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들뢰즈 미학관련 읽을거리..1

  • 등록일
    2010/10/14 16:41
  • 수정일
    2010/10/14 16:41

 {옥스포드 미학 백과사전}에 나온 "Deleuze, Gilles" 항목 번역
(12) ~ (13)이 그의 저서 {영화 1},{영화 1}에 대한 내용

Text : Encyclopedia of Aesthetics(vol.1), Ed. by Michael Kelly,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p.516-521.
Writer : James Williams

 

 

질 들뢰즈 (1935-1994)

(1) 벵센느 파리 8대학에서 가르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작업은 철학의 세 영역을 망라한다
: ① 철학사에서의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해석
; ② 포스트구조주의적 철학의 진전(들뢰즈는 많은 동시대 포스트구조주의자들, 특히 미셸 푸꼬와 쟝-프랑수아 료따르와 더불어 결실있는 논쟁들에 뛰어 들었다)
; ③ 펠릭스 가따리와 함께 한, 포스트-프로이트적 유물론의 창안.
세 가지 모두 들뢰즈의 미학에서 역할을 맡으며 그의 미학에 영향을 미친다.

 

 

(12) 예술과 철학의 상보성은 들뢰즈의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영화 1: 운동-이미지}와 {영화 2: 시간-이미지}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들뢰즈는 퍼스(Charles Peirce)의 기호론(semiotics)에 의해 고취된 시간과 운동에 관한 영화적(cinematic) 기술들의 신중하고 포괄적인 분류와 베르그송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문들의 급진적 독해를 결합시킨다.
그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 즉, 행위*(acts)에 의해 야기된 공간적 관계들에 있어서의 변화를 포함하는 영화적 이미지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의 보다 심층적인 특질들(characteristics)을 소통시키는 영화적 이미지 ― 라는 최초의 부류들을 가져오기 위해 베르그송의 직관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의 초기 희극은 서로 다른 운동-이미지들 사이의 기대치 않은 연결들(links)에 의존한다
; 우리는 특정한 운동-이미지 ― 예를 들어, 주먹질 ― 로부터 특정한 액션(action)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운동-이미지에 연결되는 그 작용은 그러한 기대들을 혼란시킨다 ― 그 주먹질은 키스와 눈꺼풀의 파닥거림으로 응수된다.
또는 오손 웰즈의 거울의 사용에 있어서는, 시간-이미지와 이미지들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본성이 부각된다
; 거울에서 장면의 반영은, 단일한 실제 이미지의 단순한 개념이 거울의 사용에 의해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게 되는 이중적 현실(reality)을 창조한다.
비록 들뢰즈는 이미지의 두 부류들에서 지각에 우선권을 주지만, 우리는 감동 받으며(be affected) 액션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각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이미지는 액션에 우선권을 주며 따라서 운동에 우선권을 준다.
반면 시간-이미지는 우리가 시간의 본성과 현실에 대한 그것의 효과에 대해 배울게 되는 관조적 수동성(passivity)으로 우리를 이끈다.

 

 

(13) 영화에 관한 들뢰즈 저작의 첫째 권은 운동에 집중하며, 둘째 권은 시간에 초점을 둔다.
그럼에도 두 책은 영화사에 관한 논제(thesis)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시간-이미지에 우선권을 주려는 논의(argument)라는 점에서 또는 영화가 현실에서의 시간의 원초적 역할을 드러내주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연결되어 있다.
첫째 권의 끝부분으로 가면서, 들뢰즈는 로버트 알트먼(Robert Altman), 존 카사비트(John Cassavetes), 시드니 루밋(Sydney Lumet)의 영화들에서 운동-이미지의 역설적인 극한-경우들(limit-cases)을 숙고한다.
그는 액션-상황-액션(여기서는 액션이 상황에 응답을 하고 새로운 상황을 촉발시킨다) 또는 액션-상황-액션이라는 구조들에 따라서는 상황들(situations)이 액션들에 의해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경우들에 관심을 가진다.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로의 이동(shift)은 적어도 의식적 행위의 관점에서는 무작위의 특성(property)을 취한다
; 액션은 어떤 상황으로 되지도 않을 것이며, 혹은 상황은 그에 상응하는 액션이 부족할 것이다.
방랑하는(wandering) 로드무비 또는 더 정확하게는 끝없는 여행의 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이 분해(disintegration)의 경우이다(예를 들면,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에서).
여기서, 액션의 종합하는 역할은 자기-좌절(self-defeating)이다.
비록 각 운동-이미지가 풍경을 통한 방랑에 의해 이웃하는 운동-이미지에 연결될지라도, 방랑의 행위는 그 자체 목적이 없다.
액션은 공간의 더 심층적인 지각 ― 그것을 통해 영화가 운동한다 ― 의 측면에서 이미지들의 펼침(unfolding)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으며, 영화는 운동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풍경을 지각하는 다른 방식과 관련하여 시간에 관한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 지각이 액션의 그리고 운동-이미지의 부정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풍경은 그것을 통해 방랑하는 이들에게 입력되며 목적적으로 행위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부정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미지의 영화의 이 위기 ― 여기서 영화는 "플롯을 상실한다" ― 를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화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출현과 연관시키기 시작한다.
사실, 영화에 대한 그의 작업은 새로운 물결[누벨바그]에 대한 이 논제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운동-이미지를 넘어 시간-이미지에 주어진 우선권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 운동의 특성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행위들은 시간의 특성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관념들에 자리를 내준다.

 

 

(14) 영화에 대한 연구는 들뢰즈로 하여금 표현의 개념을 시간과 공간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직관들을 개척하는 급진적 기획인 한편, 또한 산업적 스케일에서 운동에 관한 전통적 환영들의 창조로서의 영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이다.
들뢰즈는 영화감독들이 어떻게 더욱 다양하고 효과적인 시선들(views)을 표현하는지를 ― 예를 들면,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들뢰즈가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 코믹한 주인공의 반직관적인(counterintuitive) 액션의 연장(extension)으로 세계를 환원시킴으로써 코믹한 상황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 주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객관적인(objective), 상식적인(commonsense) 시선들을 확장하며 또 깎아 내린다.
키튼의 영화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습들을 무시한다
: 주인공은 거대한 거리들(distances)을 즉시 뒤덮으며 복잡한 기계장치(machinery)를 단순한 사적 메커니즘으로 바꾼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세계를 작은 마음(mind)의 반영으로 만든다.
만일 영화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면 그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험, 즉 상식적인 시선들을 더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들뢰즈는 위대한 감독들을 그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다른 시선들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분류한다.
그 표현이라는 점에서의 각각의 발견은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채택된다
;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의는 아직 고려되어 본적이 없는 형식들의 발견과 병행하여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업을 플래시백(flashback)에 대한 다른 사용들을 통해 시험한다.
그는 어떻게 요제프 만키비츠(Joseph Mankiewicz)가 플래시백을 ― 과거의 사건들의 기록들로서 미래에 회상되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억(memory) 그 자체의 창조에 대한 기록들로서 ―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때로 플래시백은 무언가 일어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 회상(remembrance)의 행위로서, 그것은 미래의 기억의 창조를 그 특성들 중 하나로 보여준다
: 플래시백에서, 그들은 무언가를 회상하기로, 미래를 위해 그것을 기록하기로 결정하며, 이것이 그들의 행위들을 설명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되돌아보는(look back) 행위로서 뿐 만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look forward) 창조적 행위로서, 기억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측면에서 현재에 대한 정의가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