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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님의 [자동차와 일상성] 에 이어서...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중
198p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자동차는 단순히 어떤 기술성이 부여된 물질적 물체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단이고 환경이며, 요구와 강제들의 담지자이다. 자동차는 등급들을 야기한다. 지각될 수 있고 감각될 수 있는 등급(크기, 동력, 가격)은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등급, 즉 행위 수행의 등급과 쌍을 이룬다.
이 두 등급의 작용은 유연하다.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들 사이에는 하나의 주변, 하나의 사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대화와 논의와 논쟁의 장소가 있다. 한마디로 담론을 위한 장소이다. 물질적 단계에서 확정된 위치와 행위수행의 단계에서의 위치는 일대일로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단계를 뛰어올라 점수를 딸 수도 있다. 소그룹 안에서 나는 (몇 분간 또는 며칠간) 챔피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론 나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어디일까? 내가 만일 좀 더 동력이 큰 자동차를 추월한다면 나는 한단계 높은 등급으로 내 위치를 수정시킨다. 이 등급은 과감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교묘함, 술책 따라서 자유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특히 내가 모험을 감행했는지에 대해 통행인 및 친구들과 함께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토의할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 등급은 더 이상 억압적이 아닌 듯이 보인다. 그것은 통합적으로 된다.
자동차라는 물체의 신분이 스포츠와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육체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거기에는 물리적 등급(무게, 힘, 크기 등)이 있으며, 행위 수행의 등급이 있고, 두 차원의 충돌이 있다.
그런데 이 이중의 등급은 사회적 등급과 그대로 일치한다(부적절하게, 따라서 아주 유연한 방식으로, 그것이 모든 사람들, 즉 분석자들에게는 흥미 있는 일이다). 사회적 생활 수준의 등급과 자동차의 등급 사이에는 유사성(엄격한 동질성이 아니라)이 있다. 그 등급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결정적 정지의 지점을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한 등급에서 다른 등급으로 이동한다. 결코 정의되지 않고 또 정의될 수도 없으며 항상 역전 가능하고 언제나 재검토의 대상이 되지만,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이 분류의 성격이 많은 수의 조합, 대립, 예측을 허용한다.
교통의 기구이고 운행의 도구인 자동차의 실용적 존재는 결국 사회적 존재의 일부분이다. 정말로 특별한 이 물체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이중성을 가진 강력한 이중 존재이다. 즉 그것은 감각의 대상인 동시에 상징적이며, 실용적이고도 상상적이다. 등급화는 상징에 의해 동시에 말해지고, 의미되고, 지지되고, 심화된다. 자동차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고 위엄의 상징이다. 자동차에서는 모든 것이 안락과 힘과 위엄과 속도의 상징이며 꿈이다. 실제 사용에 기호들의 소비가 중첩된다. 물건은 마법의 것이 된다. 그것은 꿈속으로 들어간다. 이 물건에 대한 담론은 수사에 의해 풍요롭게 되고 상상을 감싸 안는다. 그것은 의미적 총체(언어, 담론, 수사와 함꼐) 안에서의 시니피앙적 물체이다. 소비의 기호들과 기호들의 소비, 행복의 기호들과 기호들에 의한 행복이 서로 한데 얽히고 서로 강화하고 상호 중화시킨다. 자동차는 역할들의 축적이다. 그것은 일상성의 강제들을 요약한다. 자동차는 중개물 또는 수단에 부여된 사회적 특권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동시에 자동차는 일상에 게임과 모험과 의미를 덧붙여 줌으로써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압축시킨다.
이 물체는 자신의 법규를 가지고 있다. 도로교통법이 그것이다. 아무런 주석도 필요없다. 도로교통법에 대한 의미론적, 기호학적, 기호론적 해설들은 이미 여러권을 채웠다. 그것은 강제적 '하위법규'들의 원형이다. 그 중요성은 오히려 의미의 부재와 사회의 일반법규의 부재를 은폐해 준다. 그것은 기호들의 역할을 보여준다. 자동차에 대한 기호론적(그리고 사회학적) 탐구를 끝까지 밀고 갈 결심을 한 해설가가 의존할 수 있는 '문집'이 있다면 그것이 이 법규를 넘어서서 다른 자료들, 예컨대 법률, 언론, 문학 텍스트들과 안내광고 등을 병합시킨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자동차라는 첨단 물품은 교통 체계만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를 사용하고 또 그 체계에 봉사하는 조직과 제도들까지도 활성화 시켰다.
339p
다시 한 번 유토피아 사상에 대해서 말해야 겠다. 일상생활에 관한 한 최소한의 변화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일상생활에 관해 어떤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중대하고 불안한 일로 여겨진다. 자동차의 운행체계나 자동차 자체에 대해 하찮은 수정을 가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겸비한 전문가들은 수많은 결과들을 예상해 가면서, 값이 너무 비싸게 먹힌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이것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할 것이다. 무엇을 증명하는가? 일상성 전체를 다시 문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공작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인)는 결국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일상인)로 귀착된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인간(homo)의 자질마저 잃어 버린다. 일상인은 아직 사람인가? 그것은 잠재적으로 하나의 로봇이다. 그가 인간의 자질과 성질을 되찾기 위해서는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일상성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상을 극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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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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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하고, 5~10가구가 모여야 쉐어카 형태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하면^^기업도 임원차량 소유 금지 업무용 차량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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