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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뿌리는 '부르주아지 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 계급인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 정치, 군사적)을 갖는다. 반면에 다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살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부과한 조건에서만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의 노예, 즉 임금 노예이다. 따라서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양립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중립적이고 계급을 초월한 전지전능한 기관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전의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국가는 계급 통치의 기구이며, 그 기능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 즉 노동계급을 임금 노동의 사슬로 묶어 부르주아지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누가 부르주아지를 대신하여 국가를 운영할지 결정한다. 선거 제도는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부르주아지는 독재를 위한 이상적인 정치적 외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계속 의지해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보통 선거권을 통해 '다수' 또는 '국민'이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착각을 만든다. 즉, 자본주의 국가가 실제로 중립적인 기관이라는 착각, 유권자가 단순히 주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진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후보자가 누구든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지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 줄 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누구에게 투표하든 자본주의적 요구가 승리한다. 보기를 들어 경제 위기 때마다 자본주의 체제는 긴축과 해고 등을 요구했고,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모든 정부는 자본주의 요구에 따랐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 의회)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는 무엇이었나?
이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태도는 어떤 영원한 반(反)정치적 '순수주의'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일부인 의회의 역사적 발전에 근거한다.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그리고 각 단계에서 노동자 운동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의회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전임자인 봉건 귀족에 대항하는 핵심 무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정치 과정에서 명백히 배제되어 투표하거나 후보를 낼 수 없었다. 따라서 초창기 노동계급 운동에서 제기된 요구 중 일부는 정치적 대표성(영국의 차티즘 등)을 포함했다. 지배계급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에게 제한적인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와 같은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새롭게 제공되는 공간을 활용하도록 장려했다. 맑스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처럼 거대한 관료 체제와 군사 기구가 없는 일부 국가에서는 의회를 통한 평화적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이 보여주듯) 다른 대부분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은 혁명을 수반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성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맑스, 「프랑스 내전」, 1871) 이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한 후 새로운 기관을 건설해야 한다.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자본주의 국가들이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면서 실제 정치권력은 점점 더 의회에서 벗어나 관료주의 복합체와 상비군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국가 복합체 내에서 부르주아 의회는 자본주의 통치를 최적화하기 위한 토론장과 위원회로 위축되었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의회 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혁명 세력에게 의회와 선거 참여는 전술적이고 선동적인 것이었다. 선거 출마는 혁명가들이 선거 유세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연설하거나, 의회 연단에서 연설과 시위를 하거나, 의회 면책을 이용해 혁명가들을 기소로부터 보호하는 등 선전을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혁명 물결이 발발한 후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이를 정확히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즉시 제기되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평의회’, 일명 소비에트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대안을 찾았다. 부하린이 작성하고 제3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채택한 테제는 ‘국가 체제로서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지 통치의 ‘민주적’ 형태가 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 국가기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파괴하고 노동자 대표로 구성된 지역 소비에트로 대체해야 한다’라고 인식했다. 동시에 그들은 혁명적 상황에서도 의회 연단을 여전히 유용한 선전 도구로 여겼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혁명적 의원들이 '적진에 들어가 지뢰를 매설'하고 '의회 담장 뒤에서 대중이 의회를 폭파하도록 돕는' 군사적 이미지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코뮤니즘은 미래 사회의 국가기구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기구로서 의회를 부정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위해 의회를 사용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의회 파괴를 자신의 임무로 규정한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오직 분쇄 대상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것이 [그 기구들의] 이용과 관련하여 제기될 오직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길이다. (...)
코뮤니스트당은 이 의회 체제 속에서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의회 분쇄를 의회 안에서 돕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다.” (「3차 인터내셔널 첫 4개 대회 테제」, 결의와 선언, 1920년)
반면, 보르디가의 ‘기권주의 분파’로 대표되는 코뮤니스트좌파의 입장은 의회가 전술적 문제라는 부하린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혁명이 임박하고 노동계급 당면 임무가 부르주아 지배의 정치 기구를 파괴하고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일 때, 혁명가들이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더 중요한 일에 쏟아부을 에너지를 빼앗아 가며,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 기구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맑스주의 원칙으로 민주주의 질서가 오랫동안 발전해 온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선동은 선거와 부르주아 기구에서 보이콧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선거 활동에 막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실천은 이중적인 위험이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활동이라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모든 힘을 빨아들여 당의 다른 모든 부분을 마비시킨다. (...)
선거 활동을 수행하는 당 조직은 혁명에 필요한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활동에 맞는 조직의 성격과 뚜렷이 다른 매우 특수한 기술적 성격을 발전시킨다. 당은 유권자들을 준비하고 동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여러 선거위원회로 쪼개진다. (...)
제1 인터내셔널은 선동, 비판, 선전하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했다. 그 뒤 제2 인터내셔널에서 의회주의의 해악적 영향이 나타났다. 그것은 개량주의와 계급협조를 가져왔다. (...)
언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방식으로 선거를 활용할 수는 없다.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을 활용하는 것은 행동 방식 문제이다. 선거 캠페인과 의회 연단을 활용하는 것은 부르주아 기관 문제이다. 부르주아 기관은 노동자 소비에트 같은 프롤레타리아 기관으로 대체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 이후에 언론, 선전 등의 활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
착취계급에서 피착취 계급으로 권력 이전은 그 뒤로 대의제 기구 변화를 불러온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는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혁명적인 직접행동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은폐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낡은 가면을 찢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의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며, 이 관점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에 완전히 부합한다. (...)
코뮤니스트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계급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아마데오 보르디가,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920년)
“믿을 수 없는 자들이 의회에 들어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혁명의 노선에 따라 투쟁할 거로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 의회에 들어가면 연설을 통해 선동할 수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적 제도들을 믿도록 길들이는 것이다. 의회에 들어간 자들에게 선동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 세계 코뮤니스트당은 이제 의회 선거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다른 할 일을 찾아야 한다. (...)
리프크네히트 동지는 분명 위대한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의회 밖 대중들 속에서 활동하는 한에서만 그랬다. 만약 리프크네히트 동지가 의회 안에서 발언만 했었다면, 맥도널드나 다른 많은 배신자처럼 아직 살아있었을 것이다. (...)
모든 나라 인민이 그런 것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앞에도 이제 양자택일의 선택이 있다. 두 가지 전술이 있다. 하나는 갖가지 민주적 단계를 통해 인민들 속에 순종의식을 키우는 것이다. 다른 것은 대중들 속에 혁명적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이제 우리 힘은 대중들 속에서 혁명적 투쟁을 날카롭게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지금 순종의 길이냐 투쟁의 길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갈라처(영국)의 지지 발언, 위의 글)
코뮤니스트좌파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생디칼리스트 등도 원칙적으로 부르주아 의회 참여를 완전히 거부했다. 이들 모든 분파는 노동자들이 자기 정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적(敵)인 부르주아 정당의 약속, 즉 자본가 식탁에서 더 많은 빵 부스러기를 뜯어내겠다는 약속에 넘어가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그 부스러기를 직접 가져갈 수 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좌파가 선거 참여가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마지막으로 선거에 참여한 것은 1948년이었다. 이탈리아의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은 “투표하지 말자”라는 구호 아래,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 참여했을 뿐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냉전의 경계가 형성되고 노동자들은 각각 (스탈린주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과 기독교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두 제국주의 블록, 소련과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선거 자체는 제국주의 갈등의 한 장면으로 축소되었다. 그때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에 선거는 도전이었다. 73개 도시와 읍내에 있는 지부와 수천 명의 당원으로 당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아직은 다양한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는 주요 정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부는 1919년 보르디가의 ‘기권주의’ 분파의 입장으로 돌아가 선거를 강력하게 비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의회 방식을 통해 이룰 수 없다는 원칙에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선거 문제는 전술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1948년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한 결정적 요인은 후보자를 내세운 정당이 모든 도심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나 공청회에서 발언권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공적인 공간을 사용함으로써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은 더 많은 노동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동시에 체제 전체를 공격할 수 있었다. 아래 전단에서 볼 수 있듯이 당의 목표는 여전히 반(反)의회적이었다.
“우리 국제주의자들은 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의 신비를 여전히 믿고 있는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활할 것이며, 전쟁 세력을 물리칠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보다 효과적이고 현실감 있게 말할 수 있어서 선거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오직 부패한 투표용지와 의회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의식과 힘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고 말하기 위해서.” (“투표하지 말자”, 1948년 4월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 집행위원회)
실제로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가장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는 전술적 문제로 남아 있으므로 선거 참여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은 의회 선거에 참여해서 얻을 수 있는 전술적 장점을 결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선거에 대한 자본주의 미디어의 역할이 증가하면서 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으로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 이후의 모든 선거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미디어와 자본(선거비용)이 선거 자체를 더 지배하게 되어, 노동자들을 ‘자본의 경쟁 영역’으로 강력하게 끌어들인다. 이러한 선거에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후보를 출마시킨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거대한 물량 공세 앞에 작은 선전의 효과도 초라해진다), 오히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만 강화할 뿐이다.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계급투쟁으로 대응해야 한다. 선거에서 자본가계급은 우리에게 온갖 장밋빛 공약과 미래를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임금 노예와 전쟁만을 제안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자본가 편에 서서 싸우도록 속이기 위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대안은 노동자민주주의이다. 노동계급은 위대한 투쟁 역사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독립적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특히,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수백만, 수천만 명이 자기 삶의 수준과 일상을 스스로 결정하고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노동계급 대표자를 직접 선출할 가능성을 열었고. 1905년에 이어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만들어진 소비에트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실제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전 세계 노동계급은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각 나라와 지역에서 노동자평의회를 만들었다. 심지어 기차 승객들도 달리는 열차에서 모든 승객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도록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투쟁의 물결 속에서 자주적으로 투쟁을 조절-통합하고 자기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었다. 일단 선출되고 나면 유권자의 통제를 받지 않는 대통령, 국회의원과 달리, 노동자의 대표는 노동자평의회에서 위임받은 내용에 반드시 따라야 하며, 유권자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각 대표와 함께 ‘대체 대표’를 선출했고, 탄압 시기에는 대표가 체포되었을 때 역할을 대신할 대체 수단이 되기도 했다.
미래에 노동자 투쟁이 대대적으로 확산하고 계급의식이 발전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이 벌어진다면, 세계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계급투쟁이 혁명적 절정에 이르고, 마침내 지배계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노동계급은 자기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생산과 사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노동계급은 처음으로 자기 권력을 갖게 되며, 사회는 계급 철폐와 인간해방을 위한 자유로운 인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 민주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주주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초로 성공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한 나라(러시아)에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든 경험은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의 노동계급은 혁명에 가까워졌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노동계급은 자신을 계급으로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계급이 아닌 민주 ‘시민’이나 애국하는 ‘국민’으로서 투표하도록 길들어졌다.
여전히 유일한 해결책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며, 그것은 혁명적 투쟁을 통해 썩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의회와 자본주의 권력의 모든 기구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선출한 사람이 직접 소환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 기구를 만들어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이형로
이 글은 <코뮤니스트 정세토론회> "선거 이후 위기와 노동계급의 대안" 발제문에서 발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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