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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경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 등록일
    2004/10/13 20:52
  • 수정일
    2004/10/13 20:52

* 이 글은 알엠님의 [엄마의 비밀]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장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빚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쳐박혀

그 한 겨우 내 술놀음 허송 속에

그러나 아아 그러나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쳤을 때

우리는 잊지 않으리라 비겁한 자의

저 비겁한 몸짓을 거짓된 웃음을.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어깨를 끼고 섰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섰다.

저것이 비록 주음의 종소리일지라도.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고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이제 저 노랫소리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깨를 끼고 섰다.

 

                                                                신경림 시전집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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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을 향하여....

  • 등록일
    2004/10/13 12:59
  • 수정일
    2004/10/13 12:59

이번주 일거리가 없어 용역회사에서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저번주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가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들 겨울나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히 용역사무실로 나오지만 바램과는 다르게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군요. 오늘은 2시간 일거리가 있어 2시간 동안 일을 하고 왔습니다. 몇일간의 담배값과 차비를 벌었습니다. 그나마 짧은 시간이라도 일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함을 느낍니다.

 

오늘 아침 용역사무실에서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군요.

일이 아니되면 안되느데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나보다 낮은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가라고, 욕심을 버리면 이 생활도 적응이 된다고 한마디를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늘 나보다 높은 곳 더 높은 곳을 바라며 분에 넘치는 욕심과 허영심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 그분은 고정된 시선으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참 보기 좋더군요. 이 생활을 하면서 내가 너무 분에 넘친 생활을 하였음을 하루하루 깨닫고 있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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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블로 네루다] 시

  • 등록일
    2004/10/12 11:57
  • 수정일
    2004/10/12 11:57
그러니까 그 나이였죠..... 시가 나를
찾으러 왔더군요. 모르죠, 어디서 나왔는지
겨울에선지, 강에서 나왔는지.
언제 어떻게 돼서 왔는지 모릅니다.
아니예요,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말소리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었습니다.
어떻든 어느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요
밤의 가지 위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들 틈에서
격렬한 불더미 속에서 나를 불렀죠.
아니면 홀로 돌아오는 길목에
얼굴도 없이 거기 섰다가
나를 만지든가 했어요.


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랐어요. 내 입은
뭐 한 마디 이름조차
대질 못하다군요.
내 눈은 멀고
무언가 나의 영혼속에서 뛰노는 게 있었어요.
열기 같은 거라든가 아니면 잃어버린 날개 같은 거.
그리고 나는 자꾸 혼자 되어가는 걸 느꼈어요.
혼자
그 불탄 자국을
해석해 가며
그래서 아주 애매하게 나마 첫 줄을 썼죠.
형체도 없이 애매한, 순전히
바보짓이었죠,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의
순후한 지식.
그리고는 문득
하늘이
허물어져 내리는 걸 봤어요.
하늘이 열리고
위성들과
고동치는 논밭
구멍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으로
난도질을 당한 그림자
나를 에워싸는 밤과 우주를 봤어요.

 

그리고 나, 이 미약한 존재는
그 커다란 공허에 취해
신비의 모습 그대로
별이 총총한 허공에 도취되어
나 자신 어느 심연의
순수한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을 느꼈지요.
별들과 함께 나는 굴러떨어졌죠.
내 심장이 바람 속에 한가닥 풀리기 시작했죠.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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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 소외, 여가

  • 등록일
    2004/10/12 10:06
  • 수정일
    2004/10/12 10:06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본질, 곧 자신의 생활표현의 대상으로 삼거나 인간이 오직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에 직면해서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인간적 자연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적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이 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노동은 대상화라는 형태를 취한다.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대상으로부터  자연적  형태를  제거하여 그것을 인간적 욕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적  형태를  각인받음으로써  대상은 자립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것에서  인간세계로의  통합을  통해 산출된 것으로 전화한다.



자연적 대상이 인간적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된 것이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대상이 또한 인간의 목표, 상상, 의지를 구현한 것이 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대상화는 그에 선행하는 의식상의 관념적 대상화를 전제한다. 이러한 관념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은 이미 자연적 대상들을 그것들의 객관적 척도에 대한  지식이라는  형태로  전유하고  있다.  한편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동시에 인간적 욕구, 즉  인간화된  자연적  욕구와  고유하게 인간적인 욕구가 산출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식욕이라는 자연적 욕구는 자연 속에 주어져 있는 형태 그대로의 음식이 아닌, 조리된 음식에 대한 식욕이 되며 미적 욕구 등 생활의 직접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문화적 욕구가 탄생한다.

 

노동은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대상 사이의 거리를 확립함으로써 욕구를 인간화한다. 오로지 자연적 존재이기만 한 동물은 즉각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롤 때만 생산하며 오직 그때만 자유롭게 생산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그 자체로 이미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의 도야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발전을 통해 가속화된다. 대상적으로 전개된 인간의 본질의 풍부성을 통해 비로소 풍부한 주관적인 인간적 감성, 음악적인 귀, 형식미를 보는 눈이 생성된다. 왜냐하면 오감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각들, 실천적인 감각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적 감각들 곧 감각들의 인간성은 그 대상의 현존재 곧 인간화된 자연을통하여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사 전체는 인간의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곧 인간을 위한 자연의 생성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간은 대상화로서의 노동을 통해 동물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성을 확립하고 확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노동의 질의 문제로 귀착된다. 인간이 노동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그 삶은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적 본질의 대상화라는 형태를 박탈함으로써 임노동자를 자신의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시킨다. 임노동자는 우선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타인, 즉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그 생산물의 축적은 자본의 축적으로 실현되어 그에게 점점 더 큰 적대적 힘으로 맞서 온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노동과정 자체로부터의 소외와 상응한다.
노동과정의 조직과 관련된 일체의 계획과  결정, 즉 관념적 대상화의 계기는 자신이 그 사용권을 구매 한 노동력이 인간의 몸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그 결과 임노동자는 기계의 명령에 순응하여 그 전체적 맥락을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적 동작만을 되플이하는 동물적 존재로 전락한다.

 

소외된 노동이 임노동자으로부터만 인간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소외된 노동을 낳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임노동자와  자본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사적인 이익과 무의식적인 자연적 필요성에 의해서만 타인에게  의존하는
독립적 인간들로 구성하며 따라서 인간이 인간의 기본목적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공동체적 향유를 저지한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각 개인의 활동은 그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주로 상품의 양적 증가로 표현되는 욕구의 이러한 양적 증가는 개개의 인간에게 소원하고 적대적인 힘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팽창에 봉사하는 수단인 한 결코 진정한 욕구의 풍부함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그러한  욕구의  풍부함마져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만 해당될 뿐 각 개인들은 자신의 계급 및 분업상의 지위에 따라 오로지 그 욕구들을 부분적으로만 자기화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진정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과 개인들 사이의 진정한 상호인정으로서의 공동체를 부정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행복한 삶이라 할 만한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삶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삶의 핵심에서 소외된 그들은 여가라는 그 가장자리에서 행복의 가상을 찾는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는  그  행복의 가상을  제공하는데 적극적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악무한적인 상품 소비와 그에  상응하는  온갖 쾌락에의 탐닉에서  그 행복을 발견한다. 그 숭고한 크기로 완성된 상품의 천국 속에서 넋을 빼앗긴채 잠시도 쉬지 않고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실천한다. 그들의 유일하게 진정한  자기표현은  소비활동이며  그들이  유일하게 그  성원으로  인정받는 공동체는 상품공동체이다. 다른 한편 그들은  삶의  모순으로부터의 도피나 그 모순의 가상적 해결에 탐닉한다. 소비 자 본주의에 들어서 그 수단은 지배적으로 문화상품, 즉 대중문화가 된다. 아주 가끔 이 도피나 가상적 해결은 오히려 바로 그 도피나 가상적 해결을 요구하는 현실적 삶 자체의 모순으로 의식의 초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계기를 지니고 있지만 지루하고 단조로운 노동에 의해 초래된 활력의 지나친 소모는 좀처럼 그들에게 그 초점을 유지할 만한 집중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가 시간의 질은 결코 노동 시간의 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출현한,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추구에 비우호적인 환경 속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깊숙히 편입해 들어가고  있으며  그  전진운동은  조직화된 노동의 행보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가 현실적 삶의 불행을 완전히 봉합한 것으로 보이는 선진국형의 소비 자본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 소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저  대상화로서의  노동과는  완전히  단절된 뿔뿔히 흩어진 상품소비자들이 된 자신들에, 상품이 될 수 있는  무수한  것들의 그 상품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실현해 주는 도구들에 불과한 자신들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임노동자와 자본가의 차이는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질과 양에 있어서의 차이로 환원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어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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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벗들과 함께하는 공간

  • 등록일
    2004/10/11 17:02
  • 수정일
    2004/10/11 17:02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술]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이성우위원장님 힘내라는 차원에서 어눌하지만 개인 글을 쓰기위해 트랙백 걸었습니다.

 

저는 술자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힘들때나 즐거울때나 괴로울때 저는 술자리를 갖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속에 있는 내말을 다 찌껄입니다. 그러면 속이 확 후련해지죠.

그리고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아프면 전 벗들을 불러냅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벗들에게 내 말만 지껄입니다. 그러면 내 가슴속 뭍어둔 아픔은 다는 아니지만 서서히 사라집니다.



나를 믿어주는 벗들과의 자리가 있기에 저는 술을 좋아합니다.

저는 술맛을 모릅니다. 술 먹은 후 쓰린 배나 아픈 머리를 부여잡는 고통을 감내하여야 합니다. 그래도 전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 나를 보여줄 수있는 자리 고민과 아픔을 지껄일 수 있는 자리인 술자리를 갖거나 즐깁니다.

 

나를 보여줄 수 있고 벗을 알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는 모습이 다 똑같은 사람들... 고민꺼리 또한 거의 동일하지는 하지요. 사고나 고민의 자락은 마디마디 맥을 닿고 있습니다.

 

해결점은 제시해주지 않습니다.

저를 지켜보고 같이 마음 아파해줄 친구 그들이 있기에 저는 나만의 허영심인 고민과 사고에 빠질때 저를 추스리곤 합니다. 그 벗들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내 아픔을 나눠갖기 못함에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저를 지켜보며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너를 믿는다고....

 

한마디 말이 인생에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부족하기에 해결점 없이 문제들을 산더미 처럼 차곡차곡 올려 놓는 나에게.... 한마디의 위로는 희망을 줍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팡질팡 문제 때문에 사방을 헤매이지만 그때마다 저를 믿고 옆에서 묵묵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때 제 자신이 행복함을 느낍니다.

 

숙제 평생 지고 가야할 문제가 아닐까요.

내가 고민하는 문제 그리고 해결하여 할 과제들.... 아마 인생의 긴 여정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큰 성과겠으나 현실은 그렇질 못하다는 것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감성에 젖거나 타성에 찌들어 자신의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저는 긴 인생 여정에서 내가 추구하는 삶을 올곧게 가지는 못하겠지만 그 지향만 분명히 날을 세운다면 참 뜻한 일에 최선을 다했다 생각합니다.

 

문제는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어울림이 낳는 조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기니 문제가 있다니 뭐 이렇다니 저렇다니 하는 말에서 자신의 입장과 각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크나큰 문제입니다. 입장과 각을 세우지 못함은 휩쓸린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요구할때나 결정을 할때 많은 고민을 하겠지만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살아오면서 원칙이니 입장이니 하는 말들을 무수히 입을 통해 저는 지껄였습니다. 그러나 말에 대한 실천을 해왔냐 물어보면 삶에서 그렇지 못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늘 운동을 입문하였을때 초심을 잃지 않기위해 바둥바둥하면서 지금까지 길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주변 벗하는 사람들의 큰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벗들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 하나 내 원칙과 입장에 대해서 만큼은 벗하는 이들의 도움없이 스스로 올바르다면 고집이라면 고집 아집이라면 아집을 지켜가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문제 쌓아놓지만 말구 풀어놓으세요. 조금 있으면 연말입니다. 친구들에게 선물로 고민과 근심을 뜸뿍 퍼담아 주세요. 단 벗에게 버려도 좋다는 전제조건에서요.

만약 바겐세일하면 저도 작은 근심상자 하나 사가겠습니다.

 

저는 문제가 안풀리고 마음이 흘들리면 술을 실컷 먹고 펑펑 울어본답니다. 그러면 마음속 쌓싸함이 없어져요.(남자는 태어나서 3번운다고 누가 말하더라구요. 저는 눈물 흘린 감성이 없는 사람이 더 삭막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이성과 감성을 선택하라면 전 감성쪽을 택할 것입니다. 갈팡질팡 마음이 가는데로 흘러가지만 감성에서 내 나약함 모습을 발견하면서 다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거든요, 전 불완전한 존재이기때문에....)

 

이성우 위원장님 힘내라는 차원에서 트랙백 하였습니다.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해 도움은 되지 못하나 마음만이라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꼭 힘내세요, 저도 힘내고 있잖아요.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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