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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어릴 때 시골에 산 경험 때문인지 금석문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골집에 가는 차를 갈아타려면 3시간 정도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는데, 너무나 지루해 인근 동산을 누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는 주로 고적 답사나 답사기로 채울 예정입니다.

1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10
    풍류객이었지만 불행했던 왕자
    풀소리
  2. 2006/03/15
    강아(江娥)의 무덤을 찾다(2)
    풀소리
  3. 2005/01/21
    답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풀소리

풍류객이었지만 불행했던 왕자

 월산대군(月山大君)



원당에서 낙타고개를 넘으면 송강마을 가기 전에 왼편으로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사당은 일부러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작다. 이곳이 월산대군을 모신 사당으로 석광사(錫光祠)라고 한다. 이곳은 후손들에게 어떤 일(설사 역모로 몰리더라도)이 있어도 사당에서 모시는 제사는 그치지 말라는 왕의 특명인 이른바 불천위(不遷位)의 장소이다. 석광사는 1786년 정조 임금이 중수(重修)하고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  월산대군을 모신 불천위(不遷位) 사당 석광사(錫光祠)

 

사당 건너편(국도 건너편)으로 월산대군의 무덤이 있고, 국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 야산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대거 묻혀있다. 이곳은 원래 월산대군의 별장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의 별장(別莊)은 집만 덩그러니 있는 요즘 별장과 달리 전답이 딸려 있는 생활자치공간이기도 하였으니 아마 이곳이 월산대군의 식읍(食邑)지가 아닌가 한다.


이곳은 이웃에 서삼릉이 있고, 각종 왕족들의 무덤이 근처에 있으며, 바로 아래 송강 정철의 유적이 있는 등 수없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두를 한꺼번에 돌아보고 싶지만 그러기는 어렵고, 글로 아우르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월산대군과 그 후손만을 다뤄보고자 한다.



1. 어쩔 수없이 정치적이어야 했던 가계(家系)


월산대군은 세조임금의 맏손자이자 적(嫡)손자이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어 작은 아버지인 예종이 세조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예종은 임금에 오른 지 불과 1년 남짓 만에 승하하니 후사가 문제였다. 이때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4세), 월산대군(16세), 자을산군(13세) 등 3명으로 압축되었다. 결국은 적장자도 아니고, 나이도 월산대군보다 작아 가장 왕이 될 가능성이 적은 자을산군이 형인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성종이다.


                           제7대 세조 ┬ 정희왕후 윤씨

           ┌──────────┴─────────────┐

          장남 덕종(의경세자 장) ┬ 인수대비 한씨           차남 제8대 예종

                                         |                                       |

                                         |                                  제안대군

             ┌─────────┴─────────┐

          장남 월산대군 ┬ 승평부부인순천박씨  차남 제9대 성종(자을산군)

       (1454-1488)      (박원종 누나)             |

                                               ┌─────────┴─────┐

                        장남 제10대 연산군            차남 제11대 중종

                            (1476-1506)



성종이 왕이 된 데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는 인수대비 한씨의 야심과 당시 실권자인 한명회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성종의 비가 한명회의 딸(공혜왕후 한씨, 후사 없이 젊어 죽음)이기도 하였으니 권력의 화신이기도 하였던 한명회로서도 내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  왕릉에 못지 않게 당당한 월산대군 묘

 

부자연스럽게 왕이 결정되니 어떻거나 성종도, 월산대군도, 제안대군도 모두 난처한 관계가 되었다. 성종이야 임금이니 난처한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할 것이지만, 월산대군이나 제안대군은 자칫 잘못하다간 역모에 휩쓸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죽음은 물론 처자식들도 무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에 역모로 몰리면 왕족도 죽음뿐만 아니라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제안대군은 실제 바보였는지 너무나 처세가 뛰어나 바보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바보로 보일만큼 세속일과 거리를 두어 일단 역모로부터 벗어난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장록수도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였다고 한다. 근친으로 어쩔 수없이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연산군과 달리 남자구실도 못한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주색도 멀리하였다고 한다.



2. 다정다감하고 풍류를 아는 왕자


월산대군은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 건강한 체질이 아닌데도 효심이 깊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인 인수대비를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간병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병이 도져 숨졌다고 한다.


동생인 성종의 안타까운 돌봄이 있었지만 왕권과는 늘 거리를 뒀다고 한다. 무덤자리도 한양을 등지고 잡도록 하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실제로 낙타고개에 있는 월산대군의 무덤은 북향(北向)이다.) 월산대군은 정치대신 풍류를 즐겨 수없는 시문을 남겼다. 그의 호(號)를 딴 “풍월정집(風月亭集)”이라는 시문집이 사후에 성종에 의해 간행되었고, 이 문집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그곳에서도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월산대군의 시조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돌아오노매라.

 


    ▶  월산대군 신도비의 두전(頭篆)의 月山 이 그림문자처럼 쓰여진 게 이채롭다.



3. 불행의 시작(1)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왕이 못 된 것을 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사후 후손들이 겪는 불행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 사후의 불행을 불행이라고 말하기는 그러하다. 그러나 후대를 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후 불행도 불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재위 1469-1494)도 죽고 문제의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즉위한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알다시피 폐비 윤씨다. 매우 빼어난 외모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눈 밖에 나 끝내 사약을 먹고 죽음을 당한다. 그 때가 연산군이 4살 때였다고 하며, 어린 연산군은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부인 박씨, 박원종의 누나)이 주로 키웠다고 한다. 모성결핍이었다고 전해지는 연산군은 주색에 빠지고 폭군이 된 후에도 큰어머니인 승평부부인을 매우 따랐나보다. 큰어머니를 궁궐에 불러 오래도록 있게 하곤 하였고, 그러다 보니 항간에는 연산군이 큰어머니와 통정(通情)을 하였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  월산대군묘 뒤에 위치한 승평부부인 박씨묘/ 죽음에 얽힌 설화 때문에 지아비 무덤 뒤에 숨어있다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적장자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성종)으로 앉히고, 섭정을 할 만큼 대가 센 인수대비는 결국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죽음으로 증명하라며 자신의 큰며느리인 승평부부인에게 자결을 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승평부부인은 자결을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었을까.

 

연산군에 비교해 승평부부인의 나이가 어떠했는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박원종이 연산군보다 10살이나 많고, 월산대군은 연산군보다 22살이 많은 것으로 나이 차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통상 여자의 나이가 더 많았던 당시 결혼 풍습으로 볼 때 승평부부인은 최소한 연산군보다 22살 이상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나이차나, 어렸을 때 친어머니처럼 길러주었던 사정 등을 봤을 때 연상군이 승평부부인과 통정을 했거나 강간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이 폭군임에 틀림없지만 시문에 정통할 정도의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정부분 상식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악행은 후세 반정세력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것이 요즈음의 통상적인 해석이다.


그럼에도 승평부부인이 자결에 이른 것은 인수대비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연산군에 대항하여 중종반정을 앞장 서 이끈 박원종은 자기 누나의 일을 반정의 명분 중 하나로 삼은 듯 하다. 결국 자기 누나의 자결에 앙심을 품고 반정의 선봉에 섰다는 박원종은 자기 누나의 죽음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4. 불행의 시작(2)


승평부부인은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에 의하면 아들을 낳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월산대군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이가 덕풍(德風)군이다. 덕풍군은 연산군이 쫓겨나는 중종반정이 있기 직전에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의 신도비/ 역모로 몰린 계림군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가  역적의 아버지라 하여 칼로 내리쳤고, 그곳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 사선으로 그어진 자욱에는 붉은 빛이 돈다.


덕풍군의 부인은 현부인(縣夫人) 파평윤씨이다. 현부인이 또한 이 가문의 불행의 씨앗이라면 씨앗이랄 수 있다. 이분은 윤여필의 따님으로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언니이고, 후에 권세를 잡았다가 윤원형에게 밀려 사형을 당한 윤임의 누나이다. 중종 사후에 그의 큰 아들인 인종과 둘째 아들인 명종이 차례로 왕이 되면서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의 세력이 크게 대립되어 권력투쟁은 끝내 피 튀기는 사화(士禍)로 발전하니 먼저 윤임 일족이 윤원형과 그의 누나 문정왕후의 세력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한다. 이에 덕풍군의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윤여필(尹汝弼)                   윤지임(尹之任)

                         |                                 |

              ┌─────┴─────┐                 ┌─┴──┐

         덕풍군부인(현부인)  윤임  장경왕후 - 중종 - 문정왕후   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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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    명종

                    (인종 : 재위 1544. 11 - 1545. 7)


덕풍군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째가 파림군이고, 둘째가 계림군(송강 정철 누님의 남편. 정철의 큰 누님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다.), 셋째가 전성부정(全城副正)이다.


인종이 조선왕조 최단명인 왕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니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일거에 몰아낼 궁리를 하는데, 윤임이 인종이 승하하자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역모로 고변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 을사사화이다. 계림군은 성종의 셋째 아들(연산군의 서 동생)인 계성군의 양자이기도 하였으니 유력한 왕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중종의 정통 왕자(대군)인 명종(경원대군) 있으므로 윤임 일파가 계림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을사사화로 전성부정이 국문을 당하다 죽고, 지레 겁먹고 도망갔던 계림군은 한양으로 잡혀와 참수형을 당하고 머리는 군기시(軍器寺) 앞에 효수(梟首)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다섯 아들 중 13세가 넘는 위로 세 아들이 함께 사형을 당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덕풍군의 큰아들인 파림군은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죽어 화를 면했다. 전성부정의 아들(靈川守 감)은 아버지가 죽을 때 겨우 4살이라 화를 면했다. 그러나 집안의 충격 때문인지 19세 어린 나이에 죽었고, 그의 초라한 무덤을 볼 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산이 몰수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전성부정의 아들 영천수 감의 묘/ 대군의 증손 무덤치고는 서민의 무덤처럼 매우 작다. 

 

계림군과 계림군의 아들들, 전성부정 등은 32년이 지난 선조 10년에 율곡 이이선생의 41회에 걸친 간곡한 신원(伸寃) 상소 끝에 복권된다.



5. 기타 불행


월산대군의 묘는 대군이 무덤으로는 가장 장엄하다고 한다. 이는 동생인 성종의 애틋한 형제애의 표현이기도 했겠지만, 조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재정적으로 풍족한 성종시대의 사회적 반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산군과 통정 혐의를 받았던 승평부부인 박씨의 무덤이 월산대군의 뒤에 있는 것을 두고 마치 부끄러워 뒤에 숨어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있지만, 문학적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웃에 있는 월산대군 아들인 덕풍군의 무덤도 부인의 무덤이 뒤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집안의 불행과 관계가 있기도 한 한명회의 무덤 또한 부인 무덤이 뒤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일종의 당시 무덤 양식 또는 풍수의 영향이랄 수 있을 것이다.

 


      ▶  덕풍군과 그의 부인 묘/ 이곳도 부인 묘가  뒤에 자리잡고 있다.

 

월산대군의 묘에는 석물들이 당당하다. 좋은 돌로 만든 장엄한 문인석은 우뚝 선 콧날이 여전히 생생할 정도이다. 행적을 담은 신도비(神道碑) 또한 한눈에 보아도 매우 공들여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신도비 위의 전서(篆書)는 그림문자에 가까운 파격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도비를 지은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간신으로 분류돼 왕조가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않았던 임사홍(任士泓)이다. 임사홍은 이 비문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두 아들이 공주, 옹주의 부마가 될 정도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지만 어쩔 것인가. 결국 간신이 지은 비문을 간직해야만 하는 것을.

 

         ▶  월산대군의 신도비/ 당당한 모습과 달리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으로 불리우는 임사홍이 지은 비문을 지니고 있다. 밑으로는 새로 난 순환고속도로다.  멀리 낙타고개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은 월산대군 묘 밑으로 순환고속도로가 새로이 나 무덤으로 오르는 길조차 없는 실정이다.



6. 불행 중 다행


‘불행 중 다행’, 글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월산대군의 장손들은 왕실 후손에 걸맞게 큰 재산은 유지한 듯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 일행이 한양에 돌아왔을 때 왕실의 궁궐이라는 궁궐은 모두 불타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궁궐로 삼으니 현재 덕수궁의 시작이다. 물론 덕수궁은 현재보다 훨씬 넓은 영역으로 월산대군의 집을 중심으로 삼았다고 하며, 당시 이 저택의 소유자는 월산대군의 증손이며 파림군의 아들인 양천도정(陽川都正) 성(誠)이다.

 

          ▶  양천도정 성의 묘비/ 월산대군의 맏 증손이며, 파림군의 아들/ 파림군 묘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다. 

 

온갖 풍상을 거쳤어도 증손자 대까지 한양에 대저택을 소유했다는 것은 여전히 큰 재력을 소유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7. 기타

 

 

 ▶  대군의 막내손자 전성부정의 묘/ 을사사화로 죽은 이후 선조 10년(1577년)에 복권되니 신도비와 장명등, 그리고 제법 당당한 묘는 복권된 이후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무덤에 다듬은 돌로 4면을 만든 무덤 양식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형태이다. 선조 대에 조성된 무덤으로는 매우 희귀하다.(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밑에서 싸운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의 아버지 묘소의 경우 정도)





             ▶  위의 전성부성의 문인석과 아래 파림군의 문인석이 한 사람의 작품처럼 비슷하다. 가장 큰 특징은 수염이 있다는 것! /

 

▶ 덕풍군 묘소 위 산줄기의 바위/ 풍수에서 무덤을 향한 날카로운 바위를 피한다고 하는데, 여기도 바위를 뽑아 눕혀놓은 게 풍수적인 비보인 것 같다. 

 

    ▶  덕풍군 묘 위로 난 산책길/ 한달 전이라 아직 황량하지만 제법 운치있다.


 

 

 

     ▶  계림군 후손(증손)의 비문/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이 짓고 쓴 비문이다. 글씨 자체로는 잘 썼겠지만, 왠지 과장되고, 정리가 안 된 느낌이 든다.

 

남구만은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조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소론의 영수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인물 평은 매우 상반되어 한 쪽에서는 옹졸한 쫌팽이로, 또 한 쪽에선 대단한 명신으로 평한다고 한다.

 

위 시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에 남구만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위 비문을 본 내 느낌은 별로 좋지 않다. 당시 일부 사람들이 남구만을 가리켜 "70세에 얻은 서자에게 전답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및 종실의 비문을 가리지 않고 짔는다"고 했는데, 이 비문과는 어떤 관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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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江娥)의 무덤을 찾다

 1.

고양시에 이사 오면서 지역 답사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제대로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고양시에 이사 온지 벌써 7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일요일(3월 12일) 이웃으로 이사 온 후배 덕분에 답사를 떠났다. 후배는 대구지역에서부터 답사조직을 했었다고 한다. 갑자기 잡힌 답사라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강아(江娥)의 무덤을 가자. 강아는 송강 정철을 사모했던 기생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강아 무덤 근처에는 송강문학관이 있고, 그곳에는 고양시 초대 문화원장을 지낸 이은만씨가 살고 있다. 정치적인 지향과 관계없이 그분을 만나면 근처의 송강 유적을 자세히 안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송강문학관에 들렸더니 이은만씨는 출타중이다. 문학관 뒤에 있는 강아의 무덤으로 올랐다. 상석이 있는 것 말고는 서민의 무덤처럼 아담하다. 그래도 시인이 무덤이라서 그랬는지 누군가 꽃을 꽂아 놓았다. 비록 조악한 조화지만 말이다.

 


  송강 정철의 연인이었던 강아의 무덤

 


  강아 무덤 옆에 있는 송강고개. 송강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2.

강아. 그가 송강과 어떤 사랑을 나눴고, 아름다운 시를 썼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떻게 보면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반항하는 나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송강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자신의 파당을 위해 반대파를 원한이 맺히도록 많이 죽였고, 후의 노론의 앞길을 닦은 권신(權臣)이었기 때문이다.


송강의 무덤도 여기 어디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종(숙종의 아들, 영조의 형)대에 송강을 사모한 송시열이 충북 진천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곳은 대단한 명당이었기 때문에 송강의 후손들이 영달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믿거나 말거나다. 어찌됐던 송강과 송시열은 서로 ‘통’했나 보다.


강아의 무덤 옆으로 커다란 문인석이 서 있는 무덤이 있다. 사실 내가 무덤 답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첫째, 비문을 보고, 둘째, 무덤가에 있는 돌조각(석물)인 비석의 모양, 문인석, 무인석, 석등 등을 보고, 셋째, 무덤의 형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수가 아닌 인문지리적으로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커다란 문인석을 갖춘 무덤의 주인은 귀인(貴人) 정씨(鄭氏)이다. 비석 뒷면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누굴까? 아마 인종의 귀인이었던 송강 정철의 큰누나일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설명하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한다.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불과 며칠 만에 죽어서 문정왕후 윤씨 손에 자란다. 문정왕후도 아들을 낳았으니 후에 명종이 된 이가 그이다.

 

인종이 임금자리 오른지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여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차례로 권력을 잡으니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그들이다. 권력은 공유할 수 없다고 했던가. 멀지 않은 친척 관계이기도 한 윤임과 윤원형(문정왕후)은 피 튀기는 권력투쟁을 한다. 문정왕후는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악독한 여인의 표상이니,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인 송강 가문과 이미 피할 수 없는 악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귀인 정씨 무덤. 왕의 후궁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편이다.

 

어찌됐든 송강 가문은 송강의 둘째 누나의 남편인 계림군(桂林君) 유(瑠)(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가 역모로 몰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로부터 죽움을 당하면서 큰형이 곤장을 맞아 귀양길에서 죽고, 아버지가 유배되는 등 말 그대로 풍비박산의 위기에 몰린다.


이런 송강 가문의 위기는 귀인 정씨 무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첫째, 왕실의 종산에 묻히지 못하고 친정 선산에 묻힌 점이 그렇고, 둘째, 귀인의 무덤 치고는 초라할(?) 정도로 적고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도 한데, 비석을 세우는 밑돌은 있는데, 밑돌은 비석을 얹지 못하고, 미완성의 자세로 서있다. 아마 귀인 정씨가 죽었을 때 아무리 그를 미워하는 문정왕후일지라도 기본적인 예장(禮裝) 하사품인 석물은 내렸지만, 비문을 받고, 받은 비문을 가지고 비석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들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흐지부지 된 듯이 보인다.


귀인 정씨 무덤 아래에는 송강의 형의 무덤이 있다.


4.

송강문학관 이은만씨가 없으니 계획에 차질이 왔다. 어디로 갈까? 음, 그래. 전에 찾다 못 찾은 「연산군 금표비」나 보자. 금표비 관산동 위에 있는 대자동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도상 위치가 지도마다, 홈페이지마다 틀렸다. 다만 왕족인 ○○君 무덤가에 있다고 했다. 에라 모르겠다. 근처의 큰 무덤을 다 뒤지다보면 나오겠지.


대여섯군데를 들렸는데도 없다. 오기가 생겼다. 끝까지 뒤지려고 하는데, 트럭을 몰고 나가는 분이 친절하게 장소를 알려주고 안내해 주었다. 금표비는 무덤가가 아닌 길옆으로 옮겨져 있다. 허탈하다.

 

연산군 금표비/ 지금은 길가에 초라하게 서있다.

 

연산군 금표비에는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이라고 써 있다. 뜻은 침입자는 기훼제서율에 의해 처참한다는 것이다. 기훼제서율은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법으로 연산군시대 한글로 연산군을 비난하는 투서와 벽서가 있어 그 범인을 찾고, 벽서를 막기 위해 한글 사용을 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3족을 멸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벌이다. 어찌됐던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친놈이 틀림없다.


말이 나왔으니 조금 사족을 붙이자. 광해군에 이어 요즘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에 대한 다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사실 금표비는 연산군이 처음 세운 게 아니다. 왕실의 사냥터를 위해 세운 것도 명나라 등 중국에는 일반적인 예이다. 연산군 때까지만 하여도 왕의 권세가 살아 있을 때이니 문제는 있더라도 그 자체로 그를 폭군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고, 반정의 주역들도 그놈이 그놈이랄까 하는 반감이...

 



이성군(성종 아들)의 무덤 앞에 있는 석등/ 기하학적 무늬가 특이하다.

 

5. 그외 석물들의 특징1 (문인석)

 

옥산군(1490(성종21) 죽음) 무덤의 문인석/ 관모가 요즘 사극 신돈에 나오는 것처럼 각이져있다.

 


이성군(1552(명종 7) 죽음) 묘의 문인석/ 옥산군보다 약 60년 후에 만든 석물의  관모는 금관조복의 금관과 유사하게 바뀐다. 임진왜란 이후인 숙종대 이후에는 금관이 일반화되는데, 금관양식으로는 가장 초기형태에 속하는 것 같다.

 

6. 그외 석물들의 특징 2 : 비석

 


옥산군의 비석/ 투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투구형 비석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하던 양식인데, 왕조 성립 100년이 지난 성종 때에도 이런 비석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형식을 유지한 마지막 정도가 아닐까 한다.



투구형 비석의 사대부 비석/ 위 옥산군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비석으로 같은 사람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경주김씨의 무덤으로 고종 때 재상을 지낸 김홍집(인근에 무덤이 있음)이 이 집안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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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답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나는 여러 자리에서 고양시 지역의 답사를 조직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이 많다.
고양시 지역에서 답사를 한다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서민들의 삶을 먼저 보자면 당연히 초가집이지.
아니야 역사성을 살린다면 금정굴이나 장준하 선생 유적이지.
사람들 눈길을 잡으려면 장희빈 관련 유적은 어떤가.
속절없이 고민만 하면서 답사를 조직하겠다는 나의 발언은 빈말이 되어가고 있다.

에이 생각난 김에 혼자라도 하는 마음에서 찾은 곳이 복재선생 기준(奇遵)의 묘소이다. 복재선생은 조광조, 김식, 김정 선생 등과 함께 기묘명현의 대표 인물이다.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나간 기묘사화는 유교에 바탕한 이상주의적 개혁이 실패한 결과물이었지만, 그 정신은 유교적 대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사육신과 함께 조선 600년 동안 유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조선왕조는 이들의 정신을 우려먹으면서 600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준의 묘소는 원당역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원당역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한옥의 큰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행주 기씨 재실이다. 재실을 이정표 삼아 길을 잡으면, 입구에 행주 기씨 도선산이라는 비석이 있고, 재실 앞으로는 각종 신도비가 줄비하다.
신도비를 지나면 연지(蓮池)가 나오는데, 연지 옆에는 북송의 대 유학자 주돈이 렴계선생이 쓴 애련설(愛蓮說)을 새긴 새김돌이 있다.
새겨져 있는 애련설은 이러하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하니 晉陶淵明은 獨愛菊하고 自李唐來로 世人이 甚愛牧丹호되 予獨愛漣之出於 泥而不染하고 濯淸漣而不妖하고 中通外直不蔓不枝하고 香遠益淸하야 亭亭淨植하니 可遠觀而不可褻翫焉이라.
予謂菊은 花之隱逸者也오 牧丹은 花之富貴者也오 蓮은 花之君子也니 噫라 菊之愛는 陶後에 鮮有聞이요 蓮之愛는 同予者 何人고 牧丹之愛는 宜乎衆矣로다

국화는 은자의 꽃이고, 연꽃은 군자의 꽃이요, 모란은 부귀의 꽃인데 사람들은 모란만 좋아하는 구나 하는 내용으로, 이를 인용하는 것은 군자의 삶을 살겠다는 일종의 결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 나란히 있는 내용을 보면 명당에는 샘이 솟는데 이곳에도 역시 물이 솟으니 명당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투의 문구가 보인다. 명당에 집착하는 것을 볼 때 그 속내는 주렴계 선생의 연꽃보다 모란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상은 현실 속에서 썩어가는 것인가. 실제로 연지에는 연꽃은 없고, 헝클어진 창포만이 버려진 듯 자라고 있을 뿐이다.

재실 뒤로는 복재선생의 증조부인 기건(奇虔)의 묘소이다. 이분은 대사헌에 공조판서, 판중추원사 등 고위 관직을 지냈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던 분으로 실질적인 행주 기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실 왼편으로 삼송방향으로 난 3호선 전철이 있고, 전철 밑으로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가다 전철을 끼고 왼편으로 오르면 복재선생의 손자이며, 영의정 기자헌의 부친인 기응세의 무덤이 나온다.
기응세의 무덤에는 남다르게 비석이 2개 있는데, 나중에 아들이 영달하여 벼슬이 추증되어 하나 더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석들의 비문이 범상치 않다. 처음 건립한 비석의 비문은 한석봉이 쓴 것이고, 나중 건립된 것은 중국의 명필 주지번이 썼으니 당대 최고 명필들의 글씨가 한 무덤에 나란히 있는 것이다.

기응세 무덤 바로 위로는 복재선생의 아들 한성부 판윤을 지낸 기대항의 무덤이다. 이곳에서 곧장 올라가면 배드민턴 연습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능선길을 20여m 가면 왼편에 복재선생의 무덤이 나온다.
복재선생의 무덤은 원래 지도읍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언제 이곳으로 이장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경한 모습의 석물들로 볼 때 무덤은 최근에 손을 본듯한데 왕릉을 버금할 정도의 큰 봉분을 하고 있다.
애초에 세워진 비석(기자헌이 좌의정일 때 세워졌음)은 대좌만 있고, 1962년에 다시 세워진 비석과 이 비문을 한글로 번역한 1990년에 세워진 비석이 또 하나 있다.
빽빽이 세워진 석물들은 우리가 흔히 돌공장에서 보는 조악한 수준의 것들로 동자석, 양, 사자석 각 2기, 촛대석, 문무인석이 무덤의 위엄을 살리기는커녕 조잡한 민화풍의 그림들로 가득찬 시골 산신당처럼 기괴한 분위기만 풍기고 있다. (반면 처음 세워진 비신을 잃은 대좌는 대리석으로 꽃잎이 단아하게 새겨진 것이 기품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무덤은 시신을 묻은 곳을 표시하는 단순한 의미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후손들의 대외적인 신분과시이며, 동시에 그 신분과 기득권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이다. 그러니 무덤에 집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신을 살리기보다 치장에만 급급한 복재선생의 무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욕심이 어떻게 정의를 욕보이는지를 보는 것만 같아 민망하다. 자기의 직계 조상인데도 말이다. 목숨을 내 논 헌신이 기득권이 되었을 때, 절제 못하는 기득권은 결국 추한 모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준은 21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28세에 기묘사화로 유배되고, 29세에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맥을 이은 사람이다. 조광조의 개혁 당시 개혁 주체들이 토지의 소유 한계를 정하는 한전법을 주장한 반면 농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보다 혁신적인 균전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기묘사화 당시 국문을 당하며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조광조나 김정, 김식과 함께 한 것은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 줄 모르고 상종했을 뿐이라며 고문관의 논리를 부정하며 비껴가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을 근거로 복재선생의 인격을 깎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진 고문을 의연하게 버틸 자가 몇이며, 고문에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고 변절했다 할 것이며, 의연하게 견뎠다고 모든 정당성을 한 몸에 받을 것인가. 목숨을 걸고 버틴 박종철 열사가 있지만, 온갖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아 희대의 고문기술자 이근안 마저 존경하였다는 이태복씨의 이후 행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많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복재선생의 명분 있는 개혁과 죽음은 행주 기씨 집안에도 대단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음이 틀림 없는 것 같다. 그의 조카 기대승은 퇴계선생과의 4단 7정 논쟁으로 유명한 대 유학자가 되었고, 증손자 기자헌은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광해군과 당시 집권 대북파가 전현직 고위관료와 종친, 왕의 사위들 등 1,100여 명을 모아 놓고 폐모를 위한 연석회의를 하였다. 기자헌은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하였지만 그 많은 신료들 중 홀로 반대하였고, 그 일로 관직에서 쫓겨난다. 명분이란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어 되살아나는 것 아닐까.

ps - 답사와 관련 좋은 아이디어 있으신 분 연락 주시길.

 

<200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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