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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상)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상)

성승욱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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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우리는 작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출범하면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하며1)


“지난 수십 년간 사민주의(의회주의), 민족주의, 조합주의 등 노동자계급 내부의 장애물들은 노동자계급 고유의 무기인 단결력과 전투성, 그리고 계급투쟁에서의 창발성을 무력화시켰다. 자본의 공격은 강화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자본가,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들에 의해 여전히 여러 장벽에 막혀있다. (생략)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1)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자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투쟁과 실업자, 빈민, 청년, 소수자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2)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에 기반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기반한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 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3)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공산주의를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생략)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생략)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핵심은 낡은 노동조합운동과 사민주의 정치를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코뮤니스트 정치가 직접 만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경로와 입장을 통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과 실천을 주장해왔다. 이글은 노동조합 문제에 대한 보다 실천적인 접근을 위해 우리와 원칙에서 가장 근접해있는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의 입장을 소개, 평가하여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논쟁과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이글은 노동조합의 탄생에서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조합의 변화, 68혁명 이후 현재까지 노동조합의 역할과 계급투쟁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실천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노동조합의 탄생에서 68혁명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글의 결론 일부를 미리 밝히자면, 코뮤니스트들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개입하는 원칙을 소개하고 정립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넘어선 운동, 즉 ‘반노동조합 노선’으로 표현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과거 코민테른의 노동조합 개입방식인 전달 벨트(노동조합이 당과 계급 사이의 전달 벨트 역할) 전술은 폐기되어야 하며, 코뮤니스트는 노동조합을 지도장악할 수 없다. 코뮤니스트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장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과 직접 만나고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의 자기 조직화를 위해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운동에 개입한다.

 

코뮤니스트는 임금 투쟁이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어떠한 투쟁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무관하다며 기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뮤니스트들은 어떻게 노동조합 기구가 항상 이 투쟁들을 궤도 이탈시키고 통제하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인정하는 범위를 넘어서 비공인 투쟁을 시도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생존조건의 지속적인 악화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외부 또는 노동조합에 대항한 비공인 파업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투쟁은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투쟁위원으로 구성된 파업(투쟁)위원회에 의해 유지 확장된다.

 

코뮤니스트는 계급투쟁과 노동자운동에 개입함에서 공장(작업장)뿐만이 아니라, 지역에서도 국제주의/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자 정치 그룹은 각각의 위치/ 장소/ 지역에서 코뮤니스트와 동조자로 구성된다.

 

현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외부에서 그들에 적대하여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를 위하여 반(反)노동조합 노선"을 고수해야 한다. 노동자총회, 투쟁위원회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코뮤니스트는 공산주의 정치적 틀을 항상 제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혁명적 상황의 성숙은, 반(反)자본주의적 투쟁 기구들의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들로 발전하는 능력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특징을 취하는 그러한 조직들의 반(反)자본주의와 혁명적 방향에 따라 명확히 나타날 것이다. 반(反)자본주의와 혁명적 방향은 코뮤니스트노동자들의 활동적이고 조직화된 개입 없이 자발적으로 행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공세적 시기에 어떻게 투쟁 기구들의 개별적 경험들이 혁명 전략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이다.

 

물론 노동조합의 국가(자본) 기구화 진행이 아직 온전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거나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탄압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반(反)노동조합 노선은 노동조합 안의 노동자를 포기하거나, 반(反)노조정서에 역이용 당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노동조합을 개조하거나 장악할 수 있다는 낡은 환상에 비하면 기우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아직 새로운 운동의 출현과 그 주체가 준비되어있지 않을 뿐이다.


1. 노동조합의 탄생과 성격의 변화

 

노동조합은 19세기, 일상생활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목적으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심각한 갈등의 국면에서 탄생했으며, 조직과 계급의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자본주의 최대의 번영 시기에, 노동 계급은 종종 격렬하고 처참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지속적인 조합조직을 건설했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다. 이 기관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개혁과 투쟁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2)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점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을 해온 노동계급 조직이었고 그들의 계급에 충성을 다 하는 투사들로 구성되었다.”3)


비록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고 시도하지 않는 체제 내의 조직이었을지라도 계급의 진정한 기관이었다.

 

“여러모로, 이러한 노동조합은, 과도한 관료주의 없이 노동자에 의해 창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달랐다. 비록 이러한 노동조합이 계급의 제한된 도구였다는 것 그리고 모든 혁명가들에 의해 이 부분(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방어하기 위한 단순한 조직이었다)이 인식되었을지라도 4)


“노동계급의 방어적인 조직으로써 처음 나타났던 노조들은 인간 이하의 노동환경에 직면했고, 오래된 친목단체나 회사의 확장으로서의 산업적 측면에서 그들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노조는 그들의 열망에 기초해서 개량주의 수준까지도 도달하지 않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이며 경제적인 분석을 이용하자면, 개량주의는 혁명적인 행동에 대한 요구 없이 법적인 발전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조합들에게는 발전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물음은 전혀 없었으며 더군다나 사회주의에 대한 물음조차 없었다. 노조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좀 더 참을만하고 덜 굴욕적인 노동환경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증명해왔듯이, 자본에 좀 더 적합한 노동환경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노동조합들은, 혁명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노동계급의식을 가지며 오늘날 노동조합들의 왜곡된 계급의식, 타락과는 대비되는 건전한 구성을 가진 조직이었다.”5)


이러한 초기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상승기’ 또는 ‘상승과 자유경쟁의 단계’라는 경제적 조건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현재의 노동조합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이 체제로부터 용인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마찬가지로 계급의 결합에서 하나의 중심이 되었고, 이 속에서 계급의 연대와 계급의식이 발전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그것으로부터 "공산주의의 학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개입활동을 했다.”6)

 

“이러한 노동조합은 그것의 역사적인 시기가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완전히 다르게 탄생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상승 국면 동안에 탄생했으며, “자유경쟁” 시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두 가지 측면 - 상승과 자유경쟁의 단계 - 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1. 비록 자본가 계급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 구조는 계급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그러한 개선(생활조건, 노동조건) 비용을 큰 어려움이 없이 흡수할 만큼의 충분한 이윤을 가졌다.

2.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이미 나타났으나 아직 제국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생산 및 금융 독점은 형성되지 않았다.

또 다른 본질적인 측면 : 이러한 역사적 국면 동안 부르주아지, 국가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합법화시키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분명히 중재 조직이지만, 부르주아 국가는 이 중재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조합/노동자와 부르주아지 간의 충돌을 수반할 뿐이었다. 7)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또는 자본주의 쇠퇴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노동조합의 특징과 역할은 변했다.

 

“제국주의 시대인 20세기에 변한 것은 무엇이었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자본주의는 거대한 제조업 및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금융 센터를 형성하는, 제국주의 특징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국제경쟁이라는 맥락에서,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조합을 합법적으로 인정(이 단계는 19세기 말에 시작했다.)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임금을 관리하기 위해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중재자로서 노동조합을 인정했다 (국제적인 수준의 '국민 국가제도’에 대한 자본의 재평가와 경쟁의 요구에 따라). 수년간 노동조합은 중재 기구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발전은 피할 수 없는, 노동조합이라는 본질의 결과였다 : - 노동자와 자본가 - 라는 두 당사자 사이의 조정을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심지어 지배계급과 국가 양쪽에서 승인, 합법성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는 19세기를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충돌은 주로 지역적이고 제한적인 특징을 띤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구조 변화 (자유경쟁의 소멸), 생산 및 금융 독점의 보급, 국제 경쟁은 민족국가의 수준으로 충돌의 규모를 상승시키고 국가고용주협회는 노동과 자본 간의 경제적 충돌에 점점 더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수년간, 노동조합은 노동력에 대한 협상, 즉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 기구로서의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다. 만약 노동조합에 이러한 본질적인 특성이 남아 있다면, 변화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이다.”8)


“20세기 초에 이르러 노동조합의 성격은 변화했다. 사회 전반으로 가치법칙이 확장되면서 노동조합과 다른 중요한 노동계급 조직들은 자본주의 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자 대중정당들 역시 이에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태의 예 중 하나는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노동조합이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다.”9)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진입하면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노동자계급에게 개혁 및 생존조건의 개선을 용인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노동조합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 옹호라는 그것의 근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이후, 그리고 임금노동의 폐지와 그와 더불어 노동조합의 소멸이 주요 사안이 되어버린 하나의 역사적인 상황에 직면한 이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옹호자로,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대리자로 되어버렸다. 이것이 노동조합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새로운 쇠퇴기에 유일한 생존기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전개는 쇠퇴기 이전의 노동조합의 관료주의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생활의 모든 구조들을 자신 속에 흡입해 버리려는 국가의 가차 없는 경향을 통해 조장되었다.”10)

 

2. 노동조합의 역사적 변화와 계급과의 대립

 

그렇다면 노동조합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경과하면서 어떻게 성격을 바꾸었으며, 노동자계급과 무엇으로 대립하게 되었는가?

 

노동조합주의

우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해당되는 노동조합주의는 오늘날 새로운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초기부터 존재했다.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활동이다. 그것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 양식으로 교체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에서의 좋은 생활 조건을 보장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특징은 혁명성이 아니라 보수성이다.

 

“노동조합주의는 처음에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영국에서 등장했다. 그것이 다른 나라들로 널리 퍼진 후에, 자본주의적 산업에 자연스럽게 경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특별한 조건이 조성되었다. 초기에 풍부한 미개척지는 마을에서 노동자 부족 현상과 상대적인 고임금 및 좋은 조건들을 만들었다. 미국 노동 총동맹은 나라에서 권력을 갖게 되었고, 점점 그 조합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생활 표준들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었다.

 

명백히 그러한 조건들하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한다는 생각이 노동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날 리는 없다.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충분하고, 꽤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현재 존재하는 질서에 적대적인, 분할된 계급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가능한 모든 것들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대부분이 유럽에서 건너온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 공간이 있었다. 이런 급속한 농업 인구의 증가로 인해, 에너지와 행운이 함께한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기능공, 소상인, 심지어 부유한 자본가가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급속히 성장하는 산업이 필요했다. 거기에서 진정한 자본주의적 정신이 노동계급에게 널리 유포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경우가 발생했다. 여기서는 영국이 세계의 상업과 대산업을 독점했고, 외국 시장에서 경쟁자가 없었으며, 영국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 부유한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본가들은 산업 평화를 위해 조합과 고임금을 허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정신에 물들게 되었다.”11)

현재 거의 모든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있는 노동조합주의는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가치, 곧 조직화된 투쟁의 정신인 노동자 연대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된 힘의 최초 형태를 구현했다. 하지만 초기 영국과 미국의 노동조합들에서 이런 가치는 종종 잘못 적용되어, 결국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인 협소한 동업조합으로 전락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노동조합주의의 형태는 자본주의의 발달 차이들로 인해,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모든 국가에서 같은 양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서서히 소멸해갈 때,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은 때때로 그것들을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조합주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계급의식과 불안정 노동계급이 증가할수록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조합주의를 만들었고, 더욱 발전된 자본주의에 적응해 나갔다.

 

따라서 새로운 조합주의는 모든 조합주의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으며, 노동 계급과 노동조합주의 사이에는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게 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생디칼리즘(전투적 조합주의) 역시 그것의 전투성과 무관하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주의이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모든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의 개량으로 제한하는 데 반해, 노동자의 삶을 방어하면서도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으로까지 향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평의회이다. 부르주아 권력의 파괴와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평의회의 정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다.

 

전쟁과 혁명의 시기, 노동조합의 본질

 

노동조합 형식은 자본주의 상승기인 19세기의 구조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조합 관계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실제 표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노동조합은 그러한 형태의 특성을 상실했는데, 이러저러한 노동조합 지도자의 실수 혹은 배신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본질 때문에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되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세계 분할을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이다.

 

“사회주의당, 사회민주주의자, 개량주의자, 이들 모두 - 일부를 제외한 - 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면서 그들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줄을 섰다. 사회민주주의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들은 그들 “자신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다. 이것은 민족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입장에 있는 노동조합의 최초의 분명한 사례였다.” 12)

 

노동조합은 부르주아 국가인 조국의 방어자 역할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의 수적인 증가와 사회적 힘은 1914년 이후 계속 증가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수적으로 줄어든 몇몇 나라에서도 그만큼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점차로 커져 왔다. 노동조합들에게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 참사는 그들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사건이었다고 이야기된다. 이것은 그때까지 자본주의가 노동조합을 파괴적인 힘으로 두려워했고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협력적인 역할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지배(자주 관리가 아닌 노동조합의 노동자통제)”라는 수많은 경험은 자본가들이 만족할만한 효과에 의해 그들을 만족시켜왔다. “노동자들의 지배”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약화시켜왔고, 공장의 공정과정을 촉진시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노동조합들은 (특별히 자본주의적인 총체인) 조국의 방어자로서 뿐만 아니라 착취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로서 눈에 띄었다.”13)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기인 1917년 러시아에서이다.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동이 성공한 유일한 곳이다. 당시 노동조합은 볼셰비키 당에 지도되지 않았고, 혁명적 행동의 주역도 아니었다.

 

“지배계급(황제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의 정치권력이 빈농과의 동맹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전복되었고 볼셰비키 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유일한 시기. 그런데 혁명은 볼셰비키가 기존의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는 일 없이 일어났다 (“전달 벨트”로서 노동조합을 활용하지 않고서). 혁명가에게 소비에트와 그전의 기본적인 단계인 공장위원회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조직이 있었다. 볼셰비키는 노동대중과 군인들을 장악하여 그들을 혁명적 행동으로 이끌려고 했지만, 동시에 볼셰비키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은 단 한 곳도! 확실히, 없었다. 1917년 전후 러시아에서 노동조합에 의해 공개적으로 수행되었던 몇몇 반혁명적 활동보다 더 적었다. 예) 철도 노동조합은 반혁명적 구조위원회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군대가 이동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우편 및 전신 노동조합은 스몰리 협회와 교신하여 볼셰비키를 방해하였으며 은행 노동조합은 혁명 조직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파업을 선언하였다.”14)

세 번째는 이탈리아에서 대중파업과 대규모 공장점거가 잇따랐던 1919~20년의 “붉은 2년” 동안이다. 토리노와 밀라노 등지에서 타올랐던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 상황에서 이탈리아사회당은 손 놓고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노동총동맹 또한 이들과 함께 투쟁의 확산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혁명적 기회를 유실했고 뒤이어 반동적 공세를 초래했다. 붉은 2년에 이어 끔찍한 검은 2년이 뒤따랐고, 무솔리니 파시스트의 권력 장악으로 반동의 최고조에 달했다.

 

“최근의 사례는 “붉은 2년” 동안 이탈리아노동총동맹 [CGdL] 의 행동이었다. 공장점거가 한창일 때, 계급투쟁(적어도 단순한 요구의 영역에서라도)을 확대시키기 위한 노력 대신 이탈리아노동총동맹은 이탈리아사회당과 함께 확실한 반대를 했다. 그들은 공장에서의 시위를 고립시켰고 동시에 금속노동자의 쟁의에서 타협을 시도했다. 지올리티(Giolitti) 정부에 제출한 문서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이전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산업의 정확한 상태, 그들의 재정 및 기술적인 작업에 대해서 가능한 한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규제의 실행에 기여하는 노동조합의 소산인 공장 대표자를 통해서, 직원에 대한 고용과 해고를 통제하고 따라서 필수적인 규율과 함께 작업장 생활의 정상적인 과정을 장려한다.”15)


이러한 노동조합 활동은 그들의 개량주의적 지도부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핵심은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개량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혁명적 관점에서 명백하게 혹은 잠재적으로 혁명기였던 1917년과 “붉은 2년”의 역사적이고 중요한 순간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걸림돌이 되었다. 비록 1920년대 이후 코민테른이 반혁명의 도구로 전락하여 노동조합을 장악했지만, 이전의 혁명시기 노동조합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도되거나 공산주의 강령과 일치하는 혁명적 행동을 한 경우는 어떠한 곳에도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본질이며,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의 관계 설정의 토대이다.

 

스탈린주의와 노동조합

 

1930년대 노동조합은 자본의 보조적 기관으로서 자신의 잠재적 특성을 명백히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스탈린주의였다. 서구에서 노동조합의 반동적인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상황의 악화는 러시아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진행된 이래 예전의 모든 부르주아 세계는 그것으로부터 착취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36년 이후로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를 약화시키면서도 실제로는 착취의 구체화를 강화하는 거의 모든 수단은 스탈린주의 러시아 안에서 그 모델을 찾았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 안에서 자본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면,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노동조합에게 매우 강한 힘을 주면서도, 착취를 근본적으로 강화하여 자본가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사례를 제공해 주었다. 결국, 노동조합의 본질적 운명을 폭로하게 된 셈이다.

 

“정치적 권리와 공장 안팎에서 모임을 개최할 권리에 대한 완전한 억압; 고용주에 의해 강요된 초과노동이나 공식적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기본급; 고용주의 결정에 따른 징계수단이나 벌금, 고용주는 또한 공장 법규를 명령한다.; 시간동작연구와 무수히 많은 통제, 일한 분량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노동, 기술적“자격”과 임금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내에서의 위계적 분화; 오직 자본에게만 이익이 되는 단체협약, 생산자들의 손해로 향하는 끝없는 생산성의 향상, 법에 따른 혹은 실제적인 파업금지 ; 짧게 말해, 서구에서 노조조직을 점점 더 부정적인 조직으로 이행하게 하는 모든 것은 1930년대 러시아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자본과 노조에게 영향을 주었다.”16)


다른 어떤 부르주아지보다도 스탈린식 관료주의는 노동 주기의 가속화와 최대한의 직업분류로 프롤레타리아를 가르고 나누어 착취를 증대시켰다. 러시아에서 노동조합과 관료주의는 그들의 서구식 상대방을 제압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 관리자는 노동하고 있는 그들의 동료에 대한 착취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그들은 노동자의 기본급을 능가하며 그들의 팀 안 노동자들의 숫자 비율에 따른 보너스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임금이 보통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부터 증대되는 것을 보며 이 착취를 증가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의 관리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노동에서 그들의 동료들의 적으로 변한다.”17)

1939년 통과된 노동법은 말한다.: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의 임금을 특징화시키는 기본적 특징은 전문노동자와 비전문 노동자 사이의 임금에 서열화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보수로써 소부르주아의 서열화는 사회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수년 동안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는 그치지 않고 서열화와 싸웠다.

 

수년 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맑스 사상의 충실한 표현으로써 임금노동을 통한 산업발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반대로 맑시즘은 임금노동의 폐지와 사회의 경제적 서열화의 폐지, 모든 개인적 요구의 무제한적 만족의 폐지, 개인적 집단적 만족에 필수불가결한 위대한 자유의 폐지를 확립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혁명적인 어떤 것도 현재의 역사적 고비에 실현될 수 없다.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안에서의 임금차이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직접시장관계에 의해 성립된 조건이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임금격차는 헌법에 따라, 원칙이라는 상태를 확보했으며 결국 이것에 대한 투쟁은 범죄가 된다.”18)

한편,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보다 파업할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서구에서 사실상 이러한 권리는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그들의 대표, 즉 노동조합이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동자 자신들에 의해 일어나는 파업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조나 국가와의 제휴를 맞이하게 된다. 종종 노동자들의 직접적 패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에게 중재안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렇다. 1936년의 프랑스의 혁명적 파업이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실패한 이후로, 거의 모든 나라는 파업이 노동조합에 의해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19)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파업은 노동조합에게 위임되었다. 그뿐 아니라 계급투쟁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일상적 관계 안에서 노동조합은 둘 사이의 완충장치로서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 노동자를 자본의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을 돕는 앞잡이로서 나타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도 서구에서도 노동자들의 자주적 투쟁이 아닌 노동조합에 의해 독점되어 버린 자본에 대한 노동의 모든 투쟁의 표현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분명히 드러난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이윤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노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희생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해서, 곧 다음 말을 덧붙였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들의 몫을 나누지 않는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정부와 노동조합 사이, 심지어 직접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중재자와의 사이에서의 협상이 되었다. 문제는 결코 ‘희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나 분명히 ‘어떻게 희생의 도입을 조직하는가.’였다. 그리고 이 대본의 마지막 행동은, 수백 번 연기되었던 것으로, 언제나 똑같았다. 국가 자본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에 의한 새로운 희생이 그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승리했다며 외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 없었더라면 더욱 나빴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3. 소결 : 68 이전 과거 노동조합의 특징

 

과거의 노동조합들은 많은 점에서 오늘날과는 달랐지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노동조합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중재 기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형식에서 필수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역할의 발전은 노동조합이 중재 기구의 역할을 했으며, '제도적' 노동조합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은 언제나 노동력에 대한 협상, 즉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 기구로서 그것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다.

 

둘째, 노동조합은 대표단과 대의권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노동조합의 초기 관료화의 과정은 단순했지만, 이것은 노동조합의 실제 활동의 중요하고 공식적인 반영이었다. 이것은 결국 공식적으로 노동조합-형태의 특징과 연관된다. 사실상 그것은 관료주의의 조건들을 창출하는 중재와 협상이라는 기능과 결합된 바로 대표단과 대의권이다. 노동조합이 파업과 투쟁을 독점하면서 대의권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것은 노동자 직접행동의 분출과 직접민주주의의 확장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노동조합은 정치적으로 개량주의의 온상이다. 노동조합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개량주의를 위한 공간일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형태의 본질과 관련 있다. 사실상 자본과 노동 간의 중재 기관으로서, 노동조합의 행동 지형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그것이다. 그래서 제3인터내셔널 시기에 노동조합이 혁명 조직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난날 경제 확장시기에 노동조합이 개량과 임금 상승을 얻어낸 것도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이었지 중재의 결과가 아니었다. 자본의 공격과 자본주의 주기적인 축적 위기는 노동조합들을 더욱 개량주의로 고착화 시킨다.

 

“경제 위기의 강풍과 역풍 사이에서 노동계급의 노동 및 생활 조건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그 공격이 민족경제의, 자본주의 발전의, 시장 확장의 이해관계 방어를 위한 합의의 관행에 기초하기 때문에, 각각 이전의 “개선” 을 무효화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상에 불과한 그러한 요구의 정식화를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축적의 위기에서, 노동조합은 자본의 경제적 한계를 받아들인다. 노동조합은 노동조합 그 자체가 매일의 계급투쟁에서 주된 장애물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부과한다.”21)


<다음 호에 계속>

 

 

 

<주>

 

1)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3) <원문> [Response to an Inquiry from Korea],2007, 국제주의자전망(IP)
<번역>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 사회주의노동자신문

 

4)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5)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6)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7)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8) 위의 글

 

9) <원문> [Response to an Inquiry from Korea], 2007, 국제주의자전망(IP)
<번역>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 사회주의노동자신문

 

10)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11) [노동조합주의], 1936, 판네쿡

 

12)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13)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14)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15) 위의 글

 

16)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17) 위의 글

18) 위의 글

19) 위의 글

 

20)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2005, 국제공산주의흐름

21) [오늘날 코뮤니스트의 과업과 노동조합], 1997,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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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시대 - 국제공산주의흐름

파국의 시대1)


국제공산주의 흐름
 


오늘날 혁명가들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모두 공유하지는 않지만, 이는 1차 세계대전에 반응해야 했던 사람들과 대전 이후 뒤따른 혁명적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이 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비슷하게 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는 것이 그로부터 도출된 공산주의 강령과 전술을 다시 고무시키는데 필수불가결했다.


 「국제평론」에 실렸던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련된 연재물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확장에 깔려있는 기본적 과정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이 지구의 전(前) 자본주의의 지역으로부터 그 체제의 진정한 핵심인 부르주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밀어닥친 재난의 귀환을 예측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원제목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을 1915년 감옥에서 썼을 때, 1914년의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발은 교전하는 양 진영의 노동계급에게 퍼부었던 파괴와 참상 때문에 파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배신행위, 즉,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훈련된 국제주의의 전수된 봉홧불인 대다수 사회민주당의 결정이 그들의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고, 191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 동안 제2인터내셔널과 그를 구성하는 당의 수많은 회의에서 통과된 전쟁 반대 선언에서 울려 퍼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 학살하는 것을 재가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에 파국이었다.

 

 이는 지금은 서로 다른 국민정당으로 쪼개지고 그 다수가 지도정당으로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를 위한 강제 징병 관료로서 서명하게 한, 인터내셔널의 죽음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을 배신행위로 끌고 간 “사회 쇼비니스트” 또는 “사회 애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끔찍한 와해 속에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인 “중도주의자들”은 온갖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평화 정책의 가능성이라는 어리석은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사회 애국주의자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설 수 없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교황”이었던 카우츠키의 경우에는, 인터내셔널이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일 뿐이라는 근거로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주 멀어졌다. 이와 같은 트라우마의 시대에 오직 소수만이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의 전쟁 노력을 인터내셔널이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유보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문서를 전쟁 전야에 채택한 인터내셔널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을 앞당기는 수단으로서 전쟁이 가져다 준 사회위기를 사용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의 개전시기에 민족주의적 히스테리에 직면하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에서 묘사된 “학살 분위기”는 혁명적 좌파의 훌륭한 투사들까지도 의문과 어려움으로 몸부림치게 했다. 보기를 들자. 라이히스타그(Reichstag)에서의 전쟁 채권에 대한 당 투표를 발표한 「독일사민당」 신문인 「Vorẅarts」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닌은 이것이 정치 경찰과 함께 공모한 헛소문이라고 처음에 믿었다. 독일의회에서 반(反) 군사주의자 리브크네히트는 처음에는 당 규율을 벗어나 전쟁채권에 대한 투표에 참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사회민주주의 내의 좌익반대파가 불완전한 개인들의 소수집단이었음을 그녀가 느낌 정도를 보이고 있다.


 “나는 (라이히스타그) 대표들의 활동에 맞서는 가장 활발한 행동을 하기를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일관성 없는 인물들(집단)로부터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 칼(리브크네히트)은 하늘의 구름처럼 떠돌아 붙잡을 수 없군요. 프란츠(메링)는 문자캠페인 말고는 관심도 없습니다. 클라라(제트킨)의 반응은 히스테리 같고 가장 어두운 절망인 것 같고요.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려 합니다.”2)


 아나키스트 중에는 역시 혼란과 철저한 배신이 있었다. 덕망 있는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독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프랑스 문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그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나코-트렌치스트라고 불렸고,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 CCTT의 경우에는 특히 애국주의의 매혹이 강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그 이질적 성격 때문에 “맑스주의 당”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뿌리부터 흔들리지는 않았다. 수많은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그들이 전에 지녔던 동일한 국제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방어했다.3)

 

 

제국주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공공연하게, 재조직화와 재집단화의 작업은 민족주의적 열광과 국가억압에도 불구하고 선전과 선동의 기본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전의 사민주의 좌파 그룹들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전쟁이 오랫동안 운동을 붙들어 왔던 가정들을 어떻게 휩쓸어갔는가를 이해하는 투철한 노력, 이론적 재점검이었다. 국가 방어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조심스럽게 선택한, 맑스와 엥겔스의 문구를 사용하면서, 반역자들이 그들의 애국주의를 위장한 “사회주의적” 포장을 찢어버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독일의 경우에는 러시아 짜리즘이 제기한 반동적 위협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맑스주의 경향의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이론적 탐구의 필요성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취리히 도서관에서 조용히 헤겔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 레닌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코뮨(The Commune)」에 최근 실린 논문에서 미국의 맑스주의-인본주의 위원회의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은 레닌의 헤겔 연구는 그의 멘토인 플레하노프와 (확장해서 그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이 조야한 유물론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또한 헤겔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역사의 진정한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고 주장한다.4)


 물론 헤겔의 기본적인 변증법적 원칙 중의 하나는 한 시대에서의 합리적인 것은 다른 시대에서는 비합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특히 플레하노프 같은 사회 쇼비니스트들에 레닌이 응답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전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사회 쇼비니스트들(플레하노프가 이끄는)은 1870년 전쟁에서의 맑스의 전술을 인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연합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조국을 방어할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있다는 1891년 엥겔스의 성명에 대한 독일의 입장들(Lensch, David 등 집단의 유형)이 그렇다. … 이러한 모든 인용들은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자들 편에 서서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무모하게 왜곡시키는 보기들이다. … 진보적인 부르주아지 시대의 전쟁에 대한 맑스의 태도를 인용하고,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는 맑스의 언명을 반동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언명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맑스를 왜곡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견해를 사회주의자의 견해로 대체하고 있다." 5)

 

 여기에 맑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가 반동적 체제가 되었다는 열쇠가 있다. 전쟁이 그것을 증명했으며 이는 운동의 낡은 전술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와 옛 시대의 위기에 있는 자본주의 특성, 그리고 계급투쟁이 맞닥뜨린 새로운 조건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뜻했다. 좌익 분파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진화의 이러한 기본적 분석은 보편적이었다.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은 전쟁으로 이끄는 시기의 제국주의 현상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기반으로, 인류가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엥겔스의 언명을 담아, 이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이 전쟁은 야만이다.”고하면서 당면한 현실이라고 선언했다. 이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억제되지 않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서 특정한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낡은 전략은 모든 진보적 내용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고삐 풀린 시대에 민족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민족(국가)의 이해는 제국주의라는 필멸의 계급의 적의 지배아래 노동대중을 몰아넣는 구실로만 봉사할 뿐이다.”


 트로츠키는 「Nashe Slovo」에서 전쟁은 국민국가 스스로 인류진보를 진전시키는데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룩셈부르크와 같은 방향으로 쓰고 있다.

“국민국가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틀로, 계급투쟁을 위한 기반으로,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국가형식으로 스스로 성장했다."6)


 이보다 더 유명한 저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처럼 세계 강대국 사이의 유혈적 갈등은 이들 강대국들이 전 지구를 분할하고 제국주의적 먹이는 제국주의 도깨비들 사이의 폭력적인 숙원풀이를 통해 다시 분할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다.


 “검토하고 있는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는 지구의 마지막 분할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재분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분할이 가능하고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 정책이 지구상의 미점령지역의 장악을 완결지었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세계는 완전히 분할되어 미래에는 재분할만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소유자로서 주인없는 지역을 넘기는 대신 하나의 ‘소유주’에서 다른 소유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임을 말한다.”7)

 

같은 책에서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를 “기생과 쇠퇴” 또는 “소멸해가는 자본주의”로 특징지우고 있다. 기생적이라는 의미는 특히 영국의 경우 공업국이 지구적 부에 생산적으로 공헌한 경향이 점점 금융자본과 식민지로부터 빨아들인 초과이윤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비판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금융투기의 만개와 몇몇 강대국들의 탈공업화의 증거를 보면 직관의 요소를 담고 있다).  쇠퇴의 의미는 (레닌은 성장의 절대적 정체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으로부터 독점으로 기우는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부르주아 사회가 더 고도의 생산양식으로 그 자리를 양보할 필요성이 커졌음을 뜻한다.

 

레닌의 「제국주의」라는 저술은 수많은 약점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는 겉으로 드러난 징표들의 기술에 가깝다. (“(제국주의를8) ) 정의하는 다섯 가지 특징들”은 특정 국가와 블록이 제국주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좌파들의 인용구이기도 하다.) 이는 룩셈부르크가 정의했던 것처럼 축적 과정에서의 현상의 뿌리로 다가가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다. 식민지로부터의 초과이윤으로 기생하며 사는 선진 자본주의 중심국가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제국주의 기획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계급 언저리의 “노동귀족”을 매수한다는 견해)는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 형식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커다란 간극을 남기고 있다. 더구나 독점시기(거대 사적연합이라는 의미의)는 무엇보다 전쟁과정을 통해 이미 국가자본주의의 엄청난 성장이라는 자본주의 쇠퇴의 “고도의” 표현으로까지 전환되었다.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분명히 부하린이 했는데, 그는 “제국주의 국가의 시대”에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삶의 총체가 무엇보다 경쟁하는 제국주의와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기구에 의해 삼켜져버렸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인물 중 하나였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국가에 대한 총체적 대조를 해보면, 제국주의 국가는 그 기능의 복잡성의 엄청난 증가와 사회의 경제적 삶으로의 격렬한 침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전반적인 생산영역과 전반적인 상품순환영역을 지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혼합기업의 중간유형은 순수한 국가규제로 대체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중앙집중화 과정은 더욱 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을 위해 금융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배계급의 상이한 하위집단을 제거하고 그들을 단일한 금융자본주의 집단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거대한 국가기업의 주주 또는 동업자가 되었다. 착취의 보존자와 방어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국가는 착취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직접 맞부딪치는 단일한, 집중화된 착취조직으로 전환된다. 시장가격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는 노동력의 보존을 위해 충분한 일정한 배급량을 할당받는다.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관료주의는 그 중요성과 권력이 꾸준히 성장하는 군사당국의 입장과 전적으로 발맞추어 기능의 조직화를 완수한다. 국민경제는 군사적 방식으로 구성되고 거대하고 규율있는 육군과 해군을 가진 국가로 흡수된다. 노동자는 그들의 투쟁에서 이와 같은 괴물 같은 기구의 무소불위와 맞서야 하며 그들의 모든 진전은 직접적으로 국가에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범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착취에 대항하는 반란은 부르주아지의 국가조직에 맞서는 직접적 반란의 의미를 지닌다.”9)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와 전쟁경제는 분명히 뒤이은 세기의 근본적 특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괴물의 전능한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부하린은 앞으로의 모든 중요한 노동자투쟁은 국가와 맞서는 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일한 깊은 부르주아지 국가를 파괴하고 그들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대체하는, 다시말해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구를 “폭발시키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결론짓는다. 이는 기존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데 대한 모든 가정들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뮨의 경험 이후까지도 이러한 가정들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고 이는 점차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적 입장이 되었다. 판네쿡은 1921년 부하린과 같은 입장을 취했고, 부하린은 레닌이 부하린을 아나키즘으로 넘어갔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응답을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이해할 필요성 때문에 끊임없이 진화하는 변증법에 다시 빠져들었고, 판네쿡과 부하린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결론은 10월 혁명전야에 쓴 「국가와 혁명」에 정식화되었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1917)」에는 맑스가 확신한, 경제모순에서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향한 추동을 말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은 이윤율 저하에 의해 발생하는 압력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시장 확대의 필요성에 인식을 포함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처럼 부하린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적 “지구화”의 과정이 통일된 세계경제를 창조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앞으로 쇠퇴의 길만이 남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전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적절한 임무는 적어도 큰 틀에서는 세계시장의 창조였다. 그리고 그 시장에 기반한 생산의 창조다.”10)

 

 이처럼 맑스주의를 호전적 진영의 어느 하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왜곡시키고, 현상유지로 되돌리기를 원했던 사회 쇼비니스트들과 중도주의자들에 맞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은 더 이상 진보적 자본주의는 없고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역사적 의제에 올랐음을 만장일치로 확인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


 역사적 시기의 똑같은 근본적 문제는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고양되는 국제적 물결의 절정의 지점인 1917년 러시아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소비에트로 조직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짜르의 제거가 그들의 근본적 문제의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발견했을 때, 사회민주주의의 우익과 중도파는 옛 짜르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2월을 합법적 혁명으로 주장한 모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의 숙원을 풀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비에트 대항권력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맞서 그들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주의가 충분하게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맑스의 저작물을 빠르게 훑어간 멘셰비키에 의해 이론적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너무나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과 볼셰비키는 역사적인 등넘기 놀이를 하는 모험주의자들의 일당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4월 테제」에서 레닌이 내놓은 응답은 항상 역사의 운동을 총체성으로 강조한 헤겔에 대한 그의 독해와 일치했다. 동시에 그 응답은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헌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혁명을 위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성숙해야 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출현은 이러저러한 국가만을 검토함으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제국주의 이론이 보여준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지구적 체제였으며 그 쇠퇴와 전복의 필요성 역시 지구적 규모에서 무르익는다.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이에 대한 충분한 증명이었다. 고립된 러시아 혁명은 있을 수 없고 러시아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봉기는 국제혁명을 향한 첫걸음일 뿐이었다. 이는 레닌이 망명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그를 환영하러 나온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한 폭탄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병사, 선원, 그리고 노동자 동지들. 동지들과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축하하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로 동지들을 만나 행복합니다. …칼 리프크네히트 동지의 법정소환에서 인민이 자본주의 착취자들에 맞서 그들의 무기를 들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 동지들의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11)


 혁명적인 국제주의 좌파가 코민테른 1차 대회에 함께했을 때 10월 혁명에 의해 속박을 푼 혁명적 격정은 최고조에 있었다. 1월 베를린에서의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분쇄되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잔인하게 살해되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건설되었다. 그리고 유럽, 미국의 일부와 남미는 대중파업이 움켜쥐었다. 그 때의 혁명적 열정은 1차 대회가 채택한 기본 텍스트에 실려 있다. 「독일공산주의당(KPD)」의 창립대회에서의 로자의 연설과 나란히 새 시대의 새벽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분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개혁을 위해 싸우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과 의회에의 참여를 통해 자본주의 내부에서 조직하는 작업은 근본적 존재기반을 잃었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전쟁뿐만 아니라 그 흔적 속에 남겨진 경제적, 사회적 혼돈으로 나타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위기는 소비에트로 조직된 권력을 위한 직접 투쟁이 현실적이며 긴급을 요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강령은 식민지와 반(半)반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유효했다. 더구나 이러한 새로운 최대 강령은 이전 시기동안 노동계급을 “대표”했지만 1914-17년 전쟁과 혁명의 검증이라는 역사적 검증이 적용되자마자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한 조직과 완전히 분리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개혁주의자,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노동자 운동의 우익이 아닌 자본의 시종으로 규정되었다. 1차 대회에서의 논쟁은 초기 인터내셔널이 혁명적 전투의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가장 대담한 결론에도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의 경험이 다소 다른 길을 걸었지만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이 더 이상 단순히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톱니로써 직접적인 반혁명의 장애물이 되었고, 노동자는 공장과 거리에서 조직의 평의회 형식을 통해 밖에서 조직화되고 맞서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독일, 스위스, 핀란드, 미국, 영국과 기타 국가들의 대표들 증언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계급투쟁이 작업장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살아있는 중심부는 코민테른의 공식문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투쟁에 단순히 관련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의 권력을 사보타주하는데 사용된 지배계급의 직접적 무기였던 도구인, 의회의 빈껍데기와는 날카롭게 대조되었다. 이는 1917년 러시아와 1918년 독일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비슷하게 코민테른의 “선언”은 민족투쟁이 과거 시대의 산물이고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는 경쟁하는 제국주의적 이해의 단순한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혁명적 결론은 새로운 시대의 새벽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다수를 따르게 한 것처럼 보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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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대회의 논쟁

  

1914년으로부터의 경우처럼 역사가 가속화할 때, 1-2년은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21년 6월 코민테른 3차 대회 때까지 창립대회에서 보인 혁명으로의 즉각적 확장에 대한 희망은 가장 심각한 타격으로 고통 받았다. 러시아는 3년 동안의 내전으로 소진되었고 적군이 백군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켰지만, 정치적 희생은 극에 달했다. 소비에트가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상실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혁명”국가의 관료화가 심화되면서 가장 계급의식이 강한 노동자의 대다수는 목숨을 잃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엄격함과 적색 테러의 파괴적 과잉으로 마침내 노동계급의 공공연한 반란을 자극했다. 소비에트의 부흥과 노동자 군사화와 첵카의 억압적 행위의 종식을 요구한 크론슈타트 선원과 노동자들의 무장봉기에 뒤이어 3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가에 육화된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 운동을 백군의 반혁명 표현으로만 바라보았고 무자비하고 유혈적으로 그 운동을 억압했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 기지의 고립 표현이었다. 패배는 패배를 낳았다. 헝가리와 바바리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위니펙과 시애틀의 총파업, 레드 클리데사이드(Red Clydeside), 이탈리아 공장점거, 독일의 루르 봉기, 그리고 기타 수많은 대중운동들의 패배가 그것이다.

 

점점 그들의 고립을 깨달으면서 러시아에서 권력에 매달리는 당과 그 밖의 기타 공산주의당들은 폴란드로의 적군의 진주, 1921년 3월 독일에서의 3월 행동 등 이 혁명을 확산시키는데 처절한 수단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는 노동계급 권력에 진정으로 필요한 계급의식과 조직의 대대적인 발전 없이 혁명의 속도를 강제하는 실패한 시도였다. 그 동안 전쟁으로 피를 흘리고 깊은 경제적 위기 징후를 보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을 세계 산업 발전소와 채권자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서, 스스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화하는데 성공했다.

 

코민테른 내에서 1920년 2차 대회는 이미 이와 같은 연이은 패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대회에서 배포된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의 발간으로 상징화되었다.1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살아있는 경험을 드러내는 대신 볼셰비키의 경험, 또는 그 경험의 특정한 유형이 보편적 모형으로 제시되었다. 볼셰비키는 1905년 이후 듀마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혁명적 의회주의”의 전술은 모든 곳에서 유효했고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최근에 형성되어 프롤레타리아 삶의 모든 징표를 잃지 않고 있었다 … 그러므로 모든 국가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부패한 관료로부터 노동조합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이러한 노동조합과 의회전술의 정식화와 함께, 이를 거부하는 좌익 공산주의의 경향에 확고한 반대를 밀고 나갔으며 독일의 「통합사회민주당(USPD)」과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당(PSI)」과 같은 당들을 통해 대중정당으로서 공산주의 당들을 설립하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1921년은 단기적 성공과 수적인 성장을 위해 원칙과 장기 목표를 희생하는 기회주의로 편향되는 증거를 더욱더 보이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사회민주주의당을 명백하게 비판하는 대신, “그들의 지도자들을 싸우도록 강제”하거나 그들의 노동계급 멤버쉽을 드러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궤변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공작정치는 대중을 어떻게든 계급의식화되게 하려는 간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술은 “통일전선” 전술의 선포를 하게 만들었고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의회에서의 담합을 하는, “노동자 정부”의 무원칙적 슬로건으로까지 나아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배후에는 “소비에트”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와 일시적 타협을 하여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버티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1917년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저주받은 비밀외교의 실행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을지라도 말이다. (1922년 “소비에트” 국가는 일 년 후 공산주의 노동자들을 살상하는 데 사용된 무기를 공급하는 비밀협정을 독일과 맺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멀어지고,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되는 퇴행으로의 길을 걷게 되는 자본주의의 현상유지로 통합되는 궤적의 가속화를 의미했다.

 

이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모든 명료함과 모든 심각한 논쟁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러한 기회주의적 경로에 대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응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는 견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1920년의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강령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만든 역사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14)

 

같은 해에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좌파의 주장은 의회 선거운동이 이전시기에서는 입증되었지만, 혁명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낡은 실천을 입증시키지 못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공식적” 목소리조차도 새로운 시대의 특정과 결과를 이해하는 진정한 시도를 했다. 
 

1921년 6월, 7월의 3차 대회에서의 트로츠키가 제출한 세계 정세에 대한 보고와 테제는 신용과 의제 자본으로 뛰어오른 새로운 시대에서 생존을 보증하기 위해 심대하게 몸살을 앓는 자본주의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분석을 내놓았다. 전후 회복의 첫 번째 징후를 분석하면서 트로츠키의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보고와 코민테른의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사실과 호황 자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째로 경제적 원인이 있다. 전쟁 후 국제적 연결망은 극히 단축된 형식이지만 시작되었고 모든 상품 유형에 대한 보편적 수요가 있었다. 둘째, 정치적, 금융적 원인이다. 유럽 정부들은 전쟁 이후 따라와야만 하는 위기에 대한 숙명적 두려움이 있었고 전쟁이 만든 가공적 호황을 동원해제의 기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 정부들은 계속해서 엄청난 화폐량을 유통시켰으며 새로운 공채를 발행하고 이윤, 임금, 그리고 빵 가격을 규제함으로써 동원이 해제된 노동자의 소득을 기본국가기금으로 지급했으며 국가의 가공적인 경제부흥을 괴했다. 이처럼 이러한 간격 사이에 의제 자본은 특히 산업이 침체에 바진 국가들에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 이후 자본주의의 전체 생명은 그 자신의 경제법칙을 어기면서 스스로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이와 같은 진단을 입증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텍스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 자본주의는 새롭고 더욱 파괴적인 전쟁을 분명히 풀어놓을 것이라는 이해를 심화시키려고 했다.(영국이라는 옛 권력과 미국이라는 떠오르는 권력 사이의 절박한 충돌이라는 연역이 충분한 근거 없이도 넓게 퍼졌을지라도) 그러나 이와 같은 문서에 담겨진 가장 중요한 명료한 사실은 새로운 시기의 도래가 쇠퇴, 공공연한 위기, 그리고 혁명이 동시적임을 의미하지 않았고 1919년에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다”는 원래의 정식화에서 보였던 모호함은 자본주의가 동시에 “마지막” 경제적 위기와 혁명적 갈등의 끊이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결론이었다. 이러한 진전된 이해는 1921년 6월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텍스트 “3차대회의 주요 교훈”에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계급은 생산에 뿌리박고 있다. 계급은 노동의 사회조직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 계급은 더 이상의 존재에 필요한 조건이 생산력의 향상, 다시 말해 경제의 더 나아간 발전과 모순될 때 그 기반을 잃기 시작한다. 이것이 현시기에 부르주아지가 발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살아있는 근거를 잃고 기생적이 된 하나의 계급이 즉각적 죽음으로 내모는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가 계급규칙의 기초를 구성하지만, 각각의 계급은 국가 - 정치기구와 조직의 수단인 군대, 경찰, 당, 법원, 언론 등등의 수단에 의해 스스로 권력을 유지한다. 경제적 기초에 관련을 맺어 “상부구조”를 대표하는 이러한 기구들의 도움을 받아, 지배계급은 사회 발전에 대한 직접적 제동장치가 된 후 수년, 수십 년 동안 스스로 권력을 영속화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긴 시간을 견디지만 한물간 지배계급은 그가 지배하는 국가와 인민을 그들과 함께 끌어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계속해서 쇠퇴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순수한 기계적 개념은 몇몇 특정 그룹의 동지들이 핵심에서 오류를 범하는 이론, 즉, 영웅주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수동성의 벽”을 흔드는 주도하는 소수라는 그릇된 이론을 만들게 한다. 투쟁의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의해 수행되는 중단 없는 공격을 말하는 그릇된 이론, 무장봉기의 방법을 적용하며 수행되는 부분 전투를 말하는 그릇된 이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론들이다.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한 요소는 「공산주의」라는 비엔나 저널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술 이론들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명하다.”

 
이처럼 쇠퇴의 징후는 경제적 수준에서의 회복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후퇴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1919-21년의 패배가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혁명의 임박한 순간이 아닌 혁명의 시대를 마주하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할 뜨거운 문구가 있었다. 3차 대회가 채택한 별도의 텍스트인 “전술에 대한 테제”는 매우 정확하게 노동계급의 확신과 자기의식을 세우기 위해 공산주의당들이 방어적 투쟁에 참여할 필요성을 밀고 나갔으며, 쇠퇴와 혁명이 결코 동의어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이러한 입장은 「3월 행동」의 반(半)반란의 접근방식을 대체로 정당화한 “공격의 이론”을 거부하는 필요성에 입각했다. 객관적 조건의 성숙이라는 전제 아래 공산주의당이 대중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다소 영구적이고 봉기적 공격을 해야 한다는 이러한 이론은 벨라 쿤과 기타 혁명가에 의해 독일 「공산주의당」 내에서 좌파에 의해 견지되었으며, 이는 이 점에 대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과 그 주위의 세력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았더라도 「공산주의 좌파」가 주장한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15)

 

 이러한 면에서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선언의 개입은 매우 교훈적이다. 「전술에 대한 테제」에서 “종파적”이라는 딱지에 근거해 보면,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태도는 책임있는 소수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그 시기에 그 개입이 곤혹스럽게 제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공식라인의 지지자들로부터 방해와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KAPD는 모든 일정에서 스스로 충실한 부분이었으며 그 대표들은 그들이 참여한 곳에서 동의의 지점을 인식하는 데 기꺼이 노력했다. 그들은 종파적 태도의 본질인 스스로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6)

 

보기를 들어 세계정세에 대한 토론에서 다수의 KAPD 대표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재구성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통제를 다시 획득하고 있다는 트로츠키 분석의 많은 부분에 동의했다. 따라서 시맨은 특히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을 잠정적으로 제쳐두는 국제 부르주아지의 능력을 강조했다.

 

트로츠키의 보고와 세계정세에 대한 테제가 대체로 “공격성의 이론”의 편에선 세력에 대한 반박으로 정식화되어 있음을 전제했을 때, 여기서의 함의는 KAPD가 더 이상의 자본의 안정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투쟁이 어느 순간에도 공격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견해의 관점은 수많은 개입에서 명료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세계의 경제 정서에 대한 트로츠키의 발표에 대한 응답에서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어떻게 트로츠키 동지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 모두가 그의 입장에 동의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작은 위기와 순환적이고 순간적인 소생이라는 짧은 시기 사이의 관계를, 다른 한 편으로는 거대한 역사적 시기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의 부흥과 쇠퇴의 문제를 제시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전에 상승하고 있었던 큰 곡선이 지금은 저항할 수 없이 하강하고 있고, 이러한 넓은 곡선 내에서 일반적 하강 속에서 아직 동요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17)

 
이처럼 “죽음의 위기”에 대한 KAPD의 견해에 모호함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쇠퇴의 징후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생명의 급작스럽고 명백한 몰락을 의미했다.
 같은 의미로 코민테른의 전술에 대한 헴펠의 해석은 “종파주의적” KAPD가 방어적 투쟁을 거부하고 매순간의 공격적 투쟁을 요구했다는 비난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 행동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어떠한 부분적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개개 행동과 개개 전투를 말하는데 왜냐하면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의 이러한 전투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전투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요구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독일과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40-50년 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효과에 종속되어 왔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투쟁에 익숙해왔다. 슬로건은 부분적 행동에 상응해야 한다. 보기를 들어보자. 한 기업에서 또는 다른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날 때, 그것은 특정한 지역에 한정된다.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한 투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꼴사나울 것이다. 슬로건은 주어진 상황에서 기대될 수 있는 정도로, 힘의 균형에 적응해야 한다.”18)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개입의 뒤에는 코민테른이 자본주의 생명에서 새로운 시기와 그에 따른 계급투쟁이 시작됐다는 이해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KAPD의 주장이 있었다. 일시적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견해에 동의하는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테제에 표현되지 않았던 것은 총체성으로 보인 흥성하는 자본주의의 이전 시기와 비교되는 쇠퇴의 시기의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다.”19)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후로 생존할 것이라는 방식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본은 경제를 파괴함으로써 그 힘을 재구성한다.”20)


 이러한 전망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다음 세기에 체제로서 지속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전술에 대한 토론에서 헴펠은 코뮤니스트가 특히 전술로서 노동조합과 의회문제를 밀고 나가야 하는 정치적 입장에 관련하여 새로운 시기의 의미를 도출한다. KAPD가 때대로 동질화되었던 아나키스트와 대조적으로, 헴펠은 의회와 노동조합의 활동은 이전시기에서 옳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옛 노동자 운동의 임무를 회고해 보면, 더 구체적으로 혁명의 발발시기 이전의 노동자 운동을 돌이켜보면, 한 편으로는 그 임무는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인 당 덕분에 부르주아지와 관료주의 노동계급의 대표에게 남겨놓은 의회와 기구에 대표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임무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이는 노동계급에게 이득이었고 옳았다. 그들 편에서 보면 노동계급의 경제 조직은 자본주의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개선하는 과업이 있었고 투쟁을 밀고 나가 투쟁이 끝났을 때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쟁 전의 노동자 조직의 임무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졌고 다른 임무가 조명을 받았다. 노동자 조직은 더 이상 임금 인상이나 개선을 위해 의회에서 노동 계급을 대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투쟁에 한정되지 않았다.”21)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과정에 머물렀던 모든 노동자 조직이 그들의 혁명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투쟁에서 스스로 가면을 벗는 경험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22)
 

그리고 이것은 노동계급이 왜 프롤레타리아 자기조직화의 필요성과 국가와 자본에 직접 대응할 필요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창출할 필요성이 있는지를 말한다. 이것은 소규모 방어적 파업과 더 넓은 대중파업 모두에게 진실이었다. 베르히만은 노동조합을 국가의 부분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옛 노동조합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근본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파괴를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어의 최악의 의미대로 노동조합이 혁명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구가 되었음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23)
 

비슷한 맥락에서 샤크스는 대중 정당 개념으로의 퇴행과 사회민주주의 당에 대한 공개편지의 전술을 모두 비판했다. 이들은 한물간 사회민주주의 실천과 조직 형식으로의 퇴행이거나 더 나쁘게는 그들 자신을 적에게 넘겨준 사회민주주의 당으로의 퇴행이었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승자에 의해서거나 적어도 승자로 나타나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다. 3차 대회 이후 수년 동안 공식적인 공산주의당들은 수백만 노동자들을 명령할 수 있었던 대규모 조직으로 남았다. KAPD는 곧 수많은 요소로 분열되었고 그 중 소수가 1921년 모스크바에서의 대표들이 표현했던 명확성을 유지했다. 진정으로 종파적인 오류가 특히 KAPD의 호르터 주위의 에센 경향이 “제4인터내셔널” (KAI 혹은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세우려고 한 성급한 결정을 하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그때 혁명의 후퇴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코민테른의 퇴행에 맞서 싸우는 국제적 분파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코민테른의 미성숙한 파괴는 10월 혁명의 본질을 점점 부르주아 혁명으로 거부하는 회귀를 수반했다. “죽음의 위기”의 시기에 임금 투쟁은 기회주의적이라는 KAI의 슈뢰더 경향 역시 종파주의적 견해였다. 다른 경향들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평의회주의”로 알려진 경향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혁명적 전위의 보다 일반적인 약화와 분열의 표현은 증가하는 패배와 반혁명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영향력 있는 대중조직으로서의 공산주의당의 유지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산물이었지만 이러한 당들은 파시스트와 민주적 학살자와 함께 그들의 전위성을 등치시키는 끔찍한 특수성을 보였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쇠퇴이론에 뿌리를 내려 혁명의 최고점에 만들어진 산물인 KAPD와 이탈리아 좌파의 가장 명료한 입장은 소규모이지만 고통스럽게 고립된 혁명가 그룹들의 참을성 있는 노력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반혁명의 안개가 걷히면서 이러한 입장들은 새로운 혁명 세대의 출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며 그들은 다음 혁명당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 성과로 남아있다.

 

옮긴이|오세

 

 

<주>

1.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ICC), 「International Review」, 2010, 4th Quarter, 143, 15-21

2. 1914년 말 콘스탄틴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 피터 네틀 「로자 룩셈부르크」, OUP, 1969

3. 그러나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 운동 내의 현재의 가능한 시도들을 더 탐구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4. “80년 후 레닌의 헤겔과의 조우: 비판적 평가”, http://thecommune.wordpress.com/ideas/lenins-encounter-with-hegel-after-eighty-years-a-

critical-assessment/

5.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1915, 전집, 21권

6. Nashe Slovo, 1916년 2월 4일

7.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VI, “강대국 사이의 세계분할”, 전집, 22권

8. 역자 주

9. “제국주의 국가 이론에 대하여”, 1915

10.  맑스가 엥겔스에게, 1858년 10월 8일, 「전집」 40권, 347쪽, Lawrence and Wishart

11.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1권, “짜르의 전복”, 15장, “볼셰비키와 레닌”, 296쪽, Pathfinder, 1980 에서 인용

12. 1차 대회에서의 이러한 토론을 더 자세하게 보려면, 「국제평론」 123호 “역사    유물론의 핵심인 데카당스 이론” 제4부를 볼 것.
(http://en.internationalism.org/ir/123_decadence)

13. 우리는 이 텍스트가 호르터의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 대한 답변이나 비판없이 쓰여지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한다.

14. “거대한 차원의 유전이라는 벼락맞은 인상을 준 엄청난 사회·경제적 효과와 함께, 세계 전쟁으로부터 빚어진 세계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신들의 황혼]이 가깝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한 부문이었던 주기적 경제 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다. 예기치 못할 정도의 계급적대의 무서운 분출, 모든 계층의 인민의 일반적 참상이라는 사회적 유기체 전체의 격동적 경련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운명적 경고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점증하는 적대감,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 이 전에 무관심했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더욱 퍼지는 의식이 해결될 수 없음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실패를 경험하고 있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의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견디기 힘든 연장은 야만으로의 퇴보인가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인가라는 역사적 대안 앞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내려놓는 혼동을 만들었다.”

15. 보기를 들면 앞의 각주에서 인용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강령의 서문은 자본주의의 마지막이며 명백한 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반란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3월 행동」 동안의 몇몇 KAPD 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범주에 속했다. 보기를 들면 총파업에 참가하도록 미고용노동자를 이용한, 「독일통합공산주의당(VKPD)」와의 무비판적 동맹이라든지, 막스 호엘츠와 기타가 이끄는 “독립” 무장세력과의 모호한 관계맺기를 들 수 있다. 또한 3차 대회에서의 헴펠의 개입을 보라(La Gauche Allemande, 41쪽). 여기서 「3월 행동」은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는 없었지만 일관성을 상실한 입장인, 정부의 전복이라는 슬로건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에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못한 어던 종류의 “노동자 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개입에 대한 영문 번역은 www.libcom.org, “interventions by the KAPD at the 3r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21), parts1-5“를 볼 것)

16.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에 대한 헴펠의 태도는 이러한 조류의 진정으로 혁명적 표현으로 함께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종파적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La Gauche Allemande, 44-45쪽을 볼 것)

17. 「La Gauche Allemande」, Invariance, 1973, 21쪽

18. 「La Gauche Allemande」, 40쪽

19. 윗 글, 21쪽

20. 윗 글, 22쪽

21. 윗 글, 33쪽

22. 윗 글, 34쪽

23. 윗 글, 56쪽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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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시위와 계급권력

가두시위와 계급권력

                                         D.Valerian 6/7/2013
                                         Tuesday, July 9, 2013

 

 


5월 말 터키에서 발생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건,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 기간 동안 브라질에서의 대중 시위, 그리고 또 다시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대로 가득한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사(the current events)는 우리가 여전히, '아랍의 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2013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분신자살한 한 청년으로부터 촉발되었던 사건에 의해 좌우되었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5월 말, 쇼핑센터 개발과 이스탄불 중심에 있는 공원의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는 터키의 81개 주(州) 가운데 79개 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운동으로 폭발했다. 그 당시, 세계의 이목이 브라질의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로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파울루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는 (신문의) 일면을 차지하고 축구 대회를 옆면으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모르시(Mohammed Morsi)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는 이집트 전역에서 2년 전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게다가 언론에는 덜 보도되었지만, 인도네시아는 휘발유 가격 44%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하여 뒤흔들렸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랍의 뿌리(Arab roots)와는 거리가 있고 또한, 적어도 피상적인 수준에서, 현재 영향을 받는 국가들이 모두 민주  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독재자'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촉구하는 시위를 넘어서는 것을 '운동'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운동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지역적 세부사항들 보다 더 중요한, 이러한 운동을 특징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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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의 인구통계

 

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청년들이 운동의 방향을 쥐고 있다. 아카니스트 매체(anarchist media)는 탁심에서 경찰에게 새총을 쏘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그러한 예외는 한낱 규칙의 증명에 불과하다. 물론, 청년들이 어떠한 사회투쟁에서 돌격대를 만든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투쟁은 압도적으로 청년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 인구의 43.3%는 24세이거나 그 미만이다.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상대적 수치는 각각 40.7%, 41.5%, 그리고 44.1% 이다. 이러한 수치를 '서방(West)'국가들의 통계 자료와 비교를 할 때, 차이점은 매우 극명하다.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의 수치는 24.1%, 30.3%, 33.8%, 그리고 23.3%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들은 전(全)세계적으로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인구 내에서 청년들의 더욱 높은 비율에 의해 증폭되기도 한다. 대학 교육의 확산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에서 대학 졸업자의 수는 1995년 이래 매년 5%씩 증가해 왔다. 서구 국가들처럼 대학에서 배출되고 있는 졸업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고 그들의 부모 세대와 비교하여 그들이 일자리를 얻을 자격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최근 2008년 이후 국제적인 경제위기 발생의 영향에 의해 훨씬 악화되어 왔다. 좌파노동조합인 DISK에 따르면 실업률은 17%에 육박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단지 대학생뿐만 아니라 공부, 시험, 그리고 학원(cramming schools)이라는 동일한 역학을 따라가는 모든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동력을 공급하고 있는 사회적 동력인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외에" 청년들에게 미래를 내놓을 수 있냐는 측면에서 어떠한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는 교육제도에 휩쓸린 압도적인 청년 대중이다.

 

 

계급 구성

 

시위자들이 전반적으로 청년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이한 분석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이러한 운동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윤곽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터키에서 국가 빈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던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엘리트의 하나로서 운동을 대표하는 에드로안의 지지자들에서 터키 좌파까지 이르며, 이것은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놀랍지 않다. 이 국가들에서 다수의 도시 거주자들은 노동계급이며, 그리고 효과적인 정치운동 - 그것이 공산주의, 파시스트, 종교 혹은 민족주의 정치든지 - 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존재할 수 없다. 분명히 타이이프 에드로안의 AKP(Alengaden Kunjuvareed Poulose : 정의개발당)에 의해 조직된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의 구성 또한 노동계급이었으며, 그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도 있다.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밝혀내려 하기 이전에 물어봐야 할 문제는 무엇이 운동 일반에서 계급의 본질을 결정하는가이다. 운동의 사회학적 구성 하나만으로는 계급의 본질을 판단하기 충분치 않다. 1960년대 영국의 파월(Powell) 파업과 1974년 얼스터(Ulster) 노동자 평의회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이, 노동자들은, 판단을 내리기 충분한 노동계급의 방법이 아닌, 복고운동(reactionary movements)의 배후로 전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운동의 목표, 요구, 그리고 방향이다. 운동에 관해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모든 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동을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할 때, 분명히 노동계급의 일정한 집단은 그들 내에서 두드러진다. 사전에 명시한 것처럼, 이것은 어느 운동에서나 당연하다. 대규모 시위, 총회, 그리고 심지어 일부 파업을 활용하는 방법은 노동계급의 방법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노동계급 운동의 중요한 부분인 작업장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부족하다.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파업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터키에서 조차, 다수의 노동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운동의 요구와 목표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오합지졸이었다. 분명히 브라질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국가 탄압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관련되어 있는 요구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개입과 쿠데타(coup)를 성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요청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시위대와 같은 비(非)계급적 요구가 있었다. 만약 터키 군대가 AKP 정부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역사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시위대의 일부분이 그 곳에서 유사한 요구를 제기한다는 것을 들었다 해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운동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를 작성하려고 할 때에, 생산, 혼합된 요구, 그리고 구성 시점에 활동의 부족은 계급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인구학적 기초를 형성하며, 그 운동은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임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운동이 소규모의 계급교차 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이다. 이 운동 안에는 그들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거의 마치 공장 내 파업의 물결이 그 자신의 이익을 강조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 운동'에 편승하고 있었던, 2011년의 이집트에서 매우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이 운동 안에는 또한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적인 요구를 지지하는 시위에서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이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이라고 해서 공산주의조직이 그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거부하면서 그것을 묵살하고 고압적으로 물러서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공산주의 조직은 항상 계급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역으로, 일종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판단해서 흥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다양한 배후의 부르주아 분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것들은, 마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운동인지, 그리고 그 운동 내부에 어떤 경향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모든 종류의 허튼수작을 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점거'와 총회

 

상당히 확실한 한 가지는 올 여름의 운동이 '아랍의 봄(ArabSpring)', 그리고 이란에서의 '녹색운동(Greenmovement)'과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거(Occupy)'운동은 이러한 운동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아랍의 봄' 이라는 운동의 매우 옅은 반영이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러한 운동이 사회를 동요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고, 정부를 뒤흔드는 진정으로 거대한 운동인 반면에, 점거 운동은 본질적으로 결코 활동가들의 운동을 넘어서지 못했다. 주류 및 좌파 언론 두 곳에서 상당량의 대중 매체의 주목을 받았던 점거 운동은 그것이 세계 대중 매체의 중심이며, 그리고 노동계급이 매우 미약하고 투쟁의 수준이 극도로 낮은 미국에서 일어난 것과 더욱 관련이 있다. 미국은 분명 중요한 국가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자는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해는 중요하다. 전 세계의 대중 매체를 좌우하는 미국의 이 사건에 대한 보도 분량, 그리고 간신히 다년간의 투쟁 이후 미국 좌파가 느꼈던 흥분은 이 운동의 규모를 판단하기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되지 않는다. 물론 '점거'운동과 더욱이 위스콘신(Wisconsin)에서의 사건은 중요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미국에서의 잠재적인 부활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지금은 만지 않지만, 그리고 그 자신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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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좌파가 자랑스럽게 알렸던 '점거'운동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운동을 작동시키기 위한 총회의 활용이었다. 이러한 총회의 종류는 또한 '아랍의 봄'의 다양한 국가에서, 그리고 터키, 그리고 오늘날의 브라질에서 목격되었다. 많은 좌파는 마치 그들이 소련의 일부분인 것처럼 이 운동을 칭송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개최했던 총회 사이에, 그리고 대중 집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누가 그것들을 대표하는가이다. 작업장에서의 대중 집회는 분명히 그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총회는 작업장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대개, 노동계급 내에 그것의 일부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계급 조직 보다는, 시위대 그들 자신만이 대표하며, 그것은 활동가들의 조직이다. 어떻게 시위대는 NGO와 좌파노동조합과 함께 주류 및 좌파 정당의 상의하달식(a top down) 연합인 '탁심연대(Taksim Solidarity)' 에서 '영적 위원회(spiritual commission)'의 보고서를 논의하는 한 서클에서 수십여 명의 히피족이었던 '점거'의 최악의 경우까지 다양한 것들을 대표하는가.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도래하는 혁명의 조직 형태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시위에서 파업까지

 

이러한 총회의 본질이 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점거'운동 기간 동안 오클랜드(Oakland),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의 총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시도는 노동대중을 끌어내는데 실패했으며, 그리고 노동자들 (오클랜드의 항만 노동자들, 그리고 교원들) 내에서 지지를 얻었던 곳에서조차 휴가, a personal day, 혹은 아프다는 전화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것으로부터 분명한 점은 활동가 위원회가 마음대로 노동계급에게 파업을 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노동자들 자신만이 이것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서 다수의 활동가들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규모 작업장에서 흔히 불안정한 직업으로 오늘날의 많은 청년들과 같이, 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규모 파업 운동을 지지하는 원동력은 이러한 종류의 작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운동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규모 사업장에서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위대는 성공적인 대중파업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부분으로서 노동계급의 동일한 부분이 아니다. 그에 반해서 30년 이상 전, 이러한 부류의 청년들이 공장 내의 대규모 사업장에 들어가거나, 혹은 정부부문에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그러한 일자 리가 별로 없으며, 청년들은 대학교에 진학 할 가능성이 더욱 많으며, 그리고 그들이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러한 일자리에 취업할 가능성은 적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일자리가 여전히 많은 곳에서조차 그러한 일자리의 다수는 '축소'되고 있으며 신규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고 있다. 2009~10년 겨울 동안 진행되었던 터키의 TEKEL (국가 독점) 투쟁에서, 젊은 노동자들은 지난 12년 동안 새로운 신규 노동자들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던 그들의 부재를 주목했다. 브라질에서 시위대에 관한 통계는 시위대의 거의 3/4이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인구의 19%만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그리고 청년 중에서 대학 등록률(attendance rate)이 최근 몇 년간 거의 두 배인 국가에서, 이 3/4이란 수치는 노동계급은 차치하고서라도 총인구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 분명한 격차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연결하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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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격차를 연결시켰던 시기가 있었다. 이란에서의 '녹색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란의 가장 큰 공장인 코드로(Khodro)에서 노동자들이 국가 탄압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시위대와의 연대를 위해 나섰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아랍의 봄' 기간 동안 특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터키에서 좌파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의 참여했다. 브라질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연맹은 7월 11일에 '항의, 파업, 그리고 행진'의 날을 개최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앞서 봤던 터키의 좌파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된 일일 '총파업'은, 이러한 파업이 노동자들의 참여 인원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광범위 하지도 않았고, 국가에 실질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그것의 한계점(limited duration)의 면에서도 충분히 길지 않았다는 것이 인식되는 듯하다. 유사한 상황이 그리스에서 긴축정책(austerity programmes)의 시행을 반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일일 파업을 조직한 시기 동안에도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파업을 넘어서 이동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 반면에, 일일 파업을 선언하는 방법의 문제는 시위대에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운동에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하여 총파업을 요구해 왔다. 오클랜드에서와 같이 이것은 대체로 실패했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업이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적어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 총파업을 요구한 페이스북(Facebook)은 파업에 대한 지지의 수준이 있음을 보여준 50만 명 이상의 지지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히 보이는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인구학적 격차(demographic gap)는 컴퓨터 사용을 반영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젊은 대학교육을 받은 노동자들보다 컴퓨터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적으며,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에서 조차 그들은 소셜 미디어 사이트 활용을 덜 할 가능성이 있다.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를 을 통한 총파업 요구는 그들이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는 많은 사람들과도 연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활용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분명히 터키 정부는, 불시 단속을 벌여 트위팅(tweeting)이라는 죄로 체포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된,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터키 정부는 분명히 그것의 잠재력을 인식하며, 그리고 좌파가 하는 것처럼  '키보드 혁명가들(keyboard revolutionaries)'을 저자세로 보지 않는다. 터키 정부는 그들을 가두었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시위를 위해 거리로 사람들을 끌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파업으로 동원하는 것은 덜 효과적이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다수의 사람들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작업 중 파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시위로 나타는 것이 더 손쉽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시위에 가는 것은 개별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물론 이러한 시위에 작업장, 학교 혹은 대학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례는 있지만 다수의 경험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고 결정 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력으로 파업에 참여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시위에 나타나는 적보다 돈을 잃고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결정하는 데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는 우리에게 경험의 부족, 자신감, 그리고 작업장 내의 의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지난 10년 정도에 걸쳐 국제적인 규모로 작업장 내 투쟁의 부활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규모이다. 지난 10년이 1990년대처럼 지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10년이 얼마나 좋았는가 보다는 그 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더 많이 반영한다. 오늘날의 작업장 내 투쟁은 70년대는 고사하고 80년대에 있었던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 시기와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작업장 내 투쟁이라는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은 이미 연금을 받고 있거나 기껏해야 퇴직할 때가 되어 가고 있다. 경험은 사라졌고, 신규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인 대중 집회를 열었던 작업장에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향후 예상에 대하여

 

이러한 종류의 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은 매우 분명하다. 국가는 내놓을 해결책이 없다. 이집트에서 모르시(Morsi) 대통령의 퇴진은 어떠한 새로운 정부도 직면하는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의 배후 원인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세계 자본주의는 대학과 여타의 교육기관으로부터 대량생산되고 있는 청년들에게 제공할 보수가 좋고 안전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이 계속해서 폭발할지라도, 그들에게 작업장에서의 활동이 없이는 전진할 방법이 없다. 그 권력이 없이, 가두시위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시리아에서와 같이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자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는 충돌로 변질됨으로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군사 쿠데타에 따라 초래된 충돌인, 이집트에서 유사한 발전의 가능성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개인으로서 이러한 운동에 관련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로서 그들의 권위를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다.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그들이 향후 운동의 발생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 중동에서, 노동계급이 종파주의(sectarianism), 종교, 그리고 민족주의와 같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집트의 길이 내전을 초래한다면 이집트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은 어떤 길로 나아갈지를 결정하기 위한 제1보(the first step)이다. 이 자발적 활동(self-activity)은 대중 참여(mass participation)를 위한 적절한 조직 형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단지 정부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양산했던 전체 경제 및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필요성을 표현하는, 정치 수단도 생기게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공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체 가능한 사회는 가능하다.


옮긴이|김명수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document_srl=176491&mid=cl_bd_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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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책 소개] 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국제공산주의흐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했기 때문에  「유니우스 팸플릿」이라고도 불리게 된 이 글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쓰인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세계대전이 일대 전환점을 나타내게 된, 자본주의의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세계대전의 시대 –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1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 같은 규모의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더불어 전대미문의 파괴기계가 작동되어 무수한 사람이 살육 당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차 대전 직후, 스페인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다시 2천만 명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사람들의 목숨을 더 앗아갔다.


1914년 8월 그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과 국제주의에 대한 완전한 배신에 직면하여, 여전히 국제주의자로 남은 혁명가들은 신속히 스위스의 찜머발트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원인과 귀결에 대한 규명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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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이글, “사회민주당의 위기(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그리고 그녀가 또한 작성한 “국제 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원칙들”은 인류에게 있어서 새로운 그 상황을 파악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제시하려는 혁명가들의 그러한 국제적인 노력의 일부분이었다.


그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 앞에서 그녀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오류로부터 배우는 것, 즉 철저한 자기비판이었다. 그리고 파악한다, 모든 것을 뿌리깊이 분석한다는 그 원칙을 통해서 그녀는 이 재앙의 엄청난 규모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대전- 이것은 야만으로의 퇴행이다. 제국주의의 승리는 문화의 절멸을 초래한다. 하나의 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은 간헐적으로, 하지만 이제 시작된 세계대전들의 시대가 계속된다면 결정적으로. 우리는 지금, 한 세대 이전, 즉 40년 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승리와 문화의 몰락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것의 수단인 전쟁에 대항한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행동의 승리냐는 선택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민족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그녀는 여러 장에 걸쳐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어떻게 자본주의가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늘 새로운 지대를 영입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서 “뒤늦게 도착한 자들”이 “먼저 도착한 자들”의 정복물들을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빼앗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는지를 묘사한다. 제국주의의 출현에 관한 이장들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전쟁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때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어느 한 나라 또는 몇몇 나라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국내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국제적인 현상으로서 오직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그 어떤 개별 국가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국가의 방어전쟁도 더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민족국가방어전쟁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지지도 일관되게 거부했던 혁명가들의 진영에 속한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때 민족자결이라는 민족의 이해와 국제연대라는 계급이해 사이의 충돌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룩셈부르크는 “국제사회주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오직 국제사회주의만이 그러한 민족국가를 창조할 수 있고 민족들의 그러한 자결권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전쟁이 채 몇 달도 진행되지 않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한목소리로 독일의 민족방어전쟁이라 주장한 그 전쟁의 새로운 성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전쟁은 “전체로 놓고 볼 때, 이미 완전히 꽃핀 자본주의가 세계지배를 놓고 벌이는,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세계지대의 마지막 나머지의 착취를 놓고 벌이는 경쟁투쟁”임을.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로 그 이전의 어떤 전쟁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현상, 즉 “전쟁의 지속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관련되고 점점 더 전쟁기간이 길어져서 군사적 승패 그 이전에 모든 관련국의 완전한 경제적 황폐화,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비 관련국들의 점점 더 심해지는 경제적 폐허, 그에 뒤이어 모든 나라에서 열띤 군비경쟁, 군사주의와 반동세력의 득세,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세계대전 발발이 초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끌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전국의 그 어느 하나의 승패를 무비판적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종결을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법칙성과 모순들로부터 생겨나는 객관적 역사적 조건들과 질적으로 새로운 발전단계를 다루는 동시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 발발과 관련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는 상황분석 끝에, 사회민주당의 배반이 없었다면, 노동조합들이 자본가들과 맺은 작업장에서의 당쟁중지(파업금지)가 없었다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쟁중지와 계엄 상태를 받아들이고 조국의 방어를 호소하고, 그렇게 해서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을 자행했던 사회민주당과는 그녀는 사회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세계대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 종결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전쟁을 없앨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제국주의는 인류에게 있어서 그 모든 재앙적인 모습에도 현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계급에는 역사적 필요성이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발전 가능성에 대한 조금의 환상과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하고 계속 학살을 자행할 수 있게 되면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의 생존 가능성도 의문시될 수 있는 위험성을 전쟁 발발 후 얼마지 않아 즉시 인식했다.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앞에 서 있다는 점을.

 

혁명가들의 임무와 유니우스 팸플릿

 

1차 대전발발 당시 혁명가들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1914년 8월 그 전쟁을 지지했을 때, 그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이 사실상 붕괴하였을 때 처음으로 국제주의에 대한 그 정도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그네히트 등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결연한 국제주의자들은 당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았던 배신적인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그래서 당내에서 국제주의 역량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막 창립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 유니우스 팜플릿을 몇 가지 수정을 거쳐 그 지침으로서 받아들였다.


그 속에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우선순위들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10.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사회주의의 주요과제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살아있는 혁명 권력으로 모아내고, 이를 이해관계와 과제에서 통일된 견해를 가지며 평화 시에도 전쟁 시에도 통일된 전술 및 정치 행동능력을 갖는 하나의 강력한 국제조직을 통해서 정치생활의 결정적 요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로부터 소명 받은 역할이다.”    

   

“12. 선도적 국가들의 사회주의당들의 공식 대표들이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배반한 점을 놓고 볼 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로부터 부르주아-제국주의 정치로 전향한 것을 놓고 볼 때,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이끌고 한데 모아내는 일을 떠맡을 새로운 노동자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의 이해에 역사적 이론적 틀을 제공함과 동시에 혁명가들의 활동을 위한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이 저작의 주요 축들, 즉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몰락상황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양자택일, 노동자계급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 이 모두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참조점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초에서 그녀 자신이 전쟁발발 직전 썼던 다른 저작, 자본축적론을 그 토대로 삼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을 묘사하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발전지점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간은 전쟁 전 그녀의 책 “자본축적론”의 출간이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일련의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항의를 받게 된다. 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론, 즉,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모든 국가의 악성종양으로 되어버렸고 그렇게 해서 “민족자결주의”를 향한 요구의 기초가 사라져버렸다는 결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진행 중이던 때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이점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불붙었는데, 여기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때, 그 혁명가들은 공동의 국제주의적 입장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망을 공동으로 옹호하면서 조직적으로 그 당시 가능한 한 국제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었고, 다른 그룹들의 주저함에 대한 그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이라는 전망을 추구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류에 대한 이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한때 선도적 노동자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한 배신에 직면하여 상황을 그 뿌리까지 예리하게 분석하고 또 그러한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그녀의 능력을 통해서 혁명적 정신의 한 예를 제공했다. 이 정신은 불굴의 투쟁력, 결연함 그리고 광범위한 시각의 이론적-정치적 분석능력을 특징으로 했다.


세계대전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혁명가는 전대미문의 규모의 이러한 야만 그리고 선도적인 노동자당의 배신이 발생함으로 인해 처음에 진정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전쟁기간 동안 갇혀 있거나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동안 대부분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인류에게 있어서 그러한 재앙과 사회민주당의 배신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대응은 학살의 한복판에서 공포에 대항해 그리고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그녀의 국제주의적 활동을 막으려는 시도에 대항해 그 무엇보다도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문전기 저자 네틀이 쓴 내용에 따르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잠깐의 “자유” 이후 1916년 7월 다시 갇혀있을 때 전쟁기간 동안 그녀 자신의 문학적 계획을 다음과 같이 윤곽 지었다: “1. 자본축적론이라는 제목으로 경제학에 관한 완전한 글 – 원래의 저작과 부록,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반비판-으로 구성.” 그리고 2. “국민경제학 입문”(정치경제학에 대한 개요)이라는 집합적 제목으로 전적으로 대중적 일련의 에세이들. 그리고 3. “나는 코로렌코가 쓴 러시아 책,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다” (감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J. 디에츠에게 쓴 1916년 7월 28일자 편지에서).

 

그녀는 비록 감옥에 감금된 상태로 당연히 고통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수감기간 동안 쓴 글과 편지들은 매우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감옥 속에서 그녀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들의 다양함, 감옥 속에서 그녀가 작업했던 책 3권(저서 2권과 번역서 1권), 예술과 문학에 관한 수많은 편지는 불굴의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읽고 때로는 쓰기만 해요.”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제트킨에게 쓴 1916년 7월 1일자 편지)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을 앞에 놓고,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결연한 투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절친한 사람들을 잃은 후에도 스스로의 힘을 추스리고 기상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론적인 노력들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능력(그림을 그리고 식물학에 열광함)과 특히 외부로부터의 큰 지원망을 통해서 힘을 얻었다. 부분적으로 사식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았을 뿐만 아니라(위에 문제가 있어서 특별한 식이요법이 필요했음), 그녀의 글들은 항상 다시(교도관들의 묵인하에) 감옥으로부터 밖으로 유출될 수 있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녀는 밖의 많은 동지들 및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며 수감상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지원했다. 그 어떤 두꺼운 벽으로 둘러 쌓인 감방도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었고, 개별적으로는 자신의 동지들을 그리고 전체로서 계급을 그녀가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부를 향한 그녀의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출옥하던 날은 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감옥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를 집까지 동행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발전, 특히 아시아에서의 발전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행한 분석을 확인시켜 준다. 이 저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그녀의 경고, 즉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전쟁이 전개하는 파괴기계와 잔혹화, 그리고 이는 다시 노동자계급을 물리적으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의 정치적 기상적인 약화를 야기하게 된다는 점까지.


그녀는 시계의 째깍거림을 느꼈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될 것임을, 자본주의체계가 길게 생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인류에게, 지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에게 그만큼 더 커다란 위험임을 느꼈다.          
 
제국주의 역사속의 한국

 

1차 세계대전동안 아시아대륙은 전반적으로 전투행위의 영향권에 있지 않았던 반면, 그 직후에는 군사주의 암종양이 아시아에서도 자라났다.


이 현상은 먼저 중국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충분한 통일을 이뤄낼 수 없었고 무수한 군웅의 충돌로 그 나라는 항상 다시 황폐해졌다. 1930년대에 이미 일본과 중국 사이의 전쟁으로, 그런 다음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극동은 유럽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전쟁무대가 되었다. 전쟁결과 중공과 타이완으로 나뉘게 된 중국의 분할과 더불어 새롭고 지속적인 충돌 중심지가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전쟁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일련의 군사적 정복을 통해 충족시키려 시도했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무수한 화염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은 야만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의 원자탄투하가 새로이 출현한 경쟁자 러시아가 일본에 관여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양대 세계대전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의 무대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주로 원자재와 폭탄 받이로서 인력자원을 주로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면, 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새로이 출현한,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중국 및 러시아 사이에 최초의 거대한 힘의“과시”에서 그 중심에 서있게 된다. 그 전쟁의 강도와 규모 및 지속기간, 서울과 평양이 거의 초토화되어버릴 만큼 엄청나게 심한 파괴 이 모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를 잘 보여주었다. 한 동안 미국은 한국이 러시아(소련)-중국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정리된 지 반백 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북한 사이의 충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군무장된 지역들에 속한다.


이제 동서블록들의 붕괴 이래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졌다. 새로이 부상하려는 중국, 그 숙적인 일본과 약화되어가는 미국 모두는 이 지역에서 특히 남북한에 대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망들을 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긴장의 첨예화가 여기서도 놓여있다.


동시에, 신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연결점과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려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광적 노력들은 전대미문의 환경파괴를 초래했고 장기적으로는 이일대의 삶의 토대들을 위협하고 있다. 생산력의 향상, 백 년 전만 해도 경제적으로 난쟁이에 불과했던 새로운 경제적 경쟁자들의 출현이 평화로운 발전으로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 그리고 결국 제국주의적 긴장을 더 불붙이게 됨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묘사했던 이론적-정치적 틀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이 책이 독일어로 처음 출판된 지 거의 100년이 흘렀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과 더불어, 한국의 독자들이 노동자운동의 세기적 저작들인 「자본축적론」과 「유니우스 팸플릿」 책을 곧 접하게 된다. 이 저작들은 또한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 2 및 제 3인터내셔널 내 좌파적 흐름의 전통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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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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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코르쉬는 그람시, 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 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 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공산당 안에서 「공산당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 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공산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자리에서 코르쉬를 울트라 좌파 (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 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 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공산주의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공산주의자, 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 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 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 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즉 실제 혁명운동에서주어 진다. 예를 들어, 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 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 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적으로 정립되며, 부르주아 사회 제도, 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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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뮌과 러시아 소비에트, 독일 노동자 평의회에서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코르쉬는 파리코뮌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한다. 파리코뮌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인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행동(Die Aktion」에 실렸다.

 

 *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옮긴이|남궁 원

 

 

 
자본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 의제를 제기하는 역사적인 현 시기에, 계급의식적인 모든 노동자는 혁명적 코뮌에 관하여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더구나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따라서 자기 의식적인(self-conscious) 프롤레타리아트 부분은 혁명적 코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propaganda)이 이루어진지 반세기만에, 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 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schools)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안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 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뮌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 때, 다시 한 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깜짝 놀란 속물들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20년도 더 지난 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 주요부에서 파리코뮌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월, 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 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 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뮌”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혁명적인 모든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 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 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와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이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 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 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 또는 1920년 카프(Kapp)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 또는 1923년 루르(Ruhr)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Cunow) 파업 과정에서, 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의 패배의 결과로 현재, 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낡은 신념, 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샤이데만과 뮐러, 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기구의 최고 정점에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 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 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 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 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 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의 발전형식에서, 발전하는 의식이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 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뮌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뮌의 가담자들(communards)이다. 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 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 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뮌을 달성해냈으며, 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러나 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뮌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코뮌”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 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 동시에 그는 “코뮌”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뮌”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뮌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코뮌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 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뮌”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 코뮌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즉,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이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서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뮌”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 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발전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 바, ―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뮌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 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 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시스트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뮌을 비교함으로써, 부르주아 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봉건제와 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 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 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 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 단계 역시 봉건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 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 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로 막 전환했던 1840년대 초기 맑스의 이 이론적 설명은, 몇 년 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 및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되었고, 또 20년 후에는 저 유명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대회 제네바 회의의 결의에서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주장되었다. 즉 노동조합은 지금까지의 지배적 발전 과정에서 이미 “마치 중세의 자치체나 마을이 부르주아지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고 논증한 것이다. 이는 비록 노동조합 스스로는 자본의 과도한 요구에 맞서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방어하는 하루하루의 당면과제에 파묻힌 나머지 이를 넘어서는 자신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앞으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전체를 조직하는 그러한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 코뮌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 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했다. 맑스가 이 새로운 코뮌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은, ―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뮌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 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뮌 및 코뮌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뮌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 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코뮌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 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뮌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 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 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 적어도 파리코뮌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년~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도, 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 이제 파리코뮌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 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 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왜 하필 특히 “코뮌”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 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 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 번 매우 상세하게 코뮌의 특징을 서술했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화된 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 정확히 “코뮌”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 사실상 파리코뮌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 있어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뮌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 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Michael Bakunin)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 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뮌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뮌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 즉, 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뮌 및 코뮌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Cf. Brupbacher: Marx and Bakunin, pp.114-115.)

1871년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 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에서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 파리코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 즉 파리코뮌과 프랑스 모든 코뮌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 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 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 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 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모두, 바로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 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 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제1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 그는 혁명적 파리코뮌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적인 한 순간 ― 승리한 반동세력에 맞선 코뮌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내려 간, <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파리코뮌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 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뮌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 그 이유는 더 이상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뮌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뮌을 추가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와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 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1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뮌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뮌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 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 파리코뮌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 만일 맑스가 파리코뮌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뮌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뮌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코뮌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코뮌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 코뮌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뮌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며,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 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 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뮌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뮌의 연방적이고 반(反)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 파리코뮌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코뮌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뮌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 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 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뮌”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뮌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들이 만약 어떤 “코뮌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완전히 틀렸다. 최종적으로 “코뮌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 시킨다”는 이론, 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 이상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 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을,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 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뮌” 국가도,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 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이며, 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공산당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장치를 “장악”해내든, 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 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 혁명적 코뮌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 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 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옮긴이|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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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  정현철

 

 


1. 노동조합의 한계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을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한편으론 계급의 조직으로 발전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론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조건에 대한 협상자이자, 노동과 자본의 중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계급의 연대와 결합의 중심이 되었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며,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민주의 정당들과 함께 제국주의적 학살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노동조합이 협력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반(反)계급적 역할이 처음 드러났다.1)

 

또한, 전쟁 이후의 혁명 물결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들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전쟁을 지지했다. 그 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서도 생존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을 위해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의 학교’ ‘사회주의 훈련소’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극소수의 정파활동가나 초보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공급받을 수는 있겠으나,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과 대중이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조직과 노조운동의 잘못된 결합, 즉 정치조직의 노조운동 지도-피지도 관계에서 나타난 대리주의 경향은 계급행동의 수동성과 상층부의 관료주의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조직 전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축소시켜왔다.2)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상대로 공동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의미가 있다. 헌법의 노동 3권과 관련한 하위법들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이 체제 내화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간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 지역일반 노동조합운동, 산업별 노동조합건설 등-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 날개 전략 속에서 진보정당의 몰락과 함께 내셔널센터(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로서의 위상마저 무너져 버렸다. 최근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둘러싼 희대의 촌극은 민주노총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 해고자들이 이끌고 있다. 재능교육,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등 이른바 장기투쟁사업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역할과 권위의 상실은 내부 자정능력도 상실시켰다. 최근 10여 년간 민주노총 내부의 무수한 조직 갈등에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한계는 말하지 않고 ‘개량주의’나 ‘관료주의’의 문제로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것은 대개 노동조합의 ‘급진화’-좌익리더십 선출, 급진적인 요구안, 많은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촉구-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핵심은 기본적인 노동조합의 형태를 방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재편, 강화, 혁신’ 등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전체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의 밖에 존재한다. 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며 계급성을 고양시키는 기구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2.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조합운동의 개조나 발전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으며, 좌익적(전투적) 노동조합이나 평조합원 운동이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투쟁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적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평의회, 즉 노동자 총회에 의해서 통제당하는 대표들의 회의가 그것이었다.

 

소비에트나 평의회는 준 상설적인 총회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일반화된 계급투쟁에 의존한다. 계급이 모든 공장에서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장소에 노동자들의 총회가 없다면, 노동자평의회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이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을 이어나갈 때에만 상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 자체로 혁명적 시기를 뜻한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특유의 기구이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일상시기이거나 계급의식의 고양기가 아닐 때 어떻게 그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난 50여 년 동안 진행된 수천 번의 비공인(와일드캣) 파업3) 의 경험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노동조합을 넘어선 파업은 특히 매우 단순한 조직 형태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총회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조직적 기초가 평의회의 형태로 이러한 파업 속에서 발견된다. 형식과 내용은 결합되어 있다. 그들의 형식이나 조직은 어떤 태동기에 그 형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혁명 기관의 조직 형태인 노동자평의회이다.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 의해 선임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된 각종 평의회에 의해 협력하고 확장되면서, 이러한 투쟁들은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부르주아 국가와의 정면대치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의 확대와 급진화를 통해서만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국가에 대항한 방어적 투쟁에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공세적 투쟁으로 이행할 수 있다. 대중 파업, 급진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자기 조직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자신을 노동조합의 한계와 영역에서 넘어설 때 노동자 투쟁은 확장되고 막혀있는 모든 곳을 열어놓을 것이다.


 

3. 평의회의 특징과 직접민주주의

 

평의회는 아래와 같이 공통의 특성이 있다.
           
첫째, 평범한 노동자, 농민과 소시민, 군인, 저임금 노동자 포괄적으로 보면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비중을 가지고 평의회의 주체로 활동했다. 이러한 계급 또는 계층은 사회적, 경제적(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오는 임금노동자), 정치적(법에 따른 선거권 제한)으로 권리를 억압받았었고, 박탈당하였으며, 최소한 어떤 특정한 계급에 종속되어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위치에 있었다.

 

둘째, 평의회운동의 정치적 조직형태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영역이거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법률적 조직과 제도들에 대항하면서,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 조직형태를 지향했다. 이러한 정치적 조직을 통하여 평의회는 지금까지 박해받던 계급이 직접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이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평의회의 첫 번째 조직원칙은 평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자들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항시적으로 고용하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거나 생산수단을 임대한 모든 사람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셋째, 평의회 직접민주주의는 다음의 실천과 제도들이 특징이다.

1) 모든 지도적 위치는 선거를 통하여 결정된다.
2) 선거권자는 통일된 선거단위에서 행동하며, 자신들이 속한 기본단위(작업장, 분과, 위원회, 부대)와 대중집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형성한다. 
3) 선거권자는 필요한 결정을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논의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들이 뽑은 선출자에게 되도록 적은 사안에 대한 결정권한을 위임한다.
4) 당선된 선출자는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선거권자의 위임에 통제 받는다.
5) 당선된 선출자들은 선거권자의 지속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해명해야 하며, 과오가 있을 때 언제든지 소환되거나 대표성이 상실된다.
6)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한 같아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원리가 확산되어 일반화되면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가’ 동일화되는, 즉 ‘대중의 직접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평의회가 지향한 직접 민주주의의 골격을 이룬다.

 

평의회의 특징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가져야 할 무기는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직접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모임 참가자들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행동에 참가하는 그룹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된 평의회 형태를 보일 때에만 가능하며, 평의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고유의 단결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4)
     

 

4. 새로운 노동자운동에 대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계급의 기본생활을 방어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적 분리(분업)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5) 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제도권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가의 수단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들은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6)

 

그것은 비공인파업, 점거운동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직접행동네트워크 등이 투쟁의 내용과 일치되는 조직형식이다. 하지만 최근의 점거운동은 국제적으로 활성화되었지만, 대중총회 형식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내용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 자본주의 개조 주장에 머물렀다. 지나친 정치조직의 지도의지, 느슨한 시민운동과의 결합이 운동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프롤레타리아(프레카리아트) 자발적 행동과 의식적 투쟁이 지역평의회에서 만나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평의회운동은 현실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노동자 대중의 직접행동과 비공인파업 투쟁 형태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투쟁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평의회적 조직인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통해 계급 안으로 확산해나갈 수 있다. 또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생존권 방어에 내몰린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빈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소수자들이 거리투쟁, 광장점거를 통해 투쟁의 주체가 되는 대중총회를 개최하고, 지역에서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지역(투쟁)평의회 건설을 통해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

피티민주주의.jpg

이러한 평의회운동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 새로운 계급주체들이 작업장, 업종, 고용 여부, 성별, 조합원, 비조합원 장벽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광장점거와 파업투쟁을 하나로 묶어낼 것7)이며,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선 전 계급적 투쟁전선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조직은 노동조합 역할에 개입하거나 경제투쟁을 배후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에 나서는 것을 조력, 촉진하고, 대중총회, 파업위원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계급의식을 혁명의식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토론문화, 토론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상시기부터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평의회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본에 의하여 분열 통치되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주체적 자각’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을 열망하는 ‘계급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직형태가 ‘평의회’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주체들8)이 평의회운동, 코뮤니스트 정치와 만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중투쟁의 분출과 함께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주체,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모든 조직 형식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5. 평의회 운동의 지평 확대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

 

앞으로의 평의회운동은 이제 노동자권력을 지향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 계급의식의 발전 기관으로 지평을 확대하여야 한다.

 

첫째, 새로운 주체형성과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은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지역적 연대투쟁과 이른바 프레카리아트 계급의 직접행동 분출로 현실화될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이 수평적으로 만나 지역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평의회로 발전할 때 계급의식 또한 급속도로 회복,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의 평의회운동은 대공장 사업장의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지역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과 만나 기성 노동조합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적 조직형태를 결합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9)가 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총회와 정치광장이 확장되어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실업자, 학생,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할 때 대리주의 노동자(진보)정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직접정치가 실현될 것이다.

 

셋째, 광장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직접행동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경험과 확장만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계급의식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대중총회, 지역평의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연대는 대중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여기 흔들리는 민주노조라는 노쇠한 나무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그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는 풍성한 가지들을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악한 세력들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들을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들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 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더 폭넓은 단결 투쟁의 근거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자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평의회)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여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주>

1)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고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혁명가들의 살해에서도 그랬다. [필자]

 

2) 이른바 ‘민주집중제’로 표현되는 중앙 집중적 의사결정구조는 대의제 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총회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는 사라졌고, 집행부와 대의원 장악이 모든 것에 우선시 되었다. 노동조합 상층기구와 형식적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과 노동자투쟁의 확산을 가로막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몰락과 회복불능을 가속화 시켰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민주노조재건’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이미 평조합원들이 절감하고 있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3)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파업은 규칙들과 규제들에 따라 노동조합에 의해 선언되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와일드캣 파업(비합법적이거나 비공식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자생적인 파업들은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다른 개별 노동조합들로 분할되는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통들은 노동자들을 종종 경쟁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회사들로 분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작업장에서 다른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서로 간에 반목했다. 파업을 할 때도 그들은 종종 분리된 상태로 참여했다. 때문에 통일이라는 관념들에 접하기 어려웠고 행동의 조화와 타협은 유일하게 위원회와 관료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직접행동에서 이러한 노동조합의 회원 차이는 어느 조합에도 속하지 않는 표시로써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즉 통일이 없이는 어떠한 투쟁도 불가능했다. 와일드 캣 파업들이 거대한 대중들을 결집하고, 전 산업 분야, 도시와 구역에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 한다. 파업위원회들은 관료들의 노동조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노동자 평의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

 

4) 프롤레타리아계급에 1910~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은 계급의식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보여주었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가 나타났고, 그곳 모두에서 회합과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교류가 발생했다. 이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가 부과한 심각한 무지와 의식의 왜곡 속에서 침체되어 있었지만, 평의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명료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소통하면서 그들은 정치적 토론에 임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을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환경은 열정적인 토론을 창출하고, 다른 프롤레타리아들과의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때 계급의식은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역할에 대하여],이형로, 2012, 붉은글씨 창간호,

 

5) 비정규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파업의 대부분을 불법으로 몰아가거나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대공장(대기업) 노조들의 생산(자본)에 타격을 가하지 않는 공식적 파업에 대해 묵인하는 현상들은 이러한 자본의 지배방식(분업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

 

6) 이 글에서 노동자운동 새로운 대안의 핵심 중 하나인 정치운동(혁명조직) 관련된 내용은 담아내지 못했다. 혁명조직의 역할, 혁명조직과 계급과의 관계, 혁명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호로 넘긴다. [필자]

 

7)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8)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9)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이다. 다수가 이러한 정치의식에 익숙해졌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노동자계급 의식이 된다.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만이 어제든 나타날 수 있는 계급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한 계급의식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이러한 토대에서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창조성과 자발성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 더욱 높고 깊은 계급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고, 토론의 결과가 행동으로 즉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혁명의 승리는 고사하고 내부 분열이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부르주아 대의제도의 허위의식을 타파하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만들어 간다면 무너진 폐허에 새로운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실제로 보일 것이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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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민족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를 넘어,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와 지배계급의 폭압기구 해체 투쟁에 나서자!

'진보-민족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를 넘어,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와 지배계급의 폭압기구 해체 투쟁에 나서자!

 


1. 위협세력?! 눈엣가시?!
 
국가정보원에 의한 부정한 여론조작으로 얼룩진 대통령선거를 통해 집권한 박근혜 정권의 실질적 ‘위협세력?! 눈엣가시?!’는 누구인가?


하나는 지금 대통령선거결과에 대한 무효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다. 이것은 2008년 광우병 파동,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중학생 사망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분노와 자발성으로 결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댄 광범위한 대중행동이라 하겠다.


또 다른 하나는 특별한 설명이 더 필요 없는 휴전선 너머 60년 넘게 마주하고 있는 북한 정권과 한반도에서의 제국주의 군사적 충돌이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별도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 내 이른바 ‘진보-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내부투쟁을 통해 ‘통합진보당’으로 외화 되었고, 그 외부에서는 그들에게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고 있다.

 

 

 

 

2. 국가정보원은 왜 'RO사건`을 통해 통합진보당을 공격했나?

.

 

 

부르주아 국가에 정보기관은 체제 유지에 필수요소다. 정보를 독점,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그들의 역할은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음지에서 자신들의 양지를 지켜주는 최고의 파수꾼들이다. 이러한 때 자신들의 보호막이 엄청난 정치적 수세로 몰리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정권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빨갱이 안보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대중투쟁의 확산이 박근혜 정권으로 향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자기방어 측면과 함께 박근혜 정권 내내 직면할 세계경제위기 상황과 한반도 긴장상태를 고려한 정권 초기 안정적 통치기반 마련과 장기적인 정국주도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박근혜 정권 입장에서 정권 대 대중행동으로 광범위하고 부담스럽게 확대되는 전선을 국가정보원 대 통합진보당으로 왜곡, 축소시킨 후 애국세력 대 종북세력으로 역(逆)확장하여 대중행동을 분열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반대세력을 뿌리까지 제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하게 통합진보당을 공격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기에 통합진보당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합진보당은 그간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흐름에 함께 하면서 성장해 온 이유로 그들의 본래 계급적․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진보', ‘좌파’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계급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고, 동시에 북한지배권력과 정치 군사적 상당한 공통의 인식기반을 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스탈린주의의 변종인 극단적 민족주의(김일성주의)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공산주의 혁명에서 분명히 적대 되는 세력이다.


한마디로 진보적이기는커녕 퇴행하는 반혁명 정치세력이다. 우리가 위에서 밝힌 ‘진보-민족주의 세력’이라는 표현은 사실 칭찬에 가깝다 하겠다.
 


4. 그럼에도 우리는 부르주아 폭압기구의 민족주의 세력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발언과 의지가 허무맹랑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사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탄압을 받는다면 이 사회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꿈과 목표를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하는 데에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발언은 헌법에 위배되니 정신 차려야 하고, 박근혜 정권과 하수인 국가정보원은 이를 문제 삼아 공안정국 조성과 공안탄압을 중단하라’는 이율배반적인 회색주의자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모든 세력들의 그 신념과 의지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그 어떠한 탄압도 거부하고 반대하며 방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5. 전망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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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은 공안탄압을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공안사건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발맞춰 검찰과 경찰, 보수언론, 극우세력들 전체는 사회주의운동, 노동자운동 전반으로 공격을 확대할 것이 예상된다.

 

 

이때 의회주의자들과 기회주의 정치세력, 개량주의 노동자운동세력은 급격히 체제 내화 되어,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공안정국은 한국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그동안 운동을 퇴보와 패배로 이끈 낡은 진보-민족주의와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공안탄압과 폭압기구 해체,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하며, 공세적 대중행동과 의식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가능하다.

 

 

이에 노동자계급과 혁명세력이 나서서 공안탄압, 공안정국에 굴하지 말고, 폭압기구 해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보다 광범위하고 공세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위축되지 말고 노조관료나 의회주의자들에게 의탁하는 투쟁이 아니라 더욱 과감한 직접행동에 나서야 한다.

.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투쟁과 혁명(코뮤니스트)정치의 결합만이 낡은 진보와 민족주의를 넘어 다수계급의 사회혁명 열망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소수의 내란이나 테러리즘이 아니라, 다수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모두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 직접정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는 가장 이성적이고 창조적인 혁명이다.


2013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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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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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여름호(3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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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3호에 실린 글>

 

□ 故 남궁원 동지 추모 특집

 
-안녕! 남궁원!

 
-추모시   /임성용

 
-남궁원 동지를 추억하는 시인의 일기    /조성웅

 
-남궁원 동지가 걸어온 고집스럽던 그 길목에 한편의 이야기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
 

-덩치만큼이나 오지랖 넉넉 하고 푸근했던 사내    /이승찬

 
-사랑…
 


□ 故 남궁원 동지의 공산주의 출판 활동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좌익공산주의


-노동자평의회와 공산주의 길
 

-다시 혁명을 말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 특집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혁명조직의 구조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정현철

 
-혁명가조직 구조와 기능    /이형로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이정인

 


□ 정세와 계급투쟁


-재능지부 문제 : 새로운 의사 결정 구조를 위하여

 
-거리시위와 계급 권력     /김명수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성승욱.이형로

 
-만덕5지구와 개발동맹들     /윤웅태

 
-[인터뷰] 영상활동가 김수목 동지    /정현철

 


□ 기획번역 연재


-기획번역1. 파국의 시대      /오세철


-기획번역2.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배신자들의 비난(2)

 
-기획번역3. 민족주의는 계급투쟁의 치명적인 독이다.     /성승욱


 

□ 좌익공산주의 역사와 인물

 
-헤르만 호르터의 사망기사     /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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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혁명가 故 남궁원 동지 49재 및 추모사업 첫 준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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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 공개토론회 :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실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3/07/03 11:52
  • 수정일
    2013/07/03 12:05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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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지 [붉은글씨]  공개토론회

 

<주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실천

 

<발제>

 

-점거투쟁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 프레카리아트 운동에 대해 (사회주의노동자신문 독자회원 이정인)

 

-노동조합을 넘어선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제안하며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정현철)

 

*토론자 : 김혜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회자 : 김운용(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일시 : 7월 12일(금요일) 오후 7시

 

장소 : 경향신문사 별관 2층, 민주노총 사무연맹 회의실 (5호선 서대문역)


주최 : 붉은글씨를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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