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남편이 이틀을 연달아 쉬었다. 오른쪽 아래 맨 끝 어금니에 염증이 생겨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일용직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반차를 쓰거나 조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린이집 하원한 딸과 이른 저녁을 먹고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생협 매장에서 부추, 오이, 무와 각종 찬거리 장을 보고 들어왔다.

 

초저녁에 엄마 아빠와 같이 있는데다가 저녁 먹고 잠시 마실도 다녀오자 하니 우리 딸 완전 신이 났다. 그 바람에 말도 참 잘 듣는다. 먹으라는 대로 밥도 잘 먹으며 '맛있어요.'를 연발해 주시고, <로보카 폴리>는 두 개만 보자니까 세 개 보겠다며 협상을 제시한다. 목욕하자면 목욕하고, 이제 자야지 하니까 밤 10시도 되기 전에 저 좋아하는 이불을 들고 순순히 안방에 걸어 들어가는 거다.

 

딸을 데리고 방에 들어간 남편이 아이 재우면서 자기도 잘 테니, 이제 나는 장 본 것들을 처치해야 한다. 김치라곤 묵은지만 남은 살림살이라 신선한 부추 오이 김치와 무생채, 무나물 만들기가 오늘의 일거리다. 결혼생활 54개월, 4년 살림 경력이라 그 일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다행히 시이모님이 고춧가루 양념장을 만들어주신 것도 냉장고에 저장되어 있으니 오늘은 정말 횡재한 날이다.

 

잠시 고민을 한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굿닥터>를 IPTV로 시청해 볼까 했지만, 마감이 다가오는 원고가 두 편 있는 게 걱정되기도 한다. 원고료를 따질 급이 안 되는 처지인지라 그나마 받는 게 어디냐 생각하다가 문득 아는 청년이 며칠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저를 무급으로만 쓰고 싶어 해요.” 음…. 사람들이 내 글에 원고지 한 장당 몇만 원쯤 줄 날이 언제가 될까 하는 생각이 흘러간다. 어쨌든 나는 신용 위주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글을 쓰기로 한다. 원고 하나 마칠 즈음에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었다. 아마도 나는 이 원고를 마친 후 아까 건너뛴 <굿닥터> 몇 편 보고 잠을 잘 것이다.

 

 

아마도 결혼하고 애 엄마가 되고부터 혼자만의 시간 또는 동굴, 이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에는 딱히 갈망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었는데 말이다.

 

동굴이라는 단어가 남자들의 어떤 특성을 말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며 '여자가 웬 동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여튼 내게는 동굴이 필요하다. 동굴의 절대조건은 두가지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것,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하고, 할 수 있을 것. 이런 절대적 자유 시간이 내게 필요한 것이다. 


결혼 초에는 남편과 가사 분담을 하자고 요구하기도 했고 한동안 잘 지켜 오기도 했지만, 임신과 출산 이후에 남편에게 애 좀 챙기라는 것 말고는 집안일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간혹 너무 설거지하기 싫은 날 설거지를 해 달라거나, '이런 거, 저런 게 안 되네요.' 하고 당신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 말고는 거의 그렇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나의 동굴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낮의 활동이야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이른 저녁 시간까지가 내 시간이니 혼자 보고 싶던 영화를 보기도 하고, 때론 동네 친구들 만나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요즘은 자전거를 끌고 가까운 대학교 교정에서 커피 한잔 사 들고 책을 읽는다. 전에는 여기저기 숱하게 많은 커피집 중 하나를 골라 '죽순이' 노릇을 하며 책을 읽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이렇게 유한마담 같은 일정만 있는 건 아니다. 가끔은 은행이나 관공서 일도 처리하고, 집 안 청소도 하고, 세탁기 한 통 차기를 기다리며 미뤄두었던 빨래도 돌린다. 

 

육아휴직(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한 시기이니 꼭 해야만 한다고 나름 치열하게 작전을 짜서 얻어낸 사연 많은 사건)을 하기 전에는 정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집-어린이집-회사-어린이집-집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생활. 싫어하는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정해진 약속 시각을 지킬 수 있었던 숨이 가쁜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했다. 물론 이런 일상을 잘 넘기며 살아내기 위해 간간이 자투리 시간이나 틈새를 활용해서 막힌 숨통을 틔우기는 했지만. 


내게 나름의 장래희망이란 게 생긴 후로는 교육이나 참여해야 할 모임이 자주 생기고 있다. 안 그래도 술과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사람들 만나 수다 떨고 연극과 콘서트도 봐야 하는, 분주하게 다녀야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남편에게 단단히 다짐을 놓아왔는데 그 횟수가 좀 더 늘어나 버린 것이다. 
남편의 퇴근 시간이 늦은 편이라 그런 모임이 있는 날, 딸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밥을 챙겨줄 조력은 아이 돌보미 서비스를 이용하는 중이다. 시어머니나 친정엄마보다 속이 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처음 신청하는 것이 번거롭고 매번 돌보미 선생님들의 일정을 조절하느라(이 조율까지 내가 하는 건 아니지만,) 귀찮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 서비스가 없었다면 늦은 나이에 찾은 나의 장래 희망도 서럽게 포기했을 것이다.

 

낮은 낮대로 바쁘고, 밤은 밤대로 분주한 생활을 하다 보니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겠네.' 싶어 때론 슬쩍 겁이 날 때도 있다. 고작 육아 휴직 4개월 차인 내가 혹시 과로사? 이제 애가 32개월이고,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54개월을 맞는 중이고, 아직 내 인생의 반도 다 못 살았는데, 혹여 만일의 경우 내게 들이닥칠 수도 있는 내 과로사의 중대한 요인이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인, 주부라는 정체성 때문이라면......나는 주부, 안 하고 싶다. 

 


글쓴이 :  옛날 같으면 손녀딸 볼 나이에 낳은 딸이랑 애증의 관계를 쌓고 있던 중,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활동가라는 장래희망에 부풀어 좌충우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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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12:57 2014/04/2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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