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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엄청난 속도로 2010년이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일을 떠올리면서 2010년의 일인지 2009년의 일인지 헛갈릴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앞만 보고 달려온 건 아닌가, 소중한 것들을 순간 놓치고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잠시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절대 놓지 말고 살아야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는데

나는 또 2010년 한해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고 아프게 했을까?

또 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쓸데 없는 내 고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진 않았을까?

나에게 아직도 열정과 신뢰가 솟아오르고 있을까?

 

2011년이 밝았다.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이다.

올해는 무엇을 다짐하며 시작할 것인지 생각도 못하고 맞이해 버렸다.

힘들때마다 떠올렸던 기억들, 다짐들...

그것이 나에겐 힘이고, 또 희망이지.

그 속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내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보다 나를 더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좀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을 기획하고 살아야지.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살아야지.

다시 태어나도 이길에 있었을 거라는 믿음, 되뇌이며 살아야지.

내 기억속에 있는 이들, 혹은 이제 그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이들도 많겠지만

모두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원해본다.

 

2011년 새해..

더 힘차고 치열하고, 또 즐겁고 신나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한 바 이루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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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사회적기업의 공생가능성

2010년 11월, 인천문화재단 아트플랫폼 수록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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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사회적기업의 공생가능성

- 지역 문화예술생산자조합이라는 자바르떼의 시도를 토대로 -

 

이은진 (신나는문화학교 자바르떼 대표)

 

 

최근 1~2년 사이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이 가히 전국적인 붐이라 할 만큼 높아졌다.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시행된지 3년하고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인증된 사회적기업의 수는 2010년 10월현재 400개소를 넘었고, 서울형이나 예비사회적기업까지 하면 500개가 넘을 것이라 예상되고, 앞으로도 더 속도를 붙여 사회적기업을 육성한다고 하니, 마치 한국사회 고질화된 실업문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인식되어지기도 한다. 노동부는 사회적기업 육성 계획에서 ‘새로운 수요가 많고 시장과의 충돌이 적어 사회적기업의 진출가능성이 높은 지역개발, 문화, 환경 등’을 미래성장형 사업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사회적기업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사회적이라는 말과 특히 잘 어울리는 영역이 문화예술분야라고 생각되었다. 문화예술의 공공재적 성격과 사회적가치는 잘 부합되고 또 문화예술분야의 많은 인력들이 안정적인 활동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많은 일자리 창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여졌다.

이에 대한 근거는 간단한 몇 개의 자료만 찾아봐도 알 수 있다. 문화예술향수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구성원 중 70% 정도의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향유한다. 고전적 개념의 예술행사 관람률은 아주 저조하고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나이가 어리고 대도시에 살고 있을수록, 그리고 학력이 높고 가구소득이 많을수록 예술행사 관람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문예술인 교육을 받고 배출되는 인력은 교육인적자원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6만~7만명 정도인데, 전문예술인들의 예술활동관련수입은 없음(23.5%), 100만원 이하(38.4%), 100~200만원(19.1%)의 분포를 나타냈다. 이처럼 문화예술분야는 수요의 측면에서 문화소외와 편중현상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로 인해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먹고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문화소외를 극복하는 문화다양성과 문화기본권의 개념 도입이 중요하고,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수요는 증가하게 되고, 당연히 예술인일자리도 늘어나야하고 예술인들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보여졌다.

 

그러나 막상 2년이 좀 넘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을 운영해보고, 또 문화예술영역에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은 사회적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적가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계량되어 외화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예술이 가진 공공성과 사회적가치 실현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예산업 역시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공의 영역일 수 있지만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업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미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의 공연이나 드라마 등이 취약계층에게도 제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문화예술분야에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 사회적가치, 사회서비스는 어떻게 규정하고, 또 구분지어야 하는가, 나아가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회적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던 문화예술 영역의 단체들이 인증제도를 거쳐 사회적기업에 진입하는 것은 이를 기반으로 좀 더 확대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 것인데, 막상 시작을 하면 기업이라는 단어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해왔던 단체운영방식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조직운영이라는 크나큰 과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영역에서는 많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문화예술인들을 고용하고 출퇴근 관리 등 통제를 한다는 것, 수익창출이라는 지점이 그러하다. 기업운영이라는 것이 인간 중심이라기보다는 이윤추구가 존재 목적이기에 경제적 가치를 우선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밖에 없고, 개개인 특성을 인정해 가면서 인간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 생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이 쉽게 가능했다면 수많은 공연단체, 문화예술단체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단체를 해산하거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개인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본력이 없으면 예술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조차 어렵고, 이미 거대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예술활동을 하면서 먹고사는 것이 가능했는가 말이다. 이렇게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기업이나 지원이라는 조건들이 오히려 기존에 활동의 근본까지 흔들거나 그나마 어떻게든 유지해 오던 자생성마저 와해시킬 소지도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문화예술인들에게 인건비를 포함한 지원과 혜택도 중요하나 이러한 지원을 기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된다.

흔히들 사회적기업을 사회적이라는 단어와 기업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인식하면서 두가지를 공존시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즉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안정된 수익구조와 고용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거나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떻게 시장에서 경쟁하여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색하면서 사회적가치 실현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도 비중으로 놓을 것인가하는 줄타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안정적인 수익구조 확보를 우선으로 두고 여기서 나온 수익 중 잉여분을 사회로 환원하거나 소외계층에게 수혜를 일부 주는 것이라면, 굳이 국민의 세금을 풀어 사회적기업을 왜 육성해야 하는 걸까. 이는 모든 기업들이 하고 있고, 또 앞으로 더 확대되어야 할 기업의 사회적책임인데.

그러다 보니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어떤 것을 우선에 놓을 것인가, 혹은 두 가지를 어떤 비중으로 배분할 것인가도 문제이지만, 실제 사회적가치를 어떻게 산출하여 이를 경제적 효과로 드러내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이고, 또 과연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도 참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것일까? 이런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 해결해야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이 가능한 것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초심에서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문화예술단체들은 과거에는 훨씬 더 결속력이 높은 공동체적인 운영과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경제적으로나 대중과의 소통의 측면에서 잘 해결되지 못하면서 많은 단체들이 거의 해체를 하였고, 공간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일이 있을 때만 합주나 회의를 하러 모이게 되었고, 그 결과 오히려 단체의 목적에 맞는 활동이 더 어려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당연 상근활동을 하는 사람이 줄었고, 한두명의 기획자나 창작자만 남아 예술가들을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 때 그 때 채용하거나 모집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일상적인 창작활동과 연속적인 고민이 없어지면서 주변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도, 향유자들의 욕구를 들여다볼 계기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렇게 또 활동력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장기적인 비전과 활동토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가야했다.

자본이 없으면 창작물이 제대로 생산되기도 어렵고, 대중들과 소통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자바르떼가 사회적기업을 준비한 것은 이처럼 뿔뿔이 흩어져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창작활동마져 저조해진 현재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함이었다.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지속적인 활동의 토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일정한 지원과 틀을 바탕으로 가능한 모색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이라는 고민을 같이 하게 된 것은 문화예술분야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업’이라는 틀에 대한 부담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모두들 불편하고 어색했다. 나 역시도 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나, 예술가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라는 자리가 늘 어색하고 불편했고, 또 기존의 활동방식과 관계들의 관성도 많이 남아있어 조직운영에 원칙들을 고수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자신이 어떤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도, 출퇴근 시간을 통제당하는 것도 불편했을 것이고, 꼭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이라도 회사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억지로 수행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매일 업무일지를 올리고, 각종 행정서류를 작성하면서 왜 이런 것을 해야할까하는 회의도 들었을 것이다. 이전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싫고 불편하고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고, 또 공유하더라도 그것을 가능케하는 구체적인 방안과 믿음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정리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또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3개월마다 평가를 하고, 재정 분석을 하고, 6개월마다 인력 재배치를 하고 조직체계를 재편하면서 3년차에 들어서 보니,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본 친구들은, 많은 돈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면서 재밌게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갖게 되었다. 현재 100%는 아니지만 점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초기부터 계속 강조해왔던 예술활동을 사회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의미,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예술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정리도 조금씩 되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여러 번에 걸친 조직진단 워크숍과 컨설팅을 통해 교육하고, 토론하고 고민해 온 결과이고 그래서 현재 자바르떼의 예술가들은 이렇게 끝까지 계속 함께 잘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직은 좀 더 조직의 비전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실현계획과 그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겠지만 이제야 이들과 함께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결국 중요한 건 지속성일 것이다.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만들어갈 것인가? 만약 자바르떼가 인건비 지원이 종료된 후 운영할 대책이 없다면 많은 이들이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아가던가, 과거의 생활도 돌아갈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동안 쌓아온 역량들과 가능성조차 소실될까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운영진들이 수익구조의 확대라던가, 조직운영방식에 대해 고민을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속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장에서 성공하는 어떤 수익구조를 만들어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수익구조는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은 것도 중요하긴 하나 그 외에도 가능한 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화복지 차원에서 보호된 공공시장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같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를 기본적인 사회권이라고 보면 주민들의 문화욕구를 발굴하고 이를 충족시켜주는 문화예술활동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게 확대될 수 밖에 없다. 복지 바우처를 문화영역으로 연결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영역을 사회적기업에게 맡겨준다면 지역에서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외의 다양한 활동을 펼쳐갈 기반을 갖출 수 있다. 실제로 자바르떼 경기지부의 경우 안산시와 협력해서 복지부 청년사업단을 문화예술분야로 받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공급자가 많아지면 경쟁이 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전 국민의 기본권으로 확대해 간다면,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이 많아져도 수요를 다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아마도 이런 활동을 자신의 활동으로 삼을 예술가가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다른 서비스와는 달리 문화소외를 해결하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한 영역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려면 오히려 지역에서 건강하고 자기 철학을 가진 젊은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생겨야 할지도 모른다.

수익구조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접근해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지역 안에서 대안적 경제구조로 해결하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시도를 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이미 지역에는 이런 구조 속에서 상호 협조하는 단위들이 꽤 많이 있다. 수익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에 사는 예술인들이 지역에서 관계를 맺고,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활욕구를 충족시켜가는 것도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서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만 해결하려하지 말고, 지출을 줄이면서 지역내 협동구조에 들어가 같이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지역이다. 사회적기업이 성공하려면 지역을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 주민의 문화예술 욕구를 발굴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지자체와도 협력하고, 주민들의 지지도 받고, 지역의 소외계층에게도 같은 질의 문화예술활동을 제공하면서 공동체적인 기반을 만들어가지 못하면 일반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밖에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조직운영과 관리, 시스템의 문제인데, 물론 순서로는 이 부분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예술가들의 출퇴근 통제가 어렵다고는 하나, 함께 모여서 창작하고, 연습하고, 지역 주민들의 욕구를 탐색하고, 이를 충족시킬 방안을 고민하고, 조직의 비전과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일자리와는 분명 다르다. 몇몇 사람이 사회적가치를 고민하여 사업단을 만들고 일자리로서 예술가들을 고용하는 것이라면 현재까지 처해있는 문화예술의 현실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이 운영의 주체가 되기는 쉽지 않다. 초기부터 참여할 중심적인 예술가들과 기획자, 운영진들이 함께 사회적기업의 비전을 세우고, 우리 지역의 주민들과 어떤 문화예술활동을 할 것인지, 수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찾아나가야 한다. 최소한 각 조직의 10년 후 모습을 그려보면서,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인증과 그 과정이 어떤 단계의 어떤 역할을 할지 판단한 후 도전하는 것이 좋다.

운영방식에 있어서도 예술가를 통제해서는 좋은 창작물이 안나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편 맞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도 이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기획자들이 물꼬를 터주고, 계기를 마련해주면서 같이 소통할 때 더욱 그 빛을 발한다는 건 또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또 자기의 방식대로만 예술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에서,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좋은 예술이 나오기 힘들다. 한 공간에 모여 고민하고, 합주하고, 또 창작하고 공연하는 것이 주는 즐거움도 무척 크다는 것을 해보면 또 느낄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후에 사회적기업으로서 조직 시스템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 관계를 재규정하고, 인력을 재배치 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모든 예술가가 사회적기업가나 사회적기업의 직원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허나 사회적기업은 준비하는 주체 모두의 철학의 문제이고, 조직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공동의 책임감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같이 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이것을 실천해갈 사람인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에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정부도 꼭 해결해 줘야 할 부분이 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가치냐, 기업으로서의 운영과 수익창출이냐의 분리된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을 하나의 개념으로 놓고 이의 새로운 조직형태, 운영방식 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의 사회적기업이라면 문화예술생태계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기업 하나로 모든 예술계의 문제나 문화복지 실현 등등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정책방향, 문화복지에 대한 고민들 속에서 사회적기업이 어떤 위치에 서게 할 것인지, 어떤 사회적기업을 육성할 것인지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예술가들이 많이 놀고 있으니 일자리를 늘리겠다거나, 예술단체들이 어려우니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창작력을 고양시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하도록 한다는 발상보다는, 국민들의 문화 향수권, 참여권, 창의력 향상 등 문화복지와 문화예술생태계 차원에서 접근하여 방안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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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와의 첫교신은 비교적 괜찮았다.

오랜만에 대학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다.

중간에 88학번 후배가 다리를 놔서...

그니까 올해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이 10학번인데,

84학번인 나하고는 26년 차이가 난다. 헉!!! @.@

그러니 누군가 중간에서 브릿지를 해주지 않으면

대화도 잘 안될 거 같았다.

 

그리하여 88학번 후배와 같이 09학번, 06학번들을 만났는데

이 친구들이 80년대 이야기를 듣고 싶단다.

왜 노래동아리에 들어왔냐고 하니까

노래가 좋아서, 그리고 어릴 때 부모님이 공연을 같이 보러다녔다고...

 

요즘은 신입생 때 노래동아리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대학 2학년에 집행부를 맡고,

3학년이 되면 취업을 위한 자기 스펙쌓기에 들어가느라

동아리 활동은 모두 정리할 수 밖에 없다는 친구들.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워서

최대한 졸업을 늦추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기다리는 건 대부분이 비정규직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지...

9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세대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자신들은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닌 게 저주받은 거 같다고...

 

그런데 이 친구들은 90년대 후반 세대들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잡히지는 않지만

이들의 부모세대가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약간 윗세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모세대의 영향을 받은?

이 친구들이 7, 80년대 민중가요의 역사와 동아리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았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가 듣고 싶단다.

흠... 뭘 이야기해야 할까?

선배랍시고 나서서 그 당시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노래가 있어 힘이 되었고

아직도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게 공감이 갈까?

일제시대 만주에서 개타고 말장수하던(우린 이렇게 써먹었었다.) 전설이나

1.4 후퇴 때 피난내려간 소설같은 이야기로 듣지 않을까?

날짜를 잡고, 계속 고민만 맴돌았다.

당일 날은 10학번부터 05학번까지 열 두어명이 모였다.

민중가요라는 노래문화가 시작된 시절의 역사와 활동

긴장의 연속이었고 과도하게 비장했던 80년대 학생운동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면에 얽혀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했다.

1시간 40분을 혼자 떠드느라 노래는 몇곡 듣지도 못했고,

또 명색이 노래패인데 같이 노래한곡도 제대로 못부르고 서둘러 뒷풀이로 향했다.

휴우~~ 이 친구들이 어떻게 느꼈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각자 고민하고 서로 함께 나누며 풀어가야겠지 싶었다.

뒷풀이 때도 이런 저런 질문을 계속해온다.

그러다보니 뒷풀이에서도 또 혼자 떠드는 꼴이 되어버렸다.

85학번 후배들과 90.91학번 후배들이

그래도 선배가 나섰다고 지원을 와주었다.

삼삼오오 붙잡고 서로 고민을 나눈 거 같다.

뒷풀이비도 감당해줬다. ㅎㅎ

그런데 담에 한 번 더 이야기를 해달란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노래는 무엇인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란다.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렇게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으랴.

25년, 딱 한 세대를 넘어 공감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 취했을 때 문득 든 생각 하나.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고 엄혹했던 80년대를 지내면서

존재가 이미 대학생, 기득권층인데, 노동자민중의 삶을 어찌 이해하고 함께하냐고,

얼마나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갈등하며 울부짖었던가...

생각해보면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엄청나게 높은지위에 올라가는 줄 알았던거다.

아마도 대학을 나오면 모두 자본가가 되는 거라 여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워했지,

졸업을 하고도 결국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텐데...클클클~~~

그래도 그 시절은 참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니

우리 후배님들도 열정을 품고 치열하게 함께 고민하면서

무엇을 하며 살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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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꽃다지 공연, 그 후...

한반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고

게릴라성 폭우와 눅눅한 날씨가 절정을 달하던 2010년 8월 13일.

오랜만에 꽃다지가 콘서트를 올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콘서트가 오랜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소극장 규모의 극장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올린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의미이다.

그럼 그동안 꽃다지가 공연을 안했냐하면 그건 아니다.

꾸준히 신곡창작 작업을 하고 1년에 한두번 정도의 소규모 공연을 홍대앞 작은 클럽에서 열긴 했었다.

하지만 꽃다지 활동은 점점 더 위축되어 갔고,

공연도 점점 더 소규모화 되었고, 그러다보니 홍보도 수세적으로 밖에 하지 못했다. 

 

전국에서 파업과 투쟁은 여전히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고, 또 장기투쟁도 아주 징하게 길게가는 현실인데도,

파업현장, 노동자 집회현장에서도 노동가요를 부르는 일은 아주 의례적인 일일 뿐

그 자리에서 함께하는 이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화로 선택하고,

스스로 즐기며 부르는 건 드문 일이 되어갔다.

이런 현상들은 꽃다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반적인 노동문화운동의 침체 내지는 정체현상이 2003~4년 이후부터 계속되어왔고,

노동문화를 향유하는 주체들은 과연 있는지,

노동문화운동집단이 구분되어 존재는 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문제제기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문제를 받아 같이 논의할 단위는 있는지...

불확실한 세월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열린 꽃다지 콘서트는 그야말로 나름대로의 대 성황이었다.

모처럼 많은 이들이 함께하며, 홍보도 잘 되었고,

과거에 꽃다지를 아끼던 분들도 많이 모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과거의 명성에 기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꽃다지가

지금의 멤버들의 힘으로 스스로 다시서기에 성공했다고나 할까?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두 시간을 내내 서서 공연을 봐야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고,

하나하나 공들여 만든 공연을 보면서, 그리고 그자리를 가득메운 사람들을 보면서

뭔가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그 사이에 꽃다지가 활동을 게을리 했다거나, 쉬었던 적은 없지만

다른 이들에게 꽃다지가 아직 있냐?는 질문은 많이 받아온 나로서는

꽃다지가 보다 존재감 있게, 자기색을 갖고 활동하길 기대했었다.

이제 꽃다지는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줬고, 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것임을 다짐했다.

꽃다지 민정연 대표에게 용기를 준 네오의 말은

'꽃다지는 존재자체로 아직 충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이유가 있다.' 였다고.

꽃다지 노래들은 나에겐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때론 위로가 되어주었고,

때론 단결의 무기로, 투쟁의 무기로 함께 해왔다. 

 

꽃다지 선배로서가 아니라 꽃다지의 활동에 기대를 거는 친구로서

또, 과거의 노래부터 현재의 노래까지 꽃다지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꽃다지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기를 늘 기대해왔던 바이다.

물론 꽃다지 활동 방식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음악에 있어서도 확실한 자기 정체성과 지향이 부족함에 아쉬워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 꽃다지가 주변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지해주고, 응원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좀 더 치열하면서 한편으로 여유있게,

미래를 향한 계획과 삶에 대한 고민을 음악으로 풀어가길 기대해본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꽃다지 음반 사전 구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주는 일이겠다. 

팬들도 이제는 그냥 공연을 보러오는 팬이 아니라,

꽃사람에도 가입하고, 음반 사전 주문도 해서

노동가요를 지켜가는 주체가 되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예전에 민중가요, 노동가요를 유기농에 비유해서

다품종 소량생산방식이나 주문생산방식으로 가는 것이

우리문화를 지켜가는 거라고 이야기한 분이 있는데,

그말에 동의하던 안하던 간에 음반 사전구매운동을 통해

꽃다지가 좀더 좋은 음악을 생산해내고,

오래오래 더 많은 자리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지기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아~~ 끝은 광고로 마무리

음반 사전 예약은 http://ihopesong.tistory.com/ , http://ihopesong.tistory.com/203

민정연 대표에게 010-4190-6600 / 트위터 @ditsel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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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연초부터 레디앙에 노래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 일단 부담이 먼저 앞섰다.

노래이야기 연재를 기획하면서 알아보다가 박 모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데

사실 마땅히 넘겨줄 다른 누군가가 떠오르질 않는다.

예전에도 인터넷 방송을 한 2년 넘게 진행했는데 그 때도 두주에 한 번 올리는 거였다.

처음에는 쉽게 이것저것 생각나는대로 나름대로 구성을 했는데,

주제를 찾고 그것을 이야기로 엮는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두주에 한 번 올리는 건 그야말로 나에겐 엄청난 노가다였다.

그리곤 2년 반 가량을 허덕거리다 도저히 더이상의 여력이 없어 끝내버렸다.

그 땐 90% 정도는 내 기억속의 것들을 기록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이미 한 번 경험을 하지라 더더욱 자신이 없어 계속 고사하며 여러가지 우려의 말을 붙였다.

근데... 많은 부분을 담당자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고,

뭐 꼭 간격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핑계댈 말이 마땅치 않아 수락을 했다.

그리곤 2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두주는 정말 빨리 돌아왔다.

헐...

근데 문제는 그 이상이었다.

자유롭게 주제를 잡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가

노래운동사를 정리할 때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거나 논리적인 부분으로 접근을 했던 반면

이번에는 노래에 얽힌 이야기와 시대 상황,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편하게 풀다보니

꺼내고 싶지 않은 어지러운 기억들이 혼란스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굳이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도 그 시절의 개인사와 감정들이 꿈틀대며 기어나왔다.

애써 저 밑바닥에 꼭꼭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한놈 머리를 쳐들더니

마치 칡뿌리 엉킨듯 줄줄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다시 꽁꽁 싸매 놓으려 하는데, 머리의 의지와는 달리 감정은 나도 모르게 기억을 붙잡고 있었다.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꿈도 꾸고, 잠을 설치기도 하고,

한동안 그 기억을 붙잡고 자학을 하고 만다.

언젠가는 다 풀어내리라 마음을 먹고, 어떨 때는 연습도 해보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는 풀어내 보기도 했다. 그러곤 어쩌면 좀 가벼워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랬나?

 

어쨌든 이 연재는 연말까지 계속될 거니까

좋든 싫든 이렇게 한 번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이 끝이 어떤 결말이 날지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끄집어 낼 기회를 또 만들기는 쉽지 않기에...

그리고, 또 이미 시작은 되어 버렸기에...

이판 사판... 가는데까지 가보는거다.

힘내자... 힘.... 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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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스님 소신공양 조계사 추모제

 

6월 5일 저녁 조계사에서 열린 문수스님 추모행사

 

<울산 민예총에서 제작해 항공편으로 부쳤다는 걸개그림- 조계사에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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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만에 볼 수 있었다는 하늘 빛~

며칠전 낮에 걸려온 전화...

이렇게 좋은 날 왜 사무실에 앉아있냐? 노트북 들고 강가에 나가라...는...

친절한 조언이나 다들 정신없이...

강의안을 쓰다가 머리가 아파 조금 일찍 퇴근하는데

눈앞에 들어오는 하늘이 너무나 황홀하야... 자전거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강변...

카메라를 안가져와서 핸펀으로 찍었는데

그러다가 해질때까지 약 2시간 가까이 있다가 왔다는... ㅠㅠ

덕분에 원고는 못썼지만

13년만에 오는 맑은 날이라는데, 13년 전엔 언제였는지 난 모르겠고

한국에 살면서 생전 처음 보는 하늘 색...

써비스로 사진 몇장 올립니다.

즐감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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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매화는 봄을 불러오지 않는다

 매화는 봄을 불러오지 않는다

-박지연 씨*를 추모하며


                                                      - 박일환-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매화가 피면 봄이 멀지 않다는 사실

만고불변의 진리라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 이제부터

기대와 소망 따위 품지 않기로 했다


남쪽에서 매화가 한창 북상 중이던

3월의 끄트머리를 밟고

네가 가버린 그날 그 순간부터

꽃 피는 봄날이라는 말, 함부로

읊조리지 않기로 했다


어떤 눈보라가 쳤던 건지

어떤 비바람이 불어왔던 건지

살아생전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너는 가버렸고

속절없이 꽃이 핀들

눈길은 너를 더듬어 하늘로만 향하는데

드디어 봄이야,

고운 네 목소리로 들려주지 않는 한

봄이 어찌 봄이겠는가

꽃이 어찌 꽃이겠는가


네가 없는 지상에선

한 줌 햇살마저 차마 부끄러워


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지더라도

봄바람이 대책 없이 살랑대더라도

꽃 같은 것 예뻐하지 않기로 했다

봄 같은 것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여고 3학년 때부터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던 중 2010년 3월 31일에 만 스물셋의 나이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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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심심아...

예울림 초기 시절인 89년인가, 90년인가...

자주가는 신촌의 술집에서

우리가 공연을 하면 많이 도와주고 같이 노래를 부르던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한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 선배가 있던 한국음악극연구소에 피아노 연주자로 그날 들어온 친구였다.

 

세종대 피아노과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긴 생머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앉아서 술자리 내내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질문을 하면 고개짓으로 끄덕거리거나, 씨익하고 웃기만 했다.

4시간을 내내 같이 앉아 있으면서 말은 한두마디 했을라나?

그런데, 그날 술자리에서 우리가 예울림에 들어오라고 막 꼬셨더니

술자리 끝날 때쯤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배도 약간 황당해 했지만 우리를 너무 좋아하고 친했던 터라 그러라고 했다.

하루에 두 군데 단체에 입단을 하게 된 친구.

하두 말이 없어서 김호철 선배가 붙여준 별명이 '심심이' 였다.

 

피아노 실력은 뭐 두말하면 서러울 정도였고 편곡 실력도 뛰어나 예울림 활동에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술자리도 좋아하여 늘 말없이 술자리에서 홀짝홀짝 들이키면서도

내노라 하는 주당들을 다 쓰러뜨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 말이 없었지만 가끔씩 술취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는데...

 

그 때부터 꽃다지로 이어 계속 10년을 같이 활동을 하곤 어느날 의정부로 들어갔다.

거기서 음악하는 친구들하고 밴드를 만들고 지역 활동도 하고, 또 창작활동도 계속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가끔씩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 말고

서로 연락도 없이 살았고, 그렇게 마주쳐도 활동 공간이 다르다 보니 그저 안부나 물을 뿐

술한잔을 한 번 같이 못했다. 그렇게 잘 살고 있으려니 하고 신경을 못썼었다.

 

그러던 올 해 초 그녀는 몹쓸 병에 걸려 버렸다.루푸스 라는 참 희한하고도 어려운 병에.

한달이 다 지나서야 겨우 소식을 접하고 병원에 찾아가서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완전 뻐밖에 안남았고, 얼굴이고, 손발이고 피부가 모두 거뭇거뭇 죽어 있었다.

열도 심하게 나고, 기억도 왔다갔다하고, 숨도 가쁘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거란다.  이전 병원에 있을 땐 병실도 못찾아 발칵 뒤짚어지기도 했다는데..

그래도 다행히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퇴원을 했다.

지금은 집에서 쉬면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얼마나 아파서 고생을 했는지 집에 오니까 그냥 저절로 몸이 다 나은 것 같단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싶단다.

 

인간 사는 거 뭐 별게 있다고... 서로서로 챙겨주고 나누고 살았어야 하는데...

대단한 일 하는 듯 사람도 못챙기고 정신없이 살아온 게 많이 많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한의사 한테 불어보니 삶의 방식과 환경을 완전히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고

특별한 치료법은 없지만 잘 관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단다.

활동에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한 우리 친구들과 다같이

정말 어디 공기 좋은 곳에 내려가 공동체 마을을 꾸리고 살아야 하는데...

선배들도 친구들도 다 그런 꿈을 꾸곤 있지만 다들 꿈이기만 할라나?

그냥 아직은 이 자리에서 좀 더 사람들을 돌아보고

서로 보듬으며 천천히, 즐겁게 일을 하며 사는 게

하루하루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

몸도 건강하고, 관계도 건강하게~~

 

심심아~~~ 아프지 말고, 잘 이겨내~~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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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담구기 2

이번엔 지난 번의 기억을 되짚으며 다시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반드시 “절인배추”로 김장을 담구고, 그날 술을 먹고, 다음날 천천히 올라오리라...하는...

그런데, 재작년 멤버들과 통화를 하며 김장 준비를 하는데...

참내... 얘네들은 김장을 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갔었냐고 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뭐를 우리가 준비해 가야 하는지 물어보랬더니

그집에 다 있으니 김치통만 들고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 번엔 젓갈도 샀고, 과일은 그집에 없어 다른 친구가 가져왔었는데.. 싶어서

못미더운 마음에 직접 전화를 했다.

그 집에 있는 것은 절인 배추와 무, 그리고 고춧가루... 나머지는 다 사가지고 오란다.

그러면서... "누나... 걔네들 남자잖어." 한다.

더군다나 채칼도 없고, 고무장갑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이런... 쯧쯧...

이런 남자애들을 데리고 내가 무슨 김장을 하겠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김장을 하러 간 것도 기억을 못하는 후배녀석이

자기 어머니께서 이왕가는 거 한 7~80포기 해오라고 했다고... 그걸 다 하겠단다.

누굴 잡을 일있어? 우린 초보라구...

절대 안돼. 그리고 우리끼리야 괜찮지만 그렇게 했다가 다 망치면 두고두고 누굴 욕할라고... 겨우겨우 말려서 40Kg(우린 고작 기껏해야 15Kg 정도 할건데 쒸이~)만 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래도 전체 해야하는 김장이 최소 60Kg은 되는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어쨌든 이것저것 재료와 준비물을 챙겨 출발~~

그런데... 불상사가 또 생겼다. 총 4명이 3집 김장을 하는 건데,

그 중 한 후배가 회사에 일이생겨 밤에나 온다는 거다.

허걱!!! 내가 못살아... 완전 또 밤새겠네...

걱정은 태산이고, 완전 초짜들 두 남자 데리고 별 경험도 없는 내가 그 많은 김장을 헐~~

뭐... 그집에서 좀 알아서 코치해 주겠지...하면서 일단 시작!!!

재료는 농사짓는 후배가 동네에 아주 경험많고, 맛있게 김장 담구기로 유명한 분한테서 전달받은 분량에 따라 준비했다.

특히나 지난 번 오이김치 담굴 때 부추와 쪽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 남편이

손질된 대파, 쪽파를 사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마늘도 농협에서 다 갈아 주었다.

주인마님이 제공한 배까지 양파와 같이 갈아서 넣고는 흐뭇. ^^

 

총괄 지휘를 하며 무채를 썰게하고, 양념을 만들고 배추를 버무려 통에 담으면서

한쪽에서는 돼지고기를 삶기 시작했다.

배추는 속을 너무 많이 넣어 뚱뚱해서 접어지질 않고,

어떤 배추는 소금에 덜 절여져 애들이 밭으로 뛰어갈라하고...

얘네들을 이리저리 갈무리하며 한통한통 채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가져간 10Kg 김치통 5개와 약 7~8Kg되는 김치통 4개가 다 채워졌다.

 

그런데 먹으면서 모두 하는 말... 아유... 너무 맵다.

원래 안매운 고춧가루 다섯근과 매운 청양 고춧가루 1근을 섞기로 했는데, 우릴 위해 남겨두었던 안매운 고춧가루를 동네 형이 급히 어디 보내주기로 한 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가져가는 바람에 다시 다른 분한테 5근을 샀는데, 그게 아마 매운고추였다보다 한다...

헐... 쫌 많이 맵긴하네.

그래도 유기농 배추와 무에다가 갓과 쪽파를 한껏 넣고, 최고의 양념까지 더했으니 어찌 맛이 좋지 않을 수 있으랴... 더군다나...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만든 김장이니 뭐 말할 나위 없었다.

냉장고가 좁아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25Kg 정도의 김치를 누나가 하는 부동산 김치 냉장고에 갖다 넣고, 필요할 때마다 남편이 배달을 해오기로 했다.

올 겨울은 이제 정말 몸도 마음도 든든하게 날 수 있게 되었다.

맛 보고 싶은 분은 연락하시라~~ 단 좀 맵다는 거...

 

무채를 썰을 뒤에 쪽파를 썰면서 생각을 빻고 있다. 생강을 까먹고 같이 갈지 않아서 저렇게 수공업적으로 ㅎㅎㅎ  자기가 마치 선수인 양 하던 후배, 생강 씻어오랬더니 원형그대로 보존하면서 사이사이를 다 파내서는 한 시간에 걸쳐 400그램의 생강을 씻었다. 어차피 찧을건데... 쯧쯧...

쪽파는 어찌나 크게 썰었는지, 애들이 따로 논다. 흐으~~

 

버무리기는 서로 선수란다... 손이 보이지 않게 마구 문질러 대면서 배추들을 혼절 시키고 있다.  아마 이 속도로 갔으면 이틀을 꼬박해도 아마 끝나지 않았으리...

 

먹는 재미를 빼면 어찌 김장을 하자 했을까 싶은... 먼저 막걸리 한잔하고, 잔 건넨뒤 자신은 얼른 배추 싸서 먹고, 또, 먹여주고... 주거니 받거니... 아마 술 먹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면 절대 김장하잔 소린 안했을 거다.

 

주인장 가족. 태어난지 19개월된 소담이... 어찌나 말도 잘하고 귀여운지... 댄스는 정말 압권!! 소담의 재롱 덕에 웃음꽃이 활짝~~~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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