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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10주년 나의 10주년

[공연을 준비하는 꽃다지]

꽃다지 10주년 행사에 대해서 조금씩 얘기를 듣기 시작한 것이 벌써 2년도 넘었다.
올해 드디어 준비에 들어가면서 내심 꽃다지 10주년을 다른 단체와 활동가들이 함께 준비할 수 있도록 판을 열었으면, 기꺼이 다들 응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조금 힘이 부쳤는지, 이전의 꽃다지에서 활동했던 선배들과 현재의 꽃다지중심으로 행사가 정해졌다. 공연이 준비되고 있는 과정을 보면서 내심 이런 걱정이 들었다. ‘만약 과거를 추억하는 것으로 공연이 끝이 난다면 그건 실패인데.’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 ]

공연 당일날. 음반가판을 하면서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았다.
30대이상과 10대~20대의 비율이 반반, 일요일에는 장기파업장의 노동자들이 같이 했다.
이렇게 참가한 사람들의 구성만으로도 성공을 했다는 예감을 했다.

[공연 시작이다]
단결투쟁가로 시작해서 ‘한번더’로 끝을 맺고 앵콜곡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로 끝을 맺었다. 40여곡으로 구성된 3시간이 넘는 공연.
그래서 지루했냐고? 과거의 회상, 추억만 건드렸냐고? 30명이 꽉찬 그 무대는 나의 작은 걱정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예전 꽃다지에서 노래하던 가수들의 목소리가 살아서 현역 꽃다지 가수들과 화음을 이뤄 관객들에게 날아들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천만에 말씀. 출산이라도 한번 거치면 목소리는 변한다고 한다. 그리고 삶이 변하면 감정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면 노래를 부르는 마음도 바뀐다.
생각해보라, 그 무대에 서겠다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숱한 시간을 고민하였을 것이다.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개인 가수인 사람들은 자기의 색깔과 생각이 담긴 자신의 노래가 음반으로 나와있다. 그것을 포기하고 3시간여의 무대에 여러 목소리중 하나의 목소리만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가정에서 현장에서 직장에서,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몇 년씩 살면서 가수라는 이름을 접었던 그 선배들은 내가 정말 그 자리에 서도 되나, 목소리가 나오기나 할까, 정말 부끄럽지 않을까. 결정하기까지 자신을 쪼개고 쪼개어서 들여다 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꽃다지가 해체하고 추억공연을 한다면 모르지만, 현재진행형인 꽃다지의 이름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짠 것처럼 노래를 따라부는 내 머리 속으로 나의 어제, 오늘, 내일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과 다르게 머릿속에서는 차분하게 순서대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상호작용하면서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처음 운동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겼을때 어린 대학생이었던 내가 밤마다 스트레오도 안되는 고물라디오로 ‘누가 나에게 이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민들레처럼’을 주먹쥐고 부르면서 울곤 했었고, 사람에 상처받아 눈물흘릴때 ‘행복한 인생’을 부르며 견뎠다. 따르던 선배들이 졸업할 때 ‘내일이 오면’을 불렀고, 내가 졸업할 때 혼자서 ‘다시 떠나는 날’을 부르지 않았나.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내 사람이 분리되었을때 못견뎌하며 ‘단결투쟁가’와 ‘동지’를 중얼거리며 미친 듯 불렀다. 그리고 전업활동가가 되어서 내 삶과 함께 했던 노래를 만들었던 이들과 함께 일하게 되고, 또 그들의 활동이 내 힘이 보태기도 하는 순간들을 살고 있다.
서른살을 코앞에 두고 20대 초반의 찬란한 꿈들이 다시 떠올라서 지금 사는 모습이 그때의 생각에 반추해서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꾸만 불안해지는 요즘인데, 도저히 반성해도 끝이 없어져서, 못났다 싶어 혼자 슬프고 겁도 나서 술한잔 홀짝홀짝 마셨는데....
‘나, 참 행복하네. 틀리지 않게 살았네. 또 그렇게 살아야지. 우리 편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도 안무섭다. 근데 내가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으이씨발..“ 울다가, 웃다가, 욕도 같이 섞여 나온다.
혜경언니는 시작부터 끝까지 울었다고 중얼거렸다. 꽃다지의 10년의 역사는 자신의 역사였다고. 대학을 때려치우고 아남정밀에 들어가 노조를 만들고 위원장도 하고, 또 무너지는 모습을 봤으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노문교협 활동을 하며 창조와 보급을 만들었지, 그리고 쉬면서 해솔이 키우다 보니 교육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 밝은공동체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대안학교, 노동문화활동가 자녀들의 교육문제, 교육에서의 노동문화운동의 결합을 시도하는 고민을 현실화하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는 언니의 10년여의 생활.
그곳에 늘 함께했던 노래들을 마치 자신의 얘기하듯 흘러나왔을 것이다. 현재진행형의 그 노래들 말이다.
낮은 목소리로 화음을 맞추듯 따라부르던 웅얼거리는 관객의 노래소리가 정말 문화적인 충격처럼 가슴에 새겨진다.
공연 몇일전 침탈 당했던 경희의료원 조합원들이 힘받아서 간다고, 고맙다고 전하는 말을 몇 달새 훌쩍 여위어버린 얼굴로 전하며 서로 손잡을때 글썽거리는 눈빛도 가슴에 새긴다.

[공연이 끝나고 ]
언젠가 만화가 장진영선배가 한 얘기가 떠오른다.
“문화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웃음을 줘야지. 자꾸만 희망을 깨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거든.”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예전 선배들에게 다시 노래하라는 말을 많이들 했다. 이 공연을 계기로 다시 노래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꽃다지가 아닌 자신의 노래여야 할 것이다. 이번 공연의 성과와 비판의 목소리까지 안아가야 할 사람들은 현재의 꽃다지이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힘들과 과제는 미래의 꽃다지가 잊지말고 전해받아야 한다.
나는? 고민했던 것들을 싹 날려버렸고 내가 지금 이순간, 처음 노문센터 사무실을 두드리던 그때의 수줍고 머뭇거리면서도 간절했던 심정으로 돌아가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자꾸만 입술끝에서 ‘노래여 우리의 삶이여’가 흘러나온다.


‘먼길 걸어온 우리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옆에 있던 노래 있어. 땀과 눈물어린 오선지 위에 아직은 못다 이룬 꿈과 사랑이. 하지만 슬플때 흘렸던 나의 눈물과 기쁠때 보여준 너의 환한 웃음 싣고 굳게 손잡아준 모든 이의 꿈을 새겨 이제 들꽃처럼 끝없이 피어나리니.
쓰러져간 벗들의 맑은 영혼과 오늘을 살아갈 너와 나의 다짐 싣고 따스히 보아준 모든이의 희망새겨 이제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 가리니. 노래여 우리의 삶이여 어둠속에서 더욱 밝게 비춰준 노래여 우리의 꿈이여 끝내 온세상에 울려 퍼지리.‘

(200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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