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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용어정리...(1)

  • 등록일
    2010/10/20 16:05
  • 수정일
    2010/10/20 16:05

들뢰즈 책을 읽을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정리해 봅니다.

우선 이 용어 정리들은 우리가 주요 택스트로 읽는 [시네마1,1]에 있지 않은 다른 책들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용어정리들입니다.

 

우선 아래의 용어정리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번역하신 "박정태"라는 분의 용어 정리 입니다.

 

분절(articulation)

articulation은 베르그손은 물론 들뢰즈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로 옮긴 "분절"이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artticulation이란 A와 B가 연결(이 연결이 기능적인 연결이든 또는 단순한 접합이든 상관없이) 되어 있을때의 연결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해부학과 관련해서는 관절을, 기계와 관련해서는 링크 도는 연동장치를, 언어학과 관련해서는 즈음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베르그손-들뢰즈가 말하는 articulatipon은 그 의미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될수 있다.
첫째, 그것은 A와 B의 견결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구분을 염두에 둔다고 할 때의 그 구분을 가능케 하는 A와 B의 "사이"를 가리킨다.
둘째, 이 사이는 언제나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사이"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이의 양 항을 이루는 A와 B는 운동과 무관한 정적인 A와 B가 아니라, 생명 또는 지속 고유의 내재적인 원인에 근거한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물들로서의 A와 B이기 때문이다. 즉, 베르그손적 언어로 말하자면 A와 B는 순간이 아닌 지속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사이는 공간적이며 외적인 의미의 사이가 아니라, "비공간적이며 내적인 의미의 사이"이다. 왜냐하면 사이의 양 항을 이루는 A와 B가 생명 또는 지속 고유의 내재적인 원인에 근거한 운동으로 부터 비롯된 결과물들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A와 B는 그들 간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생명 또는 지속)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이때의 A와 B는 서로 부정의 대상을 이루는 상호 외적인 A와 B이기 이전에, 자기 내재적인 동일 원인에 근거한, 상호 부정과는 완전히 무관한 A와 B인 것이고, 따라서 이와 같은 A와 B를 양 항으로 취라는 사이는 공간적인 의미와는 무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넷째, 이 사이는 우리로 하여금 들뢰즈가 말하는 '본성의 차이들을 보게끔" 해준다. 왜냐하면 비록 A와 B가 "구분"되어서 거론되는 것은 오로지 이 사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본성의 차이들을 구하는 것과 실재의 분절들을 구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다. 이것이 우리가 분절로 옮긴 베르그손-들뢰즈적 articulation의 개념이 갖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분절이란 "생명 또는 지속 고유의 내재적인 원인으로부터 비롯된 운동의 결과물들 간의 비공간적인 사이로서, 우리로 하여금 본성의 차이들을 보도록 해주는 것"을 말한다. 에를들어서 베르그손-들뢰즈가 생명을 무한성을 개방하는 능력으로 보면서 생명은 매 순간 지속적으로 자기와 차이를 낳는다라고 말할 때, 그 결과물들인 서로 다른 A, B, C,,,,,의 사이들이 바로 '실재의분절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절의 동사 형태인 "분절하다 articuler"는 '사이를 낳는다'를 말하며, 또 이는 결국 "분화하다(생물학을 언급할 경우)" 도는 "차이를 낳는다"와 다른 말이 아니다.   

 

환영(simulacre)

일반적인 의미의 플라톤 주의는 가지적인intelligible차원(많이 존재하는 차원, 본질의 차원, 변화하지 않는 차원)과 감각적인sensible 차원(적게 존재하는 차원, 외양의 차원, 변화하는 차원)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 위에 근거한다. 물론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이 같은 이분법에 따른다. 즉, 개개의 사물들이 자신들에 고유한 가지적인 차원을 얼마나 나누어 가지고(분유하고) 있느냐 또는 얼마나 잘 재현(모방)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그것들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다. simulacre는 이러한 구도속에서 감각적인 차원 쪽으로 무한히 내려간 끝에 해당한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해보면, 이데아를 한 극점이라고 할 때, 그 반대편에 있는 극점이 바로 simulacre인 것이다. 따라서 simulacre쪽으로 가가이 가면 갈수록 존재는 점점 더 적어지며 그에 따라 가치 또한 점점 더 적어지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simulacre에는 그 어떤 형상, 존재, 가치도 없으며, 더 나아가 형상이나 모델을 따른 (진정한 의미의)모방마저도 없다.
  

            --> 존재와 가치가 점점 더 적어짐 -->
이데아 <---------------------------------------------------> simulacre
  I        <존재와 가치가 점점 더 많아짐   <------              I
  I                                                             I
존재, 가치, 본질                                        무존재, 무가치, 외양
영원, 질서, 무변화                                        순간, 혼돈, 변화

 
플라톤은 이 같은 simulacre와 관련하여 특히 다음과 같은 세가지 성격을 지적한다. 첫째, simulacre의 본질은 내화된 상이성 속에 있다. 둘째, simulacre는 자기자신 속에 차등적인 관점을 내화한다. 셋째 simulacre에는 그 어떤 앎이나 올바른 견해도 있을 수 없다.
simulacre의 본래 뜻을 모두 담은 우리말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게다가 들뢰즈적 의미로 쓰인  simulacre의 뜻까지 함께 살린 우리말을 찾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simulacre처럼 번역어의 선택이 어려운 개념어의 경우, 원어를 우리말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면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해당 개념어에 대한 보충 설명이 여전히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꼭 원어를 그대로 두는 방법을 고집할 이유도 없어진다. 왜냐하면 (본래의 뜻을 오해하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없는 한도 내에서) 원어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우리말을 선택한 후 보충 설명을 더하는 방법 역시 적어도 원뜻의 이해에 있어서는 원어를 그대로 두는 방법과 동일한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방법이 더 옳고 그르냐 하는 문제는 따로 제쳐놓더라도, simulacre의 경우와 유사한 경우의 개념어를 만날 때마다 매번 번역어 없이 원어를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옮긴이는 simulacre의 본래 뜻에 가급적 가장 가까운 우리말을 찾고자 하였으며, 결국 "환영(幻影)"이 아마도 그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않일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교될 무엇조차도 없으며 유사함 자체가 배제된 simulacre(따라서 '무엇에 대한 거짓된 상'의 의미를 함축한 "가상(假狀)"이라는 말은 적절치가 않다.), 둘째로 무존재, 무가치, 외양(비본질), 순간, 혼돈, 변화로서의 simulacre(다라서 simulacre는 일종의 :환영"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들뢰즈는 simulacre와 거의 같은 뜻으로 phantasme(환영 또는 환상)을 쓰고 있기도 하다), 셋째로 자신 속에 상이성과 차등적인 관점을 내화한 simulacre(관찰자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깊이, 거리, 각도 등으로 인해 상이함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이런 상이함을 "환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넷째로 그 어떤 앎이나 올바른 견해도 있을 수 없는 simulacre(가상, 환상등도 마찬가지이지만 "환영"역시 앎이나 올바른 견해와는 무관하다)에 그나마 오해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우리말, 따라서 simulacre에 가장 근접한 우리말이 바로 "환영"이기 때문이다. 아주 정확한 역어는 아니겠지만, 옮긴이가 simulacre를 "환영"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 위의 두 용어들은 매우 중요한 듯 보입니다.

어쩌면 위의 두 용어들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들뢰즈의 철학들을 이해하는 것에서의 두 키워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ㅎㅎ

 

여튼 책읽으면서 참고했으면 해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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