 갈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평의회가 사회주의 변혁과 건설과정에서 중심적인 조직의 역할이 부여되지만, 평의회는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일부 임의적인 혁명적 집단에 의하여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였다.


평의회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분석에서 판네쿡은, 평의회는 일하는 대중들의 실천으로부터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도부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는 비공인파업이나 공장점거 투쟁 등과 같은 실천적 활동에서 태생적인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되는 파업위원회에 평의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계급공동체'의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두 개의 실천이 국가 차원으로 확장된다면 자본주의 국가 자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조직이 필요한데, 바로 이때 노동자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며,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할 때까지 평의회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이론은 특정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이 불안정노동과 미조직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대공장)' 중심의 투쟁형식은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로의 투쟁 확산에 약점이 있고, 투쟁이 전면화되지 않는 한 광장에서의 평의회 민주주의 실현은 지속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상시기에도 평의회 형식의 조직은 노조를 넘어설 뿐 아니라 지역, 업종, 고용형태 까지 넘어서서 가장 넓게 계급을 포괄하는 아래로부터의 계급조직이어야 하고, 내용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평의회민주주의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는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나 미조직프롤레타리아까지 포괄한 새로운 '평의회 운동'의 경험과 전형이 필요하다.


3) 자발성과 대중행동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실질적인 혁명은 반자본주의적 힘이 친자본주의적 힘보다 더 성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자본주의적 관계 아래에서의 그러한 힘은 반자본주의적으로 조직화할 수 없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것은 불만을 가진 대중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자신의 반란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모든 필요한 결정사항이 '노동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개념에서는 노동자와 운동가 사이의 분할에 기초해서는 공산주의가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계급에 행동을 호소하지 않고, 그들 자신을 노동자 계급의 구성원의 일부로 사고한다. 그들은 계급과 함께하면서 자본주의 흥망성쇠를 향한 발전경향을 인정하고, 노동자의 현재 활동과 그들의 목적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선전그룹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단지 노동자에게 필요한 행동의 과정을 제안할 뿐이라 주장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신하여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스스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대해 미래의 전망 즉, 공산주의 혁명의 최종목표를 밝히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현재 필요한 것을 완전히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이라 말한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행동이 일어나는 어디든 참여하며, 모든 경우에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이 분리된 프로그램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러한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모든 결정에서 자신들의 직접 참여가 증대될 때 운동이 발전하고 혁명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의 주체'문제와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에 대한 고찰은 이른바 '당 중심(주의)' 운동에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투쟁 속에서 자기 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계급 스스로 성숙을 통해 운동을 발전시키고 역사적 역할을 할 때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연결하고, 계급적 단결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며 계급의식을 질적으로 도약하는 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혁명조직(당)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4) 한계와 전망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노선에는 많은 한계가 있고, 오늘날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과 논란이 뒤따른다. 특히 자본과 그들의 방어자들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자발성을 방어하려는 노력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큰 공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계급구성에 대한 고정된 이해로 비쳐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행동, 그리고 인종과 여성, 소수자 문제에 있어 '계급중심(환원)'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이 노동자 운동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계급정치의 중핵'으로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에 대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평의회 조직'들은 1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렬한 사회적 갈등의 순간마다 출현해왔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시작하여, 헝가리로부터 칠레까지, 폴란드로부터 이란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수천 번의 비공인파업과 광장점거에서의 대중총회를 통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3. 평의회주의 오류와 변형


1) 당에 대한 거부


평의회 공산주의자였던 오토 륄레는 1924년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하나의 당이 프롤레타리아적(的)이라는 단어 상의 의미만으로 당이 혁명적 성격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당의 혁명적 성격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단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변할 때 말이다."


륄레는 처음에 '혁명은 당의 과업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의 과업'이라며, 이전의 당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당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조직)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과도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의회주자들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부족했다.


2) 경제주의 오류


평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추진력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20세기 초 이미 세계시장의 형성을 완성했기 때문에 일국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그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기지로서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혁명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평의회주의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에 매달리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정치수준에서 가로막혀'노동자계급의 조건에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착취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정복을 진행할 수 있는 경제 권력을 옛 사회 내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궤적, 즉 세계 수준에서의 정치권력 획득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의회주의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성격'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착취기반이 경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공산주의적 경제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일국에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노동자 착취를 전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의 비중이 압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의식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 계급투쟁의 마지막 결과이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이 경제적 성격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평의회주의자들은 간과했다.


이처럼 평의회주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을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기관리'기획으로 바꾸었고, 그 안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찬양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좌파들은 공산주의는 관리가 아니며, 자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서, 공산주의는 '자본의 완전한 파괴'라고 주장했다.


3) 평의회주의의 변형


당 조직에 대한 거부,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 평의회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주장해온 평의회주의는 반혁명기를 거치면서 스스로 생존능력을 상실했으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여러 조류와 만나 변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는 무정부주의와 연결되었고,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은 '자주 관리', '노동자 통제'라는 경제주의 이론으로 정식화되었고,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주요 주장에도 평의회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좌익공산주의자, 평의회 공산주의자, 리버테리안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교류가 활발하고, '공산주의 최종 목표'와 '당과 계급의 역할,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열린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리버테리안,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내부에서 평의회주의의 정치조직 거부와 경제주의 논리는 약화 되었다.

 

 

4. 이탈리아 좌익분파와 평의회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좌파


1920~30년대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유럽혁명의 실패는 독일에서 공산주의좌파들을 파편화시켰다.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 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지라도, 나치 테러로 제압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반혁명의 전면화와 '평의회주의' 흐름은 좌익세력을 더욱 분산시켰으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원칙적 기반 위에서 국제적 토론과 협동을 위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반혁명에 대해 줄기찬 투쟁을 했다.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과 좌익반대파 망명그룹과 논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개방적 정신은 망명분파에 의해 성취된 보편적 강령의 진전과 함께 빌랑(Bilan)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좌파는 반혁명과 계급투쟁의 퇴조 속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히 정의했다. 그 임무는 첫째, 전쟁에 직면하여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할 것, 둘째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대조표'를 만들 것, 셋째,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즉, 독일-네덜란드 좌파가 러시아 혁명의 퇴행과 볼셰비키 당이 보인 반혁명적 역할에 대해 '10월 혁명과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당과 혁명을 모두 버리는 '평의회주의'로 경도된 반면, 이탈리아 좌파는 항상 명확하게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에 대한 '평의회주의적' 관점을 가진 네덜란드 좌파와 '당이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언하면서 투쟁했다.


전쟁 시기 수감 및 가택연금 속에서도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9)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 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같은 해 프랑스 망명분파는 프랑스 공산주의좌파(Gauch Communiste de France, GCF)를 만들었다. 이때 프랑스 공산주의좌파는 빌랑의 정신에 따라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게으르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이행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이들은 이탈리아 좌파의 확고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에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훌륭한 공헌들을 통합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분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공산주의 입장 중에서 명료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탄생시켰고, 기존 혁명그룹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혁명의 시기인 1917~1920년대에서, 반혁명의 시기인 1930~ 1940년대를 거쳐, 계급투쟁의 부활기인 1968년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은 공산주의좌파들에게 과거의 유산을 쇄신하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게 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공산주의좌파들은 조직, 사상,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확대되고 심화하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좌파들이 90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계급투쟁의 전진과 후퇴 속에서 수많은 장애물과 곤경을 만나면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면서 약점을 보완하고 계급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는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각종 기회주의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고, 내부적으로는 조직(역할)을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의 극단적 오류와 경직된 강령주의로 공산주의 운동 단일화를 가로막은 '보르디가주의'와의 기나긴 투쟁10)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고 확장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은 평의회주의의 오류와 평의회 공산주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래의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우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비록 평의회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해결책은 오류이었을지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과 혁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어떻게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부에서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량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킬 혁명의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계급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떻게 계급의식을 방어하고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실천운동이다.


~형로


2014년 4월

 

<주>


1. 안톤 판네쿡(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좌파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2. 아마데오 보르디가(1889~1970)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 이론에의 기여자였으며,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였다. 또한 코민테른의 지도자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공산당의 주요 인물이었다.


3. 헤르만 호르터(1864~1927)는 네덜란드 시인이자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88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새로운 안내자(De Nieuwe Gids : The New Guide)를 공동작업 했던 네덜란드 작가들의 매우 영향력 있는 그룹인 '80년대인들(De Tachtigers)‘의 주요 회원이었다.


4.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0)는 영국의 공산주의좌파이자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e)였다.


5. 오토 륄레(1874-1943)는 전쟁공채에 반대하여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투표한 공산주의좌파이며 독일공산당 창립멤버였다.


6. 폴 매틱(1904-1981)은 독일 공산주의좌파이며, 이후 미국에서 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주창자이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혁명사상의 반대자였다.


7.칼 코르쉬(1886-1961)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서구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창립 문서 중 하나를 작성한 독일 공산주의좌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사회주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 되었지만 후에 모택동의 지지자가 되었다.


8. 카요 브렌델(1915-2007)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좌파였으며 제2세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자 판네쿡의 동조자였다.


9. 오노라토 데이먼(1893~1979)는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처음으로 활동했던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 혁명가였다.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이후, 그는 조직된 이탈리아 좌파와 함께 활동했으며, 흔히 기관지 공산주의 투사(Battaglia Comunista)로 알려진, 국제공산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 PCint)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1945년에 창립된 국제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숫자상으로 가장 큰 공산주의좌파 조직이었다.

 

10. 보르디가주의와의 투쟁은 [코뮤니스트 4호]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구조와 기능 2 :  당과 계급, 당의 중앙화에 대한 이탈리아 좌파의 논쟁을 중심으로 " 를 참고 바람.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의 국제 공산주의(혁명) 조직은 다음과 같다.


ICC(국제공산주의흐름): http://en.internationalism.org

ICT(국제공산주의경향): http://www.leftcom.org

IP(국제주의자전망): http://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

ICG(국제공산주의그룹): http://gci-icg.org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의 국제적인 토론 그룹(포럼)은 다음과 같다.


Controversies (국제주의 공산주의좌파 포럼) :  http://leftcommunism.org

Internationalist Discussion Network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 :  http://groups.yahoo.com/group/intsdiscnet


*세계 여러 곳에서 최근 10여 년간 생겨난 신생 공산주의좌파 그룹들과 공산주의좌파 친화적 그룹, 보르디가주의 경향의 조직은 다음 호부터 별도로 소개 예정이라서 제외했다.

 

 


<참고문헌>
 

1.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1920, V.레닌


 
2.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2008, 오세철
 


3. [좌파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1998,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
 


4. [러시아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2004, International Review


 
5. [평의회 공산주의], 1939, 폴 매틱
 


6. [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비판], 1999, 카요 브렌델
 


7. [WHAT IS COUNCIL COMMUNISM?], 2000, Wage Slave X


 
8. [Council communism - an introduction], 2005, libcom
 


9. [혁명적 전통- 평의회 공산주의], 1995, 스티브 라이트


 
10. [노동자평의회], 2005, 빛나는 전망, 안톤 판네쿡


 
11.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1984, J. P. Geber


12.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1900–68)], 1988 and 2008, Philippe Bourrinet


13.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6-45], 1992,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4. [THE COUNCIL 'COMMUNISTS BETWEEN THE NEW DEAL AND FASCISM], 1976, Gabriella M. Bonacch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865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노련공대위 및 사노련사건 피고인 일동 성명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08/22 13:40
  • 수정일
    2014/08/22 13:4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사노련공대위 및 사노련사건 피고인 일동 성명서]

 

사노련 사건 대법원 판결에 굴하지 않고,  정치사상의 자유와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대법원 2부는 오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사건에 대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일부 집시법 위반 혐의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을 뿐, 이번 재판의 핵심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이것은 1심, 2심 판결에 이어, 정치사상의 자유에 대해 또 한 번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다.


정부가 이미 해산한 사노련을 4년째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모두 실업, 가난, 해고, 비정규직 제도 등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참상을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정부들은 선령 제한을 풀고, 세월호의 설계변경을 허용하며, 과적과 안전시설 미비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정부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산업재해들을 방치하고 있다. 오직 유병언을 비롯해 한 줌 회장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이 정부들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더욱 거센 탄압을 통해 한줌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려 발악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재갈을 물리려고 집회 시위, 파업, 정치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물론이요, 국정원을 동원해 대선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구 사노련은 이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해왔다. 경제파탄의 책임을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지 말 것을, 오히려 투기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강화에 여념이 없는 자본가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했고,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했다. 유가폭등 물가폭등으로 신음하는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4대 정유사를 비롯한 재벌 대기업들의 영업비밀 폐지, 국유화 조치를 주장했다. 탐욕에 사로잡혀 있을 뿐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자본가들이 아니라, 노동자가 직접 일터를 통제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라는 암초를 제거하지 않는 한 노동자 민중의 삶에 희망은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나아가서 몇몇 회장들의 천문학적 이윤을 보호하기 위한 비인간적 경제체제가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 민중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경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정당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생명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병언 일족의 이윤이 아니라 승객들과 선원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면, 세월호는 선령 연장 없이, 설계변경 없이 진즉 해체돼 이미 고철이 되었을 것이다. 선원들과 고박 노동자들이 세월호를 통제 감독할 수 있었다면 과적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세월호 대학살극은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들의 영업비밀이 폐지되고, 박근혜 정부가 물러났다면, 또한 모든 정부 기구의 정보들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다면 세월호 학살의 책임자들은 모두 정의의 심판대에 올려졌을 것이다.


사노련의 주장은 오늘날 경제파탄과 세월호 학살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전면적으로 대변한 것일 뿐이다. 대법원 판결은 현 정부는 민주주의와 정의,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과 절대 양립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부의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사노련 피고인들과 사노련 공동대책위는 자본가들과 억압적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국가보안법을 들이밀어 사회주의 사상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몸부림은 가망 없는 애처로운 짓일 뿐이다!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상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라”는 요구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현 정부의 실체가 분명하다면, 고통 받는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만이 진실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치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권리도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굳건히 연대하고, 이들과 함께 우리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인간다운 공동체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우리를 조금도 멈추게 할 수 없다!

 


사노련 회원들에 대한 유죄판결, 즉각 철회하라!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정치·사상의 자유 보장하라!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자유 쟁취하자!

 


노동자투쟁에 대한 탄압 분쇄하자!

 


세월호 진상위에 기소권과 수사권 보장하라!

 


2014년 8월 20일

 


사노련탄압 분쇄와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사노련사건 피고인 일동(박준선, 양준석, 양효식, 오민규, 오세철, 정원현, 최영익, 고 남궁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연극 <반도체소녀> 크라우드 펀딩에 함께 해주세요.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4/08/02 20:33
  • 수정일
    2014/08/02 20:3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연극 <반도체소녀> 크라우드 펀딩에 함께 해주세요.

 "8/9일 까지 입니다! 함께 해주세요"


●후원방법


1.크라우드 펀딩 을(밑에 주소를 클릭하시면 후원가능합니다)
https://tumblbug.com/day2004
에서 8월9일까지 합니다!


2만원 부터 가능하십니다^^
 # 출금은 8월9일 이후에 목표액 성공하면 출금 됩니다!!!


2.온라인 후원 이 힘드신 분은 계좌이체
01090236542
02-953-6542
문화창작집단 날 로 연락 주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국민 834702-04-138045 최현


3.밑에 주소는 "힘내요"란 곳인데요 이곳에서는 무료 포인트(500원가량의)로 반도체소녀 인터넷 생중계를 위한 자금을 후원해주실수 있으십니다.! (6월30일 오픈)
http://himneyo.com/main.jsp


국제코뮤니스트전망도 후원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선거와 월드컵을 넘어 코뮤니즘으로! 코뮤니스트 4호가 나왔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I. 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II.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III.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집중화와 규율
IV. 볼셰비즘의 역사적 궤적
V. 반-볼셰비즘의 두 운동: 개량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투쟁
VI. 레닌이 한 것으로 주장되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의 핵심
VII. 이탈리아의 문제에 대한 부록

 

lenin.jpg


2장.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


우리는 레닌의 정연한 저작들을 이해함으로써 현재 유일하게 맑스주의에 충실한 좌익 공산주의에 적대적으로 그것을 인용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그 저작의 첫 페이지를 읽었는지 의심할 것이다. 그 저작은 ‘긴급한’ 필요에 의한 2차 세계대회의 테제의 이론적 합의안의 전조가 되었으며, 2판 부제는 맑즈주의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대중 담론 에세이(이 ‘대중 담론’의 부제는 저자의 겸손함으로 인해 고전적 제국주의로 부쳐왔다)이다.
첫째 장은 스탈린주의 추행의 위대한 업적들을 파괴하는데 충분하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결과는 1914년의 훨씬 더 불명예스런 사회-애국주의자들이 한 짓보다 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국사회주의라는 비열한 '이론'이다. 그동안 스탈린-후르시쵸프주의 신문과 볼셰비키 공산당 역사에 대해 ‘수정된’ 단기과정은 그 이론이 레닌에 기초한다고 여전히 계속 떠들어댄다!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완전한 날조까지 해 왔다. 다음은 '단결! (Unitā)'의 1960년 8월 31일에 실린 글이다.

 

좌익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오직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지원이 있을 때에만 방어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는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혁명을 고무시키는 것이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책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좌익에 대한 첫 번째 날조다. 좌익은 러시아 바깥의 혁명을 인터내셔널의 코뮤니스트 활동을 통해 고무시키길 바랐지, 러시아 국가의 전쟁을 통한 방법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발상은 초기 '스탈린주의'를 특징지으며, 좀 더 근대적인 ‘스탈린주의’나 악명높은 후르시쵸프주의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거대한 날조가 레닌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이 국제 혁명을 '고무시키는' 이론은 맑스주의 - 맑스주의에 따르면 혁명의 발전은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의 계급투쟁의 성숙에 달려 있다 - 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레닌이 증명했다'고 새로운 책자는 지적한다. '사실 이는 레닌주의의 '평화 공존' 개념의 가정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책자는 트로츠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레닌을 죽이려 했다는 음모와 같은 날조와 상관없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여전히 트로츠키가 레닌의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맑스-레닌주의는 혁명의 잠재기에 필요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첫 번째 장이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중요성을 다뤘음을 상기해보자. 러시아 혁명의 성격이 보편적이며 국제적으로 중요하다는 레닌의 명백한 정의를 다시 한 번 읽은 이라면, 후르시쵸프나 톨리아티(Togliatti)와 같은 오늘날 레닌주의자들의 공식적인 테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20차 러시아 당 대회 이후, 이 작자들이 각 국가들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국가 나름의 길'이 있으며, 따라서 그 길은 상황에 따라 러시아의 길과 다소 다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조작된 주장에 따르면, 대체 다른 모든 혁명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어떤 성격이, 레닌의 용어로, 본질적이지 않은가? 그들은 그것을 신비화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소비에트 체계, 혁명적 테러리즘, 그리고 왜 아니겠는가, 봉기 폭력들이 모두 러시아만의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들이란다. 의회(제헌의회)의 파괴 자체가 러시아 혁명의 특색이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길 기다렸던, 그리고 진정한 레닌과 원칙적인 측면에서 함께 열광하고 이의 없이 동의하며 기뻐 날뛰었던,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의 첫 번째 성취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 레닌을 읽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난 처음의 몇 달 동안(1917년 10월 25일 - 11월 7일), 후진적 러시아와 서구의 선진국 사이의 거대한 차이는 서구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우리의 혁명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게 했을 수 있다.'

 

이것이 대중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번 더 지적할 필요는 있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세계 혁명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는 서유럽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1920년, 레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 누구나 둘 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반대의 경향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레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 아시아나 미국에서 혁명을 그리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러시아와 대서양 사이에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항복하지 않으려면, 그런 조건이어야만 했다.


왜 서유럽 혁명의 발전이 러시아의 것과 다른 것처럼 보이며,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러시아는 후진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그러했으며, 그것은 봉건적 전제정치로부터 겨우 몇 달 전에 벗어났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그 혁명은 전제정치나 봉건주의를 몇 세기 전에 전복한, 프랑스나 영국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실제 차이와 함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국가들의 혁명이 더 명확하고, 단호하며, 압도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비교하여 보다 덜 화려하고, 더욱 불확실하고, 망설여지게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레닌 저작의 중심 가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남아있는 노동 인민'에 대한 헤게모니는 산업화된 서유럽에서 더욱 쉽고 완벽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역겨운 정도로는 제3인터내셔널의 시체로부터 일어난 것들 정도에만 비교되는 제2인터내셔널의 몇몇 속물들만이 그러한 우스꽝스런 일이 일어난 후에 프롤레타리아 테러, 독재, 의회의 파괴가 유럽적인 것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성격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의 기회주의자들은 붉은 러시아를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했고, 오늘날 더욱 역겨운 이들이 그들이 격찬하는 방식대로 모든 이들이 믿는 체하며 이를 반복한다.
만일 러시아 혁명이 진실된 선거 시스템의 설립 몇 달 후에 의회를 없앴다면, 한 세기동안 의회가 있었던 나라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오늘날 배신자들은 호색한의 얼굴을 하고 이러한 국가에서는 의회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재미로, 부주의하게, 또는 위대한 블라디미르가 보드카에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모든 혁명의 특징들

볼셰비키 혁명은 시작될 때에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상황들이 근본적으로 다양할 수 있지만, 그 본질적인 과정은 모든 지역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밝히기 위해 레닌은 글을 썼다. 그 과정이란 무엇인가? 이 저작 뿐만 아니라 가짜가 아닌 맑스-레닌주의적 저작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우리는 그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를 포기한 이들과 함께, 누구든 40년 동안의 사건들이 역사가 거꾸로 흘렀다고 믿는 이는 그럴 것이라고 이해된다. 1920년,

 

'우리는 이제 충분한 국제적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혁명의 어떤 근본적인 성격이 지역적이지도 않고, 특히 민족적이지도 않으며, 러시아만의 것이 아니라 국제적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앞의 책, p.512)

여기서 저자는 오해를 피하고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국제적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혁명의 몇몇 특징 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한 특징과 부차적인 특징이 모든 나라들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의미에서 국제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국제적인 타당성‘(이 단어는 '가치'라는 말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이 국제적인 규모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혁명의 어떤 근본적인 특징들이 그런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앞의 책, 512쪽)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정확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좌익의 테제였다. 레닌은 그것을 직후에 설명한다. 하지만 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이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몇몇이 그러한지, 맑스주의 혁명 강령이 되는지(또는 그렇게 승인되는지) 지적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제국 황실의 숙청은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하며, 여전히 그에 대한 소음이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어디서든 불가피하게 반복되는' 특징이 아니다. 황실이 없는 나라들에서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짜르의 후손들은 왕조의 계승권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런 계승권이 없는 곳에서 살해는 무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바깥의 모든 혁명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유의미한 특징들은 전부가 아니라 오직 몇몇이 될 것이다. 어떤 것들은 타당하지 않다. 어떤 것들이 그러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세심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가장 중요한 구절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진실을 과장하고, 우리 혁명의 특정 근본적인 특징들을 넘어서까지 과장하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오류일 것이다. 선진국 중 적어도 한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 직후 뚜렷한 변화, 즉 러시아가 더 이상 혁명의 모델이길 멈추고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안에서) 다시 후진국이 될 것이라는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놓치는 것 역시 오류가 될 것이다.‘(앞의 책, 512쪽)

 

혁명이 곧 유럽으로 전파될 것이다 : 이것이 레닌주의의 중심 사상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의 승리 이후, 러시아는 경제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적 경로에서 독일식 구조가 저 뒤에 남겨놓은 후진국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레닌의 사상은 소비에트 독일, 또는 소비에트 유럽의 옆에서 사회주의 러시아가 낡은 경제로부터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그로부터 비록 국가의 형태를 띄더라도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아이디어로 완성된다.
그런 견해는 레닌 이후 분별없이 유행했던 개념, 한 나라가 모델이 되는, 주도적인 나라의 사회주의라는 공허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모방할 만한 모델이라는 이론과 러시아가 혁명의 후방에 있다는 이론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향한 변질된 국가의 길과 위에서 언급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국제적인 규모로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반복된다'는 강한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같은 모순이 있다 : 러시아 모델 이론이 바로 오늘날 모방적인 공존(emulative coexistence)이라는 미신의 첫 번째 토대였다.
1920년 러시아로 되돌아가 보면, 약속된 땅에 대한 묘사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프롤레타리아 주인들 앞에서, 우리는 위대한 레닌의 겸손한 학생들로서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길과 그것이 작동하는 바를 보았다는 믿음, 마치 그것이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일종의 스푸트니크과 같이 발명되고, 만들어진 무언가인 것처럼 여기는 믿음과 단호하게 싸웠다.
사회주의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맑스주의자로서, 빛나는 인간의 메커니즘이 아직 그 구실을 하기 시작하기 전인 전세계와 러시아를 위해 사회주의가 어떤 길이 되어야 할지 알았고, 그것을 확신했다. 행진하는 혁명군은 흘륭했고, 굳건했으며 고통스러웠지만, 공산주의의 즐거움을 향한 길로 인정되었다. 모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는, 그 자신과 러시아의 혁명군에게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고, 그들은 오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들이 대륙의 모든 부르주아 국가들을 전복시킬 수만 있었다면.
오늘날의 사악한 공존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반맑스주의자와 반레닌주의자의 입장은 모델 이론에 입각해 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10월 혁명에 대해 언급할 때 그러한 엄청난 오류를 다음과 같이 의인화했다. : '자본'에 반대하는 혁명.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 만약 승리했다면,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다. 경제적 결정주의와 유물론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대신 자발적 관념론이 진실이고 빛나는 것이다. 레닌은 역사를 창조하고,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모범이 되는 모델을 창조할 수 있었던, 따라서 대망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 신화의 영웅이 된다. 순례자들은 예언자의 망토 끝자락에 키스하는 수 밖에 없다. 모델을 심사숙고하고 그 모습과 비밀을 기다리고 있는 서구의 대중들에게 이야기해주면, 그들은 그것을 흉내낸다.
그러나 레닌은 메시아인 체 하지 않고 그 곳에 있다. 그래서 그가 더 겸손하며, 위대하다. 그는 맑스주의 유물론의 모든 측면에 대해 언급하고, 그가 살고 있는 역사에 대해 그의 변증법으로 가르치며, 그 모델을 비웃는다. 가엽게도 그 모델이 구식이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리 되리란 것을 믿고 바란다.
레닌을 자본의 처형자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머리를 숙이고 빛을 향해 눈을 뜰 것이다. 그람시는 그의 초라한 육체적 힘이 그의 관점의 날카로움을 유지시켜 주는 한 실제로 그러했다.
오늘날 블라디미르의 푸르게 빛나는 두 눈은 죽었지만, 그의 전형적인, 가차없는 논쟁의 힘과 전 세계가 기적적인 모방 덕에 공산주의로 변할 것이라는 몰상식한 해설을 혼동하는 것으로 충분한 어리석은 모방모델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많은 것들 중에 우리가 남긴 것이다.

 

 

러시아가 가르쳐 준 것

 

그러므로 레닌주의의 견해에서 러시아 혁명은 세계에 사회주의의 구조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다른, 더욱 위대한 국제적인 기능, 혼자만의 수단과 군대로 모든 곳에 있는 자본과 그 패거리들의 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한 가르침은 교의의 중요한 행간에 이미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최초로 증명된 것이다.
비록 그 시기에는 오늘날보다 상업 자본주의와 그것을 모방하는 가증스런 서구의 진정한 낙인에 의한 오염이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러시아식 뼈대의 사진을 찍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비유가 허용된다면, 혁명적 사건들을 영상으로 담아, 그로부터 소위 결정적인 순서로, 모든 유럽에 보편적으로 타당하도록 뽑아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시기의 압도적인 열정에 활기없는 것이 아닌, 역동적인 모델이 등장하는 것이다. 넌더리나는 조리법이 아니라, 사회적 부활의 분출하는 불꽃으로서.

그러므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지금, 모든(이것은 레닌의 강조다, 악당들아!) 나라에게 그들의 가까운, 피치못할 미래에 대한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밝히는 것은 러시아 모델이다'(앞의 책, 512쪽)

 

우리가 너무 긴 호흡으로 이야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모델은 현재의 재생산에 대한 현재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인 미래에 봉사할 과거로부터의 교훈으로 의미를 가진다.
비록 인간은 순진하게 모방하는 동물이고, 1960년의 인간은 이에 대한 안타까운 증거이지만, 1920년,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도약하는 그러한 권력의 돌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혁명 이론의 무오류성에 대한 거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열정적이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대지의 선진 노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혁명적 계급 본능으로 이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파악해 왔다.'(앞의 책, 512쪽)

 

문화도 아니고, 부르주아 학파의 가르침을 따라하는 것도 아닌, 본능!

 

레닌은 우리에게 그의 뛰어난 연구의 과정에서 보편적인 혁명 전선의 다양한 필수불가결한 특징들에 대해 가르쳐줄 것이다.

 

'여기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비에트 권력, 볼셰비키 이론과 전술의 근본적인 지점들의 국제적인 '중요성'이 있다.'(앞의 책 512쪽)'

 

여기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의 서론은 논쟁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시국적인 발언을 포함하여 가장 시급한 중요성을 살려 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단어들은 레닌이 약속한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우리는 이를 항상 유의미한, 이라고 이야기한다) 특징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화한 것을 주석으로 달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들은 '주요한' 것들이며, 레닌은 그것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볼셰비키의 이론과 전술이다.
국제적인 반향과 함께 영광스런 볼셰비키 공산당을 특징짓는 것은 그 교의에 있는 원칙의 체계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론이 원칙의 체계에 묶여있는 반면, 전술은 자유롭고, 불편부당하다고 이야기할 권리는 없다. 모스크바에서의 몇몇 대회에서 우리 좌익이 주장한 것은 레닌 그 자신이 섰던 입장 위에 있다 :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칙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게다가 그 원칙들은 모든 나라에,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에 타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1922년 로마 테제가 그 증거다.
이 문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자 지도자들과 카우츠키, 바우어, 아들러 등의 중도파를 비난하는데, 그들은 저속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은 아니었을지라도, ‘반동으로 증명된 이들’과 배신자들에게 볼셰비키 당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준 이론적이고 전술적인 원칙 체계들의 보편적인 타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닌은 가공의 민주주의, 평화롭고 유혈사태에 이르지 않는(우리는 여기에 '모방하는'을 덧붙일 권리가 있다) 세계 혁명의 특징들을 러시아 혁명의 특징들과 위선적으로 대비시키는 (바우어의) 팜플렛, 소위 '세계 혁명'의 현학, 야비함, 수치스러움에 뺨을 때린다. 사실 모든 혁명에 속한 것임에 틀림없는 그러한 특징과 모든 것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아는 1920년의 상황에서, 서유럽에서의 혁명 전투는 주어졌다.
레닌은 중도주의자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른 후, 카우츠키를 지적하며 오래 전 1902년 그가 맑스주의자였을 때 쓴 글 '슬라브 민족과 혁명'을 보여주고 싶었다. 거기서 카우츠키는 혁명의 중심이 19세기의 초반 프랑스에서 19세기 후반, 영국으로, 독일로 이동한 이후, 유럽 혁명의 지도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넘어갔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의 머지않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저술했던 레닌은 카우츠키에게 외친다, '18년 전, 카우츠키는 얼마나 잘 썼던가!'.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메아리 친다, 58년 전, 카우츠키는 얼마나 잘 썼던가!
슬라브 프롤레타리아의 엄청나게 기억할만한 착취 위에, 그런 얼음 비석 위로, 폐쇄된 얼음 껍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파시즘, 공존, 데탕트(detente),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길!
레닌이 국제 연맹을 자본의 요새라고 그 혐오스러움을 드러낸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레닌을 져버리고 국제연합의 그야말로 돈독이 오른 녹색 테이블 위에 그러한 비문을 쓴다.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불꽃을 후대에 넘겨주는 근대의 올림픽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 죽은 카우츠키와 언제나 빛나는 레닌은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러시아로 옮겨가는 불꽃을 보았다. 오늘날 러시아는 영광으로 빛나던 순간 이후 땅에 떨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불꽃이 다시 타오를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의 서두에 묘사했던 것처럼, 수치스러운 미국과 타락한 러시아 모두의 경쟁적인 억압에 맞서는 부활하는 서유럽을 생각한다. 양쪽 모두의 악의적인 외교관들이 포악한 독일의 문제를 외설스럽게 조작할 동안, (비록 장기적으로라고 할지라도) 그런 나라들을 통해 그 역사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저항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든 적이 되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백인이 힘을 잃고, 그들의 황인 흑인 형제들이 포효하며 행진하는 과정에서 반세기는 회복할 것이다.

 

 

독재와 실리주의자들

 

우리는 레닌의 글을 소개하는 이 장에서 칼 카우츠키, 오토 바우어, 프리드리히 아들러 등에 대한 파괴적인 공격 속에, 레닌은 언제나 그런 인물들, 중도주의자, 독립주의자(independents), 제 2.5 인터내셔널 주의자들처럼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에 있는 이들에 반대하여 가장 강력한 일격을 날려왔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만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그들을 우익들, 사회민주주의자들, 또는 사회애국주의자들, 부르주아지의 공개된 동맹들(open allies)과 경찰들, 이름하여 샤이데만, 노스케, 밴데발트, 맥도널드, 등등보다 전쟁과, 전후에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들로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사실 카우츠키는 독일에서 사회-사이비 애국주의 의회의 주류에 저항하는 반대파를 만든 첫 번째 인물이었다. (우리는 의회주의의 쟁점에 대해, 그것을 다뤄야 할 때, 칼 리프크네히트 스스로 1914년 8월 14일 당의 규율에 고개를 숙인 것을 다룰 것이다. 그것은 의회 그룹의 규율에 따라, 슬프게도 카이저 정부의 전쟁 공채에 찬성하는 투표를 조용히 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바우어와 과거의 맑스주의자 빅터의 아들 프리츠 아들러가 소위 오스트리아-맑스주의(마치 민족적 맑스주의가 있는 것처럼!)의 지도자들이었다. 빈에서 프리츠는 용감하게도 전쟁에 반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이론가로서 - 이런 평판의 대부분은 스스로 만든 것이었는데 - 맑스주의와 독재는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볼셰비즘과 레닌주의를 건전한 사회주의의 위반으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들에 따르면, 맑스주의자는 자유, 민주적 합의, 대중의 지지, 다수 '시민'의 자유 민주주의적 의견의 자유라는 규칙을 깨지 않을 의무가 있다. 그런 그들이야말로 맑스에 대한 가장 수치스러운 왜곡을 만든 이들이다.
레닌은 불과 칼로 그들에게 덤벼들며, 우리는 생사를 건 역사적 전투의 목격자이자 투사로서, 그러한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날 그런 진정한,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 우리의 영원한 적대자들이 파라부르주아(parabourgeois)라고 형용사 '구체적인'을 붙여 부를 - 행동은, 그 스타일과 교훈이라는 점 모두에서, 그리고 탁월한 레닌의 논쟁이 기록된 형식 그 자체가 의미심장하다고, 감히 이야기한다. 역사 앞에서의 그의 엄청난 책임 때문에, 이 극단적으로 비학자적인 대중의 지도자는, 이제 막 최근의 반제정 혁명으로부터 벗어난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에 직면하여, 변절자들이 칠칠지못한 비난을 자신에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레닌은 쓰고 있다. : 우리는 국민투표와 숫자로 표현된 합의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부르주아 시대의 노예제와 노예근성의 병리적 잔여물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젊은 이들은, 그리고 어떤 오염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테제나 이론서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도) 규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정치적으로 말하는 가장 가까운 이들을 흉포하게 공격하라! 그렇게 하면 너는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 편에서 우리는 레닌을, 다시말해 수백만의 인물들과 함께 실제 전투 속에 있었던 그 시절의 혁명가들의 보기로 들 수 있고, 다른 한 편에서 멍청이들, 레닌의 저작과 활동에 대해 파렴치한 왜곡을 이용했던 바보들의 가련하고 비참한 종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블록 안에, 전선에, 가공의 적의 오른편에서 고립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배신자들이 했던 짓의 반복일 뿐인 반대의 규범을 따랐다. 기회주의 역병의 세 번째 역사적 파동의 승리자는 우익, 중도 사회주의자와 함께 연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전시를 훨씬 넘어서서 평화의 시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카톨릭와 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회적 입장에서, 오염된 프롤레타리아와의 연합 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지와의 연합, 나아가 중간 계급과의 공공연한 협력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론적 질문은 실질적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레닌은 그들이 맑스를 잘못 해석한 교수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에 단지 기쁨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더 있다. 이 악당들은 서쪽의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는 군대가 볼셰비키 권력과 혁명 전부를 유혈낭자하게 소탕하려고 돌진해 올 때, 백군과 연대하여 영광스런 레닌주의 전위에 의해 저질러진 '독재'와 '테러'의 범죄를 벌하는, 그들의 승리를 바랐다. 우리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승리가 오직 역사의 '필연적인 것으로 예견할 수 있을' 방법으로 성취될 때, 그런 전선을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배신당한다는 것을 배웠다.
가장 호전적인 반볼셰비키, 카우츠키가, 러시아에서는 그 응답이 총살이었겠지만, 위와 같이 썼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배신자 카우츠키'를 썼고, 트로츠키는 경외로운 '트로츠키주의와 공산주의'를 썼다.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은 오늘날 – 다른 나라에서는 이제 용서된 - 독재와 테러가 '1917년 러시아의 독특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들은 레닌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문장으로 발음했던 것처럼 자유주의-맑스주의자(liberal-marxists)들이고, 맑스주의자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몽땅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지로 간 이들이 아닌가?

 

 

중상모략은 언제나 똑같다

 

오늘날 바우어, 아들어의 이름은 그들의 볼셰비즘 비판을 기억하기 위해, 동시에 '독재와 테러 없는'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이론에 대해, 패배를 선언하기 위해 기록되고 있다(Rome의 1960년 9월 2일, ‘Messagero’를 보라) ; 실제로 그것은 옳다 (바로 옆에 앉아서 보는 것보다 반대편 극단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것처럼, 이런 표현을 해도 된다면, 의회의 여흥 정도의 가치가 있는, 언제나 똑같은 옛날 이야기다.)
폴란드인 도이(Deutcher)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이후의 러시아(Russia after Stalin)'란 제목으로 책을 썼다. 이 최신 저자의 견해는 현대 러시아는, 무엇이라 부르든, 자유주의적인, 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미국인, '러시아주의자인', 크론(Croan)은 도이의 테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토 바우어의 1931년 책, '세계 전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테제와 같은 것이라고 논쟁했다.
만약 40년이 지난 후에도 레닌이 영원히 제거하려 했던, 오토 바우어와 같은, 레닌주의의 자칭 문하생들과 더러운 위조자들이 우리의 길을 막는다면?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헤르만 호르터를 추모하며

헤르만 호르터를 추모하며

H.칸느 메이예르

 

 

 

헤르만 호르터는 1927년 9월 1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스위스로 갔다. 하지만 생의 최후가 가까워졌음을 느꼈고, 그래서 스위스에서 묵는 것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브뤼셀에서 어쩔 수 없이 여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호텔에서 같은 날 밤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삶처럼 용감하고 참되었다. 그는 10시간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무덤에 대고 말할 리 없는 미출판된 저작과 쟁점이 되는 엄격한 지침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hh.JPG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리고 이른바 '사회주의' 운동이 모든 국가에서 민족 부르주아지의 명령과 처분에 따랐을 때, 헤르만 호르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가 계급에게 굴복하게 했던 모든 '이론가'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리고 '제국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세계 전쟁'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붕괴 원인을 분석했다.


헤르만 호르터는 저명한 네덜란드 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1864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 그는 고전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고등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그는 그의 시 '5월'로 문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시는 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언어로 자연을 찬미하는 시 였다. 그는 전통을 깨고 규칙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실제로 느꼈던 감정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썼다. 문단 보다 폭풍 같은 열정적인 충동과 시는 그러한 종류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 최상의 것으로 인정받았다. 호르터 주위에 한 무리의 젊은 시인들이 모여들었고 '80년대의 운동'으로 알려진 문학 혁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호르터는 곧 이 운동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깊이도 부족했다. 그는 원인을 찾았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강력한 발전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고대문명을 다시 공부했다. 그 결과는 “ 80년대 운동의 비판” 이라는 수필로 표현되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번역했으며, 그리고 칸트에 열중했다. 그런 다음 “자본”을 읽는다. 그는 원하는 것을 맑스에게서 발견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깊이 공부했다.

 

1890년에 호르터는 네덜란드에서 사회민주노동당(S.D.A.P)에 가입했다. 처음에 이 당은 그의 입당을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당의 비위를 맞추기에는 너무 유능하고 똑똑했다. 순식간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스주의에 관해 가장 위대한 이론가 가운데 한 명으로, 그리고 네덜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가 중의 한 명으로 부각되었다. 사회민주노동당 조직의, Het Volk는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멋진 꿈, 붙잡을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평했다. Het Volk는 호르터가 냉철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가라고 인정했지만 그가 당에 지장을 준다고 덧붙였다. 이는 호르터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으로 부패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인, 출세 제일주의(careerism)라는 사회주의를 그가 반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의원에게 성스럽거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조합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대중을 기꺼이 살해할 의향이 있었다.

 

계급투쟁을 가라앉히는 경향, 그들을 개량주의자로 만드는 경향은 S·D·A·P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 무기인 맑스주의로 무장한 호르터는 S·D·A·P의 자본주의적 타협 행위와 배신을 폭로했다. 투쟁은 날카롭고 격렬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향력 있는 맑스주의 그룹이 S·D·A·P 내에 만들어졌다. 이 그룹의 대부분은 1909년에 축출되었고 사회민주당(S·D·P)이라는 이름으로 맑스주의 당을 결성했다. 호르터는 SDP에 가입했다.

 

그해 SDP는 호르터의 저작인 맑스주의와 수정주의를 발행했다. 이 저작은 모든 수정주의적 활동의 반(反)사회주의적 특징을 폭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기까지, SDP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석하는 일을 훌륭하게 했다. 그런다음 지도부 권력에 대한 변화가 와서 원즌쿱과 라벤스테이즌은 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즉시 기회주의로 변질되었다. 조직화된 기구로서, 네덜란드 노동조합주의의 노동자들은 “프로이센 주의”에 많이 경도 되었으며 “연합한”제국주의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노동자들이 투표장에서 투표하기를 원했던 Winjnkoop과 Ravensteijn은 의회에서 '연합한 이유'를 옹호했다. '제국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세계 전쟁'이라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을 저 버릴수 없다는 것이 호르터의 그 이유였다. 호르터는 제국주의 연합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는 동일하게 남았다. 모든 제국주의는 투쟁해서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전쟁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제국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 그것은 세계 혁명이라는 방법 이었다. 노동자는 사회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도록 해야만 했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호르터는 열렬한 방어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착실한 맑스주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이중적인 성격을 보지 못했다. 승리를 위해서 혁명은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퇴각하거나 없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세력들은 세계 혁명을 더 잘 실현시키기 위해서 힘을 쏟아 부었다.

 

친구이자 이제껏 등한시된 또 한 명의 저명한 네덜란드 맑스주의자인 안톤 판네쿡과 함께, 호르터는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분석했다. 그들은 이 혁명이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즉, 자본주의적 혁명이었는 것을 보여준다. 농민들은 소규모 농지와 사유 재산 및 토지의 분배를 열망했다. 사회주의에 대해 동조하는 1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1억 명 이상의 농민들이 있었다. 만일 세계 혁명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원하기 위해서 왔다면, 천 만명은 세계를 장악하고 해방시키는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혁명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시기가 시작된 러시아에서 존재하는 계급 조건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러시아가 세계 혁명의 중심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 투쟁에 적대하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동맹을 맺을 것이다.

호르터는 비합법적으로 1921년 제3인터내셔널 제3차 회의에 K.A.P.D의 대의원이며 이러한 관점의 방어자로서 참석했다. 레닌은 이미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선택하였고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라는 저작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끝장 낼려고 하는 대회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되었으며, 그리고 자본주의 정치로의 가교는 통일전선이라는 슬로건에 기반을 두었다.

 

호르터는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레닌의 소아병(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하여 날카롭게 반박했다. 거장다운 묘사로, 그는 레닌의 전술이 어떻게 하여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세계 투쟁을 붕괴시키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 그리고 세계 혁명에 대해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억압을 강요했음이 틀림없다. 레닌주의는 투쟁을 연장시키고 노동자들의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켰다.

 

호르터는 레닌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존재를 표현! 하는 것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당의 선전으로서도 청산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즉, 레닌의 자본주의 방식에 반대하는, 반의회주의, 전세계 의회와 노동조합주의의 후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공산당의 점진적인 감소와 제거가모든 지역에 '합법' 정당을 존재하게 한다는 레닌의 좌익 전술을 발전시켰다. 호르터는 좌익의 역사 유물론적 토대와 반(反)의회주의 전술의 개요를 서술했다. 그는 모든 계급 운동의 중심에 직장 위원회를 배치하는 전술은 이론가들에 의해 '발견' 혹은 '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매 시기는 일반 노동자들이 그 자신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에 따르는 그 자신의 법칙이 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의회와 노동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국가에서,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에 반대해서 건설하고 발전시켰던 이론 조직을 발견했다. 그래서 직장 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그 통풍구를 발견했던 형태로 왔다. 좌익의 전술들은 프롤레타리아 그 자신에 의해 발전했다.

 

호르터는 이러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 방식의 원인을 분석하고 설명했으며, 그의 '공개서한' 에서 그것은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필연적인 표현! 이라고 했다.


호르터는 레닌이 서구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 대해 적용하려고 한 전술은 실수라고 생각했다. 서구 사회가 혼돈 상태에 빠지고 동구 사회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이 지점에서 하루-이틀 추측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제1, 제2, 그리고 제3 인터내서널은 끝났다. 제4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아나키즘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실패했다.

hh3.JPG

 

호르터와 판네쿡은 좌익의 이론적 서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유일한 세력이고, 계급의식과 집권의식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활동을 변질 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계급사회의 안전판으로서 파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은 산업 분야에서 의회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좌익은 21개 조항을 제외하지 않았으나 제3인터내셔널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호르터는 제3인터내셔널의 와해는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그의 앞에서 러시아의 후퇴에 따라 야기되었던 재앙 이후, 마침내 부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산주의를 보았다.

 

호르터가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때, 그에게 이슈가 된 시집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닌 계급투쟁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그의 시 가운데 한 편에서 말하듯이, 그는 '자연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다음에 그는 팬이라 불리는 500여 페이지 분량의 위대한 시를 썼다. 그는 1907년부터 1916년까지 그 시를 쓰는데 9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작품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서, 그는 경이로운 것으로서, 인류 정신의 압축, 세대의 성장, 혁명과 공공복지의 모체로서 공장을 본다.

 

호르터의 미 출판된 작품 가운데, 'Der Aredarraad'(소비에트 위원회)라는 한 편의 시가 있다. 호르터는 공산주의를 현재로 가져와서 혁명의 중심인 직장 위원회를 묘사한다. 그는 계급인 노동자들에 대해 모든 사랑을 담아서 이 시를 썼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배계급, 거짓된 문화의 세계는 어떻게 이 위대한 시가' 소비에트 위원회'라는 주제를 중심에 둘 수 있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반 의회주의자인 케네 메이에르에 의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진 기사로부터 기 알드레드가 요약하고 수정함)
알드레드에 이한 반-의회주의 개척자로 부터


옮긴이|김명수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27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