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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나를 '슈퍼장애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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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슈퍼장애인'이라 부른다

  • 등록일
    2004/12/20 08:21
  • 수정일
    2004/12/20 08:21

[문화인물탐험] 연극배우· 방송인 한석준 
 
 
                                                          이오성 레이버투데이 기자 dodash@labortoday.co.kr
                                                          사진 허태주 기자 tjheo@digitalmal.com

 

한석준씨(23)는 사랑이 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은 비록 웃기고 자빠진 3류 슬랩스틱 코메디 판국이지만, 그는 정말 ‘찐한 멜로’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불편한 팔과 다리로 무대에서 노래하고 이야기하듯 그는 ‘우리들의 사랑법’을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멜로 영화 찍고 싶어요. 아주 분위기 있는 걸로요. 장애인도 남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까진 한번도 내 마음에 쏙 드는 멜로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실은...멜로 영화 보면 자요...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그냥 자는 거죠. 그래서 배우고 싶어요... 그 사랑이란 것을..."

 

스물세 살 청년의 꿈

그랬다. ‘연애와 연예', 스물세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으랴. ‘장애인의 사랑법’을 절절이 담은 '찐한' 멜로물의 주인공을 꿈꾸는 그에게 영화 「오아시스」는, 그래서 '불편한 기억'이다. 그는 “오아시스 역시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장애인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엔 언제나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고생과 노력 끝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거나, 아니면 너무 못 사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예요. 한쪽은 칭송하고, 한쪽은 아주 동정하고···. 절대로 중간은 없어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어요. 사람들은 보통 장애인들 생각하면 무조건 천사 같은 이미지만을 떠올리잖아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아주 성질 더럽고 나쁜놈도 많이 있어요(웃음).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이에요. 하지만, 오아시스 역시 그런 시각에서 못 벗어난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 역을 진짜 장애인이 했다면 정말 좋았겠죠.”

 

이제껏 장애인을 대상으로 삼은 영화와 드라마는 숱하게 많았지만, 장애인이 스스로 주연이 된 작품은 거의 없었다. 단지 ‘대상화의 대상’을 넘어 스스로 주체가 되려는 ‘욕심’. 이 23세의 앳된 청년은 참으로 야무진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데 그건 인생의 '두 번째 꿈'이란다. 그의 첫 번째 꿈은 대체 뭘까.

 

"야이 병신아, 병신아!"
11월 5일 저녁, 대학로 외진 곳에 있는 한 교회. 문을 열자마자 난데없이 "병신"이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장애인 극단 '휠'이 다음 주에 열릴 정기공연을 앞두고 맹연습 중인 가운데 튀어나온 소리다. 뇌성마비,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 갖가지 장애를 지닌 젊은이들이 모여 대사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주인공도 있고, 목발을 짚은 조연도 있다. 이 중엔 아예 앞이 보이지 않는 '참관인'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겐 '장애'가 아무런 벽이 되지 않는다. 교회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은 '에너지' 그 자체다.

 

1인 2역의 중증장애인

한석준은 이 연극에서 '취객'과 '장난전화 거는 꼬마' 역을 함께 맡았다. 1인 2역이다. 고작 해야 잠깐 등장하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언어장애를 지닌 데다 전동스쿠터가 아니고선 무대에서의 이동도 쉽지 않은 그가 1인 2역을 맡은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만난 그의 얼굴에 흉터가 하나 생겼다.

 

"마지막 리허설을 하다가 무대에서 넘어졌어요. 취객 역할이었는데 발이 꼬여서. 원래는 누워서 잠 자는 걸 연기하면 되는 건데 한번 서서 자는 연기를 해봤어요. 많이 취한 사람은 서서 잘 수도 있잖아요. 연출하시는 선배님이 그게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서 있는 게 쉽지는 않지만요."

 

그는 흉터 진 얼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결국 그의 상처는 그가 자초한 것이었고, 이는 온전히 그의 남다른 '끼' 탓이었다. 그의 끼는 공연 당일에 빛을 발했고, '단역 중 단연 최고'라는 평도 받았다.

 

게다가 뜻밖이지만, 그는 '방송인'이라는 '직함'도 가졌다. 그는 매주 월~ 목요일 오후에 방영되는 KBS 2TV의 장애인 전문 프로그램 '사랑의 가족'에서 사회자를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 '기획진단-함께 가는 길'에서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제도적 문제점들을 시청자와 함께 나눈다.

'연극배우 겸 방송사회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실은 연극이건 방송이건 데뷔 1년을 넘기지 못한 '초짜'에 불과하다. 연극무대엔 올 2월부터, TV 브라운관엔 5월부터 얼굴을 내밀었다. 흔한 말로 '벼락출세'한 셈이다.

 

"연극할 때 방송사에서 잠깐 취재를 왔는데, 얼마 뒤에 연락이 왔어요. 장애인방송의 사회자를 구하는데 해보고 싶냐고. 흔쾌히 응했죠. 원래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날 택했는지 그 이유가 뭔지는 몰라요.(웃음) 지난 방송도 안 보고, 그냥 무작정 가서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했더니 호응이 좋았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장애인 한 분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분이 몸도 자연스럽고 너무 이야길 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비장애인 취재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들 웃더라고요. 그날 바로 합격을 받았죠. 그런데 방송이란 게 굉장히 줄 알았는데 훨씬 편하더라고요. 왜냐면 내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그는 지금은 본인도 '깜짝 놀랄 만큼' 언어장애가 나아졌다고 말한다. 자칭 '인간승리'란다. 기자가 "말을 그냥 잘할 뿐 아니라, 참 재미있게 한다"고 추켜세웠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이렇게 해야, 먹고 살죠(웃음)."

 

"저는 손을 못 쓰니까, 말로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밖엘 못 나가니까 동네 아줌마들하고 많이 놀았어요. 아줌마들이 집에 놀러오면 같이 수다떨고 했던 게 제일 즐거웠어요. 그래서 그런가, 가끔 애늙은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요(웃음). 특히 어머니가 제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어요. 친구들 집에 데려오면 너무 좋아하시고. 제 성격이 이렇게 밝은 것은 어머니 탓이 크죠."

 

놀랍게도 그는 소시적 '동네 골목대장' 출신이다. '골목대장'이라면 비장애인도 역임하기 어려운 유년 시절 최고의 '감투' 아닌가. 비록 어린 시절이지만, 그의 유달리 밝은 성격 앞에 '장애아'라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때 애들이 내 휠체어를 끌고 다니면서, '대장' '대장' 했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최고의 연예인이 되고픈 까닭

지금 그의 첫 번째 꿈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과 연예인',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방송사의 '흥행코드'에나 어울릴 법한 구도지만, 그의 바람은 절실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1인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인이 연예인이 되면 정말 많이 바뀔 것 같아요. 연예인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하고 싶어요. 제 말 한마디에 모두가 주목해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홀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아무 데나 막 다니고, 일부러 지하철만 타고 다녀요. 우리집 면목동에서 대학로까지 리프트를 타면 비장애인들의 두세 배는 걸리지만, 그런 행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제 꿈은 두 번째로 밀렸죠. 우선은 장애인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중요하죠. 아직도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많고, 제 몫은 그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처럼 높고 견고한 ‘사회적 벽’ 앞에선 차라리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제가 방송 나가고 이러는 것 보면서 어린 녀석이 설치고 다니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제 행동을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은 욕도 많이 하시죠. 그런 분들 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저 같은 장애인들이 많아지면 우리나라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왜 못 할까요. 사람들이 절 보고 힘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어요. 서태지처럼."

'세상 밖으로' 나서다

 

그는 뇌성마비 1급의 장애를 가진 청년이다. 뇌성마비는 유전은 아니지만, 선천성에 가깝다. 태어날 땐 몰랐지만, 돌 때쯤부터 목을 전혀 가누지 못했다. 뒤늦게 장애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손발도, 입도 자유롭지 못한 그가 받을 수 있는 학교교육은 없었다. 동생이 다니는 학교에 엄마 등에 업혀서 딱 두 번 가본 게 '학교생활'의 전부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그는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평생 집에서만 지내다가 열여덟 살 때, 교회에 처음 나갔어요.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굉장히 궁금하고, 또 두려웠어요. 난 그때까지 내 또래아이들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용기를 내서 장애인특별반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반 고등부로 들어갔어요. 처음엔 다들 경계하는 눈빛이었어요. 교회에 세 번째 나갔을 즈음인가, 누군가 인사를 했어요. 안녕. 그리고 그 친구가 이름이 뭐냐고 묻더군요. 그게 나이 들어서 제일 처음 사회적 경험을 한 것이었어요."

 

교회를 통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성격이 바뀌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그러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비로소 '세상 밖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한씨 집안에서 네가 제일 출세했다'고 하지만, 전엔 달랐어요. 아버지는 그냥 집에서 몸 관리나 하면서 칩거하길 바라셨어요. 별 기대를 하지 않으셨죠. 두 살 아래인 동생에게 가장의 역할을 바라셨어요. 혼이 나도 동생이 더 많이 혼났고. 하지만 전 맏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장애인들 보면 밖에선 물론이고, 집에서도 왕따를 당하잖아요. 그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어요. 저는 그런 가족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어요."

 

이 나라의 경우 아직 장애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천박하다.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지하철 철로에 뛰어들어 목숨 건 시위를 하거나, 심지어 온 몸에 불을 사르며 생존권과 이동권을 요구했음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시 버스개편'이라는 천지개벽 속에 떡 고물처럼 떨어진 것이 아주 가끔 눈에 띄는 '저상버스'다. 그러나 여전히, 혹은 당연히 '가뭄에 콩 나듯'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장애인은 찾기 힘들다. 어쩌면 그들에게 세상은 더 악랄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물었다. 예컨대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의 대답은 조심스럽다.

 

"솔직히 잘 몰라요. 그렇게 제도를 바꾸려고 시위하는 것, 옳다고 생각은 해요. 그런데 왠지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뭔가 철창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 그 생각이나 행동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자꾸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 같아요. 무슨 느낌인가 하면, 뜨질 못 한다는 거예요.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자리예요. 저는 어떤 장애인이 능력이 있으면 그걸 사회적으로 띄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장애인들이 잘 돼야, 우릴 보는 시선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그의 생각은 틀렸을 수도 있다. 게다가 충분히 위험하다. 어쩌면 현실을 외면한 '출세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23세 청년의 '자의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그의 고민을 포용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의무이고, 몫은 아닐까. 청년의 말은 이어진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게 너무 의지를 많이 하는 것도 문제예요. 너무 받으려고만 하니까요. 이를테면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밥 그릇을 절대 안 치워요. 당연히 누군가 치우겠지, 하는 거죠. 말로는 비장애인들과 똑같다고 하고, 똑같아야 하겠지만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경우도 많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지금 그를 '슈퍼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손발이 성치 않은 데다, 약간의 언어장애까지 겹친 그가 연극무대는 물론, 공중파에서까지 '맹활약'을 펼치는 것을 두고 어떤 '팬'이 그에게 '슈펴장애인'이란 별명을 붙여준 것이 계기였다. 조금 있다 그는 "이 별명을 퍼뜨린 것은 실은 나 자신"이라고 실토했지만, 그 별명이 너무 좋단다. 슈퍼장애인. 언뜻 형용모순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처럼 '혈기왕성한 장애인'을 부르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어 보인다.

 

'희망의 휠체어'가 되어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죽음'이 드리웠던 시절이 있었다. 3년 전,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한 형이 아파트에서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날마다 만나 고민을 나눴을 만큼 의지가 되던 사람이었다.

 

"진짜 좋아하던 형이었어요. 장애인 단체 활동도 함께 했고. 저보다 세 살 많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제 나이 때 일이죠. 전 정말 몰랐어요. 그 형이 그렇게 힘든지. 항상 웃고 다녔고... 미소가 정말...천사 저리 가라 같았어요. 그 형은 저보다 손을 좀 썼고, 걷지는 못하고, 기어다니는 정도였지요. 아버지와 둘이 살았는데 매일 술에 쩔어 사셨어요. 미래가 없었나 봐요. 그래도 자살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때 나도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나는 그 형보다 손도 못 쓰고... 저도 같이 따라갈까 생각을 잠깐 했었어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태지처럼 유명한 연예인으로 뜨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어쩌면 그때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무좀양말을 신은 채 발가락으로 전동스쿠터를 조작하는 언어장애인이 방송에 나와 요란을 떨며 만인을 웃길 때, 많은 이들의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그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게 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문득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장애형제들'에게 그는 '희망의 휠체어'가 되고 싶은 것이리라. 그 휠체어가 어두운 '장애의 벽'을 넘는 날, 그는 '두 번째 꿈'을 찾아갈 것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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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인터넷 문화 트렌드 '베스트 10'

  • 등록일
    2004/12/18 15:30
  • 수정일
    2004/12/18 15:30
[노컷뉴스] 마이팬 사이트 발표 '미니홈피' '초딩문화' 등 CBS 노컷정보 nocutnews@cbs.co.kr 2004년도는 인터넷 문화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선 이후 여전히 총선에서도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이 위력을 떨쳤고 패러디 문화가 깊숙히 번졌다.


또 1인 미디어 시대를 연 미니홈피와 블러그 열풍은 인터넷을 즐기는 젊은이들 차원을 넘어서 정치인들도 개인 홈피를 하나씩 개설 할 정도로 급속하게 번졌다. 인터넷 퍼뮤니케이션을 표방하며 다양한 컨텐츠 작가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사이트인 '마이팬'이 선정한 2004 인터넷 문화 트랜드 BEST 10을 보면 한 눈에 그 변화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미니홈피 개인 커뮤니티 활성화로 1인 1미니홈피를 달성할 정도로 미니홈피의 뜨거운 붐이 있었다. 이메일 대신 답방글을 남기며 서로 안부를 전달하고 자신의 생활을 미니홈피로 꾸미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블러그 다양한 정보와 컨텐츠들로 개방된 개인 커뮤니티와 정보 창구 역할을 하는 블러그의 붐도 미니홈피 못지 않게 거셌다. 미니홈피보다 더 짜임새있고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서 누구에게나 정보 접근성이 용이한 블러그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폐인문화 매니아의 의미를 가진 폐인 문화도 작년에 이어 거세게 이어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드라마 혹은 주제에 관하여 열정적으로 반응하며 게시물을 올리고 하루종일 매달려 산다. ▷초딩문화 '즐' 혹은 '반사' 등의 유행어와 더불어 인터넷의 악동으로 떠오른 초딩문화의 원류는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거나 혹은 이론 없이 비평하는 매너없는 행위에 대해 시작했다. 순수함을 잃은 초딩의 비판에서 초딩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재치까지 다양한 형태로 인터넷 문화의 한 부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리플문화 감상한 자료나 기사등에 자신의 의견을 올리며 적극적인 의사 표명을 하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에는 수천건의 리플이 달리며 문희준, 귀여니등의 기사 아래에도 안티와 열성팬간의 수만건의 치열한 리플들이 올라오며 이전의 기록을 갱신하고는 한다. ▷캠문화 젊은이들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디카와 폰카의 확장으로 일상의 모든 것들이 사진으로 담아지기 시작했다. 생활 주변에서 얻어지는 다양하고 특이한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공유하면서 일상의 즐거움이 인터넷 세상을 통하여 알려지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풍자/합성 사회 풍자에서 정치 그리고 자신들의 일상 생활까지 재치와 아이디어로 재구성하는 풍자/합성이 일반화 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사진만을 올리는 것을 넘어서 사진을 변형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넣어 더 강하게 어필하거나 역발상을 통하여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인터넷 문체 기존의 채팅 문화에서 파생된 인터넷문체들은 단어를 줄이거나 외래어를 변형시키고 단어를 줄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유행되고 있다. 특히 근래에는 인터넷의 문체가 구어체로까지 퍼지며 “그러셈” “ 좋으삼?”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귀엽고 다정하다는 의견과 한글의 파괴라는 우려 속에서 인터넷 문체들은 계속되는 진화를 진행 중이다. ▷얼짱문화 얼짱이라면 범죄인까지 미화되는 과도한 반응부터 몸짱 열풍 그리고 자신을 망가뜨리며 대세를 타려는 얼꽝에 이르기까지 미에 관련된 다양한 시각들이 인터넷에서 나타났다. 익명성의 사이버 공간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서는 네티즌들은 자신이 열광하고 싶은 새로운 대상에 목말라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컷뉴스 홍석재 기자 nocutente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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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주민번호 없이 인터넷 가입한다

  • 등록일
    2004/12/18 15:18
  • 수정일
    2004/12/18 15:18
음 EBS가 수능학생 명단 누출로 사건을 계기로 개인정보보호를 실행하고 있다니 흐뭇하다.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주민번호 없이 인터넷 가입을 받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 흐름이 전체 포털사이트까지 이어지길 바램해 본다. 개인정보보호법 제정을 위한 움직임이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것 처럼 흐뭇해 지기 바란다. 한ㅤㄸㅒㅤ 정보통신운동을 하였던 자로서 참 이와 같은 기분좋은 소식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래 기사 --------------------- 17일부터 '주민등록번호 없는 인터넷 사이트' 운영 민임동기 기자 gom@mediatoday.co.kr EBS가 17일부터 '주민등록번호 없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한다고 밝혀 관심을 모으고 있다. EBS는 "지금까지 운영상의 편의성을 내세워 회원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던 관행을 과감하게 버리고 사이트 가입시 주민등록번호 기재항목을 폐지함은 물론 이미 축적된 주민등록번호 데이터 역시 완전 삭제함으로써 회원의 개인정보보호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면서 "'주민등록번호 없는 사이트 운영계획'을 수립해 12월 17일부터 이를 전면 시행한다"고 밝혔다. 기존 회원들의 데이터도 모두 삭제, 타 언론사에도 영향 미칠 듯


EBS가 이처럼 '고강도' 방침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인터넷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인정보유출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BS의 한 관계자는 "회원에 가입할 때 반드시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게 돼 있는데 이의 유출로 인한 피해를 막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사이트 가입시 회원의 주민등록번호를 함부로 요구하는 관행을 철폐하는 것"이라면서 "현재 EBSi 사이트에 가입돼 있는 120만 회원의 주민등록번호 또한 완전 삭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EBS가 '개인정보유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7월 14일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교육부 장관과 EBS 사장 등이 개인정보유출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당하면서부터다. EBS의 다른 관계자는 "지난 7월9일 EBSi 100만 회원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교육부의 요청으로 가입자 가운데 최고령자 및 최연소자 관련 260명의 명단과 생년월일(주민등록번호) 등이 담긴 개인정보를 (교육부에) 제출했다"면서 "교육부는 EBS로부터 제공받은 자료를 7월9일부터 12일까지 회원 동의 없이 교육부 사이트에 파일형태로 게재해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고발당한 바 있다"고 밝혔다. EBS는 지난 7월15일 EBS사이트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으며 민주노동당은 지난 8월 6일 검찰에 고발을 취하하겠다고 통보했다. EBS 내부 구성원들의 반대도 만만찮아 하지만 EBS가 이를 공식적으로 표방하기까지 내부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간부는 "개인정보, 특히 주민등록번호에는 출생지 등을 포함한 여러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에 폐지에 반대하는 구성원들도 많았다"면서 "집적된 개인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보인데 이를 굳이 스스로 포기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때문에 완전폐지가 아니라 이를 외부에서 활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비롯한 여러 방안들이 내부적으로 논의가 됐었다"면서 "하지만 고석만 사장의 지시로 완전폐지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EBS쪽은 이번 '주민등록번호 없는 사이트 운영'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사이트 운영업체들이 관리상으로나 관행적으로 요구해 오던 주민등록번호 없이도 운영상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회원들의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EBS의 이런 결단이 정보통신업계의 정보기본권에 대한 인식제고의 한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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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고졸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 등록일
    2004/12/16 10:35
  • 수정일
    2004/12/16 10:35
학벌주의와 신자유주의, 두 괴물에 눌린 우리 자화상 '청년실업'이란 단어는 다소 식상한 메뉴다. 최근엔 '구조적 청년실업'이란 말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란 얘기다. 누구나 동의하는 바, 참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다. 그런데 신문이나 TV에 잡히는 '청년'들의 면면을 보면 어찌된 셈인지 죄다 대학생들 일색이다. 아무리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높다지만, 이건 좀 기이하다. 그 많던 '고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올 하반기 통계를 한번 보자.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실업자 수는 78만 7천명이다. 그중 고졸 이하는 55만 8천 명. 무려 70%에 달한다. 청년실업자 수를 30만 명이라고 할 때, 그 중 60% 이상이 고졸 이하 학력이다. 구직포기 등으로 인한 유휴인력의 규모로 봐도 압도적이다. 대졸 유휴인력이 22만명인데 반해 고졸 유휴인력은 89만명에 달한다. 이런 현실은 고졸청년층의 실업과 고용문제가 청년실업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수의 '비대졸자'들이, 대한민국에서는 투명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의 기득권을 문제삼고, 명문대와 지방대의 차별을 성토하면서도 정작 '고졸'과 '대졸' 사이에 놓인 거대한 취업장벽에 대해서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설마 청와대에 계신 분이 '고졸'이어서?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선 숨죽이고 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차라리 전쟁이나 터져라"


"차라리 전쟁이나 확 터지면 좋겠네." 전상규(가명) 씨가 씹어뱉듯 던진 말이다. 전쟁이 터지면 좋겠다고? 미 대선 이후 가뜩이나 심란한 요즘, 이 무슨 망언인가. 어이없어하는 기자에게 눈을 맞추지도 않은 채, 그는 씩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전쟁 나면 예비군들 소집할 거 아니에요. 고졸이건 대졸이건 똑같이 끌려가는 거지 뭐." 낯은 웃는데, 말 속에 뼈가 있다. 전상규 씨는 지금 '백수'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프리터'다(프리터(freeter)는 '프리 아르바이터'의 준말로 아르바이트나 시간제로 돈을 버는 청년층을 뜻한다). 그는 현재 PC방 '알바'를 하고 있다. 전 씨는 작년까지 컴퓨터 조립업체의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이라곤 하지만 직원은 동갑내기 친구와 그, 단 두 명이었다. 그러나 '고졸' 학력의 두 청년이 살아남기엔 서울은 너무 잔인한 곳이었다. 불황 속에서 악전고투하던 전 씨는 카드 다섯 개를 '돌려막기'하다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에게 공장 같은 데 취업을 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안간다"라는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제대하고 바로 취직했었거든요. 관심있던 IT업체 여러 곳에 원서를 넣어봤지만 대부분 아예 고졸을 뽑질 않아요. 하는 수 없이 안산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죠. 한 3년 일했나? 오래 했죠. 이젠 알바를 하면 했지 공장에는 다신 안갑니다. 거기 다닌다고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울 수도 없고, 계속 몸만 망가지더라구요. 일을 하더라도 뭔가 앞으로 잘 될거라는 거,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전상규 씨에게는 아직도 빚이 많이 남아있다. 그는 한 2년 '빡세게' 알바해서 남은 빚을 다 갚고 나면 다시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고졸들의 살길은 장사라는 게 전 씨가 짧은 인생을 통해 터득한 '지혜'다. 물론 전상규 씨도 아무나 장사를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겪어봐서 안다. 하지만 이 희망만이 그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민노당원들도 만나면 학번부터 물어본다" "민주노동당원들 중에 고학력자들이 많습니다. 저를 만나면 학번부터 물어봅니다. 그럼 전 87학번이라 대답하죠. 1987년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거든요." 씁쓸하게 웃는 김성호 씨(가명). 그와 만난 건 토요일 새벽 6시 무렵이었다. 호텔에서 야간에 접시를 닦는 그를 만나려면 퇴근한 뒤인 그 시각이 적당하다. 민주노동당원이라는 그는 지금은 당 활동이 조금 뜸하지만, 2002년 대선 당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한다. 김씨는 힘들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때였다며 추억에 잠겼다. "얼마 전까지도 당 상근자가 되려고 지구당들에 원서를 많이 냈어요. 번번이 미끄러졌습니다. 면접 때마다 '왜 대학을 안갔냐'고 물어보는데 참 대답하기가 막막하더군요. 대학 안간 것을 후회했던 순간이었죠. 아직도 운동에 미련이 많나봐요." 김성호 씨는 이른바 '고운세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했다. 그리고 남들이 한창 대학에 다닐 20대 내내 그는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일했다. 그의 첫 직장은 현대 중공업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일했다. 물론 정규직이 아니라 하청노동자였다. 김 씨는 뾰족한 기술도 경험도 없었던 자신이 그곳에 오래 있기는 무리였다고 털어놨다. 그 다음 직장도 역시 석유관련업체인 유공이었다. "10년 전에 월급 150만원을 받았으니 꽤 대우가 좋았죠. 그런데 문제는 울산에서 혼자 지내야했다는 겁니다. 전 고향이 전라도 쪽인데 음식도 입에 안맞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했던 터라 지방에 홀로 떨어져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고립감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결국 그는 유공도 그만두고 김포공항에 취직한다. 대한항공 하청노동자였다. 항공기 예비부품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월급은 50만원에 불과했고 정규직이 될 희망도 좀체 보이지 않았다. 답답하고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그러다 결국 그곳마저 그만두고 주유소 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2년 친구와 학원을 차렸다 빚만 잔뜩 진 채 망해버렸던 경험도 있다. 영등포의 한 영세업체에서 고압호스를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빚쟁이들이 직장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그마저도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도 아직 꿈은 있어요. 노무사가 되는 겁니다. 노동법 공부를 하는데 파견근로를 마음대로 하는 회사에 대해서 제대로 된 규제가 없다는 걸 알고 참 놀랐습니다. 왜 저희같은 비정규직들이 양산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일 하면서 공부한다는 게 만만치가 않더군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태일을 떠올린 게 과연 기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직업에 귀천 없다는 거짓말 고졸 여성들의 취업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전체 취업여성의 73%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에다, 학력이라는 변수가 더해져 고졸여성들은 실제로 직업선택의 자유를 거의 누리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이은주 씨(가명)는 멀쩡히 정규직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된 후, 똑같은 직장에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됐다. 그녀는 "계약직은 그야말로 시한부 인생, 파리목숨"이라고 자조한다. 계약기간이 6개월 심하게는 3개월 또는 1개월 단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3년 경력의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경력의 대졸 남성 노동자의 3분의 1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심지어 3년차 대졸사원보다도 월급이 적다. 최영미 씨(가명)의 경우, 첫 직장은 백화점이었다. 정규직이었고 일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고졸여성인 그녀는 IMF 직후 인원삭감의 대상이 됐고, 이후로 정규직이 된 적은 한번도 없다. 지금은 대기업 빌딩의 안내데스크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 다시 이직을 준비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을 별로 후회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김정아 씨(가명)는 전화상담으로 판매영업을 하는 텔레마케터 일을 하고 있다. 올해는 그녀가 고향인 경남에서 상경한 지 딱 10년 째다. 여상을 나와 서울에서 첫 직장을 얻은 후 지금까지 세 번의 이직을 경험했다. 10년간의 사회생활 중 '고졸'이어서 차별을 느낀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급여였다. 두 번째 얻은 직장은 건설회사였는데, 5년 경력의 그녀가 받는 임금은 전문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보다 적었다. "1년 만에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죠. 업무능력과 아무 상관도 없이 졸업장만으로 임금이 결정되어버리는 구조였거든요. 납득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차별은 내내 이어졌다. "최근에 텔레마케터 채용공고를 낸 어느 생명보험회사에 원서를 냈었죠. 그런데 면접응시 기준이 전문대졸 이상이었어요. 거 참…. 전문대졸이나 고졸이나, 하는 마음에 고졸이라도 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마지못해 면접을 보러 오라더군요." 하지만 그 회사는 그녀를 불러주지 않았다. 업무능력만 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가 현실의 벽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기업들은 여전히 대졸과 전문대졸과 고졸을 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여성 비정규직의 비애도 털어놓았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법에서 보호되는 생리휴가, 출산휴가는 꿈도 못꾸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장에서는 일손이 없어서 아우성이라는데, 보수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이 배가 불러서""쉽게 돈을 벌고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김정아 씨의 대답은 이랬다. "되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당신 같으면 그곳에서 일하고 싶겠냐고. 외국처럼 블루컬러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임금도 충분히 받는다면 왜 일하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왜 이민을 떠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구요? 천만에. 한국에는 분명 직업의 귀천이 있어요." 학력별 임금격차 세계최고 위의 사례들은 고졸청년계층이 우리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고졸'청년들의 증언 속에는 한국노동시장의 구조적 모순들이 고스란히 숨어있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 소장은 "대졸 청년실업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주목해야할 게 바로 고졸 등 저학력 실업"이라 강조했다. 고졸 이하 청년층의 실업과 취업형태가 한국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는 중대한 하나의 '신호(sign)'라는 것이다. 김 소장은 학력별 임금격차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표, 고졸대비대졸자 급여수준) "임금소득 불평등도가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악명높은 미국조차 1998년 앞질러 버렸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집단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비정규·저학력 노동자들이지요." 실제로 고졸학력자에 대한 고용의 질적 수준도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구인구직 전문 사이트인 인크루트가 자사에 이력서를 등록한 구직자를 학력별로 분류해 본 결과에 따르면 고졸자 채용 공고에서 파견직이나 계약직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고졸자를 원하는 계약직 채용공고는 2001년 1020건에서 2003년 4073건으로 299.3%나 증가했고, 파견직 채용공고도 2001년 1120건에서 2003년 1만 3580건으로 무려 1112.5%나 증가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고졸자의 구직자 수 증가율은 대졸자 증가율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그 기간동안 고졸자 구직자 수는 208.3%나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4년제 대졸 구직자 증가율은 148.2%에 그쳤고, 전체 구직자 증가율 175.6%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청년세대가 많이 참여하는 '청년집약산업'에 고졸인력이 얼마나 흡수되는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왜냐하면 유럽 등 선진국에서 1980년대 청년실업이 큰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이런 청년집약산업에서 먼저 고용이 감소했고 그것이 곧바로 극단적인 청년실업률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정보통신, 문화, 오락, 교육, 금융 등의 이른바 '신산업' 분야에서 젊은 세대의 취업률이 높은데, 이 부문에서 청년층 고용증가율은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과 한국의 청년실업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청년집약산업'의 고속성장에도 불구, 고졸 이하의 계층은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졸의 경우 전체 취업자 증가율이 1993년∼2000년 8.1%인데 반해, 청년집약산업에서는 5.6%에 머물고 있다. 반면 전문대졸 이상의 경우, 같은 기간 57%의 취업증가율을 보였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학력별로 청년층 노동시장 분절이 극대화되고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지식기반경제니까 어쩔 수 없다? 입시경쟁에서 탈락했다는 이유로, 혹은 집안형편상 학업을 포기한 청년들은 만성적인 실업에 시달리거나 묵묵히 저임금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너도나도 '지식기반경제'를 외쳐대는 한국에서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치부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낸다. 우리나라의 직업구조가 이렇게 많은 대졸자들을 포괄할 정도로 첨단산업이 많은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것이다. 이들은 학력인플레와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한 하향취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북대 사회학과 남춘호 교수는 "과연 지금 대졸자 중 하층을 이루는 계층이 과거 우수한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들보다 능력이 뛰어난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1995년까지는 고졸자와 대졸자가 취업시장에서 능력을 경쟁하는 체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경쟁 자체가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독일의 경우 68혁명 세대가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면서 블루컬러가 자긍심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현대나 포항제철에서 블루컬러로 10년 일하면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것들, 즉 차 한 대와 집 한 채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그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직업성취모델이 됐다. 실제로 1995년까지는 지속적으로 학력별 임금격차가 줄어들기도 했다. 남 교수는 "한국 역시 점차 그런 사회로 변화해가는 중이었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이런 경향은 급격히 꺽여버렸다"고 말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한국에서 소위 '구산업'인 제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유선 소장은 고졸청년실업이 이른바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지식기반경제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는데 따른 결과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IMF 이후 은행과 공공기업들 구조조정 했지만 그때 잘라낸 인력들을 얼마 후 다시 고용했습니다. 여전히 필요한 인력들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다시 쓸 때는 비정규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조업체에서는 대량생산과 단순반복작업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반면 아웃소싱 붐과 함께 영세하청 제조업체들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고졸자들이 경쟁에서 밀려난 건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두 괴물 불과 10년 사이, 한국의 노동시장은 고졸청년들에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정규직 비율을 보면 대졸자의 경우는 60.3%, 전문대졸 50.15 고졸 실업계 35.5%, 고졸 일반계 29.2%, 고교중퇴 10.1%로 드러난다.(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2001년) 학력에 따라 철저하게 정규직 비율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취업경쟁에서 가장 탈락할 확률이 높은 계층은 일반계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계층이었다(전병유·이상일, 「고졸미진학청년층의 고용·실업현황과 정책과제」). 고졸청년들의 고용·실업대책에 정답은 없다. 참고할만한 것은 대부분 앞서 청년실업을 경했던 서구의 정책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고졸 이하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한 TRACE(Access Route to Employment) 프로그램이나 영국의 뉴딜프로그램(New Deal for Young People) 등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청년실업정책을 보면 대부분 전문대졸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거나 고졸자를 대상으로 한 인턴제의 경우에도 홍보가 턱없이 부족하고 실효성에도 의문부호가 찍히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서구와 한국의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즉, 극단적인 학벌문화가 만연해있고, 가족 외에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는 한국의 고졸청년들과 사회안전망이 발달한 서구의 고졸청년들은 선 자리가 다른 것이다. 학벌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두 괴물에 짓눌린 우리의 자화상을 이젠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박권일 기자 kipark@digital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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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떨고있니? 삼성자본의 비열함 또 드러나!

  • 등록일
    2004/12/15 20:42
  • 수정일
    2004/12/15 20:42
삼성해고자후원의 밤 탄압 극심, 18일행사 장소변경할 수 밖에... 소 위 '무노조신화'를 자랑하는 삼성, 세계 1위의 일류 기업을 목표로 한다는 그 삼성의 노조탄압은 거의 광기어린 수준이다. 특히 이번 삼성해고자 후원밤에 대한 탄압의 모습을 보면 치졸함 더불어 자본가 놈들이 얼마나 철저한가 되새기게 된다. 삼성SDI의 송수근 동지를 비롯해 삼성그룹 해고 노동자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7년의 해고투쟁을 전개해왔다. 동지들이 받아온 탄압은 어느 자본보다 뒤질게 없는, 아니 일류를 자랑하는 삼성자본의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회유 협박은 기본이고 납치와 폭행...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자본을 십분 활용하여 언론과 사법기관을 구워 삶아 왔다. 거기다 지난 여름에 폭로된 기본적인 인권마저 침해하는 불법위치추적 까지 신종 노동탄압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삼성자본도 두려운게 있었다. 첫째는 바로 해고된 동지들의 끈질긴 투쟁이고, 둘째는 그 동지들과 현장의 조합원들이 만나는 것, 세째는 삼성노동자들 사이에 번져가는 분노일 것이다. 따라서 12월 18일로 예정되어 있는 삼성해복투와 삼성SDI 현장모임의 공동 연대한마당 - 해고자 후원의 밤은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해복투에 따르면 삼성자본은 후원의 밤 티켓 한장 한장을 현장노동자들에게 파는 것을 공정거래 위반으로 신고하겠다고 으르고, 행사장으로 예약한 곳에 구사대(?)들을 결집시킬 계획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행사장소 사업주와 건물주까지 협박해서 결국 행사 4일을 앞두고 장소를 긴급하게 변경해야만 했다. 국내 독점자본의 상징인 삼성, TV 드라마에서는 그 삼성 재벌을 국가를 살린 영웅이라고 금칠을 할지 모르지만 실제는 법으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 짓밟아 쌓아올린 부(富)일 뿐이다. 보다 많은 지역동지들이 해고자 후원의 밤에서 함께 어깨 거는 것, 그리고 삼성재벌의 무노조 분쇄와 민주노조 건설의 과정에 더 굳건한 연대의 끈을 부여잡아야 한다. 다음은 삼성해고자 후원의 밤에 대한 삼성자본의 탄압에 대해, 송수근 해고자의 부인인 박미경동지가 올린 글이다. (출처 :안티삼성 홈페이지) 삼성SDI는 무엇이 두려운가! 그렇게 자신이 없나? 왜 사원들의 개인적인 모임마저 방해하며 못살게 구느냔 말이다. 12월18일은 삼성sdi 현장 모임 주최로 언양에서 처음 열리는 삼성해고자 후원을 위한 일일 주점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하면서 노조결성의 전초모임이라며 현장 모임 사원들을 man to man방식으로 접근해 괴롭히고 있다. 현장 사원의 가족까지 동원하고 부모를 찾아가 당신 아들 12월18일 모임에 참석하면 해고감이라며 협박까지 하고 있다고한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보아하니 SDI 일부 경영진들이 출세하고 싶은 모양이다. 무노조를 지향하는 삼성본사에 노조 결성 움직임이 보인다고 알려 일부러 큰 난리라도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고있다. 한마디로 난리 굿~~ 삼성SDI 그렇게 자신이 없나? 노조가 있는 회사 같으면 해고자 주점에 노조위원들이 적극 나서서 사원들에게 모임을 홍보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SDI는 어떠한가. 무노조에 근무하는 노사위원들마저 회사와 한통속이 되어 한심한 노릇을 보이고 있다. 삼성SDI가 사원들에게 떳떳하다면 퇴근후의 사적인 모임까지 일일이 방해하며 탄압을 일삼지는 않을것이다. 죄지은게 많으니 해고자와 일부 사원들을 미행하며 감시를 하는 것이다. 뭐든지 일류 좋아하는 삼성. 삼성의 노동탄압 또한 국내 초 일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합법적인 노조건설마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삼성의 비열함에 혀가 찰 노릇인데 말이다. 사원들에게 떳떳하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해마다 수천억 흑자를 내면서도 회사가 어렵다고 거짓 핑계대면서 비정규직으로 강제 전환한 사원들이 도대체 몇명인가? 지은죄를 숨기려다보니 삼성의 탄압은 끝이없다. 삼성SDI는 치졸한 방법으로 노동탄압하는 작태를 당장 중단해야 할 것이다. 2004-12-15 오후 3: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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