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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28
    왼손의 수첩
    간장 오타맨...
  2. 2004/10/27
    아래 카툰을 보고 입가에 미소 짖게합니다.
    간장 오타맨...
  3. 2004/10/26
    깊은 슬픔(9)
    간장 오타맨...
  4. 2004/10/24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2)
    간장 오타맨...
  5. 2004/10/12
    [펌] 노동, 소외, 여가
    간장 오타맨...

왼손의 수첩

  • 등록일
    2004/10/28 17:57
  • 수정일
    2004/10/28 17:57

한 권의 시집이 3000원이던 시절

나는 모든 시인을 숭앙했고

모든 시어로 아침을 맞이했다

전봇대에 가는 띠로 매달린

전선 노동자를 우러러 보았고

아스팔트에 항문을 씻는

동네 개와 달리기 시합을 했다

아버지의 오동나무 책상에 앉아

하늘빛과

친숙한 벗들을 그리워 했고

십자가 무덤 같은

서울의 비정함을 저주했다

- 서울에선 내 친구들이

끊임없이 쓰러졌고

모든 아픈 무덤들은

환락가의 사연이 되었다

정가 3000원의 맨 뒷장이

너무 낯설어진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지?

나는 시인 한 명 생각나지

않으며

관계 없이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

그 허상에 질척거리다가

나는

아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한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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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카툰을 보고 입가에 미소 짖게합니다.

  • 등록일
    2004/10/27 09:11
  • 수정일
    2004/10/27 09:11

한겨레 카툰을 간만에 들어가 보았는데...

정보통과 생활미씨는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우리내 이웃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이어나가고 있더군요.




 

오늘 아빠는 무얼 잘해?에서....

딸의 눈에 비친 아빠의 사인(주로 카드를 사용할때 많이 사용하는... 생활 속 작은 일들)을 보고 딸이 반해서 눈망울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 무엇을 잘해라는 말에 뜨끔하는 정보통의 모습에서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이전 커다란 나무 같은 느낌이 확 달아나더군요.

 

예전 아버지들은 큰 거목과도 같았고 높은 담벼락 같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버지들은 어떠한지.... 요즘 어머니들은 어떠한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의 의미는 변하나 봅니다.

아이가 커가듯 부모도 커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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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 등록일
    2004/10/26 19:52
  • 수정일
    2004/10/26 19:52

                          올해 오월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그녀에게 청혼을 했답니다.

 

그 기쁨을 겪어 본 분은 아실겁니다. 제 삶의 빈구멍에 따듯한 햇살이 가득찬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게 이번 토요일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울고 계시더라구요. 아버지가 암이시래요. 간암이 폐까지 전이가 되었답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 하다고 하시더니 제 동생이 의사거든요. 제 동생이 그런 말을하네요. 이렇게 전이가 많이 된 경우는 처음 본다고 . 수술할 상태도 아니래요. 그냥 편하게 가시도록 기다려야 한답니다. 제가 장남이거든요. 장남은 의젓해야 되거든요.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동생은 의사가 돼서 아버지를 이 지경으로 놔두었다고 옥상 올라가서 대성통곡을 하네요. 의젓하게 견디는 게 참 힘드네요.

 




혹시 대체의학이나 전통요법하시는 분 아는 분 있으신가요? 인터넷을 뒤져봐도 믿음가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서. 혹시 믿을 만한 분 아시면 연락 좀 주세요. 고치려고 하는건 아니고 최대한 편안히 여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쉰여덟이시거든요. 너무 젊으시죠.


교회가서 기도했지요.
딱 오년만 더 사시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내기를 걸었답니다. 아버지를 오년 더 살게 해주시면 내 평생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아니 삼년만이라도 그것도 힘들면 1년 6개월만이라도 더 살게 해주시면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너무 허망하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면 그러면 난 평생 하나님을 잊고 살겠습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이 내기를 이겼으면 좋겠어요. 응원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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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 등록일
    2004/10/24 16:26
  • 수정일
    2004/10/24 16:26

서른에 나이 하나를 더 더하면서 시집을 들추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릴 땐 드라마틱한 구조를 지닌 소설이 그리 좋더니만 요즘은 왜 이렇게 마음 깊은 곳을 긁어대는 시가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무님들은 이 시가 어떤지요?


<<꽃피는 말>> -- 박노해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 남 하는 대로 " " 나 하나쯤이야 " " 세상이 그런데 "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 나 하나만이라도 " " 내가 있음으로 " " 내가 먼저 "

 




20대 초반에 그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내가 나이가 들고 부양 가족이 생기고 키워야 될 자식이 생기고 그러기 전엔 적어도 그러기 전인 20대만이라도 비타협적으로 살겠다고... 적어도 내 인생에 20대만큼이라도 비타협적으로 살겠다고.. 쉽게 진실 아닌 진실과 손 잡지 않고 쉽게 정의 아닌 정의와 마음 합치지 않고 쉽게 화해 아닌 화해와 악수 하지 않겠다고...

30을 갓 넘긴 저는 아직 부양 가족도 없고 키워야 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그 면에선 20대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 러. 나....

요즘은 생각합니다. 제가 부양 가족이 생기고 키워야 될 자식이 생기는 나이가 되더라도 "나한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남 하는대로" 가 아닌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로 살게 해주소서...라고요.

세상이 그런데... 사는게 그렇지 뭐.. 그저 튀지 말고 남 하는대로 .. 나 하나쯤이야 ..정말 그렇게 말고

내가 먼저, 내가 있음으로, 나 하나만이라도 믿음을 가지면서 살수 있기를....
그리고 그 믿음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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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 소외, 여가

  • 등록일
    2004/10/12 10:06
  • 수정일
    2004/10/12 10:06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본질, 곧 자신의 생활표현의 대상으로 삼거나 인간이 오직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에 직면해서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인간적 자연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적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이 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노동은 대상화라는 형태를 취한다.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대상으로부터  자연적  형태를  제거하여 그것을 인간적 욕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적  형태를  각인받음으로써  대상은 자립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것에서  인간세계로의  통합을  통해 산출된 것으로 전화한다.



자연적 대상이 인간적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된 것이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대상이 또한 인간의 목표, 상상, 의지를 구현한 것이 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대상화는 그에 선행하는 의식상의 관념적 대상화를 전제한다. 이러한 관념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은 이미 자연적 대상들을 그것들의 객관적 척도에 대한  지식이라는  형태로  전유하고  있다.  한편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동시에 인간적 욕구, 즉  인간화된  자연적  욕구와  고유하게 인간적인 욕구가 산출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식욕이라는 자연적 욕구는 자연 속에 주어져 있는 형태 그대로의 음식이 아닌, 조리된 음식에 대한 식욕이 되며 미적 욕구 등 생활의 직접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문화적 욕구가 탄생한다.

 

노동은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대상 사이의 거리를 확립함으로써 욕구를 인간화한다. 오로지 자연적 존재이기만 한 동물은 즉각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롤 때만 생산하며 오직 그때만 자유롭게 생산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그 자체로 이미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의 도야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발전을 통해 가속화된다. 대상적으로 전개된 인간의 본질의 풍부성을 통해 비로소 풍부한 주관적인 인간적 감성, 음악적인 귀, 형식미를 보는 눈이 생성된다. 왜냐하면 오감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각들, 실천적인 감각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적 감각들 곧 감각들의 인간성은 그 대상의 현존재 곧 인간화된 자연을통하여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사 전체는 인간의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곧 인간을 위한 자연의 생성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간은 대상화로서의 노동을 통해 동물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성을 확립하고 확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노동의 질의 문제로 귀착된다. 인간이 노동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그 삶은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적 본질의 대상화라는 형태를 박탈함으로써 임노동자를 자신의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시킨다. 임노동자는 우선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타인, 즉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그 생산물의 축적은 자본의 축적으로 실현되어 그에게 점점 더 큰 적대적 힘으로 맞서 온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노동과정 자체로부터의 소외와 상응한다.
노동과정의 조직과 관련된 일체의 계획과  결정, 즉 관념적 대상화의 계기는 자신이 그 사용권을 구매 한 노동력이 인간의 몸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그 결과 임노동자는 기계의 명령에 순응하여 그 전체적 맥락을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적 동작만을 되플이하는 동물적 존재로 전락한다.

 

소외된 노동이 임노동자으로부터만 인간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소외된 노동을 낳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임노동자와  자본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사적인 이익과 무의식적인 자연적 필요성에 의해서만 타인에게  의존하는
독립적 인간들로 구성하며 따라서 인간이 인간의 기본목적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공동체적 향유를 저지한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각 개인의 활동은 그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주로 상품의 양적 증가로 표현되는 욕구의 이러한 양적 증가는 개개의 인간에게 소원하고 적대적인 힘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팽창에 봉사하는 수단인 한 결코 진정한 욕구의 풍부함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그러한  욕구의  풍부함마져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만 해당될 뿐 각 개인들은 자신의 계급 및 분업상의 지위에 따라 오로지 그 욕구들을 부분적으로만 자기화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진정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과 개인들 사이의 진정한 상호인정으로서의 공동체를 부정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행복한 삶이라 할 만한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삶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삶의 핵심에서 소외된 그들은 여가라는 그 가장자리에서 행복의 가상을 찾는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는  그  행복의 가상을  제공하는데 적극적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악무한적인 상품 소비와 그에  상응하는  온갖 쾌락에의 탐닉에서  그 행복을 발견한다. 그 숭고한 크기로 완성된 상품의 천국 속에서 넋을 빼앗긴채 잠시도 쉬지 않고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실천한다. 그들의 유일하게 진정한  자기표현은  소비활동이며  그들이  유일하게 그  성원으로  인정받는 공동체는 상품공동체이다. 다른 한편 그들은  삶의  모순으로부터의 도피나 그 모순의 가상적 해결에 탐닉한다. 소비 자 본주의에 들어서 그 수단은 지배적으로 문화상품, 즉 대중문화가 된다. 아주 가끔 이 도피나 가상적 해결은 오히려 바로 그 도피나 가상적 해결을 요구하는 현실적 삶 자체의 모순으로 의식의 초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계기를 지니고 있지만 지루하고 단조로운 노동에 의해 초래된 활력의 지나친 소모는 좀처럼 그들에게 그 초점을 유지할 만한 집중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가 시간의 질은 결코 노동 시간의 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출현한,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추구에 비우호적인 환경 속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깊숙히 편입해 들어가고  있으며  그  전진운동은  조직화된 노동의 행보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가 현실적 삶의 불행을 완전히 봉합한 것으로 보이는 선진국형의 소비 자본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 소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저  대상화로서의  노동과는  완전히  단절된 뿔뿔히 흩어진 상품소비자들이 된 자신들에, 상품이 될 수 있는  무수한  것들의 그 상품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실현해 주는 도구들에 불과한 자신들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임노동자와 자본가의 차이는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질과 양에 있어서의 차이로 환원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어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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