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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1/08
    들뢰즈읽기모임 시즌2. 철학사 읽기..제안(1)
    우중산책
  2. 2010/11/01
    들뢰즈읽기 네번째 모임...!!(4)
    우중산책
  3. 2010/10/20
    들뢰즈읽기 3차 모임(10/19)(2)
    우중산책
  4. 2010/10/20
    들뢰즈읽기 2차모임 후기...
    우중산책
  5. 2010/10/20
    들뢰즈용어정리...(1)
    우중산책
  6. 2010/10/14
    들뢰즈 미학관련 읽을거리..1(1)
    우중산책
  7. 2010/10/12
    들뢰즈 읽기(1차)..사전모임 후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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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9/30
    [들뢰즈 읽기_1]들뢰즈 책읽기 모임에 함께해요...ㅎㅎ(2)
    우중산책
  9. 2010/09/06
    공룡도서관에 있는 들뢰즈의 책들(대여가능)(1)
    우중산책
  10. 2010/09/06
    들뢰즈 읽기자료(1)...시대구분과 저작연표(1)
    우중산책
  11. 2010/09/05
    들뢰즈 책읽기 모임을 제안하며(첫 제안)(6)
    우중산책

들뢰즈읽기모임 시즌2. 철학사 읽기..제안

  • 등록일
    2011/01/08 14:58
  • 수정일
    2011/01/08 14:58

2010년 들뢰즈 책읽기 첫 시즌으로

[시네마 1,2]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시작되면서 함께 읽는 이의 마음이 바빠서

잠시 여유를 가지고 읽기로 하였답니다.

그덕에 현재는 들뢰즈 읽기가 휴식기를 맞이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랫동안 들뢰즈를 만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엄청난(?) 실례일 것 같아서 또다른 들뢰즈 읽기를 제안합니다.

 

이번 들뢰즈 읽기 시즌2...의 기본 텍스트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철학사라는 것은

역사적 혹은 시간 순서상의 철학적 흐름들을 살펴보고

그것인 인간의 역사적 발전 순간들과 어떻게 연계맺고

또 당시 철학적 상황들이 어떻게 현실들과 관계 맺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로

찾아보면 몇몇 주요 텍스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텍스트인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는 기존의 철학사와는 다른

엄밀히 이야기하면 철학사를 바라보는 들뢰즈의 눈

혹은 철학을 완성해 가는 독자로서의 들뢰즈를 경험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 입니다.

물론 기존의 들뢰즈의 책처럼 이 텍스트도 어렵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얻는 것도 많은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엄밀한 책읽기를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들뢰즈를 통해서 보다 많은 생성의 시각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훌륭한 길안내를 해주는 택스트가 이번에 읽은 철학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임방식은 언제나 같습니다.

주 1회의 모임을 같고 서로 이야기하는 형식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힘들어도 지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들뢰즈 모임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튼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들뢰즈 읽기 시즌 2.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읽기

모임 : 주 1회 읽고 발제하고 이야기하기

첫 모임 : 2011년 1월 15일 저녁 7시

모임장소 : 마을까페 "이따"

모임지기 : 영길

참고로 첫 모임은 한 주 정도 더 미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 시간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어 그때 그때 잡힐 것 같습니다.

연락 : 043-266-4055 교육담당 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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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읽기 네번째 모임...!!

  • 등록일
    2010/11/01 17:18
  • 수정일
    2010/11/11 21:30

들뢰즈 읽기 네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조촐하게 그리고 즐겁고 진지하게...ㅎㅎ

 

일시 : 2010년 10월 30일 오후 2시

장소 : 공룡 마을까페 "이따"

참석 : 이빈쌤, 나

텍스트 : [시네마1:운동-이미지]에서 3장 편집..

 

이번에는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전문적이진 않아도 되긴하지만 여튼 영화사에 대한 혹은 몇몇 영화감독들에 대한 지식이 없는 관계로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하기가 조금 버거웠다고나 할까요..?

이번 모임을 준비하면서 그리피스 보다는 아니 미국영화의 유파들 보다는 소련의 영화감독들에 더 관심들이 많았지만 에이젠슈타인이나 베르토프 등등은 그저 언젠가 들어 보았었던(?)..정도의 지식이다보니 적절하게 이야기를 해 나가기가 많이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ㅎㅎ

 

여튼 제 3장 편집을 읽어나갔습니다.

쳅터 1의 세번째 단계 : 전체, 운동 이미지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의 구성은 크게 편집의 경향들 즉, 차별화된 부분들의 교차, 상대적인 영역들의 교차, 수렴적인 행위들의 교차라는 편집의 세 가지 형식 또는 리드미컬한 교차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되게 이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편집이 구성 즉,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는 '운동-이미지'들의 배열이라는 측면에서 그리피스의 평행적 교차편집을 미국영화 유파의 유기적 경향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쳅터입니다.

'운동-이미지'의 구성을 조직, 유기체, 커다란 유기적 통일성, 다시말해 차별화된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이런 차별화된 집합들을 리듬에 따라서 한 부분의 이미지를 다른 부분의 이미지들로 이어지게 만드는 유기적 구성속에서의 이원적 관계 및 상대적 차원의 교환들을 이야기 하였답니다.

결국 그리피스의 유기적 평행교차편집이 가지는, 가장 확고한 유기적 통일성의 경향을 가지는 미국영화 유파들의 확고한 형식은 결국 서술(narration)이라는 것 혹자의 비판처럼 미국의 영화들이 서술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서술이야말로 평행적 교차편집에 의해 파생되어 나온 개념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운동에 결부시켜 생각하고 운동의 척도로 정의할때마다 우리는 시간의 두가지 측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우주 안의 운동의 집합을 거두어들이는 전체인, 거대한 원이나 나선과 같은 시간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운동이나 행위의 가장 작은 단위를 표시하는 간격으로서의 시간이 있다는 것, 간격으로서의 시간은 가변적이고 가속적인 현재이고 전체로서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광막한 무한성으로 양끝이 열린 나선이라는 것,

 

그래서

"한없이 팽창된 현재는 스스로 전체가 될것이며,

                                              한없이 수축된 전체는 간격속으로 지나갈 것"

 

이라는 것 속에서 결국 편집에서 또는 운동-이미지들의 구성에서 생겨나는 것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영화의 편집에서 얻게 되는 것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일터인데 그런 부분에서 우리는 영화를 아니 영화의 편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영화의 시간을 우리들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시간으로 인식하는지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쳅터 2. 소련 유파에서는
간만에 변증법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간만에 접하는 존재와 사유 혹은 물질과 사유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서 조금 오버(?)해서 관념론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서로의 인식정도를 나누기도 하고 덩달아서 아주 본원적인 질문으로서의 철학의 이원론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수다처럼 늘어놓으면서 그야말로 책수다회처럼 쳅터 2.를 읽어나간 것 같습니다.

 

소련유파에 대한 이야기

즉, 근접화면의 상입 등등의 몽따주 기법을 중심으로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도브첸코, 베르토프 등등의 편집경향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는데 주되게는 결국 소련에서의 변증법에 대한 해석과 그 변증법을 어떻게 영화적 편집이라는 형식에 접목시키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에이젠슈타인이 어떻게 그리피스에게 영향받고 어떤 생각들을 중심으로 그리피스의 유기적 경향들을 극복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길게 설명되어지는 쳅터이고 따라서 에이젠슈타인이 구현하고자 하였던

변증법적 배열'로써의 편집 혹은 영화이야기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읽고 이야기하면서 중요하였던 것은 쳅터의 구성상 들뢰즈가 변증법적 배열이라는 것에 많은 설명을 할애한다고는 해도 결국 들뢰즈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철학으로서의 인식론은 결국 변증법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쳅터는 그런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즉, 에이젠슈타인에서 베르토프로 나아가기 위한 설명의 장인 것 같습니다.

 

에이젠슈타인 등등이 그리피스의 유기적 구성을 변형하여 변즙법을 운동-이미지의 유기적 구성을 변형시키기 위해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하면서 마지막에는 간략하지만 베르토프가 변증법을 유기적 구성과 단절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내가 잘못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시네마라는 텍스트의 글쓰기 방식은 언제나 처럼 1장의 베르그손의 운동테제에 대한 주석의 글을 형식적으로 무한반복하면서 점차로 확장시키는 형식으로의 반복과 그런 반복에서의 몇몇 첨가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다음 단계로의 확장을 드러내놓는 형식이어서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살짝쿵 들뢰즈식 글쓰기에 조금은 재미도 붙이면서 아 !! 나도 흉내...?...뭐 이런 욕심도 은근슬쩍 들기도 한다는.....ㅎㅎ

 

여튼 이 쳅터2.는 기존의 나의 공부에서 많은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조금 편하게 이야기하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너무 영화관련 책을 철학관련으로 협소하게 읽는 것에 대한 반성을'하게된 부분도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베르토프]에 대한 무지와 그에 따른 [베르토프]에 대한 무한한 관심의 폭증이랄까 ?

여튼 베르토프의 영화와 그의 생각들을 찾아보고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답니다...ㅎㅎ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영화사에 대한 공부와 다큐 등등에 대한 입문서라도 탐독해 볼까 ?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ㅎㅎ

 

여튼 3장 전체를 다 읽지 못하고 이번 네번째 모임에서는 두개의 쳅터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나머지 편집의 장세서 남은 전쟁전 프랑스 영화의 유파와 독일영화의 유파들을 읽고 이야기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4장 운동-이미지와 그 세가지 양상 : 베르그송에 관한 두번째 주석]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

 

다음은 11월 6일 토요일 오전 11시에

공룡마을까페 "이따"에서 하기로 잠정적으로 시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대 조정이 있을 수도 있을듯 싶네요...ㅎㅎ

음....시간 조정이 잘 안되면 저녁 5-6시 정도로 옮겨질것도 같습니다.

확정되는대로 시간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ㅎㅎ

 

다음 모임도 좀더 재미있었으면 좋겠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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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읽기 3차 모임(10/19)

  • 등록일
    2010/10/20 17:02
  • 수정일
    2010/10/20 17:08

들뢰즈읽기 3차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참석자 : 나, 이빈샘

장소 : 공룡의 교육공간 "공"

일시는 2010년 10월 19일 화욜...저녁 6시

주 텍스트 : [시네마1:운동-이미지] 중 2장 화면틀과 쁠랑, 화면잡기와 데꾸빠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임전..?....ㅎㅎ

원래는 각자 발제해오기로 하였는데

제가 지난 주말의 오마을과의 체육대회 여파와

제 집안의 장례식이 있어서 이래저래 정신없이 지내다가 결국 정리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이빈쌤에게 미안해서 전전긍긍대다가

에잇...솔직히 떨어놓고 용서를 받는 것이 좋을듯 싶어서 미리 사죄하고...ㅎㅎ

여튼 그렇게 조금 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모임을 하게 되었다는...ㅎㅎ

 

모임

전체적으로는 발제 내용보다는 책을 직접적으로 읽으면서 강독(?)처럼 진행하였습니다.

책의 내용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중요하게는 저 스스로 영화에 대해서

많이 무지한 관계로 이런저런 준비들이 많이 필요했지만

준비하지 못해서 원래대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보다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주되게 이야기 되었습니다.

그런 탓인지 이야기하기에는 저에겐 좀더 쉬웠던 (?)...탓인가

이야기들이 재미나게 자알..?....진행되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되게는

"쁠랑"에 대한 이야기인데

화면틀이라는 닫힌 체계로서의 집합들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과

그 화면틀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쁠랑"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주되게는 "쁠랑"을 어떻게 운동으로 인식하는 지

닫힌 체계가 아닌 개방성과 지속을 가진 운동으로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었답니다.

문제는 이 2장 전체가 결국 1장의 내용 즉, [운동에 대한 논제들]을 부가 설명하기도 하고

글, 즉 텍스트의 문단 구성까지도 1장과 유사하다는 것

그렇기때문에 영화라는 매체보다도

실은 [베르그송의 운동에 대한 논제들]에 집중해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들을 전체적으로 1장의 연장선상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아직도

쁠랑이 어떻게 운동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와

이것이 열린 개방성으로써의 전체와 어떻게 지속으로 연결되는지에 집착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맞는지는 조금 자신없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텍스트가 어려워서

조금씩 애먹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느 선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닫힌 체계로서의 집합이 화면틀이라는 것이라면

그런 화면틀을 한정하는 것은 결국 화면잡기라는 것...

그리고 그런 화면잡기를 통해서 운동의 속성이 부여된것이 결국 "쁠랑"이라는 것

그 쁠랑을 다시 한정하는 것은 결국 데꾸빠주인데 이 데구빠주가 주요하게 등장하기 위해서

제기된 배경은 결국 카메라 혹은 카메라운동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결국 초기 영화사에서 고정된 카메라에서 카메라의 이동으로 얻게된 것은

쁠랑/쁠랑들/쁠랑-시퀀시.....의 개념들인데

이는 결국 전체에 대한 통일성과 모순되지 않은 다중성이라는 것

그것이 결국 데꾸빠주 즉, 편집의 단계로 넘어가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답니다.

 

지나치게 투박하고 간결(?)이 아니라 단순하게 정리해서

모임내내 활발했던 이야기들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서 미안하기는 한데

여튼 모임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ㅎㅎ...나름 열띤 이야기들과 흥분들이 생겼답니다...ㅎㅎ

 

여튼 그렇게 자연스럽게 3장 편집으로 넘어갈 수 있는 끈들을 열어 놓은 상태로 모임은 정리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 모임은

10월 30일 토요일 저녁 2-3시쯤으로 기약하였습니다.

혹시 함께 하실 분들은 미리연락 주시고 책읽어 오시고

그리고 즐거운 마음 가지고 오시면 될 듯 싶습니다...ㅎㅎ

 

책 내용 요약본은 이빈샘의 정리글을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ㅎㅎ

 

(참고로 현재까지 진행된 내용을조금더 자세하게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아직까지는 용기내질 못해서....ㅎㅎ

조금 더 시간이 나면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 진행될 것들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ㅎㅎ

그때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야기들이 좀더 풍부해지면 좋을듯 싶기도 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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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읽기 2차모임 후기...

  • 등록일
    2010/10/20 16:35
  • 수정일
    2010/10/20 16:35

들뢰즈읽기 2차 모임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바로 후기를 올리려 했었는데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늦어져 버렸네요...ㅎㅎ

 

여튼

드디어 책읽기를 시작했답니다.

 

일시는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늦은 6시

장소는 마을까페 "이따" 에서....

주 택스트는 들뢰즈의 [시네마1 : 운동-이미지]

참석은 저랑 이빈쌤과 영재쌤...이렇게 조촐하게 3명이 진행했답니다.

 

다들 시간대가 저녁시간대라서

주린 배를 움켜지고 들뢰즈를 양분삼아 ...?.....진행하려했지만......헤헤헤..?

고맙게도 씨네오딧세이 대표이신 김주영님게서 제과점 빵을 선물해 주시고 가셔서

맛나게 야금야금 먹으면서 들뢰즈를 읽어 갔답니다....ㅎㅎ

 

발제는 원래 약속대로 저와 이빈쌤 모두 준비했었는데

발제라기 보다는 편하게 책을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하였기 때문인지

발제문은 두개지만 신기하게도..?...한개나 마찬가지의 발제문이 되었답니다...ㅎㅎ

 

여튼

발제문을 중심으로 책을 살펴보는 것으로 전체 진행이 이루어졌고

서로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나 꼭 필요한 개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하는 점검(?)들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였답니다.

 

전체적으로 텍스트의 내용이 어렵기도 하였지만 생각보다는 이야기들이 수월하게 진행되어서

준비하면서 많은 긴장을 했던 것에 비해 재미난 책읽기 모임이 되었습니다......ㅎ..

.......(나만 그런지는..?...ㅎㅎ).............

 

----------------

[시네마1 : 운동-에너지]

1장은 [1. 운동에 관한 논제들: 베르그송에 대한 첫번째 주석]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들뢰즈가 주석을 단 베르그송의 운동에 대한 세가지 논제에 대하여

들뢰즈의 생각을 밝히는 장으로

어쩌면 이 전체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분인것 같은데

들뢰즈 자체가 우리가 이미 베르그송을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서술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읽는 내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조금만 참고 읽다보면 의외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는..?....ㅎㅎ

 

여튼 하고픈 이야기는

운동은 분할되지 않는 지속의 전체라는 ...?...것이지요...ㅎㅎ

 

우선 첫번째 논제는 운동은 분할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주되게는 우리가 흔히 집합이라는 닫힌 체계로 사고하는 것들에 대하여

진정한 운동은 분할되지 않을뿐 아니라 항상 새롭게 재생성된다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번째 논제인 특수한 순간과 불특정한 순간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지

베르그송의 이야기로 보면 어떻게 기억하고 인식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고

마지막으로 운동의 변화 즉, 운동의 지속적 개방성으로써의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읽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혹은 우리가 "운동"이라는 것..."활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어떻게 삶을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다른 시각들을 얻을 수 있을것 같아서

자꾸자꾸 읽게된 부분이기도 하답니다.

 

보통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이라는 텍스트의 제 1장을 설명하는 단락이라는 들뢰즈의 설명처럼

이 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이라는 텍스트의 1장을 충분히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들뢰즈의 이 텍스트를 음이(?)하는 식으로 좀더 생각들을 깊게하면

이 장이 갖는 풍부한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ㅎㅎ

 

저 스스로는 이 텍스트를 가지고

제가 기존에 해왔던 활동들에 대한 나의 인식 혹은 판단의 방식들에 대해서

아니면 기존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인식의 방식들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보고

그런 것들을 정리하여 공룡들과 공유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은 욕망이 들기도 하더군요....ㅎㅎ

 

실은 첫번째 모임이라서 그런지

지나치게 책....텍스트의 내용들을 가지고 이야기 한듯 싶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조금더 우리들 자신들의 생각하는 방식 혹은 삶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이야기 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했더랍니다.

실제로 들뢰즈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던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의 첫장은

언젠가 함게 읽고 이야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 텍스트인데

우리들 스스로는 너무 들뢰즈라는 틀에 얽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더랍니다...ㅎㅎ

 

뭐 여튼 아직까지는

들뢰즈의 텍스트 이외의 것들을 함께 읽기에는

조금 벅차해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우선 욕심부리지 말고

현 [시네마]텍스트에  집중하는 것도 좋을듯...싶기도 해서.....ㅎㅎ

 

여튼 조금 서툴기도 하고 재미난 책읽기 첫 모임을 어찌어찌 ....ㅎㅎ...했다는 소식...히히힛

 

<< 책 내용 욕약본 >>

 

Ⅰ. 운동에 관한 논제들 : 베르그송에 관한 첫번째 주석

 

1. 첫번째 논제 : 운동과 순간

 

가로질러진 공간은 과거이고 운동은 현재이면서 가로지름의 행위인 것이다. 지나온 공간은 그냥 나누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반면에 운동은 나누어 지지 않거나 매번 나뉠대마다 그 속성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이는 이미 더욱 복잡한 관념을 함축하는 것이다 : 운동이 가로지른 공간들은 모두 하나의 균질적인 공간에 속하지만 운동들은 이질적이고 서로 환원될 수 없다.

 

-공간 속의 위치들이나 시간속의 여러 순간들, 즉 '부동적인 단면들'을 가지고는 운동을 재구성할 수 없다. 이러한 재구성을 가능케하려면 [공간적] 위치와 [시간적]순간들에 연속성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기계적이고 균일하며 보편적인, 공간의 전사(轉寫)이며 모든 운동들에 대해 동일한 시간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결합시켜야 한다.

 

=> 두가지 방식으로 놓치게 되는 운동

a) 아무리 두 개의 [공간적] 위치 또는 두 개의 [시간적] 순간들을 서로 접근 시키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운동들은 항상 이 둘 사이의 틈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파악되지 않는다.

 

b) 아무리 시간을 나누고 또 재분할하여도 소용없다. 운동은 항상 구체적 지속속에서 이루어지며 개개의 운동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 지속을 갖게 될 것이다.

 

=. 이로써 두개의 환원 불가능한 공식을 대립시킬 수 있다.

[실제운동 --> 구체적 지속] 과 부동적 단면들 + 추상적 시간

 

 

베르그송 : 영화적 환영 (부동적 단면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하는 공식)

 

영화는 실상 두개의 상보적 소여물들과 함께 작용

-'이미지들'라 부르는 즉각적인 단면들

-장치(카메라 혹은 영사기) '안'에 있으며, (카메라 혹은 영사기)와 '더불어' 이미지들을 차례로 지나가게 하는 비인격적이고 단일하며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또는 지각 불가능한 운동 혹은 시간

=> 따라서 영화는 우리에게 가짜 운동을 가져다주며, 그 자체가 가짜 운동의 전형적 예이다.

 

사실상 영화가 운동을 부정적 단면들로써 재구성할 때, 영화는 다름아닌 가장 고대적 사유(제논의 역설)가 이미했던, 혹은 자연적 지각이 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하고 있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영화가 단지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환영의 투사, 재생산일 따름이다.

 

들뢰즈

환영의 재생산이란 어떤 의미에서 환영의 교정일 수 있지 않을까 ?

수단이 인위적이라고 해서 결과가 인위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

 

영화는 사진소들 즉, 초당 24개의 이미지들이라고 하는 부동적 단면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진소가 아니라 운동이 덧붙거나 추가되지 않은 평균적 이미지이다. 반대로 운동은 소여의 형태로 평균적 이미지이다.

 

(소여 : 주어진 바 혹은 부여된 바

[논리]연구 따위의 출발점으로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나 원리.

[철학]사유에 의하여 가공되지 아니한 직접적인 의식 내용.

소여성[所與性] 사실이나 대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주어진 경험의 내용 범주.)

 

우리는 자연적 지각에서 환영은 주체 안에서 지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 조건들에 의해 지각의 전단계에서 교정된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여하한 조건 하에도 놓이지 않은 관객에게 이미지가 출현함과 동시에 환영의 교정이 이루어진다. 요컨대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를 주는 대신, 즉각 운동-이미지를 준다. 영화가 주는 것은 단면이지만, 그것은 동적인 단면이지 '부동적 단면+추상적 운동'이 아닌 것이다.

 

베르그송에 대한 평가 : 사물의 본질은 애초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다가 중간쯤에서, 그 전개의 와중에서 그것의 힘이 견고해질때 드러난다. 영원성의 문제 대신 '새로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새로운 무엇인가의 생산이나 출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 철학을 변화시킴...들뢰즈의 평가

 

-우리는 사물이나 사람들이 막 무언가를 시작할때 항상 스스로를 은폐하도록 강요되며, 또 그렇게 하도록 운명지어져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컨대 그는 생(生)의 새로움이 초기에는 나타날 수 없는 이유를 처음에는 생이 물질을 모방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2. 두번째 논제 : 특수한 시간들과 불특정한 순간

오류는 항상 운동을 시간적 순간들 혹은 공간적 위치들로써 재구성하려는데 있는데, 그렇게 하는데는 고대/근대 방식 두 가지가 있다.

 

고대 방식

-고대에 운동은 인지할 수 있는 요소들, 스스로 영원하고도 고정적인 '형태' 혹은 '관념'에 준거

-운동은 형태들의 '변증성' 즉, 운동에 질서와 척도를 부여하는 관념적 종합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의도된 운동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다듬어진 이행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무용에서 보듯 포즈 혹은 특수한 순간들의 질서이다. "형태와 관념들은 한 시기를 특징지으면서 그것의 정수를 표현한다. 이 시기의 나머지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관심사도 되지 못하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최종항이나 극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본질적 순간으로 삼는다. 사실들의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취했던 이런 순간은 과학에 있어서도 역시 그것 (사실 전체)을 특징짓는 데 충분한 것이 된다."

 

근대방식

-근대 과학혁명은 운동을 더 이상 특수한 순간들이 아닌 불특정한 순간과 연관시킴으로써 이루어 졌다. 운동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들(포즈)로써가 아니라 물직적이고 내재적인 요소들(단면)로 이루어졌다.

 

- 모든 곳에서 불특정 공간이 갖는 기계적 연속성은 포즈들이 갖는 변증법적 질서를 대체하였다.

"근대과학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독립적인 변수로 보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 영화란 불특정한 순간에 의거해서, 다시 말해 연속성의 인상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등간격의 순간들에 의거해서 운동을 재생산하는 체계이다.

 

- 특수한 순간들이라 함은 운동속에 속하는 비범한 또는 독특한 점이라서이지, 초월적 형태를 실현하는 순간이라서가 아니다.....다만 불특정한 순간은 규칙적이거나 또는 독특한 것일 수도 있고, 평범하거나 또는 비범한 것일 수도 있다.

 

-에이젠슈타인이 추구하는 현대적 변증성과 낡은 변증성 사이의 차이다. 후자가 운동안에서 실현되는 초월적 형태들의 질서라면, 전자는 운동에 내재하는 독특한 점들의 생산 및 그것들의 대립이다. 그런데 이 독특함의 생산(즉 질적도약)은 평범한 것들의 집적(양적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독특한 것은 불특정성에서 추출되며, 독특한 것 자체도 비-평범하거나 불-규칙적일 뿐인 불특정한 것이다. 에이젠슈타인 자신도 '비장함'은 단면들이 거쳐 지나가야 하는 불특정한 순간들의 조직된 집합으로서의 '유기성'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더 이상 가장 오래된 환영을 이룰 완벽한 장치가 아니라 반대로 새로운 현실을 완성시킬 기관이 될것이라는 관점

 

 

 

3. 세 번째 논제 : 운동과 변화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 즉 전체 혹은 어떤 전체의 동적인 단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 훨씬 더 심오한 그 무엇, 즉 지속 혹은 전체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동적 단면들                         동적인 단면으로서의 운동

     -----------               =                   ----------------------

       운동                                           질적인 변화

      (환영)                                              (현실)

 

-베르그송 "전체는 주어지지도 않고 주어질수도 없다(고대과학과 마찬가지로 현대과학의 오류는 두가지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전체를 주어진 것이라고 상정한 것이다)"

->전체가 주어질 수 없는 것인 이유는 전체가 '개방성'이며 그 속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솟아나게 하는, 다시 말해 지속하기때문이다

-베르그송 "무언가가 살아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든, 어딘가가 열려있는, 시간이 기재되는 '장소'가 존재한다"

-전체를 정의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관계라고 정의할 것이다. 관계는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며 관계항들의 바깥에 있다. 또한 관계는 개방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영적 또는 정신적 실존을 나타낸다.

 

-집합들은 단혀 있으며 단혀있는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닫혀 있다. 집합들은 항상 부분들의 집합들이다. 그러나 하나의 전체는 닫혀 있지 않다. 그것은 열려 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부분들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란 분할의 매 단계마다 자신의 성질을 바꾸지 않고는 결코 분할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적 전체란 나뉘지 않는 연속성일 것이다."

 

-전체는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의 질적인 상태의 집합을 또 다른 집합으로 이끌어가는 그 무엇처럼, 도는 이 상태들을 거쳐가는, 정지하지 않는 순수한 생성처럼 전체는 부분들이 없는 또 다른 차원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영적이거나 정신적이다.

 

-'부동적 단면들+추상적 시간'은 사실상 부동적인 단면들을 부분으로 갖는, 그리고 어느 하나의 추상적 시간에 입각해 계산된 연속적 상태들을 부분으로 갖는 폐쇄집합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실제적 운동-->구체적인 지속'이란 지속하는 어느 한 전체의 열림을 가리킨다. 이때 이 전체의 운동들이란 닫힌 체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동적인 단면들이다.

 

세 단계

1) 판별될 수 있는 대상들이나 구분되는 부분들로서 정의되는 페쇄집합들 또는 체계들

2) 이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며 그 각각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이동 운동

3) 자체의 고유한 관계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적 정신적 현실로서의 지속 또는 전체

=> 그러므로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대상이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 또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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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용어정리...(1)

  • 등록일
    2010/10/20 16:05
  • 수정일
    2010/10/20 16:05

들뢰즈 책을 읽을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정리해 봅니다.

우선 이 용어 정리들은 우리가 주요 택스트로 읽는 [시네마1,1]에 있지 않은 다른 책들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용어정리들입니다.

 

우선 아래의 용어정리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번역하신 "박정태"라는 분의 용어 정리 입니다.

 

분절(articulation)

articulation은 베르그손은 물론 들뢰즈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로 옮긴 "분절"이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artticulation이란 A와 B가 연결(이 연결이 기능적인 연결이든 또는 단순한 접합이든 상관없이) 되어 있을때의 연결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해부학과 관련해서는 관절을, 기계와 관련해서는 링크 도는 연동장치를, 언어학과 관련해서는 즈음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베르그손-들뢰즈가 말하는 articulatipon은 그 의미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될수 있다.
첫째, 그것은 A와 B의 견결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구분을 염두에 둔다고 할 때의 그 구분을 가능케 하는 A와 B의 "사이"를 가리킨다.
둘째, 이 사이는 언제나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사이"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이의 양 항을 이루는 A와 B는 운동과 무관한 정적인 A와 B가 아니라, 생명 또는 지속 고유의 내재적인 원인에 근거한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물들로서의 A와 B이기 때문이다. 즉, 베르그손적 언어로 말하자면 A와 B는 순간이 아닌 지속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사이는 공간적이며 외적인 의미의 사이가 아니라, "비공간적이며 내적인 의미의 사이"이다. 왜냐하면 사이의 양 항을 이루는 A와 B가 생명 또는 지속 고유의 내재적인 원인에 근거한 운동으로 부터 비롯된 결과물들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A와 B는 그들 간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생명 또는 지속)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이때의 A와 B는 서로 부정의 대상을 이루는 상호 외적인 A와 B이기 이전에, 자기 내재적인 동일 원인에 근거한, 상호 부정과는 완전히 무관한 A와 B인 것이고, 따라서 이와 같은 A와 B를 양 항으로 취라는 사이는 공간적인 의미와는 무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넷째, 이 사이는 우리로 하여금 들뢰즈가 말하는 '본성의 차이들을 보게끔" 해준다. 왜냐하면 비록 A와 B가 "구분"되어서 거론되는 것은 오로지 이 사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본성의 차이들을 구하는 것과 실재의 분절들을 구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다. 이것이 우리가 분절로 옮긴 베르그손-들뢰즈적 articulation의 개념이 갖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분절이란 "생명 또는 지속 고유의 내재적인 원인으로부터 비롯된 운동의 결과물들 간의 비공간적인 사이로서, 우리로 하여금 본성의 차이들을 보도록 해주는 것"을 말한다. 에를들어서 베르그손-들뢰즈가 생명을 무한성을 개방하는 능력으로 보면서 생명은 매 순간 지속적으로 자기와 차이를 낳는다라고 말할 때, 그 결과물들인 서로 다른 A, B, C,,,,,의 사이들이 바로 '실재의분절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절의 동사 형태인 "분절하다 articuler"는 '사이를 낳는다'를 말하며, 또 이는 결국 "분화하다(생물학을 언급할 경우)" 도는 "차이를 낳는다"와 다른 말이 아니다.   

 

환영(simulacre)

일반적인 의미의 플라톤 주의는 가지적인intelligible차원(많이 존재하는 차원, 본질의 차원, 변화하지 않는 차원)과 감각적인sensible 차원(적게 존재하는 차원, 외양의 차원, 변화하는 차원)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 위에 근거한다. 물론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이 같은 이분법에 따른다. 즉, 개개의 사물들이 자신들에 고유한 가지적인 차원을 얼마나 나누어 가지고(분유하고) 있느냐 또는 얼마나 잘 재현(모방)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그것들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다. simulacre는 이러한 구도속에서 감각적인 차원 쪽으로 무한히 내려간 끝에 해당한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해보면, 이데아를 한 극점이라고 할 때, 그 반대편에 있는 극점이 바로 simulacre인 것이다. 따라서 simulacre쪽으로 가가이 가면 갈수록 존재는 점점 더 적어지며 그에 따라 가치 또한 점점 더 적어지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simulacre에는 그 어떤 형상, 존재, 가치도 없으며, 더 나아가 형상이나 모델을 따른 (진정한 의미의)모방마저도 없다.
  

            --> 존재와 가치가 점점 더 적어짐 -->
이데아 <---------------------------------------------------> simulacre
  I        <존재와 가치가 점점 더 많아짐   <------              I
  I                                                             I
존재, 가치, 본질                                        무존재, 무가치, 외양
영원, 질서, 무변화                                        순간, 혼돈, 변화

 
플라톤은 이 같은 simulacre와 관련하여 특히 다음과 같은 세가지 성격을 지적한다. 첫째, simulacre의 본질은 내화된 상이성 속에 있다. 둘째, simulacre는 자기자신 속에 차등적인 관점을 내화한다. 셋째 simulacre에는 그 어떤 앎이나 올바른 견해도 있을 수 없다.
simulacre의 본래 뜻을 모두 담은 우리말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게다가 들뢰즈적 의미로 쓰인  simulacre의 뜻까지 함께 살린 우리말을 찾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simulacre처럼 번역어의 선택이 어려운 개념어의 경우, 원어를 우리말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면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해당 개념어에 대한 보충 설명이 여전히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꼭 원어를 그대로 두는 방법을 고집할 이유도 없어진다. 왜냐하면 (본래의 뜻을 오해하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없는 한도 내에서) 원어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우리말을 선택한 후 보충 설명을 더하는 방법 역시 적어도 원뜻의 이해에 있어서는 원어를 그대로 두는 방법과 동일한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방법이 더 옳고 그르냐 하는 문제는 따로 제쳐놓더라도, simulacre의 경우와 유사한 경우의 개념어를 만날 때마다 매번 번역어 없이 원어를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옮긴이는 simulacre의 본래 뜻에 가급적 가장 가까운 우리말을 찾고자 하였으며, 결국 "환영(幻影)"이 아마도 그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않일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교될 무엇조차도 없으며 유사함 자체가 배제된 simulacre(따라서 '무엇에 대한 거짓된 상'의 의미를 함축한 "가상(假狀)"이라는 말은 적절치가 않다.), 둘째로 무존재, 무가치, 외양(비본질), 순간, 혼돈, 변화로서의 simulacre(다라서 simulacre는 일종의 :환영"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들뢰즈는 simulacre와 거의 같은 뜻으로 phantasme(환영 또는 환상)을 쓰고 있기도 하다), 셋째로 자신 속에 상이성과 차등적인 관점을 내화한 simulacre(관찰자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깊이, 거리, 각도 등으로 인해 상이함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이런 상이함을 "환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넷째로 그 어떤 앎이나 올바른 견해도 있을 수 없는 simulacre(가상, 환상등도 마찬가지이지만 "환영"역시 앎이나 올바른 견해와는 무관하다)에 그나마 오해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우리말, 따라서 simulacre에 가장 근접한 우리말이 바로 "환영"이기 때문이다. 아주 정확한 역어는 아니겠지만, 옮긴이가 simulacre를 "환영"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 위의 두 용어들은 매우 중요한 듯 보입니다.

어쩌면 위의 두 용어들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들뢰즈의 철학들을 이해하는 것에서의 두 키워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ㅎㅎ

 

여튼 책읽으면서 참고했으면 해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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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미학관련 읽을거리..1

  • 등록일
    2010/10/14 16:41
  • 수정일
    2010/10/14 16:41

 {옥스포드 미학 백과사전}에 나온 "Deleuze, Gilles" 항목 번역
(12) ~ (13)이 그의 저서 {영화 1},{영화 1}에 대한 내용

Text : Encyclopedia of Aesthetics(vol.1), Ed. by Michael Kelly,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p.516-521.
Writer : James Williams

 

 

질 들뢰즈 (1935-1994)

(1) 벵센느 파리 8대학에서 가르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작업은 철학의 세 영역을 망라한다
: ① 철학사에서의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해석
; ② 포스트구조주의적 철학의 진전(들뢰즈는 많은 동시대 포스트구조주의자들, 특히 미셸 푸꼬와 쟝-프랑수아 료따르와 더불어 결실있는 논쟁들에 뛰어 들었다)
; ③ 펠릭스 가따리와 함께 한, 포스트-프로이트적 유물론의 창안.
세 가지 모두 들뢰즈의 미학에서 역할을 맡으며 그의 미학에 영향을 미친다.

 

 

(12) 예술과 철학의 상보성은 들뢰즈의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영화 1: 운동-이미지}와 {영화 2: 시간-이미지}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들뢰즈는 퍼스(Charles Peirce)의 기호론(semiotics)에 의해 고취된 시간과 운동에 관한 영화적(cinematic) 기술들의 신중하고 포괄적인 분류와 베르그송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문들의 급진적 독해를 결합시킨다.
그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 즉, 행위*(acts)에 의해 야기된 공간적 관계들에 있어서의 변화를 포함하는 영화적 이미지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의 보다 심층적인 특질들(characteristics)을 소통시키는 영화적 이미지 ― 라는 최초의 부류들을 가져오기 위해 베르그송의 직관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의 초기 희극은 서로 다른 운동-이미지들 사이의 기대치 않은 연결들(links)에 의존한다
; 우리는 특정한 운동-이미지 ― 예를 들어, 주먹질 ― 로부터 특정한 액션(action)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운동-이미지에 연결되는 그 작용은 그러한 기대들을 혼란시킨다 ― 그 주먹질은 키스와 눈꺼풀의 파닥거림으로 응수된다.
또는 오손 웰즈의 거울의 사용에 있어서는, 시간-이미지와 이미지들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본성이 부각된다
; 거울에서 장면의 반영은, 단일한 실제 이미지의 단순한 개념이 거울의 사용에 의해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게 되는 이중적 현실(reality)을 창조한다.
비록 들뢰즈는 이미지의 두 부류들에서 지각에 우선권을 주지만, 우리는 감동 받으며(be affected) 액션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각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이미지는 액션에 우선권을 주며 따라서 운동에 우선권을 준다.
반면 시간-이미지는 우리가 시간의 본성과 현실에 대한 그것의 효과에 대해 배울게 되는 관조적 수동성(passivity)으로 우리를 이끈다.

 

 

(13) 영화에 관한 들뢰즈 저작의 첫째 권은 운동에 집중하며, 둘째 권은 시간에 초점을 둔다.
그럼에도 두 책은 영화사에 관한 논제(thesis)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시간-이미지에 우선권을 주려는 논의(argument)라는 점에서 또는 영화가 현실에서의 시간의 원초적 역할을 드러내주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연결되어 있다.
첫째 권의 끝부분으로 가면서, 들뢰즈는 로버트 알트먼(Robert Altman), 존 카사비트(John Cassavetes), 시드니 루밋(Sydney Lumet)의 영화들에서 운동-이미지의 역설적인 극한-경우들(limit-cases)을 숙고한다.
그는 액션-상황-액션(여기서는 액션이 상황에 응답을 하고 새로운 상황을 촉발시킨다) 또는 액션-상황-액션이라는 구조들에 따라서는 상황들(situations)이 액션들에 의해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경우들에 관심을 가진다.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로의 이동(shift)은 적어도 의식적 행위의 관점에서는 무작위의 특성(property)을 취한다
; 액션은 어떤 상황으로 되지도 않을 것이며, 혹은 상황은 그에 상응하는 액션이 부족할 것이다.
방랑하는(wandering) 로드무비 또는 더 정확하게는 끝없는 여행의 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이 분해(disintegration)의 경우이다(예를 들면,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에서).
여기서, 액션의 종합하는 역할은 자기-좌절(self-defeating)이다.
비록 각 운동-이미지가 풍경을 통한 방랑에 의해 이웃하는 운동-이미지에 연결될지라도, 방랑의 행위는 그 자체 목적이 없다.
액션은 공간의 더 심층적인 지각 ― 그것을 통해 영화가 운동한다 ― 의 측면에서 이미지들의 펼침(unfolding)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으며, 영화는 운동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풍경을 지각하는 다른 방식과 관련하여 시간에 관한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 지각이 액션의 그리고 운동-이미지의 부정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풍경은 그것을 통해 방랑하는 이들에게 입력되며 목적적으로 행위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부정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미지의 영화의 이 위기 ― 여기서 영화는 "플롯을 상실한다" ― 를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화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출현과 연관시키기 시작한다.
사실, 영화에 대한 그의 작업은 새로운 물결[누벨바그]에 대한 이 논제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운동-이미지를 넘어 시간-이미지에 주어진 우선권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 운동의 특성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행위들은 시간의 특성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관념들에 자리를 내준다.

 

 

(14) 영화에 대한 연구는 들뢰즈로 하여금 표현의 개념을 시간과 공간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직관들을 개척하는 급진적 기획인 한편, 또한 산업적 스케일에서 운동에 관한 전통적 환영들의 창조로서의 영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이다.
들뢰즈는 영화감독들이 어떻게 더욱 다양하고 효과적인 시선들(views)을 표현하는지를 ― 예를 들면,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들뢰즈가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 코믹한 주인공의 반직관적인(counterintuitive) 액션의 연장(extension)으로 세계를 환원시킴으로써 코믹한 상황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 주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객관적인(objective), 상식적인(commonsense) 시선들을 확장하며 또 깎아 내린다.
키튼의 영화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습들을 무시한다
: 주인공은 거대한 거리들(distances)을 즉시 뒤덮으며 복잡한 기계장치(machinery)를 단순한 사적 메커니즘으로 바꾼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세계를 작은 마음(mind)의 반영으로 만든다.
만일 영화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면 그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험, 즉 상식적인 시선들을 더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들뢰즈는 위대한 감독들을 그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다른 시선들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분류한다.
그 표현이라는 점에서의 각각의 발견은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채택된다
;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의는 아직 고려되어 본적이 없는 형식들의 발견과 병행하여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업을 플래시백(flashback)에 대한 다른 사용들을 통해 시험한다.
그는 어떻게 요제프 만키비츠(Joseph Mankiewicz)가 플래시백을 ― 과거의 사건들의 기록들로서 미래에 회상되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억(memory) 그 자체의 창조에 대한 기록들로서 ―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때로 플래시백은 무언가 일어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 회상(remembrance)의 행위로서, 그것은 미래의 기억의 창조를 그 특성들 중 하나로 보여준다
: 플래시백에서, 그들은 무언가를 회상하기로, 미래를 위해 그것을 기록하기로 결정하며, 이것이 그들의 행위들을 설명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되돌아보는(look back) 행위로서 뿐 만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look forward) 창조적 행위로서, 기억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측면에서 현재에 대한 정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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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읽기(1차)..사전모임 후기

  • 등록일
    2010/10/12 16:50
  • 수정일
    2010/10/12 16:50

들뢰즈 책읽기모임 1차 사전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에는 예상대로 조촐한 인원 ...?...ㅎㅎ

나 포함해서 2인으로 출발하게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책읽기 모임의 텍스트가 [들뢰즈]다 보니 다들 어려워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함께 읽다보면 어떻하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반 걱정반....ㅎㅎ

그렇게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우선 모임에서 첫 질문으로 이 책 특히, 들뢰즈를 왜 읽으려고 하나..?...하는 질문을

각자에게 해 보았습니다.

들뢰즈를 이제 막 읽기 시작하는 우리 2인 모두

딱히 들뢰즈를 전공하거나 아니면 학문연구자의 길로 나아갈 것도 아닌데

왜 이 어려운 글을 읽으려고 하는가 ? 하는 질문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했답니다.

그중에서 기억나는대로 추려보면

최근 들뢰즈는 무슨 유행처럼 우리들 주변에서 자주 거론된다는 것.

그렇게 자주 듣게되고 간혹 들은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는 것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오역과 오해등등이 난무한다는 것

가장 크게는 들뢰즈 책이라는 텍스트가 사회현상화 되면서

내가 택스트를 활용하는 것이 아닌 텍스트가 나를 혹은 우리들을 지배하는 느김이랄까 ?

유목/정주, 차이/차이화, 기계 등등의 어려운 개념들이 마치 유행처럼 이야기되는 것들에 대해서

한번쯤 읽어야 하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는 것....등등....ㅎㅎ

 

함께 참석한 이빈쌤의 경우

어느 전시회의 소개글로 접해서 다양한 생각들을 하시게 되었음에도

선뜻 책읽기에 도전하지 못했었다는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어쩌면 이번 모임을 제안한 나 스스로도 간혹 읽기도 하고 관련 논문들을 구해 읽기도 했지만

정작 들뢰즈를 진지하게 정독할 기회는 많지 않았었다는 것이 어쩌면

이번 가을에 들뢰즈를 정독해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듯 싶습니다.

최근 저의 상황이 이래저래 차이화 혹은 신체화에 대한 갈피를 잡는 시기이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철학적 탐구들이 나의 삶의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이기를

바라는 어떤 욕구들이 있음에도 몇년째 지리멸렬해 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을

들뢰즈만의 시선을 가지고 다시한번 고민해 보자라는 개인적 결심도 한 몫 한듯 싶기도 하군요....ㅎㅎ

 

여튼 일너 저런 이유들을 가지고 우리는 이 책읽기 모임의 조금 어려운 길들을 나서려고 합니다.

 

1. 발제 및 발제 형식 :

 우선 발제는 참여자 모두가 하기로 하였습니다.

누군가 발제를 하고 누군가는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각자의 발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그 발제를 공유하면서 그때그때 이야기형식들을

맞추어가기로 하였습니다.

발제 형식은 우선 내용 요약을 중심으로 각자의 질문거리들을 덧붙이거나 생각들을 덧붙이는 형식

그리고 혹시 자신의 삶이나 자신이 겪은 사건들 혹은 영화 이야기들을

각자의 정리글에 덧붙여 올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을듯 싶다는 것으로....ㅎㅎ

아 !! 그리고 정리는 꼭 컴퓨터를 이용한 문서작업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는..?

손글씨로 정리해 와도 무방한 것으로 정했습니다.

 

2. 참고자료 공유에 대하여

각자 책읽기를 진행하면서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찾아 읽게 된 자료들을 정리해서

함께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공유 싸이트는 이곳 모르페우스 블러그를 이용할 생각입니다...ㅎ

 

3. 서로에게 질문하기 및 답변하기 :

각자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서로에게 질문해보는 형식과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보는 일종의 질문과응답의 형식으로 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칫 발제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다보면 지나치게 설명 위주로 갈 것 같은 우려를 해소해 보자는 이야기였는데 물론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설명형식으로 진행될 것 같으나 계속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향한 질문의 시선으로 진행되었으면 좋을듯 싶습니다. 

 

4. 공유방식 정하기 :

우선 우리들의 책읽기 모임에 대해서 공유하게 되는 모든 것들은 모르페우스 블러그를 통하여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모임에서부터는 소리 녹음을 하기로 했답니다. 물론 소리녹음은 정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녹취록 같은 지나치게 상세한 자료로 정리되지는 않기로 하였습니다.

 

5. 함께 읽기

비록 처음에는 같이하지 못했지만 참관이나 추후 함께 할 사람들을 위해서

몇가지 사항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루어 졌습니다.

 

우선 함께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책은 읽어 와야 한다는 것

지난 모임까지의 이야기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와야 한다는 것(모르페우스 블러그 자료 읽어 보기)

모임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이 마치 들뢰즈에 대한 어떤 오해나 오역들로 비춰지지 않게

모든 것들은 이제 막 시작된 일종의 고민이나 질문 등등으로 정리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합류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6. 차후 모임

각자 바쁜 일정때문에 우선은 한회 한회 모임 시간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당장 2차 모임은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6시에 만나면 간단하게 저녁먹고 30분 정도 각자의 발제 내용들을 상호 공유하고 그런 후에 책읽기 모임을 교육공간 [공(共)]에서 갖기로 하였답니다.

 

7. 향후 책읽기 모임 순서(텍스트의 목차 순으로 정했습니다....)

*. 들뢰즈 읽기 2차 모임

1. 운동에 관한 논제들 - 베르그송에 관한 첫번재 주석

 

*. 들뢰즈 읽기 3차 모임

2. 화면틀과 쁠랑, 화면잡기와 데꾸바주

3. 편집

 

*. 들뢰즈 읽기 4차 모임

4. 운동-이미지와 그 세가지 양상-베르그송에 관한 두번째 주석

 

*. 들뢰즈 읽기 5차 모임

5. 지각-이미지

 

*. 들뢰즈 읽기 6차 모임

6. 감화-이미지:얼굴과 근접화면

 7. 감화-이미지:특질, 힘, 불특정한 공간

 

*. 들뢰즈 읽기 7차 모임

8. 감화에서 행동으로:충동-이미지

 

*. 들뢰즈 읽기 8차 모임

9. 행동-이미지:큰 형식

 10. 행동-이미지:작은 이미지

 

*. 들뢰즈 읽기 9차 모임

11. 형상들 혹은 형식들의 변명

 12. 행동-이미지의 위기

 

*. 들뢰즈 읽기 10차 모임

시네마1: 운동-이미지 결산

 

*. 들뢰즈 읽기 11차 모임

이후 진행에 대한 사항들을 다시한번 결정해 보고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시네마2:시간-이미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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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읽기_1]들뢰즈 책읽기 모임에 함께해요...ㅎㅎ

  • 등록일
    2010/09/30 10:27
  • 수정일
    2010/09/30 11:25

 

 

들뢰즈 책읽기 모임을 진행합니다.

이야기는 몇 차례 있어 왔고, 책까지 선정한 마당에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해서 제안을 미루고 있었는데

드디어 책을 읽고 이야기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들뢰즈 읽기 1

 

들뢰즈의 모든 저작들을 읽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는 용기가 남아 있다면,

계속해서 읽기 위하여 모임은 우선 들뢰즈 읽기 첫 번째 모임으로 정해 보았습니다.

 

 

텍스트는 [시네마 1_운동_이미지] 로 정해 보았습니다.

 

이 텍스트를 정하면서 많은 고민들을 했습니다.

들뢰즈의 [시네마]라는 책은 들뢰즈의 후기 저작으로 일종의 예술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들뢰즈의 본격적인 철학책이 아닌 영화론에 대한 것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

또 우리의 불친절한 들뢰즈의 책이라는 것 때문에 더 큰 고민이 있었다는...?....ㅎㅎ

 

 

들뢰즈의 책을 읽기가 힘든 것은

알려진 대로 들뢰즈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저작에

그 이전의 자신의 저작을 읽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많은 영화들을 보았을 거라고 가정한다는 것

그리고 글쓰기 자체를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쓴다는 것...?....ㅎㅎ

 

즉,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지는 것들을

독자들이 스스로 혹은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들 공감하는 바이지만 들뢰즈식의 개념 정리랄까?

기존의 서양철학에서 주되게 사용되어지는 철학적 개념들을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재정의하여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기존의 의미들을 뒤짚어 버리며, 우리들을 상당한 혼란으로 이끌어 가버린다는 점도

들뢰즈를 제대로 읽기 힘들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 들뢰즈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작 순서대로 읽는다.

- 들뢰즈를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이다.

- 들뢰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을 듣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왜 들뢰즈를 읽어야 하느냐 하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저 또한 딱히 학문을 하는 사람도 아닌 일반 독자의 입장이고

영화 매니아처럼 어떤 것들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광적인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책을 그저 내가 읽고 싶은대로 읽지 못하고 항상 힘들어하고 두려워해야 할까요?

 

전 스스로 들뢰즈를 왜 읽어야 하느냐 하면

이미 근대 이성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기존의 철학들은

이미 스스로 철학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우리들을 몰아간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기 힘든 아니 어쩌면 이성 중심의 철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여전히 우리 현실과 삶에는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런 질문들을 나 스스로 나의 삶에 투영하기 위해서

어쩌면 들뢰즈에게 생각들을 빌려오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내가 들뢰즈를 적절하게 제대로 이해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 보다는

나의 삶의 어떤 부분 어떤 현실에 꼭 필요한 것을

들뢰즈에게 빌려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들뢰즈를 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들뢰즈 책읽기 모임을 제안하면서 가장 우려스러웠던 것도

또한 마찬가지 상황 즉, 마치 제가 누군가에게 들뢰즈에 대해서 강의(?) 비슷한 것을

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는 상황입니다.

 

여전히 저 스스로도 들뢰즈를 읽기 힘들어 하는 평범한 독자의 입장이고

다만 이 읽기 힘든 책을 누군가와 재미있게 함께 읽으며 이야기 해보면

지치지 않고 중도포기 없이 우리가 밟고자 하는 어떤 길로

나 스스로를 움직이도록 추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는 정도 입니다.

 

 

모임 제안

- 텍스트 : 들뢰즈의 [시네마1 : 운동_이미지]

- 모임: 2010년 10월 9일 오후 7시

- 장소 : 마을까페 "이따"

- 매주 혹은 격주로 운영해 보면 좋을듯 싶습니다.

(책을 사전에 읽고 발제해 오시고 서로 읽은 책에 대해서 발제해 오신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주 소화할 수 있을지...조금 더 시간들을 가지려면 격주도 무방하리라 생각하지만 여튼 참여하시는 분들의 의견을 모아서 정기 모임을 정했으면 합니다.)

 

모임 전까지 이런저런 모임에 대한 생각들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참여하실 분들은 덧글로 남겨 주시고

또한 모임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올려 주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 이반 일리치 강독회 외 다른 교육 프로그램 안내는 이곳에서

   공룡 가을/겨울 학기(10월~2월) 교육 프로그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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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도서관에 있는 들뢰즈의 책들(대여가능)

  • 등록일
    2010/09/06 16:54
  • 수정일
    2010/09/06 16:54

공룡 도서관에 있는 들뢰즈의 책입니다.

뭐 대략은 나의 책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 책이라는 이유로 내가 이 책들을 다 안다고 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그래서 짐처럼 가지고 만지작거리고만 있습니다.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칸트의 비판철학

-의미의 논리

-천개의 고원

-앙띠 오이디푸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마니즘1, 2

-들뢰즈와 시간의 세가지 종합

 

정도를 가지고 있지요...ㅎㅎ

 

이 모든 책들을 사서 읽기는 부담스러울테니 혹시 필요하신 분들은

도서관에 찾아 오셔서 대여해 가셔서 보시는 것도 무방할듯 싶네요....ㅎㅎ

 

그리고 이번주내로

우선 급하게

시네마1, 2를 구해볼 생각이고(혜린이 사준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있다는...?...헤헤헤)

다른 책들은 시간을 두고 구해도 좋을듯 싶기는 한데....ㅎㅎ

 

여튼 본격적으로 들뢰즈를 읽기전에 워밍업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뒤적거리고 있는

요즘 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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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읽기자료(1)...시대구분과 저작연표

  • 등록일
    2010/09/06 16:22
  • 수정일
    2010/09/06 16:22

들뢰즈 이해를 위한 몇 가지 (건축가 장용순의 분류)

 

들뢰즈의 철학적 생애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수 있다.

 

*. 철학가로써의 시대 : 1953 - 1967년

이 시기에 들뢰즈는 륨, 니체, 칸트, 베르그송에 대해 연구한다. 문학에 대한 연구로서 프루스트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였다. 이 연구는 후반기의 예술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9년간의 공백후에 내놓은 [니체와 철학]은 그가 평생동안 철학을 할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칸트의 비판철학]에서는 칸트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판단력 비판]에서 능력의 발생과 강도의 문제를 집어내고 있으며, 이것은 [차이와 반복]의 중요한 테마가 된다. [베르그송주의]에서는 베르그송의 잠재태/현실태의 순환방법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으로 흡수하고 있다.

 

*. 존재론의 시대 : 1968 - 1970

들뢰즈 스스로 최초로 철학을 하기 시작한 책이라고  말하는 [차이와 반복]이 1968년에 국가 박사 논문으로 제출되었다. 이 시기에 국가박사 부논문으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가 발표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으며, 들뢰즈의 일의성의 철학은 스피노자의 표현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969년에는 [의미의 논리가]가 출판된다. 이 시기에 들뢰즈 철학의 기획이 되는 반플라톤주의, 차이의 철학,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가 대부분 모습을 드러낸다.

 

*. 가타리와의 시대 : 1971 - 1995

정신 분석학자 가타리와 공동 작업으로 네권의 책([앙티 오이디프수], [카프카], [천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을 집필한다. 라캉의 제자였던 좌파 정신 분석학자 가타리로부터 들뢰즈는 여러 개념들(분열분석, 분자적/몰적, 기계적, 추상 기계, 리투르넬 등)을 배우고 자신의 철학과 함께 발전시킨다. 가타리로 인해서 들뢰즈는 정신 분석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과 참여적인 입장을 갖게되는 한편, 철학을 뛰어넘고 장르를 초월하는 연구를 실행한다. 동시에 들뢰즈는 가타리와는 독자적으로 예술론을 펼치는데, [감각의 논리], [시네마1:운동 - 이미지], [시네마2:시간 - 이미지]가 그런 책들이다.

 

*. 들뢰즈가 대항해서 싸우는 개념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말한 것처럼 철학자가 어떤 것에 대항해서 싸우는지를 알면 그 철학의 성격을 알수 있다. 드뢰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대항해 싸우는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 재현 또는 표상,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대립, (술어의) 유추, (지각의) 유사성, 부정성, 변증법, 통합적 종합, 위계, 의미 작용, 주체화, 조직화, 일자, 주체, 형이상학, 이분법 등.

 

 ==> 들뢰즈 저서연표 <==

1925                                   1월    18일 파리출생

1944 - 1948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연구

1948                                    철학 교수 자격시험 통과

1948 - 1957                        아미앙, 오를레앙, 파리 등에서 고등학교 철학교사

1953                                    [경험주의와 주체성]

1962                                    [니체와 철학]

1963                                    [칸트의 비판철학]

1964                                    [프루스트와 기호들]

1966                                    [베르그송주의]

1967                                    [매저키즘]

1968                                    [차이와 반복]

1968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9                                    [의미의 논리]

1970                                    [스피노자, 실천철학]

1972                                    [앙티 오이디프스] (펠릭스 가타리 공저)

1975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 (펠릭스 가타리 공저)

1977                                    [디알로그] (클래르 파르네 공저)

1979                                    [중첩]

1980                                    [천 개의 고원] (펠릭스 가타리 공저)

1981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1983                                    [시네마 1: 운동 - 이미지]

1985                                    [씨네마 2: 시간 - 이미지]

1986                                    [푸코]

1988                                    [주름 : 라이프니치와 바로크]

1990                                    [변호들]

1991                                    [철학이란 무엇인가 ?] (펠릭스 가타리 공저)

1993                                    [비평과 진단]

1995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                                    11월 4일 자살로 생을 마감

2002                                    [무인도]

2003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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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책읽기 모임을 제안하며(첫 제안)

  • 등록일
    2010/09/05 13:27
  • 수정일
    2010/09/05 13:27

드디어 공룡도서관 모르페우스의 첫번째 읽기 모임을 제안합니다.

 

[들뢰즈 책읽기 모임] 

 

왜 들뢰즈를 읽어야 할까 ?

 

최근 우리들이 접하는 많은 이야기들중에 들뢰즈에 기대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들뢰즈를 인용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유목, 기게, 통접, 관계, 존재 등등을 두고 철학, 인문사회, 예술등등 다양한 곳에서 인용되는 들뢰즈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쉽게 들뢰즈의 책들을 읽다가는 영낙없는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무수히 많은 곳에서 인용되어 익숙한듯 하지만 막상 들뢰즈의 책을 펼쳣을대 그리고 한문장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겪게되는 그 고통이란 읽어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왠만큼 책을 읽는다는 독서의 고수들(?)도 결국 실패하고 마는 책들이 어쩌면 들뢰즈의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많이 접하고 알듯하면서도 모르는 들뢰즈를 생것으로 직접 읽어내려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어쩌면 우리들이 놓치고 봤던 많은 것들과 이야기들을 우리들 삶의 직접적인 공간속으로 끌어들이며 이야기할 수 있는 다양함과 풍부함을 쌓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으로 책읽기 모임을 제안합니다.

 

우선 들뢰즈를 읽기 위해서 들뢰즈의 저작연대 순으로 읽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 보다는 우리들이 흥미있어하는 방식의 책들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해서 처음에 제안하고 싶었던 것은 들뢰즈의 예술론을 볼 수 있는 시네마와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철학을 접하는 것이 어떨까 해서 [시네마1, 2]나 [들뢰즈가 만들 철학사]중에 고민하였는데 결국 철학사보다는 [시네마]를 읽는 것으로 우선 제안하는 바입니다.

 

물론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들뢰즈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접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만 그전에 워밍업하는 심정으로 예술론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은 것같은 소견이 작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예술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들뢰즈의 철학을 접하는 것이 필수겠지만 뭐 어쨋든 드디어 들뢰즈를 진지하게 읽기위한 노력을 함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첫번째 텍스트 ==>  [ 시네마 1- 운동 이미지]

첫 모임 10월 2일(토) 저녁 7시

모임지기 : 박영길

참여할 분들 연락은 공룡으로 043-266-4055

 

보다 자세한 이야기나 참고자료 등등은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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