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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1
    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간장 오타맨...
  2. 2004/11/09
    아이다(Aida) 중 "개선 행진곡"
    간장 오타맨...
  3. 2004/11/06
    그리스도의 평화
    간장 오타맨...
  4. 2004/11/03
    노동조합과 communication ― 전달인가 소통인가?
    간장 오타맨...
  5. 2004/11/02
    아름다운 죽음(3)
    간장 오타맨...

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 등록일
    2004/11/11 09:17
  • 수정일
    2004/11/11 09:17

감옥에서의 사색.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색'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수'와는 더욱 연관짓기 힘든 이 아름다운 말, 생각, 편지들...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학업에 시달려 맘 편히 책을 손에 잡아 본 것이 벌써 옛날인 듯 한데, 한 글자 한 글자가 머릿속, 아니 마음속에 박혀 세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 책을 샀을 때, 처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얇다더니 뭐 이리 두꺼워~" 라는 비명 섞인 한숨이었다. 게다가 몇 년 전인가 「사형수가 어머님께 남기는 글」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은 온통 '푸른 하늘이 그립다','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이 세상'과 같은 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책도 어두운 말들로 가득 차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책을 넘겨 가면서 나는 어느새 감옥에 들어앉은 수인이 되어 있었다. 그 좁은 방 구석구석 묻어 있는 그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20년이라는 긴 긴 세월을 그는 어떻게 버텨 왔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날 동안 어두운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 어쩌면 그 곳이 그를 이만큼이나 성숙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봄과 가을이 없어 '하동하동'의 반복이라는 감옥에서 오히려 부모님을 염려하면서 빼곡히 채워 넣었던 작은 엽서들이 이제와 나에게도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쇠창살의 풀 한 포기에 감사하는 그의 맑은 마음을 대하면서 뭔가 모를 찡함이 자꾸만 느껴졌다. 책을 읽다 말고 문득 창 밖을 보니 벌써 불그레한 가을이었다.  눈만 돌리면 이렇듯 가까이 있는 가을의 향기를 왜 나는 느끼지 못했을까.

 

감옥의 조그만 창으로 본 가을을 이처럼 간절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여지껏 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모르고 지나쳤던 모든 사물-심지어는 천장의 먼지 하나까지도-이 내가 느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앞만을 보고 달려왔던 것은 아닐까. 아니, 주위에 있던 것들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성취해야할 목표를 위해, 방해되는 것은 잊어버리자는 생각 때문에... 이 책에서 무엇보다 놀랐던 점은 그의 감옥에 대한 생각이었다.

 -육순 노인에서 스물두어 살 젊은이에 이르는 스무남은 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바짝 몸 비비며 살아가는 징역살이는 사회·역사 의식을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방의 기쁨이란 새로운 사람들과 또 그들의 아픔을 만나는 일이라고 할 만큼 그는 그곳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감옥'이라면 으레 떠오르는 욕설과 폭력이 그의 글에 나타나지 않은 대신 세상 사람에게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징역수, 무기수들은 너무도 순수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서문에 나오듯 그가 한 장 한 장의 엽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은 그의 아픔뿐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모든 고뇌와 양심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갑자기 감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에 가서 이처럼 아름다운 생각만을 할 수 있다면. 매일 정신없이 돌아가는 생활에서 벗어나 감옥이란 곳은 어쩌면 너무 평화스러운 곳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지금의 생활을 탓하면서 감옥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배부름에 겨워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무책임한 소리일 것이며 또 그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갈고 닦은 신 씨에게는 너무도 큰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조금만 마음에 여유를 가진다면 어디에서라도 '사색'은 충분히 할 수 있을 터인데.

 

나는 요즘 '2학년이 되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파릇파릇한 1학년으로 고등학생이 되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내년이 되어 생일이 지나면 만 16살, 이젠 나이만 한 살 더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평생 동안의 인격은 가장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청소년기에 결정된다는데 공부에 찌들어 있는 내 모습은 과연 어떤가. 항상 하는 생각들이 눈앞의 이익만 위한 것이 아닌, 우리의 어른들에 대한,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불만만이 아닌, 좀더 나 자신을 고결하게 하는 것이라면 좋겠다.      


 뼈저리는 옥고 속에서도이처럼 아름다운 생각만을 할 수 있었던신영복 씨를 언제까지나 기억하며, 또 오늘의 이 감동을 영원히 마음속에 새기며,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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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Aida) 중 "개선 행진곡"

  • 등록일
    2004/11/09 09:08
  • 수정일
    2004/11/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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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집트의 전략적 위치도 서유럽 열강과 그 자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이집트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건설과 더불어 이집트란 나라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세계의 문화는 케디브[오스만 제국에서 파견한 이집트의 태수 격되는 직위 명칭]가 베르디(Verdi)에게 가극 [아이다](1871년)의 작곡을 의뢰한 것을 다소나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다]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년)을 경축하여 케디브의 새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음 공연되었던 것이니까. 그러나 이집트의 백성들에게 그것은 엄청나게 비싼 선물이었다.
------

 

♪ 아이다 개선행진곡 ♪

 



에릭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 제7장 3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이다]를 봤을 때 그 웅장한 스케일과 환상적인 노래가 아직도 생생하다. 작년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봤을 때는 국립 오페라단의 공연이었는데 주연남여배우는 외국인인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가 맡았고 나머지 배우들은 국립 오페라단원들이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집트 인들은 모두 백인 비스무레한
분장이었고 이디오피아 왕은 얼굴에 약간 칠을 한 백인 분장, 그리고 나머지 이디오피아 포로들은 코미디 프로에서 볼 수 있는 흑인 분장이었었다. 수에즈 운하 개통을 경축해서 만든 오페라이니 개봉 당시에도 이디오피아의 왕은 백인이 했을터이고 아이다는 아마도 유럽에서 잘나갔던 흑인 가수를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봤던 유럽인들과 이집트인 중 상류층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평범한 이집트 인들은 볼 돈이 없었겠지).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상황상 내용상 영 아햏햏한 작품을 대할 때마다 항상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대작에 열광하면서도 느끼는 씁쓸함.


링크된 노래는 [아이다]에서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개선 행진곡"이다.
mp3로 받고 싶으면
http://www.penart.co.kr/ndata/poemmusic/music/10/0092.mp3 을 누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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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평화

  • 등록일
    2004/11/06 21:32
  • 수정일
    2004/11/06 21:32

그리스도의 평화


원유일

                        
어제 판공성사가 있어서 성당에 갔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데요. 꽃처럼 쓰러져간 친구들 생각이 나서요. 내일이 장애인의 날인데 '장애인의 날'이 제정되기까지 많은 장애인들의 희생이 뒤따랐지요. '인간다운 삶'과 '장애해방'을 외치며 분신과 투신자살한 친구들 혹자들은 객끼를 부렸다고 폄하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어쩌면 마지막으로 세상에 대한 각성을 하게 하기 위한 간절하고 피끓는 외침이었으니까요.

비가 내립니다. 하늘에서 내 소중한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나 봅니다. 자신의 삶과 사람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친구들, 이제 내 눈물로 그대들의 상처 위로할지니 편안히 잠드소서. 세상 시름 모두 잊고 하느님 품에서 평화를 누리소서.

             2000년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뇌성마비 장애인 원유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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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과 communication ― 전달인가 소통인가?

  • 등록일
    2004/11/03 09:53
  • 수정일
    2004/11/03 09:53

노동조합과 communication ― 전달인가 소통인가?

임인애 (세기말현장보고서팀, LAN)


● 프롤로그


1999년 8월 23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자율식당 조합원 수련회에서 영화 상영이 있었다.
노조 영상패의 주관으로 제작된 98년 자신들의 싸움을 기록한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란 영화였다. 상영이 끝나고, 식당 아줌마들은 그 자리에 참석한 노조
문화패들을 한명한명 찾아다니며 질문했다.

"저거 누가 편집한거요, 아저씨가 했어요?"
"아니요... 나는 노래패예요..."
영화 상영 때문에 주변은 어두웠다.
그러나 아줌마들은 어두운 가운데 집요하게 돌아 다니며 문화패 모두에게 일일이
확인 작업을 했다.

"그러면 아저씨가 한거요? "
"아니요. 나는 풍물팬데요..."
"그럼 아저씨가 한거요?"

"...."

"도대체 저걸 누가 만들었어요?"
"저거를 여기서 왜 상영을 했어요?"
"저거 우리 위해 상영했습니까? 우리 보라고 상영했습니까? "
"나는 묻고 싶어요. 저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상영한건지...."
"왜... 그 뜨거운 여름 우리가 죽도록 싸운 것은 하나도 안나와요?"
"1년 동안 참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속 뒤집어 집니다. 진짜 억울하고 분합니다.



당신네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이럴수는 없어요. 저거를 도대체 누구를 위해 만들었으며 누구를 위해 여기 이
자리에서 상영한 것입니까?"
급기야 아줌마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삼삼오오 흩으져 독한 소주를 마시며
작년 싸움과 현재 자신들의 처지를 놓고 끝없는 난상 토론으로 들어갔다.
그 한여름 밤의 해프닝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세기말 현장보고서 팀은
하나의 싸움을 놓고 끊임없이 어긋나는 소통, 노동자 내부 커뮤니케이션이란
화두를 다시 한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영상은 노동자의 새로운 매체이다. 1년 전 하나의 싸움이 있었고, 노조 영상패는
그것을 영상으로 제작하여 조합원들 앞에서 상영함으로써 그 싸움에 대한 느낌을
공명시키고자 했다. 어쨌든 뜨거운 여름, 치열하게 전개했던 투쟁에 대한 기록을
함께 보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싸움이 영상이란 매체 속에 담기는 순간 이미지 언어가 가지는 힘에
증폭되어, 그것은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메시지로서 보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여기서 아줌마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메시지를 해독하게 된다. 메시지 해독
과정에서 우선 강한 소외감과 단절의 감정이 일어난다. 아줌마들은 그 자리에서
틀어진 영상이 자신들과 의사소통하지 않음을 느꼈던 것이다. 기록적 방식으로
구성된 그 영화 속에는 분명 그 싸움을 바라보는 어떤 견해가 녹아 있었고, 그
싸움을 주목하는 영역이 드러났고, 그 견해를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과정에서
아줌마들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납득할 수 있는 정보로서 수신을
거부하는 강렬한 몸짓이었다. 더욱 아줌마들은 영상매체가 가지는 정보 전달의
힘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저것을 전국에 틀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싸움은 저렇게 해석될거 아닙니까?"

"왜 저 싸움에 내내 우리가 고생하고 밥해먹인 것은 하나도 안나옵니까?"

"우리는 그렇게 파묻혀서 잊혀져 가고, 저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라는 우리 생각은
어디에도 없어요. 저게 어째서 아름다운 투쟁이었어요? 난 저걸 인정할 수
없어요.

왜 우리는 없는 거예요. 저걸 보니 사람들이 노조가 남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수신을 거부당한 메시지, 그러나 발신은 계속될 것인가....

당시 이 작업에 참여했던 영상패 강사에게 이 상황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 제작이 시작될 당시 7대 집행부의 의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어요.

워낙 평가가 엇갈리고 그래서 난맥은 있었지만 공정성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럼, 아줌마들의 반응은 어떻게 보세요?"

"누구나 자기 얼굴이 안나오면 서운해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차차
해소됩니다."

"우리가 고생하며 싸운 그림은 왜 안나오느냐?"의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들을 주목하지 않는 영상매체의 시선과 그로 인해 결정되는 메시지 발신에
대한 복잡한 문제제기를 아줌마들은 "왜 우리가 없냐..."는 아주 구체적이고
단순한 물음을 통해서 던졌고, 이 매체의 직접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의
대답은 "자기 얼굴 없으면 서운하다는..."것이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또한번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작품이 30분 버전으로 99년 1월 전국 노동자 영상패
수련회에서 상영되고 토론된 적이 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투쟁"이란
제목이었다.

"어째서 아름 다운 투쟁입니까?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

저 싸움은 아름다운 투쟁이 아니었다고 보는데,

저 작품을 만든 사람의 주제의식 입니까? 조합 집행부의 입장입니까?

작품의도가 무엇입니까?"

"워낙 민감해서 우리 의도나 해석을 내릴 수는 없었어요."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나 느낌이 배제된 조합의 입장을 대리 표현하는 것으로
노조 영상패의 작업이 지속된다면 집행부 바뀔 때마다 나팔수나 기능인으로 갈
소지가 많은데 틀리든 맞든 이제 우리도 자기 표현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미디어 속에 담는 내용이나 시선 관점들이 충돌할 때, 노동조합 입장이냐
매체 생산자의 자기 표현이냐는 토론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이제 하나의 투쟁에
대한 해석을 노동조합 지도부가 전적으로 독점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가 차츰
생겨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전혀 다른 해석, 전혀 다른 표현, 활발한 질문과 응답의 복원, 다양한 견해의
자유로운 표현, 그동안 지침과 명령 교육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노동자 내부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구는 이렇게 혼란속에서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었다.

 

1. 노동조합 의사소통 딜레마

그러나....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단결 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나 너와 철의 노동자 (철의 노동자 가사
중에서...)"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파업가중에서...)"

수없이 노래하고 되뇌었던 단결 이데올로기와 노동자 내부 분열의 현실적 효과에
대한 고려는 다양한 견해를 극한까지 개진하는데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 단결해야
하는 순간과 대립해야 하는 순간에 대한 이중전략이나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파업공간은 분열과 단결의 이분법만 존재했고, 첨예한
이견들은 언제나 봉합된다. 승복할 수 없는 지침이라 할지라도 강한 문제제기는
자칫 파업대오를 분열할지도 모른다는 자기검열이 작동하고, 투쟁 방향에 대한
결정권은 지도부가 독점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모두가 인정한다. 이쯤되면
의사소통은 딜레마에 빠진다. 급기야는 "지도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는 조합원은
회사측이 파견한 프락치로 규정한다"*주)는 수칙이 유인물로 뿌려져도 이 정보에
대한 발신과 수신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주) {{현자노조 중앙비대위 속보 58호, 1998년 7월 23일자}}

 

98년 현대자동차 파업이 정부 중재안 수용으로 윤곽이 잡힐 무렵 활동가들의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의 의사소통 마인드를 지배하고 있는 분열에 대한
두려움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투쟁이 잘못 됐지만 분열은 원하지 않는다.

대오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보일까봐 대단히 자제하고 있다."*주)


*주) {{1998년 8월 23일 11시경.}}


"원래 싸움 판이 열리면 이견은 표출이 안되요. 싸움이 진행되는 공간에선

이견을 내거나 팥나라... 콩나라...는 안 어울려요. 끝나고 나서야 나오는지...

이견을 상정한다 한들, 판이 바뀌지는 않아요. 이미 판이 그렇게 가고 있기
때문에..."*주)


*주) {{1998년 8월 14일 21시경}}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우리가 분열하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집행부에 힘을 실어줘야 하고 사분오열 하지 말고

끝까지 단결된 모습 한목소리를 내야 합니다."*주)


*주) {{1998년 8월 21일 20시 20분경}}


"우리 모습이요, 이게 다예요. 우리 분노가 회사관계도 아니고

노동조합을 때리 뿌수지도 못하고 그냥 속으로 삼키는 거예요."*주)


*주) {{1998년 8월 23일 20시경}}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파업농성장에서....)


2. 그들은 너무 달랐다.

평조합원들 역시 "명령만 내리십시오." "지침에 따르겠습니다." 라는 구호를 텐트
입구에 스프레이로 새겨놓고 있었지만 정부 중재안 수용을 결정한 지도부에 대한
입장은 훨씬 단호했다. 그들의 일부는 협상의 가닥이 분명해지는 순간 아예
공장을 나가 버린다.


"오늘 부터 3분의 1은 빠져나갈 거예요."*주)


*주) {{1998년 8월 21일 22시 30분경}}


"이미 빠져나간 사람 많아요. 열받아서 텐트에다 쓰레기 던져버리고
나가버렸어요.

어제 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위원장 이름을 연호하고 외쳤던 사람이예요."*주)


*주) {{1998년 8월 22일 09시경}}


"하나의 비유를 들자면 정부가 국민을 호도하는 것처럼 지도부가 조합원을
속였어요.

어리석은 국민들... 어리석은 노동자들...."*주)


*주) {{1998년 8월 24일 새벽 1시 30분경}}


"이런 협상 할 것 같으면 왜 싸움을 시작했는지... 왜 한달 동안 조합원들
잡아놓고

관들어라 뭐해라... 대가리 삭발은 미쳤다고 했어요? 인제 이 조합원들 누가
책임져요?"*주)


*주) {{1998년 8월 21일 18시경}}


"단한명도 안받아들인다고 해놓고 277명을 받아 들였어요. 277배 투쟁기조가
바뀐건데

이건 분명 우리에게 거짓말 한 거예요."*주)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파업농성장에서....)


*주) {{1998년 8월 22일 12시 30분경}}

 

하지만 지도부의 지침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처음부터 운신의 폭은 두개 밖에
없었다. 제3의 방법이란 경험도 없었고 상도 없었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우리야 위원장이나 대의원 따라 하는거지요. 뭐...

우리가 이렇게 하라한다고 이렇게 할 것도 아니고... 뭐 알아서 하겠지요.

우리는 뒤에서 따라만 주면 되는 거지요. 얼토당토 안 하면 안되겠지만

일정정도 비슷하면 따라주는 수 밖에 없어요."

이렇게 시작된 불완전한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한 번 균열이 일어나자 복원이
불가능한채로 걷잡을 수 없는 단절로 치달았다. 이미 지침과 명령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겠다는 구호와 단결 이데올로기는 허상이 되고만다. 농성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가끔 비공식적인 의사소통 체계내에서만 자신을 표현하면서
서늘한 관찰자로 돌아선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그들의 의사소통은 형식만 남고
침묵과 단절과 냉소 만이 들어선다. 파업을 위해 쏟아부었던 열정과 에너지가
순식간에경직된다. 일부 현장조직에서는 타결후 상황, 이후 일정을 놓고 대책
마련에 들어가지만 순간순간 자신을 던지며 싸웠던 평조합원들에게는 이미 모든
것은 끝이 나버린 것이다. 그들에겐 기약할 만한 이후도 내일도 챙겨야 할
대책회의 일정도 없었다.


"정리해고 철회없이 한발짝도 못나간다!"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

36일 이란 그 긴 시간 내내 외쳐댔던 구호들과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공장을
나가야 했던 실제 행위 사이에서 그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적어도 그 구호를
의례적인 투쟁의 수사학이나 상징적인 슬로건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목소리라
생각하고 외쳤던 사람들에게는...

"거짓말과 배신"이라는 원색적인 단어외에 더 이상 할 말도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정말 한 번의 배신도 힘든데 두 번 세 번....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병든 애들까지 팽개치고....이렇게 끝내자고 시작한 싸움은 정말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정해진 각본에 놀아났다는 느낌밖에 안듭니다."

"결국 노조가 도장을 찍어버버렸네요. 우리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결국 도장을
찍었군요.

그동안 현장에서 여러 목소리를 냈는데 조합원은 조합원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그런데 왜... 도대체 눈 감고 귀를 아예 틀어 막았는지... 왜 이렇게 우리 마음을
모르는지...

왜 이렇게 막판에는 우리를 버리는지... 아줌마들이 다 그래요.

저사람들은 급해지면 우리를 버린다. 이렇게 노조에 대한 불신과 배신밖에
안남았는데...

이후 노동운동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이제 다 끝난 거란 생각이 들어요."

"집행부 믿고 36일간 이렇게 싸워왔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니 너무 너무 허탈하고
남는

것은 배신감밖에 없어요. 정말 믿고 따라왔는데,이건, 결국 사람들을 기만한
거예요...."*주)


*주) {{1998년 8월 24일 12시경}}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파업농성장에서....)


"조합원들을 살리기 위하여 차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위원장의
메시지는 더 이상 수신되지 않았다. "위원장님... 우리는 끝까지 투쟁해야
합니다."라는 메시지 또한 발신만 거듭 되고 있었다.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했다. 24일 사수대들은 파업기간 내내 입고있던 녹색티를 하나하나 벗어
노동조합 앞에서 불태웠고, 그 곁에는 위원장의 결사항전 각오를 상징하는 관이
박살나 있었다. 불꽃에 쌓인 나무관이 탁 탁 갈라지는 소리만 들렸고 그들은
오랜시간 침묵하며 녹색티가 재가 될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25일 식당
아줌마들은 노동조합 집기를 산산 조각 박살냈다.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응답은 그렇게 표현되었다.


우리는 지금 부터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하기 위하여

노동운동 내부의 의사소통 관행중 문제점 몇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3. 집회와 커뮤니케이션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집회와 유인물을 통하여 결집되고 표현되었다. 이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배적인 매체로서 가동될 것이다. 집회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의사소통해왔던 대단히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집회와 가투로 몰아부친
87 대투쟁의 그림을 상상한다면 집회는 집결이고 폭발이고 서로를 느끼고
확인하는 소통과 연대, 투쟁의 성격과 정보가 순식간에 교감되는 독특하고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었다.


그것은 어떤 매체보다 직접적이고 동시적이었다. 발신과 수신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표현의 현장성,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체감지수를 절대적으로
상승시키면서 명쾌한 전략과 기발한 전술들은 즉석에서 창출된다. 이렇게 투쟁은
재빨리 속살을 채우며 심화되고 확산된다.


이때 체험하고 소통하는 정보는 발언되어지는 것 이상이었다.

누가 발언하는가 누가 응답하는가에 대한 경계는 무너지고, 발언 내용과 응답
사이 말의 의미가 꼬리를 물고 증폭한다. 그 순간 소통된 정보의 질감은 단순한
말의 의미를 뛰어 넘는다. 언어라는 코드에 에너지가 팽창하면, 폭발 직전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이것을 사람들은 "가슴 벅찬... " 혹은 "온몸으로 느꼈다..." "집회 분위기
좋았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래서 구체적 내용을 물으면, "내용이 중요해?
분위기지! " "그냥, 감동 그 자체 였어...."

그리고...

보름이고 한달이고 다리 아픈 줄 모르고 도시를 가로질러 뛰면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가투를 치룬다. 우리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런 에너지 속에서
성장해왔다.


그런데 말의 의미 문자적 코드 이상이 소통되던 공간, 내용 보다는 느낌이었던
집회에서 언제부터인가 느낌이 거세된다. 느낌이 거세되자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으로 경직된다. 화려한 연설적
수사가 용량 높은 앰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지만 이제 모두 "집회가 전만 같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집회가 내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민주노조 운동
10년의 시간만큼 연단위의 수사적 테크닉은 분명 세련되어졌고 고물 앰프로
투박하게 선동할 때 보다 내용도 훨씬 명료하게 전달되는데 사람들은 '내용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집회를 "내용이 없다.."는 말로서 평가한다. 그것은 곧
소통된 내용이 없었다는 표현이었다.


연단에 선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발언권을 독점할 수 밖에 없는 집회 형식 자체가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란 형식적
쌍방향성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방성이냐 쌍방성이냐는
이분법적 개념에 몰두하다 보면 때로는 형식을 깨뜨리고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또다른 현실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대신해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느낌이 소통되는 공간이 있다.
그것이 집회이고 연단이 높고 마이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발언이
이루어지는 내내 열광적 환호나 지지의 함성 없이 침묵만이 흘렀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경험을 종종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누군가 꼭
찝어서 표현 할 때, 모두가 발언하지 않았지만, 굳이 일방적이라 평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통이란 표현의 형식이나 질량 관계, 누가 많이 발언하느냐...
그리고 매체의 속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조합원을 대신하여 '판단'한 지도부가 그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고 지침을 전달하는 자리에는 비장한 침묵도 시선
맞추기도 울림도 사라진다. 함께 판단할 의사가 없는 공간, 질문을 받지도 응답도
묻지 않은 채, 한편에서는 말하고 한편에서는 들어야 한다. 연단위와 아래는
철저히 분리되고, 발언권을 독점하고 있는 지도부들의 원고는 천편일률적으로
흐른다. "그 소리가 그소리..."가 된다. 이쯤되면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된다. 민감한 내용도 새로운 소식도 없이 "열심히 투쟁합시다!" "끝까지
투쟁합시다!"란 상투적 구호가 공허하게 반복될 뿐,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그곳은
이미 폐허였다. 누가 거기 가고 싶어지겠는가? 평조합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왠만한 지역 집회는 활동가들의 의무조항으로 당착된다.


더욱 이런 상황은 집회의 중앙집중을 강화시키고, 그렇게 잡힌 집회를 참석하기
위해 그들이 종종 전세 낸 관광버스 안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만만챦아 진다.
그들의 활동내역중 1/3은 집회참여로 채워진다. 또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
집회에서는 동원에 대한 고민이 추가된다. "조합원들을 어떻게 집회에 데려갈 수
있을까...?" 이것이 중요 안건이 된다. 동원해야만 하는 집회... 이미 자발적인
의사소통이 증발해버린 공간이다. 90년대 중후반을 들어서면서 누구나 이런
체험을 했다.


4. "예"라고만 응답하시오!

그러나 96, 97 노개투 집회부터 상황이 반전되었다.

평소 천단위로 모이던 울산의 태화강 고수부지 집회에 1996년 12월 26일, 만단위
인파가 운집했다. 그날은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된 날이었다. 조합원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깃발이 도열하고 단위사업장의 위원장들이 연단위로 오르고
사회자는 정해진 식순대로 집회를 진행했다. 연단위의 인사들은 차례차례 나와서
비슷 비슷한 정세분석과 국면에 대한 설명을 반복했다. 여전히 연단위의 연설은
조합원의 상상력과 소통하기에는 너무 고정된 틀에 갇혀 있었다. 흐름이나 리듬,
집중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높은 톤으로만 일관하는 선동과 연설, 구호는 왜
싸워야 하는지는 알기 때문에 나온 조합원들의 판단과 상상력을 오히려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연단아래 앉아 있는 조합원들 또한 열심히 듣기를 포기하고,
의례적인 박수나 구호를 시간 맞추어 반복한다. 그래서인지 연사들은 발언 중간
중간에 "여러분 맞습니까?" 라는 문장을 반드시 구사하면서 청중들의 "예"라는
답을 확인한다. 맞습니까.../ 예..../ 그럴 수 있습니까.... /예 는 그날
집회기간 내내 반복되던 대화형식이었다. 예라고만 대답을 강요하는 연설
형식...그 공간에서 투쟁의 에너지는 규격화된다. 끝까지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
예... 지도부의 고민은 오로지 이 대오를 언제 까지 유지시킬 수 있느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어떻게 싸울 것이냐를 웅변했던 내용을 다소 지루하더라도 옮겨 적어 본다.


사회자 : .... 예, 우리.... 우리의 승리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다같이 결의 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사회자 : 예, 믿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현총련 의장이면서 민주노총 부의장이신
.... 의장님 을 모시고 민주노총 투쟁 방침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 시기 바랍니다.

의장 : 반갑습니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급기야 오늘 새벽 천인이 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 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한 것입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를 정면으 로 부정하고 ..... 동지 여러분.... 강력한 총파업 투쟁으로
박살내야 합니다......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님의 투쟁 방침을 철저히 따릅시다. 좋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휴가 또는 직장폐쇄가 단행되더라도, 이를 거부하고 주야 공히 정시 출근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낮 시간은 단위노조별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오후 4시 부 터는 거리로 나와서 국민과 함께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모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려면
폭력투쟁 가두투 쟁을 자제해야 합니다. 동지여러분 국민과 함께 비폭력
평화투쟁을 힘차게 벌려 나 갈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투쟁 지도부의 지침을 철저히 따릅시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부를 우리의
손으로 지 켜냅시다. 그럴수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신정 휴가를 반납하고 힘차게 투쟁합시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오늘밤부터 간부들은 철야 농성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그리하여 김 영삼 정권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힘차게
투쟁합시다. 동지 여러분 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도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칩시다. 승리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강력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갑시다. 투쟁합시다. 승리합시다.

군중 : 예...

의장 : 동지여러분 감사합니다.


"예..."라고만 대답하라 이미 투쟁 방침은 결정되었다. 지도부를 따르라....

이것이 발표하는 지침의 기본구도 였다.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노개투,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울산 집회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비폭력 평화투쟁의 기조를 위하여
질서유지대가 조직되었고 한달을 넘기는 시가행진중, 가끔 나타나는 돌출적인
가투는 금방 통제되었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결정된
이상, 싸움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창조적인 움직임과 판단은 금지된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넘나들던 지금까지 노동자 투쟁의 노하우는
폐기처분된 것이다. 평조합원들의 에너지는 거대한 행진 속에 고정되고, 의례적인
스펙타클의 한부분을 이룰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발한 전술도 격렬한
표현도 아이디어도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판은 이미 다 짜여져 있었고,
집회는 앉아서 구경하고 국면이 진행됨에 따라 나타나는 지역 인사들의 연설만
열심히 경청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집회는 일정이었고 이만큼 투쟁하고 있다는
물리적 증거였고, 지도부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전달했고 끝까지 투쟁하자고
당부하고 당부하면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오래된 연애 같이 .투쟁은
그렇게 거듭거듭 확인 절차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지도부들이 평조합원들에게
잠재하고 있던 미지의 열기는 지나쳐버리는 순간, 평조합원들의 수동적인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굳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없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끝없이 인도를 타고 줄지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파업이 철회되었고 1년후 98년 1월 그들의 대표는 노사정위라는 틀속에서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 도장을 찍었다. 96년 12월 26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권영길 위원장, 민주노총 , 지도부라는 단어를 거명하며 그들의 지침에
철저히 따르라는 발언을 했던 사람도 도장을 찍어주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평조합원들은 집회연단에서 나오는 발언은 이미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치적 협상과 압박을 행사하기
위해 치루는 집회와 진짜 싸움을 위해 결집하는 집회를 구별할 줄 아는 통찰력
정도는 당연히 생긴다. 또다시 집회 동원력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소통은 없고
전달만 있는 집회.... 평조합원들의 정세 판단이 서기 전까지 당분간
소강국면으로 들어선다.

 

하나만 더 그날(1996년 12월 26일) 집회의 발언을 인용해보면....

16시 43분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위원장의 연설이다.

"예, 반갑습니다. ... 현대중공업에서는요... 4000명이 오토바이 타고
나왔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에 2명씩 그러면 오토바이 몇대왓습니까? 예,
오토바이가 한 2000대 나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한 만명 왔죠? 예, 한 만명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 4000명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는
가깝고 자동차는 3만 5천이고 현대중공업은 2만 2천 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현대자동차는 당연히 많이 와야 됩니다. 맞습니까? 그 못지 않게 작은 사업장에
있는 세종공업 효문 단지에서 동양나일론에서 모든 동지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울산 노동형제 일어섰다 하면 전국이 흔들립니다. 맞습니까? 전국의
노동형제들은 울산을 예의주시 하고 뭔가를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87에서
또다른 역사를 만들어나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낼 수 있습니까?"

"예"

"정말입니까?"

"예..."

"예,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연설은 쇠소리 톤이 아닌 아주 소박한 말투로 구사되었고, 그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솔직하게 집어내어 얘기를 풀어 나갔던 이유로 듣는 사람들
얼굴에 잔잔한 웃음까지 번지게 했고 줄곧 경직되던 분위기를 다소
이완시켜주었다. 당시 그 위원장의 느낌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이 연설은 선동과
정치적 언어로 일관하는 수사력과는 다른 질감, 무엇인가 자기 생각을 말로
건네는 듯한 느낌을 그 공간에 불어넣은 것은 분명했다. 획일적인 말투와
내용에서 조금만 탈피해도 잠시 틈새는 생긴다. 경직된 분위기는 풀리고 사람들의
표정은 금새 생생해진다. 그들은 귀기울이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중간중간
"예"라는 답을 전제한 "....맞습니까?"에 대한 응수도 좀은 달랐다. 그러나
모처럼 자신을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한 연사의 발언 내용에는 집회 동원력에 대한
강박관념과 큰 사업장과 작은 사업장에 대한 구별짓기라는 무의식이 적나라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87의 기억, 울산의 이미지로 자신감과 결의를 고취시키는
수사학 속엔 투쟁경력과 울산 이라는 지역구도에 따른 기득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수직적인 연대개념이 숨어 있었다. 집회는 경험유무에 상관없이 함께
투쟁하러 나온 자리이고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이 수평적으로 소통되는
곳이다. 그런데 큰 사업장 작은 사업장 동원능력을 출석체크 하는 곳도, 각
사업장의 상이한 조건들이 확인되는 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 이 덩치큰
집회를 예의주시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력이나 등수를 상기해서라도 한 번
잘해보자는 식의 이야기는 우선 당사자들에게는 뿌듯함과 자신감을 줄지 모르나
노동자 내부 분할구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투쟁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직접 싸우는 것이다. 집회는 그 싸움에 대한 풍부한
의사소통의 집단적 매체이고, 발언은 소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표현은
최대한 진실해야하고 구체적이어야하고 솔직해야한다. 이견들은 최대한 첨예하게
부딪히고 토론되어야 하고 정보는 열려져야 하고 모두가 스스로 판단할 수있어야
한다. 표현이 형식적이면 소통도 형식적이다. 표현이 획일적이면 꼭 그만큼만의
소통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러나 집회의 규모로 투쟁에 대한 양적 수치를
확인하려는 순간 집회는 소통보다는 동원 그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되고, 집회
참석과 불참이라는 분할선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도부들은 무수히
초조해진다. 모든 동력과 조직력은 그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집회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는 조합원을 느낄 수 있는 지표가 무엇인지, 자발성과 잠재력을
무력화 시키는 동원전술에 대한 맹점은 어떻게 드러날지.... 제3의 전술도
무엇인지... 평조합원들의 생각이나 은밀한 표현은 어떻게 흐르는지.... 소통에
실패한 지도부들은 감각은 이 모든 물음을 비껴간다.


"그날 96년 12월 26일 새벽에 국회가 그렇게 된 그날...

활동가들이... 현장을 돌았지요. 그날 당일은 조합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나오는 순간 정문 앞에서 바로 집회를 하고 싸웠어야 했어요.

줄도 맞출 필요 없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서서 비좁으면 담벼락에도 올라서고

현장에 있는 엠프 가져다 쌓아놓고 바로 그기서 집회하고 싸웠어야 했어요.

열기가 막 느껴졌어요, 그 순간은.... 조합원들도 그걸 바랐던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형식이 없어지는 순간, 차있는 열기를 뽑아내야 계속 충전될
것 같은 것... 끊임없는 완전 연소를 해야하는 순간..샘물도 고인 것은 퍼내야
새물이 솟아 나는거 아니까? 그런데 고수부지까지

인솔해 가고 형식적인 가두행진을 하고 그러면서 이상해졌어요. 달리는 순간 힘이
다 빠져버린 건지.. 판을 읽었는지... 취향에 안맞는 건지... 우리도 그때 이게
아니다라고는 느꼈지만, 그 다음 부터 조합원들이 도통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위기감을 못느낀다...관리자들의 통제가 너무 심하다.... 뭐,
말들은 많았지만, 싸울 만큼 싸워본 조합원들인데 동원하고 규격 맞추는 집회에는
더 이상 목매달지 않는 것 같아요. 막상 작정을 하고 덤볐는데 아무것도
안느껴진다 생각되면 안나와요. 관리자들 탄압 받아가며 나올 이유도 열정도 싹
식어버렸던 거지요. 뭔지 모르겠 지만 판을 읽는 것 같아요. 우리 조합원들 너무
안움직인다 이상하다... 밖에서 말은 많 지만, 거칠고 투박해도 조합원들은
민감하고 정확한거 같아요. 말은 안하고 있지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눈감아
버려요...

노개투 싸움에 대한 우리 몇몇 생각은 이래요.

이걸 우리가 못느끼는 것 같아요. 뭐...느낀다한들 별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이후로 울산에서 하는 지역 집회에서 현중위원장들은 종종... 우리 사업장
조합원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현장의 탄압이 워낙 강고해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덧붙이고 연설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대체로 노개투는 대중참여가 활발했던 적극적인 집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사소통이란 잣대로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문제점은 심각했다.
구체적인 날짜와 지역에 한정하여 예를 들어 묘사한 탓에, 당시 전국의 집회
전부를 규정하기에 다소 무리는 따른다고 본다. 그러나 집회와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서 접근한다면 일반적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느끼고 이야기한다.

"집회는 집회야. 딱딱하고 설렁하더라도... 집회는 집회로서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집회에서 더 이상 무얼... 집회는 집회야!"

이미 집회는 평조합원들의 의사소통 매체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적절한 시기 모인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집회의 기능이
있는데..."

국면이 조성되면 집회를 잡아야 하고, 앞으로 당분간 집회라는 형식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모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 노동자
투쟁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부분까지 동의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집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복원시켜야 할 것이다.


5.폐쇄회로-전달인가, 소통인가?

집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노동자의 미디어에서 의사소통- 우리는 이것을 전통적
의사소통 형식이라 생각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본단위로 구성된다. 한쪽에
발신자가 있고 한쪽에 수신자가 있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뼈대만 그린다면...

메세지(정보)

발신자----------------> 수신자


이런 경로 속에는 한편에서는 말하고 한편에서는 듣는다.

또한 발신자와 수신자는 인위적으로 고립되고 인위적으로 결합된다.

수신자 발신자 사이의 영향력과 상호적 관계는 메시지나 정보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런데 정보나 메시지에 대한 발신자의 선택의 영역은 참으로 다양하고,
선택과정에는 주로 패권적 담론과 코드가 작용되면서 정보가 결정된다. 그러나
수신자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할 자유,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모델 속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에서 수신자는 수동적인 액션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더욱 분쟁과 문제 일으키기는 자칫 노노분열로 해석될거라는 불문율
속에서, 그들은 종속과 침묵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신할 때는 물론, 회피할 때조차 발신자의 코드에 종속되어야 한다.
코드를 깨트리거나 위반할 수도 범주를 벗어날 수도 없다. 예를들면 집회 참석과
불참은 메시지의 수신과 거부로만 해독될 뿐이다. 그것이 발신자가 선택한
코드이다. 그러나 코드를 달리하면 그들의 침묵이나 집회 불참등은 단순히
수동적인 거부가 아니라 제 3의 행위나 또 다른 직관이나 표현일 것이다.

발신자의 해독능력 바깥 코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통용되는 지배적인 코드
밖에서 일어나는 평조합원들의 다양한 코드나 의미들을 발신자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 소통불눙 어긋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평조합원과 지도부가 위 모델
속에서만 커뮤니케이션 할 때, 상황이 조금만 민감해지면 모든 것은
어긋나버린다.


아직까지 노동자 내부 의사소통에서 발신자의 위치는 주로 지도부들이다.

집회, 노조신문, 유인물, 영상등은 주로 발신자들이 더 많은 정보를 수신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고 가동된다. 정보가 일방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발신자들은 노동조합의 대소위원 조직체계를 통하여 가끔
수신자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매개과정이 추가될수록 최초의 표현들이
굴절될 가능성이 큰데다, 그 수렴하는 형식이 대의원 대회나 간담회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공식적인 언어의 형태를 강제 받는다. 더욱 대의원들의
전달력이나 취사선택이 가미된다면 이때 발신된 메시지의 생생함이나 코드의
민감함을 떨어뜨릴 위험조차 존재한다. 아주 건조한 메시지가 수신된다. 애초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기도 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6.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1998년 8월 21일 갑자기 만들어진 노조앞 집회에서 조합원들은 위원장에게

"우리 조합원들 발언을 제발 들어 주십시오, 위원장님..."

"위원장님, 바쁩니까? 회사하고 마라톤 협상도 하는데....

아무리 바빠도 밤을 새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제가 여러분 얘기 안듣겠다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대소위원 통해서
듣겠습니다.."

"대소위원 통해서 올라가야 말이지... 우리얘기가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제발 직접 들어 주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대소위원들을 통해 올라간다 만다의 사실 여부보다
평조합원들은 자신들이 발신한 메시지가 대소위원들을 통하여 원활하게 지도부로
수신되지 못한다고 체감하는 현실 이다. 잘 소통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왠만해서는 발신을 멈추고 침묵하고 지켜본다. "뒤에서 따라주면 된다...."는
인터뷰 내용은 이런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얼토당토 않는....."
순간이라고 판단되는 순간까지는 그들은 왠만하면 잠자코 있는 쪽을 택한다.
그런데 그날 굉장히 파격적인 소통을 제안한 것이다. 대소위원을 통한 의사소통
관행과 경로를 무력화 시키고 직접 발언에 나선 것이다. 연단위의 연사가 바뀐
것이다. 위원장과 집행부는 정말 오랜만에 집회 형식 속에서 수신자의 위치에서
들어야 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3시간이 넘는 자유발언대가 불빛도 없이 진행되었고, 평조합원들의 단호한
어조 일상의 언어들은 거침없이 쏟아졌다. . 집회에서는 전혀 쓰여지지 않는
언어와 말투였다. 생소한 어감과 금기의 발언들이 주저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참
이상한 집회였다. 앰프도 약했으며 문선대의 투쟁가도 연단도 조명도 없었지만
3시간 내내 긴장감은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열심히 발언했고 열심히
집중했고 동의와 지지를 표현할 때는 밀도가 다른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어와 비언어의 리듬이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매개없는 직접 발신, 그렇지만
단지 수신만을 요구하는 발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날 이 새로운 발신자들은
끊임없는 의문형 문장으로 발언을 채웠는데, 그것은 단순히 "예"를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복잡하고 상세한 서술을 요구하는 주관식 의문형을
끊임없이 펼쳐가며 어둠 속에서 길지 않은 분량으로 골고루 즉석에서 마이크를
돌려가며 팽팽하게 3시간 짜리 집회를 사회자 없이 진행한 것이었다.*주)


*주) {{영상자료 참고}}

 

그 순간 그들 행위는 수신자에서 발신자로의 단순한 위치이동 이상이었다.
전통적인 의사소통의 양극 구별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전통적인 소통 모델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표현이 일어났던 것이다.

권력을 가지는 말투, 규범화된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발언, 전혀 새로운 어감,
형형색색의 다른 의견과 내용들을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했고, 또한 귀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어도 되는 연설, 말의 구색과 테크닉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연설, 눈치도 검열도 없는 자리, 권력화된 언어가 사라지고
발언의 독점권이 무너진 자리에서 자유로운 표현과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색다른 경험, 초기 노동운동 시절의 기억, 집회 커뮤니케이션의
느낌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한다.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옛날 집회할 때 그때 그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싸움은 그날 우리 요구대로 안됐쟎아요?

그냥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게 곧바로 모든 해결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날 그들의 절실한 발언들은 진심이었지만 요구하는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발신자 또한 메시지에 대한 피드백 정도로 감지했을 것이다. 정보내용 실행에
대한 결정권 또한 순전히 발신자의 권리였다. 그것은 엄청난 권력이다. 발신과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는 지도부와 그 반대편에 있는 평조합원들, 그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아직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다. 지도부에게 항의하고 요구하거나 수긍해주는 관계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평조합원들의 정체성 또한 혼란스럽다. 다만 우리는
실패한 경험을 통하여 의사소통이란 단순히 정보의 발신과 수신이 아니며, 발신된
정보의 피드백 수치로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미묘한 버전이라는 것을 확인할
따름이다. 정보 소통 경로를 바꾸는 문제, 회로의 일방성과 폐쇄성을 허무는 문제
정도로 밑그림이 잡힐 뿐이다.


그래서 98년 8월 21일은... 수정을 요구하는 수신자들의 항의에 불과했는지,

노조의 권력과 질서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 행위였는지... 정말
모호하다.

하지만 강도 높은 파열이었슴은 분명하다. 당시 집행권자들에겐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우리 모두는 그날을 공개해야 한다. 그때 발언되어진
말들을 꼼꼼하게 뜯어보면서 평조합원들의 전략과 전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연구자들이 수십편의 논문을 통해서 구축한 이론들 종류가 그날
그 자리에서 다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그들은 경영참여에 대하여..../
노동조합이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원칙에 대하여... / 만약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면 선정기준에 대하여... / 노자의 협상 본질에 대하여... / 협상의
전술에 대하여... / 선동의 상징성이 안고있는 거짓과 진실의 양면성에
대하여.... / 이미지전술에 대하여... / 협상팀의 구체적 행동지침에 대하여....
/ 집회진행에 대하여... / 공권력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하여.... / 그리고
그들 노동과 투쟁에 대하여... 그들은 전략 전술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예"라는 응답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대신 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들에게 사소한 결정까지 맡겨버려야 한다. 최대한 서로 다른 견해와
다양한 정보를 걸러지 말고 공개시키고 유통시키는 것, 소통하고 의논하고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수평적 관계를 실제적으로 복원시키는 것, 그들이 "가르치거나
이끌어 내거나 조직화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는 것... 명령과 지침이란 말이 주저없이 통용되는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것...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토대는 여기서 시작한다.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정보를 던지고 그 정보를 받아 안는 것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완성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정보의 송신도 수신도 아니고, 정보의 피드백 과는 다른
특별한 교감이고 상호적인 심리작용이며,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 다양한 표현,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합의제와
다르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끊임없는 긴장관계속에서
일어난다. 그런 의사소통 과정은 정보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행위의 선택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열어놓을 것이며, 어떻게 투쟁할 것이냐를 놓고 무궁무진한 전술과
전략을 창출 될 것이다. 평조합원들, 그들의 생생한 화법때문에 정보확산이나
전달력 또한 배가될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새로운 매체와 만날 것이다.

의사소통은 정보를 운반하는 미디어 조건이 중요하지만 결코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아무리 새로운 매체가 노동자의 손에 주어진다하더라도 그것이 곧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폐쇄회로는
전복될 것인가...

인터넷이나 사이버, 그곳이 그들의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표현력들로 넘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될지, 통제된 정보, 획일화된 전달사항, 언제나
승리할 것이며 승리했다는 현실감을 상실한 투쟁소식으로 채워지는 또 다른
폐허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국가의 노동통제는 노조의 체제내 포섭으로 유연화 되고 있다. 끊임없이
제도화되는 노조의 사회적 권력이 자본의 파트너가 될것인가 평조합원들의 진정한
대표가 될 것인가 평조합원들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은 그것을 감시 할 것이다.


● 에필로그

정리해고자 이 덕기

그는 90년 입사자이고 98년 정리해고된 활동가이다. 정리해고후 실업자 재취업
교육으로 홈페이지제작교육을 하루 4시간씩 3개월간 받았다. 그는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룰줄 알게되었고 퇴직금을 틀어 자신의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했으며
1년이 넘도록 울산을 떠나지 못한채 예전보다는 많아진 시간을 인터넷 정보
사냥으로 게임에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업장 홈페이지나
노동운동 관련 포럼방이나 시유지에는 진입하지 않는다. 혹 진입하더라도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어느때 보다 10년 노동운동을 되돌아 보며
생각나는 것도 느끼는 것도 기억나는 일도 많다고 한다. 그는 세기말 현장
보고서팀에게 많은 얘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는 특별했다. 그래서 직접 쓰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소중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다소
계몽적인 권유도 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안면들과 관계들,
혼란스러움 소통부재의 상실감에 대한 상처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며 접속을
거부했다. 그는 다른 일을 찾아갔다. 장거리 트럭을 운전하는 동생에게서 새로운
일을 배우고 있다. 여전히 컴퓨터는 일상적으로 시간이 나는 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고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결코 현장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털어내고 정리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접속은 단지 기술적 문제 해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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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

  • 등록일
    2004/11/02 09:18
  • 수정일
    2004/11/02 09:18

아름다운 우리말 '아름다운'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만남 아시아나, 아름다운 시절, 등등 최근들어 '아름답다'라는 형용사의 지나친 사용이 오히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 뜻을 새롭게 되새기는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토요일(6월 13일) 오후 3호선 독립문역 서대문독립공원에서는 <제10회 민족민주 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열렸습니다. 10년전인 90년 6월 10일 성균관대학교내에서 어렵게 치뤄냈던 첫번째 추모제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만해도 87년 6월 항쟁의 여력이 제법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교문 봉쇄로 일행들과 함께 담을 넘어 참석했었습니다. 추모제의 마지막 행사로 열사들의 영정을 들고 혜화동 성대에서 동대문 한울삶(유가협사무실)까지 행진하려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며 행진을 무산시켰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성대 정문앞 도로에 주저앉아 절규하던 유가협 어머님,아버님의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당시 90년 7월호 말지 표지에 한사람이 영정을 부여안고 쓰러진 사진이 실렸고, 올해 6월호 말지에 그 표지인물의 어제와 오늘- 47쪽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후 해마다 열사.희생자의 숫자는 우리사회의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오히려 늘어만 갔습니다. 특히 '분신정국'이라 일컬으던 91년 봄엔 강경대의 죽음을 시작으로 김기설,박승희,김귀정등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습니다. 저도 그해엔 참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시인 김지하,서강대 박홍총장의 요설과 정원식 국무총리의 밀가루 뒤집어쓰기를 통해 군사정권은 수세국면의 정국을 돌파했었죠. 통계자료를 보니 91년 한해에만 32분이나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숨가쁜 근대사는 박정희 정권 19년동안 66분,전두환 정권때 78분,노태우 정권동안 110분,김영삼 정권동안 59분등 모두 318분이 조국의 민주화 제단에 목숨을 바치게 했습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알만하다'(熟知,可知)에서 유래했다고 했을 때 세상의 진실을 '안' 양심적인 개인이 "자주.민주.통일된 조국에서 인간다운삶을 이루기 위해 지구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과 바꾼그 분들의 삶과 죽음은 가히 '아름답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투쟁의 현장에서 "열사 정신 계승"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어떠한 열사들이 있었고, 어떻게 산화해 가셨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추모제 행사는 차분한 가운데 엄숙하게 치뤄졌습니다. 추모제에서는 안치환씨가 <마른잎 다시 살아나>를 추모가로 불렀고, 청주대 강혜숙교수가 <열사상생해원굿>을 하였습니다. 2부의 추모공연은 희망새,조국과 청춘,천리마등의 신나고,힘찬 노래들로 열광적인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유가족인 유가협 어머님,아버님들은 7개월째 계속하고 있는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열사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외치며 국회앞에서 천막농성중, 옷을 갈아 입고 추모제에 참석하셨습니다. 대부분 죽음을 겪은 지 10여년이 지나서인지 눈물도 마르고 의연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저자이자 계간 <당대비평>의 편집인인 조세희선생이 카메라 가방을 둘러 멘 모습이 눈에 뜨이는 등 초청인사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이 제눈엔 다들 '젊은 피를 수혈하러 온 사람들'같았습니다. 밧데리가 떨어졌을 때 충전하듯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지친 심신을 이끌고 아름다운 죽음을 통해서 다시 힘을 얻기 위해 모여든 불나비 같아 보였습니다.

 

최근 신선생님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에 대응한 '민주주의 기념관건립을 위한 모임'의 민주화운동 자료수집 팜플렛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환(生還)하는 것이다.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역사만이 힘이 된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시절을 꿰뚫고 맥맥히 이어온 반독재 민주화투쟁도 생환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않고 힘이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각계 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고난 속으로 뛰어든 거대한 물줄기였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역사이다. 이 거대하고 줄기찬 민주투쟁을 증거하고, 역사로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 오늘의 실천 속에 생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역사적 과업이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참된 각성의 시작이다.

 

여러 글에서 자주 하신 말씀이지만, 새롭게 뇌리에 박힙니다. 윗글을 패러디해보면... 음... "열사를 배우기보다 열사에서 배우는 것이 참된 각성의 시작이다."라고. 조국의 산하에 힘차게 뻗어 있는 백두대간처럼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외세와 독재와 자본에 항거하다 장렬히 산하하신 열사들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저에겐 '열사'라는 호칭이 왠지 어색하지만, 그들을 생각할 때면 읊조리게 되는 노래가 두 곡 있답니다. <눈감으면>과 <동지를 위하여>라는 노래입니다. 앞의 노래는 전두화정권 당시 85년 9월 숨막히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학원 안정법 철회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경원대 법학과 2학년생인 송광영(당시 28세)동지의 어머님 이오순 여사가 쓴 글을 작곡가 김제섭님이 읽고 88년에 만든 곡이랍니다.

 

이오순어머님의 글은 "한없이 보고 싶은 광영아! 내가 어떻게 하면 너를 잊을는지- 눈만 감아도 너의 모습이 나를 찾아 오는구나.
.................

                     너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어미는.......

 

                       

배운 것 없는 이 어미는 네가 죽었을 당시는 많은 고생으로 너를 키운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미를 두고 간 네가 밉기만 하였지만 너의 장례식 때 경찰들과 싸우면서 네가 왜 죽어야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구나. 과연 어떤 사람이 민족을 위해 죽을 수 있을까?
.................

사랑하는 자식의 아름다운 죽음으로 새롭게 우리시대의 어머니로 눈뜨게 되는 유가협 어머님,아버님의 변신과정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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