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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강령)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코뮤니스트 사회
 
노동계급은 혁명계급이면서 낡은 체제에서 피착취계급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위해서 의존할 수 있는 특권이나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부르주아 국가기구나 제도에 의존해서는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 노동계급은 다수의 집단적 힘과 의지를 관철해낼 수 있는 권력을 새롭게 창출하지 않고서는 노동해방을 이루어낼 수 없다. 부르주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 앞에는, 낡은 생산관계의 지배가 새로운 것의 이해관계를 위해 파괴되는 과도기, 즉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가피하게 선행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새로운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계급적 목적을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이며, 경제적 변혁을 수행하기 위해 착취계급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사회화 부문을 점진적으로 전체 생산부문으로 넓혀 나가는 사회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될 것이고, 계급 안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 가능한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평의회 체제에 의해 중앙(집중)화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포함한 코뮤니스트혁명 과정에서 혁명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노동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혁명당은 코뮤니즘의 필요성을 깨달은 가장 의식적인 노동계급을 재조직하고 전체 계급의식을 코뮤니스트 강령에 가깝도록 일반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혁명당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로 거짓 선전되었던 국가의 당 독재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혁명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평의회, 프롤레타리아 총회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권력을 가진다.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에도 비(非)착취계급과 계층은 여전히 존재하며,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내부적인 계급투쟁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아직, 생산수단은 전체로서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국가체제인 노동자평의회에 속할 수밖에 없다. 계급이 폐지되기 전까지 생산수단은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계급이 독점할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전면적인 코뮤니스트 생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사회는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이며, 부르주아지를 대신해 지배하는 노동계급이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의 정치권력을 창출하고 그것을 부르주아 반(反)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자, 코뮤니즘을 향한 경제적 변혁을 위한 수단이다. 소수 부르주아가 독점한 생산수단의 박탈은 고립된 개인들의 집단이 아닌 노동계급의 조직된 힘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전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렇게 조직된 힘이 노동자 반(半)국가의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 이렇듯 이행기 동안 노동계급은 사회의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에, 사회계급이 노동계급의 사회화된 부문으로 통합되어 점진적으로 소멸하면서 모든 사회계급이 폐지되고 국가 자체도 소멸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 내부에서의 특정한 부문이나 그룹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배제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손에 있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자본주의와 그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그리고 내전 동안의 반혁명적 계급의 저항과 폭력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승리를 보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과 상관없는 노동계급 내부의 폭력은, 코뮤니즘을 건설하는 데 어떤 건설적인 것도 담당할 수 없다. 이러한 폭력 사용은 노동계급의 활동을 일탈시키고, 다른 노동 계층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한 사회다. 평의회 체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꽃피어 언론, 회합, 집단 의사결정의 자유가 최대로 실현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참여만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원동력을 줄 수 있다. 누구도 전체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 없이 코뮤니즘을 만들 수 없고, 누구도 코뮤니즘을 미리 준비해서 노동계급에 넘겨줄 수 없다. 서로에 맞서 분열되지 않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실천과 의식만이 수많은 오류를 정정하면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노동계급의 혁명과 권력 장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생겨난 보다 낮은 단계의 사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 단계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가 부여되는, 즉 ‘각자의 노동에 따라 각자에게 분배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적 자본가를 소멸시킨 사회이며, 평등한 권리란 이런 사회와 노동자 사이에 적용되는 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낮은 단계를 거친 다음 단계는 코뮤니즘의 고유한 토대에만 의존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제로 하여 코뮤니즘으로 지향하는 보다 높은 단계이다. 이 단계는 개인의 분업에 근거한 노예적 종속이 소멸하고, 이와 함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이 소멸해야 가능하다. 이 단계는 노동이 단지 생존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삶의 욕구가 되는 시기다. 모든 개인의 다면적 발전과 함께 생산력 발전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하는 시기다. 즉,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더욱 높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에는 노동자평의회의 의식도 코뮤니스트 강령에 가깝게 발전해야 하며, 동시에 혁명당도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화 되어 국가가 완전한 소멸에 이르도록 준비해야 한다.
 
원시 공산제를 제외하고 모든 초기 사회는 계급으로 분화된 계급사회였다. 또한, 다른 모든 사회는 재산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 하지만 코뮤니즘은 계급 없는 사회이다. 역사에서 코뮤니즘 이전 사회는 인간의 필요에 따른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에 기초해 있었다. 그것은 결핍의 사회였다. 또한, 과거의 모든 사회는 과거의 경제체제, 사회관계, 사상, 편견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 사회가 사유재산과 다른 사람의 노동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예제나 봉건사회가 남겨 놓은 사회관계와 사상, 편견들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코뮤니즘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낡은 유산을 전혀 갖지 않은 사회이다.
 
사유재산과 착취, 계급분열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은 가치법칙 및 시장과 화폐를 통한 분배와 소비에 종속됨으로써 경쟁과 무정부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코뮤니즘에서는 가치법칙이 사라지며, 생산은 평의회 체제에 의해 사회화된다. 코뮤니즘은 전 지구적 사회이다. 국가적 경계와 분할은 사라지고 인간의 보편적 정체성과 창조성이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코뮤니즘은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낡은 전통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이다. 계급과 계급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필요 없게 된다. 코뮤니즘에서 국가는 소멸한다. 코뮤니즘은 국가 없는 사회다. 사회의 행정적 업무는 모든 구성원의 협력, 합의, 집단적 의사결정으로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에서 비로소 인간의 자유, 평등의 진정한 이상이 처음으로 실현된다.  
 
-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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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 독재인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인가?
 
파리코뮨의 경험은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제도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을 오래전에 보여주었다. 부르주아 국가는 계급을 초월해 존재하는 기구가 아니라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억압과 지배 기구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며,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완전히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평의회는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추상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과 봉기의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평의회의 혁명성은 수백만 명이 자기 삶의 수준을 스스로 통제하고 자기 계급의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평의회는 대의제와 수동성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자발적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평의회는 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되고, 계급 안에서 선출되며 언제나 소환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다. 하지만 역사의 경험은 가장 완벽한 평의회 민주주의라도 그것만으로 코뮤니스트혁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에 앞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코뮤니스트 사회로의 이행기에 전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종말을 준비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러한 코뮤니스트혁명 과정에서 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당이 노동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당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로 거짓 선전되었던 스탈린주의 국가의 당 독재와 같이 혁명당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평의회로 구성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권력을 갖는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혁명을 실현하고, 모든 권력을 갖는 것이 우리의 강령이며,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다.
 
-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에 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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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 촛불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

대대적 촛불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
 
2017년 '촛불투쟁' 관련하여 투쟁의 주체와 계급의식을 중심으로 서술한 글인데, 2024년 '탄핵투쟁'과 비교할 필요가 있어 다시 게재한다.
(박근혜→윤석열, 촛불→응원봉, 50대→20~30대, 민중총궐기→남태령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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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대적 촛불투쟁의 배경
 
촛불투쟁이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지면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늘 감춰져 있었다. 바로 박근혜 정권 이전부터 곪아 터진 자본주의 위기가 문제의 본질이다.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본가정권은 자신들의 연명을 위해 모든 희생과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분노는 언제든 계기만 주어지면 터져 나올 수 있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었다.
 
정치적으로 박근혜 정권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라는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지만, 국정원 동원 부정선거 문제와 세월호 참사 책임이라는 치명적인 약점과 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남용 문제로 내부 균열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었다.
 
이에 박근혜는 자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 반대세력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지지층 결집만을 위한 독선적 통치로 일관해왔다. 집권 초기부터 공안탄압으로 시작하여,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투쟁을 온갖 추악한 방법을 동원해 막았다. 다음에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투쟁인 민중총궐기를 국가폭력으로 막고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사경에 빠뜨려 끝내 사망에 이르게 했고,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구속하며 탄압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거칠 것 없이 공격에 매진하던 박근혜 정권은 내부 균열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해 박근혜 게이트를 정점으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박근혜 정권 내내 밀리기만 하던 저항 세력에게 촛불투쟁의 힘은 새로운 공간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재벌의 정경유착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성과연봉제 반대, 사드 배치 반대 투쟁, 국정교과서 추진 중단 등의 투쟁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절박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현안은 차가운 농성장과 한편에 묻혀있다.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태로 ‘표현의 자유’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음에도 국가보안법 탄압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직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체제가 건재하며, 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한 투쟁 없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2. 촛불 투쟁의 주체와 의식
 
1) 조직노동자
 
조직노동자운동은 촛불항쟁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업 중이던 철도노동자들이 초기 동력을 형성했고, 평일 촛불의 경우 철도노동자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오롯이 끌고 갔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고, 촛불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백만의 대중이 거리에 모이는 동안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통해 운동의 조직적,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데 주저했고, 거대한 사회적 압력에 떠밀려 실행한 총파업도 사실상 초라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는 사이 ‘즉각 퇴진’을 외친 수백만 촛불항쟁의 정치적 주도권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탄핵' 중심으로 넘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퇴진행동’ 내에서 시민단체와 야권연대 세력들은 야당과의 공조를 중요하게 부각했고, ‘즉각 퇴진’ 요구가 국회 탄핵과 특검, 헌재를 압박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투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규모 집회에서 중심이 되어 왔다. 그만큼 조직력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초기에도 조직노동자들은 집회의 중심을 유지했고 거리행진에서도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후퇴를 거듭한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투쟁에서도 ‘조직적으로 참가하는 단체 참가자’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동안 유력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거나 방해했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에 맞선 총파업 투쟁도 회피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크고 작은 노조를 가리지 않고 관성처럼 자리 잡은 어용세력과 조합주의자들은 계급적 원칙을 훼손하고 수많은 투쟁을 교란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촛불 집회의 위세에 조직노동자들은 자극받고 고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노동조합 투쟁에서 그래왔듯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 사회적인 투쟁 물결에 자신이 가진 노동자 고유의 무기로 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형식적으로만 대응했다.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계급적 투쟁’보다는 편하고 이익이 되는 ‘조직적 집회 참가자’의 길을 택했다. 조직노동자들은 대대적인 촛불투쟁을 만나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재벌(대자본)에 맞선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들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집회에서 유의미한 동력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고유의 투쟁으로 촛불투쟁과 결합할 때 자본가 정권과 지배계급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동안 거대한 촛불 뒤에 숨어 형식적으로만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그것에 만족했던 조직노동자 운동은 이제 탄핵 인용 결정 이후 대선 국면을 맞고 있다. 선거만큼 조직노동자들이 긴밀하게 움직이고 동원되는 운동은 없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투쟁보다 선거를 위한 조직이 되었다.
 
촛불투쟁이 만들어 준 반전의 기회를 자신들의 투쟁을 강화하고 확산시켜 현안을 해결하는 무기로 삼기보다는, 적당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선거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것에 관심이 쏠려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자신의 위치에서 사소한 경제적 투쟁도 제대로 못 하는 세력은 사회적(혁명적) 투쟁에서도 발목을 잡는 역할만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투쟁하지 않으면 내일은 적들에게 구걸하게 될 것이다.”
 
2) 자발적 참여자
 
연인원 1,000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가 다수는 노동조합, 정당, 시민단체 등의 조직적 참가자가 아닌 개별 단위(가족, 친구, 혼자)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다. 개별 참가자들의 직업과 정치성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지만, 경제 위기와 사회적 안전에 대한 위협 상황이 계속되면서 (자기방어적인) 보수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다. 또한, 비정규직-실업 문제에 직면한 20~30대의 참여가 광우병 촛불보다 줄어든 반면, 50세 이상의 참가가 늘었다. 이는 촛불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정치 성향을 넘어 현실에 대한 분노가 크고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발적 참가자들은 조직화 된 세력에 거리를 두기도 하고, 조직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스스로 조직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촛불 대중이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대규모로 가입하는 차원이 아니라 촛불 대중의 가장 명료한 부분이 자신을 정치(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자발적 참가자들은 10여 차례 이상의 촛불 집회를 거치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촛불투쟁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촛불 대중의 분노가 ‘급진적 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시도조차 못하고 막혔지만, 촛불 집회에서 나타난 ‘저항 문화의 정서적 충격과 창의력’은 또 다른 투쟁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촛불 대중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개별 참가자로 남아 있는 이유는 촛불 집회의 대형 무대와 긴장감 없는 행진으로 인해 집회 참가자들이 주체가 아닌 관객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촛불투쟁이 열어 놓은 광장을 제한 없이 넓혀야 한다. 거리, 일상, 지역, 공동체에서 다양한 형식과 열정적인 내용으로 수백, 수천, 수만 개의 토론 광장과 대중총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곳에서 토론하고 결정된 것을 함께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광장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조직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발적 참여자들도 아직은 촛불 광장의 열린 정치와 직접 민주주의 요구를 일터, 생활공간, 지역 사회로 확산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토론과 투쟁을 통해, 크고 작은 권리를 찾고,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촛불투쟁이 아직 집회 참가자들의 삶과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의미에서도 촛불투쟁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3. 촛불투쟁과 자극
 
역사적 투쟁과 자극
 
1871년 ‘파리코뮌’은 노동자 스스로 사회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도시구역에 따라 구성된 무장한 노동자들이 지키는 위원회가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노동자 민병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최초의 ‘평의회’ 형태이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온 ‘대대적 파업’의 물결은 전대미문의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노동자 대중은 파리코뮌에 이어 스스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탄생시킨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 부분, 국가 등의 구분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는 1905년에 소비에트는 갑자기 자발적으로 출현한다. 소비에트의 본질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다양한 계획들, 토론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들,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면,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9월부터 대중 내부에 생겨난 주목할 만한 '의식의 성숙'은 토론에 대한 엄청난 욕구의 발전을 나타냈다. 공장, 대학, 지방으로 퍼진 격론은 9월 한 달 동안 발전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트레포프의 무한한 테러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대학 담장에서 생겨나고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중들의 모임은 1905년 가을의 가장 놀라운 정치적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복도, 강당 그리고 홀을 가득 채웠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곧장 대학으로 갔다. 블라디미르대학 강당에 모인 청중을 보고 깜짝 놀란 공식 전신기관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학생들 외에도 군중은 ‘다수의 관련 없는 모든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 도시 사립학교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잡다한 무리’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모임은 잡다한 무리가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는 집단적 그룹이었다.
 
소비에트 회의는 부르주아 의회 또는 탁상공론적인 학자들 내의 논쟁과는 정반대였다.
 
"소비에트 회의에는 대의제도의 궤양인 어떠한 과장과 허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의 중인 문제(파업의 확산 및 두마 앞으로 보낼 요구)는 전적으로 현실적이었고 토론은 간결하고, 활기차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쥐꼬리만 한 매시간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전체 회의에 엄격한 승인을 가진 의장은 미사여구로 흐르는 최소한의 흐름도 꼼꼼히 살폈다."
 
활기 넘치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심오하고 구체적인 토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사회심리에 변화를 나타냈고, 이 두 가지의 발전에 있어서 강력한 요인이었다. 의식은 사회 정세와 그 전망에 대한, 대중 행동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힘에 대한, 그리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고, 미래 세계의 목표를 정교히 하는 경로 설정의 필요성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심리는 의식과 다르지만, 그것과 함께 실재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 심리는 노동자의 도덕과 생활태도를, 그들의 확산하는 연대를, 그들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공감을, 그들의 열린 마음 및 학습을 그리고 공동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이타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요인이다.
 
그리고 1905년의 ‘기억과 자극’은 1917년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러시아에서 재탄생한다. 러시아혁명의 자극과 1920년대 혁명적 물결은 독일과 헝가리에서 노동계급에 생동하는 힘과 넘치는 생각들을 강하게 분출하게 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노동자총회’가 나타났다.
 
1920년대 혁명적 물결 속에서는 계급의식의 뛰어나고, 실천적이고, 생동하는 특질이 확인되었다. 모든 곳에서 즉흥적 화합과 진실한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무수한 교류가 발생했다. 어제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부과한 심각한 무지 속에 침체하여 있었지만, 오늘의 노동자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연설자가 된다. 자본의 지배에 침묵하며 속박되어 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별안간 연설하기 시작하여, 모든 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모으며, 함께 정치 토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도성과 창의력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정치적인 환경은 열정적인 음조를 띠고,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창조된다. 계급의식이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암흑과도 같았던 기나긴 반(反)혁명의 시기가 지나가고,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트’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적 부활은 ‘상상력’의 해방과 함께 더 큰 자극이 되어 ‘급진적인 행동’과 ‘혁명적인 운동’에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1968년 프랑스와 1969년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의 특징인 ‘폭넓고 심도 있는 토론’ 문화를 만들었다.
 
1987년 한국의 6월항쟁은 그해 여름 노동자대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2011년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물결은 ‘광장을 점거하자!’는 공통의 구호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광장’의 정치는 앞선 모든 ‘역사적 자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진정한 연대’, ‘대중총회’, ‘토론문화’로 재현되었다.
 
2011년 폭발적인 '진정한 연대'가 있었는데, 이는 지배계급이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보기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방면을 위하거나 경찰이 난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들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그리스 그리고 미국에서는 주거지로부터의 강제이주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집회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는, 파업집회에서 다른 작업장들로 '파업파괴 저지단' 파견을 결정했고, 11월 2일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직원이나 학생을 처벌한 작업장이나 대학을 점거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은 비록 아주 간헐적이고 짧게 지속하였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에 의해 지지가 되고 보호된다는 느낌을 함께 느끼게 했다. 이는 불안감과 무방비 상태와 가망 없음이 지배적인 이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위와 같은 혁명적 사건이 준 자극과 촛불투쟁이 준 영향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은 눈앞의 정세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촛불투쟁에서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을 찾아내고 실현 가능한 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촛불투쟁은 ‘박근혜 탄핵 인용 결정’으로 막을 내렸고,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하려는 세력이 노동자 운동 내의 다수이다. 한편 촛불 정세를 무사히? 넘긴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촛불에 자극받아 보다 세련된 통치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계급투쟁을 잠재울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촛불투쟁 다음의 투쟁은 무엇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2017년 봄, 우리가 맞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해서 아직 한겨울이다.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노동자민중의 생활조건은 악화했다. 실업은 점점 더 커져 일상이 되었고, 비정규직 확대는 이 사회를 점점 더 깊이 잠식하고 있다. 최소한의 생활 조건도 기대할 수 없는 가난과 굶주림마저 만연하다. 촛불투쟁은 이렇게 비참한 현실과 박근혜에 대한 분노가 결합한 결과이다.
 
이에 수십, 수백만의 분노한 사람들이 ‘박근혜 퇴진’과 함께 마음속으로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염원하며 거리에 나섰다. 이러한 분노와 염원은 그동안의 수동성을 넘어 광장과 거리를 ‘거대한 인파’라는 물리력으로 점거했다. 광장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막혀있던 분노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문제들을 주장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수백만의 대중이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가져야 할 ‘필수적인 의식’은 단상에 선 지도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거나 그의 지침을 따른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대적인 토론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그러한 토론을 이끌어내는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촛불투쟁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
 
역사적인 투쟁의 자극은 계급의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다수계급을 위한 다수의 의식적이고 독자적인 운동'이 그러했다. 의식적인 토론과 결정, 그리고 노동자 대중이 선출하고 대중에게 책임지는 독자적 운동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는 현실 투쟁에서는 노동자 스스로 투쟁을 통제하는 아래로부터의 파업위원회, 노동자총회 등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촛불투쟁을 통해 자극해야 할 일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아무리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고 전투력이 약해졌어도, 노동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자본가계급에 밀려있는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것의 첫걸음은 생존권 투쟁의 전면화와 아래로부터의 실질적인 총파업 투쟁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탄핵 이후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정치광장을 열어야 한다. 노동자 정치광장을 통해 노동계급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고 행동하는 ‘직접행동’, ‘직접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동안 투쟁과 조직화 모두에서 소외되었던 비정규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빈민, 소수자들과 계급적으로 연대하여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를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 투쟁과 미조직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결합만이 계급 운동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이 체제는 박근혜와 같은 대표자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다.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자본가계급’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고 이 사회의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이다. 그 배후에 ‘국가’라는 폭력기구가 환상(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질적인 지배자들’이 기대는 곳이 바로 국가기구이다. 그들은 한 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본가계급의 국가를 지키고 강화할수록 그들도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촛불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한 줌 안 되는 지배계급의 착취와 불평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국가(통치)기구의 일부인 정부를 야당으로 교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지배계급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해주고 노동계급에 불리한 ‘선거제도’로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로지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권력을 무너뜨리고, 다수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해야 가능하다.
 
그 희망은 비록 지금 소수이긴 하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생산과 일상을 직접민주주의로 조직해,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법 제도에 맡기지 않고 투쟁으로 돌파하면서 스스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자기 권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야 박근혜 파면이라는 작은 승리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탄핵당하고 감옥에 간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이다. 특히 노동계급의 생존현장과 일상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투쟁에서 멈추지 않고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이 있는 모든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킨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자기 권력'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 자체로 첫 번째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우리는 촛불투쟁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하거나 기대해도 안 되지만, 촛불투쟁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자극을 축소해도 안 된다. 우리는 촛불을 주도하지도 넘어서지도 못했지만, 냉철하고 끈질기게 촛불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최대한 한 넓고 깊게 토론해야 한다. 토론의 결과는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근본적이고 새로운 투쟁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조직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시도와 실천만이 전쟁과 야만의 체제인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초가 될 수 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길어서 꾸준히 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2017년 3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이형로
 
<출처 > 「코뮤니스트」 5호,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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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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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어떤 도시이든아무리 작은 도시라도사실은 둘로 나뉘는데하나는 가난한 도시다른 하나는 부유한 도시다이들은 서로 전쟁 중이다.” (플라톤그리스 철학자기원전 427-347)

 

민주주의'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유래하여 종종 서구 문명에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졌다그러나 고대 그리스 사회는 대부분 노동을 노예에게 의존했고그들은 투표권이 없었다마찬가지로 대부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여성도 투표에서 제외되었다어떤 문명어떤 민주주의를 위한 기여를 말하는가?

 

현대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남성 보통선거권을 부여하는 데 100년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여성은 항상 나중이었다)에도 불구하고 의회민주주의 체제 아래 노동하는 사람들은 고대 아테네 노예처럼 핵심 의사결정에서 제외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대표로 선출한다부르주아 정당 사이 노선과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는 오늘날에도 다수 유권자는 지역/비례대표 후보의 당적에 따라 투표한다하지만 일단 당선되고 나면그들이 4년 뒤 우리에게 다시 표를 구하러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가 선출한 우리 국회의원을 쉽게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무엇을 하는가보통 그들은 국회 표결에서 당리당략에 따라 자신이 속한 정당에 투표하거나때로는 당 결정에 반하여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기도 한다가끔 총리가 의원들을 굴복시키려 국회를 정회하기도 하고(영국), 대표단이 국회를 파행으로 이끄는 일에 의원을 동원하기도 한다(한국).

 

이렇게 국회의원은 자신을 선출해 준 유권자 뜻과는 상관없이 소속 정당과 자신을 위해 정치 활동을 할 뿐 유권자의 요구를 위한 어떠한 활동도 없다이것이 대의제의 의미이다유권자들은 국회의원에게 유권자를 위해 일하도록 위임했지만그들이 일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일을 해도 다음 선거까지 그들을 바꿀 힘이 전혀 없다물론 국회가 모든 유권자에게 발언권과 결정권을 갖게 하는 근본 변혁 방안을 내놓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근본 변혁 방안이란공동체 전체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방안모든 사람에게 생존수단을 보장하는 방안이윤 대신 공동체를 위한 최선을 결정하는 방법이다다시 말해자본주의라는 이 부조리한 체제를 폐지하는 데 필요한 조치다따라서 부르주아 국회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조치이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가장 완벽한 방안

 

의회민주주의와 반대로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혁명 기간에 나타날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에서 모든 총회(집회)는 국회의원이 아닌 평의회 대표자를 선출한다평의회는 그들을 선출한 단위(공동체)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만약평의회에서 선출 단위(유권자)의 결정을 따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대표자는 즉시 자신의 선출 단위로 돌아가서 결정을 변경하도록 설득하거나 다른 대표자로 교체된다각 공동체는 인원수에 비례하여 다수 평의회 대표자를 갖게 된다. 1905년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500명당 1명씩 대표자가 있었다.

 

각 공동체/지역은 소비에트/평의회/총회(원하는 대로 부르면 된다)를 선출하고 난 뒤더 넓은 지리 영역과 부문으로 확장하여 평의회 대표자를 선출한다이것은 혁명 과정에서 세계 소비에트(평의회)총회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확장하고 발전시켜야 한다소비에트총회는 (환경보호와 같은전 세계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지역 소비에트는 지역 서비스와 자원 배분을 다룬다.

 

부르주아 국회와 노동계급 평의회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직업(전문가정치인이 없다는 것이다노동자민주주의 아래 노동자는 단지 투표를 위한 일회성 유권자가 아니라 주거공동체(협동조합), 직장위원회에서부터 스포츠협회와 예술평의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풀뿌리 단체의 적극 참여자가 된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노동계급 대표자를 직접 선출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1905년 러시아혁명에서 나타난 소비에트는 그것이 성과가 있음을 증명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다시 한번 소비에트가 확산하였고노동자민주주의가 실제로 몇 달 동안 존재했다(197년 11~1918년 3). 전 세계 노동계급은 러시아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어떻게 운영했는지에 관한 소식에서 영감을 받았다심지어 기차 승객들도 붐비는 열차에서 모든 승객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도록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지속하지 않았다노동자민주주의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초로 성공한 노동자혁명이 한 나라에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4년간의 전쟁 끝에 노동자들은 흑사병과 같은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게다가 소비에트 러시아는 14개국 군대에 의해 침략을 받았다러시아 노동계급은 고립된 상태로 오래 버틸 수 없었다결국소비에트 권력은 이 불가능한 상황의 무게에 눌려 시들어갔다.

 

1920년대 중반 국제혁명 물결이 패배한 이래 노동계급에 이른바 사회주의코뮤니즘(공산주의)라는 용어보다 더 왜곡되고 남용된 것은 없다이전 동구권 스탈린주의 체제와 현재 중국쿠바북한과 같은 국가가 노동자국가나 코뮤니즘이라는 주장은 지배계급이 영구화시킨 가장 큰 거짓이다자본가들은 이렇게 반()혁명을 상징하는 일당(一黨)체제를 코뮤니즘이라고 즐겨 부른다이것은 매우 의도된 이데올로기 공세인데코뮤니즘이라는 단어뿐만 아니라 언젠가 노동계급이 자기 과업인 코뮤니스트혁명을 수행하고진정한 민주주의인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는 모든 생각을 불식시킨다.

 

현재 통치자들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기 원하지 않는다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음을 잘 안다자본주의가 생긴 이래 가장 높은 부의 편중최근 40년간 소득감소와 생활 수준 하락 등을 겪고 나서 이러한 불만은 당연하다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제 통치자들은 무역외교금융에 관한 자신들 규칙마저 서서히 해체한다엄청난 규모의 부채는 사라지지 않고불평등이 너무 급속하게 증가하자혁명을 두려워하는 일부 억만장자가 세금을 더 내라고 요구할 지경이다한편에서는 포퓰리즘 게임을 한다그들은 자신들이 엘리트의 일부가 아닌 척하며 대중을 현혹한다그래서 극소수에게만 막대한 부를 창출해 주는 이기적 계급을 위한 진정한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한다이것은 명백한 사기극이다.

 

포퓰리스트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부추겨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그것을 위해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협박하고 실제 전쟁을 일으킨다그들이 자주 벌이는 이주민과의 전쟁이 아닐 때는 관세 전쟁환율 전쟁무역 전쟁제재 전쟁을 말한다그뿐만 아니라 그들 뒤에는 이미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총격전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전쟁이라는 말과 현실이 일상화된 바이든트럼프푸틴젤렌스키네타냐후(그리고 윤석열같은 통치자들은 자본주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전 세계 노동계급을 전쟁과 야만의 위험에 빠뜨렸다이러한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오직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투쟁뿐이다노동자민주주의의 기초인 노동계급 자기해방을 위한 실천과 투쟁만이 인류를 구할 수 있다.   (출처 : C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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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사기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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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강요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와 ‘국민’이라는 바로 그 용어를 의미 없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착취계급은 막대한 부를 손에 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정치 권력은 언론, TV 그리고 주류 소셜 미디어와 같은 이데올로기 지배 수단과 마찬가지로 착취계급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사회에서 ‘국민’은 이러한 계급 적대를 숨기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고,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권력독점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반면, 피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신들의 실질 요구를 관철하기 힘들다. 그동안 착취에 맞서 피착취계급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무력으로 진압되거나 회유와 협박으로 길들어 결국 국가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지난 100년 이상 동안 ‘노동자(진보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와는 달리 노동자들은 대통령/의회/지방선거와 국민투표에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 받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계급이 아닌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원자화된 ‘시민’으로서만 유권자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시민으로서 부르주아 선거에서 투표하는 바로 그 행위는 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의 부재(不在)에 따른 무력감의 표현이다.

 

또한, 선거에서의 이슈, 국회에서의 논쟁 주제는 우리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독점 아래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러한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이익이 우리 이익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으며, 국가는 국민과 마찬가지로 타협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감추는 거짓 공동체일 뿐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정당 사이의 논쟁에서 어떠한 선택도 자본주의 체제 위기가 초래한 생활 수준 하락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라는 종교

 

오늘날 민주주의와 국가는 칼 맑스가 처음으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용어를 만든 시대의 종교처럼 되었다. 민주주의와 국가 이익은 부르주아 사회의 ‘영적(靈的) 향기’이며,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載可)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궁극적인 실체인 노동과 전쟁에서 요구하는 모든 희생에 대한 정당성을 민주주의와 국가를 가정(假定)하지 않고서는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향기’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대통령과 국회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매우 나쁜 악취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 시대, 즉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노동자 정당의 부르주아 의회 참가가 적합한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의회는 지배계급 내부의 진보와 반동이 실제로 대립하는 장이었고,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지속적인 향상을 위해 싸울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노동자 대표의 부패 위험성을 상시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단지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 정당에 표를 모으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의회 맹신’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에, 지배계급 모든 분파는 똑같이 반동적이며, 생활 수준의 지속적인 향상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전체주의 국가의 성장에 직면하여 의회 절차의 깊은 무기력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대통령제든 의회제든, 부르주아 정치의 막다른 골목과 포퓰리즘 부상은, ‘엘리트’를 향한 가짜 비판과 함께, 많은 사람에게, 일을 해내는 사람, 즉 ‘독재자’의 통치 방식인 ‘비자유 민주주의’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계급에게 여전히 또 다른 잘못된 선택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안

 

노동계급의 역사적 운동은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1871년 파리 코뮌은 이미 의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4년에서 5년에 한 번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 즉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국민을 잘못 대변하는지를 결정하는 대신” 노동자 집단은 별도 집회(총회)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그 집회의 대표들은 선출되고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소환되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비에트나 노동자평의회는 공장과 다른 작업장의 노동자들 집회를 기반으로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윤곽을 1871년 보다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1917~21년 전 세계 혁명운동 물결 속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의회(그리고 노동조합) 기구에 직접 반대하여 생겨났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는 이것을 매우 잘 이해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세계혁명의 운명이 결정될 독일에서, 우선 평의회를 합병하고, 평의회를 의회와 지방정부의 무력한 부속물로 만든 다음, 1919년 베를린에서처럼 평의회의 실질 권력을 회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격렬하게 분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혁명, 피착취계급 해방에 치명적인 적(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목표는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인민’ 아니 오히려 통일된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진정한 인간 공동체에서는 그리스인들이 ‘크라토스(kratos)’라고 부르는 힘, 지배, 통치가 어떤 종류의 국가나 정치 권력에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출처 : 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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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 윤석열 친위 쿠데타 : 자본가 정권 타도!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계급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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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  탄핵과 정권교체를 넘어 자본가정권 타도!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의 모순과 취약성을 드러냈다.

 

지난 12월 3일 밤윤석열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동원해 정치인 등을 체포하고 국회를 무력화하려 했지만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하면서 친위 쿠데타 시도는 150분 만에 실패로 끝났다그리고 12월 7일 계엄령의 배후와 실체가 밝혀지는 가운데 진행된 윤석열 탄핵소추안은 정족수 미달로 자동 폐기되었다탄핵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 여론과 전국적으로 벌어진 탄핵 촉구 집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석열 방어에 나섰고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모범이라는 한국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의 현재 모습이다물론 이것은 지배계급 사이 권력투쟁이 보여주는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이기도 하다.

 

윤석열 집권 2년 반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 속에서 자본가 독재의 폭력성과 총체적 무능을 보여주었다윤석열 정권은 시작부터 노동계급에 전쟁을 선포하고노조 탄압부자 감세대기업 규제 완화민영화 추진복지 축소 등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그뿐인가물가 폭등실질임금 하락가계부채 증가로 생활 수준은 계속 악화하고사회적 참사에 대한 책임 회피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옹호채상병 사건 수사 방해의정 대란 등으로 일상적인 삶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대외적으로는 미일 제국주의 세력과 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조장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반()노동()자본()제국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던 윤석열 정권은 가족과 본인에 대한 끝없는 의혹과 폭로로 궁지에 몰리고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들어섰다더는 선택지가 없었던 윤석열은 결국 친위 쿠데타를 선택했고야만으로 회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모순과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번 친위 쿠데타는 45년 전 전두환의 12.12 군사 쿠데타와는 성격과 준비 정도가 다르지만불평등과 모순으로 가득한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 도구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 군대를 이용해 짓밟았다는 점에서 성격이 같다이는 70~80년대 군홧발과 총검의 공포와 폭력을 민주주의를 통해 극복했다는 이 체제가 그동안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국가폭력으로 잔인하게 짓밟아 온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윤석열 탄핵-퇴진 투쟁은 과거 촛불 투쟁처럼 노동계급의 독자적 투쟁과 권력의 전망이 없다.

 

이번 친위 쿠데타에 따른 탄핵-퇴진 투쟁은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 때와는 달리 대대적인 촛불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몰락의 길을 택한 윤석열의 폭주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하지만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투쟁과 자기 권력의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는 박근혜 퇴진 촛불 투쟁과 다르지 않다그동안 노동자 운동은 계속 후퇴하여 윤석열 정권의 전방위적 공격에 맞서 방어 투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민주노총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영역(현장)에서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여 반격의 계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형식적이고 선언적인 윤석열 퇴진만을 외치면서 부르주아 야당의 투쟁 일정에 맞춰 집회를 배치하고 행동을 제한했다하지만윤석열의 친위 쿠데타와 날로 악화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동안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켜 아래로부터의 실질적인 총파업과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이번에도 윤석열 탄핵 투쟁에만 매몰된다면과거 촛불 투쟁처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현재의 탄핵 절차는 선출한 사람들이 잘못된 선출을 바로잡기 위해 선출자를 직접 끌어내릴 수 없다윤석열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버티는 것도 탄핵이라는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탄핵은 윤석열의 공범과 부역자들에게도 의결권을 주기 때문에 그들이 탄핵을 막을 수도 있고어쩔 수 없이 탄핵을 가결한다면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다그리고 국회의 탄핵 가결 이후에도 헌법재판소라는 선출되지 않은 기관에서 헌법재판관들이 판결한다결국대중들의 실질적인 요구는 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무력화되어 낡고 부패한 현 체제 안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모순적인 탄핵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노동자의 삶도 개선할 수 없다자본주의 체제는 필요에 따라 윤석열과 같은 통치자를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고이 체제의 모든 정권은 자본가정권이기 때문이다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은 위기 때마다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정권을 교체해 왔다따라서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면 지배계급의 일부인 야당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그것은 촛불 정부를 자임하고 들어선 문재인 정권의 노동개악노동탄압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박근혜도문재인도윤석열도... (미래의이재명도 자본가정권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2면]  생존권 투쟁 전면화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계급투쟁!

 

노동자민주주의를 통해 다수가 사회를 통제하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과 일상을 조절할 수 있다.

 

과거 박근혜 탄핵부터 지금의 윤석열 탄핵 과정에서 보듯이 선출자가 직접 권력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실질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노동계급의 민주주의는 선출된 권력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어 선출한 사람들이 통제할 수 있다모든 대표자의 특권을 폐지하여 위임받지 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고소수가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으로 향하며선출되지 않은 관료제는 점차 폐지한다이것이 노동자가 직접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이며노동자민주주의를 통해 다수가 사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고노동자 스스로 생산과 일상을 조절할 수 있다노동자민주주의는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의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 광장(노동자 총회노동자평의회)에서 탄생하며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열린 토론과 민주적 결정직접행동계급적 연대로 확장된다윤석열에 분노한 노동자 투쟁이 나아갈 길은 탄핵-정권교체 환상을 깨고 자신들의 권력과 민주주의를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윤석열트럼프와 같은 통치자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토대이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다지속하는 경제위기와 전쟁기후 위기팬데믹 등을 겪는 동안 극소수의 부유층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다수 인류는 가난해지는 세상이 되었다이에 따라 세계 자본주의는 경제사회환경건강까지 모든 영역에서 엄청나게 복잡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고이 체제는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자본주의는 이미 오랜 기간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고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평화로운 선택지가 바닥난 세계의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에 더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며 위기를 전가해 왔고대외적으로는 경쟁국을 희생시키면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점점 더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고 있다이렇게 자본주의가 전쟁과 야만으로 질주하는 것은 이윤추구 체제 자체가 작동한 결과이며트럼프와 같은 통치자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토대이다윤석열 정권도 이러한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의 필요로 탄생했고다음 정권도 노동계급에 위기를 전가할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계급은 탄핵-정권교체가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냐/자본가계급 독재냐', '혁명이냐/전쟁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야권연대를 끊어내고 자본가정권 타도를 위한 계급적 연대 강화를!

 

지금은 비록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이 방어적이지만세계 곳곳에서 노동자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유럽과 북미남미에서 아시아까지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이러한 움직임은 세계 노동계급이 서서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감을 되찾고오랜 기간 잃어버린 계급 정체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열었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도 깨어나야 한다! 윤석열 정권은 실질적인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지만노동계급의 대대적인 반격 없이는 '탄핵-퇴진이후에도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그동안 자본가정권이 강요한 모든 굴욕과 희생을 거부하고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여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야 한다.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 투쟁을 교란하고 후퇴시켰던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야권연대를 철저히 끊어내고조합주의선거주의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확산하고 자본가정권 타도를 위한 계급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이를 위해 노동계급은 스스로 투쟁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독립적인 파업위원회노동자 총회노동자평의회를 구성해 반격해야 한다.

 

자본가정권이 아무리 자주 바뀌고 덜 나쁜 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경제위기전쟁 위기착취와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근본적인 해결책은 전쟁과 야만의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전한 코뮤니즘으로 대체하는 것뿐이다.

 

아래로부터의 파업위원회 건설실질적인 총파업 투쟁!

생존권 투쟁 전면화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계급투쟁!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을 넘어 자본가정권 타도 투쟁으로!

노동자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2024년 12월 12일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한국위원회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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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탄핵과 정권교체를 넘어 자본가정권 타도!

탄핵과 정권교체를 넘어 자본가정권 타도!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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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모순과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1. 지난 12월 3일 밤윤석열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동원해 정치인 등을 체포하고 국회를 무력화하려 했지만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하면서 친위 쿠데타 시도는 150분 만에 실패로 끝났다그리고 12월 7일 계엄령의 배후와 실체가 밝혀지는 가운데 진행된 윤석열 탄핵소추안은 정족수 미달로 자동 폐기되었다탄핵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 여론과 전국적으로 벌어진 탄핵 촉구 집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석열 방어에 나섰고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모범이라는 한국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의 현재 모습이다물론 이것은 대중 투쟁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지배계급 사이 권력투쟁이 보여주는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이기도 하다.

 

2. 윤석열 집권 2년 반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 속에서 자본가 독재의 폭력성과 총체적 무능을 보여주었다윤석열 정권은 시작부터 노동계급과의 전쟁을 선포하고노조 탄압부자 감세대기업 규제 완화민영화 추진복지 축소 등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그뿐인가물가 폭등실질임금 하락가계부채 증가 등으로 생활 수준은 계속 악화하고사회적 참사에 대한 책임 회피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옹호채상병 사건 수사 방해의정 대란 등으로 일상적인 삶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대외적으로는 미일 제국주의 세력과 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조장했고우크라이나 전쟁에 포탄 지원에 이어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살상 무기까지 보내려 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반()노동()자본()제국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던 윤석열 정권이 임기 절반을 남겨두고 가족과 본인에 대한 끝없는 의혹과 폭로로 궁지에 몰리고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들어섰다더는 선택지가 없었던 윤석열은 결국 친위 쿠데타를 선택했고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모순과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이것은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정치 현상이기도 하다.

 

윤석열 탄핵-퇴진 투쟁은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투쟁과 자기 권력의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는 박근혜 때와 다르지 않다.

 

3. 이번 비상계엄령 선포는 45년 전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민중항쟁으로 이어진 전두환의 계엄령과는 성격과 준비 정도가 다르지만불평등과 모순으로 가득한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 도구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 군대를 이용해 짓밟았다는 점에서 성격이 같다이는 70~80년대 군홧발과 총검의 공포와 폭력을 민주주의를 통해 극복했다는 이 체제가 그동안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국가폭력으로 잔인하게 짓밟아 온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계엄령 사태에 따른 탄핵-퇴진 투쟁은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과는 달리 대대적인 촛불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몰락의 길을 택한 윤석열의 폭주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하지만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투쟁과 자기 권력의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는 박근혜 탄핵 때와 다르지 않다그동안 노동자 운동은 계속 후퇴하여 윤석열 정권의 전방위적 공격에 맞서 방어 투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민주노총 지도부와 노동자 운동의 다수파는 노동자의 자리(계급의 영역)에서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여 반격의 계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선언적인 윤석열 퇴진만을 외치면서 부르주아 야당의 투쟁 일정에 맞춰 집회를 배치하고 행동을 제한했다하지만탄핵의 무산과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동안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켜 아래로부터의 실질적인 총파업과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이번에도 탄핵 투쟁에 매몰되어 탄핵이 가결될 때까지 윤석열의 공범인 한동훈의 입을 바라보며 탄핵 가결을 압박하고탄핵 후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바라보며 탄핵 인용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과거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4. 현재의 탄핵 절차는 선출한 사람들이 잘못된 선출을 바로잡기 위해 선출자를 직접 끌어내릴 수 없다윤석열이 이렇게 뻔뻔하게 버티는 것도 바로 탄핵이라는 절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탄핵은 또한윤석열의 공범과 부역자들에게도 의결권을 주기 때문에 이번처럼 공범들이 탄핵을 막을 수도 있고어쩔 수 없이 탄핵을 가결한다면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다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국회의 탄핵 가결 이후에도 헌법재판소라는 선출되지 않은 옥상옥 기관에서 상당한 시간을 갖고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에 따라 판결한다결국대중들의 실질적인 요구는 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무력화되어 현 체제 안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본질을 갖는 탄핵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노동자의 삶을 개선할 수 없다자본주의 체제는 필요에 따라 윤석열과 같은 집행자를 합법적으로 갈아치울 수 있다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은 위기 때마다 (이번과 같은 혼란 속에서도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정권을 교체해 왔다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자신을 대표할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탄핵을 통해 바꿀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이번 탄핵 사태는 그 모두가 거짓이고 환상이었음을 보여주었다따라서 노동계급이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면 지배계급의 일부인 야당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그것은 8년 전 박근혜가 파면되고 들어선 문재인 정권의 노동개악과 반()노동 정책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박근혜도문재인도윤석열도, (미래의이재명도 자본가정권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5. 과거 박근혜 탄핵에서부터 지금의 윤석열 탄핵 과정에서 보듯이 선출자가 직접 권력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노동계급의 민주주의는 선출된 권력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어 선출한 사람들이 통제할 수 있고모든 대표자의 특권을 폐지하여 위임받지 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고소수()가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으로 향하며선출되지 않은 관료제는 점진적으로 폐지한다이것이 노동자가 직접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이며이러한 민주주의만이 노동자의 생산과 일상을 스스로 조절하고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노동자민주주의는 계급투쟁 속에서 다수 노동자 대중이 참여하는 정치 광장에서 탄생하며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토론과 결정직접행동계급적 연대로 확장된다윤석열과 국민의힘에 분노한 노동자 투쟁이 나아갈 길은 탄핵을 통한 정권교체 환상을 깨고 자신들의 권력과 민주주의를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그것은 부르주아 정치와 단절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진정한 계급투쟁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윤석열트럼프와 같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토대이다.

 

6.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다지속하는 경제위기기후 위기팬데믹제국주의 전쟁을 겪는 동안 극소수의 부유층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다수 인류는 가난해지는 세상이 되었다이에 따라 세계 자본주의는 경제사회환경건강까지 모든 영역에서 엄청나게 복잡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고이 체제는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자본주의는 이미 오랜 기간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고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평화로운 선택지가 바닥난 세계의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에 더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며 위기를 전가해 왔고대외적으로는 경쟁국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점점 더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고 있다이렇게 자본주의가 전쟁과 야만으로 질주하는 것은 이윤추구 체제 자체가 작동한 결과이다몰락하는 윤석열 정권도 이러한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의 필요로 탄생했고다른 나라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이고한국의 다음 정권도 노동계급에 위기를 전가할 수밖에 없다이제 노동계급은 탄핵이나 정권교체가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냐자본가 독재냐', '혁명이냐전쟁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은 비록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이 방어적이지만세계 곳곳에서 노동자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유럽과 북미남미에서 아시아까지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이러한 움직임은 세계 노동계급이 서서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감을 되찾고오랜 기간 잃어버린 계급 정체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열었다.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야권연대를 철저히 끊어내고자본가정권 타도를 위한 계급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7.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도 깨어나야 한다! 윤석열 정권은 계엄령 선포로 실질적인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지만노동계급의 대대적인 반격 없이는 '탄핵-퇴진이후에도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그동안 자본가정권이 강요한 모든 굴욕과 희생을 거부하고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여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야 한다.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 투쟁을 교란하고 후퇴시켰던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야권연대를 철저히 끊어내고조합주의선거주의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확산하고 자본가정권 타도를 위한 계급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이를 위해 노동계급은 스스로 투쟁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독립적인 파업위원회대중 집회노동자평의회를 구성해 반격해야 한다.

 

부르주아 정권이 아무리 자주 바뀌고 덜 나쁜 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경제위기전쟁 위기노동자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근본적인 해결책은 오로지 전쟁과 야만의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전한 코뮤니즘으로 대체하는 것뿐이다.

 

형식적인 총파업을 실질적인 총파업으로!

생존권 투쟁 전면화아래로부터의 파업위원회 건설!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을 자본가정권 타도 투쟁으로!

노동계급의 모든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2024년 12월 8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한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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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호]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합니다

조성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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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혜영 시인은 자신의 시 미투를 통해 고 박영근 시인이 행한 성폭력 사건을 폭로했습니다저는 제5회 박영근 작품상을 받은 사람으로서이제 알았으므로 조혜영 시인에게 미안하고 몰랐으므로 18년이 넘도록 홀로 고통을 견뎌왔을 조혜영 시인에게 더욱 미안합니다.

 

지금 제가 시인으로서 지켜야 할 명예가 있다면 피해 생존자 조혜영 시인의 외침을 경청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삶의 체온을 느끼는 것입니다.

 

박영근 작품상 반납을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글은 조혜영 시인의 요청에 대한 제 화답입니다일생일대의 결단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저의 지지와 격려입니다문단 내에서 그녀의 삶이 안전하게 보장되고 노동자 시인으로서의 긍지가 지켜지기를상처가 아물어 치유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기원입니다.

 

1.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합니다

 

조혜영 시인이 시집 발간 이후 정말 오랜만에 연락했습니다시집을 보내줄 주소를 요청하더군요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요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줄 이 한 사람이 얼마나 절박했을까요저는 조혜영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이 한 사람이 되고 싶고우리가 조혜영 시인의 이 한 사람이 되자고 제안하기 위해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하고자 합니다.

 

2.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

조혜영 시인이 고발한 미투 사건 성격 규정

 

석바위 사거리 수()다방에서/하룻밤만 자주면 문단에 데뷔시켜주겠다며/성 상납을 요구하던 사람/유명한 문예지에 작품을 실어주고/등단시켜 시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돈 2백만 원을 요구한 유명했던 노동 시인//그 유명했던 시인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여전히 그를 기억하고/그의 문학을 연구하고/그의 문학상을 만들어 후배를 양성하고/양지바른 공원에 시비를 세워/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된다/꽃다발을 들고 시비 앞에 줄지어 서서/활짝 웃는 많은 문인을 본다//그를 알았거나 알지 못했거나 가리지 않고/그의 시비 앞에 모여 묵념하고/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을 칭하며/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그의 시로 만든 노동가를 목청껏 부른다/그의 시와 문학을 연구하는/새파란 젊은 대학원생도/그의 시비 앞에 머리를 숙인다//나는 그의 시비 앞에 차마 침을 뱉을 수 없어/나는 그의 사후 미투를 한다/나는 그의 기일마다 유별나게 흥분을 감추지 못해/나는 해마다 그를 고발한다.”(조혜영미투그 길이 불편하다푸른사상, pp. 66-67)

 

아프고 아픈 시입니다시인은 시에 자신의 운명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박영근 시인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사건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지만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로 기록한 조혜영 시인의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습니다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열린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미투를 읽은 저녁마음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뒤척이며 조혜영 시인이 겪었을 고통의 뿌리를 명료하게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성적 언동으로 상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여성가족부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 2021.7.)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불쾌한 성적인 언사몸짓신체적 접촉추행강간 등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며법적으로 예시된 이외에 다음의 내용도 포함된다. 1. 개인의 성적 자율권 및 성정체성을 침해하는 모든 언어적정신적물리적환경적 폭력행위. 2. 성적 호의를 조건으로 타인의 경력급여보직고용 등에 영향을 미치거나기타 일방적으로 만남이나 교제를 강요하는 행위.”(민주노총 성폭력폭언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

 

문단에 데뷔시켜준다고 하룻밤 잠자리를 요구하다니요유명 문예지에 등단시켜준다고 금품을 요구하다니요고 박영근 시인은 문단 내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조혜영 시인의 의사에 반하는 하룻밤 잠자리를 요구함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습니다국가기구인 여성가족부에서도제가 속한 민주노총에서도 박영근 시인이 행한 행위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즉 성폭력이라고 명료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저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작가회의의 성폭력 규정은 모르지만한국작가회의가 시민사회의 일부라면국가기구도 인정하는 성폭력 개념을 부정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조혜영 시인이 시 미투에서 고발한 사건의 성격을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폭력이라고 규정합니다그리고 이 사건을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으로 부르고자 합니다이러한 호명은 피해 생존자 삶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나아가 성폭력 가해자가 오해의 여지 없이[!] 우리가 아는 박영근 시인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박영근 시인을 아는 사람 중 누구는 그게 무슨 성폭력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고 성폭력은 인정하나 사건명에서 박영근 시인의 이름은 빼자고시끄럽게 하지 말고 문단 내에서 조용히 마무리하자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부정하고 싶거나 머뭇거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죽은 박영근 시인이 저지른 잘못을 살아 있는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박영근 시인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떠넘겼듯이 우리도 다음 세대의 후배들에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떠넘겨서야 되겠습니까사건의 성격을 명료하게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평가하며 피해 생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사려 깊게 함으로써기만과 허위의 우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박영근 시인을 문학 앞에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몰랐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 앞에고발 이전의 고통보다 고발 이후에 더 큰 고통을 맞이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조혜영 시인은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기로 결단했습니다저는 그 마음을 먼저 헤아립니다자신에게 성폭력을 행한 자가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으로 칭송되는 그 기만과 허위가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직시합니다.

 

어떤 일이든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그래야 미봉책이 아니라 해결의 수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공론의 무대에 서는 출발점조혜영 시인의 용기 있는 결단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이라는 명료한 규정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수단을 내와야 합니다.

 

3. 더듬더듬 해답을 찾아가는 몸짓을 보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저는 여성들이 자신의 상처와 피해를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시기이 땅에 성폭력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대를 알고 있습니다또한 피해 생존자와 작은 공동체들의 고통스럽고 끈질긴 투쟁으로 이 땅에 성폭력 개념이 구성되고 확장해온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저도 이 반성폭력 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제가 살고 투쟁하며 시를 써오는 동안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피해 생존자의 고통을 제 안에 들여 앓음으로써 제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입으로는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은 반혁명이었던정치적 기형의 삶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조금은 더 인간다워질 수 있었습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은 과거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뒤엉켜 있습니다박영근 시인이 사망했기 때문에 원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성폭력 사건으로 남아 있었습니다조혜영 시인도 살기 위해서 잊고자 했을 것입니다그런데 상처가 덧나고 악화하기 시작했습니다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시 미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그의 문학을 연구하고 그의 문학상을 만들어 후배들을 양성하고 양지바른 공원에 시비를 세워 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꽃다발을 들고 시비 앞에 줄지어 서서 활짝 웃고 그의 시비 앞에 묵념하고 그의 시로 만든 노동가를 목청껏 부르며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으로” 박영근 시인을 칭송하는 것이 그녀가 보기엔 기만과 허위였기 때문입니다그 기만과 허위를 매년 목격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을 파괴하는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통을 헤아리는 자리에 문학은 있었고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여전히 문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지금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덧난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그녀의 고통을 헤아리고 사려 깊게 배려하는 것입니다시인인 제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함으로써 그녀의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혜영 시인의 시집 그 길이 불편하다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모든 일에세상을 보는 시선이참 순정한 사람이구나박영근 시인이 훼손한 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으로 살아내기 위해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치르고 있구나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조혜영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드러냄으로써 시인 조성웅의 명예도 회복시키려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참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다.

 

조혜영 시인에게 곁을 내주면서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있습니다제가 반성폭력 운동에서 경험했던피해 생존자를 향한 가혹하고 잔인한 말과 행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이미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시대에 어떤 말과 행동이 비수로 날아올까 긴장됩니다.

 

성폭력 사건이 고발되었을 때누구나 당황하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가해자들이 믿고 신뢰하던 대표자였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충격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피해 생존자의 상처보다 자기 이해관계가 먼저이고 피해 생존자의 고통보다 조직의 안위가 먼저였습니다예외 없이 가해자 살리기 호위무사들이 등장하고 피해 생존자에 대한 체계적인 비난이 시작되었습니다비난의 목적은 단 하나피해 생존자를 고립시키고 지쳐 쓰러져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그렇게 노동자 투쟁 앞에 피해 생존자의 고통은 침묵하고 참아야 하는 것으로 강제되었고조직 방어 논리 앞에 피해 생존자의 외침은 빠르게 축출되어야 했습니다.

 

예상하건대, “윤석열을 탄핵해야 하는 엄중한 정세에 조··동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짐짓 문단을 걱정하는 듯한 자들의 말을 경계합니다피해 생존자의 목소리를 삭제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문단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라는 이야기입니다정녕우리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고 성찰하여 극복하는 수단을 함께 찾음으로써 적들의 공격과 조롱에 맞설 수는 없는 것입니까그리하여 이 자본주의와 다르게 살기 시작함으로써 적들을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정말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30년이 넘는 지난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로 성폭력 사건 처리 규정이 만들어졌습니다그러나 이 매뉴얼을 과신하거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이 규정은 만능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동안의 경험을 종합해 피해 생존자의 치유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미완의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피해 생존자의 시간에 밀착해 섬세하게 돌보지 않으면 정무적이고 사무적인 사건 처리 과정치워야 할 물건처럼 서둘러 치워버리는 형식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피해 생존자의 시간과 분리되어 그녀의 일렁이는 다층적인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고 피해 생존자의 고립감은 깊어집니다집행 단위와 피해 생존자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고 서로 상처를 더하기도 합니다저는 성폭력 사건 처리 규정에 따라 피해자의 요구를 반영하고 사건 처리 과정을 다 밟았다고, “자 이제 다 치유됐습니까?”라고 물을까 봐 겁이 납니다치유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피해 생존자가 관계망 내에서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전지대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구성되어야만 치유는 지속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치유의 공동체는 관계의 바닥을 뒤집어엎는 집단적 성찰을 통해서만 오겠지요훈육된 습성을 끊어내기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의 단계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드물고 귀한 관계론이겠지요쉽지 않겠지요그렇다고 포기하겠습니까조혜영 시인의 치유를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 공론화 이후 문단 내에서 작지만 귀한 공동체가 구성될 수 있을까요저는 함께 가보자고 제안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소위 문단이라는 곳에 속해본 적이 없고또 조혜영 시인이 거주하는 인천 지역에서의 관계망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저도 정답을 모릅니다다만 피해 생존자의 곁에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더듬더듬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고 싶습니다더듬더듬 해답을 찾아가는 몸짓을 보고 싶습니다알았으니 미안하고 몰라서 더 미안하다고 조혜영 시인을 안아주고 싶습니다문자가 아닌 우리가 촉감하는 가 되고 싶습니다.

 

올해는 김남주 시인 30주기입니다김남주 시인은 제게 혁명하는 사람그가 시인”(김남주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비평사, 1995, p. 204)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젊은 날이 가르침을 따라 살았습니다나이 들어 낡아가고 있지만조혜영 시인의 곁을 지키는 것이 제가 지금 행하고 있는 하나의 혁명입니다.

 

4. 우리들의 치유 보고대회

 

언제 시골 가면 제가 사찰 요리 잘하고 좋아하니 우리 집에서 밥 한번 대접할게요.”

 

조혜영 시인이 말하는 시골은 우리 집과 지척이지요한 8년 전인가요조혜영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처음 만났는데 집으로 초대해 강원도식 막장[된장찌개]으로 차려진 밥상을 내주었어요제게 조혜영 시인은 따뜻한 시골밥상 같은 분입니다.

 

조혜영 시인이 밥 한번 대접하는 자리전 치유 보고대회라고 부르고 싶어요사찰음식으로 정갈하게 차려진 치유 보고대회두런두런 맛나는 대화로 기쁘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고 박영근 시인 성폭력 사건’ 공론화 과정에서 조혜영 시인과 더 많은 이들이 우정으로 맺어져 초대장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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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과제 피해자의 온전한 치유와 공동체적 해결을 위하여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온전한 치유를 위해 함께하는 이들을 지지한다그리고 작가 사회의 성평등 문화 실현을 위한 집단적 노력과 공동체적 해결을 촉구한다.

 

이미 박영근기념사업회에서 입장문을 올린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된 것 아닌가?

 

조성웅 박영근기념사업회에서 진위 파악한다며 진흙탕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을 피하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기념사업을 중단함으로써 조혜영 시인의 바닥없이 깊어지던 고통에 쉼표를 찍어줬잖아요. (기념사업 중단이고통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지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박영근 시인 사망 이후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억장 무너지는 마음과 고통이 치유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박영근기념사업회 입장문을 봤어요기념사업을 중단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인데 사건에 관한 규정이나 평가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조혜영 시인의 고통을 헤아려보려 하고 사려 깊게 배려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어 무척 아쉽습니다.” (‘박영근 작품상 반납한 조성웅’, 2024년 9월 24오마이뉴스)

 

<첨부한국작가회의 성차별·성폭력 처리 및 예방에 관한 규정

 

 

한국작가회의 성차별·성폭력 처리 및 예방에 관한 규정

 

(2018.7.14 이사회 승인)

 

한국작가회의는 사람 사이의 차별이 없는 존엄한 평등의 문화를 이뤄내고자 성차별·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다이는 올바른 사건 해결을 통해 성별로 인한 억압과 차별을 해소함과 동시에 사건의 축소은폐왜곡의도를 척결하기 위한 한국작가회의의 조직 규율이다또한성 평등의식을 구성원 모두에게 자각시켜 성차별·성폭력을 예방하고자 하는 한국작가회의의 의지이다.

 

1조 목적

 

이 규정은 본 조직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제반사항을 규정하며 성차별성폭력의 근절과 예방을 목적으로 한다.

 

2조 정의

 

① 성차별이란 성별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행하여지는 차별배제제한을 말한다.

② 성폭력이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신체언어정신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희롱·성추행·성폭행 모두를 일컫는다.

③ 2차 가해란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와 고통을 주는 일체의 행위를 포괄한다.

④ 대리인이란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대리하도록 선임한 자연인을 말한다.

 

3조 적용 범위

 

본 규정은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피해자나 가해자어느 한쪽만 회원인 경우를 포함한다.

 

4조 사건처리의 원칙

 

① 사건처리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1. 사건의 성립과 처리는 피해자의 구체적인 진술에 바탕을 둔다.

2. 사건의 처리 과정과 결론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

3. 피해자가 제2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4. 신고제소된 사건은 절차에 따라 최대한 신속하게 해결한다.

② 사건의 처리는 공식적 해결을 원칙으로 하며필요한 경우 가해자의 실명처리결과조직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

 

5조 피해자 권리 및 보호

 

① 사건의 조사와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는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

1. 대리인을 동반하거나 선임할 권리

2. 증인이나 참고인 등 특정인을 신청할 권리

3. 임시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4. 사건 해결의 전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 권리

5. 가해자 처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권리

② 본 조직은 피해자의 보호 및 치유와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피해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유관기관과 연계하여 상담치료 등을 지원한다.

 

6조 사건의 성립

 

① 사건을 신고함과 동시에 성립된다신고자의 신원과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② 사건은 피해자피해자의 동의를 받은 대리인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신고할 수 있다.

 

7조 적용시한

 

적용시한은 따로 두지 않는다.

 

8조 임시조치

 

① 대책팀은 피해자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활동중단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② 대책팀은 피해자의 제1항과 같은 청구가 있었을 시 임시조치 여부를 신속히 결정하여야 한다.

③ 대책팀은 임시조치를 결정한 때에는 이를 피해자피해자 대리인윤리위원회에 통지해야 한다.

 

9조 성폭력대책팀

 

① 구성

1. 평화인권위원회 내에 성폭력대책팀을 둔다.

2. 대책팀장은 평화인권위원회 위원장이 겸한다.

3. 팀원은 5인 이내로 구성하며 윤리위원회에서 정한다.

 

② 대책팀의 역할

1. 성차별·성폭력 상담 및 신고접수를 전담한다.

2. 피해자의 진술을 확보하고 가해자 조사 및 소명 절차를 밟는 등 공정한 활동을 한다.

3. 가해자가 소명에 응하지 않았을 시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4. 조사 도중 발생한 비용은 조직에 청구할 수 있다.

 

10조 가해자에 대한 징계 및 조치

 

① 신고가 접수된 시점부터 징계가 결정될 때까지 해당 회원의 탈퇴를 인정하지 않는다.

② 대책팀은 조사가 마무리되면 윤리위원회에 그 내용을 회부한다.

③ 윤리위원회는 가해자에 대한 징계와 방법을 심의한다.

1. 윤리위원회에는 성폭력대책팀장을 포함하고 성폭력 상담전문가 또는 교육이수자 등 외부 인사를 참여시킬 수 있다.

2. 성폭력대책팀과 윤리위원회는 사건 처리에 필요한 자료의 제출관련인의 소환을 요청할 수 있으며 회원과 조직은 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3. 정관에 의거한 제명자격정지 외에 경고견책주의 등을 결정한다.

4. 가해자의 성평등 교육프로그램 이수 권고활동금지재가입 불가처분을 내릴 수 있다.

5. 가해자또는 회원이 2차 가해를 한 사실이 명백할 경우 제10조에 의거하여 처리한다.

6. 법적인 분쟁의 경우항의 의거하여 탈퇴금지 및 회원자격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다.

④ 본 규정이 제정되기 이전에 발생한 사건의 경우에도 1~6항의 조치를 적용할 수 있다.

⑤ 조사결과와 징계 결정 사실을 이사회에 보고한다.

 

11조 공동해결

 

피해자나 또는 가해자 중 어느 한쪽이 회원이 아닌 경우사회적 해결을 위해 당사자의 소속집단과 공동해결의 원칙에 따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12조 예방

 

 

성폭력의 근절과 예방성평등 조직문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성폭력 예방 및 성평등 교육을 회원 교육에 포함하여 실시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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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7강>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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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7강>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강사 ㅣ 이형로
 
일시 ㅣ 2024년 11월 3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국제노동자연합(1864-7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1889-1914),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1919-1928) ... 기회주의, 반(反)혁명 세력에 맞선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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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20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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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축적의 위기에서 비롯된 전쟁과 기후위기의 일상화는 자본에는 이윤추구의 수단으로노동계급에는 고통과 죽음으로 다가오고 있다국제 부르주아지는 선거에 대한 환상과 민족주의를 내세워 노동계급을 무력화시키고 체제 유지와 전쟁에 동원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스라엘에 의한 가자/레바논 인민 학살을 포함하여 현재 전 세계적으로 50여 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분쟁에 노출된 인구수가 20억 명에 달하고 1억 800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렸다분쟁 지역 중 여러 곳에서 인종 청소공동체 사이의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또한해마다 기후위기 난민이 증가하고 있지만국제 부르주아지의 대응은 겉으로는 녹색으로 포장하고 뒤로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적 관계 보존과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한쪽을 지지하는 자본의 좌파에 맞선 국제 코뮤니스트좌파는 일관되게 혁명적 패전주의와 노동자국제주의를 방어했다.

 

그런데 이른바 좌파’ 세력특히 혁명적이고 국제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세력 상당수는 ()제국주의’ 또는 차악(次惡)’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또는 다른 쪽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그들은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한쪽 편을 드는 전쟁 지지를 촉구한다그들은 억압받는 국가(민족)의 노동계급이 지배계급 사이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되어자국 지배계급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당하는 것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왜곡하고 있다하지만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피억압 국가'든 '억압 국가'든 특정 자본주의 세력이 반()제국주의의 한 축을 구성할 수 없다제국주의는 세계 체제이며자본주의 세계 운영의 한 단계이므로 모든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이 체제에 참여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에 참여하는 시대에 진정한 반()제국주의 투쟁은 체제 자체를 전복하는 투쟁뿐이다물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이다이른바 '좌파'가 그토록 사랑하는 '()제국주의투쟁은 실제로는 제국주의 사이 투쟁이다그들의 실제 내용은 제국주의의 협력 속에서 한 국가의 지위를 바꾸는 것이다.”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NWBCW 한국위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이번 코뮤니스트」 20호에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코뮤니스트좌파의 대응과 올해 주요 국가에서 치러진 부르주아 선거를 다뤘다또한코뮤니스트좌파 진영 내부 논쟁자본주의 경제적 토대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등 연재 기사와 코뮤니스트 혁명가 안톤 판네쿡 서평을 실었다그 외에도 현 정세에 참고할 만한 글과 흥미진진한 주제가 풍성하게 실렸다.

 

 특집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에는 오늘날의 혁명적 패전주의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평화 요구는 전쟁 게임의 일부이다’, ‘학생 시위 뒤섞인 신호를 실었는데평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혁명적 패전주의를 다루었다.

 

평화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에 본질적으로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자본주의 내의 평화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계략을 숨기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노동계급을 호도한다그들이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평화는 용어상 모순이다대신전쟁에 대한 유일한 진정한 반대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다.” (‘평화 요구는 전쟁 게임의 일부이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오늘날 혁명적 패전주의는 동지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나요?

 

현재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혁명가들이 전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의 질문을 전면에 불러일으켰습니다이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답변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혁명적 패전주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입니다.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자본주의는 이제 세계적인 체제이며전쟁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세계와 자원을 재분할하기 위한 수단입니다경제 위기의 시기에는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군사적 해결책을 선호합니다전쟁이 가져오는 자본의 파괴는 또한 체제의 수익성을 회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지배계급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고 자본주의는 새로운 생명선이 필요합니다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세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가운데 편익 동맹(alliances of convenience)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국가 프로젝트도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국지배계급이 강대국 파트너의 공범인 약소국은강대국의 제국주의 체스판에서 졸에 불과하며전시에는 자신의 노동대중과 마찬가지로 강대국이 도구로 이용하고전쟁 후에는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따라서 민족 해방민족의 자결권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역사적 모순이 되었습니다제국주의 전쟁에 계급전쟁으로 맞서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날의 혁명적 패전주의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코뮤니스트 정치에는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노동자에 국가와 민족은 없다’,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전복의 전망’,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을까?’를 실었는데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된 전쟁의 일상화와 기후위기의 배경과 지배계급의 행태와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체제 유지와 제국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민족주의기후위기를 통해 이윤추구의 새로운 방법을 구사하는 자본의 적나라한 모습과 왜 노동계급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전쟁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자본주의는 잔인함과 야만성을 더 많은 영역으로 확산할 뿐 인류의 미래를 제공할 수 없다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역사는 전쟁이라는 자본가계급의 살인 기계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노동계급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독일혁명의 위험 때문에 자본가계급이 휴전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이 계급전쟁을 벌일 위험에 처할 때만 전쟁 중단을 고려할 뿐이다오늘날 세계 노동계급이 대대적인 계급투쟁을 즉시 벌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계급투쟁의 확산과 발전만이 그러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오직 노동계급만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긴장의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고 인류에게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NWBCW 한국위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자유민주주의적 사고와 비판으로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박정희 신드룸과 박정희 동상을 잠재우기는커녕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과 향수만 자극했다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사관의 극복은 한국 민족주의가 아니라 코뮤니즘을 향한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국제주의로 가능하다.” (‘노동자에 국가와 민족은 없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국제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의 지배계급이 부르주아 선거를 어떻게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환상을 심어주는지를 분석하고 있다또한북미 지역 노동조합의 한계와 그것을 넘어서는 노동자 투쟁의 절실함과 볼리바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실었다.

 

모든 선거는 위기이며자유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국민투표가 된다부르주아지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잃고 있다고 선언하며 우리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말한다투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투표하지 않았으니 불평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우리에게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공허한 반동적 활동(자본주의 선거에서 투표)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벌이고선거를 집단행동의 대체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대안이 있다.

해리스나 트럼프 모두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가 나아가는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노동계급은 투표를 통해 계급 지배를 정당화하는 대신누가 당선되든 일어나게 될 경제적 공격과 전쟁 준비에 맞서 스스로 조직하고 싸워야 한다.” (‘미국 민주·공화 양당하나의 썩은 체제’, 국제주의노동자그룹)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과거가 이미 의문을 제기한 문제이다……… 프롤레타리아 여러분우리는 이 선거가 우릴 위하여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체제를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기에이 모든 것을 거부하자좌파든 우파든 우리의 적들에게 투표하지 말자그들은 모두 우리를 착취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선거에서는 언제나 자본주의가 이긴다!’), 국제주의혁명그룹)

 

 코뮤니스트좌파 진영 내부 논쟁에는 혼돈의 시대'인가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또 다른 가짜 인터내셔널’, ‘부르주아지가 조직하는 방법을 실었다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위원회’ 참가 이유와 국제맑스주의경향(IMT)에 대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비판과 포푤리즘에 대한 분석을 소개했다.

 

자본주의의 전복과 새로운 코뮤니스트 세계의 토대 구축은 전 세계 수백만 노동자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이는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강령을 중심으로 계급을 통합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국제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의 과업은 자본주의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한 선전을 확산하는 것이며이는 나머지 노동계급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광범위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정신과 이러한 동기로 우리는 더 광범위한 계급 저항을 향한 구체적인 단계를 제공하기 위해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위원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했다이번 호에 보도된 프라하 국제 모임과 아레초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에도 이러한 정신으로 참석했다.” ('혼돈의 시대'인가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인가?‘,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더 오래되고 최근의 이 모든 예는 IMT의 국제주의가 사기이며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다고 주장하는 구호가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IMT는 다른 모든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모든 노동계급의 투쟁을 방해하는 반()혁명의 도구다……… 그러나 일단 '혁명적 패전주의'에 대한 강령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나면그들은 구체적 문제로 넘어가서실제로는 기존의 전쟁 전선에 참여하고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학살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구분하기 시작한다."[9]. 이는 트로츠키주의에 있어 정치적 입장보다 정치적 실천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그 실천은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동원에 끊임없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기사에서 CWO가 쓴 것처럼 파산한 정치적 경향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트로츠키주의는 노동자 투쟁이나 제국주의 전쟁의 영향을 받아 급진화하는 계급 내 소수를 통제하고 탈선시키는 부르주아지의 중요한 도구이며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더 거대하고 정치화된 계급 대립으로 가는 길을 막는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부활하는 IMT의 정책이다.” (‘또 다른 가짜 인터내셔널’, 국제코뮤니스트흐름)

 

 혁명가에서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안톤 판네쿡을 조명했다안톤 판네쿡(1873-1960)은 노동자 운동에서 엄청난 기복의 시대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낸 혁명적 파고를 겪었다판네쿡이 그 사건들에 직접 참여한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노동계급 역사에서 격동의 시기를 겪었던 판네쿡은 평생 맑스주의자로 남았고혁명적 변혁의 열쇠는 노동계급 대중의 계급의식 발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전체적인 전망은 노동계급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판네쿡은 다른 평의회주의자들과 다르다그리고 의식은 조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판네쿡은 평의회를 이상적인 형태로 보지만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 없이는 도달할 수 없으므로 그 과정에 기초한 이라는 개념도 배제하지 않았다그는 이렇게 말한다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위대한 시기는 당쟁의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생각을 논의하고 동지들을 계몽하기 위해 그 생각을 선전한다이러한 공통된 의견 그룹을 당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그 성격은 이전 세계의 정당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의회주의하에서 이 당들은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닌 기관이었다노동계급 운동에서는 이 당들은 계급을 선도하고그 대변자이자 대표로 활동하며지도와 지배를 열망하는 조직이었다이제 그들의 기능은 정신적 투쟁일 뿐이다노동계급은 실천적 행동을 위해 당이 필요하지 않다노동계급은 행동을 위한 새로운 조직…… 즉 평의회 조직을 만들었고행동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 자체이며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도 전체 노동자 자체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안톤 판네쿡비평’,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에서는 헤르만 호르터의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중 의회주의에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헤르만 호르터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정치경제 상황은 다르며따라서 의회주의 전술도 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방어에 이어저는 동지의 의회주의 방어에 대해 자세히 답변하고자 합니다동지는 영국과 독일의 의회주의를 (36쪽부터 68쪽까지방어합니다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러시아(그리고 극히 일부 다른 동유럽 국가)에만 유효하며서유럽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앞서 이야기했듯이 바로 그 점이 동지의 실수입니다그것은 동지를 맑스주의자에서 기회주의 지도자로 전락시킵니다이에 따라 맑스주의자이자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의 급진적 지도자인 동지가 서유럽과 관련해서는 기회주의에 빠지게 합니다그리고 동지의 전술이 여기서 받아들여진다면서유럽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 것입니다이 점은 동지의 주장에 대한 답변에서 자세히 입증하겠습니다.” (헤르만 호르터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문화에서는 낯선 땅에서 노동자로서 삶을 시작하는 소박한 청년의 일상을 소개한 나의 스무 살과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를 실었다조혜영 시인의 시 미투를 통해 고 박영근 시인이 행한 성폭력 사건을 알게 된 조성웅 시인이 박영근 작품상 반납에 대한 이유와 앞으로의 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은 조혜영 시인의 요청에 대한 제 화답입니다일생일대의 결단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저의 지지와 격려입니다문단 내에서 그녀의 삶이 안전하게 보장되고 노동자 시인으로서의 긍지가 지켜지기를상처가 아물어 치유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기원입니다……

저는 조혜영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이 한 사람이 되고 싶고우리가 조혜영 시인의 이 한 사람이 되자고 제안하기 위해 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하고자 합니다.” (조성웅,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박영근 작품상을 반납합니다’)

 

 코뮤니스트좌파 역사에서는 창립 45주년을 맞이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탄생 배경과 간략한 연표를 실었다.

 

이번 코뮤니스트」 20호에는 자본축적의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경제 분석부터 지배계급의 반동적 전쟁과 여기에 맞서는 국제 코뮤니스트좌파들의 원칙(노동자국제주의), 역사투쟁을 깊게 다루었다.

 

미래는 노동자의 것이다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안톤 판네쿡, 1907)

 

다시 한번 소개하는 안톤 판네쿡의 생애와 사상은 노동계급에 영감을 불어넣기에 부족함이 없다앞으로도 우리는 독자와 지지자들의 격려와 다양한 의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한국-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반대!

자본가 정권 타도제국주의 전쟁 타도!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민족에 맞선 민족이 아니라 계급에 맞선 계급으로!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

 

2024년 11월 9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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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전국노동자대회 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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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전국노동자대회 전단>
 
 
계급전쟁만이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년 8개월이 넘었고,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조직적인 학살도 1년이 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1만 명 넘게 사망했고, 양측의 군사 사상자는 50만 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가자 지구에서는 사망자가 42,000명을 넘어섰고, 이 중 45%는 어린이였다. 레바논에서도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2,000명 넘게 사망하고, 1만 명 가까이 다쳤다. 이 무자비한 전쟁 폭력 속에서도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계속 돈을 쏟아붓고, 러시아는 계속 공세를 유지하면서 희생자를 늘려가고 있다. 게다가 심각한 체제-정권의 위기에 빠진 한국과 북한의 통치자들이 위기 모면의 수단으로 이 전쟁에 개입하려고 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에 옮겨붙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일반화된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
 
오늘날 자본주의 제국주의 체제에서 이러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결과는 필연적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 즉 제국주의적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쟁은 지난 120년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다. 현재에도 전 세계에서 50여 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있고, 전쟁의 평균 지속 기간도 길어졌다. 2023년 기준으로 분쟁에 노출된 인구수가 20억 명에 달하고 1억 800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렸다. 분쟁 지역 중 여러 곳에서 인종 청소, 공동체 사이의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60년 동안의 성장률 하락으로 인해 위기가 심화하자 세계 자본가계급은 체제 유지를 위해 지난 40년 동안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 왔고,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부채로 미래를 저당 잡히며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임금, 연금, 사회 서비스의 삭감을 동반한 대규모 투기가 발생했고, 극소수의 부유층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다수 인류는 가난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여기에 자본주의 생산이 지구에 초래한 환경 재앙까지 더해지고,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은 국가가 붕괴하거나 이웃 국가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공급망의 지형 변화는 생활 수준에 대한 위협과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재앙이라는 측면에서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자재 확보 경쟁은 분쟁의 핵심인데, 원자재가 중요한 이유는 세계 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패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대전의 근처에 와 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레바논 등에서 주민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주변에 어떤 일이 닥칠지를 보여준다. 제국주의 전쟁은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양측 군대 또는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두 제국주의 이해관계 사이의 전쟁이다. 그 이해관계는 모든 지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이다. 자본가계급이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국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희생당한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
 
전쟁은 자본의 위기로 인해 발생한다.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그 전쟁은 지배계급의 이념에 종속된 노동계급이 벌이는 전쟁이기도 하다. 전쟁과 관련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을 이용하는 이념은 ‘민주주의’, ‘국가-민족’ 방어 또는 ‘국의 수호 등 다양하게 포장되어 있다. 지금 진행 중인 두 전쟁도 민족주의 기치 아래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노동자들이 착취자를 위해 죽고, 자기 계급의 이익을 잊도록 세뇌하는 대표적인 거짓 이념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민족(해방)투쟁이 진보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지지했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민족투쟁이 억압받는 민족 노동계급의 임무가 아니라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서 지속적인 분쟁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한 투쟁은 어떤 경우에도 제국주의를 약화하지 않는데, 제국주의의 뿌리,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제국주의 시대에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은 체제 자체를 전복하는 투쟁뿐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와 전쟁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평상시에는 과잉 착취당하고, 전쟁 시에는 학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노동계급이 무언가를 위해 일하고 때때로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계급의 적(敵)인 자본가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노동계급의 이익이어야 한다. 이는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와 지구 생태를 위한 이익이다.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 인류 공동체를 위한 사회, 경제적 기반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중단하고, 계속 쇠퇴하고 있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 지금 인류와 지구에 필요한 것은 임금 노동, 화폐,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바로 코뮤니즘이다.
 
 
 
생존권 위협, 전쟁 위기에 맞서
노동계급의 반격! 자본가 정권 타도!
 
 
몰락하는 윤석열 정권의 러-우 전쟁 개입 반대!
 
윤석열 집권 2년 반은 자본주의 위기 심화 속에서 자본가 독재의 폭력성과 총체적 무능을 보여주었다. 윤석열 정권은 시작부터 노동계급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노조 탄압, 부자 감세, 대기업 규제 완화, 민영화 추진, 복지 축소 등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뿐인가. 물가 폭등, 실질임금 하락, 가계부채 증가 등으로 생활 수준은 계속 악화하고, 사회적 참사에 대한 책임 회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옹호, 채상병 사건 수사 방해, 의정 대란 등으로 일상적인 삶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미, 일 제국주의 세력과 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를 조장하고,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개입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반(反)노동, 친(親)자본, 친(親)제국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던 윤석열 정권이 임기 절반을 앞두고 가족과 본인에 대한 끝없는 의혹으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들어섰다.
 
선택지가 없는 윤석열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처럼, 북한의 파병설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모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에 맞서 노동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개입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 북한군 파병설과 윤석열 정권의 살상 무기 지원과 관련해 노동계급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파병-무기 지원에 대한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양측의 정권이 개입하려는 전쟁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희생이다.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모든 군사동맹은 무슨 명분이든 지배계급을 위한 동맹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질서를 위한 동맹일 뿐이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이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제국주의 전쟁에서 어떠한 군사개입(파병, 무기 지원)도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살상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파병된다면 유럽의 전장에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우크라이나 노동계급 군인을 죽이는 역할을 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량 살상무기는 러시아 노동계급 군인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결국 제국주의 전쟁의 확장과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 양측의 노동계급에 큰 고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의 반격! 자본가 정권 타도!
 
그동안 자본가 독재의 폭주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노동자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윤석열 정권은 스스로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반격 없이는 '퇴진' 이후에도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노동자와 수많은 사람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몬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는 일은 노동계급의 당연한 과제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이 단지 부패하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현재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투쟁은 더 나아가야 한다. 그동안 자본가 정권이 강요한 모든 굴욕과 희생을 거부하고, 생존권 투쟁을 전면화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 투쟁을 교란하고 후퇴시켰던 야권연대, 조합주의, 선거주의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확산하고 자본가 정권 타도를 위한 계급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경제위기, 전쟁 위기, 노동자 희생이라는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기에 노동계급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계급전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2024년 11월 9일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으로(NWBCW) 한국위원회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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