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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속도

이반 일리히, <에너지 위기>,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미토

 

10p

에너지 위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특수한 인간관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계속 선전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노예에 의존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으며 노예를 다루는 방법을 열심히 습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수를 노예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인간의 일을 대신 해낼 기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에 의하면 어떤 사회의 삶의 질은 그 구성원이 학교에 다니는 기간과, 학교에서 배워 그들이 지배하게 되는 에너지 노예의 수에 의해 측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오늘날 번영을 자랑하는 경쟁적인 이데올로기의 어느 것에나 공통되는 점이다. 그러나 일단 탐욕스러운 에너지 노예집단이 수량적으로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인간을 상회하면, 명백한 불공정, 황폐, 무력함과 같은 현상이 모든 곳에서 나타나서, 그런 사고 방식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에너지 위기는 이러한 노예들에게 먹일 사료 부족을 걱정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나는 우선 자유로운 인간이 노예를 필요로 하는가 아닌가를 묻고자 한다.  

무엇을 노예로 삼을 것인가, 노예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보다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과연 노예가 필요한가이다.

어떤 사람이 동물이든 기계든 사람이든 노예를 사용하고 노예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와 능력, 그리고 행복과는 오히려 반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단지 구매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14p

에너지 사용의 한도가 설정되어야 비로소 높은 수준의 공정성이란 특색을 갖는 사회적 제관계가 처음으로 성립될 수 있다. 현재 무시되고 있는 그 세번째의 길(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 길)이야말로 모든 나라가 선택해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또한 극도로 기술화된 관료의 힘에 대해서도 정치적 과정을 이용하여 제약을 가하고자 하는 경우에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책략이기도 하다. 참여민주주의는 저에너지 기술을 요구한다. 오직 참여민주주의만이 합리적인 기술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18p

사회가 붕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이유는 연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며 또 유효전략의 낭비나 오염을 초래하는 사용법, 또는 불합리한 사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을 필연적으로 타락시키고 박탈감과 좌절을 안겨줄 정도의 에너지 사용량을, 산업이 사회에 가득 채우고자 하는 것에 있다...

 

국민들이 과도한 에너지가 투입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과도한 열량을 함유한 식품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위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나, 국민 전체가 에너지에 탐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식생활을 인정하게 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다.

미개인의 경우 노예상태나 가혹한 육체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적절한 근대기술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유한 인간의 경우에 그 이상으로 두려워해야 할 타락을 피하는 길은, 에너지 소비의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서면 기술화과정이 사회의 제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열량은 너무 과잉되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좁은 범위 내에 머물러 있어야만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에 도움이 된다.

기술화된 관료의 힘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예를들어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를 정점으로 체계화된 산업 시스템과 핵에너지를 기반으로한 국가에너지 시스템을 제약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서 어떤 다른 사회적 관계가 가능할 것인가?

소비 에너지의 최소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를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어떤 방법도 거짓이다. 

19p

에너지의 총량과 에너지 사용을 관리하는 권리의 배분에 관한 공공의 이해는 상반되는 두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방향에서는 탈산업, 노동집약, 저에너지 사용, 고도의 공정성 등을 목표로한 경제에 대한 연구의 물꼬를 터서 정치적 재편성에의 길을 여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또하나의 방향에서는 기계를 움직이는 사료(에너지-역주)에의 히스테릭한 관심이 현재의 자본집약적인 제도적 성장의 가속화에 박차를 가햐여, 우리들은 과잉산업사회의 혼돈된 종말을 회피할 수 있는 최후의 분기점을 통과하여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에너지 사용량의 총체'에 대하여 생태학적 제약을 가하지 않으면 그 필연적인 결과로써 전 세계적인 사회 붕괴가 야기될 것이다. ...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도로 절약하는 경제를 선택한다면, 가난한나라들은 먼 장래에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부를 포기해야만 하고, 부유한 나라들은 기득권을 버거운 부담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25p

교통에 있어서 특정의 시간대에 사용되는 에너지(동력)는 속도로 변환된다. 그 경우 에너지의 한계량은 속도의 한계로 나타날 것이다. 공공운수기관의 속도가 15마일을 넘어서고부터 공정성이 저하되었고, 시간과 공간의 부족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자동차회된 수송이 교통을 독점하고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왕래하는 것을 방해하게 되었다.

광물연료를 변환시키는 기계의 개별적 출력이 일정한 수치를 넘었을 때, 그러한 기계에 의해 인간은 신진대사 에너지의 사용을 방해받았고, 교통기관의 포로가 된 소비자가 되었다. 빠른 속도는 운송이 사회에 파괴적 기능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다. 적절한 정치제도 및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의 올바른 선택은 속도가 억제된 경우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참여 민주주의는 저에너지의 기술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인간은 자전거의 속도에 의해 생산적인 사회관계에의 길을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마지막에 굵은 글씨의 결론은 다소 갑작스럽지만, 몹시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자전거의 속도^^

15마일이면 약 24km인데 이봉주의 마라톤 기록이 약 시속 19.88km 보다 약간 빠른 셈이다.

별 필연적인 관계는 없겠지만...

자전거의 속도도 대략 그정도를 넘어서면, 긴장감과 체력소모가 급상승한다.

시속 20km는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낼 수 있는 속도지만, 30km는 어지간한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달리기 힘들다. 얼마가지 않아 땀으로 범벅이되고 가빠오는 숨을 참기 힘들어진다. 사고의 위험성도, 사고시에 부상의 정도도 급상승한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안전하게 힘들이지 않고 한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시간에 간다.

다치기는 정말 싫고, 보험도 없는 상황에서... 메신저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속도의 제한이 필수적이다.

일단, 평지 기준으로 순간속도 30km/h, 평균속도 24km/h를 넘지 않는 정도로 설정해볼까 한다.

재밌는건 지난 이틀간의 주행기록을 보면 평균속도 24km/h를 넘는 구간이 딱 두군데 있다.

하나는 우면산터널구간, 다른 하나는 남산3호터널구간이다. 둘 다 사람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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