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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알량함에 대하여

간만에 아주 늦게 지하철을 탔습니다. 오늘은 제가 하던 일(직장이라면 좀 뭣하고)을 그만두는 날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앞으로 생계는 어떻게 꾸릴지, 공부는 잘 될는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늦은 시간에 앞으로 제가 하던 일을 인수인계해 줄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곁들여 소주한 잔을 마시고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빵이나 기다리던 버스는 역시나 오지를 않는군요. 시불시불하면서 지하철을 타러 내려옵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묵은 배를 주려잡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한 시민단체의 스티커를 보면서 저는 지하철을 빨리 타야겠다는 일념으로 볼 일을 일사천리를 끝내고 지하철 승강장으로 뛰어내려갔습니다.

붕~ 이미 지하철을 떠나버렸습니다. 불러도 소용없고, 예전에 호기를 부리며 지나가던 지하철을 세워서 타고 갔다는 얘기는 온데간데 없이 다음 지하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익근무요원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니 다음에 올 지하철이 막차인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술김에 독서를 하면서, 양 귀는 쫑긋 세워듭니다. 이번에 놓치면 '끝장이다'라고 하면서 저는 '뚜르르르'하는 소리만 학수고대합니다.

드디어 지하철에 저는 입성하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붕뜨고 있습니다. 아~ 집은 나의 안식처요, 삶의 터전이요, 휴식의 공간이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자리도 많습니다. 평소에는 어디든지 앉으려는 인간의 얄팍한 본성 때문에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강탈(?)당하면 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런 생각에서 저를 아주 평온하게, 거의 득도한 중처럼 지하철 자리에 온몸을 묻습니다.

가끔씩 보면 지하철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모금 및 각양각색의 구걸을 하는 사람들에 이르기 까지 늦은 시간에도 그들의 실천(?)은 지하철에서 끊이질 않습니다.

'안년하시므니까. 조희는 국제학생봉사단 이루본 대표 기못찌(가명), 나카무라(가명) 이므니다. 조희는 소마리아와 아흐가니스탄 등 오료운 사람들을 돗기위해 모그믈 하고 있스므니다. 칸사하므니다'라고 모금을 하는 일본과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한 번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지요. 사실 조금은 내키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가능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동전을 들이미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치는 않습니다. 다만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조금 부담이 되지만 일단 동전을 꺼내기 전에 먼저 사람에 대한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사실은 감정에 더 치우치지만) 판단을 한 끝에 그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채워 줍니다.

때로는 지하철에 노쇠한 할머니나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보았을 때에는 저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를 벌까하는 계산도 해봅니다. 한시간에 얼마면 하루면 얼마겠지, 그러니깐 한달이면? 이런 생각들이 많아지면 호주머니와 지갑은 거의 용접이 된 상태로 열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는 도중, 오늘 내가 지하철을 내리기 직전에 저는 그런 알량한 계산들과 내가 가진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때로는 경제적으로 내가 그리 풍요롭지 않다고, 아니면 그것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지 내가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내가 내 입으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을 때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다른 부분에서도 알량하게 작용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방금 먹은 술이 채 소화기를 타기도 전에 닭발을 먹고 올라오는 묘한 냄새를 동반한 트림을 꾹꾹 누르고 밟고서 저는 아까 꺼내든 책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약 20대 초반에 여자분이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하게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한 손에는 큰 벙튀기 과자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팔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두둥~

"안녕하세요. 저는 부모님이 없구요. 동생이 많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을 팔게 되었...."

"어구..죄송합니다. 이번 역에서 내리거든요."

그리고 그 여자분은 나의 다음 자리에 앉은 분에게 또다시 그 설명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그리 두텁지 않은 잠바차림에, 앞니가 한 두 개 정도만이 남아있고 눈의 초점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채, 또렸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빨리 나아서 저도 빨리 잠을 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상술이라고, 그것은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눈 빛은 보면 진실을 말해줍니다. 적어도 다른 능력이 없는 저에게는 그런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깝게 발휘됩니다. 그리고 황급히 저는 지하철을 내렸습니다. 찝찝합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니 2천원이 나옵니다. 순간 저는 나에게 쓰는 돈 얼마는 진짜 아깝지 않게 생각하면서 다른 삶, 그것도 생존의 벼랑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도 인색하고 알량한지 자못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분들이 정부에서 보조를 받는지, 혹은 누구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는지, 하루에 얼마를 버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택도 없이 핸드폰 전화를 20분이나 썼고,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호기를 부려가며 얼마를 계산하겠다고 내색을 하면서, 20만원이 호가하는 기타를 사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구입했다고 남들에게 떠벌이고 다닐 때, 그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도 늦은 시간에 홀로 과장 봉지를 들고 동생 약값을 벌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따뜻해지는 것을 말하기 전에 나부터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가끔씩 내가 하는 소비 중에 남을 위해서 하는 소비가 얼마나 되는지, 가치가 있는 소비를 위해서 얼마나 정당하게 벌고자 하는지를 다시금 고민합니다. 한 때는 그 사람들이 지나가면 머리를 쳐박고 자는 척을 하거나 코구멍을 후비면서 딴 짓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랬던 부끄러운 시간들이 제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군요.

만약 내가 그 사람의 처지라면, 자신의 그러한 절규를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진짜 그것이 진실인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 버냐고 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요?

예전에 한 티브이에서 앵벌이에 대해서 조폭이 배후에 있고, 그것을 시켜서 수익금을 착취한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분들의 삶이 더욱더 힘들어지고 어려워졌다는 다른 한 쪽의 뉴스도 접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내는 세금이 정치자금으로, 거액의 비자금으로 변모하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세금을 낼 수 있을까요? 문제는 안내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쓰여지는 것, 본래의 목적에 쓰여지도록 만들어내는 구조와 그 구조에 대한 믿음이 있었야 합니다.

오늘 술자리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것을 술상 위에서 떠벌이다가 정작 그들의 삶에서는 나는 피해가려는 모습을 되내이면서 다시는 그렇게 알량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반성해 봅니다. 변화는 일상에서 자그마한 나의 행동이 변화하면서 점점 사회를 전염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새샘 느껴봅니다. 오늘은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평소에 편협하고 속좁게 굴던 내 가슴을 양주먹을 쿵쿵 내리치면서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열심히 사세요. 저는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나는 당신을 믿어요."

2004.02.18 0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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