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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2)

2. 오키나와 평화행진 1일차

5月16日(平和行進1日目・東コース) 평화행진 1일차. 동쪽 코스로 헤노꼬에서 킨까지 18 Km (9시부터 17시까지)를 걷기로 되어 있었다.


 6시 30분에 미리 빌린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비가 많이 내려 비옷과 우산등을 준비하고,

또 더늠은 공연을 위해 악기와 의상들을 준비하느라 짐이 하나 가득이었다.

서둘러 차로 출발하고 차내에서 주먹밥과 삼각김밥을 먹고 8시 헤노꼬 도착하였더니

비는 간데 없고 뜨거운 뙤약볕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노꼬 기지 반대 투쟁 농성장으로 들어서니

미찌루라는 젊은 여성 (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이 삼신을 들고 맞아준다.

미찌루는 만월(滿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삼신(일본에서는 샤미센이라고 하는 비슷한 악기를 오키나와에서는 삼신-세개의 선-이라고 함.

일본에서는 고양이 가죽으로 만들고, 오키나와는 뱀가죽으로 만든다고 함))으로

아리랑도 연주를 했고, 또 오키나와 민요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꽃다지 성일이의 기타를 꺼내서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미찌루는 19일에 있을 콘서트 때 긴조시게르씨의 타이고(오키나와 북) 연주를 한다.

 헤노꼬 농성단은 보통 아침에 모터보트를 타고 나가 시위 및 감시를 하는 데

지금은 태풍이 와서 배가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이 맘 때가 우기인데 올해는 우기가 조금 늦게 오고 태풍이 오는 중이라고 한다.

9시가 조금 안되서 바닷가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시작했다.

더늠은 미리 차에서 옷을 갈아있고,

한국에서 주로 하는 것처럼 멀리서부터 악기를 치면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왔다.

주최측은 이런 공연을 처음보기 때문에 공연단을 자꾸만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또 중간에 끊으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흐름이 있는데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고만...

하여간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런 후에 꽃다지가 공연을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고 두곡이었다가 한곡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위처럼 한곡을 같이 불렀는데 방송차량의 음향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마이크가 하나 밖에 없어, 결국은 그냥 모두 기타 반주에 생소리로 불렀다. 

집회에 참여한 대오들은 수도국 노조 조합원들이 많았고,

헤노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참석하셔서 많은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헤노꼬 분들은 농성장을 지켜야 하므로 행진은 하지 않았다.

집회는 주로 연설로만 계속 될 뿐 다른 프로그램은 전혀 없었다.

워낙 그렇게 진행을 해와서인지 사람들은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9시 반이 좀 넘어서 행진을 시작했는데, 진행차선 한 차선을 따라 행진을 하고

자원활동가들인지 단체티를 입은 젊은 이들이 깃발을 들고

차선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질서유지를 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다가 아침에 비가 와서

땡볕에 대응할 준비를 못했기에 우리들은 무척 힘들었다.

다들 조용히 걷는데 한국 행진단은 8박자 구호와 기차박수를 치면서 행진했다.

(주요 구호 : 평화헌법 사수하자. 오키나와에 신기지 건설 반대한다.

미국놈들 물러가라 등등... 김창곤, 박선봉이 주도)

그러나 그도 잠시 모두 지쳐서 묵언 수행을 하듯이 걷기만 했다.


  ** 평화헌법이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자체 반성을 하면서 군대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평화헌법을 제정 (9조)했으나 오키나와는 이 헌법에서 예외로 미군지기가 몰려 있는 곳임. 오키나와에서도 평화헌법을 지키자 라는 의미와 이 조항을 최근 개악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임. 

 

 11시 쯤 어딘가 주차장 같은 공터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바나나와 음료,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햇빛은 쨍쨍한데 약간의 비가 오락가락 한다.

잠시 휴식하고 또 행진. 사람들이 많이 지쳐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계속 행진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든 것 같았다.

서울에서 사전 점검회의를 할 때는 걷진 않아도 되고 차로 이동하면서

중간 중간에 공연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전달 받았었다.

점심 식사 시간. 어딘가의 시청 혹은 구청 이었는데 주차장 바닥에 앉아

주최측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었다.

리는 밥을 먹으면서 오후에 꼭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도 맨날 길바닥에서 사는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뭐 이런 기분들이었다.

하지만 이시카와는 단호했다. 평화행진에 참가하기로 했고,

전체 일정을 같이 해야 하므로 걷는 건 의무라는 것이다. 뭐... 사실 굳이 할 말이 없다.

기양 걸을 수 밖에... 사실은 내가 정말 허리가 많이 아파 도저히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 쉬기가 미안해서 다같이 걷지 말 것을 제안한건데 어쩔 수 없었다. 참을 만큼 참아보기로 했다.

중간 중간에 상점이 나타나면 맥주를 사서 마시면서 걷기도 했고,

잠시 앉아 마시고 출발하기도 했으나 대오가 곧 사라지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참 힘들었다.

식사 후에는 그냥 밋밋하게 걷지 말고 풍물을 치면서 행진을 하기로 했다.

풍물을 치기 시작하면서 대오는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뭐 특별히 공연을 보거나 집회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행진을 하면서 풍물을 계속 치자 조용하던 마을에서(오전에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음)

사람들이 튀어나와 지지하는 손짓과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특히 초등학교를 지날 때에는 아이들이 행진 대오를 보려고 담장을 따라 뛰면서 환호하고

“아리가또~~”(고맙다)라고 외쳤다. 초등학생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럴 걸 왜 조용히 걷기만 하는지 좀 의문이 들었다.

대 시민 홍보도 아니고, 각자의 실천 중에 하나인 걸까?

오전 내내 걸으면서 특히 더 힘들었던 게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 같기도 했다.

땡볕에서 더늠이 한 시간 넘게 공연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장구 가락에 맞추어 박선봉이 민요를 몇 곡 불렀다.

그 이후에도 악기를 차에 실어놓고 계속 행진을 했는데

나는 허리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차에 타고 이동을 한 후 우익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송차 한 대와 검은 찝차 한 대에 천황의 군대라는(菊軍) 표시와

일장기(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기운이 뻗쳐 나가는)를 두르고 시끄럽다는 둥,

북한으로 가라는 둥 계속 방해를 하면서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다른 행진대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우리들 일행은 열받아 욕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힘들다가도 우익들이 출현을 하면 기운이 펄펄 났다나 뭐라나... 이구구..

킨에 도착하여 정리집회를 한 후 5시 정각에 해산을 했고, 모두들 차에 올랐다.

숙소로 돌아와서 식사당번을 정했다.

첫 번째 식사 당번은 나와 정혁, 그리고 선봉형.

준비된 게 없었기 때문에 라면을 끓여 햇반을 몇 개 사서 먹었다.

이후에는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며, 혹은 숙소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이시카와를 집에서 쉬고 푹 자라고 보냈는데 8시도 안되어 신문에 난 기사를 가지고 달려왔다.

어제 인터뷰한 것도 나왔고, 오키나와 타임즈에도 꽃다지 사진이 아주 크게 나왔다.

이시카와하고 술집에 갔다. 이시카와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취해서는 “내가 없었으면 이 행사 못했겠지?” 한다.

맞어... 네가 아니었음 어떻게 여기를 오겠다고 했겠니. 그리고 어떻게 성사가 가능했겠니...

고맙다. 또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계기를 기회로 너도 오키나와에서 너의 자리를 찾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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