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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2/22
    "굶어죽은 아이, 건설일용직 현실 고발"
    간장 오타맨...
  2. 2004/12/21
    당신의 프로그램이 당신을 몰아낼 수 있다!
    간장 오타맨...
  3. 2004/12/21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간장 오타맨...
  4. 2004/12/21
    ‘혼자만 잘살믄‥’ 저자 전우익선생 별세(2)
    간장 오타맨...
  5. 2004/12/20
    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간장 오타맨...

"굶어죽은 아이, 건설일용직 현실 고발"

  • 등록일
    2004/12/22 21:33
  • 수정일
    2004/12/22 21:33
대구건설노조 "고용보험 가입 여전히 어려운 상태 드러내" 지난 20일에 있었던 5살 어린이의 아사 사건에 대해 대구지역건설노조(위원장 조기현)는 "이번 사건은 건설일용직 노동자 실업사태가 사회적인 불안과 절망으로 내몰려 있는 위기 상황임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조는 "아이의 부모는 건설일용직에 종사하다가 실업상태에 있었는데 건설일용노동자들에게는 고용보험이 사실상 적용되지 않고 있어 실업 상태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밝혔다. 노조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정부가 고용보험을 일용직 노동자들에게도 전면 시행하고 있지만 건설일용노동자들의 경우 직접고용 당사자인 전문건설업체에서 근로계약을 작성하지 않거나 임금이나 근로계약 사항을 기재하지 않은 허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어 고용보험에 가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노조는 "불법다단계 하도급, 불법용역이 만연하면서 상습적인 임금체불로 이어지고 하루 일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건설일용노동자들에게는 비일비재하다"며 "두달째 실업상태가 되고도 아무런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해 자기 아들이 굶어 죽어가는 현실을 지켜봐야 했던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또 "비통한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마치 정신병자 취급하는 경찰과 언론의 보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다. 김경란 기자 eggs95@labortoday.co.kr P.S 남의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현실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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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프로그램이 당신을 몰아낼 수 있다!

  • 등록일
    2004/12/21 22:42
  • 수정일
    2004/12/21 22:42
문태준 작성일 2000년 10월 29일 18시 00분 08초 ------------------------------------------------------ 당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당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 신기술 도입과 실업문제 2000. 10. 29. 일요일 오후에 문태준 taejun@tunelinux.pe.kr http://tunelinux.pe.kr http://database.sarang.net 90년대 그리고 2000년 현재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이런 기술 자체가 업무환경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프로그램의 도입을 통해 조직을 합리화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자동화하고 있다. 그룹웨어부터 시작해 인트라넷, 전자결재 시스템, 전사적 자원관리(ERP), CRM 등등. 그러나 경영합리화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 도입을 도입하겠지만 거꾸로 이것이 불러올 노동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는 간과를 하는 것 같다.


18세기,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철자가 맞나? 초기 자본주의에서 사람의 물리력에 의존을 해서 상품을 생산했다면 여기에 기계를 도입하여 자동화하고 불필요한 인력을 줄임으로써 생겨난 운동이다. "기계를 파괴하자!" 기계의 도입으로 생산성이 증가된만큼 그 혜택이 노동자에게도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 정보통신기술의 엄청나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위의 문제가 단지 과거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직접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에 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인터넷으로 신문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신문은 아침에 나오는데 그전날 저녁부터 기사들이 오고 이것을 수동으로 편집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작업을 한다. 일부분은 자동화되어있고 일부분은 수작업이다. 여기에 인력과 시간을 투입하여 완전 자동화를 할 수가 있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내가 직접 그 작업을 맡아서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마치고 난 후 생길 문제들을 생각하면 내 스스로가 그 무서움에 떨게 된다. 전산화를 통한 자동화, 합리화를 통해서 대여섯명의 일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 생긴 여유인력을 과연 일반적으로 어떻게 처리를 할까? 가장 바람직한 것은(그리고 올바른 것은) 재교육을 통해서 다른 업무에 투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말만큼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대로라면 "짤라" 이게 옳다. 굳이 필요없는 인력을 가질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산화 이전에 그에 따라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미리 인식하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먼저 고민을 한 후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엔지니어는 단순한 "기술" 그 자체만이 아니라 새로운 신기술 도입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 노동조건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흔히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보고서에는 이에 대해서 오히려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평가를 내고 있다. 기술실업. 몇십명, 몇백명이 작업했던 것을 거대한 컴퓨터 1대가 혼자서 거뜬히 처리해버린다. 국내에서도 IMF라는 상황이 있기는 했지만 IMF라는 상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급격한 기술발전으로 오히려 수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해낼 가능성이 커지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기술 자체가 가치중립적일 수는 없다. 그것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여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신기술의 도입시 노동의 관점에 따라 여기에 개입을 하고 생산과정, 노동과정에 미칠 영향에 대해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업무로써 프로그래밍을 했다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든 프로그램 때문에 바로 옆의 당신의 동료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부메랑이 되어 어느날 "당신의 모가지"를 짜를 수가 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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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등록일
    2004/12/21 22:38
  • 수정일
    2004/12/21 22:38
2001년 01월 11일 21시 08분 56초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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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살믄‥’ 저자 전우익선생 별세

  • 등록일
    2004/12/21 09:15
  • 수정일
    2004/12/21 09:15

아~ 또 한 사람의 마음 따스한 이가 인생의 소풍을 끝냈구나... 안타깝다.

 

자연 감싸안은 삶 깊은 울림

“생나무보다는 고사목, 좀 썩은 나무, 집 뜯은 나무가 좋다는 걸 알았어요. 사람도 어느만큼 썩어야, 풍상도 겪어야 사람맛 나는 사람이 되듯이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등의 수필집을 통해 자연의 결을 거스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전우익 선생이 지난 19일 아침 6시쯤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성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향년 79.

 

고인은 1925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제대에 입학했으나 혼란스런 정국 탓에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1947년부터 ‘민청’에서 청년운동을 하다 사회안전법에 연루돼 6년 남짓 옥살이를 했고, 출옥 뒤에도 보호관찰 대상이 돼 65살 때까지 주거 제한을 받아 고향 밖을 나가지 못하고 부자유하게 살았다.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에서 밭농사 짓고 나무 키우며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외에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사람이 뭔데> 등 3권의 책을 펴내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짓 없는 삶의 참모습을 알렸다. 고인의 글은 투박한 농사꾼의 이야기뿐이지만, 소박한 삶 속에 진실한 삶이 있음을 아무런 꾸밈도, 왜곡도 없이 보여주었다. 신경림 시인은 고인을 가리켜 “깊은 산속의 약초” 같다고 했다.

 

“세상에 나는 물건을 사람만이 독식해서는 안 되지요. 새와 곤충이 없이 사람만이 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런데도 혼자 먹겠다고 야단이지요.”(<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2002년 9월 <문화방송> ‘!느낌표’에서 고인을 만나 그의 진솔한 삶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해 타계한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과 평생의 벗으로 우정을 나누었으며,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과도 각별한 친분을 가꾸었다. 무명씨를 뜻하는 ‘언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일꾼을 뜻하는 ‘피정’(皮丁)을 아호로 썼다. 이름을 섣불리 팔지 않고, 헛된 알맹이보다는 실한 껍데기로 살려는 뜻이 담겨 있다.

 

고인은 지난해 5월 중풍으로 쓰러진 뒤 대구 영남대병원 등지에서 치료를 받아 오다 최근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집으로 돌아가 투병생활을 해왔다. 유족으로 아들 전용구씨 등 3남3녀가 있다. 장례식 21일 아침 8시. (054)673-6762.

 

봉화/구대선, 고명섭 기자 sunny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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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 등록일
    2004/12/20 08:44
  • 수정일
    2004/12/20 08:44

* 이 글은 노동목사님의 [ 10/28 반세계화 공동투쟁 선포] 에 관련된 글입니다.


세계 장로교회, '신자유주의 반대'를 선언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박성원 신학박사. 세계개혁교회연맹 협력과 증언부 총무

 

“우리는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제외시켜 그들과 계약 맺으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현 세계의 경제질서를 거부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절대적 계획경제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뒤엎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에 적대적 행위를 하는 모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국을 거부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시장의 광포한 소비주의와 경쟁적 탐욕, 이기적 속성의 문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또 어떤 구조를 가졌든 자신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체제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미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많은 부분을 파멸로 이끈, 규제받지 않는 부의 축적과 무한 성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수익을 인간 앞에 두고 모든 피조물을 더불어 돌보지 않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사유화하는 경제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런 이념을 복음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 이런 이념에 대한 맹종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거부한다."

 

전 세계 개혁교회를 대표하는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은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12일까지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제24차 총회에서 위와 같은 신앙고백의 언어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반대했다. 이를 '아크라 고백신앙'이라고 부른다.

 

세계 장로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란 이름으로 알려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존 칼빈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기독교 전통인데, 칼빈은 소위 '자본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 후예들이 자본주의의 가장 열악한 형태인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아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25년이 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을 가진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고 난 뒤 세계갈등의 틀이 냉전시대의 정치와 이념에서 경제로 바뀔 것이란 예상을 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제1차 걸프전 직후인 1992년부터 '신앙과 경제'란 주제로 일련의 연구를 시작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199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가진 협의회를 시작으로 각 대륙을 순회하면서 각 지역의 경제현실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이중 1995년 아프리카 잠비아 키트웨에서 가진 아프리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아프리카는 세계경제에서 완전해 제외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은 세계경제지도와 G8의 세계경제계획에서 이미 사망선고된 지역으로 선포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전 세계 개혁교회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신앙'을 선포하도록 건의했다.

 

'고백신앙'이란 당대의 조직적 불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중 가장 강도가 높은 대응이다. 어떤 불의를 용납하면 자신들의 신앙 자체가 위협받을 것으로 간주될 때 발동하는 '긴급 행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고백신앙'으로 대응한 여러 사례가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바르멘 선언'이다. 히틀러가 등장해 자신이 아리안족을 위한 메시아란 암시를 주기 시작했을 때 소수의 독일교회가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기고 '고백신앙'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 인종분리 정책으로 백인들이 아프리카인들과 유색인종들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하고 제외했을 때 교회는 '벨하 신앙고백'으로 대응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성찬식을 함께 나눌 수 없게 하는 인종분리 정책은 복음과 정면으로 위배되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고백신앙의 전통

이런 경험은 우리 나라에도 있다. 일제식민강점 시기가 말기에 달했을 때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이를 특별히 기독교회에 집요하게 강요했는데 찬송이나 성경에서 천황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의 사용을 제한하고 일본신사를 강제로 참배하게 했으며 특히 예배전엔 동방요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때 소수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일제의 강요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판단, 순교적 각오로 이를 거부하는 고백신앙의 행동을 했다.

 

이번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채택한 '아크라 고백신앙'은 바로 이런 바르멘 선언이나 벨하 신앙고백의 정신으로 전개된 것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는 다음과 같이 이번 고백의 신앙적 배경을 밝혔다.
“개혁전통과 시대의 징조가 가리키는데 따라 세계 경제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및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제자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현 구조에 대해 침묵하고 행동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 신앙의 온전함이 위태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이렇게 신앙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던 긴급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세계개혁교회연맹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에 대해 고백적으로 대응하게 했는가.

 

우선 아크라 신앙고백은 '이 시대의 징조가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계속해서 속박 속에서 탄식하며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듣고 있다”(로마서 8장 22절)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지금 전 세계의 고통받는 민중과 상처받는 피조물 세계의 탄식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세계민중의 고통과 생태계에 가해진 상처가 중첩되는 극적 현실을 보고 있다”고 고백의 전제상황을 설정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엄청난 위협의 근본원인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권력과 군사력의 비호 아래 전개되는 불의한 경제구조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며 '현 세계의 부끄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 세계 1퍼센트의 부자들에 속하는 연간 수입이 가난한 자 57%의 연간수업과 맞먹는다. 하루에 빈곤 및 영양실조와 관련해 죽는 사람의 수가 매년 2만4천명에 이르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외채는 끊임없이 원금을 갚아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빈곤층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루에 1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살아가야 하는 절대 빈곤속에서도 세계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우상 숭배'

이어서 아크라 신앙고백은 경제 세계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심각하게 지적했다.

"부국들의 무한 경제성장 정책과 다국적 기업의 이윤추구 극대화 지향이 생태계를 약탈하고 환경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1989년엔 하루에 한 종(種)의 생물이 사라졌으나, 2000년에는 시간 당 한 종(種)이 사라지고 있다. 황폐화의 결과로 기후변화, 어족의 고갈, 벌목, 토지의 부식, 물의 오염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살림살이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해안지역과 태평양 섬들은 침수될 위협을 받고 있다. 폭풍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고농도의 방사능 방출이 건강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구조와 문화적 지식이 경제적 이윤추구를 위해 특허화되고 있다”며 생태계의 상업화를 고발한다.

 

아크라 고백은 이 위기의 주범은 바로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라고 분명히 밝히고, 오늘의 위기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진행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단언한다. 고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무한경쟁, 소비주의, 무한경제성장, 부의 무제한 축적이 전 세계를 위해 제일 좋은 방안이다.
■사유재산권은 사회적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투기, 시장의 자유화와 탈규제화, 공기업과 국가자원의 민영화, 규제없는 외국자본의 투기와 수입, 낮은 세율,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이동 등이 모든 사람의 부를 성취하게 할 것이다.
■사회적 의무, 가난한자와 사회적 약자의 보호, 노조, 사람들의 관계성 등은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의 과정에 부수적이다.

 

특히 아크라 고백은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와 자연으로부터 끊임없는 희생을 강요하며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념”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것은 경제가 생명위에 주권을 행사하고 우상숭배에 이르게 하는 절대충성을 강요하면서 부와 번영의 창조가 세상의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약속”이라며 그 허구성과 사기성을 폭로했다.

아크라 고백은 이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또 이런 이념의 프로젝트는 누구의 비호아래 전개되는지를 명쾌하고 밝히고 있다. 아크라 고백은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진리와 정의의 구도자” 시각으로 분석할 때 “현 세계의 질서(혹은 무질서)는 '제국'의 극도로 복잡하고 비도덕적인 경제구조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제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제국이란 강대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구성한 지배구조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권력의 총체적 집합을 의미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에서 국가는 시장경쟁에서 사유재산과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 후 국가는 노동운동의 투쟁을 통해 시장을 규제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자본의 이동이 초국화하면서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복지기능을 해체하면서 시장을 세계화했다. 이에 따라 시장을 보호하는 정치적·법적 기구들도 세계화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정부는 국제금융기관들(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과 함께 정칟경제·군사적 협조를 하면서 자본가들의 이윤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크라 고백은 “경제세계화와 지정학이 신자유주의의 지원으로 결합해 오늘의 경제위기를 극도로 심화시키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현재의 세계체제”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경제구조로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장 13절)고 하셨다. 이 말씀을 근거로 세계개혁교회연맹은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의 동기를 밝힌다.

 

“성서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이루는 부의 축적 구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 이 같은 구조는 인간의 고통(예방할 수 있는)을 가중시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맘몬에 해당한다.”

 

아크라 고백은 세계교회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고백의 과정에서 줄곳 주저하면서 고백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유럽 및 미국 교회들도 현재는 아크라 고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분주하다. 남미, 아프리카 등 남반부 교회는 지구적 경제정의 투쟁에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하며 흥분하고 있다. 이번 고백으로 세계신학의 축이 서구에서 제3세계 교회로 전환되기도 했다.

 

혹자는 경제는 경제인들의 영역으로, 영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교회가 경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제의 어원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서의 경제는 ‘집안 살림’이란 뜻인 ‘Oikos’ 에 규범이란 말인 ‘Nomus’가 연결되어 나온 개념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것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하나님의 집안 살림살이 법칙’이란 뜻이다. 이 ‘Oikos’ 란 말에서 경제를 가리키는 영어인 'Economy'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Ecology'가 나왔다. 에큐메니컬(교회통합운동)의 정신인 '오이쿠메네'(Oikumene,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공동체)란 용어도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란 것은 이처럼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제가 인간의 손에 들려지면서 인간의 탐욕의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는 신앙과 관련된다는 것이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인식이며 이 때문에 경제를 윤리나 도덕이 아닌 신앙의 문제로 보려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경제를 윤리나 도덕의 문제로 보면 남의 가난이 남의 문제로 보이지만 고백의 문제로 보면 이웃의 가난은 곧 나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신앙의 발로가 이 사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사랑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에도 이 같은 깊은 신앙고백적 행동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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