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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관련 메모

* 세종과 신하들간의 관계
- 세종 22년 3월 어전회의에서 수령임기(60개월/6기법)를 2배로 늘리자는 의견에 신하들과 언쟁이 있었음.
- 고약해와의 심한 언쟁 속에는 세종이 신하들과 터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음.
- 그러나 세종도 의외로 전제적인 면이 있음. 고약해는 파면조체됨.
- 특히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추진력을 많이 보임. 강인하고 끈질김. 실력을 바탕으로 반대세력을 집요하게 설득하는 수사의 능력이 있었음.
- 세종이 임금이 되고서도 태종이 섭정을 실시, 특히 아들의 길을 막는 세력(왕비, 외척세력, 태종의 왕비세력)을 숙청. 결국 인재가 부족. 세종은 젊은 학자 대거 등용.
-> 특히 이 당시까지 사병들이 존재

* 집현전을 설치. 연구휴가 특전(사가독서제). 연구원들의 의무사항 중에는 정치권에 들어가지 말게끔함. 권력에서 완전배제, 집현전 배치후 10년 근무, 세종의 정책을 보좌하는 역할.
- 세종의 개혁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조판서 허조와 갈등이 컸음. 허조는 대쪽같은, 소위 보수꼴통. 세종은 허조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뽑아쓰는 '교활한' 측면이 있었음.
- 황희도 세종의 반대파였으나, 세종은 황희를 19년간 영의정으로 중용함. 황희의 탁월한 균형감각과 상황파악 능력을 높이삼. 사실 황희가 청백리기 보다는 대지주로 스캔들이 많았음. 그러나 세종이 황의의 실력을 중요시.

* 공법개혁 사건 세종9년(1427년)
- 종래에는 공법이 손실답험제(관리가 풍흉을 조사, 부정이 끊이지 않음)였음.
국정의 여러문제를 과거시험에 출제, 여론을 살핌. 과거시험에서 공법(조세법)을 출제. 어전회의에 상정됨.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여론조사를 실시. 백성들이 찬성하고 있으면 여론조사를 해보자고 제안. 전국에 17만 가구의 관민을 대상으로 실시(5개월)
- 찬성9: 반대7, 그러나 새로운 제도를 즉시 실시하지 않음. 토질과 수확량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달리 나타남.(가령 한강이남은 찬성이 압도, 한강 이북은 반대가 압도하는 결과가 발생)
- 조정에서도 찬성과 반대가 나타남. 재경부 관리들이 강남에 많이 사는 것과 같이 대지주 관리들이 반대. 또한 세제개혁은 숨겨진 재산이 드러날 수 밖에 없음.
- 결국 토질과 수확량에 따른 공법제도 실시. 연분 9등, 전분 6등법 시행(1444년 세종 26년)-> 만장일치로 시행.
- 세계적으로도 합리적 농정을 실시한 사례가 거의 없음.
- 단계적으로 전라도부터 시작, 함경도까지는 40년 걸림.
* 그러나 그 이전에 농사직설을 창간. 우선 농업생산량을 늘려야 공법시행에 저항이 적을 것이라고 간파. 특히 중국의 농업관련 서적은 밭농사 중심. 생산량이 고려말보다 4배 정도 늘어남.


* 그러나 외교문제(명나라)가 세종에게는 아킬레스
- 말과 매를 상납토록 요구하는 명나라의 요구로 인해 엄청난 국방력을 상실. 세종은 인삼을 조공을 대체. 국익 손상을 최대한 억제. 명나라를 사대로 예우하는 대신, 내정간섭을 막고 국경정비를 실시(4군 6진개척). 이 때 확보한 국경이 현재까지 유지됨.

* 개기 일식 (세종 4년 1월 1일)
- 궁중에서 개기일식 때는 중요한 기상이변. 그러나 예상한 시간 보다 15분이후에 개기일식 시작. 그 이유는 궁국과 경도가 다르기 때문임. 일식이나 월식이 차이가 나타남.
-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음.
- 세종은 천문학 연구에 착수. 기상담당관이 아닌 조정 문신들에게 이 사업을 맡김. 왕조의 권위에는 천문역법이 아주 중요함. 세종 24년 칠정산이 완성됨(중국, 아라비아, 한국 순).
- 앙부일구(장영실)는 최초의 시계, 정확성은 현재와 거의 동일함. 특히 옥루는 조선의 역작(설계도만 남아있음)

* 중국의 종(황종)이 기준이었으나 어느 기준에 따라 황종을 잡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짐. 시대, 환경 등에 따라서 황종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기인. 정간보 간행(세종29년). 소리를 다루는 학문을 율학이라고 하는데 도량형과 관련된 문제임. 따라서 음운학은 도량형에서 음악까지 모든 과정을 지나온 다음, 한글 창제로 이어짐으로써 결국 세종말기에 한글창제 사업이 진행됨.

* 훈민정음 창제- 김화살부사건(세종10년)
- 효행록 발간 지시. 한자로 일반인이 읽기 어려웠음. 삼강행실도를 그림책을 제작. 효과 미미.
- 범죄예방에 주력하기로 결심.
- 법조문 중 중요한 부분만 추려 이두문자로 번역하여 출판하자는 제안에 반대가 만만치 않음. 세종은 감옥에 사람이 없게끔하는 일, 즉 치여어지일공(致囹圄支日空). 인권보장에 상당한 의미부여.
- 문자창간 초기 반대가 만만치 않음을 간파,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함. 세종 22년, 사신들을 유학보내 중국어를 배워오게끔. 어문학 관련 서적을 수집.
- 세종 21년(1440) 세자에게 강무를 이양. 권력을 중신들에게 대거 이양함. 이유는 한글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 결국 왕의 업무를 줄이기 위한 방편임(6조 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전환/서무결제권을 세자에게 이양).
- 신숙주(보한재집)에서 음운학을 위해서 요동을 14번 다녀옴. 그러나 한글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님. 한글은 세종이 독단적으로 결정. 왕과 직계가족만 비밀리 수행.
- 1443년 훈민정음을 발표. 최만리(부제학)가 언문 반포를 반대. 오랑캐 발언에 대해 최만리를 옥에 가둠. 이는 세계관의 대결. 최만리가 사실 한글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음.
- 한글 반포 60년만에 최만리 우려가 그대로 나타남. 저항이 고조.

* 조선중종: 이문건의 묵재일기
- 한국소설 설공찬전(중종 6년, 채수 저)
- 종이 낱장 속에 또 하나의 문서가 있었음.
- 설공찬전은 성종때 연산군 폐위시키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력을 비판한 내용임.
- 채수는 사형을 언도(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필화사건으로 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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