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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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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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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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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03/03
    세종관련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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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2/17
    내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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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1. 블로그 대문을 열면, 우선 참, 건강하구나, 하면서 그 건강함, 이면에는 그 건강함이 일정한 자존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여성에 대해 존귀한 의식을 가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차별과 각 개인의 자존과 구별이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여성주의자들과 진보주의적 남성과의 대립각을 이루는 부분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싫다'와 '그렇게 싫은 건 좀 다른 것이다'의 차이다.

 

다른 이야기.

 

2.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이라는, 그것도 인간이 그렇다는 이유는 두 가지 의미다. 내 생각에는, 하나는 인간은 '정치적'이라는 하나의 관념이 권력의 상하좌우 수직수평관계에서 분명한 자존, 즉 나는 어디에 어떤 입장이냐 이것을 찾겠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그래서 정치적, 특히 정치를 움직이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정치적 과잉, 거대담론 속에 매몰되는 우리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치적 과잉과 거대담론 속에서 허우적대는 민중들의 일반적인 삶이 자신의 생계적 욕구와 당면한 개별 경제적 상황과 때로는 무관하게 진행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압도하는 정치적 의식, 다시 말하면 '정치과잉'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의 논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러한 정치적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되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유럽의 그 이들과 우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진, 이라는 말은 굉장히 모호한 개념이다.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누구에게든 자신의 논리를 공고화하는데 쉽게 사용될 수 있으며, 설사 유럽에 갔다오지 않아도, 비록 1-2개국만 갔다와도 그것을 일반화할 수 있다. 그러나 비교해보라. 그들이 정치적인 과잉, 거대담론에 전혀 관심이 없는가를. 관심있다. 그러나 우리와는 그 관심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그들은 정치적인 태도와 입장을 분명히 하는데 익숙하다. 그러한 태도와 입장을 제법 긴 시간동안, 왕모가지 잘라가면서, 혹은 그런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훈련된 인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미 그럴 기회를 잃어버렸고, 게다가 그렇게 할 시기나 상황이, 더구나 지금은 더욱더 안된다. 그러한 동력은 고스란히 집단 속에 있는 개인에게 전달되고, 그 전달된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가, 순간적으로 발현된다. 일상에서도, 혹은 거대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다.

 

나는 이것이 과도적인, 순수히 한국만의 과도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경우, 정치적 과잉이나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밥 먹고 살지도 못하면서 한나라당 지지하는 것을 비참하게 본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좌파의, 더욱더 좌파의 삶은 한국자본주의 내에서 그리 추천할 것이 못된다. 그들도 정치과잉에 거대담론에 매몰된 자들이다. 문제는 관점의 차이일뿐, 그러한 의식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 보다는 현재 당신들이 옳은가 그른가에 더욱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적어도 한국사회 내에서 정치적 과잉, 거대 담론에 대한 흡수는 정신적인 영양분이다. 실제 입 속으로 넘어가는 양분만을 말하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며,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역동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인처럼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정권을, 자신들이 지지한 정권을 욕하고 비난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한국사회의 역동성은 불확실성이면서도 확실한 사회, 분명하고 일관되게 수렴되는 어떠한 한 사회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의 근저에는 과거 오랫동안 군부독재의 진한 녹색물이 배여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회로의 회귀를, 혹은 그 사회로의 회귀를 온 몸으로 부정하는 이 사회의 대립된 입장과 태도가 바로 역동성으로, 자유롭게 양자를 비판할 수 있는 힘으로, 비공식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대립화된 모습을 가지게 만든다. 자칫 유럽의 '선진화'라는 담론에 매몰될 때, 나는 분명 이러한 지식인들의 사고가 우리의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역동성성을 빼앗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안정화'된 형태의 국가지향성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과 안정되지 못한, 과도적 상황에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회생방안 보다는 유학생 출신의, 국제적이라는 빌미하에 자행되는 검증되지 못한 이론과 쉽게 이식될 수 없는 제도를 받아들에 될 때, 우리는 미국식의 안정화 기류와 유럽식의 안정화 기류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안정화는 소수의 삶을 망각함으로서, 위만 바라보고 아래를 보지 않게 함으로서, 즉 아래를 전혀 인식치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유럽의 안정화는 정치적 과잉과 혁명, 혁명에 대한 실패와 그에 대한 예방 등에 대한 각종 대책들 속에서 사회적인 안정화를 통해 제도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차이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상황에 곧이 들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앞서 설명한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대로 둘 것인가. 일단 여기까지가 오늘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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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드세요.

떡값

굉장한 정치 권력이 개입했는지 혹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국내 유명 포털은 물론 다음팟, 엠엔캐스트 등등에 이 뉴스 영상이 올라오는 즉시 모조리 짤리고 있다고 합니다....<펌글에서>

 

http://www.youtube.com/watch?v=daF9oUMV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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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거래

결혼은 언제 실패하나. 거래에 실패할 때 실패한다. 역시 이해타산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었어야 했단 식의 주말드라마는 낭만적이긴 하나, 착각이다. 실패는 타산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타산의 목록이 잘못됐던 데 있는 거다. 자신에게 교환가치가 있는 게 뭔지 스스로도 몰랐던 게지. 지가 언제 행복한지도 모르면서 남들 목록만 베끼고 자빠져 있는 인생이 태반이니까. 결혼의 불행은 그러니까 거래, 해서가 아니라 그 거래에, 실패해서 오는 거다. 고로 결혼의 지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주고받는 것, 그 교환 목록의 밸런스다. 그 거래의 균형이 무너지면, 결혼도 무너진다.

http://www.hani.co.kr/arti/SERIES/153/2738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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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관련

살곶이의 공공부문 개혁

A. 공공부문 개혁

1) 파업관련

- 버스, 지하철 등 육상정기여객운송사업의 노조파업시 최소서비스제도 도입. 단, 육상정기영객운송사업의 경우, 파업 5일전 파업예고의무를 부과(사전통지의무)
- 파업참가자는 48시간 이전 참가의무를 통지

2) 특별연금제도

- 철도, 전기회사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연금제도는 노동의 특수성에서 기인. 야간, 휴일 등의 날에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보전하는 의미. 일반연금은 40년을 부어야 하는 대신, 특별연금은 37.5년 납입. 이게 결정적 차이.

* 위 1)은 2007년 8월경 노조 반대에도 의회통과, 2)는 2008년 2월 현재 협상 진행. 다만 2)는 기업별 차원으로 일임한 상태로 절반의 타결로 볼 수 있음.

B. 노동시장 개혁" '노동시장의 현대화'
- 소위 유연안정화(flexisecurit)를 위한 발단. 2008년 1월 11일 합의에 성공.
- 주요내용으로는,
1) 인턴기간 연장, 산별 규정이 없을 경우에는 일반직은 2개월, 기술직은 3개월, 간부급은 4개월까지. 산별협약을 통해 4. 6, 8 개월 연장가능.
2) 무기계약 합의종결: 노동자의 해고수당과 사측의 절차 문제를 맞trade(단, 지방노동사무소의 인가 필요).
3) 사업별 노동계약: 일종의 도급계약 형태, 사업의 완성을 위해 12-36개월까지 가능.
4) 실업최저 보상금: 이전 월급의 20%수준 유지.

C. 특히 우파 정부 하에서도 노동권은 보장되고 있음. 더구나 중요사항에 대한 노사합의를 유도, 이를 통해 합의에 성공하면서 우파정부 또한 명분을 얻음. 명박이가 살곶이한테 배울 건, 요거임. 밀어부쳐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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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관련 메모

* 세종과 신하들간의 관계
- 세종 22년 3월 어전회의에서 수령임기(60개월/6기법)를 2배로 늘리자는 의견에 신하들과 언쟁이 있었음.
- 고약해와의 심한 언쟁 속에는 세종이 신하들과 터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음.
- 그러나 세종도 의외로 전제적인 면이 있음. 고약해는 파면조체됨.
- 특히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추진력을 많이 보임. 강인하고 끈질김. 실력을 바탕으로 반대세력을 집요하게 설득하는 수사의 능력이 있었음.
- 세종이 임금이 되고서도 태종이 섭정을 실시, 특히 아들의 길을 막는 세력(왕비, 외척세력, 태종의 왕비세력)을 숙청. 결국 인재가 부족. 세종은 젊은 학자 대거 등용.
-> 특히 이 당시까지 사병들이 존재

* 집현전을 설치. 연구휴가 특전(사가독서제). 연구원들의 의무사항 중에는 정치권에 들어가지 말게끔함. 권력에서 완전배제, 집현전 배치후 10년 근무, 세종의 정책을 보좌하는 역할.
- 세종의 개혁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조판서 허조와 갈등이 컸음. 허조는 대쪽같은, 소위 보수꼴통. 세종은 허조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뽑아쓰는 '교활한' 측면이 있었음.
- 황희도 세종의 반대파였으나, 세종은 황희를 19년간 영의정으로 중용함. 황희의 탁월한 균형감각과 상황파악 능력을 높이삼. 사실 황희가 청백리기 보다는 대지주로 스캔들이 많았음. 그러나 세종이 황의의 실력을 중요시.

* 공법개혁 사건 세종9년(1427년)
- 종래에는 공법이 손실답험제(관리가 풍흉을 조사, 부정이 끊이지 않음)였음.
국정의 여러문제를 과거시험에 출제, 여론을 살핌. 과거시험에서 공법(조세법)을 출제. 어전회의에 상정됨.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여론조사를 실시. 백성들이 찬성하고 있으면 여론조사를 해보자고 제안. 전국에 17만 가구의 관민을 대상으로 실시(5개월)
- 찬성9: 반대7, 그러나 새로운 제도를 즉시 실시하지 않음. 토질과 수확량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달리 나타남.(가령 한강이남은 찬성이 압도, 한강 이북은 반대가 압도하는 결과가 발생)
- 조정에서도 찬성과 반대가 나타남. 재경부 관리들이 강남에 많이 사는 것과 같이 대지주 관리들이 반대. 또한 세제개혁은 숨겨진 재산이 드러날 수 밖에 없음.
- 결국 토질과 수확량에 따른 공법제도 실시. 연분 9등, 전분 6등법 시행(1444년 세종 26년)-> 만장일치로 시행.
- 세계적으로도 합리적 농정을 실시한 사례가 거의 없음.
- 단계적으로 전라도부터 시작, 함경도까지는 40년 걸림.
* 그러나 그 이전에 농사직설을 창간. 우선 농업생산량을 늘려야 공법시행에 저항이 적을 것이라고 간파. 특히 중국의 농업관련 서적은 밭농사 중심. 생산량이 고려말보다 4배 정도 늘어남.


* 그러나 외교문제(명나라)가 세종에게는 아킬레스
- 말과 매를 상납토록 요구하는 명나라의 요구로 인해 엄청난 국방력을 상실. 세종은 인삼을 조공을 대체. 국익 손상을 최대한 억제. 명나라를 사대로 예우하는 대신, 내정간섭을 막고 국경정비를 실시(4군 6진개척). 이 때 확보한 국경이 현재까지 유지됨.

* 개기 일식 (세종 4년 1월 1일)
- 궁중에서 개기일식 때는 중요한 기상이변. 그러나 예상한 시간 보다 15분이후에 개기일식 시작. 그 이유는 궁국과 경도가 다르기 때문임. 일식이나 월식이 차이가 나타남.
-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음.
- 세종은 천문학 연구에 착수. 기상담당관이 아닌 조정 문신들에게 이 사업을 맡김. 왕조의 권위에는 천문역법이 아주 중요함. 세종 24년 칠정산이 완성됨(중국, 아라비아, 한국 순).
- 앙부일구(장영실)는 최초의 시계, 정확성은 현재와 거의 동일함. 특히 옥루는 조선의 역작(설계도만 남아있음)

* 중국의 종(황종)이 기준이었으나 어느 기준에 따라 황종을 잡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짐. 시대, 환경 등에 따라서 황종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기인. 정간보 간행(세종29년). 소리를 다루는 학문을 율학이라고 하는데 도량형과 관련된 문제임. 따라서 음운학은 도량형에서 음악까지 모든 과정을 지나온 다음, 한글 창제로 이어짐으로써 결국 세종말기에 한글창제 사업이 진행됨.

* 훈민정음 창제- 김화살부사건(세종10년)
- 효행록 발간 지시. 한자로 일반인이 읽기 어려웠음. 삼강행실도를 그림책을 제작. 효과 미미.
- 범죄예방에 주력하기로 결심.
- 법조문 중 중요한 부분만 추려 이두문자로 번역하여 출판하자는 제안에 반대가 만만치 않음. 세종은 감옥에 사람이 없게끔하는 일, 즉 치여어지일공(致囹圄支日空). 인권보장에 상당한 의미부여.
- 문자창간 초기 반대가 만만치 않음을 간파,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함. 세종 22년, 사신들을 유학보내 중국어를 배워오게끔. 어문학 관련 서적을 수집.
- 세종 21년(1440) 세자에게 강무를 이양. 권력을 중신들에게 대거 이양함. 이유는 한글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 결국 왕의 업무를 줄이기 위한 방편임(6조 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전환/서무결제권을 세자에게 이양).
- 신숙주(보한재집)에서 음운학을 위해서 요동을 14번 다녀옴. 그러나 한글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님. 한글은 세종이 독단적으로 결정. 왕과 직계가족만 비밀리 수행.
- 1443년 훈민정음을 발표. 최만리(부제학)가 언문 반포를 반대. 오랑캐 발언에 대해 최만리를 옥에 가둠. 이는 세계관의 대결. 최만리가 사실 한글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음.
- 한글 반포 60년만에 최만리 우려가 그대로 나타남. 저항이 고조.

* 조선중종: 이문건의 묵재일기
- 한국소설 설공찬전(중종 6년, 채수 저)
- 종이 낱장 속에 또 하나의 문서가 있었음.
- 설공찬전은 성종때 연산군 폐위시키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력을 비판한 내용임.
- 채수는 사형을 언도(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필화사건으로 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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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부자가 죄인이냐"는 한나라당의 절규를 잘 이해한다면 다음의 발언들을 쏟아낸 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

 

박은경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을 뿐 절대 투기 한 것은 아니다”

김성이 “아이가 중3 때 연합고사에 수석 입학을 해서 그것을 유지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청소년 복지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워 시골에 있는 엄마에게 갈 것인지, 미국에 가서 공부할지를 선택하게 됐다.”

이춘호 “유방암이 아니란 결과가 나오자 남편이 고맙다고 오피스텔을 사줬다."

남주홍 “부부교수 25년에 30억 원이면 양반 아니냐.”

이윤호“여의도는 살 만한 곳이 못 돼 송파에 집을 샀다” “여의도는 자연친화적이지 않다.”
“살 만한 곳이 아니라 송파에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분양 받았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될 걸 예상했더라면 조금 더 신변을 깔끔하게 하고 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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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

날을 세워 상대를 베어버리기 보다는 잠시 광포로 날을 덮어 때리는 것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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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이해해주는 사람 없다...나는 그냥 광대인가. 벌써 몇 병의 술을 비워도 정신은 제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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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정

내 심정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사고체계를 뭐라 말하기 그렇다.

 

http://blog.jinbo.net/cydemo/?pid=52

 

더 많은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양적으로 보는 태도도 문제지만, 보상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없이 약자를 위한다는 공명에만 집착한 나머지, 숭례문이 불탄 사건을 방화범과 국가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태도, 솔직히 건강하다 말하기는 뭣하다.

 

더군다나 뻔지르르한 글 속에는 방화범이 자기의 민주주의를 위해 방화를 저질러도 된다는 함의까지 담고 있으며, 인근 상인들의 고충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있다. 낙산사가 불탄 이후, 사하촌은 거의 절망에 살고 있다는 점, 기억하기 바란다.

 

한 개인의 분노심을 방화로 표현한 것을 인정하는 듯한 이 글의 늬앙스. 그가 노무현 책임이라고 한 말에 방화범의 레토릭이라는 말, 가당찮다. 방화범이 그정도 어휘를 구상할 수 있었으면 방화까지 생각했겠나. 게다가 그냥 복원하면 된다는 방화범의 이야기가 이해가는지 모르겠다.  두둔하려면 뭔가 새로운 정황이나 행간을 읽든지, 군데군데 멋진 말과 운동권식 용어로 칠갑을 하는 것이 그 양반의 기쁨인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복원보다는 불탄 그대로 두자는 이야기는 무슨 근거로, 어떤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이런 말같지 않은 글로 진보운동을 자임하는, 그들에게 조그만 희망이라도 걸고 있는 자들에게 못난 질책이라도 받지 않았으면 한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머리도 아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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