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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온 일본 노래 노 카이

[일본 노래노 카이의 바위처럼 노래에 함께하는

 인천 연합노래패 철의 노동자, 목포 삼호중공업 바리케이트 노래분과 '힘찬울림' 동지들]

[일본 노래노 카이의 공연 모습]

 

내가 이들과 인연을 맺은 건 10년이 넘었다. 96년 메이데이에 꽃다지가 일본 공연을 갔을 때 (그 때 나는 재판중이라 여권이 나오지 않아 갈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5.1 합창단을 꾸렸다.

95년 민주노총 출범식 때 일본 전노협 산하 젠또이쯔(전통일) 노조의 활동가들이 몇 명 한국에 왔었는데 그 전야제 때 꽃다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한국 노동자의 힘과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침체되어 있는 일본 노동자들에게 한국 노동자들의 정서를 전함으로써 다시금 활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 꽃다지 초청 공연은 성사되었다.

 

그 때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있었고, 꽃다지 식구들은 농성을 하면서 매일매일 탑골에서 거리공연을 했었다. 초청 섭외를 한 오자와 씨는 89년 한국 수미다 일본원정 투쟁 때 수십일을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연대와 지원을 했고, 이 때 많은 이들이 오자와씨를 통해 한국 노동자들을 알게 되었다.

오자와씨는 70년대 부터 활동을 했던 활동가로 노조 상근 뿐 아니라 일본 내 다양한 투쟁들에 연대하며 활동을 하던 중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한국말을 배워야 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건강이 안좋아져 잠시 쉬는 93, 4년에 한국에 유학을 왔고, 그 때 꽃다지 공연을 보게 되었고 어떻게든 꽃다지 일본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96년 메이데이 때 꽃다지를 초청하자는 젠또이쯔 노조의 의지로 다시 한국에 와서 꽃다지를 섭외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가요 전문패가 온다는 생각에 일본에서도 한국말로 한국노동가요를 부르는 5.1 합창단을 꾸렸고, 여기에 몇몇 노동자들이 함께 해 그 후로도 몇년간 활동을 계속하면서 집회나 행사 때 작은 공연을 하며 한국의 노동가요를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중단된다. 모두가 바쁜 활동가이기도 했고, 강사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해나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우연히 일본어 공부를 하러 한국의 노래강사 박미영이 일본에 갔을 때 이들은 다시 모임을 만들고자 했고, 박미영 강사의 지도 하에 열심히 연습하고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물론 멤버는 많이 바뀌었다.

재작년인가... 한국 야마모또 노조의 일본 원정투쟁 때 다시 만났던 몇몇 일본 노동자들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오자와씨를 통해 인천에서 87년 노동자 투쟁 20주년 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꼭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연대 공연도 하고 싶었다.

그 바램은 이루어졌고, 일본 노래노 카이는 아주 훌륭하게 공연을 했다.

 

일본의 노동운동은 침체되었다고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일본 노동자와 활동가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많은 활동력으로 다양한 연대활동을 하며 노동운동을 지켜나가고 있다. 내가 많이 좋아하고 또 존경스럽기까지한 젠또이쯔의 도리이 서기장 동지, 그리고 국철 해고 노동자로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동경에서 계속 투쟁하고 계신 이와사키씨, 한국의 양심수 석방을 위해 또, 수많은 활동에 연대하시는 오자와 아저씨, 그리고 늘 우리를 챙겨주며 정말 우리의 감정까지 전달해 주는 가또씨와 메구미 언니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인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일본의 활동가들도 처음엔 한국말을 잘 못했는데 만날 때마다 한국어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또 한국의 노동가요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일본을 자주 가지만 일본어가 늘지를 않는다. (공부를 안하니까 ㅠㅠ) 일본에 가면 내 주변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일본인들이 너무 많다. 굳이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도록 잘 배려해 준다.

이번 인천행사때 오신 분들 중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을 위한 배려는 하지 못했다. 

내가 일본에 가서 받는 배려나 대접에 비해 너무나 소홀한 대우를 하고 보내드렸기에 참으로 미안하고 또 부끄럽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이 분들을 한분씩 소개하고 싶다.



젤 왼쪽부터...

고구레 씨는 수도국 노동자이다. 96년 꽃다지를 만난 후 꽃사람에 가입을 했고, 해마다 꽃사람 모꼬지에 여름 휴가를 써서 혼자서라도 참여를 하신다. 이번엔 여름 휴가를 아껴서 인천 공연에 오셨다. 노래를 참 잘하시고 내가 처음 만난 일본 분 중에 한국말이 가장 많이 향상된 분이다.

 

아키모또 씨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고 또 농담도 잘하신다. 모두가 인정하는 대단한 활동가이다. 지난 야마모또 투쟁때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연대하면서 사비를 털어 한국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한국말을 할 때는 모두 농담인 거 같아서 조금 헷갈린다.

 

신가미 씨는 재일 교포 2.5세 이다. 신가미씨의 딸은 초등학생인데 조선학교에 다닌다. 이번엔 [우리학교] 삽입곡인  <하나>라는 노래를 독창하면서 노래에 앞서 현실을 알리는 멘트를 준비해 읽었는데 (한국말을 아주 잘하시진 못한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흥이 많아서 다음날 풍물대동굿에서도 쉬지않고 쇠와 장구를 들고 뛰어다녔다.

 

역시 왼쪽부터...

히나따 씨는 오자와씨와 80년대 후반 수미다 원정투쟁 때 함께 연대 했던 분이다. 한국말을 잘 못하시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열정이 많은 분이다.

 

오오따 씨는 보기보다 나이가 좀 많으셔서 몸도 불편하시다고 한다. 역시 오자와씨와 한국 수미다 원정 투쟁 때 함께 했던 분이다. 한국을 무척 좋아하고 또 배용준도 좋아하신다. ^^ 한국말 실력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정말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오자와 씨는 가장 오래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분이다. 한국말을 잘 하시기 때문에도 특히 일본과의 연대에 관한 모든 일은 이분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한다. 늘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완벽하게 일이 성사되도록 애써 주신다. 그야말로 일본의 노동문화기획자이다. 70년대 나리따 공항 반대투쟁,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수많은 활동을 하신다. 장구도 잘치고, 춤도 잘 추시는데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수미다 투쟁 때 직접 창작한 노래도 있다. (그 테입을 하나 얻어왔다.) .

 

이 분들 외에 나가이씨(사진은 없지만)는 한국말을 못하시고 노래노 카이 멤버도 아니지만 우리가 일본에 갔을 때 항상 온갖 힘들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다. 소주를 무척 좋아하고 한국의 노동가요를 사랑하는 아주 세심하고 또 재밌는 분이다.

 

그리고 역시 나로서는 처음 뵙긴 했지만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행사를 찍으면서 함께 하신 츠찌야 씨는 일본 레이버네트워크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이번에 두개의 다큐를 선물로 받았는데 하나는 일본 모또야마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비디오로 34년간 투쟁을 해서 복직에 승리를 한 내용이고,

또하나는 일본 기미가요 의식 (우리의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에 반대한 선생님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일본 헌법에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끝이 나지 않은 투쟁이지만 힘겨운 투쟁과정을 담았다.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사흘간의 일정이 앞으로 활동에 활력이 되고 또 일상의 작은 희망이 되길 기대한다. 이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96년 가을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오까와 마찌 시네클럽에서 활동하시는 도마쓰 씨가 한국의 노동문화와 노동운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후 (물론 통역을 끼고) 일한 사전을 선물로 주실 때 한 약속, 다음에 일본에 올때는 꼭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그 약속을 11년이 지났지만 이제 지키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워 본다. (정말 가능할까? ㅠㅠ)

 

 

* 일본 노래노 카이는 노래라는 한국말을 고유명사화 하고 카이라는 일본말 (모임이라는 뜻)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다. 노래모임이라고 한국말로 하면 일반적으로 그냥 노래 동호회 같은 보통명사로 쓰여지기 때문에 일부러 두 나라 말을 합해서 노래노 카이라고 지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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